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7일 토요일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 2 ]21세기 거룩한 우주적 메타종교, 불교의 법 세계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중국불교의 산물


밀교의 우수한 수행 체계, 타력 염불 수행의 우수성 외에도 힌두교

의 삼매에 드는 요가 수행, 유대 신비주의의 심오함,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의 신비주의 유교의 격물치지 수행, 도가의 기동 수행법으로도

달공하여 불교의 아라한위까지 진입 가능하다.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중국불교의 산물이자

경전 상 명문 근거가 없다.  화두선에 대해서는 정말 언급하고 싶지 않

으나 너무 오랫동안 우리 한국불교를 병들게 해서 별도의 단원으로 다

루었다.



큰스님 말씀대로 화두선을 통해서도 견성을 할 수 있으므로 화두선

이 100% 나쁜 것은 아니다.  수행자의 체질이나 전생 선근에 따라 화

두선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다.



하지만 일부 수행자들에게나 효험이 국한되는 수행법으로는 21세기

한국 불교 아니 전 세계 불교를 견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만약 화두선이 그렇게 휼륭한 수행법이라면 왜 청전 스님처럼 한국

불교에는 위대한 큰스님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왜 스님들의 명성이

널리 선양되지 못하고 있는가 말이다.  화두선 수행자들은 깊이 이 점

에 대해서 숙고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선불교의 흠결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신행, 즉 부처님의 존재를 믿는 불제자로서의

기본 수행 마음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부차라고 하는

실정인데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마음이 부처라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인데 수행은 왜하고 불교는 왜 믿는지 의문스럽다.  마음이 부처라

면 종교는 종교도 아니고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신심 깊은 불제자들은 알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종

교는 세계 그 어는 종교에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둘째, 견성, 즉 깨달으면 부처가 됐으니 막행막식하고 사음도 가하다

고 하는 것이 오늘날 선불교의 현주소다.  계율이 없는 불교는 불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계율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2500여 년을 존속 유

지되어 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셋째, 경전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잘해야 아라한 자리에

불과한 조사들의 어록들을 부처님의 경전보다 더 소중히 하는지 이유

를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한국불교가 살아남으려면 대승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넷째, 염불을 하근기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염불 수행을 제대

로 해본 적이 없이 하근기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염불 수행

의 오묘한 맛과 쉽고 빠른 경지 증득을 모르고서는 절대 염불선을 하

근기 수행이라고 모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화두

선은 상기병, 정신질환, 주화입마에 걸리기 쉬운 수행법인 반면 염불

수행은 부작용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효를 다해야 한다.  부처님이 주관하시고 불과를 중한 청정하

신 큰스님이 집전하시는 천도대재를 치르고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

그리고 친인척들을 하늘로 천도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부처님은 마음의 산물이 아니다.  어찌 마음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마음이 부처님이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모욕하고 능멸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법화경>> <비유품>의 부처님 말씀처럼 공성의 증득으로 붓다라

할 수 없다.  32상 그리고 10력 등 모든 붓다의 공덕을 갖춘 색신보신

을 성취해야 붓다인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불신을 얻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고 확인하신다.



일곱째, 생사관이 없고 육도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지옥이

없고 천상이 없다면 <<아함경>>에서 설한 육도 윤회는 거짓이란 말인

가?  그것은 부처님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덟째,  참선만이 유일무이한 깨달음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독선

적이고 배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위빠사나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라 분명히 하셨다.





화두선(간화선)수행법


한국에서는 도의국사를 기원으로 해서 천여 년이 넘게 전승된 유서

깊은 화두선이 화두 일념을 통해서 일념삼매를 통과하여 무념삼

매로 증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까지 훌륭한 수행법으로 인정되어

왔다.  화두선도 위빠사나선이나 일반 염불선과 동일하게 삼매를 얻을

수 있다.  그 점으로도 충분한 가치는 있다.  하지만 수행자의 채질이

화두선에 적합해야 하며 시간을 많이 소비한다는 단점과 함께 현대 한

국불교 수행 문화를 선양하고 수행 세계를 고취시키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두선은 이제 더 이상 한국불교, 더 나아가 전 세계 불교의

21세기 수행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실정에 와 있다.



한국과 티베트을 왕래하고 달라이라마로부터 공부를 배우신 유명한

청전 스님께서도 "한국에는 부처같은 큰 소리는 많은데 부처같은 행동

은 왜 없나 ."라고 일갈한 것처럼 선불교에 찌들은 한국불교계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화두선의 문제점과 병폐를 지적하여 더 이상 화

두선은 21세기 대표 수행법이 될 수 없음을 말해두고자 한다.



 

티베트의 밀교 수행법


밀교에서는 신행으로서 무드라를, 언행으로서

만트라 그리고 의행으로서 만다라대일여래부처

님에 대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지궁 현지사의 신도라면 효나 천

도제 등의 신행을 쌓고 비로자나총귀진언과 칭명염불 수행을 통해

서 언행을 닦아야 하며 부처님 성상을 관함으로써 의행

을 쌓아야 한다.  진리라는 다르마는 우주에 대한 세

가지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신행 언행  의행이 그것이다.  이 삼행

을 통해서, 즉 차례대로 무드라, 만트라, 만다라 수행을 통해서 신

구 의 삼업을 정화한다고 본다.



명상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정적인 장소에서 명상

하는 것과 하나는 역동적인 생활 속에서 명상하는 것이다.  이 들은 조

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즉, 생활 속에서 바르게 신행을 하고 바

르게 언행을 하고 바르게 의행을할 때 무드라, 만트라, 만다라 명상

도 잘 된다.  역으로 무드라, 만트라, 만다라 명상을 잘 하면 생활 속에

서 잘 된다.  역으로 무드라, 만트라, 만다라 명상을 잘 하면 생활 속에

서 바른 신행, 바른 언행, 바른의행을 구족하게 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이 삼행은 바로 영혼의 각성과 신성한 인격체를 창조해 나

가는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생활 속의 삼행과 명

상의 삼행의 양자 관계는 상호 조화와 상호 균형을 이루면서 큰

스님께서 설하신 붓다의 삼신 중에서 우주적인 보신을 형성

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큰스님께서는 우주적인 선근을 쌓아 키울 때 그 공덕으로 보신불

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억겁동안 내여온 악업과 죄업, 그리고 빚,

원결, 삼독심을 모두 녹이고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을 모두 제

거할 때 무량광을 보고 육종진동을 맞은 후 석가모니부

처님께서 최종으로 인가를 하시면 붓다가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연화장 세계에 보신불이 생성된다고 하신다.  결국 불교 수행

의 핵심은 보신불을 얻는데 있는데 어찌 보면 그러기 위해서 신행 언

행 의행의 삼행을 닦아 다겁 생을 통해 쌓아온 신업 구업 의업

의 삼업을 청산하는 것이 요체라고 생각이 된다.



만약 선행이 부족하다면 무드라 명상, 즉 자세를 바르게 하고 반가

부좌나 결가부좌로 명상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통해서 이 신업

을 닦을 수 있다.  만약 반가부좌를 하는 무드라 수행에 약하다면 생활

속에서 신행을 닦을 필요가 있다.  상호보완적이다.  명상은 조용한

수행이라면 생활은 활발하고 역동적인 수행인 것이다.



인간은 사바세계의성대 세계 속에서는 두 가지 양태를 지닌다.  즉

내성적인 측면과 외향적인 측면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은 내성적인 마음의 상태가 있고, 어느 말은 외향적인 마음의 상태를

얻는다.  명상은 마음의 상태를 조율하고 균일하게 하는데 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 사회 생활에 피곤함이 생긴다면 무드라 명상을

하면된다.  무드라 명상이란 연꽃 자세로 앉는 것, 즉 가부좌를 말한

다.  이렇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을 하면 그것으로 신행을 닦

는 것이 된다.  신행에 대한 활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무드라 명상, 즉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기가 힘들 때는 적극

적이고 동적으로 사회생활의 신행을 더 열심히 하면 된다. 마찬가

지로 언행에 있어서 잘못이나 실수를 했다면 만트라 수행, 즉 비로자

나총귀진언과 칭명염불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칭명염불 수행이 잘 안 되는 날에는 경전이나 좋은

글을 읽거나 도반과 좋은 대화를 나누어 언행을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의업의 정화를 위해서는 조용히 만다라 명상, 즉 부처님

성상을 흥시하고 관조하면서 명상하기 바란다.  그러면 마음의 잘

못된 뜻과 생각들을 정화하게 된다.



만약 사회 생활에서 잘못된 뜻을 가진 경험이 있다면 꼭 성상을 잘

관상하고 부처님의 정심 정의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

다.  물론 여러분도 평상시 잘하는 부처님에 대한 기도는 이 삼행

을 모두 포괄한다고 본다.  기도도 일종의 명상으로 중요시된다.

여기서 소개한 티베트의 밀교 수행법은 삼업을 정화하고 청산하는

삼행으로서 삼밀이라고 한다.






생각은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단발적이며 변화한다



우리는 생각리아는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지속적이지 못

하고 단발적이며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삿된 욕망과 결부되어 일어나는 생각들을 조심스

럽게 관찰하고 예의 주시해야 한다.  만약 생각이 영원 불변하다면 그

것은 우리의 본 마음인 청정심과 다를 바가 없다.



큰스님께서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초창기 당신께서 수행

할 당시 마음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우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

다고 솔직히 고백하셨다.



여기서의 마음은 중생심이 아닌 청정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

스님의 말씀은 진실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음은 정신을 환골탈태하여 얻어진

청정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면 생각도 깨끗한 것이다.  반대로 마음

이 탁하다면 그것은 생각도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욕구나 사고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본

면목, 즉 자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옥이라는 것

은 이러한 덧없고 본질적이지 못한 삿된 욕구와 생각들에 휘말려 본질

적인 자신의 참나, 즉 본래 면목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이렇게 무상한 생각들과 수시로 치성하는 중생심

을 여실지견으로 진지하게 꿰뚫어 보고 조용히 가라앉히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빠사나선은 미혹된 생각과 정사유 및 정견을 엄

격하게 구분한다.  만약 자신이 미혹된 생각인지 그리고 정견인지를 모

른다면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모든 잡념들에게 하나의 공부감(먹이감)

을 주어 그 잡념들을 잠재운다.  위빠사나선은 바로 이렇게 수행자에게

발생하는 부질없고 무상한 생각들과 욕구들을 하나하나 알아차려 총체

적인 무지를 타파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총체적인 무지의 구름을 일소시켜 감으로써 올바른

정견과 정사유를 증득해 나가게 된다.  하지만 거해 스님께서 <<깨달음

의 길>>이란 책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위빠사나선 도중에 잡념이 치성

하게이러나면 '망상, 망상, 망상'이라고 반복함으로써 잡념을 잠재운다

고 한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으로 잡념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 쉽지

가 않다.  왜냐하면 잡념을 완전히 일소하기 위해서는 잡념의 근원인

카프마(업)에 대한 성찰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빠사나선은 올바른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구나, 그리고 잘못된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구나를 여

실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의식을 명료하게 하

여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사실, 위빠사나선은 조용히 마음

을 가라않힌 사마타 상태에서 수행해야 제대로 된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

전해내려 온 정혜쌍수에서 정은 고요하고 맑음을 의미하는

사마타 상태를 의미하며 혜는 밝음으로서의 헤아림을 의미하는 위

빠사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위빠사나는 사마타에 기반을 두고 주도면밀하게 생각들을 관

철하여 빛의 광도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중생심이 탈각되고 번뇌의 원

인들이 하나하나 규명되어 잡연과 탁한 의식(에너지)이 제거되어 가면

자연히 오롯하게 본 성품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혼자서 위빠사나선을 수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큰스

님의 말씀대로 무릇 수행을 위해서는 큰스승을 만나야 한다.  스승이

없이 수행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불장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매우

위험한 일이므로 반드시 눈밝은 스승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우리 불

제자는 두 분의 큰스님을 모시고 있으니 더없는 복운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혼자 하다보면 치성하게 일어나는 망상을

대처하지 못해 몇 번이고 어려운 고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어떤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위빠사나선은 너무 자력에 의해서 세계의 진상을 이해하고

내면을 탐구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당연한 문제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잘못하면 때로는 잘못된 인연과 안 좋은 인연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다.



또한 위빠사나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법계(세상)와 내면의 진상

을 여실지견 파악하는 수행법이므로 너무 과도하게 몰입하면 초긴장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위빠사나선을 잘못 수행한 결과이다.  위빠사나선은 진지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항상 마음의 고요함 위에

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수행자의 내면에서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잘못된 생

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려서 그것을 올바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우주적 다르마로서의 카

르마와 인연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안 좋은 생각들과 고통은 바로 악한 카르마와

안 좋은 인연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악한 카르마는 전생과 현생

의 잘못된 신 구 의 삼업이라 할 수 있으며, 안 좋은 인연은 전

생과 현생에서 빚을 진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팔정도의 정견을 구족하는 데 매우 요긴한 수행법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왜냐하면 큰스님께서도 현지사 법회에서 말씀하

신 것처럼 수행이란 칭명염불 수행, 팔정도, 그리고 육바라밀(계율 포함)

를 병행해서 함께 닦아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재세시 설

하신 팔정도는 수행의 중심부를 점위하고 있다.



한편 수행자 자신의 의식이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수행

법이 위빠사나선인데 만약 수행자의 의식이 미혹되면 자신은 바르지

못한 삼업을 짓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본 자성인 청정심에서 저지른

죄업이 아니라 바로 마구니나 빙의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의 전생과 현

생의 죄업에 의해 이루어진 습기, 집착, 탐  진  치 등의 중생심

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빠사나선에서 선은 사유수라고 하여 생각을 닦는 것이며

정려라고도 하여 고요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위빠사나

명상이라고도 하는데 명상이란 바로 생각을 그윽하게 하고 깊이

참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명상함으로써 잡념의 뿌리는

사라지게 된다.



근래에는 미얀마 등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서 아라한 위를 증한

분이 있다고 회자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유를 다듬음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위빠사나선에 다가가는 분이 있다.



종교 명상서적들을 많이 읽고 깊이 책의 내용을 참구하는 것으로도

위빠사나선에 다가설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내부의 적'의 동태를 관

찰, 분석, 파악하여 그들을 종국적으로는 타파하여 영원히 잠재우는데

목표를 둔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운 올바른 가르침을 투명한 통

합적 사유를 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들을 타파해 나가

야 한다.  이러한 통합적 사유는 번뇌를 뿌리 채 뽑는데 큰 도움을 주

는 금세기 최고의 철학 사조이자 추세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언금한 것처럼 위빠사나선은 한계를 지닌다.



첫째, 위빠사나선은 아라한에 목표를 둔다.  즉, 위빠사나 수행법은

아라한 위에 한계를 둔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둘째,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지나치게 두뇌

를 긴장시켜 상기병을 일으키거나 바르지 못한 사유와 계율 중에서 특

히 음계를 준수하지 못할 경우 망상에 휘말려서 정신질환이 일어

날 수 있다.



따라서 옆에서 수행자를 잘 돌보아주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 또

한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바처럼 위빠사나선의 중요성은 집중 명상을

통해서 일념삼매를 통과하고 무념삼매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빠사나선은 아라한까지만 가능하다.  그 이상의 수행

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

행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바르지 못한 식욕, 삿된 음욕은
 자신의 삿된 생각에서 비롯된다 


결국 바르지 못한 식욕이나 삿된 음욕은 바로 자신의 삿된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문제는 바로 삿된 생각이

근원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삿된 생각은 바로 중생심에서 발현되며

반대로 올바른 생각은 청정심에서 발현된다.



위빠사나선은 과학적 사유처럼 실험과 관찰을 무수히 많이 반복함으

로써 중생심과 청정심의 차이를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다.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이러한 중생심을 억겁을 통해 쌓아온

습기,  집착,  죄업,  탁기,  탐,  진,  치(어리석음)의 삼독심 등으로

언급하시는 것으로 안다.



수행이란 번뇌의 근원이 되는 이러한 주생심을 타파하고 척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는 바, 우리가 식욕과 음욕을 느

낄 때 그것은 순간적 욕망이지 결코 영원하고 지속적인 욕망이 아니라

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고 불행한 것이며 고통의 근원

이 되는 것이다.



욕구나 삿된 욕망은 자신의 '참나'인 본 성품, 즉 청정심과는 무관하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모성애적 욕구를 통해

서 음욕을 일으키며,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정복욕을 통해서 음욕을

일으킨다.



이러한 두 가지 욕구들은 삿된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잘못된 욕구가 발동하는가?



남성들은 원시시대부터 밖에서 사냥하고 다른 부족과 투쟁하였으며

다른 부족을 정복하였다.  오늘 날에는 밖에서 사회적 생존을 위해 투

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정복욕을 여성에게도 작용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오류라고 본다.



한편 여성들은 원시시대로부터 남성들이 밖에서 활동한데 반하여 집

안에서 아이들을 키움으로서 모성에적 욕구를 갖게 되어 남성에 대해

서 그러한 모성애적 본능욕이 작용하는데서 오는 정신적 오류라고 알

고 있다.



이러한 정복욕과 모성애적 욕구는 사람들의 중생심에서 비롯된다.

반면 청정심에는 이러한 정복욕은 뛰어나고 현명한 지도력과 카리스

마, 진취적 기상, 호연지기로 그리고 모성애적 욕구는 아가페적인 사

랑, 보편애, 우주적인 사랑으로 승화된다.  왜냐하면 청정심 자체는 모

성적 욕구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정복 욕구를 통해 정복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의 욕구는 상대적으로 남녀 서로를

끌어당겨 올바르지 못한 음욕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심의 덫에

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이라한 잘못된 욕망에 대한 여실한 통찰과 성찰을 얻

어내어 올바른 지견과 정견을 자신의 내면에 확립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의 기초는 따라서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등,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즉 팔정도의 토대 위에서 행해진다.  부처님의 위빠사나 가르침은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칭명염불 수행처럼 동등하게 팔정도에

토대를 두고 있는 매우 수승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림 -- 위빠사나선 수행법


여기서는 앞서 논급한 성과 명을 수행하는 관법으로서 위빠사

나 수행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위빠사나선의 본질을

핵심적으로 논한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현자로 알려진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한 것처럼 알아차림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김열권 법사가 말한 대로 보면 욕망과

잡념이 사라지게 된다.  심오한 통찰과 지속적인 주시를

통해서 번뇌와 잡념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의 뿌리를 뽑아버

리는 것이 위빠사나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미심쩍은 생각이 일어난다면 무엇인가 문제의 소

지가 자신의 환경과 주변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위빠사나선도 휼륭한 수행법이라고

하셨으며 다만, 이 수행법을 통해서도 아라한 위 정도까지 얻을 수 있

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안다.



왜 아라한 위까지 얻을 수 있느냐는 위빠사나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면 된다.  사실, 위빠사나선은 생각을 다듬고 정리하고 생각을 타파하

는 수행으로서 생각에 끄달리지 않는 수행법으로서 서양철학자 헤켈이

말한바대로 절대정신을 증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절대 정신이 바로

참나 또는 본래 면목이라는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사념처관이

라고 해서 신(몸), 수(느낌), 심(마음), 법(현상)을 있는 그대로

살펴서 참 자아, 즉 본 면목을 찾는데 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그토록 강조하신

수행의 요체는 깊은 삼매에 도달하는 것이다.  수행법은 이러한 깊이

있고 그윽한 삼매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휼륭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깊은 삼매를 얻도록 도와주지 못한다면 그 수행법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위빠사나선은 생각을 타파함으로써 중생심을

제거하고 내면의 공인 청정심의 본 자성을 깨어내는데 있다.  큰스

님께서는 견성의 순간을 내면의 자성이 터져나와 하늘과 땅을 뒤엎는

경지라고 설하신다.



큰스님의 견성에 대한 오도송은 매우 휼륭한 말씀이 아닐 수 없으며

가장 명료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삼천대천세계가 눈앞에서 허

물어지고 태평양의 물을 모두 마실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마찬

가지로 위빠사나선이 증위하는 경지도 바로 생각을 지멸하고 단멸하여

맑은 본 성품이 오롯이 두되에 깨어나와 내외명철이 되는 경지이다.



사실 수행을 하면 자타불이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자타불

이를 얻기 위해서는 무아를 체험해야 한다.  하지만 견성 수준에서의

무아와 아라한 수준에서의 무아 그리고 보살 수준에서의 무

아와 최고 수준인 불과에서의 무아는 그 차이를 갖고 있다.



즉, 욕계정삼매, 명진정삼매, 해인삼매, 대적정삼매 각각의 삼매의

심화 정도에 따라 자타불이의 경험을 다르게 느낀다는 점이다.  이는

견성을 얻은 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 번 읽어보면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위빠사나선은 바로 욕계정삼매를 넘어 명진정삼매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을 하기 전에, 즉 수행에 대한 초발심 이

전에는 주관적이고 주체적인 자신과 객관적이고 상대적인 타인과의

분명한 구분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위빠사나선을 하게 되면 보다 분명

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내면에 혼재하는 자신의 의식과 타인의 의식

들을 간파하게 된다.



<<능엄경>>에서는 나그네를 모두 쫓아내어 자신의 몸에 주인공이 되

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잘못된

의식과 빙의적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의 청정심을 도야하는 것

이 위빠사나선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빙의를 제거하고 불순한 영혼을 제거하는 것은 혼자서

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위빠사나선을 잘못하면 상기명, 주화입마, 청

신질환 등을 겪게 되기도 한다.  참고로, 큰스님의 바르고 청정한 칭명

염불 수행은 먼저 부처님이 주관하시는 천도대재를 지내야 한다는 것

을 명시하고 계신다.



따라서 큰스님께서 제시하는 수행법은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 하에

수행되는 매우 체계적이고 부작용이 없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자

세한 내용은 칭명염불 수행에 대한 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한편 청정심은 수행자 마음의 본체로서 진실된 것이며 중생심

은 수행자 마음의 때처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덧없는 것이

다.  즉, 청정심은 영원한 빛이라면 중생심은 어둡고 지저분한 탁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청정심과 중생심의 구분은 삿된 욕망이라는 매개

를 통해서 구분된다.  만약 우리가 아침, 점심, 저녁 공양시간이 아닌데

무엇인가 먹고 싶고,  자녀를 두고자 하지 않는데도 음욕이 일어난

다면 그것은 올바른 욕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식욕과 음욕은 순간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여실지견으로 통찰

해야 한다.  만약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1초의 순간이라도 끊

이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영구적으로 지속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청

정한 본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식욕이나 음욕은 모두 순간적인 만족이고 만족을 얻

으면 욕망은 잠둘어 버린다.  이러한 삿된 욕망이 바로 인간을 윤회시

키는 무지의 그물이요 어둠의 굴레이다.  참고로 큰스님께서도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원각경>>을 언급하시면서 음욕이 바로 윤회

생사를 일으킨다고 사자후하셨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칭명염불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불신을 얻는데 있다
 

한편, 도가에서도 정, 기, 신을 삼보라고 하여 하단

전에 위치하여 행위와 신업을 실현시키는 정을 명으로 보

고, 반면 두뇌의 상단전에 있는 신을 성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물론 정 자체가 명이 아니고 신 자체가 성인 것은 아니다.



정을 통해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신을 통해서 성을 깨우

친다.  정은 명의 원동력이며 원료라면 신은 성의 원동력이

며 원료라고 할 수 있다.



성과 명의 상호 작용이 중요한 것처럼, 즉 성품을 통해서 세상살이

를 깨우쳐가고 세상살이를 통해서 성품을 깨우쳐 나가는 것처럼 정

과 신도 정을 통해서 신을 각성시키고, 신을 통해서 정

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주로 외도로서의 고가

수행법을 해설한 것이다.



성명쌍수를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참구해 들어가면 수행자는자신의

명에 의한 행위를 통해서 세상살이를 경험하고 결국 법계의

묘리를 깨달아 나가는 것이 하나의 수행이고 반면 자신의 성에 의

한 참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회광반조하여 내면의 묘

리를 깨달아 가는 것이 수행의 또 다른 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 명은 육체를 지닌 우리의 인간 존재의 행동 반

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은 우리의 맑은 영혼이며 삶을 경험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주로 각각 수행자 자신의 신 구 의를 관찰

하고 인연과 카르마를 성찰함으로써 견성을 얻어가는 수행법이다. 한

편 칭명염불 수행은 석가모니부처님 성상의 양미간을 집중적으로

관하면서 석가모니불을 염송함으로써 깊은 집중을 통해 삼매에 진입해

가는 수행법이다.



둘 다 아즈나 차크라를 각성시키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명쌍수에서 성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인 것이다.



또한 거시적 관점에서 성명쌍수를 봤을 때 지구의 역사라는 것은 명

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를 타고 창출된 문화와 문명을

성에 비유할 수 있다.  명은 성을 깨닫기 위한 기반이 되며 성은 명

을 이해하기 위한 기반이다.



둘은 상부상조이며 불가분이고 상호 회통되어 있는 것이다.  고대 요

가에서는 문화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문화는 성

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은 지구의 생명을 의미하며 인류의 영혼을 의미한다.



한편 역사가 없이는 결코 문화와 문명이 창출되지 못하는 것처럼 문명

과 문화가 없는 역사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의 개체로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전 과정이 의미있게 갈무리되기 위해서는 반

드시 의식이자 영혼인 성을 각성시키고 깨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유인즉 인생의 고락과 애환이 모두 진귀한 가르침으로서 이 성

에 갈무리되기 때문이다.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도 최종적으로 불과를 증

위하게 되면 사바세계에서 몸을 버리고 열반을 하게 될 때 4대 영체가

부처님 세계에 있는 자기의 불신과 하나로 계합한다고 사자후하였

다.



물론 큰스님의 사상의 폭과 깊이는 성명쌍수를 보다 고차원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훨씬 광대하고 심오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칭명염불 수행법의 이론적 토대 - 성명쌍수 
 

수행자가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한 든든한 이론적 토대를 얻기 위해

서는 성명쌍수에 대해서 이해하면 좋다.  흔히 동양 철학과 동양 수행

을 하는 수행자라면 고대 성현들로 부터 전승된 성명쌍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성명쌍수란 성(성품)과 명(생명, 삶)을 함께 공부하라는 것을 학

인에게 당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이란 성품을 말하며, 성품은

마음의 자성을 말한다.  이는 또한 불성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목숨, 즉 생명을 말하며, 더 포괄적으로는 삶

이란 점에서 성품을 공부하는 것이 명을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적으

로 영원하게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으로서의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 내재한 법리와 인연법 그리고 연기사상

을 통찰 및 철견하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성으로서의 자성을 닦는 것이 명으로서의 삶

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성과

명은 함께 닦아야 한다는 성명쌍수를 성현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힌두의 철학 사유에서도 본질 또는 존재를 공부하는 것과 인

연 또는 관계를 공부하는 것 두 가지를 나눈다.  어느 것이 우선이고

어는 것이 차선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을

통해서 내면의 자성 세계로 회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내면과 외면은 뻥 뚫려 내외명철이 된다.  이 내외명철

이 확연히 인식되어 자신의 인식 구조와 존재론적 세계가 하나가 될

때 내외의 벽은 허물어지고 완전히 허공과 같이 충만한 공을 철견

하게 된다.



인도의 쿤달리니 요가에서도 쉬바로서의 정적인 성품 의식과 샥티로

서의 동적인 육체 에너지를 이야기한다.  쉬바는 성에 해당하며 샥

티는 명에 해당한다.  성은 관조적 힘이자, 주시적 힘이자, 관찰

자로서의 힘이다.  명은 행위적 힘이자 삶의 영위자로서의 힘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불가의 팔정도에서 정견, 정사유 등은 쉬바 의식

을 도야하는 바른 길에 해당하며 정업, 정정진 등은 샥티 힘을 도야하

는 바른 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은 우리의 마음을 의미한다면 명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신 구 의 작용을 의미한다.  성은 체요 명은 용인 것이

다.  21세기 과학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시스템을 비유로 들면 프로그

램들 하나하나의 실체가 바로 성이요 그 프로그램의 행위 또는

작동이 바로 명인 것이다.



체와 용이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성명도 불

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마음에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염불선이나 위빠사나선이나 모두가 일차적으로 성을 도야하

는데 있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은 성을 도야하는 것을 넘어서 부처

님의 가피와 위신력으로 불신을 얻는데 있다.  큰스님의 법 세계에

서는 성이라는 것은 작은 불씨라면 불신은 태양으로 비유할 수

있다.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 


인간이라는 존재는 중생심이 있고 삼독심이 있어 잡념과 번뇌가 수

시로 치성하게 일어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잡념과 번뇌는 그리

스 신화의 메두사 머리카락처럼 하나하나가 뱀의 형상을 지닌다.



물론 이는 비유이지만 번뇌가 뱀이라는 비유는 많은 수행자들 사이

에서 이야기되어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의 뱀의 형상이 잡

념이요 번뇌다.  그래서 이러한 미혹한 생각들에서 비롯되는 뱀을 모두

소거하는 것이 수행자의 임무이다.



수행을 열심히 해나가면 과거에 지었던 업장들이 녹아 내리고 과거

에 저질렀던 망상과 타인에 대한 증오심들이 하나하나 탈각되어 가면

서 마음은 순수하고 청정해진다.  반면 이렇게 과거에 물들었던 잡념,

번뇌, 망상, 중생심, 증오심, 삼독심 등등이 모두 지혜의 눈에 형상화

되는데 이때 뱀의 형상으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자신의 업

장을 의미한다.



칭명염불 수행을 지속해 나가면 부처님께서 가피와 위신력으로 항상

수행자를 보호해 주시며 결국 뱀의 형상으로 보이는 중생심의 의식(에

너지)이 사라지게 된다.  사실 번뇌와 잡념, 그리고 망상을 포함한 일체

의 중생심은 마귀들의 농간에 의해서 나타나는 불순한 의식이다.  이러

한 불순한 의식을 인간 중생의 두뇌에 심어서 그것을 먹이로 먹고 살

아가는 지저분한 의식체가 마귀라고 할 수 있다.  마귀는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하며 살기가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칭명염불을 하는 도중에 외부 경계에 부딪혀 망상

이나 잘못된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것에 끄달리지 말고 항상 청정한 마

음으로 '석가모니불'을 열심히 억념, 즉 간절한 마음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하여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행을 하기 전에는 지혜의 눈이 막히어 잡념들이 보이지 않다가,

칭명염불을 지속하면 잡념들이 지혜의 눈에 형상화된다.  그 잡념들이

바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염불 수행자의 지혜의 눈에 보이곤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뱀은 실체적인 것이며 마구니들이 그동안 수행

자의 의식을 잠식하여 번뇌와 잡념들을 주입시켜 놓았던 것들이다.



동시에이러한 번뇌와 잡념들은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수행자를 괴

롭히기도 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이지만 매우 실제적이

며 번뇌와 잡념의 실체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염불선 수행자는 이러한 마구니들의 농간에 휘말리지 말고 지

혜의 눈으로 잡념과 번뇌들을 소진시키도록 정진해 나가야할 것

이다.  수행 도중 아무리 힘든 경계가 나와도 이겨내지 못할 경계는 없

다고하였다.  즉, 극복할 수 있는 고통만 주어진다는 것이 우주 대자

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혼자서 이겨내려고 하지말고 부처님

의 명호를 지성으로 염송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생각을 단멸시키는 것이 불가의 수행이라는 것은 익히 많은 고

승들에 의해서도 주창되어 왔다.  스즈끼 순류 선사도 <<선심초심

>>이라는 책에서 모든 문제가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맑은 마음을 어

지럽게 하는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생각을 지멸시키고 본 성품을 밝히는 것이 모든 수행의 일

차적 관문이라면 어려운 코스를 돌아서 갈 것이 아니라 쉬운 길을 선

택하는 게 지혜로운 수행자가 아닐까?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빠른 시일 내에

거의 부작용 없이 공과를 증득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는 것을 우

리는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재차 강조하지만 큰스님이 알려주신 칭

명염불 수행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기 때문이다.






  잡념과 번뇌의 실체


먼저 염불이나 위빠사나선 등이 불가의 수행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잡념과 번뇌의 실체를 규명하고 설명하기에 앞서 수행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수행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단도직입적으로 수행이란 글자

뜻 그대로 행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극락정토의 중품 보살이신 공자님께서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고 하셨다.  먼저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신

이란 행을 의미한다.



먼저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게해야 하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머리 속으로 불교 공부를 위한 지식을 쌓는 것보다도 행을 닦

아 나감으로써,  즉 수행을 통해서 몸으로 직접 불교 공부를 증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만약 지금 우리 불제자들이 수행정진

이 조금 힘들더라도 그것이 행을 닦음으로써 불제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확립하고 결국 우리들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 맑고 견고하게 만

드는데 일조 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는 수행 또는 과 수심의 공조라고 할 수 있다.

즉, 몸을 정법에 맞추는 수련과 마음을 눈부시게 그리고 청정하게

만드는 수련이 함께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동서고금의 모든 수련이 먼저 몸 공부를 통해서 마음 공

부로 나아가는 것이라 알고 있다.  그리고 진실된 지혜는 부처님의

가피와 조응하는 몸 공부와 마음 공부가 겸비될 때 얻어진다고

본다.



한편 집에서 하는 효도행은 우리 불제자에게 더없이 크나큰

수행이라고 부처님과 큰스님께서는 강조하신다.  수행이라고 반드시 호

흡 수련을 하고 좌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하루하루 바르게

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

가 수행이며 특히 부모님께 효도행을 다하는 것은 바른 삶을 영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아라한이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효도행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

신다.  그러므로 효도행을 자신을 닦는 수행으로써 생각하고 항상 부모

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염불을 위시한 위빠사나선 등을 포함한 모든 불가의 수행은 억겁 동

안 내려온 잡념과 번뇌들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

다.  수행을 왜 하냐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 마음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일체의 잡념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견성과 깨달음의 견처에 목표를 두고 수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다만, 수행은 단순히 잡념과 번뇌만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억겁 동안 내려온 업장, 습기, 악연(원결) 그리고 탐 진 치

삼독심 모두를 지멸시키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견성을 넘고 아라한위를 넘어 보살위에 도달할 수 있

고, 그리고 여기서 더 정진해야 불과를 증위할 수 있다고 큰스님께서

사자후하신다.  두 분 큰스님의 법 세계를 조용히 관조해 보면 불교 수

행의 궁극적 종착지는 바로 연화장 세계에 불신을 얻어 불과

를 증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불가의 수행들 중에 위빠사나선, 화두선(간화선), 묵조선, 염불 등이

있는데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칭명염불만이 독보적인 수행 체계를 지니

고 있어 보살과는 물론 잘하면 후생에 언젠가 불과를 증할 수 있다고

하신다.  여기서는 견성, 즉 깨달음의 한계 내에서 잡념과 번뇌를 타파

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한다.



무릇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므로 수행을

하게 되면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칭명염불의 수행법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하신 칭명염불 수행법

은 가히 미증유의 수행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대정각을 이루시고 45년 간의

중생 제도 후 멸도하신 이래로 지금까지 불과를 증위하신 분이

수보리 존자, 사리불 존자 그리고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

님 네 분밖에 없는데, 이 모든 분들이 칭명염불 수행에 근거

를 두고 수행을 하셨기 때문이다.



불과를 증위하면 얻게 되는 공능에 대해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자세히 나오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자 한다.  다만, 불

과를 증위하기 위해서는 한 생각 집중하여 일념삼매에 증입해

들어, 무엇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아야 한다.  그 점

을 큰스님께서는 역설하고 계신다.  이유인즉 불가에 귀의, 귀명한 사람

이라면 엄연히 불교의 교주는 석가모니부처님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

로 의당 석가모니부처님을 마음 깊이 간절하게 찾는 것은 당연한 수행

자의 도리일 것이다.




칭명염불 수행은 불과를 증위하는 근거


그런데 큰스님 말씀대로 오늘날 불교 수행 문화에서 왜 석가모니부

처님을 전면에 내세워 수행을 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본인은 여러

곳의 절을 찾아다녔지만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는 것을 익히 듣지 못했

다.  관세음보살님을 찾는 곳이 너무나도 많은 실정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아미타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큰스님과 같이 불교의 교주로서 석가모니부처

님을 무엇보다도 존숭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삼천대천세계의 총교주이시고 삼계의 법왕이신 석가모니부처님

을 간절히 염하면 그 어떤 불보살님보다 거대한 가피와 해아릴 수 없

는 위신력을 받는다는 것은 올바른 정신과 양식을 갖춘 불제자라

면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친히 큰스님께 하사하신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법의 위대함을 논하기 전에 수행법의

근저를 이루는 잡념과 번뇌의 실체, 성명쌍수등에 대해서 논

구하고 그 다음 불가에서 전해 내려온 대표적 수행법인 위빠사나

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로 석가모니부처님 재세시 근본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에는

크게 첫째 위빠사나선과 둘째 염불이 있었다.  따라서, 위빠사나선

수행법을 살펴보는 것은 불제자에게 의미있는 공부가 될 것이다.  그리

고 티베트의 밀교 수행법을 간략히 언급하고 화두선 수행의 병폐에 대

해서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또한 염불선과 현지사의 칭명염불 등을 아우르는 염불 수행에 대한

고찰을 하고자 한다.



염불에 대한 자료가 워낙 부족하여 다각도로 염불에 대한 자료를 구

하려고 하였으나 어떤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나 다행히 큰스님께서 염

불에 대한 글과 자료를 주셨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의 박상수님이

쓰신 <염불 수행의 타력과 자력 연구>가 본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기쁨을 얻었다.  큰스님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리며 박상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붓다 삼신설과 불신사상을 진작하고
흥성시키는 초석 

수많은 불교 경전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는 부처님의 삼신설

을 왜 오늘날의 우리 불제자들과 수행승은 외면해 왔는가?  정말 큰스

님이 아니셨다면 영영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

다.  단지 메마르고 희미한 삼신설은 글자만이 빛 바랜 경전에

새겨져 후손에게 전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참으로 불교의 존망과 사활이 걸린 위기에서 큰스님께서 출세

하셔서 과감하게 붓다의 삼신설과 불신 사상을 진작시키고

흥성시키는 초석을 놓으셨다 할 수 있다.  이 점 우리는 다시 한

번 두 분 큰스님께 뜨거운 눈물로써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불신사상은 엄청난 것이며 가히 큰스님이 아니고서는 필

설로 언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말씀하신 불신사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불신을 얻지 않고서 붓다(부처님)가 되었다고 한

다면 그것은 사이비이며, 외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능엄경>>

에도 완전한 붓다가 되기 위한 과정과 수순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역력히 불신을

얻어야 붓다가 된다고 사자후하셨다.



우리는 불신을 일개 법성이나 자성과 혼돈해서는 안 되며 불신

이 없이 부처라고 하는 것은 망언임을 알아야 한다.  여하튼, 우리는

큰스님을 모범적 전형으로 삼고 무한한 동경과 향상심을 가지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말씀하신 것처럼 만족하지

말고 끝없이 추구해야 한다.



부처님 세계에 자신의 불신을 얻를 때까지 말이다.  수행을 통해서

만족한다는 것은 자신의 수행에 한계를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부는 끝이 없는 것이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이 험한 사바세계에 오신 두분 큰스님께 가슴 속 깊이 감

사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분 큰스님께서 불교사에 공헌하시고 21세

기에 이루신 빛나는 업적은 찬란하게 우주 법계와 부처님 세계에 기록

될 것이리라.  끝으로, 이 험한 사바세계에 오셔서 불교사상에대한 웅

흔한 사자후와 미증유의 원대한 가르침을 설해주시고 하루하루 영혼체

정화 및 천도대재를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두분 큰스님께

지성으로 오체투지를 드림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  


부처님을 우리의 영혼의 의사라고 굳게 믿는 마음, 즉 신심을

가진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병이 나아 무량한 광명과 지혜 그리고 자비

와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믿음이 굳건해 졌다면 이제 부처님께 마음과 목숨을 바쳐 귀의 귀

명하고자 해야 한다.  큰스님께서 전해 주신대로 앞으로 금생이 다하고

다음 생이 다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오직 우리 석가모니부처님께만

"이 목숨, 이 몸뚱이, 이 마음 다해서 귀의 귀명하겠나이다."라고 마음

깊이 뼈 속에 새겨야 한다.



독을 먹어서 제 정신이 아닌 우리 전부를 부처님께 맡기고자 하는

결연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

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어떠한 일을 하든 직심과

강한 마음의 자세 그리고 물러남이 없는 정진이 필요하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하는 필사적이고 사생결단하는 자세

로 부처님께 귀의 귀명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자신을 믿고 따르

는환자들을 막거나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으시겠는가?  우리는 환자

로서 귀의 귀명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자비와 지혜와

온갖 방편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 다음으로 참회해야 한다. 왜 부처님께서 이토록 힘든 사바세계에

오셔서 고행을해야 했단 말인가?  우리는 가슴 깊이 되새겨 봐야 할

사항이라 생각한다.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서 이

토록 힘든 사바세계에 오셔서 우리 어리석은 불제자들의 영혼을 치유

하셔야 한단 말인가.



진실로 이에 대해서 깊고 진지한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모두는 깊은

감사의 눈물과 목메어 울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억

겁을 두고 지은 죄를 참회해야 한다.  어는 훌륭한 현지궁 현지사 신도

님 말씀처럼 자신이 태어난 것을 증오하거나 자신을 학대한 것, 그리

고 부모님께 잘못한 것, 형제 자매에게 잘못한 것에서부터 가까운 이

웃에서 타인에게 잘못한 것 등을 낱낱이 참회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참회하는 순간 뜨거운 감격의 눈물도 나고 삼독심을 녹이는

맑은 콧물을 흘릴 정도라면 항상 우리를 지켜봐 주시는 부처님께

서 그에 대한 응분의 도움을 주신다는 점을 깊이 마음 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누구나 부처님에 대해 감사하고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성심에

탄복하고 뜨거운 눈물과 맑은 콧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경배하고 고귀

한 영적 스승이신 부처님께 귀의, 귀명 한다면 분명 부처님은 도와주

시리라.



참회는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석가모니부처님, 이 몸뚱이는 알

고 모르고 지은죄가 너무 너무도 많습니다.  전생에도 그랬고 억겁을

살아오는 동안에 너무 너무도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진실로 참회합니

다.  소명해주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깊이 있는 반성과 사죄의 마음으로 부처님께 매달리면 부

처님께서는 우리 불제자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갸륵하게 생각하실 것이

다.  물론 타인에 대해 저지른 죄들에 대한 참회가 어려우면 부처님의

거룩하신 경전과 가르침을 통해서 깊이 감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도

죄가 사해진다고 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약을 제공해 주시니 어떻게 해서든

지 자신에게 맞는 약을 선택해서 꾸준히 복용해야 할 것이다.  즉,

자신의 중생심과 탐 진 치 삼독심에 물들은 영혼체를 정화하

기 위해 꾸준히 부처님을 믿고, 귀의 귀명하고, 참회하고, 감사하고,

감탄하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경의를 표하며 숭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는 강요가 아니라 우리 불제자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야 될 것이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부처님을 깊은 마음에서 지극한 존경심을

갖고 우러러 보며 칭송하는 일인 것이다.  절실히 간절하게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의 세계를 동경하는 불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약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 불제자들을

살펴봐 주시고 보살펴 주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발원해야 할 것이다.



"정말 지금부터 열심히 석가모니부처님을 부르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쁜 일 하지 않고 열심히, 열심히 좋은 일

하고 불쌍한 이웃을 돕고, 그리고 큰스님의 불사를 돕겠습니다.  그러니

제 죽을 때 잠자듯 편히 가도록 해주소서(죽은 복이 큼) 그리고 다음 생

에는 꼭 정법을 만나 큰 스승을 만나서 기어이 윤회를 벗어나고 싶습

니다.  부처님 그리 이끌어주소서."라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발원을 꼭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석가모니부처님

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정법을 펴시고 다시 2500여 년이 흐른 뒤 남섬

부주 대한민국에 두 분의 큰스님을 붓다를 만들어 주신 부처님께 감사

드려야하며 큰스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절을 올려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죄가 많고 악업이 많은 우리들은 부처님을 믿고, 우리를

항상 일체 처, 일체 시에서 돌보아주시는 부처님께 무궁한 감사를 표

하고, 부처님에 대한 끝없는 찬양과 찬탄 그리고 예찬을 하며 진심에

서 우러나오는 경의, 경배를 표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부처님께 마음

과 몸을 바쳐 귀의하고 귀명해야 하며 부처님의 거룩하신 자비에 울고

또 울고 더 나아가 통곡함으로써 감사의 눈물로 우리의 영혼을 정화해

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양에서 고대로부터 전해온 군사부일체의

주인 되시는 분이 바로 우리 부처님이시라는 것을 명각해야 할 것이

다.  즉, 부처님은 우리 영혼의 정의로운 임금이시요, 영혼의 자비로

운 스승이시고, 영혼의 거룩하신 아버님이시며 그리고 여기에 더

하여 영혼의 성스러운 의왕이시라는 점을......





부처님께 귀의 귀명, 참회 발원하라


먼저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부처님께 귀의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부처님께 귀명해야 하는가?  우

리 불제자는 먼저 이러한 화두, 즉 문제 의식부터 하나하나 해결해야

한다.  그냥 믿어야 하니까 믿는다는 말보다는 전체적인 식견과 합리적

이해 그리고 철저한 지혜로운 안목을 통해서 귀의 귀명의 의미를 되

새겨 봐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귀의 귀명해야 불보살님의 가피도 받게 된다는 사실이

다.  성중님이 도와주고 호법신장님이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강제

적인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화두는 잘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영적 스승이신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아이와도 같은 우리는 크게 위

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법왕이신 석가모니부처님과 불과를 증위하신 두 분 큰

스님께 무한한 감사와 경배를 올려야 할 것이다.  많은 휼륭하신 신도

님도 체험하고 있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의 크나큰 은혜와 가피 그리고

두 분 큰스님의 이 험한 사바세계에서 우리 불제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구제하시는 데 대해서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부처님이 얼마나 지극한 뼈를 깎는 정진 끝에 대성과인 불과

를 증위하시고 두 분 큰스님께서 얼마나 지극한 정진으로 불과를 증위

하셨는 지를 상상한다면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을 향하여 뜨거운 눈물

을 금할 길이 없다 하겠다.  아니 오열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법화경>>에서 전하는 것처럼 불과를 증위하지 못

한 우리들 모두에게는 다소간의 차이지만 독이 묻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께서는 갖

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우리를 돌보아주고 계시다.



부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자비의 청정한 에너지, 즉 약을 먹어

야 한다.  그런데 아들로서 우리가 의사이신 부처님을 믿지 않으면 어

떻게 약을 먹을 수 있겠는가?



먼저 부처님을 믿고 그 분의 가르침과 주의사항을 따라야 할 것이

다.  이 약을 먹으면 홀연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데, 즉 견성하여 깨

달음을 얻으면 그럴 수 있는데 여기서 중단하지 말고 계속 약을 먹어

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꾸준히 약, 즉 부처님이 주시는 자

비와 지혜의 청정한 에너지를 복용하면 언젠가는 병이 낫게 될 것이라

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 병이 고쳐진 아라한과나

좀 더 고쳐진 보살과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바램이

시다.



완전한 치유가 되어 불과를 증위할 때까지 다겁 생을 두고 끊

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왜 우리가 독을 먹었는지 물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

는 독화살 비유 이야기처럼 그 독을 먹은 이유를 알려면 그러는 동안

결국 우리는 독이 퍼져 죽게 되기 때문이다.





자재 만현 큰스님의 불의 삼신설 


넷째, 자재 만현 큰스님의 '불의 삼신설'이다.  위에서 든 것

같이 불과를 증한 붓다만이 법 보 응 삼신을 구족한다는 경

전적 근거는 <<금광명최승왕경>> 등에 있다.



불교사적으로 보살이라 존칭을 부여받은 바 있는 인도의 마명, 용수

큰스님과 몇몇 중관의 논사들 그리고, 무착, 세친..... 등 유가행 학파

의 조사들의 연구 논문인 <<대지도론>> <<섭대승론>><<보성론>>등에

의해 불신관은 삼신설로 정립이 된다.



1)  자재 만현 큰스님은 다음 같이 불의 삼신설에 대해 법문하신다.



번신(불)은 만유의 본체인 여여한 이 (법신)에 우주의 본

질 실재에, 불지에 오른 수행자의 보신불의 여여의 지가 합일

한 우주적인 광명(자기 원만보신의)을 법신불이라 한다.



(원만)보신은, 보살의 위에서 무량겁을 두고 어려운 수행 (무주상 보신

-육바라밀, 보현행원)을 한 결과로 비아를 털어 버린 수행자의 영아

가 청정을 넘어선 빛(광도와 강도가 햇빛 섬광보다 더한 안팎이 드러나 하나

된 아름답고 영롱한 무량광)으로 자라면서, 이루어진 모든 영구성이 있는 유

형의 불신, 지복의 몸을 말한다(바로 보신에서 응화신, 분신, 변화신을 냅니다).



응(화)신은 중생의 마음이 탁하고 어두워 광명으로 이루어진 불신을

보지 못해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불신으로 (a)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음 (b)원만보신에서

신발이나 옷, 머리, 때로는 성별까지 바꾸고, 방사하는 빛을 흡수해서

사바세계에서 보살의 모습으로 활동하는 변화신을 말한다.  화신은 불

신이 전제되고 따라서 불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2)  큰스님은 법설하시기를 법신불은 우주적인 몸으로소 분별을 떠나

있고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있는 광명 지로서의 존재이고, 보신불

(원만보신)은 불지에 오른 이만 볼 수 있으며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삼

명, 육통, 삼신, 사지, 대자대비, 복덕..... 등 일체에 자재하는 삼매력

을 지닌 신격적인 지복의 존재라 하시고 인행시 서원에 따라 보품(계

인)을 지니신다 하신다 (문수보살-칼, 관세음보살-버들가지, 지장보살-석장, 약사

여래불-약병...등).



3)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나투실 때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부처님들

이 각기 법신불이 되어 이 비로자나불 하나의 부처님으로 흡수된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능력은 하늘 창조주(창조주란 없습니다)적 능력을

지니신다.  석가모지부처님의 청정법신 이름이기도 하다.



4)  불과를 증한 이는 불신(원만보신)을 지닌다는 것, 법  보 화 삼신

을 갖춘다.  법신 보신 응(화)신은 하나이지만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각

각 달리 활동한다.



5)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염부제(남서부주)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고

수미산정에 올라 도리천 제석궁으로 가서 법을 설하고, 다시 보리수와

제석궁을 떠나지 않고 야마천궁으로 가서 법을 설하시고, 또 다시 위

여러 곳을 떠나지 않고 도솔천궁으로 가서 법을 설하신다.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부처님의 위대하시고 희유한 신력을 확인해야

한다.  이때는 부처님의 원만보신이 보리수 하 석가모니불 자기 색신으

로 합일해서 법을 설하시고, 그 색신(응화신)은 그 자리에 놔두고 수미

산정 제석궁으로 나아가신다.



이때 부천님은(원만보신)은, 물론 그 안에 4 영체를 흡수해 계합한 상

태이다.  제석궁에서 법문이 마쳐지고 다시 야마천궁으로 가서 법이 설

해질 때 역시 보리수 하 그리고 제석궁의 부처님(화신)은 그대로 놔둔

다.  붓다의(원만)보신은 이렇듯 백천만억의 화신을 낼 수 있다.



이 얼마나 부사의한 장관이 아니랴! 세계 어는 성인이 이러한 장면

을 연출한 적 있는가?  삼신을 구족한 붓다들은 이것이 가능하지만 최

초 불이요 붓다 중 붓다이신 석가모니불의 위신력은 특히 괄목하다 할

수 있다.



삼신을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적정삼매를 자재하는 데서 오는 것

이지, 신통이 아니다(선불교의 육조 혜능 조사에 의해서 주장된 인간 정신 내면 자

성 속, 마음의 채용을 불의 삼신으로 해석함은 붓다의 참 경계를 전혀 모르는 법설이라

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다섯째,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설과 힌두교의 브라마

비슈누 쉬바의 삼신일체설은 불가의 삼신설과 전혀 다르다.  우주

법신(부라마 비슈누 쉬바)에서 화신은 나올 수 없다.  원만보신에서 (응)화

신이 나온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의지가 있고, 욕구가 있다는 것은 중생이며 그곳 (보신, 하느님)은 대자

대비 원력과 지혜와 위신력만이 존재한다.  법신은 무시무종이니 우주

를 내고 유지 상속하는 이법일 뿐이다.



여섯째, <<화엄경>> 삼현위에서 보이는 불신은 화신(분신)불이

고, 초지에서 십지 보살이 볼 수 있는 것은 붓다의 변화신이

며, 불지에 든 붓다만이 원만보신을 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 자재

만현 큰스님의 법문이다(오직 십지에 오른 보살들만이 보신불을 볼 수 있다는 것

은 몇몇 논사들 의견임을 철언한다).



앞에서 소상히 밝힌 바와 같이 만현 큰스님께서는 삼신설은 인도의

무착, 세친 큰스님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하셨다.  그 다음으로는 <<보성

론>>의 삼신을 들 수 있다고 하시며 여기서는 불신 곧 원만보신은 무

량광, 즉 억종광, 백종 오색광, 열반광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맞다

고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금광명최승왕경>> 제二권 <3 분별삼신품>, 용수의

삼신관, 인도의 마명과 용수 큰스님과 몇몇 중관의 논사들 그리

고 유가행 학파 기타 논서 등 붓다의 삼신설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역대 불가의 최고의 큰스님들과 그 분들의 주저들을 모두

꿰뚫어 보시는 탁월한 안목과 식견을 겸비하셨다는 점에 필자는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중의 불서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득도한 수행승들도 올바르게

삼신설과 불신사상에 대해서 논하는 바가 없다.  비록 논한다고 해도

메마른 지혜로서의 사변적 지식에 불과하다.



 

 삼신을 구족한 붓다는
오직 불교에서만 출세


또한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자후하셨다.

"붓다들의 현신했을 때의 모습은 해탈신이기에 그렇겠지만

보살의 그것과도 하는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붓다의 음성 역시

그러합니다.  일거수일투족이 자비롭습니다.  보신의 미간, 눈, 입, 손바

닥 등 열 군데서 '빛'을 방사할 때에는 녹색이나 무색 광명같이 단색을

방광할 때도 있고, 백종 오색광명을 놓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억종

광명을 방사할 때도 있습니다.



붓다께서 방광사히는 빛은 마왕 파순이나 하늘 마는 물론 귀신들도

모두 무서워하는 대상입니다.  탐  진  치 삼독이 녹아버린 성자의 마

음 빛이기에 악심이나 사악한 기를 물리치고 녹이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량광은 영롱하고 청정하며, 내외명철합니다."



중요한 점은 마왕과 마구니들도 부처님의 무량광 앞에서는 꼼짝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사실이 아닌가.  마구니와 외도들

의 세력에 시달려봤던 수행자라면 부처님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되

고 고마운지를 알 것이다.



부처님이 계심을 믿고 부처님의 위신력이 이렇게 희유하며 거룩하다

는 것을 절실히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그만큼 더 정화되

고 맑게 치유된다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의 위대한 점은, 불교에서는 이러한 붓다가 나온

다는 점입니다.  삼신을 구족한 붓다가 오직 불교에서만 출세합니다.  실

제로 어는 대성자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다면 감격의 눈

물을 흘릴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여기서 나는 말합니다.  무

아 속 절대 초월의 세계가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는 오직 불과를 이룬

붓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세계이며 우리 교주 불세존께서 최초로 발견

하셨습니다."라고 사자후하신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정말 감사에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우주에 불교가 없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어

두운 세력에 휘말리게 될지 감히 상상만 해도 두렵지 않을 수 없다.



큰스님께서는 법문 도중에 말씀하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크게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열거하셨다.



첫째 붓다를 내실 수 있는 큰 지혜와 힘, 둘째 중생의 지중한 업장

을 소멸할 수 있는 삼매력, 셋째 지옥, 아귀, 축생(악도) 중생을 건질

수 있는 위신력 넷째 땅의 일부, 전부까지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길 수

있는 부사의한 큰 힘 등을 지니신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힘이 있으나 밀장이라서 공개할 수 없다고 하

셨다.  큰스님 말씀대로 붓다가 나오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는 유일무이

한 종교라는 점을 감사히 생각하고 항상 부처님을 억념하면 그에 상응

하여 부처님께서 우리를 호념하신다는 것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항상 부처님을 억념하면, 상응하여 우리를 호념

참고로,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9판의 부록

에 '무량광! 불신을 이루는 빛'에 대한 서술 내용을 여기에 싣는다.



1.  미래제가 다해도 없어지지 않는, 따라서 일찍이 생긴 적도 없는

불생불멸의 빛 그래서 훼손 될 수 없다.



2.  그 빛은 오염될 수도 없다.  불구부정인 것이다.



3.  지극히 청정하고,



4.  한없이 예쁘고 아름답다.



5.  안팎이 드러나 영롱하기 그지없다.



6.  어던 빛보다 차원이 다르게 밝다.  중생이 본다면 가루가 될 것이

다.  일생 보처의 보살도 선정에서 보지만 실명할 정도다.



7.  천둥 번개 칠 때의 섬광과도 비교 안 되는 강도이다.



8.  천만억의 빛깔로 되어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백종 오색광, 억종

광이라 한다.



9.  한량없이 방사(방광)해도 끝이 없어 무량광이라 하겠다.  삼천대천

세계를 감싸고도 남는다.



10.  땅 속이든 물 속이든 마음 속이든 삼천대천세계 어디든(지옥이든

천상이든, 윤회 안이든 밖이든) 비친다.  그러니 자연의 빛과도 다르다.  이미

이 빛은 입자가 아님은 물론이다.



11.  중생의 지중한 업장을 소멸도 하고,



12.  그래서 신통력을 지닌 빛이요.



13.  물 속 깊이, 땅 속 깊이 숨어버린 영악스런 무주 고혼을 잡아

낼 수 있기도 하는 그런 지혜 광명이요.



14.  백천삼매, 대적정삼매를 들 수 있는 부사의한 빛이요.



15.  중생이 그 앞에 있는 빛인데도 이를 볼 수 없는 신비스런 빛이

요.



16.  일체 자재한 신력을 지닌 빛이요.



17.  사바세계를 들어 던져 버릴 수 있는 큰 힘을 지닌 빛이요.



18.  외도를 조복받는 빛이요(참 진이 남아 있는 외도는, 두더지와 같이 그들

은 햇빛무량광에 결정적으로 약하다)



19.  부처님들은 이러한 청정 무량광(모든 빛-자성광이나 극락정토의 빛의)

으로 불신이 이루어져 있으므로 부처님은 32상 80종호를 구족하고

삼신, 사지, 오안, 자비, 복덕 등 18불공법을 구족하게 됩니다.





 불신에 대한 문헌학적 고증

큰스님께서는 <<대반열반경>>을 원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대열반광(부처님의 광명)이 중생의 털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불

도를 이루리라' 이르신 대목과, '만약에 부처님(불신)을 보는 자는 곧 일

체 번뇌가 다 끊어지고 부처님 말씀을 듣는 자는 반드시 불도를 이루

이라'하신 말씀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께는 부처님의 대승경전 외에도 수많은 기라성 같은 대선지식

께서 집필하신 불서와 논서를 인용하시면서 불신사상과 붓다 삼신

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하신다.  큰스님의 불신사상, 즉 붓

다의 삼신설에 대한 대의를 받아 정리한 내용을 소개한다.



첫째,  <<금광명최승왕경>> 제 二 권 <3 분별삼신품> 을 보면, 부처님께

서 허공장 보살에게 " 모든 부처님에게 세 가지 몸이 있다.  화신

응신  법신이 그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셨고, 이러한 "세 가

지 몸이 구족하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거두어준다"고 이르셨다.



"가지가지 몸을 나타내는 것이 응신이라 하고 오직 여여와 여여의 지

혜만이 있는 것 그것을 법신이라 한다"고 하셨다.



법신은 앞의 두 몸의 근본이 되며 "부처님은 큰 삼매의 힘으로 온

갖 선정, 대자대비, 온갖 다라니, 온갖 신통, 온갖 자재를 나타낸다.  큰

지혜의 힘으로 열 가지 힘, 사무소외, 네 가지 걸림없는 변재,

280(18)불공법.... 온갖 희유하고 생각할 수 없는 법을 모조리 나타낸

다."고 하셨다.



이러한 전거로 미루어보면 부처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알 수 있다 하겠다.  견성한 도인과 깨달음을 얻은 수행승들은 과연 이

러한 부사의한 능력과 힘을 구족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용수의 이신관을 거론할 수 있다.  석존 재세시에는 인간

석가모니불 이외에는 아무런 불신관도 없다가, 석존께서 열반에 드신

후 경전이 결집되면서 <<아함경>>에는 육신불, 그의 교법을

뜻하는 정도의 법신불의 이신관이 나오게 된다.  불멸 후

6~7백년 경에 태어난 용수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대지도론>>

에는 부모생신과, 단순한 교법의 의미를 훨씬 벗어난,

언제 어디서나 여러 가지 몸, 여러 가지 방편을 내어 시방 중생을

제도하는 근원적 존재이며, 항상 광명을 내고, 항상 설법하는 존재인

무상의 혜인 법성신의 이신관이 나온다고 하셨다.



이 또한 큰스님의 지혜가 아니면 경전으로부터 감히 초출할 수 없다

하겠다.  사실 오늘날 견성이나 깨달음도 제대로 구족하지 못한 수행승

이나 불제자가 어디 이러한 지극히 미묘한 경전 내용을 알려고 하겠는

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이제 큰스님의 불신 사상과 붓다의 삼신설 사상은 복원

되어야 하고 불제자들 간에 크게 추앙되어야 할 사상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유가행 학파 기타 논서..... 제 논사의 주창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무작은  <<섭대승론>>에서 모든 부처님들

은 진신  보신  응신  세 몸을 갖춘다라고 하였으며, 세친의 <<대

승장엄경론>>에서는 불과를 증한 모든 붓다님들은, 자수용신, 타

수용신,  변화신의 삼신을 구족한다고 하였다.  4C말 경 인

도의 논사  견해의  <<보성론>>  즉,  <<구경일승보성론

>>에는 모든 붓다님들은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을 구족한다고 주찰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의 소론도 거룩하고 희유하신 붓다의 삼신 설명이 너

무 관념적일 수밖에 없어 불교학을 공부하는 이들로서는 이해하기 어

려운 게 사실이었다.  큰스님의 이 부분에 대한 법설은 체험하지 않고

이리 말할 수 없을 만큼 극명하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10회에 걸친 TV 법문, 현지사 그리고

부산분원에서 정기적으로 설법하신 내용 등을 들어보면, 불의 삼신에

대한 법설은 너무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영산 당시 아난이 아니고서는, 불과를 증하지 못하고서는, 자기 불신

이 없는 이로서 그 누가 만고에 비밀이요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삼신

설에 대해 이리도 분명하게 자신 있게 설할 수 있겠는가?



11세기 티베트의 전설적인 수행자인 밀라레빠도 "붓다라면 삼신

을 구족해야 붓다"라고 했지만, 그의 <<밀라레빠 10만 송>> 어디를 보

아도 원만보신에 관해서 만은 실제로 보고 체험하여 법설한 것으로 보

이지 않는다.



참고로 선불교의 삼신 해석을 간략히 소개한다면 우리 인간 마음 가

운데 삼신을 갖추고 있다면서, 우리가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본래 청

정한 마음, 성품을 법신불로 보고, 자성의 변화 한 생각 사량분별

을 화신불로, 생각 생각 자성을 보는 지혜를 보신불로 본다.



산심은 부처님에 한한 말인 것이다.  붓다의 삼신까지도

유심화,  관념화시켜 보는 것은 불의 경계를 전혀 모르

는 소의다.



티베트 밀교에서는 공성의 증득만으로는 진실한 멸도, 성불일 수 없

고 무량한 선업으로 색신을 성취해야 대승의 진정한 성불이라면서 선

불교를 비판하다.



<<법화경>> <비유품>에서는 "공의 법을 증득하고, 32상의 색신을 성

취했을 때 성불"이라 한다.  이러한 밀교의 견해들은 전적으로 옳은 말

이지만 바르도에서 의생신을 얻어 보신불의 몸으로 성불한

다며, 육신 속에 삼신을 성취하는 위가 불이라 주창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견해라 사자후하신다.



진정한 불신은 티베트 밀교의 의생신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불신은 바르도가 아닌 상적광 세계의 정광명보다 몇 차원 높은

무량광으로 이루어진다.  영원히 멸도하지도 않고 자비와 지혜, 그리고

복덕을 구족한다.  또 항사의 신통 묘용을 쓰며, 대적정삼매에 자유로이

들어 백천만억 화신을 내어 삼천대천세계의 인연 중생을 구제하는 것

이다.



이같이 대승불교에 와서야 유가행 학파의 몇몇 논사들이 <<화

엄>> <<법화>> <<능가>> <<열반>> <<반야>> 그리고 <<해심밀경>>등을

깊이 꿰꿇어 연구하여 부처님들은 중생이나 보살과 달리 세 몸(법.보.응)

을 지닌다는 결론에 따라 삼신설은 확립이 된다.



여러 경론 <<금광명최승왕경>> <<반야바라밀다경>> <<십지경론

>> <<금강반야바라밀경론>> <<장엄경론>> <<섭대승론>> <<보성

론>>에서 표현은 약간씩 다르나, 법신은 영겁토록 변치 않는 만유

의 본체를 법으로 보고 신은 이 본체에 인격적 의미를 붙여

법신이라 했다.



보신은 보살의 위에서 무량겁을 두고 어려운 수행을 한 결과로

얻는, 영구성이 있는 유형의 불신을 뜻한다(아미타불과 같이)고

되어 있다.  응신은, 보신불을 보지 못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

나는 불신, 역사적 존재로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음으로 되어 있다.





붓다는 삼신을 구족하고 
절대계와 중생계를 넘나들면서 교화하는 분

그리고 부처님의 위신력은 천도대재 등을 통해서 중생을 천도하고

천도대재를 지낸 복위자의 업장을 녹여준다는 점에서 정말 희유하다는

사실을 명각해야 한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렇게 설하신다.  "명부에 들지 못

해서 떠도는 고혼 영가들을 찾아내서 붙들어 오는 일, 지금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영가를 천도하는 법석으로 데려오는 일, 짐승 몸을

받아 난 영가의 영체를 빼내어 데려오는 일은 오직 붓다만이 할 수 있

습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영체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오죽하랴!  부처님께서 어떠한 위신력을 구족하시고

계시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며 마음이 붓다라고 하는 세태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말이다.  오호 통재라!  우리는 큰스님의 장엄하고 웅대한

법 세계를 통해서 하루빨리 쇠락해 가는 불교를 진작 및 중흥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게 된다면 인류는 숭고한 불교 문화의 광명과 그

종적을 망각하고 불교사에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위신력을 구비하시고 계

시는가?  그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큰스님게서는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다.  "붓다 이룬 이는 법, 보, 화 삼신을 구족해서 평등적인 무아

속 절대세계와 차별적 중생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중생을 교화하

는 분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중생이 아라한과를 이룰 때까지는 반야

바라밀이 중요하지만, 보살이나 붓다 되기 위해서는 큰 삼매력이 아니

면 안됩니다.  백천 삼매, 대적정삼매에 자유로이 들 수 있어야 자기의

불신을 얻고, 그 깊은 삼매력으로 생사를 자재하며 14무외려과 지혜와

자비, 항사의 신통을 얻고 천백억 화신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큰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삼매력을 얻는 것이 관건이라

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높은 삼매를 얻느냐가 자신의 불신을 얻고 생

사를 자재하고 다양한 권능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 위신력에 대한 해답의 황금열쇠는 바로 고강

한 삼매력에 있다 하겠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붓다 중의 붓다라고 할

수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밝히신다.  "여름 한 낮의 햇살,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그런 빛을 백천

만 개 합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밝은, 수미산만한 대지

의 빛덩어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보고, 하나님이나 창조주 따위를

넘어서 우주 자체가 되어 버린 무서운 그 부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

득할 수만 있다면 불교의 위대함에 감읍하지 않고 견딜 수 없을 것입

니다."라고 말이다.



과거 현지사와 인연된 공덕으로 두 분 큰스님의 불신들께서 전

해주신 메시지들 두뇌를 통해 원격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체험은

참으로 밝고 밝아서 두뇌를 시원하게 정화하는 것 이상의 환희심을 가

져다 주었다.



너무나 깨끗한 광명의 에너지였다.  그렇다면 부처님 법신의 무

량광명체로부터 빛을 받는다면 그것은 정말 얼마나 거룩한지

통절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리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회,

아니 세상에 태어나 겪은 모든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최대의 희열

을 경험하리라.


붓다 삼신의 경계는 붓다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부처님의 상모의 훌륭함을 큰스님께서는

상세히 설하신다.



"보신불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 자비를

갖추고 있어서 백천만억의 화신을 내어 중생을 교화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과 모습은 필설로 그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상모를 다

갖추십니다.  음성 역시 미묘하여 모든 붓다들은 그 거룩하고 희유하심

이 우리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붓다 삼신의 경계는 붓다가 아

니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부여되는 최고의 극찬이라 할 수 있는 진 선 미

를 모두 구족하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큰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면 정말로 인간 중생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하찮으며 미물에

불과한지 여실히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불제자들은 지저분한 사바세계로부터 벗어나 고원하고 거룩하

신 부처님 세계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내딛어 결연한 마음으로

정진해 나가야 하리라.



부처님께서는 상모만이 아름다우신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모범을 보

이신다는 것을 또한 큰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붓다를 이룬 이는 법 보 화 삼신을 구족해서 평등적인 무아 속

절대세계와 차별적 중생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라 밝힙니다."라고 큰스님게서는 말씀하셨다.



우리 불제자들은 부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힘써주고 계시는 것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우리에게

그토록 부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

다고 말씀하신 것이리라.  또한 이와 같이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귀

명하고 그동안에 지은 죄를 참회하고 발원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또 부처님의 위신력은 다음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중생이 불신을 본다면 즉시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100볼

트 전구에 수십억 볼트 고압이 들어와 산산이 부서지듯 말입니다.  그

래서 붓다들은 32응신으로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의 중생들을 위해 베푸시는 한량없는 자비심에 감사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법화경>>을 보면 독을 먹은 자녀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방편으로

아이들에게 돌아가셨음을 알리는 구절이 나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방편으로 열반하셨지만 지금도 일체 시, 일체 처 우리들을 보이지 않

는 곳에서 알게 모르게 살펴보시고 우리들의 영혼의 질병을 치료해 주

시는 자비로운 의사와도 같으시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법 세계


큰스님께서 모든 법신을 총섭하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법 세계를

살펴보자.  큰스님께서는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이렇게 피력하신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고 같이 언제나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전 우주적인 몸뚱이'가 그의

본질적인 성품입니다.  대우주이시며 절대와 동일한 변조 광명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로서 모든 붓다들의

청정법신을 총섭하고 있습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하고 지고한 법 세계인가~  말로만 들어서 그렇지

실제로 수행을 통해서 신비 체험을 경험해 본 수행자라면 분명 이러한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내면의 정화와 두뇌에 강렬한 법열을 느꼈

으리라.



어느 경전 어는 불교 수행 서적에 이러한 비로자나 법신에 대한 이

야기를 이토록 간명하고 극명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  여기서 더 나아

가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자후하신다.



"불과를 이룬 붓다가 죽거나 입적할 때는 이 몸뚱이 육체는 버리고

그 안의 4 영체가 불계에 있는 자기 불신과 하나로 계합이 되고

다시 자기의 청정법신불과 합일합니다.  또 모든 붓다님들의 청정법신

불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안으로 뭉칩니다.  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입니다.  청정법신불은 원만보신의 빛보다

훨씬 광도가 높습니다."



컴퓨터 사이언스 세계에서는 '구조적'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

다.  이 구조적이라는 용어는 조화물의 구성과 얼개를 가리킨다.



일반 사상가나 철학가의 사유가 건전할 경우 매우 구조적인 사유를 하

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유가 조화를 이루고 사유의 구성 요소들이 건전한 균형 관

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을 일종의 우주의 모사

라고 했을 때 의식이 조화, 즉 코스모스를 이룰 때 건전한 사

유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큰스님의 비로자나 법신불 세계는 일반 불제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법 세계로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 불제자의 정신

세계가 매우 구조적이고 정합적으로 탈바꿈된다.



왜냐하면 큰스님의 법 세계는 허황된 가설이나 꾸며낸 허위가 아니

며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유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힌두의 베다학파에서는 인체는 육체를 포함하여 미묘한 코

샤(몸)와 거치른 코샤 등 세 개의 덮개로 구성되어 겹쳐 있다고

전한다.



데이비드 플로리가 지은 <<베다 입문>>에서는 음식과 호흡의 표피는

거친 육체의 몸, 스툴라 샤리라를 만들며, 호흡 마음 지

성의 표피는 미묘한 아스트럴 몸인 슈슈마 샤리라를 만

들며, 지성과 희열의 표피는 원인(코절)의 몸인 카라나 샤리라

를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힌두 사상의 한계이다.  큰스님께서는 정확하게 4대 영체를

제시하였으며 그들이 인생이라는 배움과 체험을 통해서 얻은 정보

를 가지고 자신의 원만보신인 불신과 합일을 하고 그

것이 다시 자신의 법신과 합일하여 궁극적으로 비로자나 법신과

합일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우주는 이 장엄한 비로자나불과 각 붓다의 법신불들

드리고 붓다의 보신불들이 공생하고 연동하여 우주의

평화와 안녕 그리고 자유와 질서를 관장하고 주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세계이며 웅대한 사상체계가 아니겠는가!



또한 큰스님께서는 이와 같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언제나 온 법

계를 두루 비추고 계신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붓다님들은 빛으로 일체 처, 일체 시에 아니 계신 곳 없기

때문에 법신 개념에서 볼 때 천수천안이 문제가 아니며 가고 오고 하

는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무소종래이며 역무소거입니다.  삼천대천세계

우주 자체가 바로 붓다의 몸입니다. "라고 설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하신 부처님의 세계를 한 번 불 수 있다면 정말

로 큰스님 말씀대로 감읍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불신의 위신력


지금까지 불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

러한 불신이 얼마나 큰 위신력을 지니고 있으며 부처님의 가피가 얼마

나 소중한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자후하신다.  "부처님들은 모두 무량광으

로 이뤄진 몸을 지니셔서 무량수가 되므로, 삼세의 여래가 똑 같습니

다.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불신에서 백천만 억의 화신이 현현하는 것입

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에 평술을 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할 것

이다.  큰스님의 문장 그대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큰스님께서는 말이 백천만 억 화신이지 그 이상의 화신을 낸다고 하

신다.  어찌 이를 수치로 계산할 수 있으랴!  그만큼 부처님은 위대하시

고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일부 수행자들은 백천만억 화신을 천백억 화신으로 격하시키거

나 아예 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과학 문명에서는 카오스와 프렉탈 이론을 제

창하여 우주가 동형 구조로 자신을 복제하고 자신의 정보를 자기 유사

성을 지닌 복제로 무한 상속시킨다고 한다.  이는 서양 과학기술에서도

이미 불교 수행세계를 관통하는 학설을 주창하고 있으며 이는 천백억

화신에 대한 타당성을 입증하여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고로, 부처님의 화신으로는 싯다르타 태자 외에도 구마라즙 대사,

아쇼카왕, 이차돈, 일본의 성덕태자 등으로 사바세계에 오셔서 불교의

증흥을 위해 희생 및 헌신하시고 가겼다고 큰심께서는 말씀하신다.



또한 부처님의 불신의 위신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불신에서 법보화 삼신, 부처님의 8만

4천 신통, 백천 삼매, 지혜와 자비, 복덕이 우러나옵니다.  바로 무량광

이 지혜 자비 복덕 삼매 신통능력 자체인 불가사의한 빛덩이기 때문입

니다."



우리는 이로서 왜 부처님을 믿고 귀의 귀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우리 인간 존재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서양 철학자

파스칼이 말한 대로 생각하는 갈대에 자니지 않는다.  중생들에게 무슨

무량광이 있으며 법보화 삼신이 있으며 지혜, 자비, 복덕, 삼매, 신통

능력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자비로움으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보다 상위 존재로서의

부처님께 몸을 맡기고 부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우주적인 섭리에 대한 지견을 확립해 나가는 과

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큰스님께서는 불과를 증해야 생사관이 확립된다고 다음

과 같이 밝히셨다.  즉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거기서 명이 다

하면 다시 어디로 가고, 또 그곳에서 업연이 다하면 어디로 가는지

중생이 각자 지은 업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을 어

떻게 전생하게 되며, 윤회 안의 세계와 삼계를 뛰어넘어 해탈을 이룬

성중(/아라한 혹은 조사), 보살, 붓다들은 또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히 관하

고서 세운 견해, 즉 생사관은 붓다의 경계에 들지 않고서는 알 수도

없고, 정립할 수도 없다고 말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선불교의 구습과 병폐에 찌들은 수행자들이

나 선사들은 제대로 생사관을 확립하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지

옥을 관하지도 못하고 그냥 안 보인다고 없다로 치부하는 실정이며 마

음이 붓다이며 붓다가 마음이라고 부처님의 위상을 실추 및 격하시켰

기 대문이다.



타종교 신자들도 자신의 교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마당에 어찌 실제

로 최고의 종교인 불교에 귀의한 불제자들이 이토록 불교의 가르침을

일종의 심교로서 희석시켜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부처님 세계에 대해서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즉 "붓

다는 빛으로 계십니다.  빛이시기에 삼세의 여래는 한 티끌, 한 생각이

모두 같습니다.  모든 붓다들이 무량광으로 이루어졌기에, 빛 그 자체이

시기에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붓다끼리는 서로 항상 상속되어 있고 그

래서 한 티끌 한 생각이 똑같습니다.  말 그대로 삼세여래 일체동입니

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일체의 삼천대천세계를 아우르는 우주 속에 거하시는

모든 부처님들은 하나같이 생각이 같으시고 뜻이 같기 때문에 그 분들

의 총체적 힘이란 가히 어마어마하며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또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과를 이룬 성자에게

는 좌우보처가 배정되고, 대아라한 급의 금강역사 50명이 항상 호신합

니다.  그리고 보살과를 이룬 이에겐 두 명의 금강역사가 따릅니다."라

고 말이다.



고대 힌두교나 이집트문명 그리고 유대교나 기독교에 이러한 가르침

과 위신력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새삼 부처님의 세계를 다른

종교와 비교할 바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불교의 세계는 월등히 수승하고 탁월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다

만, 그동안 가리웠던 부처님 세계의 웅대한 법력을 오늘날 큰스님

께서 사자후하심으로써 복원했다고 할 수 있다.  큰스님 말씀대로 우리

불교는 힘이 있는 종교라는 것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