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일요일

부처님께 귀의 염불하는 타력불교로 들어와야 합니다

 부처님께 귀의 염불하는 타력불교로 들어와야 합니다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는 자연의 이법입니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 못 살게 될 수 있고, 못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약한 나라가 국력이 신장되어 강한 나라가 되고, 세계 제일의 제국이 몇 백 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강국强國의 대열에서 낙오되고 약소국으로 전락되기도 합니다.

 

‘불교를 신봉하는 동남아국가들이 왜 잘 살지를 못하는가? 기독교 문명권 서구 여러 나라들이 잘 산다, 나보다 더 많이 배우고 잘 난 이들이 그 종교를 따른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고 학식이 풍부하다고 하여, 똑똑하고 잘났다고 하여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욕심이 적어 자기 분수에 만족할 줄 알고 교활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으면서 정직하고 진실하며 인륜과 도덕을 지키면서 사는 그 사람이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자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할 줄 알고 불쌍한 이웃을 돌보며 나라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은 보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더욱 나아가 정법을 만나 내면의 영혼을 백설같이 정화한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바람직한 인간상입니다.

 

이 몸은 영원하지도 않고 참된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성 소멸합니다. 그래서 본래 비어있습니다. 《금강경》의 일합상一合相의 도리로 보아야 합니다. 일체가 공입니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은 나와 세상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청정한 계율을 잘 지키면서 탐진 삼독심을 정화해 갑니다. 


조석으로 이 나라와 세계의 인류 모두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잘 살기를 기도합니다. 


부처님의 위대하신 발자취를 가슴에 담고 여러 생을 통해 지은 죄업장의 소멸을 발원하면서 염불로써 생각을 모아갑니다. 


깊은 고요로 침잠해 들어갑니다. 선정에 듭니다. 마침내 시간을 초월한 적정으로 빠집니다.

 

흑암의 동굴 속에서 몇날 며칠을 갇혀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이 작열하는 바깥 세상으로 튕겨져 나왔을 때, 내리쬐는 빛 때문에 생각 따위는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견성 경계입니다.

 

칸트Kant, 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 가 존재의 근원인 빛自性의 光明 속에서 3일을 보냈다합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한 적정의 경계였습니다.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희를 가져온 칸트는 비판주의의 웅대한 철학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라는 생각도, 어떤 대상의 흔적도 없습니다. 급기야 우주의 제행諸行을 주재하는 진리, 이법의 본래 모습을 면대합니다. 견성입니다. 도를 통했다는 자리입니다.

 

여기서도 한없이 들어가면 삼매에 듭니다. 우주의 모두를 요달합니다. 중생이 나서 사는 육도의 세계를 봅니다.

 

불교에선 여기를 보살의 법위라 봅니다. 보살이 무량겁동안 반야와 복덕을 지으면 비로소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불신을 얻는 부처님이 됩니다. 이런 자리는 결코 학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실천 수행으로서만 드는 경지입니다.

 

이 수행자는 인생을 압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압니다. 어떤 가르침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10장 중에서

 

 

 

자력으로는절대 불 보살이될 수 없습니까?

  

문6 

대 소승의 수행법으로 크게깨쳐도 아라한이라하셨는데,

자력으로는절대 불 보살이될 수 없습니까?

 

  

 

답6 

소승상좌부불교 테라바다 대승 금강승의 수행의 본질은 같

습니다.  삼학을 통해서, 탐 진 치 삼독을 닦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수행법이 다를 뿐입니다.

 

본성을 만남으로써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본성과 계합하는

것은  한 식경을 지나지 않습니다.

 

수행은 우리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에 시작합니다.

 

수행이 차츰 깊어지고, 지혜가 증장해 감에 따라 자기 중심의 소

승에서, 비이기적인 수행인 대승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불교 종파

의 수행은 인간 내부의 탐욕과 성냄, 무지의 제거를 목표로 합니다.

 

불교 수행은 이기심과 집착을 넘어서고 열반을 얻는 것이 목표

입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자연히 일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비

심이 일어나 대승을 향해 나갑니다. 

 

따라서 모든 불교 종파의 수행법으로 깨달았으면 아라한까지는

도달합니다.  여기까지가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부처님께서 수

행승이 아라한 성과를 얻도록 주로 가르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라한은 다음 생을 받아와 여러 바라밀 수행을 함으로써, 타

력에 의하여 보살과를 성취합니다.  선근 공덕을 쌓아 부처님을 염

하고, 불명을 구창하면 불퇴전의 보살과를 얻게 됩니

다.  자력으로는 결코 보살과 붓다가 될 수 없습니다.  아라한이 인

간 자력의 한계임을 거듭 밝히는 바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붓다는 법 보 화 삼신을 갖춥니다.  법신과

보신이라는 불신을 얻지 못하고서는 붓다라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역사적인 선언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타력불교

  타력불교

 

 

 

이제 우리는 윤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늘세계 가면

사람으로 오니까 하늘 사람 좋지요. 하지만 우리는 궁극

적으로 윤회, 삼계에서 윤회에서 탈출해야 되요. 그러면

우린 여기 안와요. 여기, 영원히 안 올수가 있어요.

 

하늘에서 하늘이라고 하는 그 하늘에서 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서원하고 그 곳에 목표를 두

어야 해요. 그런데 자력으로는 어려워요.

 

자력으로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가 비유를 들기

를 인공위성이 지구 인력권 벗어나기 어렵듯이 삼악도를

안 가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또 윤회를 벗어나려면 삼계의

윤회를 벗어나려면 로켓트가 지구인력권이 아니라 태양계

인력권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어렵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거요. 자력으

로는 참으로 어려워요. 자력으로는 어려워. 


그래서 절대하신 힘(파워)을 지닌 부처님께 귀의, 귀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중에서도 부처님이신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 목숨 바쳐 귀의해야 되요.

 

여러분 말은 쉽지, 목숨 바쳐 귀의 한다는 말은 쉽게 하는

데, 이것 참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구요. 


목숨을 바쳐서 귀

의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을 칭명을 하되

반드시 경전 읽고 하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출처/2007.1.1.월(음11.13) 큰스님 부산 법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