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7일 수요일

[언론에 보도된 현지사 글 모음 - 2]

2005년 06월 29일 (수요일) 15 : 50 문화일보




“한국 불교 마음 깨친다며 공부 멀리해”



(::만현스님 법문집서 비판::)

1970년대 대한불교 조계종의 포교부장을 지내는 등 중앙 종단에

서 활약하다 이후 30년 가까이 은거수행을 해온 만현(68·사진)

스님이 최근 펴낸 법문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현지궁현지

사)를 통해 ‘깨달음’의 문제 등 한국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강원도 춘천 현지사의 회주로 있는 만현 스님은 이 법문집에서

“선종과 대다수의 대승 불교학자들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마음을 깨치면 불(佛)’이라고 해석하면서 공부를 멀리하

고 있다”면서 “견성은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며 붓다를 이루는

머나먼 도정의 출발점”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만현 스님은 먼저 현재 불교계 주류의 깨달음의 관점에 대해 문

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선 “견성(見性)이 곧 성불(成佛)이라는

선가의 기치는 분명코 잘못됐으며, 설사 견성을 하고 나서 보림(

깨침을 유지하면서 윤회의 습을 떨치는 과정)을 마친다고 하더라

도 곧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스님은 “인간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아라한에 그칠 뿐”이라고 단

언한다. 이는 마음자리를 깨침(見性)으로써 곧 성불이라는 현재

선가의 이해와 다른 것이다.



스님은 그 다음 단계의 보살과 붓다의 과정은 수행이라는 자력(

自力)뿐 아니라 부처님의 위신력(타력·他力)의 도움 없이는 불

가능할 뿐더러 견성의 과정보다 더 힘든 공부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만현 스님은 또 “지옥과 극락은 따로 존재하고 있는 실재가 아

니라, 우리 마음의 산물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이 퍼져 있는 현

대 불교에 대해 크게 일침을 가한다.



스님은 “생사관(生死觀) 하나 뚜렷하지 않고, 불교수행의 기본

은 철저한 지계(持戒·계율을 지킴)에 있는데도 승려들의 승행은

심각할 정도로 타락하고 있다”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스님은

특히 스님들의 음행죄는 결코 구제될 수 없으며 지옥과 극락도

실제 존재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엄주엽기자





자재만현스님이 전하는 ...윤회
대한불교신문(2004년 4월 14일, 5면)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디를 갔느냐" 절규라  해야 옳을것 같다.

칠십을 갓넘긴 시골 할머니가 눈물, 콧물 범벅인 채 흘러간 노래를 연속 불렀답니다.  낡아빠진 흰 고무신 한짝으로 노인정 사랑방 바닥을 치면서 울부짖는 듯한 곡절에 20며 마을 노인들은 원을 지어 앉아 손뼉으로 장단 맞추며 울고 웃습니다.



 지난 3월 20일 춘분절을 맞아 아랫마을 노인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노래하고 장기자랑 한다고 나에게 특별 법문 요청을해 참석하고 목격한 장면입니다.  시자와 함께 설법시간 10분전에 도착한 덕에 그 할머니의 노래가락을 들었고 나도 모르게 뭉클 눈에선 이슬이 고였습니다. 

무아경에 빠져 토해내는 가사와 한맺힌 설움이 묻어나오는 곡조에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마침 옆에 앉아 나에게 시종 시중을 드는 마을 이장님이 할머니의 애절한 지난 삶에 대하여 귓속말로 계속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보기에도 착하디 착한 순박하고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상이었습니다.  30대 중반에 사랑하는 남편을 여의고 짝 잃은 거위가 됐다 합니다. 

어린 애들다섯을 어찌 어찌 길러내 모두 시집장가를 보냈다는 것, 소 싸움을  즐기던 남편은 자기가 기른 숫소의 뿔에 받쳐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 나와 이내 즉사했다는 이야기, 아들 하나 딸 넷중에는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자식(女)이 하나 간질병을 앓는 계집아이 하나가 있어서 그 동안의 마음과 몸고생은 이루 필설로 다 할 수 없었다는 사연, 가진 것은 밭 서너마지 뿐이라 봄에는 산에 올라가 나물 약초를 캐고 농사철에는 품팔이로 애들을  공부 시킨 소설같은 인생살이, 저녁엔 문을 열쇠로 단단히 잠그고 애들과 한방에서 수절해 왔다는 눈물의 한평생 이야기, 또 하나뿐인 아드님마저 서울로 직장 얻어 나가고 혼자 집지키고 살기를 10수년! 가끔 마을에서 관광을 떠나고, 또 한자리에 모여 놀때는 자기의 십팔번지 노래가 돼 버린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디를 갔느냐' 를 부르며 남편이 죽었을 당시 신었던 고무신 한짝을 들고 땅을 치며 통곡하듯 노래하신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나는 감명깊은 그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기에 절에 돌아와 삼매(三昧)에 들어  그 할머니의 전생을 추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할머니의 남편을 뿔로 들이 받아 죽인 소는 지금부터 4생전 동양인으로 태어나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고약스런 심보가 있어서 세경도 안주고 학대까지 했는데 금생에 인연이 닿아 소로 태어나고 전생의 주인이자 할머니의 남편에게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소아마비로 몸이 불구인 따님은 전생에 부모님께 불효하고 부모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던 과보였으며, 간질을 앓고 있는 또 하나의 따님은 염불공부하는 큰 스님의 수행을 외도라 욕하며 크게 해코지 방해한 죄보었습니다.

할머니 남편을 죽인 소는 지금 중(重)지옥에 떨어져 업보를 받고 있으며, 남편은 아직도 명부(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할머니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영적추적은 지장보살님께서 맞다는 확인을 거친 것입니다.



이 불쌍한 할머니는 그날 이후 우리 절에 가끔 나물을 캐 가지고 오시고 나는  그 할머니를 불교에 귀의시켜 염불법문을 해주고 있습니다. 염불, 계율,효도는 부처님께서 가장 강조하시고 모든 이들에게 권하시는 제일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이 할머니의 전생은 5하늘이었습니다.5하늘이라면 아래쪽 천상이지만 하늘에서 인간 몸 받아 온 이는 천명에 하나꼴될까 싶습니다. 대부분 짐승, 지옥에서 옵니다. 나는 이런 인연법을 알기 때문에 설법을 듣는 불자님들이 삼악도(지옥,아귀,짐승)에 떨어지지 않고 인간 천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고자 우선 대한불교지상 법문에 나섰습니다.

 지금 불교에선 종(縱)으로  28하늘을 말합니다.  욕계6하늘  색계 18하늘 무색계 4하늘 을 말합니다.

이 주장은 흰두교(바라문교)의 교설이기도 하지요.  나에게 법문해 주시는 많은 부처님들은 하늘 천상을 6으로 묶어 말씀하십니다. 아래 하늘부터 6하늘 5하늘 ...1하늘, 각 하늘을 상중하품으로, 또 각각을 상중하로, 이렇게해서 천상을 54품으로 나누십니다.

 5하늘에만 태어난다 해도 인간세상의 국회의원 장관 팔자와 바꿀 수 없는 복낙이 수승한 묘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지옥(다음에 상세히 설명) 아귀 축생으로 떨어질 인간의 정신 몸(영체)의 색깔(aura)은 거무튀튀합니다.  삼악도와 인간, 천상세계의 시간은 서로 다릅니다. 6하늘에 날 사람의 aura는 회색이고, 5하늘 이상 1하늘에 날이는 흰색깔입니다.

5계 10선을 잘 지키고, 착한 일 많이 한 사람은 6,5,4,하늘에 날 수 있습니다.3,2,1하늘에 태어나려면 불법공부도 많이 해서 수다원.사다함과를 얻어야 합니다.

 하늘 천상사람도 지은 복이 다하면  인간으로 옵니다. 마음자리를 깨치고 보림을 잘해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위 견성도인은 성인의 반열에 들어 윤회를 벗어난 성중하늘(부처님의 표현)에 납니다. 위빠사나 수행, 밀교수행 잘해서 무상고 무아 공을 확연히 깨치면 물론 아라한과를 이루어 여기에 납니다. 성중하늘도 넷이 있는데 27품으로 나눕니다. 이분들의 오라(aura)는 보름달 밝은 빛 곧 은백색光입니다.

 이 거짓 몸뚱이는 지.수.화.풍 4大로 이루어진 물질로서 집과 옷과도 같습니다. 집이 허물어지면 살 수 없어 집을 버리고 이사가듯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나오듯 정신영체가 빠져 나옵니다 . 그 영(혼)체는 4개로 겹쳐있습니다.

 3개의 정신몸뚱이가 하나로 겹쳐져 육체속에 주인으로 살다 육신의 수명이 다하면 빠져 나온다고 흰두교의 성전 '베-다'엔 기록되어 있습니다. 깊은 생의 비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은 그보다 깊은 나의 법문입니다.

3개의 영체가 아니라 4개의 영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보살의 천안으로서만이 볼 수 있는 에너지 덩어리입니다.  의식과 기억을 가진 생명체입니다. 소립자보다 더 작은 초미립자입니다. 초미립자는 입자와 파동의 이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파동으로 본다면 영체는 극히 파장이 짧은(진동수가 극히 많은) 전자파 에너지 생명체입니다.  육체와 1,2,3번 영체를 접합시키는 4번 영체는 육체보다 밀도가 높은 반물질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4번영체로 지옥 아귀 축생계, 그리고 (무주)고혼의 중음세계를 삽니다.



 꼬부랑 노인으로 살다 죽어 악도에 떨어지면 그 (입자)모습은 4번 영체 꼬부랑노인입니다.  착하게 살아 천상에 태어나거나 당대에 불과를 이룰 대성자를 만나 천도되어 천상에 나는 영가는 3번 영체로 가 태어납니다. 4번 영체는 하늘천상계에 적응이 안되어 죽습니다.  3번 영체는 40대 초반의 젊음입니다. 2,1번 영체는 이때 3번 영체안으로 겹쳐 듭니다.

1번 영체로 갈수록 밀도가 높아지고, 보다 더 입자가 작아져 갑니다.  성중(聖衆)하늘엔 2번 영체로 가 태어납니다. 이때 3,1번 영체는 2번 영체속으로 겹칩니다. 극락은 1번 영체가 갑니다. 3,2번영체는 이 속으로 겹쳐 듭니다.  1,2,3번 영체는 죽지 않습니다.  1번 영체는 인가의 본체입니다. 여자가 극락에 왕생할 때는 남자로 변신이 되어 갑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진여자성 일물법성은 우주의 근원입니다. 영체를 가르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를 존재케 하는 영체를 초월한 궁극실체입니다.



 붓다 이룬이는 1,2,3,4번 영체가 모두 빛덩이가 되어 자기 불신(원만보신)으로 계합,믹스(mix) 됩니다.  삼명 오안(五眼)을 갖추고 대 적정삼매에 계시는 붓다만이 육도(六道)와  중생의 윤회전생을 그대로 봅니다. 지옥의 실상과 극락세계의 진상까지를 보십니다. 인류역사상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수보리.사리불존자만이 불과를 증했을 뿐입니다.



 윤회를 본 종교로는 흰두교와 자이나교가 있습니다. 화두타파하면 견성(見性)한다 합니다.

깨쳤다 말합니다. 맞습니다. 진여본성이 드러납니다. 공(空)과 무아를 체험합니다.그러나 잠깐 마음자리가 드러난 깨달음이란 이제 공부의 시작일 뿐 입니다. 보림을 잘해 들어가면 여기가 아라한(聖衆)자리입니다.  깨달음에도 강약이 있습니다. 어쨌던 화두타파 했으면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특히 여자관계가 무섭습니다.

사음계를 파하는 것은 부처님과 법을 능멸, 모독하는 대망어 과보만큼이나 무섭습니다. 그리고 나 없는 수행, 두타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 보살과를 증합니다.  붓다되는 일은 여기서도 천만리입니다. 보살도를  완성해야 불과를 이룹니다. 그러나 보살지에 이르면 성불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붓다는 진여와의 완전 계합이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우주와의 완전 무결한 계합을 이룹니다. 대 열반이요 대 해탈입니다.                                                                  춘천 현지사 회주




30년 토굴정진 하던 만현 스님 성우 스님이 TV 법회로 끌어내
[중앙일보 2005-11-12 06:31]    


[중앙일보 조우석.안성식]

"우리 사회는 업장이 두터운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꼭 어두운 사회를 뜻하지는 않는 법인데, 잘 산다고 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밝다고 할 수는 없죠. 스님, 우리는 이를 씻어줄 한 줄기 법문, 참다운 도인(道人)의 등장에 목 마릅니다."(성우 스님) "침체상태인 한국 불교는 먼저 철저한 자기 갱신부터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계율과 함께 올바른 생사관 정립이 시급합니다."(만현 스님)

 

7일 오전 11시 서울 봉천동 불교TV 회장 집무실. 'TV법회' 녹화차 서울을 찾은 춘천 현지사의 만현 스님과 성우 회장스님이 무릎을 맞댔다. 좌담은 불교TV의 10년 장수프로 'TV법회'가 9월부터 방영 중인 만현 스님의 1년 릴레이 법회가 큰 반응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방송사 측은 'TV법회'는 대개 100만 명이 봐왔는데, 특히 릴레이 법회의 시청자는 평소의 두 배에 이른다고 밝혔다. 성우 스님의 표정이 환하다.

 

"만현 스님의 릴레이 법회는 9월 첫 녹화 때부터 부산 등 지방에서 버스를 빌려 올라온 불자들로 방청석이 초만원입니다. 교수.의사 등 엘리트 불자도 상당수죠. 전에 없던 일이라서 저도 놀랍니다. 지난 6월 제가 춘천 현지사를 찾아가 '스님, 한국불교는 앞날이 없습니다. 태풍을 몰아쳐 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고, 만현 스님이 어렵게 승낙해 주셨는데,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있어 기쁩니다."

 

성우 스님은 지금 한국불교는 침체 상태라고 규정했다. 태풍이 대기순환을 돕듯 만현 스님의 대중 법문은 불교 갱신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거듭 표시했다.

만현 스님은 1970년대 총무원 포교부장, 불교신문 사장을 지낸 뒤 30년 가까이 모습을 감춰왔다. "모자란 공부를 더하려고" 토굴 정진 등 수행에 전념해 왔다. 예전의 법명(법성 스님)도 바꿔버렸다. 그 결실의 하나가 5월에 펴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다. 지금까지 3만 권이 팔리며 불교서적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성우 스님의 제의를 받고, 지금 내가 세상에 나갈 시기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새로 마련된 법상(法床)에서 던지는 제 법문의 핵심은 올바른 수행관과 생사관의 정립입니다. 화두 타파.견성(見性)은 수행의 첫걸음에 불과한데도 막상 그 뒤에 공부를 게을리하고, 계율을 무시하는 태도는 큰 일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라면서 '법화경' 등 경전에 엄연히 언급된 지옥.극락도 무시하는 짧은 인식 때문에 생사관도 흔들립니다."

 

만현 스님은 지금의 한국불교는 불교의 본래 세계가 아닌 '마음 종교(心敎)' 정도로 축소됐다고 지적했다. 선종.교종.밀교가 축소일변도로 뒤섞인 현재의 통(通)불교를 전통인 양 고수하는 것도 문제라고 일갈했다.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씨가 지옥과 극락은 없다는 발언을 하면서 불교를 능멸해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구업(口業)의 극치 아니던가요. 이런 상황을 멍하니 보고 있는 불교계가 답답합니다. TV법회에서 이런 점을 차례로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성우 스님이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한국 조계종의 대표적인 율사(律師)로 꼽히는 성우 스님은 "TV법회는 올해로 10년을 맞는데, 그동안 석주.서암.성철.혜암 큰스님 등의 법문이 차례로 소개됐다"고 말했다. 만현 스님 릴레이 법회는 내년 8월까지 계속된다. 달마다 법문이 바뀌며, 매달 첫주 화요일에 새 내용이 선보인다.

글=조우석 문화전문기자 wowow@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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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칼럼]
글로벌 불교와 한국 불교 [중앙일보]

문명의 충돌’을 말했던 사무엘 헌팅턴은 틀렸다. 거역할 수 없는 큰 흐름은 ‘문명의 넘나듦’ 쪽이다. 이를테면 『도덕경』『장자』의 영어·불어 등 서구 번역본만 현재 300종이다. 유교는 어떠한가. 제임스 레그의 그 유명한 사서삼경 영역본이 나온 게 19세기다. 맹렬한 문명 넘나듦의 현장은 따로 있다. 불교다.

쉬운 예로 미국 엔간한 곳에는 젠 센터, 즉 선방(禪房)이 보인다.지적 호기심이나 이국취미의 공간이 아니라 엄연한 수행의 중심축이다. 그들 삶에 뿌리내렸다는 증거다.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의 저자인 종교학자 오강남에 따르면, 서구 불자는 600만 명. 이민자를 제외한 백인 불자만 100만여 명이다. 놀라운 것은 자부심이다.


자기네 불교를 신불교(New Buddhism) 혹은 엘리트불교라고 한다.원조인 우리를 종족불교·세습 불교라며 선을 긋는 것이다. 왜 그럴까? 향 피우고 연등 달거나 습관적으로 사찰 다니는 전통불교와 달리 첫째도 수행, 둘째도 수행을 앞세우는 혁신의 노력이다.

“아시아 문화의 외양을 벗고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297쪽)인데, 이쯤 되면 유럽 발(發) 불교개혁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지난 100여 년 사이의 변화다.1893년 열렸던 세계종교회의가 시작인데, 직후 하버드대 등에서 불교 연구 붐이 일었다.

대중화의 첫 물꼬는 1950년대. 문인 긴즈버그·케루악이 붐을 이끌고, 일본 스즈키 다이세츠가 선불교를 강력하게 밀었다. 훗날 한국의 숭산 스님의 활동도 그런 분위기를 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게 형성된 신자들은 불교애호가였던 쇼펜하우어·니체에서 헤세·소로우·에머슨·휘트먼 등 철학자·문인과는 다르다. 더도 덜도 아닌 어엿한 불자요, 수행자다.그들은 티벳불교·선불교의 구분을 떠난 통(通)불교를 이끌며 책도 열심히 펴낸다.

내가 읽은 불교 책에 영어 번역본이 많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에드워드 콘즈의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가 특출했다. 오경웅의 『선의 황금시대』, 트룽파의 『마음공부』, 틱낫한의 『화』등도 얼마나 훌륭한가!

필자 일부가 아시아 출신이지만, 서구의 지적 풍토에서 재해석된 불교 소식이라서 참신하다. 합리주의 세례를 받은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글로벌 불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일까?다음주 초파일(5월2일), 부처님의 자비와 사랑도 동서양 구분이 없을 듯하다.

걱정스러운 건 우리다. 자랑하고 템플스테이·선1000여 년 전통을 식(禪食)정도를 말하지만 제대로 된 불교문화 상품을 창출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수행이 시들하고 내부 혁신도 없는 불교 내부가 역시 문제다. 한국불교, 어떻게 변해야 할까? 다음주 강원도 춘천의 사찰인 현지사를 중심으로 그걸 가늠해보자.
조우석 <문화평론가>





대한불교 신문 2004년 5월 5일 5면 


삼계의 지존 부처님의 삼신을 말한다 (1)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짐승으로 환생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깨달음을 이루어 성자의 반열에 도달하는 것 뿐이라 합니다. 금수(짐승)처럼 행동하면 반드시 짐승몸을 받아 납니다. 정업불면(定業不免)입니다.

지은 업은 우리 스스로는 닦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세존의 가르침따라 호흡수행이나, 위빠사나 관법선으로, 혹은 선불교에서의 간화선법으로 깨달음을 얻었으면 이제부터가중요합니다. 음계(淫戒)를 철저히 지키면서 나 없는 수행, 두타행으로 나가(보임 잘해서) 깨달음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궁극의 깨달음, 완전 궁극에 도달해야, 거기가 아라한 성중(聖衆)입니다.인간은 여기가 한계입니다. 아라한이,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극과입니다. 여기서 보살이 되려면(보살8지 부동지 이상을 부처님께서는 보살이라 하심) 타력이 필요 합니다.

부처님의 절대하신 위신력이 요구 됩니다. 지옥이나 축생계에 자기의 돌아가신 부모, 형제 가까운 직계, 방계 영가가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면, 보살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효(孝)가 필요조건이 됩니다.그리고 아함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을 독송해야 하고,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여러 다라니를 암송하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면서 일심불난 염불수행으로 들어가 깊은 삼매(해인삼매)에 들어야 보살지에 들 수 있습니다.

보살은 보다 깊은 삼매에 들도록 더욱 정진해 가야 합니다. 육(십)바라밀행을 지어가 상품상의 보살이 됩니다.대보살지에 이른 성자는 불과를 얻고자 보현행원을 실천 합니다. 마침내, 궁극에 이르러,붓다 이룰 수 있는 관문, 즉 무량광(無量光)이라 하는 빛을 보는 겁니다.

이 빛은 광도에 있어서 태양의 중심,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해 속 보다 비교 할 수 없는 그런 빛 입니다. 우리가 억겁토록 내려오면서 지은 업장이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한 볼 수 없는 빛 입니다.다생의 습기가 완전 녹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빛입니다. 다생의 습기가 완전 녹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부처님 몸을 이루고 있는 부사의 한 빛입니다.

백천만겁토록 내려오면서 지은 악연, 그리고 빚(債務)이 남아있다면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 된다는 것은, 겁에 한 분 있을까 말까 하다고 부처님께선 말씀 하십니다. 불과를 이룬 이는 이 몸뚱이와, 4개의 영(혼)체 외에 불신을 하나 더 갖습니다. 불신(佛身)은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적멸신입니다.

교가(敎家)에서 원만(보신)이라 하는 겁니다. 아함경은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여러 관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대승불교로 넘어 오면서 육바라밀 수행, 염불수행이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보살이 되는 수행법 입니다. 대(소)승경전에도, 부처님세계의 소식은 일체 없습니다.

기록할 필요가 없기 때문 입니다.어떻게 해서 불신이 생기고, 불과를 이룬 이는 어떤 과정을 밟아서 자기 불신과 계합을 하며, 불신을 얻어 불과를 증한 대성자의 지혜, 능력, 부처님 삼매에 대한 자상한 부처님 말씀은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부처님에 대해 법문을 하고자 합니다.그것은 모두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세상이 됐으니,그것을 더욱 확실히 밝히고 위대한 부처님 소식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법을 능멸하고 모독하는 대 망어를 범하지 않도록 하고자 해서 입니다. 그러려면 불(佛)의 삼신설(三身說)을 바르게 연설해야 합니다.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씀 드립니다.

아라한 성중은 보살과를 증득하고자 남섬부주에 원력수생 한다는 것, 극락정토의 중품, 상품 보살은 붓다 되기 위해 선근공덕을 쌓고자 사람 몸을 받아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밝혀 둡니다. 상품보살도 삼신을 갖추지 못합니다. 삼신을 말씀하신 경으로는 "금광명 최승왕"경이 있습니다. 그 경 제 2권 분별삼신품에 "모든 부처님에게 세 가지 몸이 있다.

화신(化身), 응신(應身), 법신(法身)이니라", "법신은 화신, 응신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일찍이 삼신설은 인도의 무착, 세친 큰스님들에 의해서 확립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보성론(寶性論)의 삼신 - 법신, 보신, 화신을 들 수 있습니다.

삼신설은 불교의 핵심 중 핵심부분입니다. 불신 곧, (원만)보신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무량광을 몇몇 대승경전에선 억종광(億種光), 백종 오색광(百種 五色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무량광으로 불신은 이루어집니다.불신을 얻지 못하면 붓다가 아닙니다. 사바세계에 한 분의 붓다가 나오려면 부처님들의 선택이 있습니다. 붓다가 될 수 있는 그릇이 선택 됩니다. 선근 보따리가 붓다 되기에 충분한 수행승이 낙점 됩니다.상품상의 보살입니다.

이 수행승은 공부 중에 무량광을 봅니다. 다음 어떤 큰 또 다른 하나의 관문을 거치면, 자기를 찾아 온 많은 부처님들을 뵙고 법문을 듣게 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들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지도 받습니다.보다 많은 깊은 삼매에 들어가 붓다로서의 공부를 마칩니다.

이즈음엔 이미 자기 4영체는 수정같이 맑은 상태를 지나, 빛 덩어리가 됩니다. 해 속 빛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런 빛 덩어리가 됩니다. 4개의 영체는 각기 독립해서 분리하여 활동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과도같이 이 거짓 몸뚱이에서 빠져 나와서 말입니다. 죽을 때는 4영체가 자기 불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자기 불신과 하나로 계합 합니다.

그 불신은 무아 속 절대세계에 청정법신을 둡니다. 자기의 법신을 둡니다. 부처님의 법신은 삼천대천세계에 그대로 퍼져있는 빛입니다. 법신이야말로, 진불(眞佛) 입니다.전생에 이미 불과를 이룬 붓다가 이 사바세계에 사람 몸을 받아 오실경우가 있습니다.

그 몸을 (응)화신 이라 합니다. 이 때 자기의 불신은 거기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한번 얻은 불신은 그 생명이 영원 합니다. 붓다는 원력 수생하기 때문에 주로 왕궁으로 몸 받아 오십니다. 붓다세계에 불신은 보신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보신은 무아 속 절대계에 법신을 둡니다. 그래서 법신은 보신과 화신의 근본(체)입니다. 삼차원세계에 사는 우리들의 의식구조로선 이해하기가 혼란스러울 겁니다.  아미타불을 두고 말씀 하겠습니다.

아미타불은 지금 서방극락세계의 교주 이십니다.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한 많은 보살들을 붓다 될 수 있도록 교화하고 계십니다.  거기 아미타불의 불신을 보성론에서의 개념으로 보면 보신이라 하는 것 입니다. 원만보신입니다.  32상 80종호를 구족한 보신입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은 10겁전이 아니고 실로 무량겁전에 불과를 이루신 부처님 이십니다. 당신의 법신체(體)는 무아 속 절대계에 두십니다. 석가모니불은 법화경수량품에서 볼 수 있듯 진점겁전에 붓다 이루신 분이십니다.

남섬부주의 교주이시기에 지금도 영축산에 계십니다.  동시에 삼천대천세계의 총교주 이십니다.최초 불 이십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신은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시는 그 많은 부처님의 법신을 모두 아우르고 계시는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이십니다.



[독서산책] 붓다의 메시지

"염불이 최고의 수행법이오"

자재만현 지음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선종과 대다수의 대승 불교학자들은 '마음이 곧 부처'라 하고 '마음을 깨치면 곧 부처'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견성이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며 붓다를 이루는 머나먼 도정(道程)의 출발점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저자인 자재만현 스님은 이 책 서문을 통해 이같이 밝히면서 염불선이 가장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일러준 수행법이기에 염불이 최고라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석가모니불' 등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서 수행하는 칭명염불을 권한다. 일심으로 염불할 수 있다면 윤회를 벗어나고 극락정토에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간절히 바라며 염불선을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또한 윤회전생은 분명한 사실이며, 지옥도 있고 극락도 있다고 설명한다. 공의 세계에 들어 볼 때면 일체가 비었지만, 차별세계에 나와서 볼 때는 사람들도, 짐승들도 엄연히 존재하듯 소름 끼치는 지옥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치열한 염불수행의 결과로 깊은 삼매에 들었다가 빠져나와 쓴 법문이라고 강조하는 이 책은 윤회전생과 삼매, 염불선, 신통(神通), 대·소승 경전의 성립배경 등을 담고 있다.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culture/article.shtml?id=20070120.010150756150001






마음만 깨친다고 부처가 되나요 ‥
자재만현 스님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출간


견성과 깨달음 등 한국 불교계 주류의 핵심사상에 이의를 제기해온 춘천 현지사 자재만현 스님(70)의 불교사상을 담은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영산불교사상연구소 엮음,현지궁현지사)가 출간됐다.자재만현 스님은 30년 가까이 은거수행하다

2005년 자신의 체험적 구도 과정을 밝힌 법문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 한국 선불교를 신랄히 비판했다.

"단순히 마음을 깨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며 견성(見性)은 부처가 되기 위한 머나먼 도정의 시작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는 이 같은 자재 만현 스님의 불교사상을 제자들이 정리한 책.붓다 및 지옥·극락은 실재하고,칭명염불(稱名念佛) 수행법만이 부처가 되는 길이며,깨달음은 붓다가 되기 위한 시작일 뿐이고 삼매만이 윤회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1만5000원.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입력: 2007-06-28 17:52 / 수정: 2007-06-29 09:16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7062850021





강원일보 2005년 06월 01일자 화제의 책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효·도덕·독경·수행은 계속돼야"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에 소재한 현지사 회주인 자재(自在) 만현스님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펴냈다.

`염불삼매 속에서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들었다'를 부제로 단 이 책은 수행승으로서 화두선을 참구하여 득력한 후 계율을 선지하면서 염불선으로 방향을 전환해 정진을 거듭하고 있는 만현스님의 수행결과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수행하는 모든 불자들은 부모님께 효를 다하고 경전을 읽고 염불하라”며 “나라가 부강하고 세계가 평화롭게 되려면 도덕을 중심으로 재무장하고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고 강조한다.

그는 특히 붓다의 삼신설에 대해 정확히 밝히고 있어 눈길을 끈다. 태어날 적마다 수행을 거듭해야 붓다를 이루게 된다며 붓다를 이루면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등 세 몸(三身)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몸뚱이 속 4개의 영혼체에 관한 벌설 등 근원적 문제를 다루고 있어 불교를 공부하거나 수행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鄭明淑 기자




30년 토굴정진 하던 만현스님 성우스님이 TV법회로 끌어내    ( 중앙일보, 2005. 11. 12 )


만현 스님(왼쪽) "한국 불교 오그라들어 화두만 알고 계율 무시" 성우 스님(오른쪽) "앞날이 안 보입니다 태풍 몰아쳐 주시길"


"우리 사회는 업장이 두터운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꼭 어두운 사회를 뜻하지는 않는 법인데, 잘 산다고 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밝다고 할 수는 없죠. 스님, 우리는 이를 씻어줄 한 줄기 법문, 참다운 도인(道人)의 등장에 목 마릅니다.

"(성우 스님) "침체상태인 한국 불교는 먼저 철저한 자기 갱신부터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계율과 함께 올바른 생사관 정립이 시급합니다."(만현 스님)11월7일 오전 11시 서울 봉천동 불교TV 회장 집무실.

'TV법회' 녹화차 서울을 찾은 춘천 현지사의 만현 스님과 성우 회장스님이 무릎을 맞댔다. 좌담은 불교TV의 10년 장수프로 'TV법회'가 9월부터 방영 중인 만현 스님의 1년 릴레이 법회가 큰 반응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방송사 측은 'TV법회'는 대개 100만 명이 봐왔는데, 특히 릴레이 법회의 시청자는 평소의 두 배에 이른다고 밝혔다.

성우 스님의 표정이 환하다."만현 스님의 릴레이 법회는 9월 첫 녹화 때부터 부산 등 지방에서 버스를 빌려 올라온 불자들로 방청석이 초만원 입니다. 교수.의사 등 엘리트 불자도 상당수죠. 전에 없던 일이라서 저도 놀랍니다. 지난 6월 제가 춘천 현지사를 찾아가 '스님, 한국불교는 앞날이 없습니다. 태풍을 몰아쳐 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고,

만현 스님이 어렵게 승낙해 주셨는데,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있어 기쁩니다."성우 스님은 지금 한국불교는 침체 상태라고 규정했다.

태풍이 대기순환을 돕듯 만현 스님의 대중 법문은 불교 갱신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거듭 표시했다.만현 스님은 1970년대 총무원 포교부장, 불교신문 사장을 지낸 뒤 30년 가까이 모습을 감춰왔다. "모자란 공부를 더하려고" 토굴 정진 등 수행에 전념해 왔다. 예전의 법명(법성 스님)도 바꿔버렸다.

그 결실의 하나가 5월에 펴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다. 지금까지 3만 권이 팔리며 불교서적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성우 스님의 제의를 받고, 지금 내가 세상에 나갈 시기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새로 마련된 법상(法床)에서 던지는 제 법문의 핵심은 올바른 수행관과 생사관의 정립입니다.

화두 타파.견성(見性)은 수행의 첫걸음에 불과한데도 막상 그 뒤에 공부를 게을리하고, 계율을 무시하는 태도는 큰 일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라면서 '법화경' 등 경전에 엄연히 언급된 지옥.극락도 무시하는 짧은 인식 때문에 생사관도 흔들립니다.

"만현 스님은 지금의 한국불교는 불교의 본래 세계가 아닌 '마음 종교(心敎)' 정도로 축소됐다고 지적했다. 선종.교종.밀교가 축소일변도로 뒤섞인 현재의 통(通)불교를 전통인 양 고수하는 것도 문제라고 일갈했다.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씨가 지옥과 극락은 없다는 발언을 하면서 불교를 능멸해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구업(口業)의 극치 아니던가요. 이런 상황을 멍하니 보고 있는 불교계가 답답합니다.

TV법회에서 이런 점을 차례로 바로잡으려고 합니다."성우 스님이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한국 조계종의 대표적인 율사(律師)로 꼽히는 성우 스님은 "TV법회는 올해로 10년을 맞는데, 그동안 석주.서암.성철.혜암 큰스님 등의 법문이 차례로 소개됐다"고 말했다. 만현 스님 릴레이 법회는 내년 8월까지 계속된다. 달마다 법문이 바뀌며, 매달 첫주 화요일에 새 내용이 선보인다.

글=조우석 문화전문기자사진=안성식 기자




불교 교양지   禪 文 化
2005년6월호
우리시대 선승을 찾아 - 현지사 만현스님


한국 불교, 자기 갱신 없이 앞날 없다

-법문집 "21세기붓다의 메시지"에 나타난 만현(滿顯) 스님의 법 세계

조우석(중앙일보 기자)


우리가 덕담을 겸해서 던지곤 하는 한국 불교에 대한 호의적

평가란 대강 이쯤 된다.  "고대 이래 10세기 넘는 지금까지 동

북아시아 선 불교의 수행 전통을 간직하고 있고, 특정 종교의

차원을 넘어선 우리 기층문화의 소중한 유산."



사람들의 평균적 인식을 반영하는 이런 평가에 단골로 따라

붙는 메뉴는 또 있다.  통通불교라는 자랑..... 선 수행을 중신

으로한 종풍에다 교종과 밀교가 두루 포함된 불교 백화점이라

는 주장이다.  이런 통념이 분명 검증된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종종 턱없이 비약과 함께 '기분'에 취한다.



"이웃 궁국은 문화혁명 이후 망가진 자기 전통을 복원하기

위해 한국 불교를 배우려고 유학생 파견하고 있잖아. 일본 불

교? 그들은 스즈키 다이세츠 이래로 '학문화된 불교'라서 선 수

행의 전통은 부실하다고 봐야지. 서구 사회가 1868혁명을 전후

해 불교에 괸심을 가진 게 벌써 수십 년인데, 불교 세계화의

이 시대에 한국 불교의 전망은 좋다고 봐야지."



과연 그럴까?  의심받지 않은 진리란 썩기 마련인데, 1천 년

전통의 한국 불교는 과연 건강한가?  조선조 때 권력에 의해 강

제로 선종과 교종이 합쳐지고, 이후 축소 일변도로 흘러와 조

선 중기 이후 지금까지 정말 필요했던 자기 갱신에서 한참 멀

었던 역사를 막연하게 '통불교'라고 일컫고 있는 것은 아닌가?



9세기 중국 고대의 당나라에서 시작된 선 불교란 본디 인도

불교와 중국 문화, 도교의 사이에서 만들어진 제3의 변용인데,

그 조사선만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불교 패러다임의

전부일까?  혹시 조사선이란 오랜 동어반복의 과정 속에서 많이

진부해지고 활력을 잃은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한국 불교의 역량이 만천하에 유리알처럼 들여

다보이게 된 이 시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21세기 초입의 지

금 시대란 불교가 고대나 중세 때와 또 달리 '전 지구적 종교'

의 차원으로 대두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 앞서 티벳 불교나 남방 불교, 여기에 위빠사나

선 등이 서구에 먼저 소개됐고, 영향력 역시 한국 불교에 비해

크다.  티벳 불교 들이 '속이허한' 한국 불교에 여수입된 지도

10여 년이 됐다.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스님을 포함해 불교 관

련 영문 저술의 번역물이 독서 시장에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

다.  급한 마음에 사람들은 미국 명문대 출신 제자들을 길러낸

숭산 스님의 업적을 들먹이지만, 그건 외려 서구 콤플렉스를

반영할 뿐이다.



서구사회가 그들 언어로 노자의 <<도덕경>>이나 공자의<<논

어>>등 동양고전들을 휼륭하게 번역해 온 역사가 이미 2백여

년이고, <<법화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의 번역 역시 우리를

앞선 지 오래라는 점도 이미 상식이 됐다.



선 참구 수행만이 정통이고, 나머지는 속 좁게도 외도로 내

모는 이 와중에 '동북아 선 불교의 본거지'라는 덕담 혹은 자랑

이란 철모르는 소리가 아닌지를 되물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다.





한국 불교는 우물 안 개구리? 


한국 불교에 대한 이런 의문 속에서 만난 법문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자재 만현 스님 지음, 현지궁 현지사 펴냄)는 예사롭

지 않았다.  고백컨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앞서 필자가 언급했던

오랜 의문에 일정 부분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법문집은 지금 한국 불교계의 오랜 '관습화됀 유산'을

뒤흔듣다.  가히 파천황이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 불교의 정체

성에 대한 도전이고, 자기 갱신을 요구하는 사자후'에 다름 아

니었다.  <만현 스님과 인터뷰 참조>



"한국 불교가 천 년 넘게 선 불교 영향을 받아서 많은 불자

들의 인식이 고착돼 있음을 잘 압니다.  선종과 대다수 불교학

자들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마음을 깨치면 부처'라고 해

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견성이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며, 부처를

이루는 머나먼 도정의 출발점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이 나라의 불교 가르침은 많이 왜곡돼 있습니다.  교학의 바탕

이 되는 불교 경전 공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11족~12쪽)



만현 스님은 화두 참구 일변도로 진행되어 온 지금의 한국

불교 수행 방식에 '노!'를 분명히 하는데, 내가 보기에 만현 스

님의 이런 문제 제기는 지난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의 돈점노쟁과 일단 비견할 만하다. 아니 그 위력은

크게 앞선다.  20년 전의 돈점논쟁이 한국 불교 정체성 자체는

피해간 데 비해(아니 고착시킨 데 반해), 만현 스님 쪽은 훨씬 근

본적인 문제 제기로 시종한다.



이 점을 선명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내 문제 제기

는 불교 교학 발전의 한 획을 긋는 일"(13족)이라고 밝히고 있

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해당되는 자신의 법문은 먼 훗날

평가받을 것"(166쪽)이라는 발언도 던져 놓고 있다.  어쨌든 간에

만현 스님의 발언은 "불교사적으로주목할 만한 큰 사건"(156쪽)

이면서도 지금의 한국 불교계에 뜨거운 메시지다.  무엇보다 현

재의 한국 불교는 정연한 체계를 갖춘 정통 불교가 아니라 심

교, 즉 마음의 종교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우선 강

렬하게 눈에 뜨인다.



왜 그럴까?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법화경>> <<화엄경>>

등을 잘 읽으려 하지 않으니 교학에 어둡고, 거기에 나오는 생

사관을 포함한 핵심 교리들을 방편설 정도로 치지도외하는

몽매한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법

문집은 '우물 안 불교'에 대한 정문일침이다.  자기의 오랜 수행

이력의 내공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도 당당하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계에서는 말합니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자리가 곧 극락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지옥과

극락을 마음 안에서만 찾으며 그것(지옥과 극락)은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마음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지옥, 극락, 부처와 보살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40쪽)



"선은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 정도로만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지옥이란 것도 우리 마음의 산물로 (가볍게)

봅니다.  서방극락 역시 우주생명의 근원적인 바탕 정도록 봅니

다.  ----- (이런 식의 소박한 인식은) 자유와 평등의 정의사회를 구

현할 때 그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비약으로 연결됩니다.  관세음

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말도 우주 생명을 의인화한 것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합니다."(192쪽~193쪽 요약)



만현 스님은 이 같은 법설이 정법을 능멸하는 외도의 설이라

고 단언한다.  이를테면 선 불교 쪽에선 <<법화경>> 속에 등장

하는 족쇄, 독충, 귀신 등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해 왔다.  대

중교육을 위한 서적 상상력의 장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법화경>> 11장 <견보탑품>, 15장 <종지

용출품> 그리고 16장 <여래수량품>, 등의 위대한 메시지를

건성으로 읽고 만다.



법신에서 보신 개념으로 대전환


그러면 만현 스님 법문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그것은 '법신

개념 위주의 불교'에서 보신개념 위주의 불교'로 대전

환일 것이다.  보신 개념으로 불교 세계를 전면 재구성하는 것

이다.  자재 만현 스님의 말대로 필자는 그런 불교관을 불교 세

계의 새 패러다임 도입과 구축 노력이라고 보는 쪽이다.  대승

경전에 나타난 핵심 정보와 사항이 새롭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읽어보자.

<<법화경>> 16장의 경우, 부처는 "나의 말은 진리이므로, 나

의 말을 믿으라."는 권면으 세 번 되풀이한 뒤 자신이 지난 40

년 간 이 땅에서 설법을 했던 '역사 차원의 석가모니'가 아니

라, 백천만 아유타겁 동안 이미 부처였다고 설파한다.  즉 절대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부처라는 점을 언명

한 것이다.  따라서 2500년 전 출현한 석가모니란 중생을 위한

현현의 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당시 제자들은 일상의 차원에 갇힌 채로 부처님 말씀에 그저

당혹해 한다.  11장 <견보탑품> 에서 현실의 이 땅인 영취산

바로 그 자리에서 다보탑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오른다.  더욱

놀랍게도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는 곳마다 나타나 부처님의 법

문이 옳다고 증명할 것이라 맹세했던 '다보여래'가 그 곳 다보

탑 안에 들어 있었다.



장려한 불국의 장면, 즉 절대세계의 자세한 모습까지를 다시

한번 선명하게 보여줬다.  심지어 제자들 앞에서 석가모니는 다

보여래의 옆 사좌좌에 않아 보이기도 했다.  이야말로 역사 차

원의 이 시공간에 연출해 보인 궁극적 실재, 즉 절대세계의 돌

연한 출현이고, 궁극적 실재와 역사적 석가모니가 하나임을 보

여준 위대한 기적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는 이런 정보를 시적인 상상력으로 읽어

왔다.  대중 교화를 위한 방편설로.... 즉 추상화 내지 관념화

시켜서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자재 만현 스

님의 개입이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인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부처님 세계의 구체적인 묘사에 다름 아니라는 주장이다.  자재

만현 스님의 불교 세계관을 특징짓는 철두철미한 보신 중심주

의의 등장이다.  무량광으로 된 보신, 절대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보신을 중심축으로 해서 불교 세계를 전면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법신은 비로자나불로 상징되는 빛 그 자체, 진리 그 자체

혹은 우주 그 자체를 말하는 '우주적 몸'.  따라서 보신과는 불

이의 관계인데, 보신은 이 법신을 근거로 해서 나온다.  다

르게 말해 보신은 궁극적 절대계에 존재하는 불신의 구체적인

모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불교학자의 책상머리 발언이 아니고, 독

자적인 수행론과 불교 생사관의 정립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또 만현 스님의 수행 과정과도 긴밀하게 엮여 있다.  그 문제의

보고서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다.



때문에 만현 스님은 한국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 타파, 즉 견

성을 둘러싼 새로운 해석부터 정면에서 문제 제기하고 있다.



흔히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하지만, 만현 스님은 이를 철두철

미 부정한다.  한 마디로 "위험한 표현"일 뿐이라는 지적이

다.  외려 견성은 기나긴 수행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만현 스님은 자신의 수행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한다.  즉

화두 타파로 인한 마음자리를 깨치는 순간 하늘과 땅의 경계가

확 뒤집힌다는 것, 바로 이때 "내 앞의 모든 게 공이요, 나도

없고 나라는 생각까지도 사라진" 자성광명을 본다.



생각 이전의 본래 진면목이다.  이때 몸뚱이라는 것이 '가짜 옷'

이고, 나라는 것도 '가짜 나'이며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대목부터다.



그 견성의 단계가 완전한 깨달음이고, 따라서 생사윤회를 벗

어나 삼계를 완전히 뛰어넘기에는 턱없는 것

이라고..........., 이 대목에서 만현 스님은 논리와 문자에 굳이 매

달리지 않고 화두 타파 뒤 선정에 들었던 상태의 경험을 털어

놓고 있어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선정 속에 몰입했던 때, 한 이불 속에서 심한

문둥병 환자와 함께 밤잠을 자게 되었다.  이런 선정 속 상황에

서도 만현 스님은 문둥이의 존재가 자꾸 의식이 됐다.  또 토굴

에서 보림하던 중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다가올 때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진땀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연히 보게

된 미모의 여인을 보고도 마음이 설레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

대로 "(그런 자신이) 역겹고 싫었다."고 한다.  자신의 화두 타파와

선정이 부처님이 말한 진정한 삼매의 경지가 아니었다는 중간

결론을 만현 스님은 그때 내리게 된다.



그 순간 "진여실상이란 용광로에 무명 번뇌나 업장 따위가

모조리 녹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지난 날 "나의

법문을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진

여자성을 보았다 해서 곧바로 붓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

았습니다.  부처님과 보살을 뵙고자 했으나 친견은 고사하고 지

옥, 천상도 관할 수 없었습니다.  도솔정토나 서방극락도 끝내

관할 수 없었습니다.'(26쪽~29쪼 요약)



선승인 그가 염불선으로 과감히 방향 전환을 한 것은 그 때

문이다.  이 방향 전환은 두 가지 점에서 놀라운 사건임에 분명

하다.  염불선.  그것은 조사선 일색의 한국 불교에서 오랫동안

외도로 치지도외 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현 스님은 염불선

이 인도의 용수와 마명, 중국의 혜원, 선도와 각현 그리고 한국

의 의상과 원효 스님 또 서산 선사 등의 수행법이기도 했음을

주목하고 "침묵 속의 정토업을 쌓는" 수행을 거듭했다고 밝힌

다.  가히 놀랍다.



염불선이야말로 수행의 으뜸  


이런 용기는 <<화엄경>> <<법화경>> <<율장>>의 가르침대로

무엇보다 계율을 존중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는 수행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시절의 그 일이 놀랍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인간 스스로의 수

행인 자력에 의존하는 것에 일정 부분 한게를 긋고 있다

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는 타력에 의존하기 시작

한 것이다.  다음 그의 고백을 유심히 음미하기 바란다.



"덕산의 30방을 흔들며, 상에 집착 없는 언어로 공을 읊

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 다 된 양 착각 하며 오만을 떨었던 지난

날을 생각하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30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총무원 상임포교사로 법상에 앉은 지 2~3년이 못돼 나

의 공부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25쪽)



바로 이 지점에서 고유의 불교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다.  그의 단언에 의하면 출가자가 자력의 수행으로 오를 수 있

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까지다.  즉 곧바로 성불한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셈이다.  견성 그 이후부터는 철두철미 부처



님의 가피가 필요하고, 다음 생애에 몸을 받은 아라한의 공덕

이 다시 쌓여 그 결과로 보살의 반열에 오른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관음보살께서 뿌리는 부처님의

광명을 온 몸의 털구멍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종종 만나는 위

력"이 바로 보살의 경계다.



이때 모든 보살이 아닌 최상수 보살 정도가 되면 부처가 뿌

리는 무량광이라는 빛덩어리를 보게 된다.  다음이 부처님 친견

의 경지다.  즉 '불과를 증한 대성자'의 단계에 바로 이때 들어

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불신을 절대계의 부처

님 나라에 둔, 즉 법신 보신 화신의 3신을 완벽하게 구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높디 높은 까마득한 위계의 관문 때문에 '견

성 즉 성불'이라는 습관화된 말은 턱없는 노릇인 것이다.



"무량광을 보기 이전에 부처와 보살이 있다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한낱 범부가 지껄이는 망언일 뿐입니다."는 단언(35쪽)은

여기에서 나온다.  만현 스님은 자신이 구축한 삼신 이론과 부

처 성불 단계론이 11세기 티벳의 전설적인 성자 미라래빠보다

구체적이며, <<반야경>> 등에서 설명된 법신 이론 중심의 부처

설명보다 정교한 것이라고 밝히지만, 지금 이 원고는 그걸 검

증할 수 있는 자리는 안 된다.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가져왔다는 인도의 용수와 달리

만현 스님 자신은 이 책의 도처에서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말하

지만, 그것 역시 제3자가 쉽게 용훼할 수 있는 일이 못된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불교에 관심 있는 이의 입장에서

보건대 만현 스님의 이 '신 불교론'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불교

가 훨씬 불교다워진다는 점이다.  장려한 체계의 구축과 함께

그가 강조하는 신행 활동의 3박자인 염불 - 계율 - 효도는 출

가자와 불자들을 위한 덕목으로 돌연 떠오르게 된다.



장려한 체계라 함은 수행의 단계와 관문만이 아니라 올바른

생사관을 위해 필수인 대목이다.  이를테면 만현 스님은 부처와

보살이  보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론, 지옥과 극락 그리고 윤

회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마음자리를 깨친 정도의

수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장보살본원경>>에 설명되는 끔

찍한 무간지옥은 실제로 있다.  따라서 출가하여 수행하는 이가

설혹 선근공덕이 있어 견성했다 해도 계율을 지키지 않을 경우

특히 음행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비유컨대 "수행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행위란 마치 깨끗한

물 한 컵에 똥물 한 방울이 떨어져 그 물을 마실 수 없게 되

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무소유와 청정을 지향할 것을 권한다.



이 점 요즘 흔들리는 모습의 불교계에 중대한 암시가 될 것이

고, 지옥과 극락 그리고 윤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망언을

했던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 역시 가슴 철렁할 노릇이다.  책

에서 만현 스님은 부처 말씀을 인용하며 "정법을 비방하는 구

업은 그 어떤 죄업보다 지중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만현 스님 설법에서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삼신을

두루 갖춘 부처의 위신력에 대한 강조다.  훌륭한 상모와 지혜

그리고 자비와 신통을 두루 갖춘 부처는 온 세상에 자재한 존

재로 성큼 부각된다.  만현 스님이 화두 참구에 앞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염불 공부를 "가장 훌륭한 수행법"(208쪽)으로 권

장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붓다 중의 붓다께서 일러주신 수행법은 바로 염불선입니다.

위빠사나선도 2500년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공부이기 때문에 훌

륭한 수행법입니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는 것이요. "지장보살, 지장보살'해도 좋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하면 더욱 좋습니다.  이것을 칭명염불이라고 합

니다."(208쪽)



신 불교를 대망한다

앎이 짧은 필자같은 이가 불교 교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지도

모르는 만현 스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무리다.



그러나 그와 우리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느낌으로 말하건대 만

현 스님의 법문은 분명 경청할만했다.  현재 한국 불교의 내용

없는 동어반복의 와중에 감로수를 마신 듯한 느낌 또한 들었

다.  일본 인문학의 젊은 거물인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주오대)가

"일본 불교는 에도시대 들어 창조적인 힘이 멈춘다."고  비판(<<

불교가 좋다>> 133쪽)했지만, 내가 보기에 조선조 중후기 이후 한

국 불교는 자기 갱신 능력에 문제가 있어 왔다.



지난 5월 현지사를 찾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높은 산 정상

에 올라 보면 앞과 뒤의 정경이 보입니다.  산 중턱에 서서 보

면 시야가 가려 겨우 일부분만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발언이 갖는 주관적 측면에 대한 위험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은 정작 따로 있다.  <<21세기 붓다의 메

시지>>는 그동안 천 년 넘게 관습화된 수행법과, 선명치 못할

뿐더러 주요 경전들과 따로 노는 생사관에 대한 휼륭한 대안이

자 해석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만현 스님의 발언은 현재의 조계종이라는 틀보다는 정토종에

가깝거나, 아니면 그런 저런 구분을 떠나 '신 불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이름이야 어떻든 간에 포스트 모던의 이 시대에

불교는 능동적인 자기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현 스님의 법문은 '딿아진 이름' 조계종, 아니 한국 불교의

문패를 벗어나 '불교 문예부흥'의 참신한 시도인지도 모른다.


-인터뷰- 

"1973년 전남 함평 태생. 1960년 부산에서 출가(당시 법명

법성)한 뒤 조계종 총무원에서 포교부장과 상임포교사 활동. 서

울 연화사 주지와 해동불교대학장 역임. <<화엄경>>의 선재동자

처럼 여러 신지식을 두루 참방하였으나 뒤에 염불삼매로 부처

님 친견....."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책 날개에 보이는 자재 만현 스님

의 이력의 일부이다.  최근 몇 년 새 <현대불교신문> <대한

불교신문> 등과 불교TV 등 미디어를 토해 법문으로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는 만현 스님을 필자는 지난 5월 중순 춘천 현

지사에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1970년대 청담 스님을 모시

고 총무원을 이끈 뒤 돌연 은거 수행해 온 그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스님의 생각이 이토록 새로운데, 차라리 창종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도 포함돼

있다.



스님의 법문은 가히 파천황으로 시종하지만, 화두 타파와 견성은

수행의 출발에 불과하다는 말씀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정통 조계종 사람입니다.  크게 이름을 내지 않으셨지만

대단한 율사였던 석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지요.  석암 스님은

뒤뜰에서 멸치 한 마리를 먹는 것도 금기를 삼으셨던 분인데,

그 어른의 입적까지 10년을 시봉하였습니다.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큰스님 문하에 들어가 '이뭣꼬를 붙들고 전라도의 토굴에

서 참구를 했습니다.


자, 중요한 질문입니다.  간화선에 대한 회의는 어느

때부터 들었습니까?


밝히지만, 화두 타파를 했던 초창기부터 그랬습니다.  견성이

란 것이 미약했고 크게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염불선으로 돌

아선 것도 그런 배경입니다.

본래 법명이 법성이었는데 세상에 나온 지금은 법명도 바꾸고

하실 말씀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더 휼륭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는 원력이 컸습니다.

요즘은 밀교, 위빠사나, 남방 불교가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이지

만, 부처님이 직접 가르친 그런 수행법을 외도로 치고 경전을

가볍게 여기는 절 분위기에서는 수행이 어려웠습니다.  화두 타

파는 수행의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에 나 혼자 염불선에 전념을

했습니다.

책을 펴내기 전 몇 해 전부터 <대한불교신문>에 연재도 하시고 하는데

지금의 불교계에서 이렇다 할 반론 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묵묵부답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많큼 불교

계의 공부가 안 돼있고 또 내 책의 깊이 때문에 손 쉬운 반대

의견 제시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만현 스님의 불교관이 이처럼 현재의 불교와 많이

다른 상황이라면 창종도 생각 못해 볼 것이 아니겠습니다.


......... 장종을 못할 것도 없습니다.  고려 중입니다.  그러나 그

래도 부처님의 정법에 근접해 있고 계율에 신경 쓰려는 종단은

현재의 조계종이라는 저의 판단도 동시에 밝혀둡니다.



송구스런 질문입니다. 

책에 보면 만현 스님이 아난 존자의 후신이라고 쓰

여 있습니다.  또 수행일지를 보면 부처님 친견을 했다는 말도 거듭 나옵니

다.  이런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할까요?


제가 친견을 한 부처님의 말씀이 그러할 뿐입니다.  단 그것

은 밀장이기도 하니 여러분 앞에서 증명해 보일 수 없습

니다.


사실 얼마 전 입적하신 청화 스님께서도 염불선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우 좋은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

는 칭명염불과는 조금 구분되는 '실상염불'이지요.  실상염불은

모든 것의 근본 자리 곧 진여(실상)를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로 보고 그 실상의 대명사를 부르는 염불입니다.  저의 염불은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시는 부처의 존호를 부르는 칭명염불입니

다.


-스님 지금까지 좋은 답변 고맙습니다.-

출처/ 선문화 38쪽~49쪽




한국 불교 올바른 생사관부터 정립을

-자재만현스님의 법세계를 다시 본다.-


조우석(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본지 6월호에 만현스님의 인터뷰가 나간 뒤 독자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이 글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현스님의 법세계를 살펴보는 글이다.



"사체(死體) 부패의 첫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자기 분해, 즉 자기 소화이다. 인간 세포는 효소를 이용해 활용이 가능한 분자 단위로 쪼개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세포의 통제를 받던 효소들은 이제 아무런 제한없이 세포를 먹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그러면 사체 안에 있는 액체가 흘러나오게 된다.

일부 박테리아들은 그 액체를 타고 둥둥 떠다니며 사체의 머나먼 변방으로까지 이주한다. 어디를 가도 박테리아가 가득하다. 이제 무대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바로 팽창 단계다. 박테리아가 우리를 먹는 과정에서 가스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생기는 과정이다.

이른바 정상적인 소화과정에서 생겨나는 장 가스(방귀)와의 차이점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그 가스를 밖으로 내보내지만, 죽은 뒤에는 위 근육이나 괄약근이 유명무실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배가 팽창하는데, 박테리아가 그중 많은 복부가 가장 두드러지게 부풀어 오른다. 다른 부분에서도 팽창은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은 입과 성기. 남자일 경우 음경과 고환이 대단히 커진다. 그렇다. 멜론 정도의 크기일까? 사체 부패 2주 정도가 지나면 유충들의 크기가 예전의 쌀알 크기에서 밥알만하게 커진다.

유충들이 우글거리는 소리가 사체에 한두 뼘 이내로 머리를 바짝 들이밀면, 뭔가 소리가 들린다. 유충들의 사체를 갉아먹는 소리. 내 곁을 따라다니며 설명을 해주던 연구원이 알려준다. '꼭 뻥튀기를 갉아 먹는 소리죠' 간혹 몸통 자체가 터지는 때도 있다고 한다.

다시 연구원이 설명해준다. '그 때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그렇게 해서 3주 정도가 되기까지는 장기의 잔해를 분간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수프처럼 된다. 영락없이 노란색의 닭고기 수프다."



어느 서구 지식인의 구상관(九想觀) 하나

마음공부를 위한 불교의 관법(觀法)에는 자비관도 있고, 수식관도 있다지만, 앞에 인용한 글도 훌륭한 관법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구상관(九想觀) 혹은 백골관(白骨觀)…. 읽기 거북스럽다는 첫 느낌 따위는 중요한 것이 결코 못된다. 이 글은 서양의 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미국 테네시대학의 메디컬센터 안에 있는 인체 부패를 연구하는 시설을 꼼꼼히 둘러본 뒤 쓴 냉철한 보고서의 일부다. 지난 해 나온 책 『스티프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메리 로치 지음, 파라북스 펴냄)의 한 대목인데, 저자 특유의 쿨한 유머 감각이 놀랍고 리얼한 묘사 때문에 그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저자는 때로는 불교 경전 『염처경』을 들먹인다. 그것이야말로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뤄진 인간의 신체라는 것, 그리고 오온(五蘊)의 변화에 다름 아닌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문제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실한 관심이리라. 서구사회의 지성들은 이제 동서양의 핵심 고전들에 아무런 편견 없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생사관을 정립하고 있는 중이라는 좋은 증거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 싶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렇다. 생사관, 이것이 정말 큰 문제다.



『선문화』 6월 호에 나는 자재만현 스님(춘천 현지사)의 법문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소개할 기회가 한 차례 있었고, 현재의 조계종단에는 파천황(破天荒)의 문제제기로 들릴 수밖에 없는 그 스님 특유의 법 세계를 의미있게 일별해본 일이 있다.

당시 현재의 한국불교의 상황과 인식의 측면에서 그토록 생각과 법 세계가 다르다면 "창종(創宗)을 못할 것도 없다"는 만현 스님과의 일문일답 내용도 함께 음미했었지만, 고백컨대 미진했던 대목이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생사관의 문제에 대한 소개였다.



사실 지난 6월호의 만현 스님 법 세계의 소개와 함께 얹어봤던 나의 질문은 간단치 않은 것이라고 본다.

1천만 넘는 불자 수를 자랑하는 한국불교이지만, 과연 1천 년 전의 중국 조사선에 매달리면서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 '지구촌 종교' 불교의 상황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었던 것이다. 해서 이번 호 지면에서는 생사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다뤄보려 한다. 만현 스님 법 세계에서 커다란 특징을 이루는 핵심이 생사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만현 스님은 지금 한국불교가 '견성=성불'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대신 견성이란 공부의 첫걸음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철저한 지계(持戒)를 강조함으로써 현재의 조계종과는 수행론에서부터 180도 다르다. 하지만 이런 차이란 결국에는 불교 생사관을 둘러싼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이지만 현재의 한국불교처럼 "지옥과 극락은 마음의 산물일 뿐"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놓고 나머지 복잡한 문제를 나 몰라라 하며 치지도외할 경우 매우 유감스럽게도 두 가지의 문제를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우선 지난 호의 지적처럼 본디의 '장대한 종교'인 불교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이 겨우 마음의 종교(心敎)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 경우 『법화경』 『아함경』 등의 핵심 가르침과 배치된다는 점도 여간 우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즉 『아함경』 속에 등장하는 지옥을 포함한 장대한 세계가 겨우 대중교화를 위한 편의적인 방편 내지 비유 정도로 치부되고 마는 결과란 정말 자가당착의 경우라서 유감스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윤회와 전생의 문제를 포함한 불교 고유의 생사관 문제 역시 미궁의 늪에 빠져버려 거의 '믿거나 말거나'의 수준으로 밀려나 버리고 만다. 역시 대단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서구는 올바른 생사관에 목마르다



현재 한국불교가 봉착한 이런 엄청난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생사관의 정립은 절대로 중요하다. 또 다른 문제는 앞에 언급한 '마음의 종교' 수준으로는 불자를 포함한 수많은 이 시대의 대중들이 당면한 지적(知的) 혼란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대중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커다랗고 정확한 그림을 불교가 그려줄 수 없다면, 소망스러운 목표인 '불교=지구촌 종교'는 역부족이다. 앞에 인용한 단행본 『스티프』도 삶과 죽음을 대면하는 서구사회 엘리트들의 진지하면서도, 그러나 실체에서 거리가 없지 않아 꽤나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노력의 한 자락을 보여주지만, 그런 사례는 실은 부지기수이다.



이를테면 지난 해 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미 하버드대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거의 단행본 『빈 서판』(사이언스 북스 펴냄)만 해도 그렇다. 1000쪽 가까운 묵직한 분량의 이 책, 2003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의 최종 후보작이자 2002년 아마존닷컴 에디터가 선정한 최고의 과학저술로 평가받은 이 책은 현 단계 인간의 마음 내지 영혼을 둘러싼 서구 지식사회 지식의 전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인간 영혼의 실체 규명과 올바른 생사관 정립에 목말라하는 서구 지식사회의 몸부림도 간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영혼과 생사관 문제에 관한 한 그토록 오랜, 그리고 넓고 깊은 노하우가 있는 불교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을 때, 서구사회는 그들의 지적 전통 안에서나마 나름대로 눈물겨운 노력을 경주한다. 물론 자기네 패러다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맴맴돌이를 하면서도, 자연과학의 최신 성과를 토대로 해서 자기들 나름의 영혼관, 생사관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면서도, 결국에는 한계에 봉착한다는 점이 함께 눈에 뜨인다. 이를테면 저자 스티븐 핑거에 따르면, "인간 영혼, 인간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서구의 지식전통 중에 가장 힘이 센 두 개의 이론이 바로 '빈 서판'이론과, '기계 속의 유령'이란 이론으로 요약된다. 문제는 이것이 생물학을 포함해 과학적 토대가 없는 사이비 과학이론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선 빈 서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깨끗이 닦아낸 칠판'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에서 나온 말. 즉 인간의 마음이란 본래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깨끗한 백지 상태라는 신념을 반영한다. 따라서 착한 본성이나 악한 마음은 물론 영원한 진리나 신의 관념 따위란 것도 이 깨끗한 마음에 그림을 그려준 교육과 경험이 심어준 '정보들의 더미' 혹은 '환영(幻影)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빈 서판 이론을 들춰보면 서구사회의 어제와 오늘이 한꺼번에 보인다고 나는 본다. 즉 인간은 본래가 백지상태를 가지고 태어나니까 귀족 - 평민 등의 신분의 차이를 인정할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서구 근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인간 개조'의 헛된 꿈을 가질 수도 있다.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열망 혹은 우격다짐식의 사회적 열정으로 곧바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20세기 초중반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그들이다.



본디 텅 비어있는 인간 마음에 전혀 새롭고도 바람직한 그림을 그려 넣어서(프로그래밍을 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으로, 즉 전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자는 맹목적 욕심으로 마구 치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또 다른 신념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인간의 육체란 마치 시계나 자동차와도 같은 '기계'에 불과하지만, 이 속에 담긴 마음이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기 마련인 별도의 실체라고 굳게 확신을 하는 또 다른 신념이다.

즉 육체가 공간 안에 존재한다면, 마음은 물리적 공간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제3의, 비물질적인, 그리고 불멸의 존재라서 육체 따위와는 분리가 가능한 그 무엇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떠신지. 이런 분석에 왠지 비아냥거림 내지 조롱의 분위기가 들어있다는 점이 가늠이 되시는지…. 즉 인간 마음을 보는 이런 두 개의 신념체계는 인지심리학과 언어심리학 분야 서구 최고의 학자인 핑커가 보기에는 가짜 과학에 불과하다. 왜? 그는 인간의 진정한 주인은 유전자, 즉 DNA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핑커가 보기에 이 진정한 주인공인 유전자를 제쳐놓고 인간 본성을 '텅 빈 칠판'이네 뭐네라고 섣부르게 바라보거나, 마음이란 것을 기계에 다름 아닌 육체 안의 어떤 유령 내지 실체 따위로 보는 관념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핑커의 이론이 또 다른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한계란 '생물학적 결정론'을 말한다. 즉 인간이란 존재를 유전자의 장난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생각 말이다. 이 경우 적지 않은 당혹스런 결론들을 피할 수 없다. 신적인 높이를 다투는 인간 고유의 위대함이나 성취란 것도 단박에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지옥 - 극락은 '마음의 산물' ?



자, 복잡한 사안을 두고 성급하게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자.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서구의 지식사회는 그들 나름의 제한된 틀 속에서나마 인간 생사관을 정립하려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 종교를 가진 사람, 아니 가진 사람들을 막론하고 서구의 근대과학이 적지 않은 일정한 '세속 종교'의 구실까지해내고 있다는 발견도 해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설 것이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들의 직무유기부터 탓해야 할지 모른다.



그 점에서 만현 스님의 지적대로 현재의 한국불교가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자리가 곧 극락"이며, "지옥과 극락이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식의 단순논리는 도무지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섣부른 단순논리를 앞세울 경우 불교는 거의 유사 불교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 올바른 생사관에 목말라하는 우리 시대의 갈증을 외면하는 결과를 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혹세무민에 불과한 무당이나 도인들의 검증되지 아니한 신통력에 빠져들어 헛인생을 살 가능성도 농후하다. 확실히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그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세계에서 헤매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이 정신 없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세상, 동시에 법이 죽어가는 말법(末法)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 세상이란 없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라고 믿는 극도의 허무주의 속에서 그저 부대끼며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수행자들의 경우 무애(無碍)라는 높은 경지를 자신의 것인양 희롱하며, 음계를 지키지 않는 막행막식에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만현 스님의 메시지가 전하는 불교의 모습은 심히 장대 장려하다. 엄격한 위계를 가진 장엄한 세계는 거의 전율스럽기 조차하다. 또 깨달음의 단계와 맞춰 수미일관하는 틀을 가지고 정교하게 움직인다. 윤회와 전생이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지옥이나 하늘과 천상은 빼도 박도 못할 위계질서 속에 층층으로 구분돼 있다. 54개 층의 하늘로 낱낱이 구분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하늘 세계란 모두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상에 불과하다. 훨씬 아래의 지옥도 존재하며, 제대로 명부에도 들지 못해 중천을 떠도는 무주고혼들의 중음(中陰)의 세계 역시 엄연하다. 반면 부처와 보살 역시 구체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실은 적지 않은 불자들이 당혹스러워하는 핵심 대목이기도 한데, 만현 스님에게 부처와 보살들은 그저 추상적인 법신(法身)의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현존인 보신(報身)의 차원에서 지금 여기에 여여하게 존재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는 지금도 인도 영축산의 영산정토에서 법을 설하고 있으며, 보살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 화두를 타파한 수행자가 자력의 힘으로, 즉 인간의 능력으로 오를 수 있는 구경각의 단계는 아라한(聖衆) 단계일 뿐이며, 그 이후 부처의 가피라는 타력의 힘으로 비로소 보살 단계에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라한이란 나를 죽이는 무아의 공부로 들어가 중생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임이 분명하지만, 아라한의 단계는 결코 골인 지점이 아니다. 그 단계란 아직은 '작은 열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놓치면 안될 대목은 이런 작은 열반이란 다양한 수행에서 가능한 세계이다. 경계가 온통 뒤집힘으로써 환해져 자성(마음자리)이 드러나는 것은 조계종의 핵심 수행법인 간화선으로도 가능하지만,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밀교 수행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라한 단계 이후의 '큰 열반'의 세계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작은 열반'과 '큰 열반'



아라한이 '작은 열반'에 만족하지 않고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보다 높은 위(位)인 보살 붓다가 되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와야 한다. 아라한이 되고 난 뒤 다시 대비심을 발해서 자기의 원력에 따라 이 세상에 몸을 받아온 뒤에 후퇴 없는 수행 정진을 거듭해야 한다. 그 뒤 결정적으로 부처의 위신력이라는 절대적인 가피에 의해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다음의 단계가 바로 보살.

  "아라한이라 해도 성중 하늘에 태어났다가 남섬부주(인간세상)에 다시 오면 잘못된 길에 빠져들 경우 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5쪽)는 만현 스님의 지적도 도를 이뤘다는 수행자들 사이에서 섣부른 법을 설하는 행위에 대한 천둥소리로 들어야 옳다.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불과를 증한 대성자는 엄청난 빛으로 이뤄진 자신의 불신을 무아 속의 절대계, 즉 상적광토(常寂光土)인 부처의 나라에 비로소 두게 된다.

흥미롭다. 고백하지만 미욱한 나는 평소 의문 하나를 품어왔다. 인간 생사에 관한 의문과 연결된 것인데, 밝히자면 이렇다. 화두를 타파했다는 수행자들의 마음 세계란 어느 정도일까? 확철대오를 했다는 선사들이 도달한 깨침의 수준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또 전등조사들의 깨침이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일까? 여전히 미욱한 나는 이런 의문 앞에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유는 경계에 매달려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를 전하기 어렵다는 말 앞에 질려서 그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현 스님의 법문 이후 앞서의 의문들은 조금은 명쾌해졌다. "경계가 뒤집혀 온 세계가 안팎이 훤하여 공이 되는 세계"(『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4쪽)인 견성에도 강약의 단계가 여럿 있다. 크게 깨쳐 오매일여가 되어 꿈에도 법문을 하는 단계에서 더욱 계율을 견지하여 두타행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화두 타파 이후 아라한에 이른 뒤에도 무수한 단계가 더 있으며, 이런 단계는 인간의 노력이라는 자력 외에 타력의 부처님 가피가 전제가 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이 경우 불교의 세계란 더 할 나위 없이 장려해지고 지옥과 극락이란 마음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는 섣부른 통념에서 벗어날 경우 불교세계란 진정한 위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만현 스님에 따르면 지옥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록 우리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영체(영혼체)세계의 남방 지장궁 방향에 있다는 점, 『지장경』에 등장하는 지옥이란 분명 존재하는 지옥의 일부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중 중지옥의 한 곳의 경우 열 손가락 손톱 밑을 대꼬챙이로 찌르는 그런 지옥도 존재한다. 이곳에서 우리의 가련한 영체는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까무러쳐도 하루에도 만 번이나 죽고 다시 만 번을 되살아나야 하는 지독한 벌을 받게 된다.



앞에서 영체를 말했지만, 자재만현스님에 따르면 영체야말로 진짜 생명체로 파악된다. 매미가 허물을 벗을 때 빠져 나가는 몸이 진짜 매미이듯, 사람이 죽을 때 사대(四大)로 이뤄진 것에 불과한 거짓 몸뚱아리를 떠나는 진짜 생명체가 바로 영체이다. 따라서 이런 파악에서 앞서 언급했던 서구의 심리학자 핑커가 냉소적 시각으로 언급했던 육체 - 마음의 이분법은 보다 큰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다음 자재만현스님의 발언을 귀담아 들어보자. 불교가 훨씬 위대한 종교 세계로 성큼 내 안에 들어온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생에 선근공덕이 있어 온갖 마장을 이겨내고 정진을 멈추지 않아 크게 도를 깨친 이라도 음행을 저지르며, 또는 불보살과 지옥 - 극락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을 뿐이라는 망언을 통해 부처님과 법을 왜곡 능멸한다면 무간지옥에 빠져나올 기약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행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궁극에는 자정기의해서 생사의 해탈을 바라는 위대한 종교입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43쪽)



이밖에 변화술에 능한 천마(天魔)의 속임수로 부처님을 보았다는 등속의 언술에는 상대적으로 초연해질 수도 있다. 확실히 우리 중생들은 과거의 도인들이 보여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인 천안통(天眼通),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알아채는 타심통(他心通), 나와 다른 사람의 전생을 아는 숙명통(宿命通)을 포함한 신족통, 누진통 등의 신통력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재만현스님은 이런 인간의 앞날을 말하고 병을 낫게 해주는 영통은 주로 저급한 영이 인간 몸에 빙의하여 생기는 수준의 신통력이라는 것이 만현 스님의 말이다. 하지만 아라한 성자만 돼도 빙의가 일절 없으며, 영체에서 보름달 같은 백색광이 뿜어져 나와 일체의 귀신이나 외도의 하늘 신들이 혼비백산한다는 메시지는 명쾌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생사관을 전제로 하고 우리가 알만한 동서고금의 주요 수행자와 철학자들의 깨침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도 이 책에는 꽤 등장해서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이를테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그는 '자성은 본 사람'으로 규정된다. 11세기 전설의 성자인 밀라레빠. 그는 정토의 상품상의 보살로 왕생했다. 또 인도의 용수·마명·무착·천친·호법, 중국의 현장 법사·혜원, 우리나라의 원효·의상·서산·함허 스님들의 경우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한 정토 보살들이라고 언급된다.



이런 언급이란 '큰 종교'의 본래 모습을 회복한 불교의 세계가 동서고금의 주요 수행자들과 종교인들을 배척하지 않고 외려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불교 외에도 윤회를 말하는 등 불교에 버금가는 철학을 가진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경우 그 세계의 위대한 성자들도 "중국이나 한국 불교의 대선사라는 분들보다 못할 게 없고"(『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3쪽)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아라한급이나 상품 보살급의 수준"(『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4쪽)이라는 발언은 정말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런 발언은 우리 한국불교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 자랑에 정신 팔리지 말라는 것, 그러나 그들은 '작은 열반' 에 이르렀을 뿐 진정 불신(보신과 법신)을 구족한 부처의 존재와는 거리가 있다는 당당한 발견으로 이어진다. 자이나교·힌두교·유교·유태교·이슬람교 등의 수행법으로도 훌륭하게 삼매에 들 수 있고, 윤회를 벗어난 초인이나 도인이 될 수는 있으나 부처와 부처의 위대한 법에 귀의하지 못한 '외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말합니다. 유교의 거경궁리, 힌두교의 유가 탄트라, 이슬람교의 수피즘의 명상수행, 유태의 카발리즘 수행으로도 우주의 궁극이나 존재의 근원까지를 깨칠 수 있습니다. 힌두의 요기인 부레 바바, 조선의 유가도인인 정북창 같은 도인도 이 세상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붓다는 아닙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 135쪽)


결론 - '백안시'를 넘어서 '논쟁'을


나는 조금은 가늠하고 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라는 법문집과 함께 돌연 나타난 자재만현스님에 대한 세상의 두 가지 시선을…. '두 가지'란 만현스님의 법문이 외도나 사이비에 다름아닌, 따라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 세계라는 시선이 우선이다. 지금 조계종의 왜소한 철학과 열악한 자기방어의 논리를 감안한다면 응당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의 가슴 저 밑바닥에는 또 다른 '찬탄의 시선'과 박수 역시 은근히 자리잡고 있음을 나는 안다.



이렇다할 불교서적이 없는 상황에서 만현스님의 법문집은 출간 5개월여 만에 이미 5판을 찍었다. 불교서적 부문 1위 자리 고수는 그 때문이다. 그런 여세로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방영되는 불교TV 법문도 적지 않은 대중적 반향을 보이고 있다. 법문에는 부산 대구 제주 등지에서 올라온 불자들로 만원을 이루는 현상도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대중들은 새로운 목소리에 목말랐다는 증거다. 당연히 만현스님 법문이 경전의 뒷받침과 독자적인 수행 속에 나온 사자후임을 조금은 가늠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보는 선불교의 표어에 반해 만현스님은 마음을 철견하는 것은 물론 이후 무량겁을 보현의 광대행원을 실천해 보살도를 완성할 것을 말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이 때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자기의 불신을, 즉 빛의 존재를 얻어야 비로소 부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윤회를 벗어나(공을 지나) 적멸의 저 편에 보살이 가는 서방 극락정토가 있다고 언명한다. 육도(六道)생사를 말하지 않는 어떤 교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이비요, 외도라는 결론 앞에 우리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더할 수 없이 신선하기도 하다.



본디 1970년대까지 법성 스님이라는 법명을 썼던 그는 오랜 수행과정과 함께 법명까지 바꾸고 다시 세상에 나왔다. 백 번을 양보한다 해도 그의 법 세계는 기존의 협소한 불교 세계에 신선한 자극이요,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시 못할 태풍임이 분명하다. 한국불교가 해야 할 의무란 이런 법 세계에 대해 가슴을 연 대화와 함께 이해의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옳을지 모른다.





붓다뉴스 2005년 06월 09일자 -
"'견성(見性)이 수행의 끝이다?" 



우리는 수행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혹 깨달음을 얻는 것만이 수행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현 스님(춘천 현지사 회주)이 전하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보자.1960년 부산에서 출가한 뒤 ‘법성’이라는 법명으로 조계종 포교부장을 지냈던 스님은 이후 종적을 감추고 30여년간 은둔 수행해 왔다.

최근 ‘염불삼매 속에서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들었다’라는 부제로 펴낸 책에서 스님이 전하는 ‘붓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금의 불교는 그 내용이나 외양에 있어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견성(見性)이 곧 성불’이라는 인식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불교수행의 목표가 아니라, 부처가 되는 공부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스님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도(道)를 이루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고, 다음 생에 다시 원력 수행해 보살이 되고, 또 다시 수행을 통해 보살도를 완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수행승은 무엇보다 음계(淫戒)를 지켜야 하며, 효(孝)를 다해야 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명(稱名)염불이라고 합니다. 길 잃은 자식이 어머니를 찾듯 간절히 불러야 합니다.

부처님 상을 마음 속으로 그려가면서 염불정근을 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도 끊어짐 없이 염불이 되어야 진정한 염불선입니다. 염불선은 보살의 경지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 밖에도 책에서는 ‘도올 망언에 대한 일갈’ ‘현지궁 현지사 수행일지’ 등의 글이 실려 있으며 ‘독자분들의 질문에 답한다’ 코너를 마련해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2005년 6월 9일 





 부산일보 2005년 06월 04일자 


부처를 불렀다 그리고 만났다



나는 확실히 말합니다.



최초 불이시요,남섬부주 교주이시고,삼천 대천 세계 총교주이시며,모든 붓다 중 붓다이신 불세존 석가모니 불께서 일러주신 수행법이 염불선입니다. 그리고 시방의 모든 붓 다들께서 역시 염불 공부할 것을 간절히 권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염불선은 가장 훌륭한 수행법입니다.

춘천 현지사 회주 만현 스님(사진)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펴냈다. '염불삼매 속에서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들었다'라는 부제 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스님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전한다. '견성이 곧 성불'이라는 선가의 기치는 분명 잘못됐으며,깨달음은 불교수행의 목표요 종착점이 아니고 붓다되는 공부의 시작에 불 과하다고 강조한다. 화두를 타파했지만 염불선으로 방향전환한 것에 대해 스님은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한다.

염불은 '아미타불 아미 타불!'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명염불이라고 합니다. 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할 수만 있다면 윤회를 벗어나 극락정토까지 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그것을 간절히 바라고,그 원이 이 루어질 수 있는 염불수행을 일으켜야 합니다.

스님은 이 책에서 수행승들이 무엇보다 음계(淫戒)를 지킬 것을 강조하는 한편 모든 불자들에게는 부모님에게 효를 다할 것과 경전 읽고 염불하는 데,특히 신상광명(身上光明)을 관하면서 칭명염 불할 것으로 적극 권장하고 있다.  
 
임성원기자






중앙일보 2005년 5월 20일자 -
"경전공부는 멀리하고 견성이 수행의 끝?"



은거 수행 30년, 현지사의 만현 스님 "선불교 머문 불교계 거듭나야" 일갈



1970년대 중앙 종단에서 활동하다 자취를 감춘 뒤 은거수행을 해온 스님이 30년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교정화 작업으로 유명한 청담 스님을 모시고 포교부장을 지냈던 만현 스님(69). 60년 부산에서 출가한 뒤 '법성 스님'으로 통했으나 법명까지 바꾸고 나타난 그는 새 책 '21세기 붓다의 메시지'(현지사)를 통해 불교계의 갱신을 요구하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선종.교종.밀교가 축소일변도로 뒤섞인 현재의 '통(通)불교'를 유일한 전통인 양 고수하는 지금의 수행방식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남방 근본불교.위파사나 등이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또 화두 타파와 견성(見性)은 겨우 수행의 첫 걸음인데도 그 이후 공부와 계율을 무시하는 태도도 문제다. 즉 내용과 외양에서 '마음 종교(心敎)'정도로 축소된 채 불교의 큰 세계를 잊어버린 자기망각이 더 근원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춘천 현지사에서 만난 그는 무엇보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로 경전 등한시, 즉 교학에 대한 무지를 질타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 뿐이고 만족하는 그 자리가 바로 극락"이라고 가르치면서 '법화경' '화엄경'에 언급된 지옥.극락과 불보살까지도 '교육용 발언' 정도로 무시하려드는 짧은 인식이 그 대표적이다.



"그 결과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씨가 그의 책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를 통해 큰 스님들을 '미친 ×'이라고 욕하고, 지옥과 극락은 없다면서 부처를 능멸해도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은 올바른 법을 비방하는 구업(口業)의 극치가 아니던가."



만현 스님은 "유학자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통해 윤회설을 비판한 뒤 조선시대 불교가 대응을 못해 위축되온 상황의 반복이 지금 21세기 한국불교의 답답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참선.염불.계율은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강조된 출가자의 기본 덕목이라고 말했다. 이때 염불은 몇 해 전 입적한 청화 스님이 염불선과 다르다. 즉 청화 스님의 염불은 아미타불을 부르는 '실상 염불'인데 비해 자기의 염불은 부처님 법신(法身.우주 절대계에 존재하는 부처)을 외우는 칭명 염불이라서 수행법도 다르다는 것이다.

만현 스님은 "나의 불교비판은 지금의 불교가 9세기 당나라 선불교의 등장 이전의 흐름에 대해 더 충분하게 열리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그의 발언들은 현대불교신문 등에서 일부 선보인 바 있다.

춘천=조우석 문화전문기자사진=안성식 기자

2005.05.20 21:05 입력 / 2005.05.21 04:49 수정





붓다뉴스 2003년 08월 20일자 - "견성은 공부의 시작일뿐 염불·禪으로 결판내세요"



만현스님(춘천 현지사 회주)

                    -  견성은 공부의 시작일뿐 염불·禪으로 결판내세요


오늘의 한국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이도 왜곡되어 있습니다.

생사관(生死觀) 하나 뚜렷하지 않습니다. 특히 승려들의 지계정신은 심각할 정도로 타락해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크게 눈뜬 성자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에서는 말을 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요, 마음자리가 극락이라 합니다.

지옥과 극락을 마음의 산물로만 봅니다. 마음 밖의 지옥, 극락, 불·보살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안팎이 있다는 말입니까? 공(空)에 안팎이 있습니까? 마음은 시방법계를 싸고 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지옥과 극락은 실제로 있습니다. 불, 보살도 계십니다.

윤회도 사실입니다. 200여 불교 경전에 지옥 등을 분명히 말씀하신 부처님은 거짓말장이가 아닙니다. 무아속 삼매에 들어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간략히 줄여 전합니다.

공부해서 뚫은 바를 수행인의 양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지옥은 있습니다.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체세계의 남방 지장궁쪽에 있습니다. 제가 삼매에 들어보니, 지장본원경에 나오는 지옥은, 그 일부에 불과합니다. 중지옥, 무간지옥 중 그 한 군데만 소개할까요?

열 손가락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그런 지옥도 있습니다. 하루에도 우리의 영체는 고통으로 까무러쳐서 만번 죽고 만번 살아날 정도입니다. 그 고통은 육신이 당하는 고통과 똑 같이 느껴집니다. 오역죄, 사중죄를 지으면 보다 무서운 무간지옥으로 갑니다.

그곳의 수명은 한량없는 시간인 겁(劫)으로 정해집니다. 출가 수행하는 스님들이 음행죄를 지으면, 즉 단 한번이라도 사음죄를 범했다면 일단 중지옥이나 무간지옥에 떨어집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전생에 선근공덕이 있어 겹겹이 몰려오는 온갖 마장을 이겨내고 정진 잘 해서 크게 도를 깨친 이라 하더라도 음행을 저지르거나, 불보살과 지옥 및 극락이 없고 이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과 법을 모독, 능멸한다면 그것은 무간지옥에 떨어져 미래제가 다해도 나올 기약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불·보살님들께서 누누이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여러 선행을 하라’는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을 가르칩니다. 궁극에는 생사의 해탈을 바라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여기에는 자력(自力)과 타력(他力) 수행이 구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자기 구제후 남을 제도하는 게 순서입니다.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어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무명의 껍질이 벗겨져 자성이 들어나 견성한 후 보임(保任)을 잘 마친 이가 아라한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라한의 성과(聖果)를 얻으면 윤회를 벗어난 세계에 납니다. 인간은 구조상 아라한 이상은 오를 수 없습니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대아라한과를 증하셔서 윤회밖 성중 제 1하늘에 계십니다. 자성(마음자리)이 드러나는 것은 간화선, 위빠사나, 밀교 수행으로도 가능합니다.

이때는 경계가 뒤집혀 온 세계가 훤하여 공이 됩니다. 그러나 깨침에도 강약이 있습니다. 목숨을 떼어놓고 사생결단해야만 자나 깨나 한결같은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됩니다. 이러한 정도가 되어야 아라한이 됩니다. 그러나 붓다는 아닙니다. ‘견성 즉 성불’(見性卽成佛)이란 말은 위험한 표현입니다. 화두 참구를 통해 얻은 견성은 이제 공부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견성한 이라도 성중 하늘에 났다가 남섬부주에 다시 와 잘못된 길에 빠져 악도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10지 보살도 붓다의 진신(眞身)을 볼 수 없습니다. 무량광(無量光)을 보고, 안으로 육종진동이 없으면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없고, 무아속 삼매에 들 수 없습니다. 도를 이루었다는 분들은 이러한 경지가 되지 않고는 대망어(大妄語)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라한 성자는 조그마한 열반에 만족치 않고 법화경의 부처님 가르침 뜻에 따라 보다 높은 위(位)인 보살이 되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 몸 받아 옵니다. 보살 8지가 되어야면 부처님은 ‘보살’이란 칭호를 부치십니다. 이 경지에 올라야 신장(2명)이 호신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됩니다. 여자라면 남자 몸을 받아 극락세계에 납니다.

우리나라의 원효 스님, 11세기 티베트의 전설적인 성자 밀라래빠는 극락에 왕생한 보살입니다. 티베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극락세계 상품보살의 후신입니다. 보살이 남섬부주에 여러 번 생을 받아와 붓다(붓다는 삼계의 법왕이다)를 이루는 데 있어 억겁다생의 업장과 습기, 악연 그리고 탐·진·치 삼독의 뿌리가 녹아져서, 털끝 만큼이라도 그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불신(佛身)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불과(佛果)를 증할 수 없습니다. 불신은 열반광(무량광)이라고 하는 빛으로 이루어집니다. 붓다는 빛으로 계십니다.

빛이시기에 삼세의 여래는 일체가 동일합니다. 한 티끌 한 생각이 같습니다. 불과를 증한 이는 거짓 몸뚱이와 네 가지 영체가 모두 빛덩이가 되어 자기 불신과 계합합니다. 더 깊은 말씀은 여래의 밀장(密藏)이기에 함구합니다. 불신을 이룬 빛은 삼천 대천세계를 두루 비춥니다. 변조광명입니다. 비로자나 법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새벽 별을 보고 깨쳐 붓다가 되었다 합니다. 이 말은 선가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깨쳐서 확철대오 했다 해서 붓다라 할 수 없습니다.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불신을 얻어야 비로소 붓다입니다. 오랜 기간 여러 관문을 통과해서 불신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오견성은 아라한 자리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불신은 백천만억 화신을 나툴 수 있습니다. 백천삼매, 나아가 해인삼매, 대적정삼매를 자재하시고 팔만사천 신통을 구족하십니다. 지혜와 복덕, 자비자체가 됩니다. 현신할 때의 본불신은 32상80종호 그 이상입니다.

그 모습과 일거수 일투족은 자비의 극치이시며, 한 순간 뵙기만 해도 삼재와 업장이 소멸되는 선정자체이십니다. 교종에서는 이 몸을 보신(報身)이라고 합니다. 제가 말하는 불신은 법신과 보신을 합친 개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안팎, 마음속까지 비추는 그런 빛으로 이루어졌고, 대적정삼매에 항상 들어 계심으로 미래제가 다하도록 멸도할 수 없습니다.

붓다 이룬 이가 혹 출타할 때에는 백천의 신장님들이 앞뒤를 호위하는 광경은 장관입니다. 부처님만이 소위 법신, 보신, 화신 등 삼신을 구족하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계의 지존이자 남섬부주의 대교주이시며, 구원실성 최초불(久遠實成 最初佛)이십니다.

그후 수보리, 사리불 존자 두 분께서 처음으로 불과를 증득하셨습니다. 한 분의 아라한, 보살을 내는 데 있어 절대적인 공이 있는 사람은, 지옥과 축생 업을 벗고 곧 천상에 납니다. 하물며 불과를 증한 대성자가 이 땅에 출세함에 있어 큰 공을 세운 이는 극락까지 왕생할 수 있답니다. 이 대성자에게는 무한한 권능이 주어집니다. 여러분, 윤회고를 벗어나 도를 이루려면 첫째 계율, 그 중에서도 ‘음행’을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렇게 한다면 성불은 불가능합니다.


 설사 도를 이루어 보임중인 수행자라도 음행을 무애(無碍)로 보아 저질렀다면, 마치 한 컵의 물에 똥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그 물을 마실 수 없는 것처럼 만사가 무위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마장을 막아줄 수 있는 대선지식 밑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한 효를 다하고 공부 이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금강경 같은 대승 경전을 독송하고 진언과 염불을 해야 합니다. 물론 선(禪)으로 결판을 내십시오. 목숨 떼놓고 공부해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비었어라 비었어라 삼천대천 세계가 비었어라.
먼지하나 티끌하나 없는 공의 세계 맑고 깨끗한 청정자체 환희 환희 환희 그 자체인 것을.
 (만현스님의 ‘대적정삼매송’중에서)

정리=김재경 기자 jgkim@buddhapia.com

기자가 본 만현 스님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 춘천댐 상류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한 아담한 절 현지사는 2년전 새로 지은 현대식 사찰이었다.

제방의 선원과 토굴에서 오랫동안 수행에만 매진해오다 3년전부터 이곳에서 법을 펴고 있는 현지사 회주 만현(滿顯) 스님은 아직 불교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하지만 최근 춘천 불교방송을 통해 스님의 법문이 전파를 타면서 법을 구하는 출·재가 수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스님의 방송 설법은 올해로 세 번째인데, 방송이 나갈 때마다 궁금해 하는 불자들의 전화가 방송국과 신문사로 쇄도하곤 했다. 그만큼 만현 스님의 법문은 어느 절에서도 듣기 힘든, 체험해서 우러난 진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만현 스님이 강조하는 법문은 ‘견성은 부처되는 공부의 시작일 뿐이며, 견성한 이라도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부처님과 불법을 모독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특히 스님들의 경우 ‘사음’은 금기해야 하며, 참선 수행을 통해 견성한 일들은 ‘극락과 지옥이 없다’고 하는 등 경전에 어긋나는 말을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현 스님은 수행법과 관련해서는 간화선 수행 못지 않게 위빠사나, 밀교 수행법을 높이 평가하면서 염불선을 권하신다. 성불(成佛)에 대한 견해도 독특하시다. 수행자가 남·북방의 다양한 수행법으로 깨달아도 아라한과(果) 이상은 증득하지 못한다고 한다.

진정한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보살에 이어 불신(佛身)과 하나되는 더욱 더 어려운 공부과정이 남아있다는 설법이다. 1960년 부산 선암사에서 율사인 석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만현스님은 통도사 경봉 선사 문하에서 화두 공부를 했으며, 조계종 총무원 교무, 포교, 재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동산반야회 법주인 무진장 스님과 함께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서 전국에서 설법했으며 해동불교대학 학장을 맡아 재가자 포교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20여년전부터는 만행과 토굴 수행 등으로 오로지 성불을 향한 일념으로 매진해 왔다. 비구, 비구니 제자 8명을 지도하는 한편 69세의 세수에도 매일 깊은 삼매에 들어 정진의 끈을 늦추지 않고 계시다.

2003-08-20





YTN / 2010년 초파일 현지사 보도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   입력시각 : 2010-05-21 17:26 /춘천 현지사  





[앵커멘트]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입니다.연휴 첫 날을 맞아 강원도내 각 사찰과 암자에서도 많은 불자들이 모여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자비의 광명이 온 누리에 가득하길 기원했습니다.홍영기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춘천 근교의 한 사찰.넓은 경내와 5월의 푸른 하늘을 가득 메운 붉은 색의 봉축 초롱이 연등축제를 연상케 합니다.부처님 오신 뜻을 되새기고 깨끗한 마음의 연꽃으로 피어난 활기 넘치는 소망의 등입니다.

사찰 경내를 붉게 물들인 10만 2,000여 개의 초롱등이 이처럼 장관을 이루면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전국에서 모인 2만여 명의 불자들은 가족들의 이름이 적힌 초롱등을 내걸고, 나라의 번영과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인터뷰:김학수, 경기도 광주시 능평리]"우리들의 가족 건강발원과 아이들의 모든 학업성취 또 바라고자 하는 발원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서..."법당안을 가득 메운 불자들은 부처님께 꽃을 봉양하고 두손을 모아 탑돌이를 하며 불가의 진리를 되새겼습니다.


 춘천=연합뉴스 / 2010년 초파일 현지사 보도



부처님오신날 10만등 축제 

[ 2010-05-21 14:46 송고 ]













(춘천=연합뉴스) 이상학 기자 = 부처님오신날을 맞은 21일 강원 춘천시 사북면 현지사에 10만여개의 등이 내걸려 눈길을 끌고 있다. 2010.5.2

1hak@yna.co.kr

(끝)





더리더 / 2010년 초파일 현지사 보도




“붓다의 길로 가는 인연을 지어주기 위해서다”


영산불교 현지사 자재만현 큰스님 법어 내려



▲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은 21일 강원 춘천시 사북면 현지사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불성이 온 누리에 가득하길 기원하는 봉축 법요식이 열리고 있다. ⓒ2010 더리더/전경해


【춘천 더리더】영산불교 현지궁 현지사 자재만현 큰스님은 21일 불기 2554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신 뜻은 중생들에게 죄 짓지말고 착하게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붓다의 길로 가는 인연을 지어주기 위해서다”라고 법어를 내렸다.

 

▲ 영산불교 현지궁 현지사 자재만현 큰스님. ⓒ2010 더리더/전경해




자재만현 큰스님은 이어 “오늘같이 거룩한 날, 정법의 새 시대를 열어갈 것을 세계 불교계에 엄숙히 선언 한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금생도 다음생도 복 되게 살면서 극락왕생의 꿈을 이루시라”고 축원했다.


또 “멀리 해외와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대웅보전 개원을 봉축하기 위해 찾아 온 불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은 21일 강원 춘천시 사북면 현지사에 부처님의 자비와 불성이 온 누리에 가득하길 기원하는 10만여개의 연등이 웅장한 장관을 이루고 있다.ⓒ2010 더리더/전경해


이날 전국 2만여 곳의 사찰에서 봉축 법요식이 일제히 거행된 가운데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주지 성광스님) 최고의 청정수행 도량으로 알려진 현지사에서도 ‘대웅보전 개원 봉축 대법회’가 열렸다.

이날 법요식에는 멀리 일본과 제주, 부산, 대구, 강릉, 삼척, 춘천 등 무려 2만여명의 불자들이 참석해 부처님의 자비를 기렸다.



성광 주지는 봉축사를 통해 “부처님의 가피가 온 누리에 널리 퍼지고 나라의 안녕과 신도들의 무병.화목을 기원하자”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1부 점안 봉불식, 2부 자재만현 큰스님 설법, 3부 다스림 실내 국악단과 머루와 다래, 현지사 합창단의 특별공연이 펼쳐졌다.




특히 현지사의 북한강 주변과 경내는 대웅보전 개원과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기 위해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10만2천여개의 봉축 연등의 대작불사를 봉행해 장관을 이뤘다.


 
 
 
한편 현지사는 광명만덕 큰 수님과 자재만현 큰 스님이 정법을 펼치고 중생구제와 호국불교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지난 2000년 5월 38선 이북인 춘천과 화천의 경계인 화악산 자락에 건립한 정법 도량이다.



 

특히 현지사(顯智寺)는 ‘부처님의 지혜가 드러나는 절’이란 의미로 영산 당시의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이 땅에 몸 받아와 불과를 이룬 도량이다.


전경해 기자 dejavu57@hanmail.net





춘천=뉴시스】/ 2010년 초파일 현지사 보도


붉은 초롱등으로 물결치는 현지사기사입력 2010-05-20 16:47





 춘천 현지사, 석가 탄신일 10만등 '연등' 축제

    기사등록 일시 [2010-05-20 17:32:28]





【춘천=뉴시스】한윤식 기자 = 영산불교 현지궁 현지사가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 10만등 연등 축제를 개최한다.이날 오전 9시 강원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 현지사 본사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일본을 비롯해 서울과 제주, 대구, 부산 등 전국에서 2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대웅보전 갱원 봉축 대법회와 함께 열리는 이번 행사는 1부 점안 봉불식과 2부 자재만현 큰스님 설법에 이어 3부에서는 다스림 실내 국악단과 머루와 다래, 현지사 합창단의 특별공연이 펼쳐질 예정이다.

특히 사찰주변을 장엄하게 수놓아져 있는 10만2000개의 초롱 연등은 북한강변의 풍경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연출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현지사 관계자는 "이번 부처님 오신 날과 대웅보전 개원을 봉축하기 위해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봉축 10만등 대작불사를 봉행하게 됐다"며 "봉축등에 정성을 담아 축하해 준 모든분들에게 천배, 만매 이상의 복등으로 상을 내려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ysh@newsis.com






  부처님 맞이 준비에 부주한 현지사

    기사등록 일시 [2010-05-20 16:46:13]


【춘천=뉴시스】한윤식 기자 = 석가탄신일을 하루 앞둔 20일 강원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 현지사 신도들이 연초롱등으로 단장하며 부처님 맞을 준비에 분주하다.<관련기사 있음>ysh@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