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7일 수요일

[영혼체 윤회론]불교가 망한 원인 무아의 잘못된 해석







영혼체 윤회론을 선언하며!



나 자재만현은 비아非我인 영혼체가 윤회의 주체임을 선언합니다!지난 2000여년 간 왜곡되어온 무아설無我設을 바로 잡고,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윤회할 수 있다는 무아윤회설無我輪廻設을 완전한 사설邪設로 단정하고 영원히 폐기 처분합니다.

영산불교 정법의 이름으로 유아윤회설有我輪廻設 - 영혼체 윤회론을 공식적으로 불교의 교설로선언합니다.우리 영혼체는 인간의 실체로서 원래 본체계의 존재입니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상락아정常樂我靜의 아我가 바로 청정무구한 영혼체입니다. 

그러나 무량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분별이 일어나고 욕심이 생기고죄업을 지어 우리 영혼체에는 업장 등 비본질적인 것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상태의 영혼체를 우리는 비아非我라고합니다. 

그래서 유아윤회설은 성격상으로는 비아윤회설이 되고 내용적으로는 영혼체 윤회론이 됩니다.우리 불교가 고향인 인도에서도 사라지고 전세계로활발히 뻗어나가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잘못 해석되어온 무아설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무아설이 잘못 해석되었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불교가 망한원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잘못해석된 무아설을 바로잡고 '영혼체 윤회설을선언하여 정법의 새 시대를 열어가고자 합니다.

무아설이 바로서야 부처님의 실존도, 윤회 . 해탈계의 존재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무아설의 바른 해석은 정법불교의 출발점입니다.무아설에대한 새로운 교설로 인하여, 그 동안 잘못해석된 무아설을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인정해온 기존 불교계는 물론 학계, 종교계 전반에 걸쳐 만만찮은파장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법의 산고産苦를 위한 아픔으로 감수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를계기로 불교 정법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하루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할 것입니다.이에 불자 여러분의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이 책자을 발간하오니, 우리 불교계 모두가 '잘못해석된 무아설의 포로'에서 벗어나, 깨어있는 불교도로서 정법의 길에 적극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끝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이 책을 집필하느라 노고를아끼지 않은 혜운 법사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불자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늘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54년 사월 초파일                                             
영산불교 현지사                                                  

자재 만현




책을 펴내며

참으로 길고긴 어둠의 터널이었습니다.'무아설의왜곡'이 정법의 햇빛을 받기까지, 몇 십 년도 몇 백 년도 아니고무려20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 부끄러움의 긴 세월 동안 내로라하는 학자, 선지식, 큰스님들이 많이도오셨다 가셨지만, 그 지혜의빛이 어둠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부처님의 법통 태자와 문수보살 법왕자의 인연을 위해 남겨두었던 것일까요?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땅 대한민국에서 사랑하는 두 분 제자 가섭존자 광명 만덕 큰스님과 아난존자 자재 만현 큰스님을 보내주시어 정법의 새 시대를 열게 해주신 거룩하신 우리 교주 불세존께 오체투지로감사와 예경을 올리옵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인연법과 3법인, 4성제를 토대로 업- 윤회 - 해탈로 이어지는 인간 구원에 대한 정연한 진리체계와 실천증득에 있습니다. 여기에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부처님의 우주적 구원력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업-윤회-해탈의 주인공으로중생이있으며, 이 중생의 업장을소멸시켜주는 부처님의 우주적 구원력이라는 대자비가 실질적인 알맹이를 이루고있습니다.그런데 잘못 해석되어온 '왜곡된 무아설'은 중생의실체도 부처님의 존재도 부정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두 주체인 핵심 알맹이를 모두 빼고껍데기만 남겨놓은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우리 불교가전 세계로 활발하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탄생지인 인도에서도 사라진 채 아시아 일원에서 생명을 유지하고있는 정도로 쇠잔해 있습니다.우주접계의 절반이 훨씬 넘는 영역을 차지하면서 우주 정법계를 이루고 있는 불교의 법계 위상을 감안할때 이것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알맹이가 빠진 껍데기 불교만 가지고도 이만큼이라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불교의 위대성을 반증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불교가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주기만 한다면전 세계로 확산되리라는 것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역사적인 일을 시작하려고 법통 태자이신가섭존자 광명만덕 큰스님과 문수보살 법왕자이신 아난존자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 신불교인 영산불교를 개창하고 정법의 새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무아설은 원래 부처님께서 중생들의'나'에 대한 집착을 끊어주기 위해 늙고 병들어 죽어버리는 '현상계의 나'가 없다고한 것인데, 이를 잘못 확장하여본체계의 실체인 영혼체마저 없는 것으로왜곡하여지금까지 불교의 올바른 교설로 행세해왔습니다.

이제 영산불교는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 이 시대 걸출하신 대선지식인 두 분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왜곡된 무아설과 이를 토대로 한 '무아윤회설'을 영원히불교 교설에서 없애는 위대한 폐기를 단행하고, 올바른 무아설의 해석을 통해'영혼체 윤회론'을 정립하여신불교의 정법시대를 열어가고자 합니다.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의 진면목을 세계에 널리 보여주고자 합니다.그 오랜 세월 동안 '왜곡된 무아설'이라는 깊은 늪에빠져있던 우리 불교계와 전 세계 불자들이 하루 빨리정법의 손길을 잡고 늪에서빠져나와 우리 불교를 살리고정법을 널리 펼치는데 함께 참여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에 영산불교에서는 우리 불교계와 불자님들이 무아설을 바로이해하고 새로운 '영혼체 윤회론'을 받아들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그 동안 자재 만현 큰스님의 법설을 중심으로 이 책을펴네게 되었습니다.이 책을 펴 낼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시고 격래해주신 큰스님께 오체투지로 감사의 예경을 올립니다. 

행여 큰스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쓴 부분이 있다면 모두 필자의 짧은 지식과 부족함 때문이오니 독자여러분의 넓은 이해가 있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이 기회에 불교에 관한 글을 쓰시거나 강의하시는 학자님께 특별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우리 부처님은 우주의 대성자이시고 인류의 대스승이십니다. 

그런데 필자가 글을 읽다보면 자주 "석가가....."라는 문구를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안쓰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불교도이건 아니건 대성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 존칭으로 표현해주었으면 참고맙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아무쪼록 이 책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 독자 여러분이 정법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54년
사월 초파일

혜 운 합장





불세존 말씀


무아가 잘못 해석되었느니라. 

자재 만현이 맞느니라.

자재 만현은 법왕자로서 이것을 바로 잡아야하느니라. 

이것이 불교가 망한 원인이니라.

무아無我는 잘못 해석한 것이니라. 

나는 무아無我를 이야기했지만, 저 세상이 없다고 아니했다. 

살아있는 것, 언젠가 죽는다. 

내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말했다.

하늘에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오길 말했노라.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고, 죽는 것도 고통이다. 

육도윤회에 돌면서 고생하는 것을끊어주기 위해

무아無我를 이야기 했노라.

'있다 없다'를 확실하게알면서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

더 나아가서 대적정삼매에 들어 무아無我의 환희는

붓다의 경계이니라.

여기까지 공부 못하고 법을 모독 능멸하여

중생을 오도한 죄는무간지옥에 가느니라.

붓다와 법은 영원히 멸도하지 않느니라. 


왜곡되고 왜소화된
세계 불교의 실상을 안타까워하며


무량겁 전에 우주 법계 최초로 불과를 이루시고, 다시 2600여 년 전에 사바세계에 몸 받아오셔서 위없는가르침을 주시고 대열반에 드신 후, 무아 속 절대계에빛의 인격체로 여여히 살아계신 거룩하신 우리 교주불세존께 백천만 번의 오체투지로 예경 드리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우주적 진리의 불교가 2600여 년의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너무도 많이 왜곡되고 왜소화 되어 위대한 불교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그래서 지금은 이 왜곡된 우리 불교의 실상을 반성적 차원에서 냉철하게 파악하고 왜곡의 원인을 정확히밝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새로운 불교의 방향을 정립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우리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내어 정법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는환골탈태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 불교도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긴긴 잠에서 깨어나,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크게 벌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진리의 말씀 - 정법의 사자후를 드러야 합니다. 

한구절 진리의 게송을 듣기 위해 흉악한 나찰에게 한 몸을 기꺼이 던지는 설산동자와 같이 진리를 갈구하는간절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야 합니다.수천 년 간 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해설하고 주석을해놓은, 그래서 불교의 정설로 굳어진 교설조차도 때로는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까지 나의 분신처럼 가지고 있던 불교에 대한 지식도 버릴 줄 아는 아픔도 감수해야 합니다.지금 세계불교는 남방불교, 북방불교, 티베트불교라는 세 갈래의 큰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중 어느 불교도 부처님의 법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왜소화되어 있습니다.  정법불교의 위대한 면면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불교의 실상을 아주 포괄적으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로서 현행 불교를 비판할 목적은 추호도 없음을 미리 밝혀 드립니다.

오로지 우리 불교의 앞날을 위해서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고대 인도의 마가다국 아쇼카왕 때 스리랑카로 전해져 꽃을 피운 동남아시아 중심의 남방 상좌부불교는스스로의 틀에 갇혀 감히 그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올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것은 높이 사줄만합니다. 위빠사나 수행법도 불교 경론에 있는 수행법입니다.그러나 그 수행법에만 집착하다 보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는, 보다 수승한 수행법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수행 목표이고 해탈신을 갖는 보살이나불신을 두는 붓다의 경지는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어마어마한 위신력과 심원한 적멸의 해탈세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방불교는 이런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크게 왜곡되지 않은 것만이라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북방으로 전해진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소위 선불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태동  초기부터외도사상과 혼합되어 불교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심즉시불이니 견성성불이니 하면서 그럴듯한 교설을 내세우고 있지만, 부처님의 참 경계를 이해하지못해 결과적으로 불교를 왜소화시키고 부처님을 격하시키고 있습니다.한국의 간화선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화두를 들려면 부처님의 성호가 가장 좋은 화두가 되어 밤낮으로 불러야지, 왜 경전에도 없는 조사 스님의 말씀을 화두로 들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 성과도 없고 본격적인 수행의 시작단계인 견성,즉 공을 깨치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것을 위해 고생스럽게 오랜 기간 수행을 해야 하는지 이제 한번쯤은 되돌아볼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그래도 최후의 보루로서 티베트불교가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참 좋겠습니다. 

티베트불교는 수행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긴합니다.  그러나 수행의 어는 단계에서 하고 있는, 힌두교 요가 수행이 가미된 밀교 수행법은 정법이 아닙니다. 또한 티베트불교의 지도자는 신통을 사용하여 환생을 함으로써 정법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티베트불교를 위한다고 하지만 정법에 반하는 것은 하면 안 됩니다.  티베트불교의 우수성으로 주장하고 있는 즉신성불의 교설은 불자들의 안목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불신보신불이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하고 차원 높은 존재인지도 모른 채, 중음계에서 우주 본성의 빛인 정광명을 받은 의생신을 보신불이라 여기는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세계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정리해봅니다.

1. 세계 불교는 부처님의 실존과 위신력을 믿지 않는 부처님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2. 세계 불교는 인간의 실체인 영혼체을 부정하고 윤회주체마저 없다고 하는 주인공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3. 우리 불교는 붓다가 되고 보살이 되는 완전한 생사해탈을 이루는 수행법이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4. 우리 불교는 해탈법위와 해탈의 적멸세계에 대해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차원 낮은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불교는 우주 법계의 법왕이신 부처님을 교주로 모시고 있으며 완벽한 교리체계와 구원사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신도 수로 보면 기독교 천주교 포함, 이슬람교, 힌두교 다음으로 겨우 네 번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도 수가 종교 평가의절대적인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오늘날 불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하나의 지표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그리고 불교의 고향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불교가 세계로 뻗어나가 널리 정착되지 못하고, 아시아 일원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쇠퇴했습니다.불교 교리의 위대함과 우주 법계영역의 절반 이상을차지하고 있는 불교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이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성적표인 것입니다. 

그럼 불교가 왜 이런모습이 되었을까요?  이제 그 이유를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무아설의 왜곡을 통탄한다  
불교 쇠퇴의 주범 


불교가 태어난 고향인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 불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는 불교가 세계로 널리 뻗어 나가지 못한 원인을 제공해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와 지금의 환경이 많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지금 세계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나 인도에서와 유사한 이유로 불교가 사라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다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불교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필경 불교 자체에서 찾아야 할 일이지 외적 환경과 여건을 구실 삼아 면책 받을 수 있는 성질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원인에 대하여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듭니다.

첫째는 이슬람 세력이 침공하여 큰 사원들을 파괴하고 많은 스님들을 학살함으로써 교단을 붕괴시켰다는 것이고,

둘째는 불교가 밀교화 되면서 힌두교에 흡수되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불교의 심원한 철학적 교리때문에 일반 민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불교 내부의 부패와 분파주의 등을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힌두교의 막강한 영향하에서도 180년 이상 쌍벽을 이루면서, 인도의 사상과 문화의 한 축으로서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위에서 본 이유들만으로 불교가 인도에서 짧은 기간 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원인을 밝히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불교가 처해있는 것과 대등한 조건 속에서, 어쩌면 불교보다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힌두교나 자이나교가 살아남은 것만 보아도 뭔가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제 그 이유를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대개 어떤 종교가 얼마나 생명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종교가 사회와 민중 속에 얼마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는가에 죄우된다고 생각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질적 가치가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당시 불교가 과연 불교로서의 고유한 본질적 가치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민중들을  향해, 사회를 향해 제시해 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 누구도 이러한 불교의 가치를 완벽히 이해하고, 대외적으로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설명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불교가 민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알맹이인 '고유한 본질적 가치'는 불교가 튼튼히 뿌리내리기 위한 일차적이고도 근원적인 요소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불교의 종교로서의 고유한 본질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연법과 사성제와 삼법인을 토대로 '업-윤회-해탈과 부처님의 구원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처님의 구원력을 제외한 '업-윤회-해탈사상'은 일찍부터 힌두전통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힌두교가 미처 알지 못하는 훨씬 정교하고 깊은 차원에서 '업과 윤회'의 진실을 밝혀주고 '적멸의 해탈세계'를 그려주며, 부처님의 업장소멸이라는 '우주적 구원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수승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차원 높게 힌두교와의 차별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질적인 차별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고유한 본질적 가치'를 제시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불교의 핵심적 교리인 '무아설'을 왜곡하여 힌두교의 아트만이론과의 잘못된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업-윤회-해탈'의 주인공은 없다고 떠들고 다님으로써 허무적 성격의 종교라는 인식을 확산시켰습니다.  영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겼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위대하신 실체를 몰라 구원사상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왜곡된무아설의 실체'입니다.

아무리 윤회하는 삶이 고통이라고 외쳐봐야 고통 받는 '나의 실체'와 '나의 영혼체'가 없는데 미래의 그 고통이 얼마나 절실하게 와 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인간은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해탈의 주인공이없다고 하는데, 나라는 '해탈의 주체'가 없는데 그런 불교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깊이 믿을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정말 구원을 해주시는 것인지, 어떻게 구원을 해주시는지도 모르는데, 누구를 믿고 불교를 믿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런 소재는 힌두교를 비롯한 외도들에게 얼마나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겠습니까?

무려 2000여 년 간이나 힌두교와 외도들에게 발목이 잡히고 스스로 잘못된 논리에도 묶여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어떻게 불교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교의 위대한 점은 인연법과 3법인, 4성제를 토대로 업-윤회-해탈로 이어지는 인간 구원에 대한 정연한 진리체계와 실천증득에 있으며, 여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부처님의 우주적 구원력입니다. 

다시말하면 업-윤회-해탈의 주인공인 중생이 있고, 이 중생의 업장을 소멸시켜주는 부처님의 우주적 구원력이라는 대자비가 실질적인 알맹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 해석되어온 '왜곡된 무아설'은 중생의 실체도 부처님의 존재도 부정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두 주체인 알맹이를 모두 빼고 껍데기 만 남겨놓은 꼴이 되었습니다. 

이런 껍데기 불교, 반쪽도 안 되는 낙제점짜리 불교를 가지고도 그래도 아시아에서 이 정도의 교세를 유지하고있는 것만 해도 너무아 고마운 일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이것은 불교의 위대성을 반증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위대하신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전 세계로 확산되리라는 것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필자는 이 모든 엄청난 사태의 주범을 '무아설의 왜곡'으로 보고 싶습니다.  '무아설의 왜곡'이 밉습니다.   그냥 밉습니다.  한 방 크게 먹여주고 싶습니다.  아니 때려누여서 실컷 두들겨 패주고 싶습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립니다.

그래도 살생은 하면 안 되니까 죽이지는 못하고 이'무아설의 왜곡'을 열시왕의 심판을 받도록 만들어 세세생생 극무간지옥으로 보내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주범 '무아설의 왜곡'의 동조자가 여기저기 도처에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도와주시옵소서! 이 많은 선량한 동조자들을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  이렇게 사정하면 되올는지요? 

전 세계 고명하신 불교학자 여러분!  제발 과거의 잘못된 논리를 반성하시고 더 이상 '무아설의 왜곡'의 동조자가 되는 주장을 펴지 마시기를 간절히 애원합니다.

전 세계 학덕이 높으신 큰스님, 선지식들이시여!  고요한 선정에 들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되새겨보면서 "무아설의 왜곡'의 동조자가 되지 마시고 중생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펼쳐주시옵소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전 세계 사부대중 여러분!  오랜세월을 불자로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왜곡된 무아설의 포로'가 되었다면 하루 속히 깨어있는 불자가 되어 정법에 귀를 기울여주소서!

정법을 외면하고 정법이 아닌 법을 펼치는 것는 큰 죄업을 짓는 일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절제된 표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세계 불교사의 새로운 장을 열며


고맙게도, 너무나 고맙게도 거룩하신 우리 교주 불세존께서는 아끼고 사랑하는 두 제자, 가섭존자 광명만덕 큰스님과 아난존자 자재 만현 큰스님을 이 땅 대한민국에 내려 보내시어 '영산불교'라는 신불교의 정법으로 무아설의 바른 교의를 설하여 정법의 새 시대를 열어가게 해주셨습니다.

부처님! 오체투지 감사드리옵니다.!

'무아설의 왜곡'으로 2000여 년 간 우리 불교계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왔던 '무아와 윤회 주체' 문제에 대하여 영산불교 현지사의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BBS 불교방송   TV법회2010. 4 를 통해 "비아인 영혼체가 윤회의 주체"라고 쾌도난마의 사자후를 해주셨습니다.

물론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Ⅰ. Ⅱ>>를통해 이미 부처님의 실존과 영혼체영체 윤회론을 세계 불교계에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번 큰스님의 법설은, 천동설이 지동설로 코페르니쿠스적 대반전을 하여 진리가 세상에 밝혀지고 인류문명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듯, 종교상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알리는 역사적 대선언입니다.

아마 이 선언은 세계 불교계나 불교 교학에 엄청난 회오리를 몰고 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아와 윤회 주체의 논쟁에 관한 수많은 논서가 한낱 휴지조각이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영산불교는 우리 불교계가 이 문제에 대해 정말로 대성적인 차원에서 대응해 주시기를 진심으로바랍니다.  "윤회 주체는 비아인 영혼체"라는이 경천동지할 선언으로 오랜 기간 '왜곡된 무아설'을 주장하고 믿어왔던 기존의 학계나 종교계, 특히 불교계에 큰 파장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정법의산고를 위해 겪어야 할 아픔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우리 불교계의 앞날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널리 펼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인도의 대논객인 용수도, 무착이나 세친도 이 무아설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무아설이나 영체론은 최소한 상품보살 이상이 되어야 그 실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붓다의 수준에 가서야 완벽하게 체득할 수 있는 심오한 차원의 교설입니다.  따라서 이론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학자들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곡된 무아설이 2000여 년 간이나 고쳐지지 않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렇더라도 이 '무아설의 왜곡'은 우리 불교계의 한 치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자재 만현 큰스님이라는 걸출한 선지식이 탄생하셔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으시면서 일생일대의 희원을 이루시고, 우리 불교가 많이도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이론적, 체험적으로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산불교라는 신불교 교단을 창립하여 영산당시의 불교를 복원하고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아 정법의 새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왜곡의 가장 핵심주제를 '무아설의 왜곡'으로 보고 전세계 불교계를 향해 정법의 사자후를 하신 것입니다.

이는 분명 세계 종교사에 큰 획을 긋는 종교상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될 것이고 세계 불교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사적 대선언이 될 것입니다.

무아설이 바로 서야 부처님의 실존론이 자연스럽게도출되고, 실체적인 삼신설을 이해함으로써 부처님에대한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피를 찾는 칭명염불로 연결되어 붓다회상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생사해탈의 지름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붓다회상이 지금 한국땅, 춘천 현지사에서 열리고 있다는 엄청난 소식을 아울러 전해드립니다.  믿고 안 믿고는 모두 인연에 맡기겠습니다.




무아와 윤회 주체 문제의 불교사적 개관


초기불교의 무아론 개관


초기불교는 부처님 재세 시와 불멸 후 100년경까지의 불교를 말합니다.  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라고도합니다.

초기불교시대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전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은 <<아함경>>입니다. <<아함경>>은 팔리어로 된 <<5니까야>>와 한역 <<4아함경>>이 있습니다.이 팔리어 <<5니까야>>는 한역 <<아함경>>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한역 <<아함경>>에 없는 소부<<쿳다까 니까야>>가 있어 <<법구경>>이나 부처님 전생을 다룬 본생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아함경>>에는 불교의 4성제, 3법인또는 4법인, 8정도, 12연기, 5온, 12처 등 불교의 기본 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3법인 관련 내용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경전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팔리어 <<니까야>>에도 한역 <<아함경>>과 유사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우선 무아의 내용을 포함한 3법인4법인을 말씀하신 경전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네 가지 진리란 어떤 것이냐?  모든 존재와 현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근본 진리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괴롭다는 것이니 이것이 두번째 근본 진리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근본 진리이다.  번뇌가 다 멸하면 열반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네번째 근본 진리이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네 가지 진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실체로서의'나'가 없다는 것"이 바로 무아의 개념인데 번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글대장경>>에는 "일체의 법은 나라고 할 만한것이 없다"로 되어 있는데 내용상의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모든 존재와 현상'이나 '일체의 법'의 개념을 가지고 현상계의 존재를 넘어 존체계의 '나'까지 부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는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의 진리는 무상 . 고 . 무아라는 현상계의 속성을, 그리고 네 번째의 '열반적정'은 현상계로 넘어선 본체계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란 점을 볼 때, 여기서의 무아 개념은 현상계에 한정하여 보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이어서 경의 내용을 몇 가지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잡아함경/염리경1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수 .  상  . 행  . 식도 또한 무상하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또 <<잡아함경무상경 8권>>에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모든 것은 괴롭다. 모든 것은 공하다.
모든 것은 나가 아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잡아함경비아경2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나옵니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은나가 아니다.  만일 색이 나라면 응당 색에서 병이나 괴로움이 생기지 않아야 하며, 또한 색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색에는 '나'가 없기 때문에 색에는 병이 있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색에 대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수 .  상 . 행 . 식도 이와 같으니라."

"비구들아,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색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비구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아, 만일 무상하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곳은 변하고 바

뀌는 법이니라."

마갈다국 사람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색  .  수  . 상  .행  . 식의 오온이 모두 무상하다는 가르침을 받고나서,  "그렇다면 누가 활동하고 누가 고락을 받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이를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중아함경빈비사라왕영불경 11권>>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어리석은 범부는 가르침을 들은 것이 없어 '나'를'나'라고 보아 '나'에 집착한다.
그러나 필경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나니, '나'를 비우고 '내 것'을 비워야 하느니라.
법이 생기면 생기고, 법이 멸하면 멸하여, 다 인연을 따라 모이어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니, 만일 인연이 없으면 도는 괴로움은 곧 멸하느니라.

이상 견정에서 살펴 본 무아와 관련된 내용을 종합해보면 부처님께서는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으로 구성된 인간의 존재는 무상하며, '나'가 아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고 변하는 것이다"라고 현상계의 무상 . 고 . 무아 개념을 강조하시면서 중생들의 '나'에 대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 고심하고 계시는 흔적을 역력히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경전상의 맥락으로 보면 무아보다는 비아의 개념으로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팔리어 경전상의 용어로 사용된 아나트만anatman이 아트만atman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 an이붙어 이루어진 단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있다. 없다'의 존재론적 의미보다는 '이다. 아니다'의 서술적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한 이유가 됩니다.  무아
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niratman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아냐 비아냐 하는 것보다도 경에서는 모두 '현상계의 나'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본체계의 나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대승열반경>>에는 본체계의 '나의 실체인 아'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는 '무아설'을 '본체계의 나의 실체까지 없는 것'으로 확대하여 해석할 타당한 근거가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무아'를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의 아상을 떼어주기 위한 방편적 차원이지 본체계의 존재인 '나의 실체'까지를 부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나중에 상론하겠습니다.

초기불교의 무아설과 관련하여 일본의 히라카와 아키라는 아주 정확한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무아설은 진아의 적극적 부정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진정한 아가 아닌 것을 아라고 잘못 알아서 이에 대해 집착하는  그릇된 아견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부파불교시대 
무아설의 이해와 윤회 주체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신 후 100년 쯤 지나자 그동안 통일적으로 운영 되었던 교단은 교리, 계율, 교단 운영규범 등에 관한 승려들 사이의 의견 차이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수파인 상좌부와 진보파인 대중부로 갈라지더니 이후 분열을 거듭하여 결국 20여 부파가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갈라진 각 부파들은 저마다 불교교리를 연구하여 부파들 나름대로 논서를 내놓음으로써 불교 교리가 학문적으로 발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불멸 후 100년경부터 약 1000년 간 지속된 이 시대를 부파불교시대라고 합니다.  부파불교는 아비달마Abhidharma불교라고도 합니다. 부파불교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보입니다. 하나는 불신관의 이론을 정립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무아와 윤회 주체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문제는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과제였다고 보여집니다.  최고의 수행 경지에 가서야 알 수 있는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불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정확한 교설을 정립하지 못한 것은 천주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것은 필자가 불자이기 때문에 하는 말만은 결코아닙니다.  중생 구원을 표방하는 종교는 많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해줄 진리의 종교는 불교밖에 없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당시 불교의 위대한 교설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기 때문에 불교가 힌두교에 밀려 인도에서 사라졌고, 오늘 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왜곡되고 왜소화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아와 윤회 주체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부파불교의 내노라하는 논사들이 온갖 있는 지식, 없는 지식을 다 동원하여 다양한 이론을 내놓습니다.  물론 이것은 힌두교의 공격에 대한 대응이기도 합니다.

부파불교가 내놓은 의견들의 방향을 보면 고정 불변하는 윤회 주체는 아니지만 심식류의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윤회를 한다는 입장입니다.

대중부는 윤회의 주체로서 근본식사상을 주장합니다. 이 근본식은 우리의 육체와 마음 작용의 의지처가 되는 식으로 사후에도 존속하여 몸을 받는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상좌부는 유분식사상을 주장하여 모든 업력의 인을 간직한 식인 유분식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합니다.

독자부는 푸드갈라를 윤회의 주체라고 봅니다.  푸드갈라는 어원적으로는 신체,  영혼,  개인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본성은 오온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든 푸드갈라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저 세계에서 이 세계로 윤회하는 생명의 주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설일체유부는 오온상속석를 주장합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는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구성 요소는 실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하지만, 그 법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유부의 삼세실유설입니다.  이렇게 유부에서 삼세실유설을 주장한 것은 업과 윤회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설은 오온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견 무아윤회처럼 보이나 궁극적 실재인 구성요소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유아윤회적 성격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경량부에서는 일미온이라는 미세한 의식이 죽음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다음 생을 이어간다고 합니다.

화지부에서는 윤회의 주체로서 궁생사온을 주장합니다.  궁생사온은 삶과 죽음을 연결해주는 궁극적인 것으로서 부단히 상속되는 인과 주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무아와 윤회 주체에 대한 여러 부파의 주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무아윤회를 대전제로 하고 있지만 독자부의 푸드갈라 이론과 설일체유부의 오온상속설은 유아윤회적 성격이 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나머지 심식류가 윤회한다고 보는 이론도 식류를 윤회의 존재로 내세우기 때문에 순수무아윤회론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부파불교가 무아설에 발목이 잡혀 윤회 주체에 대한 명확한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고 푸드갈라나 심식류 같은 애매한 이론을 내세운 부분은 참으로 궁색한 발상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정적인 실체를 갖지 않는 존재가 윤회를 한다는 것은 얼른 납득이 될 수 없는 그런 논리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론들이 대외적으로 설득력을 가지기가 힘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대승불교시대
무아와 윤회 주체에 대한 이해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학문적이고 출가자 중심 불교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대중 중심의 새로운 불교사상으로서 중생 구제자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보살사상이 강조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기원 전후로부터 8세기까지를 대승불교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주요철학사상은 용수(나가르쥬나)의 중관.공사상과, 미륵보살의가르침을 받은 무착(아상가)세친(바스반두)이 정립한 유식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선구적 경전이라고 볼 수 있는 <<반야심경>>을 통해 공사상이 전개되었고, 용수는 <중론>에서 연기하는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고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습니다.
이는 부파불교설일체유부에서 '나'라는 존재의 무상성을 강조하면서도 우주 만물의 실체성을 인정한 법 유아무 사상에 대해 대승불교가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용수의 공사상은 무아 대신 존재의 개념을 초월한 공의 개념을 도입하여 무아와 윤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무아설의 허무주의적 성격을 더 심화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또 다른 한 축인 유식사상은 일체만유는 식에 의한 현현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유식 이론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8단계로 나누어  안 . 이 . 비 . 설 . 신의 전5식과 6식인 의식, 7식인 말나식, 8식인 아뢰야식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아뢰야식이 업의 종자를 보관하는 저장소로서 장식이라고도 하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합니다. 이는 부파불교시대에 윤회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었던 여러 심식류를 아뢰야식이라는 하나의 식으로 통일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뢰야식 윤회 주체설은 부파불교의 심식류에 비해 그 성격이 보다 분명하고 업의 저장소도 명확히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이론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윤회 주체라고 하기에는 식으로서의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나중에 상술하겠습니다.




힌두교의 불교 교리 비판,
대응과 아트만 이론에 대해




힌구교의 불교교리 비판과 대응
(김형준. 인도 정통사상과 불교의 대립/이거룡. 윤회의 주체를 둘러싼 논쟁)참조.

불교는 태동 당시부터 사성계급제인 카스트제도와 동물희생제에 반대를 하면서 베다전통의 바라문교(고대 힌두교)에 도전하는 한편, 육사외도로 불리는 자유사상가들의 유물론,쾌락주의, 단멸론, 회의론 등을 비판 하면서 독자적인 사상과 교설로 민중 속에 파고들었습니다.


불교의 교세가 확장됨에따라 힌두사상과 대립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힌두교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초기에는 주로 생활과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했으나, 점차 교리 논쟁으로 확대되어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와 힌두교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교리체계를 발달시켜왔습니다.


본격적인 힌두교의 관점에서 불교 교리를 비판한 것은 부파불교의 논장이 성립된 이후인 7~8세기경 또는 그 이후라고 보고 있습니다.(김현준, 상게논문.)

힌두 전통사상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주로 미망사, 나야야, 베단타학파에서 나타났습니다(김현준,상게논문.) 힌두교와 불교간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이론 논쟁의 핵심은 불교의 무아설과 힌두교의 유아석이었고, 이에 따른 윤회 주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무르띠(T.R.V. Murti)의 견해에 따르면 인도철학사에서의 유아설과 무아설의 대립은 금세 유럽철학에서의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의 갈등 이상으로 첨예한 논쟁거리였다고 합니다. (이거룡, 상게논문.)

당시 힌두교는 아트만이라는 영원불멸하는 자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당시의 인도불교는 어떤 경우에도 상주불멸하는 자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무아론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물론 이무아론의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두 종교간의 교리가 정반대가 되다보니 논쟁은 불가피 했다고 보입니다.

특히 윤회 주체의 문제에들어가면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힌두교에서 봤을 때 무아이면서 윤회를 한다는 불교의 교리는 참 좋은 공격거리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참으로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계시기라도 했다면당장 달려가서 여쭈어 보았을 터인데 그러지도 못하고 참 답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무아론이나 윤회론은 어는 것도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불교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불교 비판론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베단타학파의 상까라는 부파불교의 오온과 찰나이론, 유식학파의 관념론적 경향과 중관학파의 허무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이중 무아설과 무아윤회의 근저가 되고 있다고 보는 오온과 찰나이론에 대한 비판 내용을 잠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찰나설에 대해서는 찰나멸, 찰나생은 후생존재가 발생하기 전에 선행존재가 소멸해버림으로써 인과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찰나설과 설일체유부의 실재론을 묶어 순간적인 실체가 생성과 소멸을 지닌다는 주장은 자기모순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윤회의 실체적 주체가 없다고 하는 무아윤회에 대하여는 오온이론과 윤회를 엮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불교도)은 영원한 윤회 속에서 오온의 집합은 끊임없이 하나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무명 등은 그 오온 속에 머문다고 말할지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당신은 각각의 오온이 필연적으로 같은 종류의 오온을 낳거나, 아니면 어떤 정혜진 규칙없이 같거나 다른 종류를 생성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전자의 경우라면 인간은 결코 신이나 동물 또는 지옥의 존재로 변할 수 없을 것이다. 꼬한 후자의 경우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코끼리나 신이 되었다 가 다시 인간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김형준, 상게논문.)


영혼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 대한 상카라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불교에 따르면 몸과 마음의 합성체는 그 합성체를 욕구하고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영혼을 지니지 않는다.이와 마찬가지로열반을 욕구하는 자도 없다.

설사 어떤 자가 열반을 용구한다 해도 그가 바로 열반을 얻는 자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열반의 순간에 그것은 완전히 다른 합성체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일 동일인이 그것을 욕구하고 그것을 얻는 다면 이는 영원한 영혼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이거룡, 상게논문.)

사실 이러한 힌두교의 비판은 충분히 예상될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이 없더라도 불교는 무아와 윤회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문제를 두고 부파불교시대의 각 부파는 윤회 주체 대신 여러 가지 애매한 심식류를 동원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이미앞에서 본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이 아닌 또 하나의 모순된 논리를 개발한 것일 뿐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인과법이라는 불교의 기본 교리를 도외시하고 우주이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불교의 무아윤회에 대한 힌두교의 비판에 대해서도 불교는 왜곡된 무아설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정확한 논리를 내세워 설득력 있게 대등할 수 없었습니다. 부파불교의 수준 이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왜곡된 무아설로 인해 불교는 윤회와 해탈의 주체도 없는 허무한 종교의 성격으로 인식되어 민중 속에 재대로 뿌리를 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에 불교가 무아설과 윤회 . 해탈사상, 그리고 부처님의 구원사상 등을 저왁하게 설명해주고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힌두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더라면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하지도 않았고, 12세기경이슬람의 침입으로 불교가 인도 땅에서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마가다국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 시대에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확산되었고 스리랑카와 미얀마, 이집트, 그리스 등의 지역까지 전파된 것을 감안하면불교는 오히려힌두교를 흡수하면서 지금쯤 유럽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 전파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 위대한 진리의 종교가 그 진면목을 찾지 못하고 왜곡된 채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2) 힌두교의 아트만 이론에 대해

힌두교에서는 우주 만물은 법,브라흐만으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이 법이 개별 주체에 들어간 것이 아트만atman으로서, 아트만은 영원불멸하는 자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이 아트만이 범과 하나임을 깨닫는 범아일여의 경지가 되면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이 아트만이 윤회의 토대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윤회의 주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떻게 윤회를 하는지에대하여는 명확한 설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트만은 범과 같으면서 개아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트만이 범우주 본성과 같다면 아트만은 행위를 할 수도 없고 업을 지울 수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순수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트만 자신은 윤회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윤회를 하는 실체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트만과 윤회 주체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베단타학파에서는 윤회하는 미세신(이거룡, 상게논문.)을 말하고 있지만, 그 미세신 역시 애매한 개념이고 그 성격에 대하여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 주체인 영혼체는 매우 구체적이고 확실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네 개의 영혼체에 대한 설명을 통해 윤회 주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떻게 윤회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힌두교는 일찍부터 업과 윤회와 해탈을 주장한 수준 높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힌두교에 대해 몇 가지만 더 지적해 보겠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육신에 존재하는 아트만을 바로 자신이라고 깨닫게 되면 이는 곧 범과 하나가 되어 해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공을 깨친 수준으로 해탈의 수준과는 또 다른 경지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불교의 육도윤회세계, 해탈계의 차원 높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또한 사람을 행위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출신성분에 따라 고착화시켜버린 사성제의 문화는 크게 잘못된 전통이라고 보겠습니다. 아울러 동물을 희생시켜 제의식에 사용하는 것도 잘못된일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파아나두라 논쟁
영혼체 관련 부분



이 글은 불교평론38호, 2009년 봄호에 발표된 <불교와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석오진>의 내용을 인용하고 참고하였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상기 자료에 의하면, 19세기 후반1873년스리랑카에서 있었던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인 '파아나두라 논쟁'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세계적 두 종교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각자가 신앙하는 종교의 위신을 걸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승패를 걸고 행했던 종교대론입니다.

이 논쟁에는 불교 측에서 모호티와테 구나아난다Mohottiwatte Gunananda 비구가 참가했고, 기독교 측에서는 첫째 날에는 데이비드 데 실바David De Silva 목사가, 둘째 날에는 시리만나Sirimanna 전도사가 토론자로서 참가했다고 합니다.  청중은 첫 날에 5천 명, 둘째 날은 1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보면 대체로 기독교측의 열세로 끝났다는 평이 많았다고 이 자료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그 평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아설을 잘못 해석하여 영혼체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교리인 양 굳어졌고, 그 잘못된 교리를 두고 공방을 벌여 결과적으로 우문우답이 되어버린 이 사태에 대해 우리 불교계가 진정으로 반성하고 정법을 세워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논쟁의 영혼체 관련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측의 실바목사는 "불교 교리에서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도덕이 성립될수 없지 않은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에대해 불교측의 구나아난다 스님은 "만약 기독교가 설하는 것과 같이 영원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살인을 범했다 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데 귀결 된다. 

예컨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파괴되어 버린다 해도 영혼은 불멸하기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에게 불멸의 생명 또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거꾸로 윤리도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라고 되받아졌다고 합니다.

참 실소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영혼이 없다고 전제한 것도 물론 잘못이지만, 영원불멸의 영혼이 있다고 해서 살인을 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보는 시각에 놀라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스님의 신분으로 부처님께서 대표적인 네 가지 중한죄라고 정하신 4중죄 중의 첫 번째 계율인 살생중죄를 그렇게 가벼이 볼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습니다. 

특히, 이 4중죄는 4바라이죄라고 해서 출가스님이 어길경우 자격을 박탈당하는 무서운 죄인데도 말입니다. 만약 그 당시에 기독교측의 실바목사가 영혼체가 없다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모순점들을 예리하게 비판했더라면 불교측은 아마 상당히 곤혹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이 '파아나두라 논쟁'은 불교의 교리가 '영혼체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확인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왜곡된교리가 바로 잡히기까지는 다시 일백 수십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나마 이 논쟁이 스리랑카 불교의 회생에 공헌하는 등의 긍정적 성과가 있었다는 것으로 약간의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무아설의 바른 의미 
 무아는 현상계에 국한된 개념


이제 문제가 되고 있는 무아설의 바른 개념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도 오랜 세월을 잘못 알려져 왔지만 개념은 매우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무아는 불교의 3법인의 하나로서 그바른 의미는 "현상계에는 영원불멸하는 '나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조금 풀어서 표현해 보면"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인연으로 화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어 없어지므로 영원불멸하는 '나의
실체'는 현상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상계의 모든 사물에도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현상계에는 영원불멸하는 '나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무아가 됩니다. 그리고 "현상계의 나는 '나의 실체'가 아니다"라고 하면 비아가 됩니다.

이 비아의 개념에는 우리의 육체는 물론 오염된 마음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업장 등 모든 비본질적인것이 붙어있는 우리의 영혼체까지 이 비아의 개념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비아인 영혼체가 윤회 주체가 되는 논리적 근거가 나옵니다.  그리고 위에서 본 '나의 실체'는 진아가 됩니다.

여기서 '현상계'를 강조한 사실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아나 비아의 의미는 바로 이 현상계를 두고 정립된 개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현상계에는 나의 실체가 없다'라고 하거나 '현상계의 나는 나의 실체가 아니다'라고 하거나 두 가지 모두 본체계에 존재하는 나의 실체까지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현상계'에 국한된 개념을 '본체계'까지 확대 적용하여 본체계의 실체까지 부정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무아'를 어떤 경우에도 '나'라는 존재가 아주 없는 절대무아의 개념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설의 왜곡'입니다.  반면 '비아'라고 하게 되면 은연 중 진아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무아설의 왜곡'은 결과적으로 육도윤회와 생사해탈이라는 불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를 부정하고, 불교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의 개념과 관련하여 자재 만현 큰스님의 관련 법설2010. 4, 현지사 대전분원 법회을 일부 인용해보겠습니다설법 취지를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어체를 문어체로 바꿔서 표현합니다.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하신 것은 유라는 것있다 고 하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 집착심을 떼어 주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무아라고 해서 행위의
주체까지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소아적인이기적인그 생각을 딱 잘라야 되겠기에, 여러분 자신만 아는 소아적인 중생심을 잘라야 나쁜 업을 짓지 않고 좋은 업을 지어서 하늘을 가고, 사람으로 와서 부처님회상을 만나서 윤회를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아적인이기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을 하지마라 그것입니다.  나만 아는생각은 소아적인 것입니다.  그 나라고 하는 생각,그 생각이 없는 나 무아, 그것은 정토에만 가도 보살들은 나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이치가 맞습니다.  그 정토에는 무아상  .  무인상  . 무중생상  . 무수자상입니다.  보살들 부처는 나라고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즉 중생의 괴로움을 보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정말로 자비 자체로 살아가는 분, 그런 분이 보살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생각이 없는 나', '그 나'는 있습니다.

우리 불세존께서 가끔 아주 중대한 말씀을 발표하실 때에는 모든 삼천대천세계 부처님들 앞에서 "나 불세존은 삼천대천세계 여러 붓다님들 앞에서 무엇 무엇을 선언하노라"이러신단 말입니다.

'나  불세존은..............' 이렇게 나가신단 말입니다.우리 불세존, 나라는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중생만 생각합니다. 불세존께서 말씀하신 무아의 의미는 '나라고 하는 생각을 하지 마라, 나라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마라' 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아를 말씀하신 것이지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무아를 '나라는 것이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는데 마다 불교가 두들겨 맞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쫓겨난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 말씀의 진위를 지금처럼 이해를 했다면, 우리 부파불교나 기타 대승불교의 하승들이 그 인도 석학들한테 이렇게 대응했더라면, 이 위대한 붓다를 낸 불교가 오히려 힌두교를 흡수했을 것입니다.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힌두교를 흡수해왔을 것입니다.




영산 당시의 '영산회상거염화'는 
무아와 본체계에 대한 가르침

영산 당시 부처님께서 대중들 앞에 금색 바라화를들어 보이시자 가섭존자가 홀로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염화시중의 미소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 쓰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의하면 영산당시의 이 이야기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는 무아사상을 가르쳐 주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보신불과 현지사 광명 만덕 큰스님가섭존자 간의 현대판 영산회상 거염화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탐스런 수국화 한 송이를 들고 가섭존자에게 묻고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영산 당시에는 꽃을 들어 보이시기만 했는데 지금은 직접 대화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책의 관련 내용을 인용해 봅니다.


어느 날 세존께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로 뜨셔서 한 마당 작업하시고 원만보신으로 현신하셨습니다. 물론 깊은 선정 속의 일입니다.

깨끗하고 탐스러운 한 송이 수국화를 드시고 물으셨습니다.


'"이게 뭐냐?"


"본래부터 없는 것, 이름하여 꽃이라 합니다."


"이 꽃의 실체가 있느냐?"


"없사옵니다."


"영산 당시의 이 일은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를 가르치고자 함이다. 
살아 숨 쉬는 모두는 이 꽃과 같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으니 믿을 것이 없다는 무아사상을 가르침이니라."

부처님의 이 말씀은 현상계 존재의 실체 없음과 함께 현상계를 초월한 본체계가 있음을 동시에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불세존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꽃과같이 시들어 없어지는 것이니 그 무엇에 착하여 내것이다 네 것이다 분별하며 아옹다옹 하는가.  꽃과같이 인생도 허물어지는 것이니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무상한 현상계의 세계와 함께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본체게, 진제의 존재를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체계에서는 무상이 아닌 상인 어떤 실체적 존재, 무아나 비아가 아닌 진아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부처님께서는 대열반에 드시기 전, <<대반열반경>>에서 진아의 존재를 나타내는 교설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출처/2천년간 무아윤회 논쟁에 종지부        
                   영혼체 윤회론
펴낸곳/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