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5일 일요일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2]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만현 큰스님께서 불교의 정법수호 차원에서 펴내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대한 존평입니다.  큰스님의 법력

이 실린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정독함

으로써, 제가 10여 년 간 수행하면서 배운 내용이 일목요연하

게 정리되는 동시에 미혹했던 사실들을 털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저에게 크나 큰 부처

님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학비재한 제가 감명 받고 느낀 점을 동 서양의

수행 체계와 철학사상을 중간 중간 곁들여서 나름대로 큰스님

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얼마나 전대 미문의 신기원을

여는 불서이자 미중유의 보서인지에 대해 존평

글의 내용이 큰스님께 누가 된다면 그것은 바로 저의 부족함이

지 결코 큰스님과 큰스님의 불후의 성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잘못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큰스님의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법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누가 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동 서양의 성

현들의 가르침을 기초하여 다소 현학적인 어휘를 구사하여

글을 전개하였습니다.  비록 저의 글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서술되어 있다 하더라도 큰스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

기 위하임을 인식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한 한 쉬운 어휘를

선택하려고 했으나 고대의 성현들께서는 영젹 어휘와 현학
적 언어 구사 및 철학적 사유가 영적 각성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점을 착안하여 본 글에 사용할 어휘를 선별하

였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본 글을 읽기에 앞

서서 아직 큰스님의 자비와 심혼이 담긴 불자들을 위한

진법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지 않으셨다면 반

드시 정독하신 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의 법좌 아래 오체투지하며





1.  근본불교의 복원을 위한 큰스님의
     거룩하신 사자후


1. 거룩한 신비 
"The most beautiful thing we can experience is the

mysterious.  It is the source of all true art and all science.

He to whom this emotion is a stranger, who can no

longer pause to wonder and stand rapt in awe, is as

good as dead: his eyes are closed." - Albert Einstein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신비로움입니다.

신비로움은 모든 진실된 기예와 모든 과학의 근원입니다.

감성이 더 이상 경탄이나 경외로움으로 황홀해 할 수 없는 이

방인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그의 눈은 닫혀있는

것입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20세기 세계 최고의 지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알버트 아인슈타

인은 말년에 동양사상인 주역에 심취하였고, 이국 종교로

서 불교의 가르침을 대면한 후 이 지구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종교라고 말하며 깊은 감명을 표현했습니다.  서양의 종교들은

종교 전쟁이라는 유혈을 통해서 패권(Hegemony)을 장악하려고

하였으며, 그 전쟁 시대에 백성들의 마음은 암운의 그림자

속에 갇혀진 채 슬픔과 고뇌로 흐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불

교는 지구의 어떤 종교와 달리 시대를 초월하여 비폭력(/아힘사

Ahimsa)을 수호해온 매우 순수한 종교임을 우리 불제자들은 자

부심과 긍지를 갖고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신비로움과 호기심

을 가질 것을 후학에게 역설하였습니다.  학인이 우주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신비로움에 대한 찬미를 가슴속에 간직하지 않

는다면 그는 까막눈이나 다름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실존주의

사상가 야스퍼스는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을 보고 실존적 미소

의 극치를 자아낸다고 찬탄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큰스님의 저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도 언급했던 것

처럼 마르틴 하이데겨나 엠마뉴엘 칸트 또한 실재의 세

계를 동경하였고 탐구하였습니다.  또한 정신분석 심리학의 거장

구스타프 카를 융과 노벨 문학상를 수상한 헤르만 헤세의 진지

한 성찰과 사색이 담긴 서적과 글 속에서도 불교와 동양세계에

대한 심원한 갈망과 동경이 아름답게 녹아 흐르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 또한 불교와 힌두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사상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회자됩니다.  이렇

듯 서양의 과학자와 사상가 모두가 동양 수행과 종교의 정수

인 불교를 대면하고 많은 감동과 기념비적인 연구 성과와 작

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 금세기 최고의 주옥같은 가르침이 아로새겨진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어느

시대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미증유의 최상승 법력이

통합되어 있는 보경입니다.  지구 역사상 최고의 종교인 불

교 가르침을 극명하게 정리해 주고, 가장 수승한 견지에서 써

주신 큰스님의 위대한 통시대적인 사자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의 경전인 <<법화경>>에는 ""보탑이 땅에서 솟아오르고'라

는 대목이 나오며 <<화엄경>>에는 "온갖 법계가 불보살로 겹겹

이 장엄된"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도 선근이 부족한 일반 신도들이 대면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려

운 내용이 소개됩니다.  그래서 일부 미혹한 구도자들이나 간화

선 일변도의 병폐를 지닌 선 불교에 집착하는 구도자들은 희유

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단순히 신비성 조장으로 치부

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이는 잘못된 구도자들의 견처입니다.  삼천대천세계를 주관하

시는 거룩하신 불보살님들께서 과연 이 정도의 신통을 구족하

지 않았겠습니까?  불보살을 믿고 정진하여 진실로 불보살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지혜와 광명의 눈이 열릴 때까지는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에 대한 비방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여러 경전들은 다분히 신비스러울 정도로 경

이적인 이야기와 가르침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처님

의 세계와 가르침을 단순히 신비스러움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비스러움이라는 것은 가르침의 진

수를 드러내고자 방편으로 나타내시는 것이지, 그 자체에 의미

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깨달음 자체가 다분히

신비주의적 성향이 없지 않기 때문에, 즉 유대 신비주의의 카

발라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을 위시한 기독교 신비주의, 인

도의 탄트라, 티벳의 밀교 등 다양한 종교와 영성 분야가 신비

주의를 구심점으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

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자체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구도자들의 세계이며 명재계(눈에 보이는 우주) 이면에 존재

하는 암재계(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를 통해서 증득한 경지가 깨달

음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바세계라는 윤회세계는 명재계로

서 문제 공간에 해당하며 절대 세계라는 법계는 암재계로서 모

든 문제의 공간에 해당하며 절대 세계라는 법계는 암재계로서 모

든 문제의 해답을 갖고 있는 불보살님의 세계로 문제 공간에

대비되는 해법 공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신비로움은 과학적 사유를 능가합니다.  우주는 신비로움

자체입니다.  21세기 심리학 분야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알려지

고 초인격 심리학을 주창한 켄 윌버는 <<물리학의 도 (The Tao

of physics)>>를 짓고 신과학을 표방한 프리초프 카프라 교수의

세계관을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이라는 잣대로 신비주

의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제가 생각해도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종교는 신성한 것으로 과학보다 초월적이며 신비로움 그 자

체입니다.  종교를 미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프리초프

카프라 교수가 신과학을 주창했을지 모르나 한 발자국 더 나아

가면 신과학의 세계는 과학과 종교를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

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의 신비로움을 과학으로 이

해하고 풀어내려고 하는 것은 어딘가 모순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는 신비로움이며 미신이 아니며 과학

을 초월합니다.  그리하여 경이로움과 경외감만이 종교를 감싸고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신비로운 종교의 이면을

비춰 보인 큰스님의 심혼이 담긴 미중유의 서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큰스님의 저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동

서양 최고의 종교로서 불교가 그동안 감추어온 신비의 베일을

걷고 불제자와 불교 신도들 그리고 다른 종교의 구도자들에게

까지 그 형언할 수 없는 용모를 비춰보였다는 점에서 매우 희

유하고 진귀한 전대 미문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양에서도 21세기는 아쿼리스문명의 시대가 도래

한다고 하였습니다.  동양의 신흥 종교에서는 개벽을 이야

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퀴리스 문명과 개벽의 실재는 아직

까지 묘연할 뿐입니다.  진실로 실재의 현전을 수많은 불

제자와 구도자글은 추구하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큰스님의 저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렇게 그동안 고원하고 지고하며

궁극적인 실재(Supreme and Ultimate Reality)를 갈망하고 그것의

현전을 간절히 염원해왔던 수많은 구도자들과 불제자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하고 정신과 온몸을 전율케 하는 보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부처님의 실재는 동서양에서 잘 알려진

깨달음의 현전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지고하고 궁극적인

실재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단순히

표현에 불과합니다.  실재(Reality)는 말 그대로 체득을 통해서 얻

어져야 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의 수행 경

험을 토대로 불교가 은장하였던 신비로움의 베일을 걷고

불교의 정수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으며 불보살님들의 세계를

제가 아는 수준에서는 고금의 불교 전승에 있어서 그 어느 분

보다도 간략 명료하고 실재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혹자들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신비적 측면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얻으

려면 다분히 가르침의 내용이 신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분야는 아직 미지의

세계이자 신비의 세계로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맑고 순수하며,

우주의 신비로움과 존재의 경이로움을 탐구하는 영혼들은 이

양자역학이라는 불가사의한 세계에 대한 연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양자역학의 세계를 완전히 규명하

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과학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우주적인

신비가 삼라만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최신 과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내용은 종교적인 가

르침, 특히 불교의 가르침에 의존하는 경향이 학자들 간에 대

두되고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과학도들도 꼭

한 번은 정독해야 할 필독서입니다.  물질과 정신의 세계를 탐

구하는 현대 과학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가장 극명하게 서술

하고 있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정말 진귀한 서적임에

틀림없습니다. 




2.  희유한 진경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서문을 써

주신 전대 미문의 희유한 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대한 서문을 써주신

것은 다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혹한 구도자들은 그 부분

에 대해서까지도 의심을 갖습니다.  구도자는 항시 고차원적인

의식세계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

데 어찌 큰스님의 책에 대해서 폄하하고 모독으로만 나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도 신비가 없고 호기심이 없으

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상가이자

종교철학가인 동시에 통합심리학의 개척자 켄 윌버는 "종교의

신비로움을 과학으로 재단하지 말라."고까지 종교의 신비로움을

높이 추앙하였습니다.  그런데, 미혹한 구도자들은 불보살님의

가피를 통해서 이루어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해 부처님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뜻으로 암암

리에 해석하고 있는 듯 합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탄가탄입니다.



모든 것을 구족하시고 삼천대천세계를 주관하시는 부처님께

서 책을 팔아서 돈을 얻고자 하시겠습니까?  다만, 부천님의 뜻

은 책의 위엄과 존엄을 세인들에게 알리어 경각심을 갖게 하

고, 부처님의 뜻을 21세기에 맞추어 되살리시려는 가르침이 새

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큰스님께서 돈이나 벌려고

책에 부처님의 서문을 넣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서 비방하시는 분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부처님의 고귀하

신 뜻을 어지럽히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또한 미혹한 구도자들은 큰스님의 서적 <<21세기 붓다의 메

시지>>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비방하는데,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부분을 보는 것은 책의 격조를 손상시키는 것은 물

론이며 또한 책 전체의 내용을 두루 읽어가면서 서로 유기적인

맥락에서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간파해야지 어찌 한 소절,

한 구절에 집착해서 그것을 비방하려 하시는지 참으로 안타깝

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어는 불교 수행자가 말한 것처럼 "불제자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거늘 어찌하

여 부분에 집착하는지 애석할 따름입니다.  전체를 거시적으로

보시면 큰스님의 서적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내용이 의

심할 바 없이 명료하게 인식의 틀 안에 들어오게 됨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전생의 선근 부족임을 탓해야지 어찌

올바른 법을 사자후하신 큰스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시키

려고 하십니까?



따라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비방하시는 분들은 보다

높은 지혜의 눈을 얻기까지는 큰스님을 비방하는 일을 구만두

고 삼가 은인자중하시길 간청하는 바입니다.  큰스님의 고도의

지성적 성찰과 고차원적인 불보살님 세계에 대한 황홀하고도

현란하게 펼쳐 보이신 파노라마적 통찰을 여실지견으로 읽어야

지 어찌 비방만 하는지 통탄할 일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

시지>>는 금세기 최고의 서적임을 저는 자부합니다.  희유하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직접 서문을 하사하셨다는 것만으로도 국

보금 아니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습니다.  큰스

님 말씀대로 석가모니부처님은 삼계의 왕이시며 삼천대천세계

의 총교주이신 우주의 지존이십니다.  제가 지금까지 확신

을 가지고 알고 있는 한 그만큼 위대하신 분은 이 우주에 없다

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큰스님을 비방하거나 <<21세기 붓다

의 메시지>>를 오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끔찍한 지옥

문을 열심히 두드리는 행위임을 아셔아 할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남섬부주 선남자 선여인에게 전하노

라."라고 큰스님의 대적정삼매 속에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의 서문을 설하여 주셨습니다.  서문을 읽는 순간 저는 가슴

에서 우러나오는 감격과 순간적으로 정신을 울리는 강인한 환

희심을 느겼습니다.  인간은 모두 사바세계를 통해서 배움의 과

정을 겪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부처님이 남

섬부주의 교주로 계시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역설하고 계십니

다.  남선부주란 사바세계, 즉 우주 공간에서 괴로움이 많은 인

간 세계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부처님불세존께서는 사바세계뿐

만 아니라 다차원 공간계 어디에서나 응화신을 나투시는 거룩

하신 분으로 법계의 지존이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웅혼한 필치로 써내려 가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는 가히 큰스님이 아니고서는 흉내 낼 수 없습니다.  특히 곳곳

에 친히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을 첨가하여 책의 스케일을 한

층 더 웅장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의 웅대한 우주적 대서

사시를 보는 듯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불멸의

명작으로서 우리에게 주었던 감동과 전율을 대대손손 이어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3.  보서 중의 보서

치열한 구도 정신을 통해 나름대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진

리의 세계로 내딛는 올바른 구도자들은 다 아시겠지만 제대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지식을 친견하고 수많은 돈을

바쳐야 하며 거기에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

과 인고의 세월이 요구됩니다.  물론 흘리는 피와 눈물도 다른

어떤 직업에서 일하는 것보다 많습니다.



그만큼 힘든 것이 수행이며 따라서 함부로 수행을 거론할 수

없는 것이 일반 중생들의 세계입니다.  일단 수행을 한다고 하

면 과거 중국의 방거사처럼 돈과 재산을 강물에 모두 버리는

강한 구도심은 물론이거니와 마음의 탐(탐욕), 진(분노), 치(어리석

음)를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없이는 결코 수행은

어렵고 요원한 것입니다.  돈의 액수나 금전적인 계산에 신경을

써서는 결코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저 또한 수천여만 원을 바쳐 선지식을 친견하여 선도, 불도,

요가, 주역 등 다양한 방면의 수행을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헤아릴 수 없는 거룩한 가르침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이 정법입니다.  바로 큰스님과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기라

성 같은 선지식과 현자의 경지를 초월하는 매우 거

룩한 가르침으로 시종 일관하는 보경이 바로 <<21세기 붓

다의 메시지>>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과거의 스승과

선지식분들을 모두 지나서 새롭게 인연이 된 대선지식

되시는 분이 바로 큰스님입니다.  바로 큰스님의 <<21세기 붓다

의 메시지>>는 정법을 가장 잘 나타내준 책이라 할 수 있습니

다.  또한 이 책에 있는 내용은 제가 지금까지 봐온 수백여 권

의 정신게계 관련 서적들을 모두 망라한 것 이상의 가치를 지

닙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다양한 종교적 가르침

그리고 전 세계 문화와 문명의 명상 수행 및 철학사상들 중에

서 정법만을 가려서 초출한 총체적 요약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모든 명상, 철학 서적을 보고 가르침을 배우는 것 이상

으로 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심혼을 기울여 쓰신 책이므로 이 서적을

올바른 마음으로 읽는다면 새로운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어렵게만 느

껴지는 수행자의 길에 비로자나 총귀진언과 칭명염불이라는 전

대 미문의 지극히 휼륭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어 수행자들이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상단량 덜어주고 있습니다.



<<화엄경>>과 같은 불경은 매우 현학적이면서 신묘한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면 <<아함경>>과 같은 경전은

매우 친근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전을

공부하기 전에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꼭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물론 칭명염불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도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선, 교, 율 어느 하나

부족하게 설명한 내용이 없습니다.  선에 대해서는 염불선으로

교에 대해서는 많은 경전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고 실제로 큰스

님의 불과를 이루신 증험을 기록하고 있으며, 계율에 대해서는

음계를 특히 호지 할 것을 거듭 당부하고 계십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21세기를 맞이하여 구도자의 수

행자 그리고 불제자 모두에게 수행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지름

길을 밝혀준 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투자한 수천만 원

의 돈과 10여 년의 신간이 있었기 때문에 부족하지만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큰스님의 <<21세기 붓

다의 메시지>>가 10여 년 먼저 나왔더라면 그 고생을 덜하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있기

에 제가 그동안 배워온 것을 정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망망

대해같이 끝없이 펼쳐진 구도의 항해를 떠나는 데 있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뚜렷하고 명료한 방향타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불제자님과 구도자님께서도 <<21세기 붓다의 메시

지>>를 여러 번 정독하여 그 큰스님의 심의를 해듣해 나

가시길 발원합니다.  다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는 수행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책임에 틀림

없음을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또한 큰스님은 21세기 신인류를

위한 새로운 불교 문명 사조를 창도하시는 선구자이자 개

척자 라고 해도 부족할 따름입니다.  신인류 역사를 선도

하시는 영적 문명의 영도자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다양한 세계 명상서적과 인류의 역대 성현들의 가르침을 종

합해서 고찰해 보면 분명 통일되는 가르침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찾아나가는 것이 하나의 배움의 과정이며 영

적 성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가

에서 말하는 견성과 아라한 경지를 의미합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와 명상체계 그리고 철학과 사상체계 속에

녹아 숨쉬고 있는 메타포(은유)를 간파하고 꿰뚫어 이

해하는 지혜의 눈을 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큰스님의 명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세계 종교와 명상서적

들을 총괄적이고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매우 명료한 인식적 틀

을 우리의 내면에 정립하도록 해주는 보서가 아닐 수 없습니

다.  세계의 어는 역대 종교에서도 즉 유대신비주의, 기독교 신

비주의, 이슬람 수피즘, 이집트 문명, 마야 문명, 유가,

도교의 신선사상 그리고 힌두교의 성전과 인도의 요가 수행법

등을 통틀어서 불교의 가르침만큼 세계의 구도자들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가르침을 저는 본적이 없습니다.  그

리고 큰스님의 법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그러한

불교의 가르침을 금세기에 도래한 신영적 문명시대에 맞게 새

로 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불서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이후로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경전들을 21세기에 맞추어 거시

적인 맥락에서 초출 및 재구성하고 새로 집필한 불경 중의 불

경이라는 점을 우리 불제자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큰

스님의 진경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서문은 석가모

니부처님께서 친히 써주셨으며 인가해 주셨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그윽한 고요함과 거룩한 밝음을

독자들에게 전해주어 독자들의 감성과 지성 그리고 신성을 깨

워내 평화와 자유의 기쁨을 얻도록 도와줍니다.  한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제공합니다.  무롯 희망이



란 선남자 선여인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개창하도록 해줍니

다.  또한 구도자들은 꿈을 갖고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막연한 상상과 공상으로서의 비전이 아니라 현실과 융합되는

정신적인 든든한 전망대라는 기둥이 필요한 것입니다.  땅과 하

늘을 융합하고 현상계와 정신계를 조화롭게 융섭해서 하나

로 아울러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몸을 통해서 마음을

달련시키고 마음의 단련을 통해서 몸의 정화를 이루

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됩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다."라는 긍정적 마인드는 우리 구도자

들이 관심을 갖고 마음 속에 새겨둘 필요가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란 바로 끊임없이 고통 속에서도 향상심을 잃지 않고

즐거움을 추향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통 속에서 즐

거움을 찾으려면 무엇보다도 절제하고 극기하며 인내하면서 향

상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결국 구도자의 내면에

희망이라는 거대한 태양이 자리해야 함을 함의합니다.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건네줍니다.  부처

님이 무아 속 절대세계에 여여히 계시다는 가르침은 우리 모두

에게 비전과 희망의 내적 태양을 떠오르게 해 줍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우리 불제자와 구도자에게 향상

심을 가지고 부단히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향상심을 갖고 바른 마음으로 수행에정진한다면 언

제나 부처님께서 가피와 위신력으로 돌보아주시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불제자들은 큰스

님과 석가모니부처님을 위시한 불보살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서 큰스님을 따라 석가모니부처님을 믿고 하루하

루 칭명염불과 석가모니불 정근을 통한 수행 정진에 각골쇄신

의 각오로 임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또한 항상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계시

는 부처님의 거룩하신 법위 안에 우리 불제자의 마음을

평온하게 정주시키는 최고의 법경임에 우리 불제자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역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미혹한

구도자들의 비방을 감내하면서 큰스님께서 친히 자비심을 베풀

어 중생들을 위해서 사자후하셨다는 점에 특기할 만합니다.  그

리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의 자비심이 없었다면

세상에 출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스님의 보경은 세계

의 모든 지성인과 구도자들 그리고 불제자들이 니이체가 말한

초인 이상의 경지, 즉 보살위와 붓다위로 도야할 수 있는

천도 양양한 비전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지고한 현

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과 큰스님

은 이 사바세계에서 깊이 본받아야할 만세의 사표이

심을 우리는 명료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증험세계를 담은 보경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견성 오도에 대한 글은

지금까지 어떤 책에서도 엿볼 수 없는 매우 실재적이고 명료한

큰스님의 체험담이었습니다.  본래 면목, 존재의 진상, 우주의

체성을 철견하신 큰스님의 경험담은 의식을 혼탁케 하는

선문답으로 일관하는 오늘날의 선사들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문현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큰스님

스스로의 실제적인 증험 세계를 선사들의 증험담보다도 더욱

현실적이고 실재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어조를 통해서 선남자

선여인들의 마음 속 깊이 울리는 메아리로 공명시켜 주셨

다는 점에서 불교 역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기셨다 할 수 있

습니다.



'견성이 곧 성불'이라는 선가의 기치는 분명코 잘못됐다

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컸습니다.  오늘날의

불가에서는 외골수적인 간화선을 통한 견성 일변도의 수행

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견성이 마치 최고의 경지요 또는 궁

극적 경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힌두의 요가 수행자들이 설파

한 "네 안에 신이 거한다."라는 말은 불가에서 말하는 견

성의 경지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견성을 통해 신

이 거함을 알아도 생사관을 확실히 얻는 것은 아니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 말씀대로 아라한을 통

해서 얻는 것으로는 지옥과 육도 윤회를 확인할 수 없으며, 사

람들이 목숨을 잃은 후에 이디로 가는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이제 우리 모든 구도자들과 선사들은 솔

직해져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오늘날의 구도자들과 불제자들

에게 솔직할 것을 사자후하셨습니다.



이는 고대 기독교와 고대 유대교에서도 진실함(솔직함)을 제1

의 미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잘 뒷받침해 줍니다.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이러한 가르침들은 오늘날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제 전 세계적인 문화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

다.  동서양 고금을 통해서 그리고 지구 전역에 걸쳐 면면히 내

려오는 실효성 있는 가르침들은 잘 새겨보고 옳다고 판단하면

이아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큰스님 말씀대로 솔직해야 합니다.



즉, 생사관이 확립될 때까지는 치열한 구도 정신의 고삐를 놓

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매우 간명한 어조로 오도송을 쓰셨기 때

문에 일반 선사들의 오도송과 격이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21

세기 컴퓨터 문명의 총아격인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은 프로그래

머라는 직업군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프로그래머에게

있어서 통용되는 이야기는 바로 "컴퓨터가 이해하는 프로그램

은 바보도 작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프로그

래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이 프

로그래머들 간에 최고의 미덕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21세기 프로그래머들의 세계는 다른 프로그래머들도 이해하

기 쉬운 그러한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쇼팬하

우어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처럼 쉬운 것은 없다. 반대

로 중요한 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글을 쓰는 것

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있어서 구도자들은 자신이 증득한 경지를

다른 구도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표현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오도송이라고 어렵기만 해서는 그것은 구도자의 정

신을 방황케 하는 외도의 기운이 서린 잘못된 도리라 할 수 있

습니다.  큰스님의 오도송처럼 오도송은 물과 같이 담담하고 소

나무처럼 청청하게 인식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합니다.



큰스님의 오도송을 읽는 순간 머리가 가벼워지고 많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선사의 오도송을 읽고

머리가 답답해지고 어지럽고 복잡해진다면 그것은 올바른 오도

송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21세기는 무모한 강요적 수행 시대

가 아니라 이해되어지는 열림의 수행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

다.  큰스님의 오도송 자체는 21세기 한국 불교 아니 전 세계

수행 문화가 나가야 할 진귀한 미증유의 이정표를 구도자들의

앞길에 새겨 놓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큰스님의 오도송

뿐만 아니라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도처에 아로새겨져 있

으며 큰스님의 경험이 녹아있는 주옥같은 구절들을 읽으면 황

홀감을 넘어서 현란함을 느낄 정도로 지극한 아름다움을 경험

합니다.



또한 큰스님께서 !표를 사용해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에서 단언한 것은 그만큼 확실한 믿음과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

다.  이는 미국 대학교수가 어는 분에게 너무 확신성이 결여된

논문을 쓰게 되면 그 논문을 읽는 사람에게 호소력을 주지 못

한다고 경책하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의

지 빈약으로 글을 써서 어떻게 타인들을 감화, 설득, 호소력을

심어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글을 쓸 때 확신이 있으면 자신감 있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그래야 글을 읽는 사람들도 시원시원하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큰스님의 글을 비방하는 입장에서는 단언하는 형태로

비칠지 몰라도, 긍정적인 시야로 큰스님의 글을 바라보면 깊이

있는 통찰과 광오한 법력이 담긴 일필휘지의 기운

을 통해 지극히 명료한 큰스님만의 심법을 엿볼 수 있습

니다.



참고로 큰스님은 겸허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에고

에 얽매인 입지를 책 어디에서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책에

는 불과를 증위하신 분이 나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불

과를 증위한 분이 없을 시에는 큰스님께서라도 직접 나서야 하

지 않느냐는 뜻이라고 사료됩니다.  잘못된 구도자들 중에는 큰

스님이 불교의 정법을 펴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그러나

만약 큰스님께서라도 나서서 불교의 참신한 계몽과 잘못되어

온 불교의 오래된 구습을 완전히 쇄신하고 환골탈태를 이룬다

면 어찌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단지, 큰스님의 천도재 비

용이나 계산하고 책이 얼마나 팔렸느냐만 생각하는 편협된 마

음으로는 이를 지혜롭게 볼 수 없을 듯싶어 한 마디 해둡니다.



수행자들과 구도자들의 세계에서는 흔히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산을 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마치 산을 넘어본 것

처럼 말하는 사람은 위험하다."라고 말입니다.  저 자신도 가능

한 한 제가 경험한 내용 이상을 말하려고 하지 않으려 하는데,

다만 미혹한 구도자들이 억지를 부리며 큰스님을 비아하여서

제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고 얻은 바를 토대로 살을

더 붙여서 표현하였습니다.  이 점 큰스님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지 않고서는 산 정상의 경치를 말해서는 안

됩니다.  큰스님은 산 정상에 올라서 산 전체를 조망한 후 그

경험을 글로 쓰셨는데 그것이 바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입니다.  그러니, 산 중턱에 올라가고 있는 구도자나 산 아래에

서 맴돌고 있는 미혹한 구도자들은 큰스님의 가르침을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거나 아니면 조용히 침묵해야 할 것입니다.





붓다,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신다

많은 신도들이나 외도들은 부처님은 돌아가시거나 사망했다,

급기야는 독살 당했다고 모독하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

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부처님은 존재의 현상계 너

머 초월적 대적멸 적정세계에 여여히 살아 계심을 분명히 밝히

고 있습니다.



큰스님의 치열한 구도 정신이 아니었으면 알아 낼 수 없었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위신력과 불보살님의 가피가 아니었으면 우

리는 이러한 대사자후를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에도

많은 일반 불교 신도들은 부처님께서 육신을 버리신 순간 우주

에서 영원히 사라지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마 외도들은

더욱 과장하여 독살 당하셨다고 합니다.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스님의 "붓다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신다."라는

사자후는 전생에 선근을 지닌 모든 선남자 선여인에게 가슴 깊

이 환희심의 물결과 기쁨의 전율이 흐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혹한 일부 구도자들은 비방을 일삼고 있

습니다.  무릇 구도자가 되려면 세속의 삶에 초연하고 고답

적인 삶을 추구해야 하며 항상 존재계의 이면, 즉 초월적 세계

에 관심을 가지고 삶을 지향해 나가야 하는데 미혹된 마음과

세속적인 시각으로 큰스님의 책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폄하하고 비방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신세계에는 무수히 많은 불보살들께서 적멸의

상태로, 무아의 상태로, 대적정의 상태로, 무량광의 상태

로 존재함을 인식해야 하거늘 어찌 이를 모르고서 함부로 큰스

님의 책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실추시키려고 하는지 참으로 가

탄가탄입니다.



모르면 알려고 하거나 함구해야지 모른다고 '허황되다느니',

'신비성 조장'이니 운운하는 것은 존재의 이면을 성찰하고 삶의

초월적 세계를 통찰해야하는 구도자의 기본 도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분명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몸을 입고 사바세계에 오셨

을 때 후, 미, 시 촉, 청 오감으로 보고 느끼는 것, 그리고 상

을 지닌 것은 진실 되지 못하다고 하셨거늘 일부 미호한 구

도자들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글에 대한 상만을 보

고 책 내용의 본질(실재)을 목도하려고 하지는 않고 있습

니다.



또한 부처님은 무인칭이므로 1인칭, 2인칭, 3인칭 시점은 불

가합니다.  전지적인 시점이고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신 분이며

주관과 객관의 융합을 무애자재로 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냥 부처님은 부처님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

합니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마음에는 안과 밖이 없다.  가고 옴

도 없이 움직이지 않고 여여하듯 부처님 또한 그리 계신다."라

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혹되고 의심 많은 구도자들은 부처님께 직접 들었

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치부하거나 폄하하고 급기야

비방을 넘어 힐난을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

씀하신 것인데 그것이 어떤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

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석

가모니부처님께서 친히 설하신 가르침을 언급한 것은 불법의

지존적 경지에서 설파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제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음을 밝힙니다.



근세 서양 철학자 러셌으리 제자인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

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공자

님께서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 진실된 앎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량광

아!  무량광!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인지요?  동서양

수많은 경전과 수행서적 및 철학사상서 중에서 불교에서만 나

오는 무량광!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무

량광에 대해서 자세히 그 어느 책에서도 없는 미증유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무량광은 고대 이집트 문명, 유대 신비주

의 카발라,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 신비주의 그노시즘, 힌두의

요가, 유교, 도교 등 그 어느 종교, 종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용어로서 불교가 얼마나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종교인

가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특히 보살위에 들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광명을 온 몸의 털

구멍 속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종종 만나게 된다."고 하셨습니

다.  이는 쿤잘리니 요가 체험서나 선도내공

서적들에서 나오는 증험적 경지에 대한 이야기와 중요사

항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즉, 큰스님이 말씀하신 체험 경지와

쿤달리니 요가 및 선도내공의 수행 경지에서 함께 하는 공통점

은 수행의 현상과 신비체험을 통해 체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량광은 쿤달리니 요가에서 나오는 쉬바 에너지, 그리고

선도내공에서 나오는 원신 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에너지

체라는 것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하다 못해 너무 밝아서 눈으로 보면 눈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그러한 무량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량광은 불과를 증

하신 수행자에게 현전하고 체들하게 되는 궁극적 실재의 에너

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바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청정한 빛

그 자체로서 대지혜의 눈을 구족한 대성자에게만 보이는 에너

지라고 생각됩니다.



부처님의 몸이 무량광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희유한 사실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부처님들이

무아 속 절대세계에 빛으로 계신다."라는 말씀은 한국 불교계가

오랜 동안의 간화선을 비롯한 선 불교에 집착하는 구습을 혁파

하는 매우 강렬한 사자후라고 생각합니다.  아라한위를 얻기 위

해서는 자성과을 보아야 하고열반광을 보면 보살위를

그리고 무량광을 보게 될 때 불위를 증하게 된다고하신 말씀

은 구도자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혹한 구도자는 부처님의 무량광에서의 빛과 인간이 만든

전깃불의 빛을 동일시하는데 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행위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찌 거룩하시고 희유하신 부처님을 전깃

불이나 인간이 만들어낸 빛에 비유해서야 되겠습니까?  큰스님

을 비방하시는 분은 좀 더 신중을 기해서 말씀하셔야 할 것입

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전기나 광자와 같은 빛과 같습

니까?  만약 같다면 전기나 광자도 마음과 같이 생명이 있어야

옳지 않겠는지요?  미혹한 구도자들은 한시 바삐 미혹에서 벗어

나서, 하나의 관념적 사유나 집착된 사념에 빠져 큰스님을 비

방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미혹한 구도자들은 큰스님에 대해서 의심이 많습니다.  무릇

수행자가 도를 구하는 데 있어서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였

거늘, 그렇게 의심만 많아서 어떻게 수행을 하는 구도자라고

자처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의심할 것을 의심해야 하는데

의심할 것은 의심하지 않고 믿어야 할 것을 의심하니 안타깝습

니다.  그리고 의심스러워도 직접 그것을 확실히 깨닫고 이해하

지 않은 선상에서는 말을 자제하는 것이 수행자의 도리라고 생

각합니다.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에서 그리고 기독교 신비주의

인 영지주의(그노시즘)에서도 영혼의 빛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서에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9:5)."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이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그토록 강조한 부처님의

광명세계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부처님의 부량광은

그리스도의 빛의 차원보다 훨씬 우수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

니다.  그리고 그 빛의 세계는 삼매의 힘을 얻게 해주면 적멸과

적정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발라와 그노사즘에서

말하는 빛은 불가의 아라한위 정도까지입니다.  그 이상이

아님을 구도자들은 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대광명의 석가모니부처님은 서양 바이

불에서 최고의 지존으로서 일컫는 하느님의 인격적

실존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서양의 여호와 신으로

알려진 엄하고 심지어 무자비하게 보이는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 부처님은 매우 자비로우신 인격적 하느님이라 할 수 있

습니다.



도교의 가르침이나 선도내공 쪽에서도 원신을 얻어 공

의 세계를 철견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단을 수련하여

황금빛의 신선체를 얻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신선

이 되어도 수명이 수천 년 이상 또는 수만 년 이상을 살지

못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원효 스님이 동굴에서 수행을 하고 있

을 때 어느 신선이 흉측한 몰골을 하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것은 바로신선들도 수명이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

가 알기에 신선의 에너지체와 부처님의 에너지체가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도가의 선지식께서 말씀하시길 신선들은

죽을 때 커다란 슬픔을 안고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부처님들은 미래제가 다하도록 사멸하

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법문입니까?  <<21

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불교의 금석문으로서 만고불변

의 진리를 함장하고 있습니다.




비로자나불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는 모든 붓다들이 바로 비로자나

불의 나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불보살의 세계는 하나의 화합과 조화의 세계를 이

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미묘음, 무량광으로 전해

지고 있는 비로자나불에 대한 비의적 <<화엄경>>의 해석을

부흥시킨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불가의

불후의 명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언급한 비로자나불에 대한 해

설은 우리 불제자에게 유례없고 전례없는 큰 소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고 무한한 환희와 법열을 체험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뜻 깊고 신심 있는 불제자라면 반드시 큰스님

의 서적에서 비로자나불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숙독하시길 권

청합니다.



한편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어떤 다른 종교의 가르침보다 높

다는 것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전하는 사자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남자 선여인은 진실된 불제자들이 걸어

가야 할 길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훤히 비추어 주고

있다는 점을 목도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구도자가 붓다를 이

루어 비로자나불의 법신과 하나가 되는 날까지 말입니다.



붓다를 이루면 개체적 나가 우주적 나로 확장, 계합하고 개

체로서 소아가 부처님의 법신과 하나 되어 우주적 대아

가 된다는 점, 이런 진귀하고 전대 미문의 가르침은 세계 어

디에도 없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는

법계 안의 모든 부처님의 법신을 하나로 총섭하는 법신체임을

사자후하고 계십니다.  모든 참다운 불제자들의 치열한 구도 정

신의 완성은 궁극적으로 비로자나불로 귀합 한다는 점! 너

무나 감동적이고 가슴 벅찬 고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 사자후하

신 내용 중에 "부처님의 법신은 '우주적인 몸'"이라고 하시는

내용은 완전히 인식의 환골탈태를 가져다준 미증유의 위대한

법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스님의 글을 여기에 다시 한 번

되새개는 의미에서 싣습니다.  "사실은 부처님의 법신이야 말로

진불입니다.  거래도없고 머묾도 없습니다.  법계를 비추는 대지

의 광명체로서 초월이요, 평등입니다.  초월적, 인격적 실존이신

보신의 근본이 되어 이미 인격이 아닙니다.  대우주아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이

언제나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전 우주적인 몸

뚱이'가 그의 본질적인 성품입니다.  대우주이시며 절대와 동일

한 변조 광명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로서,  모든 붓다들의 청정법신을 총섭하고 있습니다.



허공 가운데 떠있는 태양은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는 날에

는 가려져 안 보일 수도 있으나 부처님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은 언제나 온 법계를 두루 비추고 계십니다.  그렇듯 붓다님들

은 빛으로 일체처 일체시에 아니 계신 곳 없기 때문에 법신개

념에서 볼 때 천수천안이 문제가 아니며 가고 오고하는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무소종래이며 역무소거입니다.  삼천대천세계

우주 자체가 바로 붓다의 몸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96,

100, 101쪽)



부처님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설

명된 불교서적이 전 세계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위와 같

이 사자후하신 큰스님의 법문 한 구절도 여타의 불교서적에서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큰스님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불

제자를 위해 진솔하게 부처님의 세계를 친불하셨다는 점에

큰스님께 무량한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붓다의 삼신설 

불가에서 전하는 붓다의 삼신설은 지극히 희유하

고도 거룩하신 법문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을 제외한 그 어떤

불교 수행자와 불교학자들도 지금까지 제대로 이 부분에 대해

일목요연하고 명료하게 설한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종교

의 수행자들은 붓다의 삼신설에 대해서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금시초문일 것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위없는 가르침을 펴시고

계시는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대신해서 자상하고 세

밀하게 이러한 붓다의 삼신설이라는 희유한 비경을

알려주심으로써 불제자들이 내적 자각의 눈을 보다 크게

뜨고 영혼의 빛을 보다 훤히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시고 계십

니다.



제가 큰스님의 TV 법회를 듣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고 또한 개인적으로 친견하고, 친히 하사하신 가르침들을 들

은 바를 여기에 정리합니다.  저는 아직 삼신설을 해득할 수 있

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가 들은 바를 정리하되

개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자 합니다.  수많은 방편과

자비로운 법문으로 미묘하고 신묘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해주

신 큰스님의 하해와 같이 무량한 자비심에 숙연할 뿐입니다.



제가 큰스님으로부터 배우고 들은 바에 의하면 그리고 저의 사

량적 판단에 근거해 본 결과 삼신설에 관한 경론상의 전

거는 크게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금광명최승왕경>>제2권 3 <분별삼신품>을 보면,

부처님께서 허공장 보살에게 "모든 부처님에게 세 가지 몸이

있다.  화신  응신  법신이 그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셨고 이러한 세 가지 몸이 구족하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거두어 준다고 이르셨습니다.  가지가지 몸을 나타내는 것이 응

신이라 하고 오직 여여와 여여의 지혜만이 있는 것 그것을 법

신이라 한다고 하셨습니다.  법신은 앞의 두 몸의 근본이 되며

"부처님은 큰 삼매의 힘으로, 온갖 선정, 대자대비, 온갖 다라

니, 온갖 신통, 온갖 자재를 나타낸다.  큰 지혜의 힘으로 열 가

지 힘, 사무소외, 네 가지 걸림없는 변재, 280(18)불공

법..... 온갖 희유하고 생각할 수 없는 법을 모조리 나타낸다."

고 하였습니다.



둘째, 용수의 이신관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석존 제

세시에는 인간 석가모니불 이외에는 아무런 불신관도 없다가,

석존계서 열반에 드신후 경전이 결집되면서 <<아함경>> 상에

는 육신불, 그의 교법을 뜻하는 정도의 법신불

의 이신관이 나오고, 불멸 후 6~7백년 경에 태어난

용수가 지은 것을 알려진 <<대지도론>>에는 부

모 생신과, 단순한 교법의 의미를 훨씬 벗어난, 언제

어디서나 여러 가지 몸, 여러 가지 방편을 내어 시방 중생

을 제도하는 근원적 존재이며, 항상 광명을 내고, 항상 설법하

는 존재인 무상의 혜인 법성신의 이신관

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세째, 유가행학파 기타 논서, 제논사의 주창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무착(불멸 후 1천 년경 )은, 그가

쓴 <<섭대승론>>에서 모든 부처님들은 진신, 보신, 응

신의 세 몸을 갖춘다라고 하였으며, 세친석 <<대승장엄

경론>>에서는 불과를 증한 모든 붓다님들은, 지수용신,

타수용신, 변화신의 삼신을 구족한다고 하였습니

다.  <<구경일승보성론>> (4C말경 인도의 論師 堅慧  저

술)에서는 모든 붓다님들은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을 구족한다고 주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의 소론도 거룩하고 희유하신 붓다의 삼신설

명이 너무 관념적일 수밖에 없어 불교학을 공부하는 이들로서

는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으나, 큰스님의 이 부분에 대

한 법설은 체험하지 않고 이리 말할 수 없을 만큼 극명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10회에 걸친 TV  법문, 현지사 그

리고 부산분원에서 정기적으로 설법하신 내용 등을 들어보면

불의 삼신에 대한 법설은 너무 구체적이고 자세합니다.  과연

영산 당시 아난이 아니고서는, 불과를 증하지 못하고서는, 자기

불신이 없는 이로서는 만고에 비밀이요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삼신설에 대해 이리도 분명하게 자신있게 설할 수 있겠습니까?



11세기 티벳트의 전설적인 수행자인 밀라레빠도, 붓다라면 삼

신을 구족해야 붓다라 했지만 그의 <<밀라레빠 10만송>>

어디를 보아도 원만 보신에 관해서만은 실제로 보고 체험하여

법설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같이 대승불교에 와서, 유가행 학파 몇 몇 논사들이

화엄 법화 능가 열반 반야 그리고 <<해심밀경>> 등을 깊이

꿰뚫어 연구하여 부처님들은 중생과, 보살과도 달리 세 몸(법

보 응)을 지닌다는 결론에 따라 삼신설은 확립이 됩니다.



여러 경론 <<금광명최승왕경(능가경)10만송>> <<반야바라밀

다경>> <<십지경론>><<금강반야바라밀경론>><<장엄경

론>><<섭대승론>> <<보성론>>에서 표현은 약간씩 다르나, 법신

은, 영겁토록 변치 않는 만유의 본체를 법으로 보

고, 신은 이 본체에 인격적 의미를 붙여 법신이라 했습니다.



보신은, 보살의 위에서 무량겁을 두고 어려운 수행을 한 결

과로 얻는 영구성이 있는 유형의 불신을 뜻한다(아미

타불과 같이)고 되어 있습니다.  응신은, 보신불을 보지 못하는 중

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불신, 역사적 존재로 석가모니부

처님과 같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넷째 자재 만현 큰스님의 '불의 삼신설'입니다.  위

에서 듣 것 같이 불과를 증한 붓다만이 법 보 응(화) 삼신

을 구족한다는 경전적 근거는 <<금광명최승왕경>> 등에 있습

니다.  불교사적으로 보살이라 존칭를 부여받은 바 있는 인도의

마명, 용수 큰스님과 몇몇 중관의 논사들 그리고, 무착, 세

친.... 등, 유가행학파의 조사들의 연구 논문(<<대지도론>>)<<섭대

승론>><<보성론>> 등)에 의해 불신관은 삼신설로 정립이

됩니다.



1)  자재 만현 큰스님은 다음 같이 불의 삼신설에 대해 법문

하십니다.



법신(불)은 만유의 본체인 여여한 이(법신)에, 우

주의 본질 실재에, 불지에 오른 수행자의 보신불의 여여의

지가 합일한 우주적인 광명(지체 자기 원만 보신의 소의)을

법신불이라 하고, (원만)보신은 보살의 우에서 무량겁을 두고

어려운 수행(무주상보시-육바라밀, 보현행원)을 한 결과로 비아

를 털어버린 수행자의 영아가 청정을 넘어선 빛(광도와 강도

가 햇빛 섬광보다 더한 안팎이 들어나 하나된 아름답고 영롱한 무량광)으

로 자라면서, 이루어진 모든 영구성이 있는 유형의 불신, 지복

의 몸을 말하고(바로 보신에서 응화신, 분신, 변화신을 냅니다), 응(화)

신은 중생이 마음이 착하고 어두워 광명으로 이루어진 불신을

보지 못해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불신, 즉 a)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음 b)관세음보살이 32응신으로 나

투는 응신 c)백천만억으로 나투어 육도 중생을 교화하는 화신

(분신) d)원만 보신에서 신발이나 옷, 머리, 때로는 성별까지 바

꾸고, 방사하는 빛을 흡수해서 사바세계에서 보살의 모습으로

활동하는 변화신을 말합니다.  화신은 불신이 전제되고 따라서

불신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2)  큰스님은 법설하기를 법신불은 우주적인 몸으로서 분별을

떠나있고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있는 광명 지로서의 존재

이고, 보신불(원만조신)은 불지에 오른 이만이 볼 수 있으며 32

상 *)종호를 갖추고 삼명, 육통, 삼신, 사지, 대자대비, 복덕

등 일체에 자재하는 삼매력을 지닌 신격적인 지복의 존재라 하

시고 인행시 서원따라 보품(계인)을 지니신다 합니다(문수-칼, 관

세음-버들가지, 지장-석장, 약사여래-약병 등)



3)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나투실 때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부처님들이 각기 법신불이 되어 이 비로자나불 하나의 부처님

으로 흡수됩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능력은 하늘 창조주

(창조주란 없습니다)적 능력을 지니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청정

법신 이름이기도 합니다.



4)  불과를 증한 이는 불신(원만 보신)을 지닌다는 것, 법보화

삼신을 갖춘다는 것. 법신, 보신, 응(화)신은 하나이지만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각각 달리 활동합니다.



5)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염부제(남섬부주) 보리수 밑을 떠

아지 않고 수미산정에 올라 도이천 제석궁으로 가서 법을 설하

고, 다시 보리수와 제석궁을 떠나지 않고 야마천궁으로 가 법

을 설하시고, 또 다시 위 여러 곳을 떠나지 않고 도솔천궁으로

가 법을 설하십니다.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부처님의 위대하시

고 희유한 신력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때는 부처님의 원만보신

이 보리수하 석가모니불 자기 색신으로 합일해서 법을 설하시

고 그 색신(응화신)은 그 자리에 놔두고 수미산정 제석궁으로 나

아가십니다.  이때 부처님은(원만 보신)은, 물론 그 안에 4영체를

흡수해 계합한 상태입니다.  제석궁에서 법문이 마쳐지고 다시

야마천궁으로 가 법이 설해질 때 역시 보리수하 그리고 제석궁

의 부처님(화신)은 그대로 놔둡니다.  붓다의 (원만)보신은 이렇듯

백천만억의 화신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사의한 장관

입니까?  세계 어느 성인이 이러한 장면을 연출한 적 있는지요?



삼신을 구족한 붓다들은 이것이 가능하지만 최초불이요 붓다

중 붓다이신 석가모니불의 위신력은 특히 괄목하다 할 수 있습

니다.  삼신을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적정 삼매를 자재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지, 신통이 아닙니다(선 불교의 육조 혜능 조사에

의해서 주장된 인간 정신 내면 자성 속, 마음의 채용을 불의 삼신으로 해석

함은 붓다의 참 경계를 전혀 모르는 법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섯째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이체설, 힌두교의 브

라마 비슈누 쉬바의 삼신일체설과 불가의 삼신설은 전혀

다릅니다.  우주 법신(브라마, 비슈누 쉬바)에서 화신은 나올 수 없

습니다.  원만 보신에서 (응)화신이 나온다는 걸 위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위지가 있고, 욕구가 있다는 것은 중생인 것, 거긴(보

신, 하느님)은 대자대비 원력과 지혜와 위신력만이 존재합니다.



남을 저주하고, 인류를 말살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요,

분명 파순입니다.  법신은 무시무종이니 우주를 내고 유지 상속

하는 이법일 뿐입니다.



여섯째 <<화엄경>> 삼현위에서 보는 불신은 화신(분신)

불이고 초지에서 십지 보살이 볼 수 있는 것은 붓다

의 변화신이며 불지에 든 붓다만이 원만 보신을 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 자재 만현 큰스님의 법문입니다(오진 십지에 오른

보살들만이 보신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몇몇 중관의 논사들 의견임을 첨언

합니다).



제가 큰스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정리해 봤습니다.  오늘날 미

혹한 구도자들은 삼신을 잘못 해석하거나 아예 삼신설 자체를

부정하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다

소간의 불제자들의 미혹을 타파하기 위해 전술한 바와 같이 큰

스님께서 지극히 자세하고 일목요연하게 붓다의 삼신설을 사자

후하신 점을 우리 불제자는 깊이 감사하고 크게 지뻐해야 할

일입니다.



큰스님의 10여 차례에 걸친 불교TV 법문과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그리고 현지사 그리고 부산분원에서 정기적으로 대자

대비하신 마음으로 설법하신 붓다의 삼신설은 그 어떤

종교와 명상체계 그리고 철학사상에서도 거론되지 않는다는 점

에서 타 가르침과 비교해 보면 영적인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

함을 우리 불제자들은 명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붓다의 삼

신설이라는 희유한 법문은 석가모니부처님 이후 불교계에 있어

서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길을 걸어오신 큰스님의 웅대한

발자취의 향기를 그대로 지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제자에게

는 더없는 복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보신부처님께서

영축산 영산궁과 현지궁 현지사에만 상주하고 계심을 불제자들

은 큰 환희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위계 --- 아라한, 보살, 붓다

20세기 서양철학의 태산북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헤드는 실재는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

재의 특성은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불가의 가르침

을 응용하면 인연법에 의거한 연기적 구도에 의해서 공

간적 시간 프에임을 통해 펼쳐지는 의

식의 진화 과정을 의미합니다.  요가에서도 의식의 확장, 의식의

진화, 의식의 변형, 의식의 각성 등에서부터 다양한 의식적 상

태(바이수바나라, 타이자샤, 프라주나, 튜리야

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양의 선구적인 초인격 심리학을 개척하고 동서양을 관통하

는 종교 철학에 대한 견고한 반석을 미련한 켄 위러라는 현자

도 의식의 스펙트럼을 주창하였습니다.  의식의 스펙트럼은 인간

의 의식은 다양한 계층과 차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큰스님께서 견성에서 성불에 이르는 도정

을 여러 계위로 장정하고 계신 것은 부처님의 정법

종지임을 아셔야 합니다.  미혹한 구도자들이 알고 있는 초

견성, 견성, 재견성이라는 것은 견성적 차원에 불과합니다.  미

혹한 구도자들은 단편적 지식으로 큰스님의 영혼의 위계와 영

성계의 하이러라키를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고 마음

대로 재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신지학에서도 영혼의 세계가 '위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위계는 바로 의식의 점진적 진화와 과정

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중생,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보살, 붓다, 석가모니부처님이라는 위계는 불경에 역력

하게 아로새겨진 위대한 계시적 가르침으로 엄존하

며, 세상이 존재하는 한 우주적 진화를 위한 세계 변전의

연기 구조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비로자나불의 현현은 우주

적으로 미래제가 다하도록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이 붓다가 될

때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한편, 유가에서도 장유유

서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웃어른을 존경하라는 이야기

인데 이 이야기는 영혼의 세계에서의 위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미혹한 구도자들은 우주적 존재의 하이어라키(위계)와 의식

진화의 도정에 대해서는 일말의 언급

도 없이 견성, 재견성만을 논의하면서 큰스님을 비방하시는 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더 공부하시고 더 수행하신 후 큰스님의

글을 비방이 아닌 비평 차원에서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

리고 솔직히 큰스님의 글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배우는 자세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구도자라면 대장부답게 떳떳

하게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 옳고 그름에 대해 식별하고 판

단할 수 있는 명료한 통각을 구족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힌두의 고대 철학에 의하면 우주라는 것은 우주 물질

프라크리티)과 우주 정신(푸루샤)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

합니다.  저는 이 둘의 사상적 프레임워크는 큰 차이

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질들이 상호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

는 것처럼, 영혼들의 세계도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중심이 되고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돌고

있듯이 물질적인 우주 구조에도 어떤 법칙이 있고 상위-하위

계층구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고목에서 꽃피운다."처럼, 늙

은 나무에서 새싹이 자라서 작은 묘목이 생겨나듯이, 우주의

물질 세계는 전승이라는 흐름을 통해서 물질적 생명들을

잉태시켜 나가며 하이어라키를 형성합니다.  만물에도 조상이 있

기 때문에 후손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라한에서 붓다에 이르기까지 불제자들이 걸어가는

도정 상의 불보살 위계에 대한 큰스님의 세계관은 실재적이라

는 사실을 우리 불제자는 대견명안으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불보살의 위계를 불교계에 널리 공포한 큰스

님의 대자대비하심에 우리는 크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주망

불제자는 자신의 환경을 통해서 자신을 일신하고 쇄신해 나

갑니다.  그러므로 환경이라는 생태적인 차원에서의 자신의 삶은

넥서스(집단 또는 계열내의 개인(개체)끼리의 관력, 유대, 관

계, 연결, 결합체)라고 하여 존재계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그물망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주

망으로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라는 존재와

타아라는 존재들은 모두 하나의 생명 그물로 얼기설

기 조화롭게 얼켜있으며 상호 연관되어 있고 궁극적으로 상호

의존적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물론 무아가 되기 때문에 의

존성이 없어지나 지구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육체를 지

니고 있기 때문에 인과의 흐름 속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삶

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좋은 에너지를 제공하며 세

상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것이 바로 그물과 같이 넥서스 조직체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의

삶입니다.



또한 이 지구는 가이아라고 불리며, 이 가이아는 정교

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힘들의 시스템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

가 있습니다.  불제자들은 힘들의 세계를 뚫고 지나가면서 경험

을 쌓고 배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조화시키거나 자신

에게 중압적 영향을 가하는 세력들을 극복하고 헤쳐나감으로써

성취를 얻게 됩니다.  자신에게 압력을 가하는 존재의 세력이

있는가 하면 자신을 돕는 존재의 세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

행의 통과 의례와 같은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그 터널

의 끝에는 깨달음의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 역설하신 견성

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마치 소년소녀 시절 밤하늘의

미리내은하수를 바라보면서 깊은 정취와 무한한 동경 속

에 빠져들었던 시절로 되돌아가게 해줍니다.  아니 그 이상의

형용할 수 없는 감명과 감동을 아나하타 차크라와 아즈나 차크

라에 전해줍니다.  맑고 선명한 깨끗함과 자비로움 그리고 온화

함이 어우러져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밝게 해줍니다.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 하나의 거대한 주망처럼 불보살님의

환희의 세계를 우리의 정신세계에 투영해 줍니다.





업  

힌두교에서나 불교에서는 업을 이야기합니다.  즉, 과거 생에

좋은 업을 쌓으면 현생에 좋은 과보를 받고 현생에 좋은 업을

쌓으면 미래 생에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과거 생에 나쁜 업을 쌓으면 현생에 나쁜 과보를 받고 현생에

나쁜 업을 쌓으면 미래 생에 좋지 못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가

르침입니다.  부처님은 간명하게 선인선과 악인악과

라고 하여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고 나쁜 원인

은 나쁜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는 종교에서는 업의 존재를 잘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

한 업의 중요성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명료하게 새겨

져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그렇게 당부하시는 말씀은 선근 보따

리를 키우는 것, 즉 복을 지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이유는 선

근 보따리만이 전생의 죄업을 사할 수 있고 윤회를 벗어나 전

무쟁투한 깨달음을 구족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부처님의 가르침들을 수많은 주옥

같은 항목으로 일목요연하고 유기적으로 설파하고 계시다는 점

에서 21세기 불교의 총체적 가르침의 정수를 초출한 금자탑

임에 틀림없습니다.




두타행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구도자들과 불제자들에게 누

차 강조한 두타행은 '나 없는 수행'을 지어가는 것을 의미합니

다.  큰스님께서는 과거 마하가섭이나 아짠문 수행승처럼 치열한

두타행을 지어나갈  것을 재삼 강조하셨습니다.  즉, 수행 도중

구렁이가 와도 끔쩍하지 않으며 문둥이가 와도 거리낌을 내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스님 말씀대로

'나 없는 수행'을 통해 무아를 증득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공를 철견한 후 모든 집착과 상을 떼어 가는 과정이

두타행이다."라고 두타행을 어는 수순으로 수행해 나가야할 지

에 대한 실용적 의미를 불제자들에게 지극히 명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많은 종교 영성서적이나 명상 수

행서적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내용이며, 구도하는 불제

자에게 매우 실재적이고 도움이 되는 알찬 정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극히 명료한 필체로 서술해 나가시는 큰스님의

법필은 매우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동시에 심금을 울립니다.




염불선

진리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강조하는 바, 삼란만상은

설법하고 있다고 어는 고승께서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든

곳곳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의을 기

울이고 자각을 하고 인식을 해야 합니다.  러셀이 이

야기한대로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존재는 없는 것과 다름없

습니다.  이러한 인식론은 양자역학의 이론과도 매칭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이란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올 때 가치

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도 몇 해 전 열반하신 숭산 스님이 말씀하

신 것처럼 우리가 사과를 깨물어 먹듯 맛을 보아야 합니다.  그

렇게 맛을 본적이 없는 진리란 단순한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

다.  큰스님의 칭명염불은 이 점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실제로 현지사의 많은 신도님들이 부처님의 방광을 본

적이 있으며 머릿속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는 칭명염불의 위력이 일반 수행자가 몇 년 동안 공부하는

양보다 많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험

으로 증득될 때 마음의 개오와 의식의 정화 그리고 정신의 각

성이 일어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내면의 진리를 발

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큰스님은 현성이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경건하고 독실한 불제자들이 각골쇄신해 온 큰스님의 삶이

여과 없이 스며들어 있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 번

정독했다면 큰스님께서 얼마나 뼈저린 삶과 진지하고 심오한

마음으로 구도 여정을 펼쳐 오셨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큰스님의 구도 여정을 완숙한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었

던 것이 바로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입니다.



염불은 만트라(진언)와 같은 효과가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보

호해 줍니다.  또한 염불을 통해서 발성하는 말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이라는 발성 자체에 강력한 힘이

있기 대문에 오래할 수록 내면의 힘이 강해진다고 할 수 있습

니다.  사양에서는 로고스라고 하여 신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염불도 석가모니부처님의 마음과 링크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많이 염송하게 되면 자신의

내면체에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은 파장과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칭몀염불을 많이 한 어는 수행자는 자신의 내

면에 부처님의 황금빛 화신이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한다고 합

니다.



재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점은 바로 염불선이 큰스님의

법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큰

스님께서 염불선, 특히 칭명염불을 강조하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부처님게서 실재하신 다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에 수

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붓다님들이 여여히 계시기에 우리는

그 붓다님들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붓다님들을 진심

으로 간절하게 찾을 때 우리는 붓다님들의 가피을 입을 수 있

고 궁극으로는 붓다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특히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붓다 중의 붓다이시기에 그 분

의 능력은 실로 창조주격이십니다.  바다를 건널 때 수영으로

건너는 것 보다 배를 타고 건너는, 즉 타력에 의한다면 훨씬

빠르게 수행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염불선으로 희귀함을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셨

습니다.  한편 저는 여러 선지시을 만나고 다양한 책들을 접하

면서 모종의 정합적 이해를 얻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혼돈이 있

었습니다.  그러한 혼돈은 바로 방황을 희미하여 급기야 정신적

공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많은 구도자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폐인이 되다시피 하는 것은 바로 확고한 방향을 제시할 뚜렷한

경지에 이른 선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불경을 통해서 염불선을 수행해야 할 당

위성을 얻으셨고 결국 수행 정진에 매진하시고 각고의 노력과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시고 불과를 얻으시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이는 한국 불교사에 일대 획을 긋는 그리고 불교계의

잃어버린 얼을 되살리는 대업을 이루신 일이라 생각합니다.  큰

스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말입니다.



여하튼 큰스님은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사자후를 남기셨습니

다.  즉, 염불선을 수행함으로써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사자후하시는 동시에 실제로 몸소 불과를 증득하셨습니다.  일체

을 의심하면 모든 법이 다 허무해 보이고 실없어 보입니다.  그

러므로 너무 의심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수행에

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도

큰스님게서는 화엄경의 주옥같은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믿음이

모든 공덕을 짓는 어머니'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불전의 부처

님 말씀이나 공부가 깊은 큰스님의 법문 말씀을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도를 이루는 근원이 됩니다.  지옥에 갈

종자는 진짜 큰스님의 말씀도 믿질 않습니다.  삼악도의 종자는

의심만합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불제자에게 신심을 내

야함을 당부하셨습니다.  믿음을 수행터로 삼아 극락 왕생과 붓

다증위를 위해 전심전력하여 염불선, 즉 칭명염불에 정진하면

우리 불제자들 모두가 큰스님의 말씀처럼 석가모니부처님의 위

신력과 가피를 받아 부단한 향상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불교의 과학적 사유

큰스님께서는 불교 세계관에 대해서 최첨단을 걸으시는 분이

라고 생각합니다.  큰스님의 법문에서 "물은 수소원자 2개와 산

소원자 1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듯 모든 물질은 동일 원자

집합으로 되어있다고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말합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원소는 핵과 전자로 되어있고 이 핵은 핵자로 되

었습니다.  핵자는 중성자와 양성자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소립자

라 합니다.    소립자는 쿼크로 이루어지고 이 쿼크는 서부쿼크로

더 들어가면 코스몬으로 이루어졌음을 압니다.  이 코스몬 보다

더 작은 입자를 최종 입자라 합니다.   이 최종 입자를 지나면

공입니다.  이 공의 자리가 아라한의 자리입니다.  윤회를 벗어난

자리인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가히 큰스님께서 불교를 과학적

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얼마나 확연하게 불교 세계를 통시(通視)

하고 계시는가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입자에

대해서 논하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부처님께서 "<<능엄경>>이나

<<구사학>>을 보면 격유진(창문에 앉아 있는 먼지 입자)이라 하고,

이 격유진을 뚫어 가면 갈수록 가늘고 세밀해재는데 이를 보면

우모진(소털 위에 앉은 먼지 입자), 양모진(염소털 위에 앉은 먼지 입자),

토모진(토끼털 위에 앉은 먼지 입자), 수진(물을 뚫을 수 있는 입자), 금

진(금을 뚫을 수 있는 입자), 미진, 극미진, 인허진, 공"과 같이 설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은 결국 입자에서 알수 있듯

만물은 혼자일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상호 의지관계를 가지고

더불어 살고 있고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의 법문에 담긴 치밀한 과학적 사유는 21세기 신인류

영상문화에 있어서 불교의 대대적 흥성(興成)을 기약하는 위대한

법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를 단순히 과학적 차원에만 국

한하여 바라봐도 안되지만 과학을 통해서도 불교를 이해하는

지견과 식견을 두루 갖추는 길은 큰스님께서 향도하시는 불보

.살님의 장엄(莊嚴)한 세계를 향해 정진하는 불제자의 도리라 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사상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밝힌 법신 개념은 공(空)사상

의 연속성 속에서 찾아야 된다고 봅니다.



많은 선 불교 스님들께서 큰스님의 가르침이 공사상을 위배하는 것이라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공(空)사상에서 엄청난 정도의 진보된 상태가 바로 법신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견성(見性)을 하게 되면 공(空)사상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법신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은 바로 불과를 중해야 얻는다고

큰스님께서 저서에 말씀하고 계시고 있고 <<금광명경>>에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 불교의 공(空)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설파하신 가르침이지

공(空)사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명료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공(空)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세계를 공허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의 몸과 정신 속의 에너지를 청정한 빛의 에너지로 채워야 합니다.



큰스님 말씀대로 아라한을 증위하기 위해서는 은광색의 빛이 두뇌에서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빛의 에너지가 바로 인도의 수행 체계에서 말하는

쉬바-샥티(Shiva-Shakti)이며, 그 빛의 에너지를 통해서 공성(空性)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는 부처님의 공사상과 노자의 현묘(玄妙)사상이

결합된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도자가 자신의 심신을 쇄신하여 깨끗하고 맑고 명료한 의식을 얻어

자신의 존재성에 빛(말하는 아유대신비주의인 카발라에서 인 소프 오르)이

스며들고 세계의 공(空)함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세계는 그대로 여여한

모습으로 우리의 지혜의 눈에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마음을 닦고 비우는 것을 말하는데 실제로 불가(佛家)에서

전하는 중생심으로서 삿된 에너지 또는 성욕의 에너지로 알려진 나쁜 업의

에너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가(禪家) 또는 외도들의 가르침에서는 깨달음은 감추어진 나를

찾는다고 하는데 이보다도 큰스님 말씀처럼 삿된 기운을 모두 제거해내면

자연스럽게 경계가 뒤집혀 공(空)이 현전한다는 것이 보다 더 확실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즉 내면이 허공을 삼키고 뒤집혀져서 청정심이 나오게 되면 깨달음을

증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큰스님의 자상하신 설명은 현대의 종교 명상서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진귀한 가르침이요 실증적 경험담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청정심이 뒤집혀 나와도 약간이라도 계율을 어기거나

믿음이 약하면 다시 원래 상태로 복귀됩니다.

이를 공(空)이 깨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공(空)을 얻었다가 잃었다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공(空)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空)을 단박에 증오하는 경우는 극히 어렵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공(空)을 얻어 아라한이 되는 것이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큰스님 말씀대로 보살위를 얻어 더 나아가 불과를 중위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삿된 에너지와 탁한

에너지를 완전히 제거하여 인간의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의 청정한 몸을 절대세계에 얻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수행은 공(空)을 얻는데

목표를 두어서는 안되고 <<화엄경(華嚴經)>>의 선재동자처럼 끊임없는

구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 누차

역설하시고 계시다는 점을 우리는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선 불교의 한계

선 불교에서는 인연을 멸하여 생각의 생멸까지 쉬게 하

는 것을 수행의 요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생멸을 그치게 하는 것은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 아라한위나

잘해야 보살위에 지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더욱 아쉬운 사실

은 오늘날의 간화선 수행법으로는 아라한 이상으로 높이 올라

갈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수행자들의 실정임을 여실지견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화두선은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해 나가는 수행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화두선 또는 간화선을 통해

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해서 정신병, 주화입마, 상기병 등에 걸

린 수행자들이 적지 않다고 수행자들 간에 은밀히 회자되고 있

다고 합니다.



선 불교의 폐단은 너무 편협하고 독선적인 아성을 구축

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또 넌센스식의 화두를 제시하여

수행자들의 마음을 너무 많은 시간 동안 미로 속에서 헤메게

만드는 폐단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얻는 것은 흔히 말하는

대오각성, 즉 견성의 완성을 통해 얻은 아라한위까지입니다.  무

엇보다도 오늘날의 선사들의 가르침에는 원시불교를 아름답게

수놓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자비심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는 것입니다. 



반면 염불은 실제로 부처님의 칭호를 염송하는 것으로서 직

접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칭호를 염송하는 염불 수행이 선 수행법 도다 못하다면 부처님

의 위신력에 우리는 회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며 실재로 과거에도 수행승들께서 아미타부터

님을 30년 간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여 절 천장을 뚫고 날아서

극락 왕생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미타불을 찾는 염불선이 많은 영험이 있다고 네티

즌 수행자들 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염불선의 위신력

이 선 수행보다 우월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염불선도 큰

스님의 지도에 따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염불

선도 외도 기운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

닙니다.



2500년 전 부처님이 이 세상에 몸을 입고 오셔서 전해주

신 위빠사나 수행이나 아나파니사띠 수행법도 좋은 효험이 있

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파한

대로 부처님의 칭호를 염송하는 칭명염불이 무엇보다도 중요함

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칭명염불선

은 새로운 불교 수행의 중흥을 이루고 새로운 불교 문화를 꽃

피우고 창당하는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마구니에 대해서 

미혹한 구도자들은 책을 통해서 아는 지식으로 큰스님께서

직접 불보살님의 실재를 경험해서 아시는 경지를 비방합

니다.  어찌 이런 통탄할 일이 있는지요?  지식이 중요합니까?  실

증적 경험과 지혜가 더 중요합니까?  그리고 큰스님에 대해서

마구니 우운하는데, 나무니가 억종광으로 발현하면서 크토록 영

험하고 자비롭다면 그게 마구니라고 할 수 있는지요?  상식적으

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험하고 자비로운 마구니를 본적

이 있는지요?



마주니의 기본 개념과 의미에 대해서 올바로철견해야

할 것입니다.  왜 마구니가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기본 이유에

대해서 확실한 이해가 정립되지 않는 이상 큰스님의 법경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온전히 읽을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서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구니의 정의와 존재 의의를

모르고서는 큰스님의 글을 일방적으로 마구니의 글로 치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금강경>>에서 설한 "색신이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는

자는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 당시 몸을 입으시

고 세간에 오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몸과 몸에서 나오는 소리로

서 부처님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이 쓰여

질 당시 부처님의 몸과 음성을 보고, 저 몸과 음성이 바로 부

처님이구나 라고생각하는 의혹을 지닌 사람들을 경책하기 위

해서 설한 가르침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마구니는 신통력 같은 것에 의해 불보살로 둔갑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행승들이 그것을 보고 마치 진짜

불보살님으로 착각하여 속아넘어간다고 하였습니다.  큰스님께서

친견하시는 붓다님들이 진불이라는 증거는 환영으로서 나타나

는 마구니들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구니에 의한 마장으로서 나타나는 환영과 환상은 엄

연히 불보살의 현시와 차이가 있습니다.  환영이라면 당연히 말

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마구니가 둔갑한 경우라면 삼매 속에

들어올 수 없으므로 큰스님께서 삼매 속에서 친견하시는 붓다

님들은 진불이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내신 화신불과

마구니들이 둔갑한 모습은 그 상모면에서 천지 차이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마구니의 변화 모습은 자비스러움이 전혀 없으며

눈에 살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서적에서도 나오지만 마구니가 형상화하는

부처들은 조잡하기에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러한 조잡한 부처의

형상은 바로 마구니가 환영으로 만들어낸 것을 의미하며 수행

과정 중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구

니의 환영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마음을 잘 관조해보면 됩니다.



자신에게 중생심으로서 오탁에 물들어 있는 마음이 조금이라

도 있다면, 그 중생심에 비추어지는 부처의 상은 가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청정심을 얻게 되면 그 청정심으

로 비춰지는 불보살은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탁에 물들은 중생심에는 마구니의 상이 비추어진다면, 깨끗이

정화되어 가는 청정심에는 진실된 불보살의 모습이 화현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진실된 불보살의 모습을 친

견하기 위해서는 견성 후 보임을 통해 아라한을 얻고 최소한

보살위를 얻어 상품 보살지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는 제가 큰스님의 책을 일고 말씀드린 것이므로 꼭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자세히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또한 마구니 식별은 큰 스승님과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

해서 지혜와 반야의 눈으로 통찰해야 알 수 있는 문제이므로

얼마나 전생에 선근을 구족해 왔느냐에 따라 마구니와 불보살

의 에너지체를 인식하는 능력이 판가름납니다.  만약 누군가가

마구니의 상과 불보살의 화현 간의 구분에 대해 미심쩍어 한다

면 스스로의 모습을 견책해야지 섣부르게 큰스님의 책 내

용을 비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의 생각은 큰스님의 가르

침에 의문이 들면 개연성을 갖고 받아들여야지 그것을 비방해

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구니란 거의 대부분이 마경으로 나타나는데 환상, 망

상, 정신질환 그리고 색마등입니다.  이는 실경이 아

니라 가경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경들 중에서 가장 힘든

마경은 색마인데 색마를 끊으면 영원한 자유인에 가까이 도달

하게 된다고 대만 불광사의 성운 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불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불도를 보다

쉽게 지름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신 성전이 바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입니다.



견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으면 색마를

제거할 수 없으며 마경을 초월할 수 없게 됩니다.  견성하

고자 한다면 간절한 마음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간절함과 절실

함은 절박함에서 얻어집니다.



현대 세속사회에서도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모면하는 방

법에 대한 글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한 위기 관리의

핵심에는 마음을 견고하게 다르시는 힘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

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견고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불제자

들에게는 불도를 간절하게 염원하는 마음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절박함이 없으면, 즉 위기의 순간이 없을 시에

는 결코 불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원해야 얻을 수 있다고 큰스님께서도 칭명염불을 언

급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승비불설 
오늘날 대승불교의 문제점은 대승의 올바른 가르침이 시대를

통해 전승되어 오면서 많이 오전되었다는데 있습니다.  구전되어

오던 내용에 학승들과 깨달음의 경지가 부족한 분들(그 어떤 분

이라도 과연 석가모니부처님만 하겠습니까?)이 첨삭을 가하고 가필과

제필을 하였기 때문에 경전의 내용이 실전되거나 왜

곡되고 결국 부처님의 교설이 적지 않게 훼손되어있음을 우리

는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별도의 장을 마련하셔서 자세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큰스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과 신도들 그리고 구

도자들 및 수행자들에게 대승불교의 왜곡된 바를 경고했지만,

그래도 순수하게 남아 있는 대승불전이 전해지고 있음을 말씀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눈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대

승불교 경전에 가필과 첨삭에 의해 왜곡된 바를 말씀하신 것이

지 그것을 읽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법경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불전을 읽는 것은

다른 어떤 경전보다고 효험이 있다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큰스

님을 비방하시는 분들은 큰스님과 부처님의 종지를 제대로

살필 수 있는 혜안을 여셨으면 바라는 바입니다.





지옥은 존재한다   

선 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 밖에 극락, 지옥이

없고 마음이 곧 평화로운 자리가 바로 극락이다."는 형태로 이

야기를 합니다.  실제 존재하는 극락, 천상, 지옥 등이 없다면

어떠한 이유로 수행을 하는지,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면 적당히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 아닌지 깊이 심사숙고해 봐

야할 것입니다.



일반 중생들로서 복이 많아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풍요로

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이러한 중생들은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 마디

로 마음이 불편하면 불교를 믿거나 열심히 수행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수행을 안 해도 되는 것인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생을 믿거나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종교

라고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지하셨으면 합니다.  이런 연장선

상에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존재 의미'를 여실지견

으로 통찰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큰스님께서 하신 "지옥은 존재한다."라는 말씀에 대해

서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비방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 아는

사실을 왜 그렇게 역설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강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모르고 지옥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선 불교의 구습의 잔재가 불교계에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

을 아라야 합니다.  그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큰스님께서 사

자후를 하신 것임을 우리는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지옥의 존재 유무를 육도윤회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며, 부

처님께서 친히 설하신 가르침에 기반을 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육도윤회는 <<아함경>>의 중심사상이라고 큰스

님께서 법문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지옥을 관

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해주셨습니다.  "지옥을 관하는 데

는, 먼저 수행자가 보살과에 증입한 후 부처님께서 위신력으로

그 수행자를 인도하여 지옥을 답사시켜 주는 길과 부처님의 미

간에서 광명을 놓아 지옥을 보여주는 길이 있다.  이 때의 수행

자는 성중 이상 보살위에 이르어야 한다.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한 수행인이 꿈이나 선정에서 보았다는 지옥은 실상과는 거

리가 먼 굴절된 모양이거나 마음의 마술사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  친히 경험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꾸며낼 수 없는 말

씀임을 우리는 명료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큰스님의 보경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자세히 들

여다보면 수많은 주옥같은 가르침들이 하나하나 유기적으로 수

를 놓고 있어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수

많은 보석 같은 가르침을 농축해 놓고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

는 무애한 필치로 아로새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만고불후의 명작임을 다시 한 번 우리 불제자는 명료

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윤회전생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수행자들과

구도자들 그리고 불제자들이 숙지해야 할 사항을 요약 정리해

서 간명하게 정문일침 형식으로 큰스님이 사자후하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윤회와 전생 이야기는 한 번 더

강조해야 하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 재삼 신도들과 수행자 그리

고 구도자들에게 환기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누차 사

자후를 설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윤회전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며, 윤회전

생의 존재는 수행자와 구도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발심

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그리고 윤회

가 있기 대문에 수행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

다.  가장 기초적인 진리의 가르침을 너무 무시하거나 도

외시하는 우를 범하면 결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의 기초적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를 거듭 강조하고 계심을 명료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미혹한 구도자들은 큰스님을 비방하지 말고, 불교의 기본 교

리에 충실하는 지혜로운 식견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그 위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가령 석

탑의 맨 아래층을 잘못 쌓으면 위층을 쌓아올릴 수 없다는 것

을 알아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기본 교리가

매우 중요함을 깨닫고 이를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중생들과 구

도자 그리고 불제자들에게 설파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지하고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은 윤회 전생의 존재가

분명히 있음을 확인해 주는 동시에 죄를 지으면 죄업을 받으

며,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업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사자후하

고 계십니다.  우리가 행도한 행위와 말들 그리고 생각들 하나

하나가 파장으로 이루어져 정신세계의 아카샤 레코드에 기록된

다고 서양의 영성 세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카샤 레코드

란 무의식 세계를 기록해 두는 공간계의 업식

기록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회 전생을 확철히 깨우쳐 알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믿어

야 합니다.  저 또한 윤회 전생을 믿지 못해서 수행 기간 동안

방황한 적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업이 많으면 이

러한 정신적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근 부족으로 나쁜 인

연과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윤회전생, 아카샤 레

코드 등의 실존적 유무를 떠나서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파

스칼이 그의 서적에서 "신이 비록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나는 착하게 살겠다.  그래야 죽어서도 밑져야 본전이

되기 때문이다.  즉 신이 없어도 나는 착하게 산 것으로 그만이

고 신이 있다면 그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철학

자의 양심을 밝힌 젓처럼 우리는 바르게 사라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른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믿음의 중요성을 큰스님의 자상하고도 엄중한 필치

로 여러 번 역설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윤회로 이루어진 사바세계

는 부정적인 에너지와 부정적 의식, 다시 말해서 저급한 욕망

과 잘못된 사유들이 존재하는 한 중생들은 사바세계를 맴

돌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불제자라면 어떻게 해서

든지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부정적

기운을 모두 몰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삿된 기운을 모두 몰

아내도록 노력할 때 비로소 윤회의 끈을 끊고 사바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큰스님께서 "삿된 기운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이다."라고

사자후하신 말씀에서 얻은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설

하신 팔정도를 통해 깨달음을 증득하게 된다는 말씀은

불제자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즉 팔정도가 구

도자들을 미혹하는 사바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로 이어준

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윤회 공간은 부정적 기운이 많고 큰스님 말씀대로 유혹의

늪이 많습니다.  따라서 늪에 빠지게 되면 부정적 의식에 잠식

되거나 부정적 영향에 빠져 무한 반복적으로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무한 반복이란'에서 나온 말로 비유하

자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띠의 양끝이 서로 반대편으로 연결되

어 있어 그 위를 걷는 개미는 영원히 그 띠를 빠져나올 수 없

습니다.



윤회 세계라는 사바세계도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세히 목도하면 매우 무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윤회를 필사적인 칭명염불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끊어버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불제자들에게

요구됩니다.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윤회로부

터 벗어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신의 모든 것을 올바른 존재자들에게 바치는 자세가 필요합

니다.



윤회 시스템에서는 자신이 삿된 의식으로 모은 물건이 많을

수록 업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윤회에서 탈출하기 위

해서는 삿된 마음으로 얻은 재물과 재산을 가급적 적게 소유하

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소유를 통해서 참다운 자신의 존재성을

찾고 그 후 다시 소유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렇게 될 때 존재성을 찾은 후의 소유는 진실된 무소유, 즉 순

수한 무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책 전체를 통해서 윤회 전생을 많은 페이지를 할

애하여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

다.  그리고 윤회 전생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는 깨달음 너머

의 세계와 불보살님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윤회도

사실이며 불보살님의 가피가 없으면 윤회에서 빠져나오기가 지

극히 어렵다는 큰스님의 말씀도 사실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윤회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서 설하고 있는 가르침들을 모두 잘 소화하고 실재로 경험적으

로 체득하여 수행 정진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에센셜 포르테(본질적 강점)는 바

로 불교의 총체적 수행 체계와 심오한 세계관을 폭넓게 아우르

면서 불제자가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4가지 영체

큰스님께서 언급한 것처럼 힌두교에서는 4가지 영체설을 이

야기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신지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체계와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신지학에서는 인

간은 에텔체, 아스트럴체(감성체), 멘탈체(정신체), 토절체(예지체)

등 다양한 에너지체들을 상정하고 있어, 초심자가

수련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에너지체를 골고루 마스터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반 불제자나 구도자가 견성을 얻기 전에는 육체에서

얻어지는 오감의 쾌락을 어는 정도 맛보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다만 견성을 하였다면 그 후에는 절대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교의 탈무드에도 어리석은 자는 감각적 쾌락에 한 번 빠

져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보통 사

람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항상 감각적 쾌락에 대해 관

심을 놓지 않고 정신 에너지를 낭비해 간다고 비유적으로 말합

니다.  그리고 현명한 재가자는 처음에 어는 정도 감각적 쾌락

을 맛본 후에는 감각적 쾌락의 문을 꽉 잠그고 청정한 삶을 살

아간다고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청정한 마음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무릇 중생

심의 허망함을 확실하게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

다.  또한 큰스님 말씀대로 견성을 한 사람이 보임 중에 음계를

범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을 능멸하는 중죄임을 명각

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생심이 삼독심(탐, 진, 치)을 일으키

기 때문에 중생심은 똥물이나 다름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

만 중생심의 삼독이 가져다주는 괴로움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코 청정심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따라서 영적 구도자들은 처

음에는 반드시 중생심의 허망함을 통렬하게 실감해야 할 것입

니다.  그 후 영적 추구의 길을 밟아 나가시면 높은 경지에 이

를 수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요가가 지금 전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

은 매우 과학적이기 때문입니다.  요가의 비보 파탄잘리

의 8가지 요가 행법은 매우 체계적(시스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 문명은 컴퓨터 시스템처럼 정확하고 정묘하

게 맞물려 돌아가는 유기적 메카니즘과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사상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요가 철학과 요가 수행체계

가 매우 서양 사회구조에 적합하게 들어맞게 된 것이라고 봅니

다.  우리는 요가 시스템과 같은 체계적인 수행법을 지행해야

합니다.  체계적이란 분류와 범주를 잘 나누어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에너지체에 대한 분류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

합니다.  4가지 영체에 대한 큰스님의 사자후는 광오한 지

혜와 심오한 식견을 지니신 큰스님께서 얼마나 체계적으로 불

교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 알파를 가미하신 것은 염불선으로의 회귀

만큼 또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

니다.




현지사의 천도재 비밀

사바세계에서 생을 얻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선남자 선여인

들에게는 현지사에서 큰스님 집전 하에 거행되는 명실상부

한 천도재를 환희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큰스님께

서 친히 말씀하신 현지사 천도재의 실체를 이제야 세상에 소개

합니다. 



지장보살님 말씀처럼 현지사의 천도재는 부처님께서 주관하

시므로 진짜 천도재이라는 점을 우리 선남자 선여인들은 마음

속 깊이 잘 새겨야할 것입니다.  현지사의 천도재는 역사에서,

이 세상에도 없는 확실한 천도재, 겁에 한 번 있는 천도재가

됩니다.  이 말은 대단히 중대한 이야기입니다.



불과를 증할 수행인이 남섬부주에 태어 났을 때, 여러 생을

따라다니시던 부처님께서 비로소 이 땅에 오셔서 그 수행인을

만나십니다.  붓다 되도록 이끄시고자 말입니다.  그래서 그 수행

인의 도량은 궁이 되어 많은 부처님 성중이 상주하세 됩니다.



부처님께서 하시는 천도재는 이러합니다.

첫째, 천도재는 진정한 효입니다.  돌아가신 부모. 조상님

들을 악도에서 건져 주는 일이니 이 보다 더한 효가 어디 있겠

는지요?  중생은 거의 죽어 악도를 간다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비참하고 험난

한 고생을 하고 산다해도, 지옥 축생의 고통과 어찌 견주겠는

지요?



둘째, 천도재의 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복위자)를 기준

으로 1) 부모 형제와 본인의 자연 유산아, 낙태아 포함 2) 아

버지쪽 조상(직계, 방계) 3) 어미니쪽 조상 4) 부인의 부모 형제

5) 부인의 아버지쪽 직계, 방계 6) 부인의 어머니쪽 직계, 방계



영가 그리고 7) 금생에 와서 은혜 입은 이 8) 금생에 와서 원

결 지운 이 9) 기타 친한 친구 10) 5대 ~ 10대 각 윗대의 조상

무주고혼 5~7명 안팎(접수한 영가 명단 외로, 큰스님과 부처님께서 수

배해 주심) 모두 70~80명 내외입니다.



셋째, 영가 명단 접수 - 현지사에 7일 전까지 영가의 명단을

작성하여 fax로 보내야 합니다.



넷째, 현지사에서는 천도재 전날까지, 큰스님께서 부처님과

더불어 70~80명 내외의 영가 소재를 파악하고  신병 확보해서

지장궁 별궁으로 유치, 대기하도록 조처합니다.  지옥에서 벌 받

고 있는 이는 열시왕, 옥사장 쪽으로 명령이 하달 되어 옥족은

죄인을 압송해 옵니다.  축생으로 몸 받아 난 이는, 그 영혼체를

빼내어 데려오고, 특히 명부에 들지 못한 중음 영가들도 1) 문

수보살님은 지혜의 칼을 땅에 꼽아 무량광을 방사 땅 속과 물

속에서 숨어 있는 영가를 2) 지장보살님은 허공에서 지상과 허

공에 숨은 영가를 수배합니다.  이때 도저히 잡히지 않는 죽은

지도 몇 백 년 되어 영악스런 영가의 정확한 수배는 3) 부처님

께서 허공 높이에서 무량광으로 레이더처럼 서서히 돌려

빛을 쏘면 그 빛(이 때는 무색광의 무량광)이 수배하고자 하는 영

가를 신비스럽게도 맞춰 잡아냅니다.  참고로 부처님은 4집안의

윗대(10대 안팎) 영가를 수배하실 때, 위신력으로 각 영가가 죽

을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시면, 큰스님은 이 때 그 영가의 나이,

얼굴, 죽은 이유 등을 영가에게 물어 알게됩니다.



다섯째, 천도재 당일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습니다.



1) 지장궁의 여러 신중들이 천도재 모실 70~80여 영가를 압

송해 오며, 관욕에서는 신중들의 신통으로 목욕시키고 새 옷으

로 갈아 입힙니다.



2) 큰스님의 변식진언에 따라 목욕물이 불어나고, 옷(내의 등)

신발은 천도재 영가들의 수에 맞춰 불어납니다.



3) 관음시식편 - 장엄염불할 때 아미타불 내려오심. 지장보

살께 공양드릴 때는 지장보살과 좌우보처께서 임석함. 10시왕

도 잠깐 왔다갑니다.



여섯째, 영가들의 수배와 신병 확보가 천도재의 핵입니다.  영

가들의 신병 확보가 안 되면 천조재란 있을 수 없다고 큰스님

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영가님들의 신병 확보란 마

치 허공에 별을 따는 것 같이 어렵다고 하십니다.  영가를 부른

다고 해서 그 영가는 오지 않습니다.  지옥 축생으로 떨어진

영가를 어찌 연행해 옵니까.  귀신을 보고, 빙의된 귀신(영가)를

떼는 스님(도인?)이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초등학생 수준으로

보아서 천도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최소한 영가를 명부에 넣어주어야 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생이나 지옥에 있는 조상 영가를 지옥에서 건져주어

야 진짜 천도이지 그리 못하는 천도재는 실익이 없습니다.  의

사가 수술 환자를 수술해서 병 치료할 때 환자가 병원 의사 앞

에 대령해야 하듯, 천도의 장에 조상 영가 분들이 와야 됩니다.



그러므로 천도재는 영가님들을 수배하고 신병 확보가 중핵이

됩니다.  최소한 지장보살 그리고 그좌우보처가 천도재를 지낼

때 강림해야 합니다.  청정비구 나아가서 분명 견성하고 보림

잘 해가는 스님, 혹은 아라한 정도의 법위에 오른 이, 보살과를

증한 정도의 스님이 집전해야 효과가 있다 하겠습니다.



일곱째, 진짜 천도재를 모셔서 영가분들을 삼악도에서 천도

해 줄 수 있다면 이것보다 큰 보살행은 없습니다.  죄보 중생이

자손의 효성으로 큰스님 만나 천도되어 하늘 천상(아래 하늘까진

가능)에 나게 해 준다는 일은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큰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덟째로 천도다 되는 자량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불보

살님께 공양드리는 공덕 그리고 큰스님(불과를 이룬)의 발원과 자

손의 재보시(재비)가 어우러져 영가님들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됩

니다.



아홉째, 현지사의 천도재는 1부, 2부, 3부로 나누어집니다.  1

부에서는 영가님들의 현주소 파악 시병 확보, 2부에서는 천도

재, 3부에서는 불보살께 올리는 공양입니다.  3부에서 불보살님

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악도, 중음계에서 수고하시는 조상님

들을 천도해 드리는 복위자(자손 당사자)의 업장 일부를 씻어주시

거나 나아가 벗겨주시기(소멸)까지 하십니다.  빙의 되었으면 떼

어 명부로 압송토록 하고, 상당한 세속적인 소원도 이루어 주

십니다.  복위자가 사는 집까지 영적으로 나쁜 기를 뽑아주시고,

집에 숨어 있는 원결 영가까지도 잡아 명부에 넣기도 합니다.



열째, 천도재 끝나면, 관음보살 및 성중들은 주로 영가들의

고약한 악취 냄새(사악한 기)를 완전 제거하는 청소 작업을 하여

청정도량을 만들어 놓으시고, 집전 동참한 스님들의 영체를 씻

어까지 주십니다.  이 부분도 정말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러한

희유하고 엄청안 작업이 현지사 천도재의 실상입니다.



열한번째.  지금까지 큰스님께서 현지사 천도재에 대한 깊은

실체를 세상에 알리지 아니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저 세상이 없다는 시대에 천도재 말이 나오면 많은 사람(선근

없는)은 머리 돈 중(스님)이라 모욕하고, 돈 들여 쓸데없는 것을

한다고 부인을 학대하는 게 예사라서, 인연 있는 불자만 와서

천도재 지내도록 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현지사에 대한 비방-

구업 많이 짓는 이들을 보아서 이해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절 스님들의 현지사를 시기 질투해서 마구 업을 짓게 될까 염

려해서 큰스님께서 실체를 들어내지아니했던 것입니다.  TV

법좌에서 앞으로 현지사에서 천도재 안 받는다고 큰스님께서

선언했으나 입소문 따라 오는 이들의 간절한 청을 마다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동안 현지사는 너무 많은 모략을 들어 온

터라 지금은 천도재 안 한다 해도, 심지어 이번 약 2달간을 큰

스님과 스님들께서 공부만 하고 쉬고 있어도 계속 줄을 잇는

중입니다.  부득불 앞으로는 선택해서 지내줄 수밖에 없다 하셨

습니다.



열두번째,  천도재 모시고 3~7일 후엔 결과를 통보해 줍니다.

어디로 조상님이 천도 돼 가셨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큰스님께서 재차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

들이 너무 많이 지옥을 간다(먼저 축생으로 빠진 이도 가끔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의 벌은 무섭다고 하십니다.  극무간지옥, 무간

지옥, 중지옥, 하지옥, 대기지옥으로 부처님은 나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명부에도 못듭니다.  명부에 들어도 거의

지옥으로 갑니다.  중지옥이 제일 많습니다.  지옥에 대한 법문은

세월이 지나면 할 것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부처님들께 진짜 공양 올리고, 큰스님 집전으로 4번 정도 천

도재 올리면 부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신력으로 그 많은 영

가들은 대개 아래 하늘로 태어납니다.  지옥, 아귀, 축생으로 떨

어져 벌 받을 과보가 끊겨지고(단절), 하늘(천상)로 태어납니다.

이 작업 이상 보살행은 없습니다.



출가승도 돌아가신 부모 조상 영가(과거 생의 부모 형제 처자가

대부분)를 천도해 드리지 아니하면 결코 큰 공부가 되지 않는다

합니다.  조상님들이 한 사람이라도 악도에 남아 있으면 출가승

의 도리가 아닙니다.  천도는 은혜를 갚은 일, 빚을 갚는 일 입니

다.  우리는 다겁 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빚도 많이 졌고, 몹쓸

죄도 많이 지었다는 사실을 명지해야 할 것입니다.  현지사 천

도재는 순수 효심으로 모신다면 그두 문제(빚, 죄)까지 해결해

줄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법이 된다 하겠습니다.



삼악도에서 왔거나, 삼악도로 떨어질 사람들은 그 영체의 더

러움 그리고 악취가 대단하다고 하십니다.  우린 마음을 닦고,

선한 마음을 지녀야하는데 사람들이 그렇질 못하기 때문입니

다.  하늘 사람만 해도 깨끗합니다.  큰스님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상세히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똥물같이 더러

운 영체의 소유자는 대지옥을 간다고 말입니다.  견성한 이

들(보림까지 잘 마친)은 영체에서 청정한 하얀 은백색을 냅니다.



보살은 청정을 넘어 빛을 발합니다.  불과를 이루신 붓다의 영

체는 햇 속보다 밝은 빛덩이 자체라 하십니다.



현지사의 천도재는 부처님의 가장 큰 자비로 베푸시는 중생

들을 위한 구원의 손길임을 우리 불제자들은 잘 알아야 할 것

입니다.  이러한 기회는 지구 역사상 전대 미문의 일이며 미증

유의 일입니다.  더 이상 비방하는 죄업을 짓지 말고, 큰스님께

서 말씀하신 천도재의 묘리와 실상을 잘 해득하고 통찰하

여 부모 조상님께 효를 다한다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사는 것이

라 할 수 있습니다.



기타 수다한 영험 사례(세속적 소망을 이룬)는, 현지사의 천도재

를 지낸 모든 신도님들이 입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 선

남자 선여인들은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자력과 타력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자력으로서는 아라한까지 도달

할 수 있으며 그 이상 위로 오르기 위해서는 타력에 의존해야

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타력이란 바로 칭명염불 등으로 불보

살의 가피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 또한 자력만으로

안 되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승을 구하고

큰스님을 친견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수행자와 구도자들이 추

구하는 바램이 아닌가 합니다.



만사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혼자서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

며 정신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21세기 수행 문화

의 한 흐름이며 사조입니다.  21세기에는 특히 자력이란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1세기는 유례와 전

례 없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보다 긴밀한 인연법에

의해 자신의 존재 구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인연이 생기면 생하게 되는 것이 불

법의 이치이므로 자신의 구도과정 또한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

고 인연에 의해서 전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존

재성 자체는 자신 스스로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절의 인연과 선지식들 그리고 불보살님의 가피가 있어

야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해득하는 선결 요건이라고 말

씀드리고 싶습니다.  정신계와 존재의 하이어라키(중생, 수다원, 사

다함, 아나함, 아라한, 대아라한, 보살(하품, 중품, 상품), 붓다, 석가모니부

처님)를 투철하게 통잘하지 않고서 큰스님의 글과 말씀을 무조

건적이고 부정적인 단식 판단과 단견으로 비방하는 것은 지중

한 죄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고대 이집트의 현자 헤르메스는 "위에 있는 대

로 아래에도 그러하고, 아래에 있는 대로 위에도 그러하다."라

는 가르침을 갈파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늘 아래의 세속에서

벌어지는 세상살이가 정의와 자비 그리고 위용과 겸손을 수호

하는 존재들에 의해서 주도되어지는 것처럼, 하늘 위의 불보살

의 세계 또한 얼마나 정의롭고 자비로운가에 따라 그 위계가

정해진다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속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가족의 도움으로 커가는

것처럼, 수행자는 불보살의 가피를 받도록 염불선을 통해서 정

신계의 길을 열어 나가는 것이 매우 평이하면서도 빠른 방법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에 어느 누구도 정신계의

상위 존재의 가피와 보호가 없이는 제대로 수행을 정진해 나갈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불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얼마나 뼈아픈

고행을 감내해야 했는지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석가모니부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한 21세기 불교계의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진법

서를 집필하신 큰스님의 자비로움과 이러한 진경을

쓰기 위해서 그동안 큰스님이 얼마나 치열한 구도 여정을 행했

는가는 가히 저와 같은 수행자의 식견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합

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사자후하신 대로 아라한까지

는 자력 신앙이면서 동시에 타력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노력 없이 불보살의 가피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

니라 염불선, 지계(계율을 지킴), 효, 5대 대승경전들의 해의 및

독송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서 아라한까지는 어는 정도 자력으

로 해야 하고 어는 정도는 불보살의 가피가 있어야 된다고 말

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발심도 하지 않고 정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즉 염불

선, 효, 천도제, 지계 등 아무 노력 없이 불보살님의 가피를 기

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를 비방하는 구도자들은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의 저변 지식과

지혜를 통찰하셨으면 합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만 가

지고 비방하려고 하지 마시고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둥그

렇게 유기적이고 전체적으로 이해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

혹한 구도자들의 단견으로 큰스님의 말씀에서 일부분을 부

정적으로 확장해서마치 전체가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행

위는 삼가야할 것입니다.  이웃 종교에서도 믿음을 강조하고 선

행을 강조하는데 어찌 불교의 가르침을 설파하신 큰스님께서

오로지 자력은 필요 없고 타력만이 필요하다고 하셨겠습니까?



큰스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해의하려면 깊이 있게 책을 통찰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큰스님께서 아라한 이상의 경지에 대해

서는 타력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편 타당한 이해의 견지에서 봤을 때 아

라한만 되도 엄청난 공능을 갖게 되고 정신계에서 높은

위계와 서열을 차지하게 되는데 그 이상의 경지에 대해서는 책

임과 임무(사명감)가 막중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과 불보살

님의 가피 및 위신력이 없으면 보살위를 증위할 수 없다고 보

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아라한 이상은 불보살님의 가피를 받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

은 100번 이치에 타당하며, 심지어 불보살님을 믿고 불보살님

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용기와 결단이 없이는 자신도 불보살위

는 고사하고 확고한 아라한 증위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불가

에서도 백척간두 진일보라고 하여 목숨을 걸어랴 한 고비를

넘고 공과를 증득함을 이야기합니다.



서양의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야스퍼스는 이를 '한계 상황'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이는 아라한의 경지로 가는 과정이지

결코 불보살의 경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보살의 경지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경지이며

참으로 이루기 힘든 경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큰스님께서 설

하신 말씀대로 수행자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는 것마저도 참

으로 힘들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힘으로 뚫고

아라한까지 올라갈 수 있어도 그것은 무척 힘든 일이며 만약

우리가 쉬운 길을 안다면 누가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까?



큰스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출간하신 서적 <<21세기 붓다

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쉬운 길을 가르쳐 주신 불가의

종풍을 진작시키는 종지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

다.  아라한까지는 자력 신앙에 의해서 좌우되지만, 물론 타력

신앙에 의존하면 더 빠르게 올라갈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큰스님 말씀대로 아라한 위의 불보살의 경지는 다

른 역대의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의 가피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또한 지혜의 눈을 구비

한 수행자와 구도자들께서도 이미 큰스님의 가르침을 매우 긍

정적으로 이해하고 깨우쳐 수지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의심이 가는 구도자분을 위해서 세상의 이치를 통해서 타력

이 필요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봄이 오면 들에는 새싹이 자랍

니다.  새싹이 자라기 위해서는 토양과 수분이라는 타력이 요구

되고 또한 자신 스스로 생존 본능에 의해 토양을 뚫고 대지로

솟아 나오려는 자생력(자력)이 요구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아라한까지의 경지는 타력과 자력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

니다.  하지만 새싹이 더 커져 어린 나무가 되면 그 어린 나무

는 여름이 왔을 때 태풍과 폭풍우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면 생명

을 잃게 됩니다.  즉, 혹독한 비바람에 견딜 만큼 큰 나무가 되

지 않고서는, 어린 나무는 거목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

서 어린 나무가 잘 자라 거목이 되기까지는 사람의 도움이 필

요합니다.  즉 어린 나무에게는 타력이라는 버팀목이 필요합니

다.  이처럼, 아라한이 잘 성장하여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불보

살의 가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삼라만상의 묘법은

풀 한 포기가 자라나는 것에도 있다는 역대 고승의 가르

침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도자들이라면 좀 더 폭넓은

사유와 통시적 사유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도

제대로 꿰꿇어 보시지도 않으면서 큰스님의 거룩한 대법륜

의 가르침을 비방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구도자가 아닐 것입

니다.




음계

큰스님의 법력이 실린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그 무엇

보다도 구도자와 불제자에게 음계를 목숨 걸고 호지할 것

을 혈토하시는 심정과 준엄한 어조로 당부하고 계십니다.  오늘

날 불가에서는 불제자라는 분들이 내밀하게 음행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 세속인들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신심 깊

고 선근이 깊은 청정한 수행을 위해 정진하시는 많은 스님들과

불제자님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거보다도 오늘날

많이 음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는 것이 불가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음계를 범하는 것은 자신을 단두하는 죄임을 알아야 한다는

큰스님의 사자후는 바로 음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

불제자들에게 중대한 경각심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음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명각해야 합니다.  음계를 범하면 수

행자에게는 치명적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또한 마음

에서 미세한 음욕이 일어난 후 하루 종일 일이 안 되고 괴로움

에 시달린 적이 있어 이를 잘 압니다.



한국의 유명한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계율을 어기면 위험이

따른다."는 말씀을 잘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는 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음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말씀

하셨습니다.  음계를 범하기 때문에 살생을 하게 된다고까지 하

신 큰스님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우리는 명각해야 합

니다.  그렇습니다.  음계를 범하게 됨으로써 탁한 에너지와 탐,

진, 치 삼독에 물든 중생심에 의해 청정심이 가리워지고 번뇌

망상에 빠져 결국 다른 계율까지 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계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역점을 두어 피력하고

계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가르침은 그 어떤 명상 수행

서적과 종교 수행서적에서 보다도 실제적이고 대면하기 극히

어려운 내용임을 우리 불제자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음계를

내밀하게 도외시하고 외면하고 급기야 헌신짝처럼 무시하고 있

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불교계를 향한 큰스님의 사자후를

우리는 뼈 속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첨언해서 불제자가 걸러가야 할 길, 그리고 구도자가 걸어가

야 할 길은 동일합니다.  즉 자신의 에너지 시스템을 환골탈테

하여 청정한 공심을 증득해야 합니다.  공심을 증득하

면 그것이 바로 견성의 경지요 선가에서 말하는 깨달

음으로 증입해 들어가는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보임

을 잘하면 무아적인 청정심이 더욱 맑고 깨끗하게 된다고 알

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견성 후 보임을 완성하는 경지가

아라한 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영적 하이어라키(위계)에서 청정심을 갖는 것이 중요합

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계를 파하는 행위로 자신의 에너지 시

스템을 똥물로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청정한 물이 담긴 컵에 똥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 마실 수

없는 것처럼, 구도자는 계율을 엄격하게 지켜야하며 음계

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임을 제대로

할 수도 없으며 아라한의 공과는 이룰 수 없습니다.  보임은 육

체를 벗어버리고 마음이 육체를 떠날 때까지 지속됩니다.  큰스

님께서 설하신 '음계와 청정수' 비유 말씀은 촌철살인적인

가르침으로서 우리 불제자는 이를 뼈 속 깊이 사무치고 두뇌

깊숙이 각인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선근 보따리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재차 역설하신 내

용은 바로 선근 보따리입니다.  선근 보따리를 얼마나 크게 이

루느냐가 바로 불제자가 아라한, 보살, 붓다의 존재 위계를 어

느 지점까지 상향해 나갈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수행자가 무주상의 보시(상에 걸림없는

육바라밀)를 통해서 많은 선근과 복을 지어야만 영적 진화가 가

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부단한 선근 공덕과 마음이 머무

르지 않는 보시를 통해 복밭을 가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최고의 복을 짓는 것은 부처님께 귀의 공양하

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사자후하신 것처럼 부처님을 공경, 찬탄, 공

양(보현행원)드리는 것이 불제자에게는 매우 수승한 공덕이라 하

셨습니다.  선근 보따리를 키우는 길은 큰스님의 심혼이 담긴

법경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설명되어 있으므로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강조한 수많은 가르침들은 오늘날 세계 불교가 걸어가야 할 전

도양양한 비전과 명료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

계 불교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하셨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

다.  그리고 큰스님의 불교사에 대한 일대공헌이 언젠가

만호중생에게 현시되는 날을 기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 불제자들은 명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인연 따라 맺어지는 세상은 현재 우리 자신

의 의식 상태의 반영이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또 타아

라는 것은 <<화엄경>>에서 시사하는 실재의 거울

처럼 우리의 의식을 반사시켜 준다고 할 수 있

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자신과 깊은

인연이 되는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을 잘 살펴보

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과 인연이 된 사람

들을 주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식의 흐름은 모종의 패턴을 가지고있다는 인식의 차원에

서 심오한 통찰을 할 때 새로운 지혜가 발현됩니다.  즉 유구한

역사적 시원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식은 광

대한 변전과 진화를 이루어왔습니다.  인간 의식의 진화는 무수

히 많은 안 좋은 의식 상태들을 경험하고 그러한 의식 상태를

좋은 의식 상태 그리고 상향된 의식 상태 다시 말해서 긍정적

의식 상태로 탈바꿈시켜 놓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불제자의 구도 과정을 선근

종자와 선근 보따리를 키워나가는 과정으로서 나타내 주고 있

습니다.  선근 종자를 키워나가 전생에서 금생으로 그리고 금생

에서 후생으로 이어나가는 것이 바로 올바른 정신과 마음을 증

득해 나가는 진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선근 종자와 선근 보

따리의 개념은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언뜻 알고 있지만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보다 깊이 우리의 두뇌 속에 각

인시키고 동시에 의식의 지저분한 편린들과 파편들을 불사르는

위대한 법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아

우선, 무아사상은 매우 고도로 난해한 불교의 가르침이

며 최상승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불교 공부는 무아로 시작

해서 무아로 끝난다고 합니다.  큰스님의 성전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에는 붓다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불신

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생사경(영원히 죽지 않은

불신을 얻어 생사를 초월함)을 얻게 된다는 말씀으로 저는 이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붓다의 몸과 생사경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

자는 '나 없음'의 두타행을 해야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즉 무

아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다에도 집착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에도 재산에도 여색에도 그리고 친구와 가정에

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집착

해서는안 됩니다.  이 말은 몸을 소중히 하지 말고, 자신을 소

중히 하지 말고, 가정과 친구를 소중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

라 청정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기되, 한편으로는 오탁에 물

들고 삼독심, 즉 탐(탐냄), 진(분노), 치(어리석음)에 물들은 중생심

을 비리고 영겁을 통해 쌓아온 삿된 기운과 악업을 청산하라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영혼의 성장이란 바로 존재의 정체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며 과거의 구습에 얽매여 있던 정체성을 송두리째 재설

계해 나가는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존재의 재설계 과

정은 자신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과 탐구 정

신을 갖고 매사에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면세계와 외면세계가 하나로 통합 및 통일되어

현현할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성과 '남'이라는 존재성의 경계

를 허물고 하나의 새롭고도 광대하고 무한한 지평을

창출하게 됩니다.  이러한 무경계는 바로 현대 서양 초인

격 심리학의 거장 켄 윌버의 저서에서 역력이 표방하고 있는

신조어입니다.



물론 이는 <<화엄경>>의 이시무애, 사사무애의 가르침을 본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무량광이라는 엄청난 가르침을 통해 모든 경계를 타파하

고 초월합니다.  무량수, 무량광은 부처님의 본성이요 특질이라

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가르침은 영원성과 초시간성

그리고 초공간성을 뛰어넘어 대적정 적멸의 화엄바다를 건너야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하고 계십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를 경탄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구도자들의 혼미스럽

고 분열적인 세계를 하나로 아울러서 구도자들이 통합적 사유

를 증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21세기 수행자들과 불제자들에

게 새로운 수행적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서광을 비추었다

는 점에서 진지하게 그 영향력의 추이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

다.  아마, 큰스님 말씀대로 지금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대한 환호보다는 후대에 더 커다란 찬사와 반향을 일으킬 것이

라 생각합니다.



또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시중의 선서에서는

거의 일말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고 불교학자들 간에도 희미하

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무아사상을 지극히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아사상에 대한 설명을 책 여러 곳에 두루

두루 포진지켜 놓으셨다는 점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감명과

환희를 느끼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불교학자들은 무아의 개념을 '나가 없음'으로 이해

하는데 큰스님은 이를 '비아'로 새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붉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참 뜻은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

라 업장, 탐욕, 습, 탁한 기운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이 나에게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그 나를 부정한 것입니다.  그 나는 윤회

할 수밖에 없으니까 잡스러운 찌꺼기들을 빼야 한다고 말씀하

신 것입니다.  이 찌꺼기가 빠지면 청정한 참나를 얻는데 이를

아라한이요, 더 나아가면 보살이요, 궁극적으로는 붓다라고 말

씀하셨습니다.  백 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무아를 '나가 없다'로 하면 분명히 엄존하는 실존적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현상계의 시각으로 봤을 때 옳지 못

합니다.  따라서 큰스님의 말씀처럼 '나가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무아를 증입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조하는바

큰스님께서는 무아를 설하시면서 "나의 본질, 즉 '참나'까

지 없다고 보는 선 불교의 잘못된 인식이 생기니 비아라

고 해서 비본질적인 것을 빼면 참나가 된다고 보아 비아의 개

념이 더 맞다."라고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병 때문에 탐욕과 집착이 생기고 근심

이 일어나고 고통 받는 원인이 되니 이 비본질적인 것을 털어

버리라는 실천 수행의 방편으로 무아를 설하셨습니다.  즉, 나를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소아적인 것을 수행으로

털어내라고 설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논리 정연하게 선 불교의

오류를 논파하시는 말씀입니까? 선 불교를 옹호하는 학인들은

큰스님을 비방하기에 앞서 스스로가 얼마나 제대로 깨우쳤으며

논리 정연한가 자문자답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큰

스님을 비방하는 것은 자신의 위상과 명예를 실추시키는 길임

을 명지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82~283쪽에 나오는 큰스

님의 이야기는 무아 개념을 이해하는데 금상첨화라 생

각합니다.  완전히 두뇌에 이해되고 각인될 때까지 반복해서 정

독하시길 권청합니다.



"어느 날 세존께서 원만 보신으로 현신하셨습니다.

깨끗하고 탐스러운 꽃 한송이를 드시고서, "이게 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깊은 선정 속의 일입니다.

만덕 큰스님이 "본래부터 없는 것, 이름하여 꽃이라 합니다."

하고 대답하시니,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 꽃의 실체가 있느냐"

"없사옵니다."

"영산 당시의이 일은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를 가르치고

자 함이다.  살아 숨쉬는 모두는 이 꽃과 같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으니 믿을 것이 없다는 무아사상을 가르침이니라."



불세존의 말씀이셨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꽃과 같이 시들

어 없어지는 것이니 그 무엇에 착하여내 것이다 네 것이다 분

별하며 아옹다옹 하는가, 꽃과 같이 인생도 허물어지는 것이니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다음은 만현 큰스님과 만덕 큰스님이 처음 만나서 만현 큰스

님께서 2500년 전 영산 당시 부처님께서 거염화하시고, 곽시쌍

부한 의미가 뭐냐고 물으시니 답하신 게송입니다.  너무 귀중한

법문이라 이 자리에 다시 소개합니다.




만덕 큰스님 게송








본래부터 없는 것





이를하여 꽃이라 하네.





시들어 없어지면 허망한 줄 알고





허망한 줄 알았기에





나 없는 행을 철저하게 하라는 것.





육신의 인연도 다 했기에





대성자 부처님도 이 땅에서





두 발을 거두셨네.




무아라는 글자 한 마디 한 마디는 큰스님께서 친히 선별하신

주옥같은 다른 어휘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영롱하게 서광을

발함으로써 마음을 맑게 하고 의식을 명료하게 해주는 정신의

청량제와도 같았습니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석가모니부처님과 큰스님의 법력

이 실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저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한국 불교 더 나아가 세계 불교를 쇄신하고 환골탈테를 이루는

데 있어 시발점이자 여명을 비추는 금세기 최고의 불교

성전임이 자명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불교의 생사관


여기서는 붓다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생사관 확립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터넷을 주유하는 어는 강호 네티즌께서 좋은 글

을 올려주셔서 여기에 인용합니다.  네티즌님의 대의는 그

대로 하되 제가 그 내용을 약간 각색하여 정리를 해봤습니다.



"무협에도 신검 합일, 화경, 현경, 생사경 단계로 나눈다고 합

니다.  신검 합일은 검과 몸이 하나가 되는 단계이고 화경은 검

기를 다루는 것이며 이때 육체적인 뼈와 살이 바뀌는 환골탈태

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현경은 검과 마음이 하나가 되

어 어검술(검을 심기로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검술)을 부릴 수 있

다고 하며 이때도 환골탈태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물론 이

때는 영적인 환골탈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생사경은 몸이

사라진다 해도 보이지 않는 영적 몸만이 살아있다면 언제든지

부활이 가능한 단계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경에 도달하

신 분이라고 합니다."



생사를 초월하는 경지, 즉 부처님의 경지에 대한 생사관 내

용은 큰스님께서 최상위 존재계인 절대 법계에 거주하시는 석

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전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잘 나

와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계의 사활이 바로 올바른

생사관 정립에 있다고 하실 정도로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백 번 옳다고 생각합니다.  견성을 한다

고 해서 생사관을 확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즉 불과를 증위

해야만 생사관을 얻을 수 있다는 점, 누차 강조해도 지나친 말

이 아니라는 점을 명료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신통 

큰스님의 심법이 담긴 성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에서는 진실된 삼매와 허위로 가장되고 신통에 의해 이루어진

거짓 삼매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구도자에게 알려줍니

다.  어는 에너지체로 삼매에 드느냐가 중요합니다.  삿된 기운을

통해서 드는 삼매는 성에너지로 자신을 채워 명상 중에 외도

수행을 하는 것에 다르지 않습니다. 진실로 참된 삼매는 <<21

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논급하고 있는 것처럼 무아 속

삼매가 진짜 삼매라고 저 또한 간접 경험으로 어렴풋이나마 알

고 있습니다.



만약 삼매 속에서 성적 카타르시스와 같은 희열을 얻는다면

그것은 가짜 삼매입니다.  진실된 삼매는 모든 것이 담백하고

청정하여 물과 같이 맑고 깨끗해야 합니다.  중생심과 청정심

그 중 어는 에너지체로 수행하느냐가 진실된 삼매와 가짜 삼매

를 구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226쪽

에서 큰스님은 신통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

고 계십니다. 큰스님처럼 이렇게 자세하게 신통이 일어나는 경

우에 대해서 논급한 글은 과거에는 구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우

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20세기 신비주의자이며 깨달은 이인 메허 바바

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대가 참된 자

유를 얻는 것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이해

를 통해서 온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기적은 신통으로 바꿀 수

있으며 이해는 바로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

요한 것은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파한

가르침대로 신통을 잘못 행하면 불구자가 되거나 비참한 최후

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점을 불제자와 수행자는

반드시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는 아니며
견성은 성불이 아니다

선 불교의 구습에 물들어 있는 수행자나 학인, 특히 도올 선

생과 같은 분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마음의 공성을 철견하였다고 해서 붓다가 되는 것

이 아닙니다.  즉, 공을 철견하면 바로 그것이 견성이요 아라한

이 되는 길목임을 알아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천여 년이 넘게 내려온 선 불교의

구습을 청산시키는 "마음이 곧 부처가 아니다."라는 최초의 사

자후를 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우롱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부처라면 그것은 큰스님 말씀대로 심교지 불교

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선 불교 수행자와 중간

계통 유식 불교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강력한 문제 의식을 제

기하셨습니다.  즉 "선 불교에서 주장하는 무아와 마음이 곧 부

처라 하면, 다시 말해 나가 없다면 불과를 증하신 부처님께서

적멸로 돌아가서 계합하시고 근원 자리(공)이 되어 실체가 없어

져서 불과를 증하신 붓다님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화신으로 인

간 몸을 받아오시는 분이 있는데 그 무엇이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해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단 말인가?  육도 윤회를 하려면

윤회를 하는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면 육도 윤회를 인정은 하는 것인가?  그런 실체를 인정하지 않

는다면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불공을 하고 천도재를 지내는가?



이건 완전히 허무주의 아닌가?  그리고 가끔 자신들의 의견과

다르다고 법문하면 천마에 섭했다고 하는데 그럼 천나믄 실체

가 아닌가?  실체가 없다고 하는 당신들이 말하는 천마는 무엇

이냐?"라고 말입니다.



과연 무엇이라 큰스님께 대답해야 할까요?  '마음이 부처라는

논리로는 결코 큰스님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해소시킬 수 없다

는 것을 학인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모르는 것에 대해서

는 함구하고 알려거든 큰스님께 공손히 여쭈는 것이 진실한 학

인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견성이 성불이 아니라는 <<21세기 붓

다의 메시지>>에서 강조하신 가르침은 선 불교에 찌들어 있는

전 세계 불교계에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사자후

입니다.  그만큼 신선하고도 전대 미문의 사자후이며 매우 중차

대한 말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

지>>는 불제자들이 그동안 답습해오던 선 불교 수행에 종지부

를 찍고 견성을 넘어서 붓다를 증위하도록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기존의 간화선 일변도에서 탈피하고 염불선으로 희귀하

여 새로운 각오와 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권청하고 계십니다.



정법을 걷는 불제자라면 큰스님의 의중을 깊이 있게 관철

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수많은 가르침

을 심득하신 큰스님께서 아낌없는 마음으로 불제자들을 위해

베풀어주신 사자후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목 하나하

나가 주옥같은 내용들로 가득 차 있고 책을 읽는 불제자들의

의식을 송두리째 환골탈태시키는 가르침들로 영롱하게 아로새

겨져 있음을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도올 선생의 망언

여기서는 큰스님들을 비방하고 도인들을 비방하는 도올 선생

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합니다.  우선 도올 선생은 겸손해야 합

니다.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사자후하신

것처럼 도올 선생은 너무 오만합니다.  겸허할 줄 알아야 합니

다.  천재면 천재지 왜 도인들을 욕하며 수행자들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최소한도 대석학이라고 자부하면 자

신이 왜 그렇게 대석학이 되었는지 그 내밀한 내막을 궁리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알기에 도올 선생은 바로 선도 내공에서 흔히 절음색증

이라고 하는 특이한 관절염을 경험한 것으로 압니다.  그것이

요가에서는 쿤달리니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쿤달리

니 부작용을 통해서 의식의 각성을 얻었고 학문 탐구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쿤달리니를 통해서 도올 선생이

스스로 대석학이라고 자부하게 된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도올 선생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동양철학과 동양사상

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과도 좋지만 제

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가 큼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무릇 사도

를 걷는 분이라면 정법을 추구해야 하거늘 어찌 마음이

부처라는 구태의연한 선 불교의 관행을 답습해서 공영TV 방송

을 통해 강의를 하였는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도올 선생

은 뭐가 잘났다고 산 속에서 도 닦는 분들과 큰스님들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지요?



동양사상과 철학을 대중에게 유포시킨 공로는 어느 정도 인

정되고 다른 학자들보다 깊이 있게 학문을 다룬 것도 다소 인

정됩니다.  하지만 왜 자신이 있기까지 노력한 수많은 현자들과

성현들의 가르침을 먹칠하는지요?  숨어있는 도인들이나 큰스님

들이 능력 없어서 세상에 안 나오는지요?  그 깊은 내막을 알아

야 하는데 이는 수행 세계는 함부로 세상에 전해져서는 안 되

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려서 그 이유는 선근 종자가 없는 사람 또는 인연이 없는 사

람에게는 제대로 정법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환언해서 구도자들도 어느 정도는 철학을 공부해야 합

니다.  경전을 보면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철학적 사유의 중요성

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무의미한 사변적 사유가 아니라 팔정도

를 위한 논리적이고 정합적인 사유는 중요합니다.  특히

영적 구도자가 동서양 철학과 사상을 통관하는

사유를 함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아는 서양 철학자로서는 국내에서느 <<하이데거와 화엄

의 사유>>를 집필하신 김형효 교수님하고 <<하이트헤드와 동양

철학>>를 집필하신 김상일 교수님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용헌 교수님의 구분에 의하면 이 두분은 강단학파이십

니다.  도올 선생이 강호학파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 김형효 교수님, 김상일 교수님 그리고 도올 선생 모두가

영적 구도자가 수행을 하는데 어는 정도 중요한 철학적 사유를

제공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올 선생은 망언을 자주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쿤달리니 경험을 하여 내공을 얻었다면 그것

을 좋게 사용해야 할 텐데 큰스님이나 우롱하고 도인들을 욕되

게 하는 만행을 하고 있습니다.  도올 선생은 지식은 많아도 지

혜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요가에서 말하는 쿤달리니 각성을 실제로 체험한 분

이 도올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올 선생 강의를 잘 들

어보면 동양 철학적 사유와 서양 철학적 사유를 넘나들면서 강

의하고 있어,  그 해박함과 시대상에 대한 통렬한 갈파와 일침

에 시원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일부 국민들은 도올

선생의 TV  강연을 보고 환호하고 탄성을 하곤 하였습니다.  하

지만 도올 선생이 잘 못 알고 있는 종교적 가르침은 나쁜 업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오만한 지식으로 선량한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도올 선생이 일갈한 마음이 천국이고 마

음이 지옥이라는 것은 견성과 그 이전 의식 상태의 경지

이지 결코 아라한 이상의 경지가 아닙니다.  불제자들이 만약

이러한 도올 선생의 오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의식적 진화에 한계의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자신의 지적 수준을 넘어서서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지적 월권이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인이 아니면서 마치 모든 종교 수행을 경허만 것처럼 학

문으로 종교를 해석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도올 선생은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도올 선생은

지옥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오도된 선가의 가르침을 추종

하고 있는 듯한데 이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

께서 사자후한 것처럼 지옥은 있으며 마음이 부처가 아님을 알

아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분연히 필을 들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쓰시게 된 이유들 중의 하나가 도올 선생의 망언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도올 선생은 이 점 신중히 사려해야할

것입니다.



도올 선생의 승속을 오고가며 현실적 테마에서부터 고

답적 준론에 이르기까지 박식함은 인정합니다.  도올

선생은 유, 불, 선적인 통합적 사유 그리고 서양철학

을 아루르는 기시적 시각과 유기적 사유체계를 통해서 일부 학

인들에게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열어놓았으며 참신하고 다양한

의식적 사상 모텔과 사유의 패턴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닙니다.



하지만 도올 선생은 둘은 알고 셋은 모릅니다.  자신을 비판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좀 더 포용력 있게 이해하고 그들의 학

문적 기풍과 사상적 체계를 섭렵하고 반추함으로써 보다 새로

운 의식의 다변화된 양태를 학습하고 의식의 진화와 보다 높은

곳을 향한 향상심에 눈길을 돌려야할 것입니다. 도올 선

생이 천필이라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공탑하

신 천두필건의 큰스님이 계시다는 것을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TV에서 강의를 하는 도올 선생은 강의를 하는 것인지 자신

을 자랑하는 것인지 애매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무불통지

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겸허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신이 석학이면 석학이고 대석학이면 대석학이지 왜 그리 글

이나 말로 큰스님들이나 도인들을 비하 및 폄하하여 자신을 높

이려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속물스러워 보입니다.  자신만 우주보

물입니까?  그럼 삼천대천세계의 불보살님들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진심으로 바라건대 도올 선생은 정말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큰스님 말씀대로 깨달

은 분들을 비방하는 것은 그 어떤 중상 모략보다도 더 큰 죄업

을 받게 된다고 말입니다.  석학의 글은 말이나 글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어도 생사관을 얻지는 못합니다.  깨달음이 적

고 미사여구로 치장한 알량한 언변과 모욕적인 언사로 큰스님

과 도인들을 능멸한 죄는 큰 죄업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또한 도올 선생의 고답적 준론과 박학다식에는 독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세우는 에고심과 다른 선

지식을 포용하지 못하고 미친 놈이라고 욕하는 것은 분명 독이

라는 점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불제자님들께서도 이 점을 분

명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시 강조하는 바 도올 선생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를 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불교의

견성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만약 견성에

이르렀다 해도 그것이 불교의 모든 것이고 궁극적 종착역이라

고 일갈하는 모습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큰스님의 말씀처럼 불교는 견성에 머무르는 한낱 심교

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도올 선생의 미화적인 수사학에 현

혹되어 일부 국민들이 좋아하고 박수를 쳤는데 도올 선생의 언

변 구사의 내실을 들여다보면 진실이 오도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지옥은 존재

하고 윤회는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체계적인 법신, 보신, 화신

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내

용은 도올 선생의 TV 강연과는 비교할 필요도 없이 훨씬 우수

하다는 점을 아셨으면 합니다.  언어의 미화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진실 속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명지

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의 종교적 수행 세계와

증험된 경지로서 얻은 최상수의 가르침으로서 제가 상기에서

언급한 도올 선생에 대한 평가를 훨씬 능가하는 지고한

가르침, 즉 우주의 지존적 가르침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

다.  도올  선생이 경험한 쿤달리니 체험은 견성까지임을 말

씀드립니다.  7개의 차크라가 통관하여 하나로 되면 공을 체

득한다고 저는 쿤달리니 요가를 수행하시는 지인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인도 도올 선생도 결코 불교

에서 말하는 법신, 보신, 응화신의 삼신을 구족하지는 못

했습니다.  큰스님이 사자후하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내용 중 삼신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우주 최고

의 가르침임을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구도자가 다양한 철학적 에토스(기풍) 를 배우는 것

은 중요합니다.  특히 훗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그리고 화이트

헤드의 철학적 사유 구조는 모든 영적 구도자들이 한 번쯤 읽

어보아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올 선생과 같이

큰스님을 비방하고 도인들을 폄하하는 행위를 하는 분의 글을

읽거나 말을 듣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철학적 사변에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각성과 마음의 개오 그리고 영적 도약을 위한 가르침에 초점

내지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올 선생은 철

학을 미화하는 것에 치우쳐 철학의 본질적 역할 모텔을 파기하

고 말았습니다.  철학은 바로 종교의 해석을 위한 도구라는 것

을 명각해야 합니다.  또한 도올 선생 강의 100편을 듣고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한 번 정독하는 것이 더 영혼의 각성과 생사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도올 선생은 자신의 학문 분야에 매진하고 학문 분야의 한계

내에서 강의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동양철학이라는 도학

을 넘어서 도올 선생이 경험하지 못한 수행적 증험 경지

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도올 선생의 말이 진실인양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조하는

바 도올 선생은 해야 할 말과 안 해야 할 말을 가릴 줄 아셨

으면 합니다.  지금까지는 잘못했다면 다시는 망언과 큰스님에

대한 비방은 삼가하시길 간청하는 바입니다.



타 동  서양 사상 및 수행과 비교하여

1.   아라한의 깨달음

흔히 선 불교나 인도 요가 그리고 천주교에서 말하는마음의

개오, 즉 깨달음은   Enlightenment라고 하여 '내면세계에

빛을 가져옴'을 의미합니다.  또한 탁한 에너지가 있을 때 그 에

너지를 연금술처럼 정화하고 통합시켜 하나의 황금빛(Golden

Light)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수행 기술이라고

수행자들 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탁한 의식을 좋은 의식(에너

지)으로 바꾸어나가면서 탁한 의식을 탈각시켜 나가는 것이라 전

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적인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

며 또한 외면 세계에 대한 통찰이 요구됩니다.  한편, 테아르 샤

르뎅 신부는 정신적 통일체로서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메가 포인트가 바로 때달음(Enlightenment)

을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바로 아라한위라는 것

을 명지해야 합니다.



전대 미문의 대역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이를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큰스님의 서적을 높

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아라한위 경지가

수행의 종착역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

다.  더 나가야 합니다.  단지 아라한위는 우주적 격률에 맞

는 존재로소 거듭나게 되는 시작점에 불과합니다.



물론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

니다.  그러한 많은 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 인내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 여정은 참

으로 힘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루지 못할 과업은 아닙니다.



얼마나 치열하고 지성스럽게 구도의 길을 걷느냐가 중요하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항상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는 자세가 필

요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는 모든 에센셜 포르테(본질적

장점)를 끌어내서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명예,

지식, 재능, 재산, 목숨 등 모든 것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것

이 아라한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라한이 끝이 아닙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서는 큰스님께서 강렬한 어조로 여기서 보다 험난한 길을 더

걸어야 보살위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험난한 길을

걸어야 붓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을 통해서 경험하고 배

우고 진지하게 마음을 탐구하고 치열하게 성찰하고 세상을 명

민하게 통찰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찰과 통찰에 의한 위빠사

나선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큰스님 말

씀처럼 칭명염불선을 통해 보살위와 붓다위로 나가야 할 것입

니다.



구도자에게 있어서 수행이란 어둠의 강를 건너는 것과 같습

니다.  그 어둠의 강을 건넜을 때 덧없고 허망한 세계는 망각되

고 밝은 실존의 세계, 즉 빛의 세계가 현전합니다.  그리고 과거

에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영적 경험들이 하나로 통합됩니다.



이러한 통합을 위해서는 누구나 불확실성의 시기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공을 항시 꿰뚫어 보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이러

한 불확실성의 시기는 '창조적 불확실성의 시기'로 다가오게 됩

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번뇌들은 불확실성의 시기에서 비

롯되지만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맺는 거름이 되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가에서 말하는 쉬바 의식의 창조성을

얻게 해 줍니다.  또 화이트헤드의 '과정이 실재

라는 말'은 바로 거름이 곧 열매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달음의 세계 속에서, 즉 공심의 세계 속에서는 그 속

에서 주인공으로 앉아서 사유하고 이야기를 하고 행위를 하는

각인은 바로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포용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유(해탈, 모크샤)를 이루며 하나의 거대한 맑고

건전한 담론 공간을 잉태합니다.  따라서 그가 경험하는 세계는

완전히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며 어떠한 말을 해도 진리

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진리란 바로 아라한의 견처에서의 진리입니다.  그

이상의 세계에서 바라보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물론 제가 배우고 경험하고 책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듣고 보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는 아라한위

이상의 세계를 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히 어마어마하게 장

대한 스케일로 불보살님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라한위에서 불가능한 점과 가능

한 점 등을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재삼 강조하는 바, 중요한 것은 일반 수행자는 아라한위가

깨달음의 종착지라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잘못되었

음을 알아야 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그러

한 잘못된 인식을 혁파하고 퇴락된 불교의 위상을 쇄신 및복

원시키고 더 나아가 격상시키고자 하시는 큰스님의 위대한 염

원이 매우 경건하게 메아리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가슴 깊이

느껴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으로서의 진리는 논리를 포함하지만 논리 자체는

아닙니다.  논리를 초월하여 보다 고원한 세계를 다루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바로 정의와 자비가 하나로 융섭

되어 있는 상태라고 저는 봅니다.  그 진리 속에서는 언어

의 모순을 초월한 보다 큰 사랑과 자비 그리고 대학에서

말하는 지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곳을 향하는 발심자의 마음이 항상 바른 길을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맞닿을 수 있는 왕도로 이어집니다.  발심

자의 마음은 왕도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진실로 간절하

게 구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구하려고 하

는 참다운 노력을 한다면 말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는 진정한 왕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도

에서는 박티 요가, 쿤달리니 요가, 즈나나 요가, 하타 요가, 라

자 요가, 만트라 요가, 카르마 요가, 등 다양한 유형의 요가를

수행자들을 위해서 마련해 두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요가 수행법의 기교적인

수행을 초월하여 계율의 중요성과 염불선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바바지의 수

행이나 다른 어떤 요가 수행자들이 얻은 의식 세계, 즉 에너지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보다 깨끗하고 청정한 에너지 세계를 우

리들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

스님의 정신세계와 불보살님들의 세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하여

농축시킨 매우 희유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읽는 것만으로 환희

심을 갖게 해 줍니다.



깨달음의 세계에는 언어의 모순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모순이

아닌 하나의 거리감 해체라고 보아야 합니다.  깨달음에는 여기

서의 세계가 저기서의 세계입니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세계>>라는 저서에서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은

언제나 모든 곳에 있다."고 갈파하였으며, 이는 카오스 이론의

나비 효과처럼 "불경에서 나비가 날면 북미에서 비가 온다."라

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즉, 거리감이 와해되고 해체되는 공간

이 바로 깨달음의 공간입니다.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이 때달음의 공간에서는 어떠한 진리도 하나로 회통합니다.

그리고 거짓은 모두 탈각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의 회통

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계는 변화해도 깨달음의 세계는 변화하

지 않습니다.  그래서 숭산 선사의 제자이신 현각 스님께서는

변화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깨어있는 마음, 그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선 수행은 이제는 화두선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위빠사

나선이나 염불선 등 다양한 선 수행을 포괄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큰스님이 상세하게 알려주신 칭명염불선은 오늘날의 불제

자라면 꼭 수행해야 할 수행법입니다.



미혹한 구도자들에게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논리적

모순으로 보일 수 있어도 그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보다

큰 세계의 모습입니다.  즉, 상위 차원의 세계를 하위 차원으로

투영한 것이라 보면 됩니다.  깨달음은 자신의 정신을 비상시키

는 일입니다.  하나의 훈력이요 수행입니다.  따라서 하위

차원에서 고차원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고행이 필요합니다.



수행은 바로 정신과 영혼의 비상이자 비월입니다.  마하라쉬

마헤수라는 인도의 요기는 미국에서 초월 명상을 창안하여 많

은 구도자들에게 가르침을 폈습니다.  이러한 초월 명상이 바로

대표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보다 높이 비월시키는 힘을

얻게 해 줍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진실과 진리를 증득하게

해주는 게 바로 수행입니다.



자비로움과 엄중함이 서려있고 한편으로는 수려하고 출중한

필치로 쓰여 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 불보

살님들의 세계를 보다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을 보다 고원하고 지고한 정점으로 확장

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의식이 확장되어야 포용력과 수용력이

확대되며 타인들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원한 불보살님의 세계를 큰스님의 법문과 서적을 통해 마음

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시시한 세속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초

연해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또한 큰스

님께서 몸소 우리를 데려다가 불보살님의 세계를 관람하도록

해 주시는 느낌을 받습니다.  큰스님의 서적을 많이 읽을수록

우리의 마음은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향상심을 갖고 정

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초월이란 바로 거리감을 일소시키고 거리감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작업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세속과 승가에 대한 거리감을 지워줍니다.  무아의 세계

에서는 세속과 승가의 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나와

너라는 대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와 너, 너와 나라는 이원

론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서 너와 나는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시켜 이를 통해서 세계를 하나로 완성시킨 후 그

것을 증득하는 것이 깨달음의 체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명상은 바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주체적 나'와

'상대적 너'의 거리감을 상실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나와 너의

일체감을 얻어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얻어내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너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

이라는 것을 깨달음의 거울을 통해서 영롱하고 선명하게 비춘

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거리감을 없애는 수행이 바로

학인이 깨달음의 왕도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는 순간 많은 수행자들과 신

도들의 갈등과 번뇌를 제거해 주며 마음의 갈증을 시원히 해소

시켜 줌으로써 지복의 파라다이스로 데려다 줍니

다.  그리고 나라고 생각하는 관념들을 제거해 주고 무엇이 구

도자 또는 불제자의 바른 길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흔히

초인으로 알려진 성자들 중에는 부처님과는 다른 에너지체를

갖추고 있음을 간파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광은 너무나도 고결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자들의 에너지와는 비교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야 할 것입니다.  읽을수록 법열의 물결을 전해주는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는 선남자 선여인을 청정광명의 불보살님

세계로 선도하는 거룩하신 가르침이라는 것을 반드시 명각

해야 할 것입니다.




4.  장자의 소요유

장자의 사상은 대표적으로 소요유로서 마음이 가는대

로 이리 저리 자유롭게 거닐면서 자연을 벗삼아 풍취를 즐기면

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소요유는 단순히 한가하게 일없

이 노니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짐을 지우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자세를 말합니다.



만약 어떤 수행자가 수행에 너무 매달리게 되면 마음과 몸의

건강이 악회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수행자라면 거문고

의 줄을 조율하듯 반드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수행을 소요유를

하듯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자께서도 일을 좋아하는 사람

보다 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더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였습

니다.  일을 즐긴다는 것은 바로 일에 빠져 몸과 마음을 피폐하

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서 심신을 수양하고 마음의 안

정과 정신적 평온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철학적으로 살펴보면 실재는 두 가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존재계의 표면에 해당하는 현상계

에서의 실재이고 둘째가 존재계의 이면에 해당하는 정신계에서

의 실재입니다.  장자의 사상은 지극히 정신계의 실재를

강조합니다.  당연히 정신계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물욕에서 자유롭고 자연과 친화하고 따라서 소요유의 정신을

회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책에서도 장자를 다루고 있는데

그 책에서도 소요유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서 수행의 즐거움을 자유롭게 얻어가는 것을 의미할 수 있

습니다.  수행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것을 헤르만 헤세의 '유리

알의 유희'처럼 하나의 유희로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

다.  물론 그 유희는 진지함과 여여한 마음이 중용을 이루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계발서 <<핑 (Ping) >>에서는 고대 성현의 가르침을

피력하고 있는데 내용인 즉 "세상의 흐름에 따르라."는 것이었

습니다.  수행이라는 것도 소요유 정신을 따른다면 세상의 흐름

과 변화에 자유롭고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오는

사람마다 않고 가는 사람마다 않는 것같이 유유자적한 정신이

수행의 근저에 자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요유는 불가의 견성화 아라한 수준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대법문으

로서 미증유의 불법을 설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

다.  더 나가야 합니다.  그 곳이 바로 보살위로 더 나갈 때 붓

다위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항상 향

상심을 갖고 치열한 구도 정신으로 자신을 부처님의 세계로 인

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5. 힌두교의 범아일여

의식의 진화(Evolution of Consciousness)라는 것은 의식의 계단



을 밟아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상승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움이 없다면 의식의 고양과 상승은 불가능합



니다.  이러한 새로움을 향한 진화의 도정을 걸어갈 때 구도자



들의 의식은 각성되고 광활한 대우주의 섭리(Providence) 속



에 자신의 영혼이 통합됩니다.  이러한 대우주의 섭리 속으로



구도자들이 영혼이 통합되는 과정을 과거 힌두교에서는 범아일



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처럼 우주와 완전



한 계합이 아님을 여실지견으로 통찰해야 합니다.  붓다만이 진



실로 우주와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큰스님께서는 사자후하셨



습니다.  '나'라는 관념적 존재와 '에고(Ego)'라는 지아상을 녹여



서 우주적인 의식과 백그라운드인 공의 세계에 흡수되어지



는 것은 견성의 견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신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



기까지가 바로 아라한위에 해당합니다.  신과 하나되고 신이 없



음을 아는 것 그것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파한 아



라한위를 얻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6.  아파테이아

서양철학의 하나인 스토아 학파에서는 아파테이아를

표방하였습니다.  아파테이아는 그리스어로서 사전적 의미는 '정

념이나 외계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

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 아파테이아는 인간 생활의 이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아파테이아는 오늘날의 동양적 사유 방식에

의하면 '평정심' 또는 '부동심과 비슷한 맥락을 함께 합니다.



불가에서는 아라한의 경지가 바로 이 아파테이아의 경

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파테이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금욕이

중요합니다.  금욕은 바로 욕구나 욕망을 억제하고 극복하는 것

을 의미하며 아파테이아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관건으로 삼습

니다.  마음의 평정함과 외면세계에 치우치거나 끄달리거나 집착

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욕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의 허망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논이나 세네카와 같은 아파테이아 주창자들은 금욕

을 중시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큰스님은 더욱 강력한

어조로 어렴풋이 금욕이라는 어휘를 사용하기보다는 계율 중의

계율인 음계라는 뚜렷한 어휘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즉 스

토아 학파에서 어렴풋하게 언급한 금욕과는 대비적으로 큰스님

께서는 음욕으로 규정하여 설파하셨다는 점에서 훨씬 더

진솔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아파테이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초발심을 내야 합

니다.  즉 현자가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신에 대한 헌

신의 요가(박타 Bhakti Yoga라고 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유수

의 과정(Process)이 요구됩니다.  자신의 생각들을 잘 다듬

고 불필요한 잡념과 망상 등을 완전히 타파하여 생각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순수하고 평온한 내면의

마음에서 생각이 나옵니다.  그 내면의 마음을 불가에서는

청정심이라고 합니다.  청정심은 성에너지가 없으

며 맑고 밝은 은백색의 빛으로 현전합니다.  유대 신비주의 카

발라에서는 영혼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영혼의 빛이 두

뇌에 채워지게 되면 의식적 각성이 일어나고 마음의 평온, 즉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파테이아는 부동심, 평정심, 청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 말하는 빛의 근원적 존재인 신(God)에 대한

설명은 미지의 수수께끼로 수행자에게 남깁니다.  이것이 불보살

세계를 여과 없이 설명하는 불교의 세계관과 대조를 이룬다는

점을 불제자들은 명료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아파테이아에 이르게 되면 신의 품 안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만상의 잡연으로부터 해탈(모크샤)에 이르게 됩

니다.  평정한 마음은 맑은 호수와도 같이 고요하고 평화롭습니

다.  그리고 밝습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정혜라고 합

니다.  정이란 맑음을 혜는 사리에 밝음을 의미합니다.  아

파테이아에 이르게 되면 마음이 맑아지고 지혜로와집니다.  그리

하여 세속적 욕망에 초연해지고 세속적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

을 쉽게 간파하고 무시하거나 타파할 수 있게 됩니다.



철학적 사변으로서의 진리는 바로 이러한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도달해야 얻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파테이아의 경

지에서는 철학적 에토스(기풍)를 지혜의 눈으로 꿰뚫어 볼

수 있어, 삼라만상과 우주에 대한 얼마간의 이해를 얻을 수 있

습니다.



물론 아파테이아 경지를 통해서 자연 과학 기술을 터득하거

나 인문 사회학을 완벽히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더 높은 마음

수양 공부를 위한 기초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아파체이아 경

지에만 이르더라도 상당한 영적 진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

니다.



아파에이아에 이루기 위해서는 매사 철두철미하게 사사물물

을 철견하고 우주만유에 대한 심오한 통찰(Insight)

을 해나감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우주적으로 확장해 가는 마음

가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음욕을 끊고 가는 마음

가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음욕을 끊고 신

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바탕이 된다면 여기서 지혜의 에너지가

싹트게 됩니다.  그 지혜의 에너지가 바로 평정심, 청정심, 부동

심의 아파테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양에서 말하는 아파테이아를 통해서 신

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에서 말하면 아라한에

해당합니다.  아라한을 성중 하늘, 즉 천회천이라 부릅니

다.  하늘 밖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불보살님의 세계는

얼마나 높은 지 상상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아파테이아의 수준

에 초연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에 비할 바 없으며

또한 형용할 수 없이 찬란하고 수려한 불보살님의 지고한 세계

를 극명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어마어마한 보서라 극

찬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7.  기독교 신비주의의 영지


또한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 외에도 다른 종교와 수행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앎이라는 것은 기독교 신비주의에서는

영지(Gnosis)라고 하는데 이는 로고스(Logos 우주의 이법),

이성,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라고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수행자

는 앎, 영지, 로고스라는 것을 통해서 삶을 성찰해 나가야 합니

다.  지식이라는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한 거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야야 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잡

다한 학문이 아니라 통찰(Insight)과 섭리(Providence)가 들어있는,

다시 말해서 진리(Truth)의 세계가 녹아있는 글이나 말씀을 의

미합니다.



 그러한 말씀이나 글은 힘(Power)을 가지고 있으며 청정한 의

식과 청정한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비

주의에서 말하는 영지는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아라

한의 경지라는 것입니다.  불제자는 이 점에 유념해야 할 것입

니다.  부처님의 청정한 에너지가 스며들어 있는 <<21세기 붓다

의 메시지>>는 바로 영지를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포괄

하고 있는 진리서이자 진법경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갈파했던 베이컨이라는 사상가의 이

야기는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영지로서의 '앎', 인도

의 요가에서 말하는 샥티(Shakti)로서의 '힘'과 동일함을 의미합

니다.  즉, 'Knowledge is Power'라는 공식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단순성(Simplicity) 속에 우주적 함의가 들어있고

진리(Truth)의 세계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해하기 쉽고 간명한 미묘음으로 부처님께서 세계

를 어떻게 주관하시며 지옥, 인간세, 축생, 하늘나라, 성중 하

늘, 극락정토 및 붓다님이 거하시는 상적광토, 절대법계가 전체

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

서 영지(靈智) 중의 영지(靈智)를 설하고 계시며 이는 그 어떤 서

적에서도 구하기 힘든 미중유의 서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21세기 붓다의메시지>>는 몽매해 있는 우리 불

제자와 오도되고 전도된 사유를 해온 불교학자들에게 크나큰

자비의 사자후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21세기 붓다

의 메시지>>를 읽는 선남자 선여인들은 새로운 앎을 통해서 의

식의 확장을 얻고 불교에 대한 새로운 식견과 안목을 구비하게

되었습니다.







8.  키에르케고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은 실로 충만함과 가득참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어있기 때문에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신을 비우지 않고서는 세계를 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존재를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주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God)과의 독대'를 하게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본질은 신과의 조우이며 아



라한의 증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변철학으로는 결국 아라한



위가 한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과의 독



대는 바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말하는 아라한위를



통과하는 과정이며 길목에 대한 증험적 이야기일 뿐임을 명각



해야 할 것입니다.






9 통섭

금세기 최고의 철학적 사조는 바로 퓨전 또는 컨버전스

(Convergence) 입니다.  이는 '융합'이라고도 하며 '합종'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사상계의 흐름이 하나로 넘나들면서 통섭되

어 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종교, 사회, 문화, 경계, 교육, 학

문, 과학, 언어, 교양 등등 다양한 시대의 사상적 조류가 하나

의 큰 흐름을 이루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참고로, 통섭

의 사전적 의미는 1.  사물에 널리 통함.  2. 서로 사귀어 오감이

라고 되어 있습니다.  Consilience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함께 넘나듦'이라는 의미이지만 이 통섭을 주창한 에드워드 윌

슨은 각종 학문들을 통관하는 이론과 사실들을 상호 연계하여

지식체계를 통합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섭이란 뜻은 지식 세계를 파노라마(Panorama)

적인 시각으로 두루 편력하여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Consilience를 통섭이 아니라 통섭

즉 우주적인 부처님의 섭리(Providence)를 통합(通合)함

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어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통

섭(統攝)의 사전적 의미는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우주적인 지식체계와 법칙을 하나로 아우르

는 통합적이고 통괄적인 사유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통섭은 학자들께서 이야기하는 바처럼 '학문의 큰 줄

기를 잡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부터 출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즉, 학문의 본원(本源)부터 공부해야지 지엽적인 잔가

지부터 공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통섭(Consilience)은 인류의

근원적 의식의 탐구이자 인류의 지식체계를 부처님의 전지전능

한 시각으로 통합하는 거대한 21세기 역류(겪어가는 흐름)라

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총섭을 통해서 보다 더 불교의 교리를 잘 이해

하고 불교의 수행 체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적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섭의 사

유를 통해서 보다 명료하게 불교의 본질과 정수를 터득하고 해

의할 수 있도록 불제자들과 구도자들을 이끌어주십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현대 정신 사조의 혁신적 패러

다임(Paradigm)인 통섭의 시각으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닙니다.

  물론 통섭을 통해 전 세계 수행 체계와 종교 영성 문화를 아

우르는 동시에, 이를 전일성(全一性)으로 규일(糾一)하면서 초월적

이고 거시적인 큰스님의 지견(智見)으로 불보살님의 세계를 여실

히 드러내 주셨다는 점에서 도도히 전승되 온 인류 역사상의

찬란한 명서들 중에서 으뜸이 되는 기념비적인 금자탑이라 아

니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길은 하나의 길로 통한다."는 격언이나 인도의 <<이샤

우파니샤드(Isha Upanishad)>>에서 전하는 다음의 가르침 "이 세

상 어디서나 하나됨을 볼 수 있다면, 어떻게 그가 슬픔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그릇된 길을 갈 수 있겠는가?"는 통섭(通涉

統攝 Consilience)의 본 면목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물론 이는 아라한의 견처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는 불보살님의 세계를 잘 알 수 있도록 아라한에서부터 붓다위

에 이르는 도정을 파노라마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는 통섭(通涉 統攝

Consilience)이라는 글자 하나에 대해서도 만트라(眞言)로 삼고,

시간을 보내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에는 다양한 종교와 수행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대의 문명과 세계적인 지식인들의 사상들을 모두

편력하고 이러한 사상들 위를 유목적(遊牧:Nomadic)이면서 두루

편재하는(udiquitous) 그리고 방랑으로 거닐고 노니는 정신이 오

늘날 우리에게 필요하며, 이는 인터넷 세대인 우리들에게 너무

나 적합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자의 소요유 정신을 있

는 그대로 포섭하면서 동시에 불교의 교리를 총섭하는 거룩하

신 부처님의 세계를 시원하게 설파하신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큰스님의 탁월한 법견(法見)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통섭(通涉 統攝 Consilience)은 신인류의 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통섭의 사유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동시에 더 나아가 불교 자체의 존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펼침을 행하되 안으로는 주체적인 입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불교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금세

기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변화를 지속하고 있고 통합되고 있으

며 유토피아 세계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의

고대 점성술에 의하면 신(God)의 주기(週期 Cycle)로 복원되고 있

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부처님의 주기로 복원

되고 있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

다.




 10 화이트헤드의 합생(合生)

저는 그동안 나름대로 적지 않은 인생의 선지식(善知識)들과의 조우를 통해서

'합생적 자아의 진화'라는 새로운 의미의 아이디어를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고 보다 큰 감명과 체계적인 수행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 득 하였습니다.

큰 스님의 설법 중에서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과 세상은

인연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씀이 가슴에 남습니다.

 실제로 합생이라는 용어는 화이트헤드가 사용한 용어입니다.

하지만 이 용어는 이미 고대 2500여 년 전 불교의 교주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의

연기사상(緣起思想)에서부터 발원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참고로 저 유명한 근세 서양철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이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 불가(佛家)의 사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위대한 가르침이 불교의 가르침임을 우리는 명각해야 할 것 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과 큰스님 말씀처럼 우주라는 것은 인연(因緣)으로 되어 있어,

원인과 조건이 결합하여 결과를 이루어냅니다.

이러한 우주적 세계 창출의 현전(現前)과 변전(變轉) 그리고 개전(開展) 속에서 우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수많은 자아 들은새로운 의식 세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경험적

세계관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자아들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자아가 영위하는

환경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윤회전생이라고 저는 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윤회 전생의 이야기를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큰스님의 천도재가 있기 전까지는 많은 불교 신도님이 윤회 전생을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을 바로 뜨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밝힐 줄 알아야 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 서양의 모든 철학사상과 종교 수행 체계는 보이지 않는세계를 다룬다는 점에 대동소이합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뜬구름 잡듯이 이야기하며 거의 사변적 존재(sein) 일변도로 탐구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 서양 철학과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동양 종교사상의 정수인 불교로서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극히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합생은 무수히 긴 시간의 역사를 통해서 자아가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큰 스님께서는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도식적 위계(Schematic Hierarchy)로 자세히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저는 합생을 무수히 많은 경험들의 총체로서 생각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의 세계가 자아에 녹아들어 자아가 성숙해 지고 성장하여 세계를 머금고 세계와 일체가 될 때 큰스님의 말씀처럼 어느 순간 숨었던 내면의 본성이 허공을 뒤집어엎으면서 터져 나와 조우석기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작은 열반'으로서의 자유를 향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유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시련의 힘든 시간을 통과해야 하며 절제와 금욕 그리고

지혜와 용기의 기간을 지나가야 합니다.

한 마디로 불가에서 전해 내려온 육바라밀을 몸소 실천 궁행해야 합니다.

수많은 동서고금의 미덕을 요구하는 이 경험들의 연속성이 바로 개아적 자아가 자유로운 자아로 탈바꿈하게 합니다. 하지만 육바라밀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불교 외의 동서고금에서 논의한 모든 미덕을 함의하고도 남습니다. 결국 육바라밀의 실천 궁행이 바로 견성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자유의 자아란 견성 차원의 무아(無我)로 볼 수 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성 차원의 무아가 더 나아가 보살위를 거치고 붓다위를 증위하면<<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파하신 대로 절대 법계 속의 무아로 향존한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가르침입니까? 자신의 영원한 항속적인 무아로서의 실재가 미래제가 다하도록 존재한다니 말입니다! 큰스님의 위대한 법문은 미증유의 법문이며, 전 세계 철학과 종교를 메타모포시스(換骨奪胎)시키는 대법설(大法設)이자 고대 근본 불경의 요체를 진작시키고 새롭게 되살리는 법작(法作)임을 우리는 환기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를 제외한 동서고금의 철학사상과 수행 체계로는 실재적인 수행적 증험을 얻기는 묘연한 일입니다.



즉, 외도로서는 아라한, 즉 공심(公心)또는 신인일체(神人一體)를 체득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 그리고 좀 더 나가서 잘해야 보살위에 이르는 것이 전부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외도와 비교해 볼 때

불교에서만 붓다를 이룰 수 있다는 큰스님의 사자후가 얼마나 위대하며 불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수승한 가르침인가를여실지견으로 목도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를 존숭(尊崇)하는 인류의 많은 영혼체들은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 하에서 자유와 해탈이라는 궁극적 도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그 목표 상태를 향해서 무수히 많은 영혼체들은 서로 경쟁과 협력을 통해서 진화해 갑니다.

그러한 영혼체의 진화과정을 화이트헤드의 용어를 빌려'합생적 자아의 진화'라고 저는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아라한, 보살, 붓다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전생 윤회를 통해서 무수히 많은 경험을 얻고 또한 그러한 경험들이 녹아서 자아는 성숙해지고

성장하며 깨달음을 위한 위빠사나선과 염불선 등을 통해 아라한위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염불선으로 더욱 정진할 때 보살위를 얻고 불위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수행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서로 상호 작용을 합니다.

즉 의식을 지닌 인간들은인간들 속에서 상호 작용하면서 새로운 영혼체로 개변, 변전, 진화를

이루어 갑니다. 세계는 변화합니다. 하지만 영원성이라는 것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는 바, 큰 스님 저술의 위대한 점은 바로 우리 구도자들이 미래제가 다하도록 변화지 않는 영원성을 향유할 수 있는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변화라는 것은 질서를바꾸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재편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법칙(Rule)은 근원적으로 존재합니다. 그 근원적인 법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법칙의 현현된 모습을 달리 해석하는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 법신의 황홀하고 억종으로 찬란한 광명을 이야기 합니다.

세계는 바로 어떤 존재자와 근원적 모습의 현현일 뿐입니다.

이것이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조물주가 되었든 천주교에서 말하는 하느님(God)이 되었든 아니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비로자나부처님이 되었든 말입니다.

물론 조물주나 하느님을 훨씬 능가하시는 지존(至尊)되시는 분이 석가모니부처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유가와 천주교 모두 불교처럼 명백하게 무량광, 무량수의 법신, 보신,화신으로서의 부처님의 세계를 기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종교의 공부에 지나친 눈길을 두지말고 부처님의 세계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전하는 불교 공부에 보다 더 많은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과 큰스님은 헤아릴 수 없이 엄청난 경지에 도달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타종교의 가르침이나 철학사상에 미련을 두거나 집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이 선근 종자를 발아시키고 윤회 전생을 통해서 부단히 정진하여 마침내 해탈삼매에 이르고 더 나아가 해인삼매를 통해 보살위와 대적광삼매를 통해

붓다위를 증득해 나갈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향상 일로를 걷는 것이 구도자의 진실된 모습이요 바로<<화엄경>>의 선재동자의 구도 여정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바로 우리 모든 불제자가 선재동자처럼 끊임없는배움을 추구해 나갈 것을 당부하고 있으며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가질 것을 당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양서(良書)임은 과언이 아닙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앞으로 연이을 큰스님의 금언진설(金言眞設)의

시금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억조창생(億兆蒼生)

에게 홍포(弘布)하는데 초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명료한 의식으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존재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맺음말

온화하시고 지극히 청아하신 큰스님의 자비로운 음성이 담긴 법문들 그리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저를 숙연케 하고 2500년 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후 마하가섭으로부터 부처님의 법통(法統)을 물려받고 법맥(法脈)을 이으신 아난존자의 영산 회상 당시의 아취(雅趣)와 향수를 오늘날 더욱 진하게 느끼는 듯 하였습니다.



부족한 소생이지만 이 보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별 다섯 개 만점에 별 여섯 개를 드립니다. 제가 지금까지 태어나면서 읽었던 모든 종교, 영성 서적들 중에서는 최고의 가르침이 들어있음을 인정합니다. 한 권 소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궁한 영광일 것입니다. 물론 다른 선근 있는 불제자에게 보시하면 무량한 복을 얻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특히 이 책을 통해서 증득할 수 있는 최고의 가르침들 중의 하나는 재삼 강조하는바 바로 불가의 위계(영적 하이어라키)가 매우 체계적이라는 점입니다. 즉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대아라한, 보살(하품, 중품, 상품), 붓다, 석가모니부처님 등으로 위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 점 꼭 수행자는 명지하시고 수행의 여정을 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8쇄를 넘어서고 있으며 이미 많은 정평(定評)을 얻은<<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윤회 전생의 의미와 아라한과의 실상(實像) 그리고 불보살님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붓다를 이루신 큰스님의 법력이 실린 청정한 글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와 닿고, 구도자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같은 지고한 법서(法書)정독해서 여러 번 읽을수록 지혜의 눈이 열리고 마음의 개오(開悟)를 얻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큰스님과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대한 폄하와 비하 그리고 음해는 불보살님들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자각하고 더 나아가 계속되는 현지궁 현지사에 대한 비방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준엄한 응징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불교 더 나아가 세계 불교의 보경(寶經),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고대 한민족의 대동사회(大同社會)를 부흥 및 중창(重創)시키는 동시에 불교적 사해 동포주의(Cosmopolitan)의 새로운 지평을 개진(開進)하는 초석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염원합니다.



-부록(附錄)

다음은 저와 인연이 된 책이름, 수행법 이름, 철학이름, 성자나 현자의 이름 목록입니다.



 1.  금강경  2. 법화경 3.  화엄경 4. 아함경   5.  원각경 6. 능엄경 7.  대반야경 8. 금강명최승왕경
 9.  법구경10. 해심밀경11선의진수 12. 화두이야기13달마에서 경허까지 14. 선으로 가는길 15. 선가귀감 16. 선의 역사와 선사상17. 불멸의 선화 백선  18. 보조어록    19. 벽암록     20. 선문촬요    21 선문염송22. 임재록   23. 임재의현선사의 선정사상연구 24. 대승기신론 25. 장엄경론
  26. 금강반야바라밀경론 27 대지도론  28. 섭대승론 29 보성론   30. 십지경론31. 선사들의 어록    32. 숭산선사의 가르침 33. 의상대사의 법성계       34. 밀라레빠 10만송 35 위빠사나 1,2  36. 세계7대종교 37. 종교학 개설 38. 만성동귀집39 팔상록    40. 금강경의 과학 41. 숩파니파타    42. 도덕경 43. 바가바드 기타44. 물리학과 대승기신론 45. 수피의 가르침  46. 불가의 위빠사나     47. 만트라(진언) 48. 그리스도 가르침-성경, 마태복음, 복음 등 49. D N A구조와 인간의 성격     50. 역의 원리 51. 카르마    52. 박티 요가     53. 즈나나 요가   54. 타로(Tarot)   55 이슬람의 수피즘 56. 한단고기 57. 천부경  58. 줄기세포 59. 기문둔갑  60. 심법(心法) 61. 비전(Vsion)  62. 유대신비주의 (카발라)  63 주역(周易)  64. 쿤달리니 요가 65. 효경    66. 컴퓨터 알고리즘67.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68. 매화역수 69. 탈무드의 가르침 70. 용호비결1. 삼일신고  72. 분자 생물학 73. 하타요가 74소주천과 대주천 75 서양 점성술76. 카를 융 박사의 무의식, 집단무의식 77. 하락이수  78. 산스크리트어 79. 칸트의 철학 80. 소크라테스의 철학 81. 탄허 대선사의 가르침 82. 헤르만헤세의 소설들83. 아비달마       84. 틸로빠, 마르빠, 밀라래빠의 가르침 85. 꿈 해몽과 상징체계 86.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 87. 오로빈도의 가르침   88. 라마 크리슈나의 가르침89. 죠하르    90. 맹자 91. 장자의 가르침    92. 김일부 선생의 정역 93. 라이프니츠의 철학 94. 상대성 이론 95. 양자의학, 양자 컴퓨터 96. 아스트럴 프로젝션97. 차크라 98. 애니어 그램99. 천상병의 귀천이나 단테의 신곡과 같은 서적 100. 세익스피어의 희곡
101.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102드의 철학103. 성명쌍수 104. 미학(美學) 105. 서유기나 최인호의 길 없는 길 같은 소설들 106. 서양의 연금술(연단술)107. 상징체계 108. 히브리어     109. 하이데거의 철학 110. 플라톤의 철학 111. 최한기 선생의 기철학112. 티벳 스승들의 가르침   113. 초월명상 114. 폰노이만의 오토미타 이론  115. 꿈과 무의식116. 대승 기신론  117. 마하리지의 가르침 118. 비베카난다의 가르침 119. 솔로몬의 잠언120. 논어 121. 노자의 도덕경 122. 도장경   123. 한동석 선생의 우주변화의 원리124. 통계의 확률론  125. 음양오행과 한의학 126. 카발라의 생명의 나무      127. 루시드 드림(자각몽) 128. 나디 129. 각종 정신세계를 밝혀주는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매트릭스에 이르기 까지 130. 선사들의 어록 131. 도학(道學) 132. 한자(중국어)  133. 수비학(Numerology) 134. 주자학 135. 송구봉 선생의 가르침 136. 중국의 신선도맥 137. 대학 138. 벤자민 플랭클린의 가르침  139. 닐스보어의 상보성 원리 140.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141.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42 고피 크리슈나   143. 인드라망 144. 카오스 이론과 나비효과    145. 홀라키(Holarchy)와 영적 하이어라키 구조 146. 신지학    147. 유체이탈 148. 선불합종   149. 신과 나눈 이야기 150. 의식혁명 151.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우주적 합목적성) 152 서경보 스님의 가르침  153.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154. 이제마의 사상의학   155. 호흡수련(안반수의, 단전호흡) 156. 양명학 157. 율곡 선생의 가르침 158. 여동빈 신선의 가르침 159. 우파니샤드 160. 중용  161. 프리메이슨 162. 아우구스타누스 163. 데카르트의 철학 164. 오쇼 라즈니쉬 165. 달라이라마166. 초현이론과 10차원 우주 167. 프랙탈(Fractal)이론168. 홀로그램과 홀론구조 169. 씨크릿 독트린(Secret Doctrine) 170. 만다라(M뭉밈) 171. 기독교 신비주의  172. 천선정리 173. 불교의 유식 철학과 중간 사상 174. 칼 세이건과 우주175. 켄 윌버의 무경계 176. 원천강 선생의 가르침    177. 오컬트 화학 178. 음악치료, 미술치료등…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추신/"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은 이 시대 최고의 성서인<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각 계의 대표적 불자 지성인들이 읽고 진솔하게 밝힌 찬사와 감동의 평론을 담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