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일 목요일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 4 ]음계와 중계의 중요성,불교적인 효,계율






견성의 체험담과 증험적 세계


사실, 이 정도로 명료하게 견성의 체험담과 증험적 세계를 펼쳐 보이신 불가(佛家)의 선지식(善知識)은 극히 드물다. 아니 전무(全無)하다. 깨달아 보니 어떻게 깨달았는지도 모르고 , 자신이 어느 경지에 와 있는지 모르는 선지식들과 수행자들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대면해 봤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매우 적게 할애해서 다룬 견성과 보림 후의 아라한 경지에 대해서도 이토록 자세하고 극명하게 설명해 주셨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큰스님의 법 세계가 얼마나 장대하고 광대한지를 우리는 짐작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내용은 큰스님의 법 세계의 단면일 뿐이다. 왜냐하면 밝히기 어려운 밀장(密藏)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창시하신 불교의 전체 맥락과 큰스님의 법 세계를 이해하고 통찰하는데 큰 힘을 제공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 미증유의 성서(聖書)를 두뇌에 각인될 때까지 거듭 반복해서 정독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음계(婬戒)를 매우 중시하셨으며 큰스님께서도 음계를 선지(善持)할 것을 누차 강조하셨다.



 일단 견성을 했으면 부처님 세계에 발을 확실히 들여놓기 시작한 시기이므로 결코 음계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지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끊기 어려운 것이 음욕(淫慾)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처럼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를 가져야 하면 이 음욕과 투철한 내적 투쟁을 감행해야 한다.

 진실로 영웅은 내면의 적, 특히 음욕(淫慾) 및 삼독심(三毒心)과 싸워서 이기는 승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나 없는 공부’로서 투타행으로 나아가야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 두타행은 큰스님의 법문과 가르침에 의하면 삼천대천세계 모든 붓다들께서 입을 모아 하신 말씀이며 이기심을 버리고, ‘나’라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는 공부이며 무아(無我)를 위한 가르침이며 ‘나’가 있음으로 인해 탐욕이 일어나기 때문에 설하신 가르침이시다.



 또한 ‘나’의 존재감 때문에 끄달림, 산란심, 분별심, 집착, 머묾이 일어나며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세상의 허망함을 깨닫게 된다고 하셨다. 이 얼마나 상세하게 조목조목 열거하신 가르침이며 일전에 익히 들어본 적이 없는 진귀하고 수승한 가르침이 아닌가 말이다.

 큰스님의 법 세계는 잘 조망하면 할수록 아름답고 황홀하기 그지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가(儒家)의 가르침에서 수신(修身)이 끝나면 제가(齊家)를 하는데 제가를 할 때는 더 이상 수신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본다. 즉, 수신을 해서 제가를 하고 치국(治國)을 하여 평천하(平天下)가 되어도 수신은 부단히 행해져야 한다.



 자신을 닦는 수신의 행(行)이 영속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가정을 다스리는 제가는 어불성설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은 더욱 요원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두타행으로 아라한과를 증위했어도 이 두타행을 끝까지 밀고 나가 보살과를 증위하고 더 나아가 불과도 증위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계를 선지(善持)하여 아라한과를 증위하고, 아라한 하늘에 태어난 후 다시 원력 수생으로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와 보살과를 증위하기 위해서도 음계를 더욱 잘 호지(護持)해야 할 것이며, 불과를 증위하는 과정 또한 음계를 보다 더 잘 수지(守持)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서문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불제자가 아라한에서 보살에 이르는 도정에 대해 친히 설해 주셨다.



 아라한이 다시 몸을 받아와

 보살이 되는 공부를 할 때에는

 음계를 생명처럼 지켜

 이타행하면서 대승경전을 읽고

 염불선 되도록 정진하라.

 부모님께 효를 다함으로써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야

 보살의 성과를 얻어

 정토에 가 나니라.



 이 얼마나 지고(至高)한 법문인가? 어느 누가 석가모니부처님처럼 아라한과에서 보살과를 증위하는 도정을 이와 같이 명확하고 심오하며 자상하게 설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큰스님께서는 이러한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매우 상세하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풀어 쓰고 계신다.



 아라한이 보살과를 증위하는 과정에서도 음계(婬戒)를 철저히 지킬 것을 강조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타행을 해야 한다고 설하신다. 간략하게 이타행에 대해서 논구하면 이렇다.



 큰스님께서는 이타행을 보살행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보살행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나 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라는 아상(我相)을 타파하고 아집(我執)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라는 착을 떼어 가는 두타행과 맥락을 함께 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타행을 ‘정글’ 등의 구렁이와 독충이 많이 나오는 곳에서 해나가면 결국 ‘자아라는 존재의 실재성이 공(空)하다는 것’을 더 절실히 체득한다.





두타행은 착을 떼어 가는 수행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적 체험이다. 그렇다면, 이타행과 보살행으로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고, 병행으로 두타행을 수행 하면 무아적 체험을 더 실재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타행에 대해서는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여실히 설명되어 있다. 즉, 구렁이와 독사가 나오는 숲 속에서 고행을 하는 것도, 그리고 무덤가 유령과 귀신이 나오는 곳에서 수행을 하는 것도 더 나아가 나병환자와 함께 있는 곳에서 수도를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죽여 가는’두타행인 것이다.



 큰스님 말씀대로 두타행은 착(着)을 떼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착(着)은 또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12연기의 구도(構圖)와 연관을 맺으며 실제로 이타행, 보살행, 두타행을 수행함으로써 12연기의 구조에 대한 안목과 식견을 향상시킬 수 있다.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과 큰스님의 가르침을 여실히 관조하고 목도해 보면 황홀할 만큼 유기적이고 체계적(시스템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법 세계에서는 여기서의 진실이 저기서의 진실이고 이 가르침이 저 가르침과 상호융섭(相互融攝)하고 상호회통(相互會通) 더 나아가 원융무애(圓融無碍)함을 알 수 있다. 만약 부처님과 큰스님의 가르침들 하나 하나가 모두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라면 부처님 법 세계(法世界)의 전체성(全體性)은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과 큰스님의 가르침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서로를 반사시켜 황홀하게 우리 시야에 현전시켜 주신다.



  그 다음으로 아라한이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대승경전을 정독(精讀), 다독(多讀), 열독(熱讀) 해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과 큰스님의 가르침이요 말씀이다. <<아함경>>과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부모은중경>> 등의 대승경전을 읽지 않고서는 근본불교 당시의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해의(解義)할 수 없다.



물론 대승경전이 왜곡되어 다소간의 외도 기운이 들어있기는 하다. 하지만 큰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외도적인 오류들을 잘 걸러내 가면서 대승경전에 전해오고 있는 부처님의 친설만을 배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科)를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믿음을 내면에 구축하고 증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많이 듣고 배워야 한다고 하셨다.



따라서 부처님의 성심(聖心)이 담겨있는 대승경전을 독송하는 것이 무엇보다 보살과를 증위하고자 열망하는 아라한들에게 소중하다고 하겠다.



그 다음으로 염불선(念佛禪)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黙動靜)’이 되도록 해야 한다. 즉,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그리고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머무르거나 항상 마음이 염불선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래야 아라한이 보살과를 증위할 수 있다고 하셨다.



 물론 여기서의 염불선은 부처님께서 하사하시고 큰스님께서 일러주신 칭명염불선을 말한다. 또한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큰스님께서도 친히 불보살님들은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선남자 선여인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셨다.





깨달음(견성)에서 아라한, 보살에서
붓다에 이르는 도정


 한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서문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불제자가 보살에서 붓다에 이르는 도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친히 설해 주셨다.



 보살이 붓다 되려면

 여러 생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바라밀 수행함으로써

 선근 보따리를 키울지니라.



큰스님께서는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자성을 깨치는 것은 공부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견성이 곧 성불’이라는 선가의 기치는 분명코 잘못됐으며, 설사 견성을 하고 나서 보림을 마친다 하더라도 곧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이 거룩하시고 희유하시며 거의 절대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라고 사자후 하신다.



 큰스님의 법문은 가히 기존 불가(佛家)의 사조(思潮)에 파란을 불러일으키며 수행 문화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일대의 혁명(革命)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부처님 당시에는 수백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경전에는 전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아라한이면서 동시에 아라한을 넘어서는 유일무이한 붓다라고 말씀하셨다.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선불교가 불교계를 장악하고 득세하면서부터 아라한과 붓다는 같다라는 공식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일반 선지식조차 제대로 아라한의 공과(功課)를 얻지도 못한채 그냥 선불교로부터 답습된 관행대로 아라한은 붓다라는 생각으로 일관해 왔다.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붓다와 아라한의 경계에 대해서 오도되고 왜곡된 시각이 불교계에 팽배하고 만연해 있는 시점에서 큰스님의 사자후는 가히 몽매한 선지식과 수행자들의 미몽(迷夢)을 확 깨이게 하는 각성제(覺醒劑)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선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 경지가 아니라 진실한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보살이 보현행원, 바라밀, 그리고 선근 보따리를 키워야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셨다. 이 얼마나 불제자가 어떤 구도의 과정을 밟아나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타를 매우 극명하게 제시해 주시는 법문이 아니겠는가?





견성에서 아라한으로


 누군가가 인생이 한 편의 흔한 영화처럼 통속(通俗)하다는 것을 통절(痛切)하게 깨달을 때, 그는 구도자가 되고 그에게는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구도자가 견성을 하면 자유, 해탈(Moksha), 열반(Nirvana)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얻는다.



 그리고 견성 이후 보림을 통해서 아라한을 얻으면 명료하게 자신이 사바세계의 오온(五蘊, Panca khandha)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온에 대한 갈애와 잡착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완전한 깨달음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스님 말씀처럼 견성은 전생의 죄업, 악연(惡緣 또는 원결), 빚, 습기(習氣, Vasana), 탁기, 집착, 삼독심(三毒心) 등을 모두 완벽하게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견성을 해도 집착이 어느 정도 남아있고 방심한다면 여색(女色)에 미혹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견성을 지나 아라한에 이르면 자신을 속박했던 중생심(衆生心)이 탈각되어 견성 때보다도 더 선명하게 청정심(淸淨心)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 자리도 큰스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생사관(生死觀)을 확립한 것은 아니다.



 즉, 지옥에 대한 철견, 육도 윤회사상에 대한 완벽한 해의(解義), 자신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견성을 지나 아라한을 얻은 이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또한 “인간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아라한에 그칠 뿐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아라한으로서는 우주와의 계합이라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라고 사자후하셨다. 여기서, 아라한은 자력이나 타력으로 얻지만 그 이상의 경지, 즉 보살이나 붓다는 자력뿐만 아니라 타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친히 전수받으신 전대미문의 칭명염불선(稱名念佛禪)을 우리 불제자들을 위해 제창(提唱)하신 것임을 명지해야 한다. 재차 강조하는바 큰스님의 법 세계를 가만히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실로 경외로움과 경이로움 속에서 크나큰 법음(法音)이 메아리 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의 대법문(大法門)이신 연기사상(緣起思想)의 가르침이 실제로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영롱한 유리알처럼 빛을 내며 점철(點綴)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휘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휘들을 요구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의 사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물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큰스님의 법 세계(法世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큰스님의 실증적 사상을 하나하나 분리해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큰스님의 법 세계 전체의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통찰하는 안목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재차 우리 불제자들이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 번 정독(精讀)할 것을 당부하신 것이리라. 또한 큰스님의 법 세계에는 세상에 통속(通俗)한 선악(善惡), 남녀(男女), 애증(愛憎) 등의 이원론적 흔적이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로지 이원론적 시공을 초월한 맑고 밝은 광대무변한 진리의 법 세계만이 오롯이 우리 불제자들을 비추고 있다.



한편 견성에서 아라한으로 가는 도정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견성의 개념을 깨달아야하고, 보림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견성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면 아라한을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보림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아라한 경지를 철견(徹見)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칭명염불 수행의 실증적 의미에 대해서 완벽히 깨달아야 견고한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으며, 선근 공덕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선근 공덕을 짓는 선남자 선여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경전을 연구 독송하거나 남을 위해 해설하거나, 부모 조상께 효도를 다한 불자, 그리고 보시, 인욕, 정진 등의 육바라밀을 잘한 자, 진짜 불보살의 회상에 크게 공덕으로 기여한 자, 다라니 염불 공부 잘한 자, 부처님과 그 법을 위해 목숨 바칠 정도로 외호한 자 등을 들 수 있다고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자상하고 상세한 법문이 아닌가? 또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를 도야해 나가야 하며, 나 없는 수행인 두타행을 체득해야 하며, 효를 다해야 한다. 한편 자력 수행뿐만 아니라 타력수행으로서의 칭명염불선을 할 때 보다 안정적이고 빠른 기간 내에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사법인과 삼학을 이루고 도야하는 자리가
바로 아라한과


 그리고 생사윤회의 괴로움과 삼계의 허무함과 통속함을 통절히 깨달아야하며 사법인(四法印), 즉 순서대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이해하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이루어야 한다. 물론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도야해야 한다. 이 자리가 비로소 아라한과이다.



 이러한 아라한과는 삼독심(三毒心)이 다소 해소되며, 빚, 원결에 의한 악연, 억겁의 죄업, 습, 기 등이 표면적으로 탈각되어 지멸(止滅)된다. 이 아라한과는 견성 단계에서의 욕계정(欲界定)삼매를 뛰어넘어 멸진정(滅盡定)삼매 또는 금강삼매(金剛三昧)라는 아라한삼매에 이르게 된다.



 큰스님께서는 오늘날의 선불교의 맹습(盲習)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질타하신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요, 마음 자리가 극락이라고 합니다. 지옥과 극락을 마음 안에서나 찾으며 ‘지옥과 극락은 따로 존재하고 있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음 밖의 지옥, 극락, 불, 보살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이러한 선불교와 현재의 불교의 모습은 진실된 불교의 모습이 아니라 심교(心敎)로서의 불교라고 한탄하신다.

 불보살님의 세계와 극락 정토가 불교 경전에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어찌 오늘날의 불교는 고대 근본불교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이렇게 이상하게 왜곡되고 전도된 불교 사상에 젖어있는 것일까? 그것은 큰스님 말씀대로 불안(佛眼)과 오안(五眼)을 구족하신 영묘(靈妙)한 대선지식(大善知識)이 나오지 않으신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큰스님께서는 “일심 혹은 법성은 시방 법계 어디에도 심지어 티끌이나 먼지 속에도 주변하여 뻗쳐 있습니다. 동시에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영원히 경계에 물들지 않습니다. 자성은 청정무구요, 여여부동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큰스님께서는 불보살님의 세계만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불교나 현재의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에 대해서도 매우 정확하고 올바른 이해를 구유(具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큰스님의 말씀은 견성은 한낱 수행의 낮은 수준이라고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을 통해서 얻은 경지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의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고대 철학 스토아학파에서는 아파테이아라는 평정심, 무변심(無變心), 부동심, 평상심 등을 거론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도 카를 융 박사는 ‘개성화 과정(Individuation Process)’이라고 인생 도정을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일컫고 있다.

 고대의 현자 소크라테스는 “나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전했으며,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도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을 통해서 우주의 근원적 법성으로서의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자아적 아트만(Atman)이 하나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이러한 다른 종교 철학에서 언급하는 깨달음의 세계와 어떤 차별화가 있는가?



 세계 최고의 종교로서 부상하고 있고 심지어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수많은 불교신도들에게 오히려 다른 종교나 철학 세계와 불교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영예(榮譽)를 실추 시키는 것이 아닌가?



 모름지기 수행자가 자신의 올바른 수행 세계와 정의로운 종가(宗家)의 영예를 진작시키는 일은 무엇보다 고귀하고 소중한 일이다. 타종교와 철학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최고임을 자부하고 있지만 우리 불제자들은 너무 겸허한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이제는 큰스님처럼 우리 불교의 장대하고 웅대하며 황홀 찬란한 법 세계를 전 세계에 선양(宣揚)해야 할 때이다. 요즘은 흔히 프리젠터이션 시대라고 말한다. 자신을 PR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시기이다. 앉아있다고 해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 한도로 노력을 해서 우리 불교의 세계를 대내외적으로 홍포(弘布)하고 포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불교가 다른 종교와 야합하여 불교의 위신과 영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중단하고 큰스님의 법 세계를 널리 알려 견성으로서의 깨달음이나 공성(空性)과 신성(神性)을 체득한 아라한 경지가 수행의 종착점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종교 영성문화와 명상 수행세계가 잘못된 야합으로 일그러 진다면 사바세계는 지금보다 더 안 좋은 파멸과 퇴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분명 강조하는 바, 전 세계 종교 영성문화와 명상 수행세계는 한낱 견성과 아라한 수준의 경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료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전 세계 종교 영성문화가 이토록 아라한 경지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인간이 증득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경지가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식은 사실 전대미문의 설법으로 그동안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타 종교 영성세계에서는 대선지식이 나오지 못해 아라한의 경지만을 추구하고 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불교에서는 아라한 수준까지도 제대로 도달한 선지식이 지극히 드물며 심지어 지옥이 없다라고 하는 실정이다.  지옥이 없으면 왜 수행을 하는가? 그리고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한 번쯤 진지하게 의문을 갖고 참구해야 할 것이다.



 사실, 선지식들이 아라한에 한계를 갖는 것은 이러한 지옥의 실상(實相)을 여실히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성을 하면 공(空)하다는 것을 알지만 지옥을 관하기에는 턱없이 경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큰스님께서는 불과(佛果)를 증하면 오안(五眼)을 구족하게 되어 이러한 지옥의 실상을 여실히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지옥을 관하지 못하는 것은 아라한의 한계이니 지옥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선지식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의 한계를 짓고 더 나아가 부처님의 법 세계를 오도하고 능멸하는 대망어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각(明覺)해야 한다.





견성 후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두타행이 필수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견성 후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나 없는 수행’인 두타행이 필수적이며, 두타행을 하게 되면 삼독심이 녹고 집착에서 벗어나며 아라한 과를 얻으면 성중 윗하늘에 태어난다.” 고 말이다. 이 얼마나 자상하신 법문이 아니겠는가?



 사실, 어느 누가 두타행을 그렇게 강조한 선사들이나 선지식이 있단 말인가?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에서 위빠사나선을 중심으로 수행하는 선지식들을 제외하고는 이제 두타행의 의미가 불가(佛家)에서 퇴색해 버렸다.



 하지만 그러한 쇠락의 길에 놓여있는 불교 고유의 가르침인 두타행을 오늘날에 다시 사자후하심으로써 불제자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사실, 말로만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단초를 제시하지 못하는 선지식들이 많다. 하지만 큰스님은 다르시다.



 정확하고 명료하게 지난 날의 참회,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귀의, 귀명, 두타행, 육바라밀, 염불선, 효(천도대재) 그리고 계, 정, 혜 삼학(三學), 팔정도(八正道), 이타행, 선근 공덕 쌓고 회향하기 등등을 자상하게 법문해 주셨다. 참고로, 아라한과의 경지는 윤회를 벗어나서 2번 영체로 성중 윗 하늘에 가 난다는 점이며 몸뚱이의 감옥인 탐, 진, 치로부터 자유로우며 탐욕의 경계를 만나거나 또 성낼 수밖에 없는 경계를 당해서도 자유로우며 공포의 경계로부터 자유롭다. 영체의 색깔은 보름달 속 밝은 은백색이고, 아라한 삼매(금강삼매)에 든다 한다.



 또한 큰스님의 가르침을 해의해 보면 음계를 선지하여 나 없는 수행, 즉 두타행으로 나아가 보림을 잘 하면 깨달음을 완성하고 인간으로서 궁극의 깨달음, 즉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야 아라한의 성과를 증득하게 되며 아라한이야말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극과이며 아라한에서 보살로 올라가려면 타력이 필요하다고 하신다.



 중요한 것은 선불교에서 일방적으로 말하는 대오철저, 확철대오는 모두 아라한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선불교의 한계를 여실지견으로 살펴서 아라한과에만 머물지 말고 더욱 분발하고 정진하여 보살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아라한에서 보살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통해서 회광반조를 해야 하지만 행위에 대해서도 자신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이를 바로 내시반청(內視反聽)이라고 하며 사전적 의미로는 남을 꾸짖기보다 자신을 돌이켜 보고 반성함을 뜻한다.



 수행이란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 영성수행 체계에서는 항상 내면 중심적인 사유를 강조한다. 마음이 바로잡히지 않고서는 수행이란 불가능하다.



 이런한 내시반청이 되기 위해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로서 남의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해야 하고 운명 공동체 정신을 따라 자신과 남이 모두 선(善)을 향해 가는 도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혈구지도(絜矩之道)의 가르침, 즉 “자기를 척도로 삼아 남을 생각하고 살펴서 바른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상의 길”을 체득해야 할 것이다. 공자께서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하셨다. 결국 자신의 정심(正心)을 잘 살펴서 자신의 마음에 거스르지 않도록 자신과 남을 대해야한다.



 이러한 자세가 확장되면 결국 불가(佛家)의 자타불이(自他不二) 사상으로 이어진다. 회광반조하고 내시반청하며, 이를 위해서는 역지사지, 혈구지도 그리고 팔정도(八正道)와 자타불이 사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을 거쳐 아라한과를 얻으면 성중 하늘을 지나 아라한 하늘에 태어난다. 



 아라한이 성중 하늘로 갔다가 원력 수생하여 인신(人身)을 받아와서 보살과를 증하기 위해서는 자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큰스님께서는 자상히 일러주신다.



즉 타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비유하자면 자력 수행에 매진하는 것이 ‘무거운 짐(다겁 생의 업)’을 진 채 도보로 한반도 삼천리를 경주하는 것이라면 타력 수행을 비행기로 한반도 삼천리를 유람하는 격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보살이 되기 우해서는 <<화엄경>>의 10회향 10지의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고 하신다. 그래서 해인삼매에 들어 시방세계 일체가 선명히 드러나고 금강석 같이 일체를 여읜 마음으로 청정해져야 한 티끌 한 생각이 녹아져 햇빛처럼 밝아야 보살을 이룬다고 큰스님께서 설하신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이타행과 보살심이 투철해야 하며 삼독의 번뇌를 벗아나 중생에게 기쁘게 회향할 줄 아는 마음 가짐, 나는 살아 남아서 눈 먼 부모님을 봉양해야 한다며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처절한 절규를 들었을 때 자기가 그 사람 대신 처형 받을 것을 자원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가르침과 법문이 아니고서는 아라한이 보살로 가는 도정에 대한 설명은 오늘날의 여타의 선지식이나 시중의 명상 수행서적에서는 찾기가 너무 힘들다. 보살도에 대한 가르침은 근본경전의 <<화엄경>>이나 <<법화경>>을 봐야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는 범부 중생이나 일반 선지식으로서는 알지도 못할 뿐더러 깨닫지도 못할 경지이다. 일반 선지식의 경지가 고작 견성에서 아라한 정도이니 할 말이 없다 하겠다.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열반경>> (여래성품)의 ‘대열반 광명이 중생의 털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불도를 이루리라’는 말씀대로, 수행인이 공부하는 중에 선정에 들어 빨강 가사, 장삼을 수하신 문수, 보현보살 그리고 관음, 세지보살께서 방사하시는 부처님의 광명(대열반 광명)을 온 몸의 털구멍 속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종종 만나면 보살의 위에 든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실제로 큰스님께서 증험한 경지를 소상히 밝히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이러한 장엄한 경지를 설하실 수 있겠는가?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열반 광명을 경험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큰스님 법문의 요체가 아닐까 한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성중 하늘에서 보살이 되기 위해서 원력 수생할 경우 자력과 타력에 의지해야 하며 이때는 염불선으로 선정, 삼매를 얻어 삿된 욕망과 삿된 생각을 모두 여의고 오계, 십선을 지켜 탐,진,치 삼독을 모두 제거해야 하며 또한 부처님의 가피를 얻어야 보살이 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극락세계에 영체 아기가 생기게 되고 결국 극락에 왕생하게 된다.”고 친히 자상하게 법문해 주셨다. 흔히 선불교의 폐습에 얽매여 있는 불제자들은 오직 간화선 또는 화두선으로 자력수행을 하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께서 삼천대천세계를 주관하시며 일체 처, 일체 시 아니 계신 곳이 없는데 왜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자력만을 고집하고 고수 하는지 안타까운 실정이다. 큰스님의 칭명염불선 사상이나 염불선을 주장하는 모든 역대 고승(高僧)들께서는 한결같이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를 받으면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쉽게 구도자는 피안(彼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 부작용이 많고 성과가 적은 간화선만을 고집하는가?



 또한 보살과를 증위하기 위해서는 아라한과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절대 무아세계에 여여히 존재하심을 믿고, 지난 날을 참회하고, 부처님에 대한 공경, 찬탄과 귀의, 귀명하며,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두타행, 육바라밀, 염불선, 부모 조상들게 효(천도대재)를 다하고, 계,정,혜 삼학(三學), 팔정도(八正道), 이타행, 선근 공덕을 이루고 이 공덕을 상대 중생에게 회향할 줄 알아야 한다.



  보살과를 증득하면 보살과의 경지는 다음과 같다고 하신다. 물론 보살이라고 하면 8지 이상의 보살과를 증한 이를 보살이라고 한다. 즉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한다. 보살과를 증하면 1번 영체로 극락에 가며 변녀성남(變女成男)이 이루어 진다. 그리고 극락에 왕생한 이는 불퇴전의 경지로서 성불이 보장된다.



 해인삼매까지 들며 보살과를 이루면 2명의 금강역사(신장)가 호신하며 영체의 색깔은 아침 8시경 태양의 빛깔이라고 하신다. 정리하자면, 무엇보다 아라한이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칭명염불선에 주력해야 하고 자력과 타력을 통해서 정진하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등 대보살이 끌어주어야 보살을 증위할 수 있다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점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보살에서 붓다로 - 1


큰스님의 최상승의 가르침은 다름 아닌 보살에서 붓다로 이르는 도정(道程)이라고 말하고 싶다.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설법해 주셨다. “다시 보살이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보현행원을 해야 하고 참회를 해야 하며 이타심과 회향심, 그리고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야 하며 수행도중에 무량광을 보고 그 후 부처님을 친견하고 또 하나의 관문을 통과해서 법문을 들으면 불신(보신)이 생겨난다.”고 말이다.



 이 얼마나 미증유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학문과 지식을 초월한 절학(絶壑)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와 같은 대법문(大法門)을 펼칠 수 있겠는가? 큰스님께서 설하신 보현행원은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53인의 선지식을 찾아 구도한 끝에 마지막으로 만난 보현보살이 가르쳐 준 법문으로 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첫째 모든 부처님을 존숭하는 것이며, 둘째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며, 셋째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며, 넷째 모든 죄를 참회하는 것이며, 다섯째 남이 쌓은 공덕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이며, 여섯째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도록 간청하는 것이며, 일곱째 부처님께 이세상에 영원히 남아 있기를 간청하는 것이며, 여덟째 항상 부처님의 모범적인 삶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며, 아홉째 항상 일체 중생의 행복을 보살피고자 하는 것이며, 열째 자신의 모든 공덕을 남에게 회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부처님의 존재를 믿고 부처님을 높이 우러러봐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의 세계를 향한 불제자의 도리인 것이다.



 부처님과 부처님 세계는 거룩하고 희유하며 장엄하다. 따라서 그 부처님과 부처님 나라를 존숭하는 것은 불제자에게 고원한 향상심(向上心)을 구족하게 하고 발심(發心)을 더욱 돈독하게 해 준다. 자신보다 훌륭하고 모범이 되는 지고한 존재자를 숭앙(崇仰)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후학(後學)들로부터 존경받는 길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신이 남들로부터 존경받을 것을 생각하고서 부처님을 존경하고 높이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순수한 마음과 무주상의 마음으로 부처님을 존경하고 경배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는 정말 가슴 벅차고 환희를 일으킨다. 부처님의 법문,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의 심법(心法)을 대하면 그렇게 아름답고 멋지고 진실되고 거룩할 수가 없다.

 부처님의 경전과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여러 번 눈물도 흘렸고 가슴에 강한 감명과 울림 그리고 정신에 강한 전율과 지고한 법열(法悅)을 경험했다. 정말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세계는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하고 고원하며 거룩하다.



 찬탄할수록 마음의 정화(淨化)를 얻고 눈물을 흘릴수록 부처님께 지은 죄업이 조금이나마 소멸되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니 죄업 소멸을 경험했다고 말해야 하리라. 힘든 사바세계에 오셔서 자비롭고도 보배로운 대법문(大法門)을 펼쳐주신 석가모니부처님과 광명 만덕 큰스님 그리고 자재 만현 큰스님께 너무 감사드린다.



 부처님의 존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광영이며 우주에서 생명체로 태어난 것이 하나의 축복이 되었다. 사실, 많은 불제자들이 부처님이 안 계시면 삶에 회의와 정신세계의 극심한 빈곤감을 느꼈으리라. 또한 부처님은 우리의 생(生)과 명(命)의 존재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거룩하신 존재자임을 우리는 명각할 필요가 있으리라.



 그 다음으로 셋째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 영산불교 현지궁의 존재 의미를 크게 깨닫게 해주며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의 존재하심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만약 두 분 큰스님께서 안 계셨다면 어찌 우리가 석가모니부처님(보신불)께 공양을 드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불과(佛果)를 이루신 두 분 큰스님께 공양을 드릴 수 있겠는가? 이 힘들고 험한 사바세계에 두분 큰스님께서 오신 것을 정말 눈물로 감사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현지사와 인연된 것만으로 그리고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지만 공양까지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우주적인 복운(福運)이 아닐 수 없다.



 넷째는 모든 죄를 참회하는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 그리고 구도라는 것은 자신의 악업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스님께서는 이를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여실히 설해주셨고 수많은 현지사 법회에서 누차에 걸쳐 설법해 주셨다. 그리고 큰스님께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바로 억겁동안의 죄업, 빚, 악연(원결), 습, 기, 착, 삼독심 등으로 말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설해주시는 대선지식을 지금까지 수백 여 권의 정신세계 서적과 수많은 선지식을 직․간접적으로 만났어도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은 치열한 수행을 해 본 불제자라면 알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죄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타파하는 지에 대해서 명료하고 실제적이며 현실적으로 설해주신 분은 큰스님 밖에는 없다 하겠다.



 다겁 생으로 내려오면서 부모․조상님들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현지사 조상 천도대재를 통해서 자신과 원결을 이룬 영가들까지도 천도해주고 효를 다하는 것, 그리고 칭명염불선을 매우 절실히 수행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마음 속 깊이 절절히 참회하는 것이 주요하다고 본다.



 다섯째는 남이 쌓은 공덕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매우 힘들다. 하지만 나와 남이라는 것을 구별하지 않고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생명체로 함께 호흡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 운명체라는 거시적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우주에 자신 혼자만 존재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고독할까? 우리는 인연의 연쇄 속에서 그리고 인과의 흐름 속에 인드라망처럼 공존(共存)하는 것을 기뻐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남이 괴로울 때 아파하고 남이 힐들어 할 때 도와줄 수 있어야 하고 남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나갈 때 큰스님께서 그토록 역설하신 이타행으로서 보살행이 무르익고 무아(無我)를 더 깊이 증득해 나간다고 본다. 또한 자신이 그동안 남에게 지은 죄를 씻는 길이기도 한다.



 우리는 큰스님의 법 세계와 실천적 사상 체계를 깊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각인시켜 이를 실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섯째 부처님께 법륜을 굴리도록 간청하는 것이다.  과거 불교 TV에

서 큰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미혹한 구도자들이 내리도록 한 적이 있

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를 이루신 큰스님의 법문을 내리도록 한 것은 불교의 가르

침을 파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즉, 불제자로서 자신은 부처님

을 안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리라.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우리

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친견할 수 없으므로 대신 큰스님의 법문을 들어

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몽매해 지고 교만해 질 수 있다.



나름대로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자부했지만 큰스님의 불후의 성

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고 끔벅 머리를 땅에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큰스님의 성서의 내용  모두가 한결같이 참으로

위대하시고 거룩하시며 희유하신 부처님의 법 세계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의 법 세계를 묘사한 큰스님의 성심이 담긴 필력은

가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  자비로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생동감을

엿볼 수 있어 숙연함을 넘어서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불과를

증위하신 큰스님만의 독특한 필체와 자비로운 법력이 실려 있기 때문

이다.



우리는 이러한 큰스님의 대사자후를 많이 듣도록 법문을 많이 청하

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큰스님께서 영원히 멸도하지 않은 체 사

바세계에 남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하루

하루가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큰스님의 법문을 많이 구하고 간청하고

듣는 것이 우리 불제자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일곱째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영원히 남아 계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사실, 본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

스님께서 언젠가는 이 험하고 힘들고 지저분한 사바세계를 떠나신다는

사실이다.  다른 현지사 신도들이나 참된 불제자들은 본이과 같이 두

분 큰스님께서 우리가 생사 해탈을 하고 보살과를 얻고 더 나아가 불

과를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영원히 영산불교 현지궁에 상주해 주

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계실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절실히 체감해야 한다.  그래야 두 분 큰스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

지 절감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본인은 두 분 큰스님께서 억조창생의 미래를 위해서

는 길이길이 사바세계에 머무르시면서 중생들을 제도해 주셨으면 하고

간절히 염원한다.



여덟째 항상 부처님의 모범적인 삶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 대

목은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함경>>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은 친히 모범적 전형이 되어주셔서 많은 중

생들을 돌보아 주시고 제도해 주셨다.



그리고 큰스님께서는 하루가 바쁘게 중생들의 애환을 달래주시기 위

해서 천도대재를 지내주고 계시며 영체를 씻어주고 계신다.  우리는 이

러한 석가모니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의 모범적인 모습을 통해서 깊이

감사하고 존숭해야 할 것이다.



휴먼 모델링(Human Modeling)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즉, 어떤 이상적

인 분을 자신의 가슴에 새겨두고 그 분과 같은 삶을 살기를 열망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 분처럼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 분의 일부를 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이는 나다니엘 호오돈의 큰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에서도 엿볼 수 있

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의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 불제자들

도 항상 석가모니부처님과 만덕 큰스님 그리고 만현 큰스님의 성의

와 성덕을 본받고 그 분들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라한을 넘고 보살을 지나 지고한 붓다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홉째 항상 일체 중생의 행복을 보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일체 중

생의 행복이 결국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남들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머무르셨을 당시

유마 거사께서는 중생이 병들어서 당신도 병이 들었다고 하셨다.  이는

유마 거사의 보살도 정신이 얼마나 투철한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즉, 우리 불제자들도 유마 거사처럼 중생들이 아플 때 아파하고 중

생들이 행복해 할 때 행복해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실된 보살도가

아니겠는가?



열째 자신의 모든 공덕을 남에게 회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덕이라

는 것은 자신 혼자서만 짓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공덕을 다른 인연에게 회향하여 흘러 보내는 게

필요하다.  과거 인연을 통해서 공덕을 쌓았다면 그 공덕을 새로운 인

연에게 회향하는 것은 정말로 복된 일이라 생각한다.



한편, 불과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보살이 남섬부주에 여러 번 생을

받아와 불과를 이루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상품보살 중의 상품인 최상

품보살이 인신을 받은 후 약사정토로 가서 상수보살이 된 후 상수보살

이 그대로 수행을 해서 불격을 갖춘 최상수 보살이 될 수 있으며, 남

섬부주 사람 몸을 받아와서 불과를 증하게 된다고 하신다.



정말 큰스님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법 세계임은 너무나 자명하

다.  전 세계 어느 민족, 어는 종교에서 이와 같이 붓다가 되는 과정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고찰한 적이 있는가 말이다.  실로 큰스님이 아니고

서는 감히 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현보살의 십대 행원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육도 만행을 무량겁으로 해서 보살도를 완성해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대적정삼매를 통과해야 하며 억겁 다생의 업장

과 습, 기, 악연, 그리고 탐  진  치 삼독의 뿌리가 녹아져 털끝만큼도

찌꺼지가 남아 있지 않아야 불과를증할 수 있다고 하신다.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무량광을 보아야 한

다고 하시며 이것이 붓다의 첫 번째 관문으로서 무아 속 절대계에 빛

으로 이루어진 자기 불신(빛의 존재)을 얻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

리고 최종적으로 붓다를 내는 데 있어서 그 열쇠는 석가모니부처님만

이 가지고 계신다고 하신다.



한편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사바세계나 삼천대천세계를 다 살만한

복덕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하신다.  붓다의 경지는 겁에 하나 천만 생

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며, 우주와의 하나로 계합이 이루어지며 붓다의

몸은 우주 자체인 빛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시며, 보살이 지니

지 못한 18가지 불공법(14무애력 4불사의 덕)을 구유하시며 삼신

을 구족하시며 삼명, 사지, 오안을 갖추시고 오안 중에서도 불안, 자

비, 복덕, 대자유를 가진다고 하신다.



거짓 몸뚱이와 네 가지 영체가 모두 빛덩이가 되어 자기 불신과 계

합하며 좌우보처 보살이 배정되고 50명 이상의 아라한급 성중이 호신

하며 황금 장삼과 빨강 가사 그리고 불자가 주어진다고 하신다.

이 얼마나 미증유의 설법이며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열거한 붓다의 특성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스님께서는 밀장이라서 다 말할 수 없다고 하셨다는 점을 충

분히 해의해야 할 것이다.  재차 강조하는 바, 금생에 불과를 이루신

큰스님 회상을 만난 것에 우리 불제자는 큰 환희로 두 분 큰스님을 모

셔야하겠다.





불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


진여일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참됨의 본성을 뜻한다.  불

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에 일차적 목표를 둔다.

이 본성이란 본 면목, 자성, 참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바

로 우주의 체성이다.



  자신의 마음이 근원 일성으로 돌아가면 본 고향에 돌아온다.  그

래서 유가에서는 이를 복명이라고 하여 명(목숨)을 태어나

기 이전의 원래 생명의 시기로 되돌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견성이다.  본성을 체화하여 증득하면 그것으로 성품과

계합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까지가 삶도 죽음도 없는 시공을 초월한

경지이다.



오온은 집착을 일으키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의미하며, 이 오온이라는 것에 의해 오감이 일어난다.  오온의 본

질이 텅 비어 있음을 관하기 위해서는 계율, 특히 음계를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한다.



  사실, 불가의 가르침이 귀중한 이유는 계  정  혜  삼학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뼈를 깎는 노력과 눈물겨운 노력만

이 영혼을 환골탈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내면을 비춰 보는 것을 화광반조

라고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것, 또는 잃어버린 마음

을 찾는 것이 바로 복본심성이다.



  견성을 하게 되면 심원하고도 고차원적인 세계로 증입해 들어

간다고 큰스님께서는 전하신다.  죽 청정하고 고원하며 지고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큰스님을 제외하고 견성 이후 아라한과

이상에 대해서는 언급한 선지식이 전무하다.



  필자 수준에서도 이 논고를 작성하면서 알 수 없는 내용을 말할 수

없어 큰스님의 가르침을 열거하는 미흡한 수준을 면치 못한 점, 큰스

님께 그리고 불제자님들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큰스님의 법 세계를 필설로 언급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큰스님의 법

세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부사의하며 어마어마하고 장엄하고 거룩

하다는 점을 말해둔다.



  타종교 어디를 봐도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체계적인 위계는 전무하

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불가에 귀의 귀명한 것을 큰 기쁨으로 삼고

열심히 구법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명료한 위계는 불제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더 지고한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향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자극제가 된다는 점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일체 중

생을 비롯하여 견성과 아라한과를 이룬 수행자라면 자력 수행만을 고

집하거나 고수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큰스님이 하사하신 칭명염불선

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아 타력 수행으로 아라

한과를 넘어서 보살과 그리고 불과로 증입해 나가는데 진력할 것

을 권청하는 바이다.



희유하시고 거룩하신 부처님의 법세계를 남섬부주 대한민국에 펼쳐

주신 두 분 큰스님께 오체투지하고 예배드린다.





음계와 중계 등 戒律을 善持하라


  평판이 자자하고 저명한 세기의 석학 앨빈 토풀러는 <<제3의 물결>>

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인류 문명이 산업 사회를 넘어서 정보화 시대에

돌입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은 실제로 20세기 후반에서 금세기 초반에 이르기까

지 명확하게 들어맞았으며, 컴퓨터가 없으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물

질 문명 그리고 정보화 사회를 견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야흐로 제3의 물결로서 정보화 시대의 물결을 타고 제4의 물

결이 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웰빙(Wellbeing), 요가 명상 그리고 불교 문화 등 각종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정신 문명의 가르침에 의한 청량한 바람

이다.


제4의 물결은 고대에서 전승된 정신 문명의 청량한 바람


그러나 20세기부터 눈부시고 현란하게 발전해 온 최첨단 과학 기술

문명의 태동과 함께 세계의 물질 문명의 발달은 고삐 없는 야생마처럼

정신없이 광란의 질주를 하고 있다.  한 외국의 유명 컴퓨터 회사는 일

에 미친 듯이 집착해서 편집광처럼 일해야 치열한 경쟁 시대에서 생존

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편집병을 일으키는 과학 물질 문명이 인간의 깨끗하고 고결한 정

신 문화를 말살시키고 황폐화시키고 만 것이다.  이러한 과학 문명만을

지나칠 정도로 무분별하게 추구하고 정신 문명을 도외시하고 외면한

결과, 지구의 정신 문명과 물질 문명이라는 양대 문명은 균형에 금이

가고 절름발이처럼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맹목적인 물질 문명의 지나친 발달에 의해 탁하

게 변질된 대기에 정신 문명의 청량한 공기를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우리는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삭막한 물질 문명

이 배태한 독가스를 들이마신 채 질식한 상태로 누워, 청량한 정신 문

화의 기운을 마시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이다.  물질 문명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정신 문명을 압박하고 맹습

하여왔기 때문에 밝고 맑은 정신 문명은 많이 시들고 소멸되어 버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에 사바세계의 지구인들은 실날같은 희망을 갖고 전 세계 모든 고

대의 성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성지와 사원 등을 주유하면서 정신 문명

의 청량제를 찾아 나서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몸을 버리고 떠난 위대한 성현들의 가르침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간접적으로 성현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전

해들을 수 있으나 많은 부분 경전이 왜곡되고 변질되어서 단순히 경전

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고대 성현들의 생명에 찬 맥동하는 가르침을

얻기는 힘든 실정이다.



  그리고 현자나 성인이라고 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도 오

늘날의 과학 문명의 시대적 조류 및 시대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구태

의연한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척

파하는 한 줄기 영롱한 상서로운 빛이 사바세계 남섬부주의 지구

라는 행성의 대한민국에 비추니 경사로운 일이 아닐 수없다.



  즉 찬란한 정신 문명의 태양이 떠오르는 영산불교 현지궁을 통해서

영산 당시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및 10대 제자 분들의 가르침이

부활하고 있으니 그 서막이 바로 영산 당시 아난 존자의 후신이신 자

재 만현 큰스님의 역작인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이다.



  이 성서는 동서고금의 종교 명상 및 수행 체계 그리고 철학 사상에

대해서 심도 있게 불교의 관점에서 총섭 및 통합하여 정리해 주는 동

시에 현지사만의 독보적인 법 세계를 주창하셨다.



  수많은 영롱한 가르침들로 선별되어 있기 때문에 성서 <<21세기 붓

다의 메시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며 두뇌에 전율과 감미로

운 법열을 일으킴에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큰스님의 가르침들 중에서 대표적인 핵심 가르침으로 10대 주제를

선별하였으며 여기서는 이 10대 주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인

<음계와 중계등 계율을 선지하라>를 주제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물질 문명 그 자체는 나쁘고 좋은 것하고는 무관하다.  다만 물질의

본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집착을 일으키며 그래서 편집병적인 집착 속

에서 끊임없는 불만족과 탐욕 그리고 욕망의 불을 지피게 된다는 것이

다.  따라서 물질 문명이 온전하면서도 화려하게 발전하려면 반드시 건

전한 정신 문명의 기출 위에서 꽃 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건전

한 정신 문명의 중추에는 바로 계율 그리고 특히 음계가 자리하

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불가에서 전하는 계율이 흔들리면, 특히 성 윤리가 흔들리

면 정신 문명의 토대가 심각하게 무너지게 된다는 점을 여실히 통찰해

야 할 것이다.



  따라서 큰스님의 법 세계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는 주춧돌 역시 단연

음계 및 중계를 선지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음계와

중계가 무너지면 수행에 있어 만사가 불통이다.



  항시 음계와 중계를 철두철미하게 목숨같이 지켜야 하며 더 나아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두 분 큰스님

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엄중하게 계율을 잘 지켜나가야 하겠다.  본

고에서는 계율, 특히 음계를 지켜야하는 이유에서부터 음계를 지키는

방법, 그리고 계율을 지킴으로서 얻는 이득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음계를 범하는 것은
청정수에 똥물을 떨어뜨리는 격



  계율 중에서 으뜸인 음계가 만들어진 동기는 <<마하승기율>>에 나온

다.  부처님이 발기국의 비사리성에 있을 때, 불제자 중 야사라는 비구

가 있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조차 어려워지자 야사의 어머니는

환속을 강요하였다.



  야사가 거절하자, 어머니는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라도 하나 남겨줄

것을 부탁하였다.  야사는 그 청에 이기지 못하고 출가 전 아내와 잠자

리를 가져 아들을 얻었으나 이내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야사가 그 사

실을 부처님께서 고백하였더니, 부처님은 "처음으로 죄의 문을 열어놓

은 자"라고 크게 꾸짖으시고는 "차라리 칼로 남근을 베어버리거나 독

사의 입에 집어넣는 한이 있더라도 음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설법하

셨다.



  이와 같이 음계를 범하는 것은 단두죄에 해당함을 우리는 알아야 하

고, 큰스님의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수행자가 음계를 범하는 것은 청정수에 똥물을 떨어뜨리는 격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청정수가 우리 자신이라면 더 이상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게 되 버린다.  만약 성과(聖果)를 이룬 아라한 성자도 계율, 특히 음계

를 어기거나 또는 남이 음계를 어기도록 한다면 마음 한 구석에 불안

과 공포가 내재하게 된다는 점, 그리하여 부처님의 절대적인 가피와

위신력이 없이는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다음 단원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삼귀의계, 오계, 십선계 그리고 중계


먼저 여기서는 <<범망경(梵網經)>>의 중계(重戒)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산목숨을 해치지 말라.

둘째, 훔치지 말라.

셋째, 사음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다섯째, 술을 팔지 말라.

여섯째,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일곱째,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헐뜯지 말라.

여덟째, 인색하여 중생을 괴롭게 하지 말라.

아홉째, 화내는 마음으로 참회를 거절하지 말라.

열째,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상기에 열거한 10가지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대승보살도를 걸어가는 불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범망경>>에 “열 가지 중요한 바라제 목차가 있으니 만약 보살계를 받고 이 계를 외우지 않으면 보살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불자가 아니니라.”고 하셨다.

 여기에 추가하여 “모든 보살들이 이미 배웠으며 또 모든 보살들이 다가올 미래에 배울 것이며 모든 보살들이 지금 배우느니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재가신도들은 이 10대 중계(重戒)를 잘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다음은 큰스님께서 신도들과 재가불자에게 강조하시는 ‘삼귀의, 오계, 십선계’에 대한 가르침 내용이다.

 우선 삼귀의(三歸依)란 사전적 의미로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삼보)에 귀의하는 일”이다. 불,법,승 삼보는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 중생들이 안심입명할 수 있고 이고득락, 윤회생사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뛰어넘어 진정한 보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보에 귀명해야 한다.

 그리고 오계(五戒)란 사전적 의미로 “불교에 입문한 재가(在家)신도가 지켜야 할 5가지 계율로서 불교도이면 재가자나 출가자(出家者) 모두가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규법으로서,



①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② 도둑질 하지 말라(不偸盜)

③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婬)

④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⑤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의 5종이다.”라고 되어 있다.



 한편 십선계(十善戒)는 사전적 의미로 “불교에서 세속인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로서 십선업도(十善業道)를 행하는 것을 계율로 삼은 것이다. 오계와 십선계를 잘 지키면 결코 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하늘 세계에 난다.



10가지란

① 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② 불투도(不偸盜):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③ 불사음(不邪婬): 음란한 행위를 통해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④ 불망어(不妄語): 진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⑤ 불기어(不綺語): 교묘하게 꾸며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⑥ 불악구(不惡口):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⑦ 불양설(不兩舌):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⑧ 불탐욕(不貪慾): 탐욕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⑨ 부진에(不瞋恚): 화를 내서는 안 된다.

⑩ 불사견(不邪見): 그릇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십선은 종래의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의 확충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즉 ① ~ ③은 신업(身業), ④ ~ ⑦은 구업(口業), ⑧ ~ ⑩은 의업(意業)이 된다. 이를 범하는 것을 십악(十惡)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십악을 행하면 반드시 지옥, 아귀, 축생계에 떨어진다.



 큰스님께서는 우리 불자들, 널리 중생들에게 중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중계인 “붓다를 상대로 죄를 짓지 말라. 법(연기법)을 모독하지 말라. 그리고 오무간업을 짓지 말 것과 출가 승려들은 ‘4바라이죄’를 범하지 말라.” 철저히 당부하신다.



 만일 이 큰 중계를 파한다면 극무간지옥이나 무간지옥을 가 미래제가 다하도록 구제 받기 어렵다 한다. 설사 붓다를 만나도 구원받을 수 없다 한다.



 우리는 이 점 깊이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자와 스님들에게 음계(婬戒)를 파하면 안 된다 하시고 자위행위와 동성연애 하면 무간지옥행 한다고 강조하신다.



 한편 계율을 지킬 때 더욱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절대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지 말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의도(意圖)’를 중시한다. 만약 의도적으로 개미를 죽이거나 의도적으로 고기나 생선을 먹고 맛있게 생각하면 그것은 죄가 커진다.



 의도적으로 생선을 먹는 등 살생을 하였을 때는 목에 가시가 걸려서 안 넘어가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수행자들 간에 회자된다. 큰스님께서는, 계율을 어기는 것은 현지사 불자에게는 더 없는 죄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항상 죄를 짓지 않도록 계율을 엄수(嚴守)하도록 이르신다.



 마음으로 그냥 살생하거나 음계를 범해도 안 되겠지만 더욱이 나쁜 마음과 나쁜 의도로 살생을 하거나 음계를 파하는 것, 도계(盜戒)나 대망어계(大妄語戒)를 범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과 죄업을 불자에게 가져다 준다는 점을 미래의 여러 생을 무서운 악도(지옥, 축생)만 윤회한다는 점을 명료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삼귀의계, 오계, 십선계 그리고 중계


먼저 여기서는 <<범망경(梵網經)>>의 중계(重戒)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산목숨을 해치지 말라.

둘째, 훔치지 말라.

셋째, 사음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다섯째, 술을 팔지 말라.

여섯째,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일곱째,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헐뜯지 말라.

여덟째, 인색하여 중생을 괴롭게 하지 말라.

아홉째, 화내는 마음으로 참회를 거절하지 말라.

열째,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상기에 열거한 10가지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대승보살도를 걸어가는 불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범망경>>에 “열 가지 중요한 바라제 목차가 있으니 만약 보살계를 받고 이 계를 외우지 않으면 보살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불자가 아니니라.”고 하셨다.

 여기에 추가하여 “모든 보살들이 이미 배웠으며 또 모든 보살들이 다가올 미래에 배울 것이며 모든 보살들이 지금 배우느니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재가신도들은 이 10대 중계(重戒)를 잘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다음은 큰스님께서 신도들과 재가불자에게 강조하시는 ‘삼귀의, 오계, 십선계’에 대한 가르침 내용이다.

 우선 삼귀의(三歸依)란 사전적 의미로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삼보)에 귀의하는 일”이다. 불,법,승 삼보는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 중생들이 안심입명할 수 있고 이고득락, 윤회생사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뛰어넘어 진정한 보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보에 귀명해야 한다.

 그리고 오계(五戒)란 사전적 의미로 “불교에 입문한 재가(在家)신도가 지켜야 할 5가지 계율로서 불교도이면 재가자나 출가자(出家者) 모두가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규법으로서,



①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② 도둑질 하지 말라(不偸盜)

③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婬)

④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⑤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의 5종이다.”라고 되어 있다.



 한편 십선계(十善戒)는 사전적 의미로 “불교에서 세속인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로서 십선업도(十善業道)를 행하는 것을 계율로 삼은 것이다. 오계와 십선계를 잘 지키면 결코 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하늘 세계에 난다.



10가지란

① 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② 불투도(不偸盜):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③ 불사음(不邪婬): 음란한 행위를 통해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④ 불망어(不妄語): 진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⑤ 불기어(不綺語): 교묘하게 꾸며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⑥ 불악구(不惡口):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⑦ 불양설(不兩舌):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⑧ 불탐욕(不貪慾): 탐욕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⑨ 부진에(不瞋恚): 화를 내서는 안 된다.

⑩ 불사견(不邪見): 그릇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십선은 종래의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의 확충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즉 ① ~ ③은 신업(身業), ④ ~ ⑦은 구업(口業), ⑧ ~ ⑩은 의업(意業)이 된다. 이를 범하는 것을 십악(十惡)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십악을 행하면 반드시 지옥, 아귀, 축생계에 떨어진다.



 큰스님께서는 우리 불자들, 널리 중생들에게 중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중계인 “붓다를 상대로 죄를 짓지 말라. 법(연기법)을 모독하지 말라. 그리고 오무간업을 짓지 말 것과 출가 승려들은 ‘4바라이죄’를 범하지 말라.” 철저히 당부하신다.



 만일 이 큰 중계를 파한다면 극무간지옥이나 무간지옥을 가 미래제가 다하도록 구제 받기 어렵다 한다. 설사 붓다를 만나도 구원받을 수 없다 한다.



 우리는 이 점 깊이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자와 스님들에게 음계(婬戒)를 파하면 안 된다 하시고 자위행위와 동성연애 하면 무간지옥행 한다고 강조하신다.



 한편 계율을 지킬 때 더욱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절대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지 말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의도(意圖)’를 중시한다. 만약 의도적으로 개미를 죽이거나 의도적으로 고기나 생선을 먹고 맛있게 생각하면 그것은 죄가 커진다.



 의도적으로 생선을 먹는 등 살생을 하였을 때는 목에 가시가 걸려서 안 넘어가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수행자들 간에 회자된다. 큰스님께서는, 계율을 어기는 것은 현지사 불자에게는 더 없는 죄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항상 죄를 짓지 않도록 계율을 엄수(嚴守)하도록 이르신다.



 마음으로 그냥 살생하거나 음계를 범해도 안 되겠지만 더욱이 나쁜 마음과 나쁜 의도로 살생을 하거나 음계를 파하는 것, 도계(盜戒)나 대망어계(大妄語戒)를 범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과 죄업을 불자에게 가져다 준다는 점을 미래의 여러 생을 무서운 악도(지옥, 축생)만 윤회한다는 점을 명료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삼귀의계, 오계, 십선계 그리고 중계


먼저 여기서는 <<범망경(梵網經)>>의 중계(重戒)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산목숨을 해치지 말라.

둘째, 훔치지 말라.

셋째, 사음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다섯째, 술을 팔지 말라.

여섯째,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일곱째,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헐뜯지 말라.

여덟째, 인색하여 중생을 괴롭게 하지 말라.

아홉째, 화내는 마음으로 참회를 거절하지 말라.

열째,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상기에 열거한 10가지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대승보살도를 걸어가는 불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범망경>>에 “열 가지 중요한 바라제 목차가 있으니 만약 보살계를 받고 이 계를 외우지 않으면 보살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불자가 아니니라.”고 하셨다.

 여기에 추가하여 “모든 보살들이 이미 배웠으며 또 모든 보살들이 다가올 미래에 배울 것이며 모든 보살들이 지금 배우느니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재가신도들은 이 10대 중계(重戒)를 잘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다음은 큰스님께서 신도들과 재가불자에게 강조하시는 ‘삼귀의, 오계, 십선계’에 대한 가르침 내용이다.

 우선 삼귀의(三歸依)란 사전적 의미로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삼보)에 귀의하는 일”이다. 불,법,승 삼보는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 중생들이 안심입명할 수 있고 이고득락, 윤회생사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을 뛰어넘어 진정한 보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보에 귀명해야 한다.

 그리고 오계(五戒)란 사전적 의미로 “불교에 입문한 재가(在家)신도가 지켜야 할 5가지 계율로서 불교도이면 재가자나 출가자(出家者) 모두가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 규법으로서,



①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② 도둑질 하지 말라(不偸盜)

③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婬)

④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⑤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의 5종이다.”라고 되어 있다.



 한편 십선계(十善戒)는 사전적 의미로 “불교에서 세속인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로서 십선업도(十善業道)를 행하는 것을 계율로 삼은 것이다. 오계와 십선계를 잘 지키면 결코 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하늘 세계에 난다.



10가지란

① 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② 불투도(不偸盜):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③ 불사음(不邪婬): 음란한 행위를 통해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④ 불망어(不妄語): 진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⑤ 불기어(不綺語): 교묘하게 꾸며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⑥ 불악구(不惡口):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⑦ 불양설(不兩舌):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⑧ 불탐욕(不貪慾): 탐욕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⑨ 부진에(不瞋恚): 화를 내서는 안 된다.

⑩ 불사견(不邪見): 그릇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십선은 종래의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의 확충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즉 ① ~ ③은 신업(身業), ④ ~ ⑦은 구업(口業), ⑧ ~ ⑩은 의업(意業)이 된다. 이를 범하는 것을 십악(十惡)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십악을 행하면 반드시 지옥, 아귀, 축생계에 떨어진다.



 큰스님께서는 우리 불자들, 널리 중생들에게 중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중계인 “붓다를 상대로 죄를 짓지 말라. 법(연기법)을 모독하지 말라. 그리고 오무간업을 짓지 말 것과 출가 승려들은 ‘4바라이죄’를 범하지 말라.” 철저히 당부하신다.



 만일 이 큰 중계를 파한다면 극무간지옥이나 무간지옥을 가 미래제가 다하도록 구제 받기 어렵다 한다. 설사 붓다를 만나도 구원받을 수 없다 한다.



 우리는 이 점 깊이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자와 스님들에게 음계(婬戒)를 파하면 안 된다 하시고 자위행위와 동성연애 하면 무간지옥행 한다고 강조하신다.



 한편 계율을 지킬 때 더욱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절대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지 말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의도(意圖)’를 중시한다. 만약 의도적으로 개미를 죽이거나 의도적으로 고기나 생선을 먹고 맛있게 생각하면 그것은 죄가 커진다.



 의도적으로 생선을 먹는 등 살생을 하였을 때는 목에 가시가 걸려서 안 넘어가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수행자들 간에 회자된다. 큰스님께서는, 계율을 어기는 것은 현지사 불자에게는 더 없는 죄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항상 죄를 짓지 않도록 계율을 엄수(嚴守)하도록 이르신다.



 마음으로 그냥 살생하거나 음계를 범해도 안 되겠지만 더욱이 나쁜 마음과 나쁜 의도로 살생을 하거나 음계를 파하는 것, 도계(盜戒)나 대망어계(大妄語戒)를 범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과 죄업을 불자에게 가져다 준다는 점을 미래의 여러 생을 무서운 악도(지옥, 축생)만 윤회한다는 점을 명료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음계와 중계의 중요성


 음계와 중계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중언부언(重言復言)할 것 없이 정문요찰(正文料察)해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음계를 파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독(毒)으로 상처받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매우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 영혼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수행자가 음계를 범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그래서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바대로 중계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음계를 지키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음계를 범하면 다른 중계도 범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지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음계를 철옹성처럼 잘 지킬 수 있을까? 해답은 완전한 금욕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의 팔정도의 가르침을 통해 삼매(Samadhi)의 힘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혼의 힘으로 음욕과 성욕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력을 넘어서 영혼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



영혼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면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성욕이 일어나는 순가 그 성욕이 왜 일어나는지 여실하게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젊었을 때 번뇌에 휩쓸리거나 잡스러운 생각이 발동하거나 혹은 삿된 마음이 일어나면 상당수가 성적 스트레스로 발전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를 무너뜨리고 성적 노예가 되는 것이다.



 우선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성욕이라는 것은 순수해야 한다. 서양의 대문호헤르만 헤서의 소설 <데미안>에서도 주인공 싱클레어가 성욕을 좋은 쪽으로그리고 건전한 쪽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신성한 마음을 얻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견성을 하여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이러한 싱클레어와 같이 성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올바른 견해로 성욕을 순수하게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상을 내면에 고이 간직함으로써 싱클레어는 순수한 여인상에 대한 동경 속에서 산다. 이런 점에서 음욕에 잘 휘말리는 재가신도는 자신의 내면에 여성상(남성상)을 깨울 수 있는 순수한 여성상(남성상)을 그리며, 이상적인 여성상(남성상)을 내면에 고이 간직하는 것도 좋다.



 마음 속으로 성스러운 내면의 여성상(남성상)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것 만으로도 어느 정도 음욕과 성욕을 절제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다소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완전한 금욕에 이를 수는 없다는 것을 명지해야 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자신의 내면에 여성상과 남성상이 하나로 조화를 이룰 때 위빠사나 명상 수행이나 석가모니부처님을 구칭(口稱)하는 칭명염불 수행 등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깨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내명이 풍요로워지고 순수해지고 그러한 순수성이 깨어나면 정신이 깨어나고 의식이 명료해진다.



 이러한 단계를 통해 삼매(Samadhi)에 도달하게 된다. 일단 삼매에 들면 맑은 정신이 하루 종일 지속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성적 번뇌가 일어나도 확연히 지혜의 눈에 비춰 보이며 자신이 언제든지 그러한 성적 에너지(의식)를 간파할 수 있어 성적 노예가 되지 않는다.

 아라한을 증위하면 성적 번뇌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



 자력으로 불가능하면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발원하고 칭명염불(석가모니불 혹은 관세음보살을 고성으로 칭명하라) 수행에 정진하고 큰스님의 대작 불사에도 참여하는 등 부단히 노력하는 한, 언젠가 금욕 수행은 완성에 이르고 자유와 해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즉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무애(無碍)한 자유인이 되게 된다. 물론 여기까지가 큰스님께서 사자후하신 아라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위빠사나 명상 수행이나 칭명염불 수행에 들게 되면 반드시 현지사 두 분 큰스님과 같은 대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올바른 스승이란 인류를 위해서 그리고 무한한 자비와 연민심으로 제자를 받아들여 잘 성숙하도록 지도하고 인도하는 분을 의미한다.



 스승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삼매에 들 수 없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한편 음욕 내지 성욕이 일어나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우선 재가 청년 불자의 경우에는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해 줄 미래의 연인을 위해서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처님과 큰스님을 존숭하는 고귀한 불제자가 되기 위해서도 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하게 마음을 다져야 한다.



 그리고 장년 불자의 경우에는 음욕과 성욕은 반복적 권태만을 일으키고 삶을 무기력하게 한다는 것을 여실히 관(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내의 시험을 잘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항상 마음 속에 더러운 욕망을 타파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열정으로 승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욕이 계속 일어나면 마음을 밝히는 불교서적인 <<숫타니파타>>, <<법구경>> 등을 열심히 읽고, 부처님 대승경전인 <<아함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을 많이 읽도록 해야 한다. 물론 석가모니부처님의 성호(聖號)를 항상 끊임없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억념(憶念)해야 할 것이다.





신․구․의 삼행을 삼가고 지키는 것이 계율

 계율은 중요하다. 계율이란 삼가고 지켜야 하고 보호해야 할 법이다. 자신의 신․구․의 삼행(三行)을 삼가고 지키는 것을 계율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음계는 계율의 중핵(中核)을 이룬다.



 그렇지만 재가신도가 무조건 계율만을 지키려고 하면 삶을 원활하게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오늘날의 불교인들은 하소연한다.



 그러므로 큰스님 말씀대로 정해진 부부관계인 정음(正婬)과 부부가 아닌 사람과의 관계인 사음(邪淫)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현지사 재가신도들은 모두 정음을 지켜야 할 것이다.



 정음이란 첫째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문란한 성 관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 부부관계를 해야 할 때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때나 부부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도량이나 임금의 궁, 열녀들이 살았던 곳, 절 등에서 부부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나치게 많이 해서는 안 되며 이치에 반하는 때에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50대에 들어서면 비구(니)같이 수도 정진하여 윤회를 벗어나고 정토에 가 나려면 일체의 음행을 금해야 한다고 큰스님께서는 말씀 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음계를 범하지 않아도 남이 음계를 범하도록 하거나 남이 음계를 범한 것을 기뻐하거나 칭찬하는 것음 모두 금물(禁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큰스님께서 현지사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과 같으며 <<범망경(梵網經)>>이라는 경전에도 잘 나온다. 여하튼, 우리 재가신도들은 결코 어떠한 이유를 두고서라도 음계를 범하거나 음계를 범하도록 하거나 남이 음계를 범한 것을 기뻐하거나 칭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편 견성(見性)을 하게 되면 큰스님께서도 말씀하신 바대로 만고의 적조요 광명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공간계의 변형이 일어나게 되면 순수한 청정심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므로 절대로 성 에너지라는 똥물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수행의 목적은 해탈과 삼매를 얻어 자유인이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 그 어느 것보다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유나 사유를 불구하고 음욕이나 음심으로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음욕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일으키는 근원이라고 불교의 경전과 큰스님께서 친히 일러주셨다.



 그러므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음욕을 단멸(斷滅)시켜야 한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음욕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존건 재가신도가 옹고집으로 음욕을 끊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마음과 부처님에 대해 귀의․귀명하고 참회․발원을 해야 한다. 음욕을 무조건 벗어나는 것이 수행자의 주된 목표가 아니라 음욕을 초탈해 나가는 점진적 과정(Process)을 통해서 진실로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전생의 죄업의 크기를 통절히 실감하고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음욕(淫慾)을 끊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그러므로 간절하고도 간절히 부처님 전에 참회하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믿고 정진에 정진을 더해야 할 것이다. 자력으로 음욕을 끊을 수 없다면 부처님의 위신력, 타력을 받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음계를 범하게 되면 우리 신체의 에너지 체계(시스템)이 무너지고 에너지체, 즉 영혼체가 헝클어진다. 그리고 탐․진․치에 물든 중생심(衆生心)이 마음에서 커지게 된다.



 이러한 독소(毒素)가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도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음계를 깨게 되면 다른 계율을 지키기 어렵게 되고 다른 계율을 범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하셨다. 또 결코 선정에 들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윤회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신다.



 음계를 범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범하는 것으로 음욕과 불법은 상극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음계를 투철하게 지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진실 되고 훌륭한 인격체는 내면에 보수적인 음성(陰性)과 고요함을 간직하고 외면으로는 진보적인 양성(陽性)과 역동성을 가져야한다고 알고 있다.

 자신을 다스리며 보호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외적인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첫째도 계율, 둘째도 계율이다(1)


 계율이 없으면 부처님의 법은 존립할 수 없다. 계율에 대해서 다시 묶어서 부연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 불자들은 금생도, 다음 생도 보다 잘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금생에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 죽어 지옥 등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물론 중음세계에 머무는 일도 없고), 54품 하늘을 지나. 성중하늘(1,2,3하늘)을 벗어나 아라한 나아가 정토에 왕생-삼계를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큰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우선되어야 한다.



 이런 불자들은 먼저 부모께 불효하거나 오역죄, 그리고 정법을 폄훼 훼손하는 죄, 부처님을 모독 능멸하는 죄를 짓는다면 극무간지옥,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사람 몸을 어쩌다 받아 온대도 뇌성마비, 삼중고............. 등의 큰 업병을 얻는다. 다행히도 붓다 회상을 만나 이 큰 지중한 죄업을 씻지 못한다면 거의 미래제가 다하도록 무간지옥에서 산다.



 오역죄(오무간업)는,

  1, 아버지를 죽임, 

  2. 어머니를 죽임, 

  3. 아라한(성인)을 죽임,

  4. 부처님의 수행 교단을  파괴함, 

  5. 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냄

      이상을 소승의 오역죄라 하며,



 대승의 오역죄는,

  1. 탑사(塔寺)를 파괴하고 경상(經像)을 불사르고 삼보의 재물을 훔침, 

  2. 삼승법(三乘法)을 비방하고, 부처님 법(正法)을 경천하게 여김,

  3. 스님네를 욕하고 부림, 

  4. 소승의 오역죄를 범함, 

  5. 인과의 도리를 믿지않고, 악구(惡口),사음(邪淫) 등의 십불선업(十不善

     業)을 짓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행자가 범해선 안 될, 사중죄(四重罪)가 있고 우리 불자들이 지어서는 안 될 십불선업(十不善業, 十惡業)이 있다. 삼보를 훼손하거나 불법의 온갖 금계(禁戒)를 파기하지 말고 또한 국법을 지켜야 한다.



 출가 비구(수행자)가 음(邪淫), 살(殺), 도(盜:도둑질), 망(妄:대망어, 큰 거짓말) 곧 사중죄를 지으면 중지옥, 무간지옥을 간다. 이중 음(淫), 사음죄는 출가 수행인으로서 가장 무서운 죄이다.



 한 번이라도 여인과 사음을 하면 그대로 단두(단두)가 되 승려 자격을 잃는다. 현지사에서는 자위행위, 동성연애도 이성과의 사음죄와 똑같이 징벌한다.



 우리 불자들이 지어서는 안 될 십불선업(10악업)은, 앞에서 나오는 십선계(十善戒)에서 열 가지 계목(戒目)을 음미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윤회를 벗어나고, 삼계(삼계)를 탈출해서 보살과를 얻어 극락정토에 나려고 보살행을 하는 수행인들은 <<법망경(법망경)>>의 보살 십중대계와 사십팔계를 지키도록 할 것이다. 여기서는 십중대계만을 말씀드린다.



 1.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2. 도둑질하지 말라(不偸盜)

 3. 간음하지 말라(不邪淫)

 4. 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

 5. 술을 빚지(빚어 팔지)말라(不販酒) 6. 4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不說四衆過)

 7.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지 말라(不自讚他毁)

 8. 간탐하지 말라(不惜加毁)

 9. 화내어 참회를 받지 아니하지 말라(不瞋心 不受悔)

 10.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不謗三寶)



위 10가지 금계는 그 인(因)이나 연(緣)이나 방법으로 업(業)을 짓는 것을 금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불살생의 경우 죽이는 인이나, 연이나, 방법을 사용하거나, 업을 지어서 온갖 생명 있는 것을 짐짓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직접 죽이거나, 남을 시켜서 죽이거나, 방편을 써서 죽이거나. 칭찬을 해서 죽이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을 외어 죽이는 것들을 엄히 금하고 있다.



 이 십중대계를 크게 범하면 무간지옥을 돌다 아귀 축생보를 받고 참기 어려운 큰 고통 속에 산다. 사람 몸을 받아와도 불구자 아니면 큰 업병을 받아 나는 것이다.



 끝으로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우주 질서를 거스르는 짓, 그 기밀을 누설하는 짓 등은 큰 죄업이 되는 것이니 이를 명심해야 할 계율로 삼기 바란다.






첫째도 계율, 둘째도 계율이다(2)


귀신 영가가 빙의되서 사람의 앞날을 예언한다거나 용신이나 망량신에 빙의 돼서 뭇 여인들과 간음하며, 외도 하늘 신 등이 붙어서 작위적으로 우주 질서를 파괴하는 신통은 중지옥, 무간지옥을 거쳐 혹 축생.인간 몸을 받아나더라도 몇 생 혹은 몇 십 생 정신이나 육체 장애자로 태어나서 고통 받아야 하는 과보가 정해진다는 것, 가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신통이란 눈 먼 중생을 오도하고 기본적으로 큰 죄업을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신통을 금기하신 것이다.



 또한 종교를 초월해서 이교도들이 절(寺)의 불상을 우상이라 해서 목을 치고 탱화, 전각을 파괴 방화하는 일은 무간지옥을 가게 되고, 인신을 받아 오더라도 문둥병 같은 저주스런 병을 얻는다. 이것도 몇 생, 몇 십 생토록 그 악업의 과보는 길다는 것을 알아서 금계로 삼아주면 좋겠다.



 법의 지존이신(보신불이든 화신불이든 간에) 불보살의 집을 파괴하는 악행에 대한 업보이다. 이 점 유념하고 명심해야 할 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해둔다.



 우리는 실로 다겁 생 이래로 여러 과거 생에 지은 크고 작은 업들이 태산을 이루고도 남는다는 것, 아직 갚음(報)을 받지 아니한 업력들이 다음 생 그 다음 생........의 몸뚱이 부모, 처자, 수명, 환경 등 모든 운명적인 것들을 창조하고 있는 것, 극히 적은 이들을 빼 놓고는 앞으로 받아야할 업보가 말씀드리기 안타까울 정도이다.



 지옥보, 축생보, 아귀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착하고 바르게 팔정도로 열심히 살았다면 하늘 보(報)가. 더욱 부처님 공부 잘하고 정법을 위한 공덕 많이 지었다면 성중에 날, 극락정토를 가 날 수가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인간들 대다수가 죄업을 많이 짓고 살기에 죽어 가는 곳은 지옥 축생 같은 악도요, 다시 사람 몸을 받아 온다 하더라도 얄궂은 운명으로 산다. 삼재와 팔난을 만나 산전수전 다 겪고 살기 마련이고, 부처님 공부를 성취해서 윤회전생을 벗어나려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아니면 시간을 내어 마음 공부 하고자 선방을 찾고, 산속에 토굴을 마련 수행 정진 한다 해도 큰 스승 못 만나면 과거 생에 짓고 맺은 업연 때문에  온갖 악연 영가들 용신이나 이매망량들, 원결 영가들이 빙의 되거나 더욱 큰 문제는 천마가 붙는다는 것이다.



 이 빙의를 그 어떤 선지식이 있어 떼어 줄 것인가? 이 뿐인가, 지난 세상에 지은 악업으로 인해 영혼체는 불구가 되었고, 쇠 철사로 반쪽 영혼체 모두가 둘둘 감겨있기도 하니 이러한 입장에서 용맹 정진할 수가 있을까?



 다겁 생으로 오면서 지은 악업으로 인한 탁한 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성(性)과 사마의 유혹에 또한 결정적으로 약하다.



 생명 존엄을 말하면서 불살생을 첫 번째 계율로 꼽는 불교야말로 과연 우주적인 종교임에 틀림없다. 붓다는 우주의 이법, 진리 자체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청정 계율을 범하는 것은 바로 우주질서에 반하는 짓이다. 이 경우 우주의 힘, 카르마 법칙의 제재를 받게 돼있다. 동서고금, 국경, 성별, 종교를 초월해서 불교의 금계를 어긴 자는 우주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기에 제재라는 고통의 과보가 따르는 것이다.



 마음 공부하는 수행인들이나. 불자들이 불법의 계율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악업 죄업을 더 이상 짓지 않고, 탐진 삼독 번뇌를 묶어 둔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억겁 다생을 내려오면서 지은 업, 업장, 습, 기 그리고 빚은 어떻게 소멸시켜야 하고, 갚아야 될까?

 탐진 삼독 번뇌의 뿌리는 어떻게 해서 뿌리를 뽑아야 될까?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경전을 독송하고 다라니를 송하고, 참회하는 길이 있다고 한다. 이는 다만 지은 업장을 정화하는 기능뿐이다. 결코 소멸은 못한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탐욕 등 번뇌 그리고 업장, 습, 기는 다시 말하자면 자력의 방법 그 무엇으로도 업장 소멸은 불가능하다.  탐욕의 뿌리는 뽑을 수 없다 - 고 큰스님께선 단언하신다. 다만 부처님 절대하신 가피로 이 모두는 해결이 된단다.



 2007. 7 어느 날 붓다의 회상인 현지궁 현지사에서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40여 명의 상좌 대중스님들 앞에서, “오늘 부처님께 공양 올린 00제자는 친히 부처님께서 12겁을 축생으로 살아야 할 업보와, 지옥보 모두를 단절해 주셨다. 이 제자는 이승을 다 살면 곧 닭의 몸을 받게 되어 있었다.”고 쇼킹한 뉴스를 발표하셨다. 그 제자는 바로 전에 5하늘(도리천)에서 온 착하고 진실한 수좌 000이다.



 아! 부처님의 우주적인 능력이여, 가슴에 벅찬 환희로운 소식 아닌가, 오직 칭명염불 수행만이 중생 모두가 구원받을 길로 확신한다.






진실된 孝란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부처님의 성전(聖典), <<법화경>>에 보면 독을 먹어 제 정신이 아닌 사랑하는 아들들을 구제해 주고자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주적인 아버지, 석가모니부처님의 자식들에 대한 그 애틋하고 거룩하신 사랑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의 자식들로서 오욕락(五慾樂)에 빠져 있지만 부처님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겨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 온 마음 혼신의 힘으로 일(Work)하고 계신다.



 우리는 부처님을 위해서 억겁을 두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허물어지는 고통을 당한다 해도 그 은혜 다 갚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주적인 영혼의 아버지에 대해 은혜를 갚는 것에 있어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이 효(孝)다. 하지만 육체를 낳아주신 어버이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불교의 위대함은 부모의 영혼을 구제하는 천도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큰스님께서도 설법하신 바와 같이 “문화사적으로 볼 때 역사가 깊고 또 상당한 철학을 지니고 있고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거느리고 있는 대종교라 할 수 있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그리고 자이나교, 힌두교 및 유교와 도교 그 어느 세계적인 종교를 살펴봐도 천도에 대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 불제자들은 알아야 한다.



 불교만이 천도라는 방법으로 부모를 위해 효를 다한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렇게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를 위해서 영혼을 구제하는 천도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일반적으로 마음을 편안히 해드리고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것, 즉 육신 봉양을 위주로 효를 행하고 있다. 물론 부모가 돌아가시면 제사를 반드시 지내 영혼을 위로한다. 하지만 제사로서는 진실된 영가 천도를 할 수 었다는 것이다.



 진실된 효는 부모의 육신을 봉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을 구제해 주는 것이다. 영혼 구제는 불교의 천도재 밖에 없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예의다.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중생심이 많은 자녀들의 경우 성인이 되어도 부모님의 귀에 거슬리게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말에는 힘이 있다. 그래서 잘못된 말이나 삿된 말 등 부모님께 해를 끼치고 마음을 상하기 하는 말은 절대로 삼가야 한다.



 이러한 잘못된 말은 아주 나쁜 구업이 된다. 부모님의 마음에 못을 박는 구업을 지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너무 기본적인 이야기이나 날 지켜지지 않아서 말씀해 둔다. 부모님께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부모님에 대한 자녀로서의 도리요 예의요 효인 것이다. 더 나아가 병든 부모님의 똥오줌을 더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부모를 잘 시봉해야 한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고 여행을 보내주고 병간호를 하는 것 만으로 효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큰스님 말씀대로 영혼을 구제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부모은중경>>에서 “물질적인 공양을 하고도 삼보를 믿게 하지 못하면 아직도 불효를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반드시 부모님만을 봉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선대, 즉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등 조상들에 대해서도 효를 다해야 한다. 그래서 천도대재가 꼭 필요한 것이다.



 조상 영가들에도 효를 다해야 하는 이유는 부처님과 현지사의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신의 조상님들 중에는 전생에 자신과 가족의 인연을 맺은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빚과 은혜를 갚아야만 보살과를 증위하는 공부를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조상 영가를 천도하지 못하고서 보살과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계시이고 큰스님의 말씀이다.



 불교에서는 천도대재를 통해서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 영가들을 천도해 드린다. 큰스님께서는 육도 윤회 중에서 삼악도의 실상을 보면 경악(驚愕) 그 자체라고 하신다.



 특히 지옥의 실상은 너무나 무시무시해서 등골이 오싹하거나 소름이 끼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산적해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 고통 받는 영가들을 구제해 주는 것이 진실된 효라고 이르신다.



 만약 진실된 불제자라면 조상 영가들이 지옥고를 받는 것을 그냥 방치하고서 혼자만 윤회 생사를 벗어나고, 보살과를 증위하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비록 실수에 의한 살인을 행한 자라도 효도를 지극 정성으로 하고 부처님께 귀의, 귀명하고 자신으 죄에 대해서 통절히 참회, 발원한 사람은 살인죄도 면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렇다고 살생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모님과 부처님에 대한 효가 얼마나 우주적으로 중요한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모은중경>>과 불교적인 효(孝)

 천도대재와 효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차후 단원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본 단원에서는 <<부모은중경>>을 통해서 부모님의 은혜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부모은중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설하셨다.

 “내가 중생을 살펴보니, 비록 사람의 모양을 갖추었으나 마음과 행동이 어리석고 어두워, 부모의 크신 은혜와 덕을 생각하지 못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그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배반하며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효도하지 않고 의롭지 못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과 행동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부모에 대해 불효를 저지른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몸을 닦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심신 수양이 부모를 위한 효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 두고 현지사의 신도라면 칭명염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염불 수행을 하면 내공이 생기고 법력이 생긴다. 그래서 말을 해도 힘이 붙는다. 참고로 법력이 뛰어난 스님들의 말에는 내공이 많이 실리기 때문에 스님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생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도 하고 위안을 주기도 한다.



 스님들은 독경을 하고 염불을 많이 하여 일반인에 비해서 수승한 내공을 연마하고 법력을 구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러한 스님들의 말은 범부 중생들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만약 법력이 높은 스님을 해하려고 하거나 그 분들을 화나게 하면 매우 안 좋은 업을 쌓게 된다. 그래서 법력이 수승한 큰스님을 대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어서 부처님께서 <<부모은중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어머니가 아이를 밴 열 달 동안은 일어나고 앉는 것이 편치 아니하여 마치 무거운 짐을 진 것 같고,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않아 마치 큰 병이 든 사람과 같다. 달이 차서 아이를 낳을 때는 한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잠깐 동안의 잘못으로 아이가 살지 못하는 무상함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돼지나 양을 잡은 것 같이 피가 흘러 자리를 적신다.



 이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 몸을 낳고는 쓴 것은 당신이 삼키시고, 단 것은 다시 뱉어 아기를 먹이면서 안아 주고 업어서 기른다. 더러운 것을 빨아도 싫어하지 않고, 더운 것도 참고 추운 것도 참으며 고생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마른 데는 자식을 눕히고 젖은 데서는 어머니가 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머니의 은혜는 한이 없다. 이러한 어머니의 은혜를 망각하고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2500여 년 전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내용이 지금에도 유효하다는 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큰스님께서는 빚,은혜를 갚아야 깨달음을 얻어 삼매에 들 수 있다고 하셨다.



 부모에 대한 빚,은혜를 갚지 못하고서 어찌 혼자만의 깨달음을 추구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부모은중경>>을 읽어보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그만큼 어머니는 소중한 존재이다.



 다음으로 <<부모은중경>>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렇듯 3년 동안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 나이를 먹으면 예절과 의리를 가르치며, 장가들이고 시집보내며, 공부시켜서 관직도 얻게 하고 직업도 갖게 한다. 힘들여 가르치고 애써 기르는 일이 끝났더라도 베품이 끊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들이나 딸에게 병이 있으면 부모도 병이 생기고, 자식의 병이 나으면 부모의 병도 바로 낫는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부모는 아이들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한다. 오늘날의 부모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위해서 몇 개의 학원을 보내는가 하면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신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 자녀를 지닌 젊은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는 것만큼 부모에게 잘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인생은 업에 의해서 상당 부분 움직이므로 부모에 대한 효를 하지 않고 자녀만을 돌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부모에 대한 효가 자녀에 대한 사랑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마음과 행동이 어리석어
불효를 저지른다 (1)


<<부모은중경>>을 계속 읽어보자

“이렇게 온갖 애를 쓰고 기르면서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여 장성하였으나 그 자식은 (부모님의) 은공을 모르고 효도하지 않는다. 부모와 더불어 이야기하거나 응대함에 있어서도 눈을 흘기고 눈동자를 굴린다. 집안 어른을 속이고 업신여기며, 형제간에 싸우고 욕설하며 친척을 헐뜯고 예의가 없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고 부모의 분부도 어기고, 형제간에 말할 적에도 일부러 서로 어긴다.



 출입 왕래할 때에도 어른께 말하지 않고 말과 행동이 버릇없이 괴상하며 제멋대로 일을 처리한다. 이런 것을 부모로서는 훈계하여 책망하고, 어른들은 잘못된 것을 일러주어야 할 것인데 철없는 어린아이라 용서해 주고 덮어주기만 한다.



 그래서 점점 자라면서 어른의 말을 어기고 거스르며, 잘못한 일도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성을 내게 된다. 좋은 벗은 버리고 나쁜 사람을 사귀며, 그러한 습관이 성품이 되어서 드디어 몹쓸 계획을 세우며, 남의 꼬임에 빠져 마침내 부모를 배반하고 객지로 도망하여 집을 떠나 고향과 이별하게 되며, 혹 장삿길로 나가거나 혹 싸움터에 나가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객지에서 제멋대로 결혼하게 되면, 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혹은 타향에서 (살 동안) 삼가고 조심하지 않다가 남의 꾐에 빠져 뜻밖의 일에 걸려들어 죄를 짓고 형벌을 받기도 하며, 감옥에 갇혀 수갑을 차게 된다. 혹 병에 걸려 고난을 당하거나 액난에 얽혀서 곤란하고 고통스럽고 배 곯며 고달파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이 남들의 미움과 천대를 받기도 한다.



또 길거리에 나앉아 죽게 되어도 누구 하나 구호하고 치료해 줄 사람이 없다. 시체가 붓고 썩어서 볕에 쬐고 바람이 불면 백골이 뒹굴어 타향 땅에 버려져서 친척들과 즐겁게 만날 기회는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따라 길어 걱정하고 근심하며 혹은 울다가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고 혹은 너무 슬퍼 하다가 기가 막혀 병이 되기도 한다. 혹 자식 생각에 몸이 쇠약해져 죽기라도 하면 이로 인하여 외로운 혼은 원혼이 되어서도 끝내 자식을 잊지 못하게 된다.



이 얼마나 부모의 사랑이 위대한가 말이다. 자식들을 귀여워 해주고 어여삐 여겨 키워주었지만 정작 자녀로부터 봉양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자녀를 생각하다가 돌아가시는 부모의 마음을 어찌 자녀가 알 수 있겠는가?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