2011년 1월 2일 일요일

칭명염불.........1

칭명염불


칭명염불수행법은 미증유한 공부법입니다.
중생들의 검증 절차가 필요치 않습니다.
삼천대천세계
모든 부처님들께서 권하시는 바요,
거룩하신 우리 교주
불 세존 석가모니부처님의 뜻이요,
불과를 이룬 광명·자재가 내놓은
공부법이기 때문입니다.



현지사 칭명염불_아라한, 보살, 붓다가 나온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꿈꾸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그 교법에 귀의하며 지난날의 업을 참회하고 탐진 번뇌를 정화해가면서 오계·십선을 행하여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이나 인간세계로 몸 받아 올 수 있는 정법의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물론 금생도 근심 걱정 없이 잘 살기 바랍니다. 그러다 부처님 회상을 만나 윤회전생에서 벗어나 정토에 나기를 간절히 권합니다.

여기서 나는 일찍이 불교사에 없었던 석가모니불을 봉창하는 칭명염불을 제안합니다. 많은 공부법이 있지만 이 염불 공부가 보살이 되고 붓다 되는 가장 확실한 수행법이기 때문입니다.

화두를 드는 선종의 간화선이나,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관법선이나 티베트 밀교의 쿤달리니 요가 수행법 - 이 모두는 자력으로 가는 수행법입니다. 잘해야 아라한 성과를 얻을 뿐입니다.

오늘 날 간화를 참구하는 선승들 중에 지계 청정하고 부처님 없다 말하지 않고 공부 잘하는 스님들도 많이 있음을 압니다. 그 스님들, 자·타력의 불교로 방향 전환한다면 결정코 성과聖果를 얻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현지사의 칭명염불은 자력과 타력을 겸비한 수행법입니다.
아라한, 보살, 붓다가 나옵니다.
이 칭명염불 수행법은 미증유한 공부법입니다. 중생들의 검증 절차가 필요치 않습니다. 삼천대천세계 모든 부처님들께서 권하시는 바요, 우리 교주 불 세존 석가모니부처님의 뜻이요, 불과를 이룬 광명·자재가 내놓은 공부법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부처님의 성호를 칭명하라!

2600여 년 전 인도 땅에서 출세했던 석가모니부처님은 대열반에 드셨다 해서 완전 공으로, 적멸로 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입니다. 처음으로 불과를 증해 붓다가 되던, 어느 부처님께서 다시 사바 세상에 사람 몸을 받아 오시던 간에 절대계에, 유무를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에 부처붓다의 몸佛身·報身을 두십니다.

그 불신은 청정하고 깨끗한 부처님의 무량 억종광명 빛으로 이루어졌기에 영원불멸입니다. 그 불신은 대적광삼매 속에서 환희, 지복을 누립니다. 동시에 이 우주와 하나로 계합해 있으면서 삼천대천세계를 항상 비추는 대생명체인 법신法身佛도 두고 계십니다.

그 부처님보신은 ≪법화경≫ <신력품>에서 말씀하신대로 자기의 화신을 천이고 억이고…… 중생의 부름에 응하여 나투어 가시는 것입니다. 소위 32응신으로 그 중생의 근기에 따라 현신하십니다. 불과를 증하신 부처님 삼신三身의 중심이 되는 보신부처님은 32상을 갖춘 유형의 불신으로서 지혜와 자비 자체가 되어 깊은 삼매의 힘으로 항하사의 신통 묘용을 자재하게 부립니다. 시방十方의 불국토를 다니시면서 보살들을 교화하십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수년 간 사유하여 큰 삼매력으로 극락세계를 성취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부처님 중 부처님이십니다. 그리고 최초의 부처님이십니다. 무량 아승기겁 전에 불과를 이루신 이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 보살님들을 양성해내신 부모님 같은 어른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들의 지혜·자비·능력은 실로 불가사의합니다. 외도 이단의 세력을 다 합쳐도 부처님 한 분을 대적하지 못합니다.

석가모니불게 귀의·귀명하고 과거 생에 저질렀던 사악한 죄업을 참회하고 그 태산만한 우리 자신의 업장 소멸을 발원하면서 칭명하는 염불수행을 나는 이 책을 읽고 있고 여러 불자들에게 간절히 권하는 바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부처님은 진실로 절대계에 계십니다. 보신부처님은 여름철 뙤약볕 아래 놓은 다이아몬드가 천만 갈래의 빛으로 발산하는 것처럼 그런 불가사의한 빛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32상 80종호로 자비·단엄하십니다. 우리 죄업 중생이 간절히 부르면 우는 아이에게 달려오는 어머니처럼, 그 같이 오셔서 각자의 수행과 공덕에 따라 업장을 씻어주십니다.

중생의 지중한 업장 소멸은 오직 부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외도 수장들도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점 확실히 말해둡니다. 나라는 의식이 생겨, 탐진 번뇌들이 일어나 업을 지으면 우리의 영혼엔 더덕더덕 오물찌꺼기들이 붙어 몸뚱이가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본래의 영아靈我에 영혼체가 생긴다 그 말입니다. 수행이란 이런 비본질적인 나, 비아非我를 정화해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영혼이 순수하고 깨끗하고 청정해질수록 맑고 청정한 국토에 납니다.

수행이란 영혼의 정화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업의 정화는 자력수행으로서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아라한 수준의 영혼 본래 모습까지는 정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 보살로 발돋움하는 것은 타력부처님 가피에 의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의 신력神力에 의해서 탐진의 뿌리가 녹고 업장이 소멸 되면 우리는 누구나 보살이 되어 극락정토에 왕생합니다. 오직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에 의해서만이 보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님의 가피력이 아니면 우리 중생은 기왕에 빙의됐거나, 앞으로 빙의될 가능성이 있는 천마·용신 등의 무서운 장애를 제거하거나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삼독 번뇌의 지멸 역시 우리 연약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금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만나게 되는 삼재와 팔난의 고통도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과 가피에 의해서만이 피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숙명적인 운명까지도 바뀌어 집니다. 죽을 때 불 보살님처럼 잠자듯 편히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주 불 세존이 안 계셨더라면 이 삼천대천세계 안의 그 많은 붓다님들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여러 정토세계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저 수많은 정토보살과 현재의 항하사 수같이 많은 성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중생은 삼악도를 헤매다가 기껏 그 중 소수만이 하늘세계에 오를 뿐이었을 것입니다.

 세존께서 나유타하고도 아승기겁 전에 불과를 이루시고 지금까지 한 시도 쉼 없이 여러 국토에 다니시면서 중생을 교화해 오셨기에 오늘 날과 같은 장엄한 회상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본생담에 나오는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수많은 과거 생을 통해 중생을 위하여 보살도를 하신 거룩한 대승의 이타심, 그 은혜에 우린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2600여 년 전 오직 정법을 심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6년간의 설산 고행을 각오하고 다시 인도 땅에 응화신으로 오셨습니다.

그 당시 산 속의 호랑이, 사자, 전갈, 독사, 쉬파리, 사나운 모기떼들에 완전히 노출된 채로 1일 일마일미一麻一米로 연명하며 고행하신 그 은혜를 우린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최초로 불과를 이루신 이후에도 사바세계에 수없이 많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마다 눈물겨운 난행고행을 마다하지 않으셨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우리 문수보살님의 송頌처럼 “이 몸 백 천으로 나누어 가루되어 바친들, 우주만큼 큰 부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는다 하리까?”하는 감사의 노래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모름지기 우리 불자들은 천상천하에 오직 위대하신 불 세존의 은덕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의 성호를 봉창해주시기 바랍니다.




현지사 칭명염불 수행법

나는 이제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칭명염불을 권고하는 바입니다.

최초 불이시오, 삼계의 법왕, 우주의 주主이신 석가모니불을 봉창하는 칭명염불 공부법을 여러 불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한 뒤 공부방에 가서 성상 앞에서 3배합니다. ≪금강경≫을 1독하고 부처님 다라니 5번 정도 염송하고 반듯이 반가부좌해서 두 눈을 벽면의 한 점에 고정합니다. 물론 부처님께 귀의·참회·발원합니다. 낭랑하고 힘 있게 석가모니불을 봉창합니다.

현지궁 현지사의 칭명염불은, 정토종念佛宗의 염불과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염불 공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입으로는 석가모니불을 계속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동시에 부르도록 해야 합니다. 선정, 삼매에 들려면 망상이 쉬면서 일념상속一念相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불을 칭명하는 것과 동시에 마음속에서 금강반야바라밀도 잘 부르게 될 때, 석굴암 부처님 미간에서 빛이 방사함을 관觀해봅니다. 자력의 선정력이 어느 수준 깊어졌을 때 부처님께서 여러분을 삼매 속으로 이끄십니다.

공부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세간적인 욕심을 포함하여 도를 통하겠다거나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되겠다는 욕심을 갖고 계율 없이 용맹정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 마가 치고 들어옵니다. 한 번 빙의된 하늘 마天魔는 떼기 어렵습니다. 결국은 정신이 돕니다.

공부 중에 경계에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정신넋이 빠질만한 미인이나 시각적으로 볼만한 대상 경계에 집착하면 큰일입니다.

그것은 하늘 마의 유혹입니다. 한두 번 마음을 뺏기다가 급기야는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빠져버리게 됩니다. 마침내 비정상이 됩니다. 미칩니다.

인생에 네 가지 어려움人生四難得이 있다 합니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바른 법 만나기 어려우며, 눈 밝은 스승 만나기 어렵고, 해탈하기 어렵다 합니다. 다행히도 여러분은 천 년, 만 년 아니 겁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는 부처님 회상 만났으니 큰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지도받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신 부모 조상님 천도해 드리는 진짜 효도를 해 드리고, 부처님께 공양도 가끔 올리면서 부지런히 선근 공덕을 쌓으며 열심히 염불 공부해 나간다면 업장이 소멸되어 이루지 못할 소원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그때 공부의 진척도 점검받기 바랍니다.


출처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中




염불선이 되어야 삼매에 든다

경전 읽고 염불하는 나의 염불선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
다. 아미타불 염불공부를 중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정토삼부경 중 하나를 선택해서 봉독한 후 벽을 향해 단정
히 반가부좌한 채로 두 눈을 벽의 한 점을 응시한 채 염불선을 시
작합니다. 결코 눈을 깜박거리지 마시고 그 한 점에 두 눈을 고정
해야 합니다. 기도 정근 중에 자꾸 마실마을 가는 놈이 있어서 공부
를 일념으로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공부의 요체입니다.

하나로 모으려면 차라리 확실하게 둘로 나눠주는 것이 좋습니
다. 망상 피우는 그 놈이 바로 '나'입니다. 그 놈으로 하여금 망상
하지 못하게, 마실마을가지 못 하게 과제를 하나 내주십시오.

내 앞에 아미타부처님께서 와 계신다 생각하고, 마음속에서 큰
소리로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다짐을 하도록 시키십시오. 또 부처
님 앞에서 지난 날 못된 짓 한 것을 경건하게 참회하게 하고 극락
왕생을 발원하도록 말을 시키십시오.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
정근한 채 두 눈은 앞 벽의 한 점을 응시하고, 귀의 참회 발원을
잘 해내도록 합니다.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나 힘써 하면
됩니다.

자유자재로 마음속의 내가 독자적으로 말을 잘 하는 정도가 되
면 이제 생각을 하나로 모아 한 점 속을 뚫어 가십시오. 염불삼매
로 들러갑니다.

부처님의 신상광명을 관하면서, 입으로는 고성으로 힘차게 칭명
해 들어가는 염불공부도 좋습니다. 모든 붓다는 몸이 빛으로 돼 있
어서, 현신現身할 때에는 모든 빛을 거둔 상태지만 여전히 안팎이
드러난 청정광명을 방사하게 됩니다. 정수리, 미간과 모든 털구멍
에서 밝고 투명한 빛을 방사합니다. '석가모니불' 염불행자라면
석굴암의 불상을 마음속으로 그려가면서 방사하는 광명을 마음숙
으로 지어갑시다. 그런 부처님 상을 관하면서 칭명염불합시다. 세
존석가모니佛 염불하는 자는 반드시 <<금강경>>을 봉독한 후
염불하는 겁니다.

대승경전 전체의 3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정토삼부경 <<대집
경>>등 200여 경전에서 염불을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수보살은
<<문수반야경>>, <<문수사리발원경>>등에서 극락왕생을 발원토록 하
셨고, 보현보살께서는 <<화엄경>> <입법계품> 마지막 부분에서 선
재동자 등에게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날 것을 권하셨습니다. 대
세지보살도 <<능엄경>>에서 염불하는 중생을 인도하여 삼마디을 얻
어 서방극락세계에 나게 하시고, 관음 지장보살께서도 물론 인
연중생을 극락정토로 인도하시는 일을 교화의 목표로 삼고 계십
니다.

인도의 마명 용수 무착 세친, 중국의 혜원 선도 천태
철양 영명, 신라의 원효 의상 서산 기화, 일본의 법연 신란
등 대선사들을 포함한 당대의 큰스님들도 염불수행을 최선의 공
부법으로 권장하고 고취시켰습니다. 물론 자기들 스스로도 정토
업염불공부에 매진한 분들이었습니다. 염불선은 보살지까지 뛰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수행법임을 다시 천명하는 바입니다.


출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부처님이 계시기에 염불하는 것


요즘은 소위 선종의 큰스님들이 염불하는 '이게 뭐꼬' 하는 화두
식 염불을 권하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이것에 반대합니
다. 진여실상을 관하면서 염불하는 실상염불이나 부처님 상호의
공덕장엄을 관하면서 염불하는 관상염불은 좋습니다. 그러나 보
다 좋은 것은 고성으로 칭명하는 염불입니다. 부처님이 계시기 때
문에 염불을 권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의 염불왕생원제18원에 따라 그 본원本願을 믿고 일
념으로 염불하십시오. 법계에 부처님이 안 계시다면 칭명염불이
아무 소용이 없겠으나, 부처님은 진실로 계십니다. 그래서 칭명염
불을 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관무량수경>>에서 "극락극에 태어나고자 하면 마
땅히 부모를 효양하고, 스승께 봉사하며, 10선도를 닦을 것이니
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정업淨業의 기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방극락세계는 있고, 아미타부처님도
계시며 경전의 말씀도 옳습니다. 다만 아미타부처님은 삼천대천
세계의 수많은 붓다님들 중 다섯 분 어른인 오여래五如來이시고,
10겁 전이 아니라 무량겁 전에 성불하셨사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특별히 당신의 이름을 일심으로 부르면 항
상 무량광명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시다가 염불중생을 섭취하
는 본원이 있으십니다.

길 잃은 자식이 어머니를 찾듯 간절히 아미타불佛을 부르며 사
십시오. 반드시 좋은 일이 있습니다. 큰 액운도 비켜가고, 죽을 때
잠자듯 편히 갈 수 있으며 최소한 하늘천상에 날 수 있습니다. 진
력을 다하면 왕생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먼저 <<아미타경經>>을
일독하시고 '아미타불佛 무량겁 멸죄진언' 을 108독 염송한 후, '나
무아미타불' 을 고성으로 힘차게 염불정근 하십시오. 지옥 축생
의 과보를 벗고자 하거나 윤회를 뛰어넘어 아라한이 나는 성중하
늘이나 극락세계에 왕생을 목표로 한다면 음계 10선계를 지
킴은 물론 큰 스승님을 지도자로 모시고 돌아가신 부모 조상님
께 효를 다 하면서 염불수행을 지성으로 하십시오. 그게 여러분이
사는 길입니다.

또한 부처님보신佛께 공양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며, 무엇보다도
청정계율을 지키면서 염불하십시오, 물론 이타행 보살행을 해야
합니다. 영명연수 선사의 말처럼 온갖 선행을 두루 닦아 왕생극락
에 회향토록 하십시오.

그리고 삼매에 들 수 있도록 염불선에 매진해야 합니다. 한 순간
도 끊어짐 없이 염불이 되어야 진정한 염불선입니다. 염불삼매나
삼매는 실제로 들기가 무천 어렵습니다.

삼매에 든다면 여기서부터 성자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삼매
에 들수록, 더 깊은 삼매에 들어갈수록 청정이 더해지고 지혜가 증
장되며 삼매력이 생겨 죽음을 마음대로 하고 윤회에서 벗어납니
다. 그렇게 해서 대성자가 되어가고 무아 속 삼매까지 들게되면
극락정토까지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더욱 간절히 염불공부
하십시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염불수행-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공부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최초 불이시요, 남섬부주 교주이시고 삼천대천세계 총교주이시
며, '붓다 중의 붓다' 이신 불세존 석가모니불佛께서 일러주신 수
행법은 바로 염불선입니다.

그리고 시방의 모든 붓다들께서도 염불공부할 것을 간절히 권하
고 계십니다. 염불선이 가장 휼륭한 수행법이라는 증거입니다. 어
느 아라한이나 정토보살위의 성인들이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붓
다 중 붓다' 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수행법이기에 염
불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관법선도 2500녅 넌 부처님께
서 가르쳐 주신 공부이기 때문에 휼륭한 수행법입니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고 부르는 것이요, '관
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해도 좋습니다. 의상대사는 관세음보살을
스승으로 삼아 정토왕생을 발원하고 '관음염불' 에 매진한 분이었
습니다. '지장보살, 지방보살' 해도 좋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
모니불' 하면 더욱 좋습니다. 이것을 칭명稱名염불이라고 합니다.

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 할 수만 있다면 윤회를 벗어나 극락정토
까지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信,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願, 그
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염불선行을 해 나가야 합니다.

<<관무량수경>> 에는 지성심, 심심深心, 회향발원심을 갖추면 극락
에 왕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심심이란 믿는 마음이 철기
등 되어 널리 공덕을 닦거나 즐겁게 선법을 쌓는 것입니다. 널리
공덕을 지으면서 불호佛號를 염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왕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렇듯 쉽지만 실제는 비범한 수행이 아니고서는
왕생하기 어렵습니다. <<아미타경經>> 에서 이르길, "1일에서 7일 일
심불란 칭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과연 보살이 아니면 왕생할 수 없습니다. 선방에서 공
부해 본 수행승이라면 생각이라는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
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라한을 뛰어넘은 보살이 아니고는, 생각
이란 놈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선이나 염불을 하다보면 생각은 곧잘 마실마음을 갑니다. 일념
一念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염불 일념을 1일에서
7일간 지속할 수 있으면, 즉 염불선이 되는 염불행자라면 설사 오
역죄를 범한 악인이라도 정토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
죄를 지은 자가 일념이 되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얼마 전 서울공대를 졸업해 일류 재벌기업의 간부로 있다가 명
예퇴직한 어느 불자님의 조상을 천도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佛' 을 부르고 있는 가운데 아니타부처님께서 현
신햐셔서, 그 천도재에 참석했던 재자齋者의 큰 아드님을 가리키며
"이 애는 5하늘에서 왔느니라. 전생에 지성으로 염불공부를 했으
니, 잘 지도해주라" 고 필자에게 부촉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염불하고 살았거나, 또 임종 무렵 왕생경계가 나
타났다 해서 그 사람이 모두 정토에 왕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속
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늘 천상만 해도 54층여섯 하늘로 나눔이 있고 그 위
에 윤회를 벗어난 아라한 성자의 하늘 곧 성중하늘이 또 27층품이
있으며, 성중하늘 위가 도솔정토 도솔정토 위가 바로 보살이 가는
서방극락세계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하십시오.

우리 인생이 설사 대과없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살았다 해도 6
하늘, 5하늘에 가기도 어려운데 염불공부만으로 극락에 쉽게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시큰둥해 하는 불자들이 있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염 불 선

진리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강조하는 바, 삼란만상은
설법하고 있다고 어는 고승께서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든
곳곳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의을 기
울이고 자각을 하고 인식을 해야 합니다. 러셀이 이
야기한대로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존재는 없는 것과 다름없
습니다. 이러한 인식론은 양자역학의 이론과도 매칭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이란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올 때 가치
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도 몇 해 전 열반하신 숭산 스님이 말씀하
신 것처럼 우리가 사과를 깨물어 먹듯 맛을 보아야 합니다. 그
렇게 맛을 본적이 없는 진리란 단순한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
다. 큰스님의 칭명염불은 이 점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실제로 현지사의 많은 신도님들이 부처님의 방광을 본
적이 있으며 머릿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는 칭명염불의 위력이 일반 수행자가 몇 년 동안 공부하는
양보다 많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험
으로 증득될 때 마음의 개오와 의식의 정화 그리고 정신의 각
성이 일어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내면의 진리를 발
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큰스님은 현성이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경건하고 독실한 불제자들이 각골쇄신해 온 큰스님의 삶이
여과 없이 스며들어 있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 번
정독했다면 큰스님께서 얼마나 뼈저린 삶과 진지하고 심오한
마음으로 구도 여정을 펼쳐 오셨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큰스님의 구도 여정을 완숙한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었
던 것이 바로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입니다.

염불은 만트라(진언)와 같은 효과가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보
호해 줍니다. 또한 염불을 통해서 발성하는 말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이라는 발성 자체에 강력한 힘이
있기 대문에 오래할 수록 내면의 힘이 강해진다고 할 수 있습
니다. 사양에서는 로고스라고 하여 신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염불도 석가모니부처님의 마음과 링크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많이 염송하게 되면 자신의
내면체에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은 파장과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칭몀염불을 많이 한 어는 수행자는 자신의 내
면에 부처님의 황금빛 화신이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한다고 합
니다.

재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점은 바로 염불선이 큰스님의
법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큰
스님께서 염불선, 특히 칭명염불을 강조하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부처님게서 실재하신 다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에 수
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붓다님들이 여여히 계시기에 우리는
그 붓다님들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붓다님들을 진심
으로 간절하게 찾을 때 우리는 붓다님들의 가피을 입을 수 있
고 궁극으로는 붓다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특히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붓다 중의 붓다이시기에 그 분
의 능력은 실로 창조주격이십니다. 바다를 건널 때 수영으로
건너는 것 보다 배를 타고 건너는, 즉 타력에 의한다면 훨씬
빠르게 수행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염불선으로 희귀함을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셨
습니다. 한편 저는 여러 선지시을 만나고 다양한 책들을 접하
면서 모종의 정합적 이해를 얻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혼돈이 있
었습니다. 그러한 혼돈은 바로 방황을 희미하여 급기야 정신적
공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많은 구도자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폐인이 되다시피 하는 것은 바로 확고한 방향을 제시할 뚜렷한
경지에 이른 선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불경을 통해서 염불선을 수행해야 할 당
위성을 얻으셨고 결국 수행 정진에 매진하시고 각고의 노력과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시고 불과를 얻으시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이는 한국 불교사에 일대 획을 긋는 그리고 불교계의
잃어버린 얼을 되살리는 대업을 이루신 일이라 생각합니다. 큰
스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말입니다.

여하튼 큰스님은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사자후를 남기셨습니
다. 즉, 염불선을 수행함으로써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사자후하시는 동시에 실제로 몸소 불과를 증득하셨습니다. 일체
을 의심하면 모든 법이 다 허무해 보이고 실없어 보입니다. 그
러므로 너무 의심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수행에
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도
큰스님게서는 화엄경의 주옥같은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믿음이
모든 공덕을 짓는 어머니'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불전의 부처
님 말씀이나 공부가 깊은 큰스님의 법문 말씀을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도를 이루는 근원이 됩니다. 지옥에 갈
종자는 진짜 큰스님의 말씀도 믿질 않습니다. 삼악도의 종자는
의심만합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불제자에게 신심을 내
야함을 당부하셨습니다. 믿음을 수행터로 삼아 극락 왕생과 붓
다증위를 위해 전심전력하여 염불선, 즉 칭명염불에 정진하면
우리 불제자들 모두가 큰스님의 말씀처럼 석가모니부처님의 위
신력과 가피를 받아 부단한 향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염불선이야말로 수행의 으뜸

이런 용기는 <<화엄경>> <<법화경>> <<율장>>의 가르침대로
무엇보다 계율을 존중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는 수행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시절의 그 일이 놀랍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인간 스스로의 수
행인 자력에 의존하는 것에 일정 부분 한게를 긋고 있다
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는 타력에 의존하기 시작
한 것이다. 다음 그의 고백을 유심히 음미하기 바란다.

"덕산의 30방을 흔들며, 상에 집착 없는 언어로 공을 읊
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 다 된 양 착각 하며 오만을 떨었던 지난
날을 생각하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30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총무원 상임포교사로 법상에 앉은 지 2~3년이 못돼 나
의 공부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25쪽)

바로 이 지점에서 고유의 불교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다. 그의 단언에 의하면 출가자가 자력의 수행으로 오를 수 있
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까지다. 즉 곧바로 성불한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셈이다. 견성 그 이후부터는 철두철미 부처
님의 가피가 필요하고, 다음 생애에 몸을 받은 아라한의 공덕
이 다시 쌓여 그 결과로 보살의 반열에 오른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관음보살께서 뿌리는 부처님의
광명을 온 몸의 털구멍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종종 만나는 위
력"이 바로 보살의 경계다.

이때 모든 보살이 아닌 최상수 보살 정도가 되면 부처가 뿌
리는 무량광이라는 빛덩어리를 보게 된다. 다음이 부처님 친견
의 경지다. 즉 '불과를 증한 대성자'의 단계에 바로 이때 들어
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불신을 절대계의 부처
님 나라에 둔, 즉 법신 보신 화신의 3신을 완벽하게 구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높디 높은 까마득한 위계의 관문 때문에 '견
성 즉 성불'이라는 습관화된 말은 턱없는 노릇인 것이다.

"무량광을 보기 이전에 부처와 보살이 있다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한낱 범부가 지껄이는 망언일 뿐입니다."는 단언(35쪽)은
여기에서 나온다. 만현 스님은 자신이 구축한 삼신 이론과 부
처 성불 단계론이 11세기 티벳의 전설적인 성자 미라래빠보다
구체적이며, <<반야경>> 등에서 설명된 법신 이론 중심의 부처
설명보다 정교한 것이라고 밝히지만, 지금 이 원고는 그걸 검
증할 수 있는 자리는 안 된다.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가져왔다는 인도의 용수와 달리
만현 스님 자신은 이 책의 도처에서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말하
지만, 그것 역시 제3자가 쉽게 용훼할 수 있는 일이 못된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불교에 관심 있는 이의 입장에서
보건대 만현 스님의 이 '신 불교론'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불교
가 훨씬 불교다워진다는 점이다. 장려한 체계의 구축과 함께
그가 강조하는 신행 활동의 3박자인 염불 - 계율 - 효도는 출
가자와 불자들을 위한 덕목으로 돌연 떠오르게 된다.

장려한 체계라 함은 수행의 단계와 관문만이 아니라 올바른
생사관을 위해 필수인 대목이다. 이를테면 만현 스님은 부처와
보살이 보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론, 지옥과 극락 그리고 윤
회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마음자리를 깨친 정도의
수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장보살본원경>>에 설명되는 끔
찍한 무간지옥은 실제로 있다. 따라서 출가하여 수행하는 이가
설혹 선근공덕이 있어 견성했다 해도 계율을 지키지 않을 경우
특히 음행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비유컨대 "수행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행위란 마치 깨끗한
물 한 컵에 똥물 한 방울이 떨어져 그 물을 마실 수 없게 되
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무소유와 청정을 지향할 것을 권한다.

이 점 요즘 흔들리는 모습의 불교계에 중대한 암시가 될 것이
고, 지옥과 극락 그리고 윤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망언을
했던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 역시 가슴 철렁할 노릇이다. 책
에서 만현 스님은 부처 말씀을 인용하며 "정법을 비방하는 구
업은 그 어떤 죄업보다 지중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만현 스님 설법에서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삼신을
두루 갖춘 부처의 위신력에 대한 강조다. 훌륭한 상모와 지혜
그리고 자비와 신통을 두루 갖춘 부처는 온 세상에 자재한 존
재로 성큼 부각된다. 만현 스님이 화두 참구에 앞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염불 공부를 "가장 훌륭한 수행법"(208쪽)으로 권
장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붓다 중의 붓다께서 일러주신 수행법은 바로 염불선입니다.
위빠사나선도 2500년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공부이기 때문에 훌
륭한 수행법입니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는 것이요. "지장보살, 지장보살'해도 좋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하면 더욱 좋습니다. 이것을 칭명염불이라고 합
니다."(208쪽)

출처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수승한 공덕의 염불 수행법

염불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부처님의 상호, 즉
그 모습을 마음으로 관찰 관상하면서 그 공덕을 기리는 일"
이라고 한다.

염불과 비교해서 다라니가 있는데 다라니의 사전적 의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요로서,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을 뜻한다. 원어명은 dharanl라고 한다. 또한 백과
사전에 의한 설명으로는 "비교적 긴 장구로 되어 있는 주문으로
총지 능지 능차라 번역하며 불법을 마음 속에 간
직하여 잊지 않게 하는 힘이다."

다라니들 중에서 좀 더 짧은 다라니인 진언, 즉 만트라에 대
해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 서원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신주
주 신주 밀주 밀언 등으로도 번역한다." 본 단원에서는 염불수행과
관련 제반 내용을 집중 조망할 것이다.

먼저, 석가모니불 칭명염불 그 효시, 즉 염불 수행의 원류를 교
학적 근거에 기초하여 논구하고자 한다.

첫째, <<잡아함경>>에 "바사닉왕이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
무여래응정등각' 하니......"라고 되어있으며 둘째, <<중일아함경>>에는
"부처님의 명호, 여래 지진등정각 선서 세간해 ..... 등 여러 가지 명
호를 부르면...., 이 공덕에 의해 두려움이 소멸되고, 신통을 얻고....
죽으면 천상에 난다."라고 되어 있다.

셋째, <<중일아함경>> <억념품>에는 "1. 거닐 때도, 2. 머무를 때도,
3. 앉아 있을 때도, 4. 누워 있을 때도, 5. 항상 어디서나 부처님을 억
념하라."고 되어있으며 넷째, <<대방편보은경>>에는 "석존의 제자 한
사람이 '나무석가모니불'을 부르게 하자, 5백 명의 도둑 신체의 고통이
제거됐다."라고 되어 있다.

다섯째로 <<여환삼마지무량인법문경>>에는 "'나무석가모니불' 부르는
것에 의해, 선근이 증장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과가 있다"고 하
였다. 그리고 여섯째, 부처님은 <<증일아함경>>에서, 모든 비구들에게
수행의 한 법을 염불이라고 설했다. 즉,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
르시기를 마땅히 한 법을 수행하고, 마땅히 한 법을 널리 펴라, 큰 과
보를 이루며, 모든 선이 널리 이르게 되고, 감로의 맛을 얻어 무위
처에 이르며, 문득 신통을 이루어,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제거하
여 아라한과를 얻어, 열반에 이른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고 하
는가? 이른바 염불이다."고 하셨다.

이는 염불하는 공덕에 의해서 무위처에 이르고 신통을 얻어
열반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한 것은 불교의 수행 중에서도 염불이 중요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관무량수경>>에서는 "부처
님께서 위제희 부인에게 16관을 .........."이라고 전한다.

한편, 정토종의 염불 수행인 나무아니타불 칭명염불에 대해서 설명
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정토종은, 서방 극락정토가 분명하게 존
제하고 염불의 목적이 왕생 극락정토에 있음을 주장한다.

아미타불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대승경전 전체의 1/4 정도에 해
당하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다. 정토사상의 발생과 <<정
토삼부경>>의 성립 연대는 불입멸 후 대승불교가 발생할 무렵
어느 대승인 학장에 의해 이루어졌으리라.

그러나 신앙의 근원은 석가모니불 제세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정토신앙은 인도의용수(불멸 후 6~7백년 경), 세친 보살에 의해
서 그 골격을 잡았고, 중국으로 전래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의 진나라 때 혜원(육경에 통달, 노장에도 밝았다), 불타발타라
후위의 담란, 수의 지자 대사, 당의 선도 화상, 도작 스님에 의해
서 염불 수행은 크게 진작되었다.

특히 도작 스님은 하루에 칠만 번씩 염불하였다. 규봉 종밀 스님은
염불법을 칭명염불, 관상(觀想)염불, 관상(觀像)염불, 실상염불로
구분하였다.

염불 수행이 선종과 결합하여 염불선이 대두되었는데 염
불선의 효시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종에서 수용하는 정토
는 내생이 아닌 지금 현세에서 도달한다는 것이고, 타력에 의한 성취
가 아니라 자력에 의한 자각이란 점을 들고 있다.

그래서 정토란 곧 자기 마음의 청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심 정토
의 사상은, 정토의 개념을 선에서 수용하여 선정일여의 염불선을 표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선종에서 정토를 일심에서 통함, 선정일여의 염불선을 언급한
것은 사조 도신스님의 <<밉도안심요방편법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말 나옹 혜근 선사(태고 보우와 더불어 고려말의
선품을 진작한 대선사)의 염불선을 음미해 본다.

아미타불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붙들고서 간절히 잊지 않는다면
염불하는 일념은 일념마저 끊어진 무념처에 도달하여
육근문에 항상 자마금색 광명을 놓으리.

나옹 스님은 자성미타인 유심 정토를 설하고 있다.
또한 참구염불선이 있는데 이는 염불을 참구한다. 즉 지금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것이다. 당대에는 서방 정토를 유심 정토로
해석해서 선과 정토가 이념적으로 통합되었고, 송대에는 법안 문익, 영
명 연수 스님이 염불선을 주창했으며, 원대에는 남송시대에 발전
한 간화선의 영향을 받아 염불과 화두 공안이 방법적으로 융합되어 임
제종의 몽산 덕이, 중본 명본 스님 등이 있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120~123





칭명염불 수행법의 이론적 토대 - 성명쌍수


수행자가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한 든든한 이론적 토대를 얻기 위해
서는 성명쌍수에 대해서 이해하면 좋다. 흔히 동양 철학과 동양 수행
을 하는 수행자라면 고대 성현들로 부터 전승된 성명쌍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성명쌍수란 성(성품)과 명(생명, 삶)을 함께 공부하라는 것을 학
인에게 당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이란 성품을 말하며, 성품은
마음의 자성을 말한다. 이는 또한 불성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목숨, 즉 생명을 말하며, 더 포괄적으로는 삶
이란 점에서 성품을 공부하는 것이 명을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적으
로 영원하게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으로서의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 내재한 법리와 인연법 그리고 연기사상
을 통찰 및 철견하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성으로서의 자성을 닦는 것이 명으로서의 삶
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성과
명은 함께 닦아야 한다는 성명쌍수를 성현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힌두의 철학 사유에서도 본질 또는 존재를 공부하는 것과 인
연 또는 관계를 공부하는 것 두 가지를 나눈다. 어느 것이 우선이고
어는 것이 차선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을
통해서 내면의 자성 세계로 회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내면과 외면은 뻥 뚫려 내외명철이 된다. 이 내외명철
이 확연히 인식되어 자신의 인식 구조와 존재론적 세계가 하나가 될
때 내외의 벽은 허물어지고 완전히 허공과 같이 충만한 공을 철견
하게 된다.

인도의 쿤달리니 요가에서도 쉬바로서의 정적인 성품 의식과 샥티로
서의 동적인 육체 에너지를 이야기한다. 쉬바는 성에 해당하며 샥
티는 명에 해당한다. 성은 관조적 힘이자, 주시적 힘이자, 관찰
자로서의 힘이다. 명은 행위적 힘이자 삶의 영위자로서의 힘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불가의 팔정도에서 정견, 정사유 등은 쉬바 의식
을 도야하는 바른 길에 해당하며 정업, 정정진 등은 샥티 힘을 도야하
는 바른 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은 우리의 마음을 의미한다면 명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신 구 의 작용을 의미한다. 성은 체요 명은 용인 것이
다. 21세기 과학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시스템을 비유로 들면 프로그
램들 하나하나의 실체가 바로 성이요 그 프로그램의 행위 또는
작동이 바로 명인 것이다.

체와 용이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성명도 불
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마음에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염불선이나 위빠사나선이나 모두가 일차적으로 성을 도야하
는데 있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은 성을 도야하는 것을 넘어서 부처
님의 가피와 위신력으로 불신을 얻는데 있다. 큰스님의 법 세계에
서는 성이라는 것은 작은 불씨라면 불신은 태양으로 비유할 수
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견성오도見性梧道 전체공개


의심하는 이 놈은 무엇인고?
화광반조 10여 년만인 7월 어느 날, 생각을 놓아도 저절로 화두
가 들리길 여러 날 동안 이어졌습니다.

답답함이 부풀어 올라 풍선같이 극치를 이룰 즈음, 큰 소리로
금강경을 봉독하는데,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데도 없다'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온몸이 폭발하듯 하
면서 세상이 확 뒤집혔습니다.

주主와 객客의 벽이 무너져 버리고, 툭 터져 허공같이 비었습니
다. 적조寂照요, 만고萬古의 광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음은 실체가 없어서 가고 옴이 없고 여여부동如如不
動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나는 저절로 일어나, 실로 법열法悅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면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겁생多劫生의 업業의 나무 무성하더라
팔만 사천 가지마다 줄기마다

망상 꽃이 피었더라.

내 이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더니

하늘도 없고 땅도 없더라.

거짓몸뚱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되어 없는데

착着할 게 어디 있는가.

마음 마음
본래부터 없는 것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네



이것이 벌써 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존재의 진상, 우주의 체성體性을 확실히 철견할 수 있었던 것은 오
매불망 간절히 의단을 쌓아온 나의 정성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
합니다.






염불선으로의 회귀


돌계집石女의 겁외가劫外歌와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을 말하고 '덕
산德山' 의 30방을 흔들며, 상相에 집착 없는 언어로 공空을 읊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 다된 양 착각하여 오만을 떨었던 지난날을 생
각하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30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상임포교사로서 불법을 포교하기 위해
법상에 앉은 지 채 2~3년도 못 되어 나의 공부禪수행 保任에 회의
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히말라야 초인超人들, 힌두교 성자요기 Ylgi들 및 티베트 밀교의
성자 미라래빠의 수행담을 접하고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
전을 정독하면서 나의 선수행을 비교 점검해본 결과 중대한 발
견을 하게되었습니다.

자성을 깨치는 것은 공부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견성見性이 곧
성불成佛' 이라는 산가의 기치旗幟는 분명코 잘못됐으며, 설사 견성
하고 나서 보림을 마친다 하더라도 곧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이 거룩하시고 희유하시며 거의 절
대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또한 인간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아라한에 그칠 뿐
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아라한으로서는 우주와의 계합이라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실존철학의 소위 존대sein 불교의 법성法性, 선禪의 자성自性에 해당가
드러나서 머무는 건 순간일 뿐입니다. 영원히 우주와 계합을 이루
는 성불만이 완벽한 생사해탈을 보장합니다.

소위 견성에 이름으로써 저 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이 우상
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창조주란 없
다!' 고 선언하는 단계가 바로 견성의 경지였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서 이 몸뚱이란 4대지수화풍로 이루어진 옷이나
집과 같은 '가짜 나假我' 라는 것과, 나我라는 것도 오온五蘊-色受想行
識으로 이루어진 인연소생의 가아假我이며 이 세상은 꿈이나 그림
자 또는 이슬과 같은 무상無常한 존재라는 사실도 발견하였습
니다.

분별하고 사량하는 것은 생각일 뿐, 마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
습니다. 이것만 해도 크나큰 깨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지天地 이전, 곧 부처 나기 이전의 적멸寂滅과 우주가 생
기기 이전의 면목을 깨친 이라면 당연히 불교의 연기법만이 진리
라는 것을 사자후할 것입니다.

내가 갑자기 염불선 공부로 용감하게 회귀할 수 있었던 것은 화
엄경 입법계품, 법화경 본문 팔품에서 가르친 대로 무엇보다
도 계율을 존중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하는 수행만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토삼부경에서 수행인이 생사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경전 읽고 염불하는 것만이
우리가 보다 잘 살수 있는 오직 하나의 대안代案임을 확실히 보았
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나는 인도의 용수, 마명보살, 중국의 혜원 조사, 진晋의
각현, 담란, 천태지의, 선도, 도작, 영명연수 선사, 한국의 의상, 원
효스님, 서산 선사의 염불선을 크게 주목하면서 우주생명의 실상
實相을 관觀하며 보림을 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모의 젊은 여인을 보고 마음이 설레는 자신을 발견
했습니다.

그 순간 '진여실상이라는 용광로에 무명번뇌나 억겁의 죄장 따
위가 모조리 녹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고 주장했던 지난날의 나
의 법문을 스스로 반추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혼자 산행山行을 하던 중에 쉬어갈 만한
곳에서 선정禪定에 들었습니다. 그 선정 중에 문둥병을 심하게 앓
고 있는 남자가 들어와 한 이불 속에서 자고, 밥지어 먹고 지냈을
때, 정말 선정에 들었으면서도 알고보니 천인天人의 선정이었다
중생심의로 돌아가 역겹고 싫은 생각이 줄곧 따라붙고 있었습니다.

한 태백산의 토굴에서 보림하던 어는 여름날, 커다란 구렁이
가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긴장하여 진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본래면목의 실상,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철
견하고 보림한다고 해서 붓다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백생 이전에 수행하실 때에 '가리왕' 이라는 포
악한 악인을 만나 난자당해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에게 성내고 원
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아니하셨는데, 도대체 나는 어디
쯤 와 있단 말인고? 결국 인간 능력의 한계라는 명제와 타력他力, 곧
'부처님의 가피' 라는 주제를 두고 차츰 골똘히 생각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깊은 선정에 들어서 그것을 진짜 삼매라고 오해
한 나머지 불 보살을 뵙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친견은 고사하고
지옥 천상세계도 관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윤회를 벗어난 해탈
오계解脫梧界, 곧 도솔정토나 서방극락세계도 끝내 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승禪僧이었음에도, 이 모두가 실제로 존재할 것이
라고 믿었기 때문에 염불선으로 과감히 방향전환하였으나 특히
1970년대 당시의 한국불교에서 선수행이 강고되다 보니, 염불하
는 행자들을 무조건 외도로 몰아 배척하였기 때문에 겉으로 내색
하지 못하고 침묵 속에 정토업淨土業을 쌓았습니다.

또 하나 내가 염불선으로 방향전환을 결심한 데는, 선재동자와
같은 나의 과거 행각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친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처럼 나이와 성별,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고, 이단異端-제2의 예수라 자칭하는 어느 목사님, 부처라
고 떠받드는 어는 재가보살 그리고 전라도 토굴의 어느 도인 등을 이해하고 오
랜 세월 교유함으로써 선禪의 참구參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절대세계의 붓다들_칭명염불을 권한다!


불자 여러분께서는 실제로 붓다들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또한 그 불보살님들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요청하면
그 염불 수행자들을 친자식같이 생각하여 이들을 건지기 위해 가
능한 온갖 자비 방편을 쓴다는 사실을 유념하셔서 칭명염불을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불가능이 없으리만큼 우주적인 무한 능력을 지니신 부처님' 을
부르지 않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크신 힘을 지니신 부처
님을 외면하고 자력에만 의존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염불을 권합니다.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을 받는다
면 우린 삼악도에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고, 짐승 몸을 받아 날 수밖에 없다 해도 큰 스승을 만나 염불공
부를 잘 한다면 삼계까지 벗어나는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학승들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법, 보, 화 삼신을 말하는 것
은 하나밖에 모르는 이설이 분명하다고 다시 단언합니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철학공부는 종교 수행인에게 이롭
지 않습니다. 실천 수행해서 깨닫고, 나아가 증득하는 것만이 필요
한 것입니다. 나는 다만 직접 깨달은 내면세계의 '다르마' 소식
만을 전하렵니다. 내가 들추어낸 이 엄청난 새로운 삼신설의 법문
지각변동이라거나 핵폭발, 경천동지 혹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수사를 뛰어넘는을 당당히 사자후하는 것입니다. 묻혀진 아니,
죽어가는 위대 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살려내어 이 땅에 널리 펴고
싶을 뿐입니다.

남모르게 공부를 이루고자 쏟아낸 피눈물이 샘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답니다.

붓다들의 현신했을 때의 모습 보신 불신은 해탈신이기에 그렇겠
지만 보살의 그것과도 하늘 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붓다의
음성 역시 그러합니다. 일거수일투족이 자비롭습니다.
보신의 미간, 눈, 입, 손바닥 등 열군데서 '빛' 을 방사할 때에
는 녹색이나 무색 광명같이 단색을 방광할 때도 있고, 백종 오색광
명을 놓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억종광명을 방사할
때도 있습니다.

붓다께서 방광하는 빛은 마왕 파순이나 하늘 마는 물론 귀신들
도 모두 무서워하는 대상입니다. 탐진치 삼독이 녹아버린 성자의
마음 빛이기에 악심이나 사악한 기를 물리치고 녹이는 불가사의
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량광은 영롱하고 청정하며, 내
외명철합니다.
모든 붓다들이 무량광으로 이루어졌기에, 빛 그 자체이시기에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붓다끼리는 서로 항상 상속되어 있고 그래
서 한 티끌 한 생각이 똑같습니다. 말 그대로 삼세여래일체동
입니다.

그러나 각각 개성이 있고 얼굴, 키, 몸무게도 다르십니다. 그 이
유는 불과를 이룬 후 열반에 들 때, 그 붓다의 거짓 몸속의 네 개
영체가 빛덩어리가 되어 자신의 불신과 계합하게 되는데, 나름대
로의 성격차이가 그대로 불신 속으로 들어가 섞여져 반영되기 때
문입니다.

붓다가 세 몸을 지니신다니 이 어찌 희유하다 아니 하겠습니까!
이것이 정설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한 생각을 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염불선


이렇게 한 생각을 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큰스님 말씀대로
‘석가모니불’을 찾는 것이다. 염불선이 강력한 이유는 무성하고도 불과 같이치성(熾盛)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석가모니불’명호를 사용해서 녹일 수 있다는데 있다. 고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큰스님께서 비유하신 바대로 용광로라는 삼매에 잡념들이 녹아버린다. 집중이 제대로 안 되면 불처럼 치성하게 일어나는 중생심에게 ‘금강반야바라밀’을 외우게 하는 것이다.중생심이 발동하려고 해도 ‘금강반야바라밀’을 중생심에게 먹이면 석가모니불을 보다 뚜렷하게 할 수 있다.

한편 스토아학파(금욕주의학파)의 현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일어나는 일 자체가 아니라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매우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조용히 생각을 지켜봄으로써 생각이 힘을 잃고 사라지도록 하는 위빠사나선이나 염불선을 통해서 일념삼매에 들어가는 방법 그리고 화두를 들어 오직 화두에만 전심전력하는 화두선 모두가 선 수행법이다.

불교는 여하튼 선을 모르면 안 된다. 선(禪)의 글자 뜻은 하나(單)를 보는 것이다. 그 하나라는 것은 허공처럼 충만하고 충일한 마음이다. 중생심과 대비되는 청정심이 그것이다. 생각을 지켜보는 마음을 볼 수 있다면 그 주시하는 마음을 강화하여 청정심을 이룰 수 있다.

이 청정심을 얻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큰스님의 염불선은 위빠사나선이나 화두보다 안정적이고 부작용이 없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항상 큰스님 말씀처럼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느 장소 어느 순간이나, 즉 일체 처, 일체 시에 석가모니불을 억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잡념과 망상이 있기 때문에 불교 공부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잡념과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들, 즉 망상이 없다면 공부감이 없는 것이다. 공부감이 없다면 배움도 없다. 사바세계는 인고의 땅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깨우치고 세상의 이치와 우중의 섭리를 배우기 위해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도자는 비록 견성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상당한 인고의 세월을 요구한다고 해도 용기를 갖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공자님 말씀대로 공부를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훌륭하다는 점을 상기하고 이 불교 공부가 힘들지만 이왕이면 즐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은 내면에 있다’라는 가장 기초적인 마인드를 잘 숙지하고 항상 내면을 성찰하고 염불선을 생활화하면서 지내야 할 것이다. 물론 내면에서 일어나는 중생심을 너무 과소평가하지는 말아야 하며 항상 진지한 마음과 긍정적 마인드로 염불선에 임해야 할 것이다.

달마 조사는 견성, 즉 깨달음을 위해서 이입사행을 역설했는데 이입사행이란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을 합한 말이다. 이입(二入)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말하며, 사행은 행입의 내용으로 보원행(報怨行)·수연행(隨緣行)·무소구행(無所求行)·칭법행(稱法行)을 말한다.
여기서 이입(理入)은 경전에 의해 그 근본 정신을 파악하고 일체 중생의 마음이 진성(眞性)임을 알아서 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즉 이입사행은 수행의 근본을 설명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행입에 대해서만 거론한다.

행입 중 보원행은 현세의 원망과 증오가 모두 과거에 자신이 지은 업(業)의 대가이므로 인간 본래의 도를 닦는 데에만 전념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보원행이 바로 전생과 현생에 지은 타인에 대한 원망을 갚는 수행이다. 이것이 수행자에게 가장 큰 문제이며 여기서 수행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남이 나를 원망하건 내가 남을 원망하건 그 원망심을 없애는 것이 보원행(報怨行)이다.

서양에서는 용서(forgiveness)로서 알려져 있다. 타인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죄업을 사할 수 없다. 즉 보원행을 행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전생부터 지어온 악업과 빚을 청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결을 소멸시키고 원망을 제거해가는 행(行)을 수도(修道)로 삼아야 한다.

수연행은 순리에 따라 도에 합치되도록 하라는 말, 즉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인연을 잘 살펴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며 인연에 거부감을 갖거나 지나치게 인연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편 무소구행은 구하는 것을 없애서 애착과 집착·탐욕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다. 또 칭법행이란 모든 불법을 항상 공경하고 찬탄하라는 가르침이다. <<법화경>>에도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는 공덕은 그 어떤 공덕보다도 수승하다고 전하고 있다.

스승에 대한 지극한 공경과 감사 없이는 수행은 불가능하다. 공경과 감사가 무르익을 때 스승의 가르침을 찬탄하고 믿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귀의, 귀명하는 마음이 더욱 강화된다. 사실 죄업이라는 것이 알 수 없는 먼 과거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멸시한 죄업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명(無明)이라고 하여 가장 원천적인 연기(緣起)의 시작은 부처님의 12연기의 처음이자 고통의 근원이다. 이 무명(無明)은 다른 말로 말하면 ‘어두움’이다. 어두움은 공포, 두려움, 불안 등을 말하며 이러한 두려움은 결국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결여에 있다고 알고 있다.

무시 이래의 헤아릴 수 없는 과거시절부터 불과를 이루지 못한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도 했지만 진실로 받아들여 목숨을 걸고 매진하고 정진하여 완전한 죄업을 다 사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가장 큰 죄는 바로 부처님을 믿지 않고 세속적 욕락(慾樂) 속에서 살아가면서 얻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집착이 아닐까 한다.


출처 /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