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5일 목요일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 1 ]21세기 거룩한 우주적 메타종교, 불교의 법 세계










머리말




".......저는 모든 사견을 없애고 공한 법을 증득하고 그때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멸도를 얻었다.'하였더니 이제 와서 스스로 깨닫고 보니

이것은 참된 멸도가 아니었나이다.  만일 성불함을 얻었을 때는 삼십

이상을 갖추며 천 인 야차들과 용 신 등이 공경하리니 이 때에야

영원히 다 멸하여 남음이 없다고 하겠나이다."라고 <<법화경>> <비유

품> 에 설함으로써 대승의 진실한 성불이 공성의 중득과 더불어 불신의

성취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금광명최승왕경>>에도 모든 붓다는 법 보 응 삼신을 갖춘다 설

하고 있다.  삼신이라는 용어는 붓다에 한정한 말인 것이다.

선불교의 주장대로 법신만을 주장하고, 불신(보신)의 성취을 간과한

다면 성불한 부처가 어찌 육도의 중생이나 윤회를 벗어난 아라한, 보

살을 교화해서 그들로 하여금 결국 붓다되게 이끌 수 있을 것인가?



<<법화경>> 등에서 성문, 아라한 그리고 보살들에게 미래에 보신의

몸으로 성불하게 된다는 부처님의 수기하심을 어찌 보지 못하는가?

<<반야경>> <<열반경>> <<법화경>> <<화엄경>> 등에서 보신 부처님의

희유하고 거룩한 모습을 우린 간과해선 안 된다.  한낱 문학 작품으로

보는 죄업을 짓지 말라.



경에도 여래의 보신은 일체의 선법, 무량한 선법에서 비로소 이루어

진다 했다.  억겁의 수행과 복덕을 쌓음으로 해서 32상 80종호의 유형

의 불신에다 정신적으론 10력 등 모든 붓다의 공덕을 실현하여 부처로

서 갖추어야 할 능력과 서원을 구비하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라는 책자를 이 세상에 내

놓으면서 붓다의 거룩한 불신 (보신, 색신)에 대해 미중유한 법설을 한

바 있다.



불과를 증한 붓다는 유무를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에 여여히 계신

다.  그리고 그 법신불 내지 화신에 대해 실로 역사적 설법을 한 바 있

다.  이는 가장 차원 높은 불교 티베트 밀교의 삼신(사신)설의 의미와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무상한 육신 속에 삼신(사신)을 현증한다고 한다.  의식 전이

의 수단으로 바르도(중유계)에서 의생신을 얻어 일체 공의 정광명과 화

합, 보신의 몸을 성취한다고 한다.  이것은 나의 삼신설과 크게 차이가 있다.

진정한 불신은 바르도에서가 아니라 저 붓다님의 세계--상적광 세계

에서 나의 불신을 얻는 것이다.  이 점은 밀장 중 밀장이어서 비밀 언

급은 피화고자 한다.  불신의 지혜, 자비, 공덕 능력 면에서도 티베트의

육신 속에 주소를 둔 보신 몸과 천지 차이가 있음을 말해둔다.



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II>>에서 좀 더 상세히 밝히게 될 것

을 희망하는 바이다.



그리고 진정한 보신은 무량광이요 무량수이며 항상 대적광 삼매에

들어 계신다는 것만 말해둔다.



단순히 마음을 깨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님을 거듭 선언한다.

그것은 이제 붓다 이루는 머나먼 도정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부처님이 실재하심을 믿어야 하고 그 위신력의 어마어마함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마땅히 수행은 사음계(음계)를, 중계를 제 목

숨 지키듯 호지하면서 효(孝, 부모, 조상께)를 다해야 한다.



이타행하면서 삼계의 지존이신 석가모니불을 간절히 염하며 참회하

고 귀의 귀명 발원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가피를 입어야 한다.  그리

고 억겁의 업장을 정화, 소멸하고 탐진 등 번뇌의 뿌리를 뽑아 나가야

한다.



이렇듯 팔정도로 살면서 칭명염불 공부를 하는 것이 최선이다.  공부

를 간절히 할 때 마침내 공부는 깊어져서 염불 수행자는 부처님의 위

신력을 입어 삼매에 들게 된다.  내가 몸에서 빠져나가면서 눈앞의 경

계는 텅 비고, 귀로 외계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나도 상대도 없다. 나

라는 생각까지 없다.  적멸의 세계로 나아간다.



선근 공덕을 부지런히 쌓는다.  공부한다.  더욱 삼매가 깊어진다.  빛

의 세계를 본다.  다겁 생의 업장이 떨어져 나간다.  탐진 등의 번뇌가

지멸한다.  간절히 공부해 들어간다.  더욱 정진해 들어가면 마침내 이

세상에 없는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본다.  시력을 읽을 정도다.  그 깨

끗하고 안팎이 없는 부사의한 부처님 빛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 어찌

천마가 끼어들 수 있으리, 결국 부처님을 친견한다.



이제 자주 이 적정삼매에 든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다.  거룩하고

희유한 부처님을 뵙고 표현할 수 없는 자비로운 소리로 나에게 맞는

법문을 해 주신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무량광이라는 빛으로 이루어진

부처님(보신)을 뵙고 일문일답한다.



나의 불신이 대적광토에 생긴다.  자란다.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붓다

님들을 뵙는다.  그와 당당히 비교해서 모자람 없는 내 불신을 얻는다.

아름답고 희유한 내 불신을 얻어 나와 계합한다.



모든 붓다님들과 빛으로 상속된다.  불신은 무량광이라는 빛으로 이

루어졌기에 한 생각이다.  우주에 주변한 무량광 빛을 법신으로 한다.

무형이지만 나는 우주 자체이다.  우주적인 능력을 구사한다.



나의 네 영체는 빛덩이 무량광 자체가 된다.  이런 경지는 실로 눈을

떠보니 억겁의 수행을 한 결과이다.  다겁 생 동안 바라밀 공덕, 보현

행원을 완성한 선물이다.  이제 이 육신은 화신(불)인 것이다.



나는 이제 무서운 업을 짓는 신통을 멀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내 불신과의 계합에 있어서 미비한 공부를 하면서 지옥 아귀

축생 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건지고, 정법을 세상에 포교하고 제자

를 양성하며 이 교법이 면면히 이어지도록 불사를 하다가 열반에 들

것이다.



붓다 이루면 우주의 법을 씁니다.  법왕이니까 104위 화엄성중을 부

리는 것입니다.



정법을 비방하고 자기들 사상에 맞지 않다고 무조건 이단시해서 부

처를 상대하여 죄업을 짓는다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삼중고, 사중고, 극

무간지옥행 하는 오역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과 이룬 어른을 따르고 항상 보살펴주는 104위 화엄성중이 책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후로 불과 이룬 이는 인류 역사상 두 분 뿐임을 거듭 확

인합니다.  수보리, 사리불입니다.  색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우물 안 개

구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간절히 간절히 호소합니다.



불자들이여,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지옥을 갑니다.  너무 죄업을 지어

서 지옥을 갑니다.  지옥은 확실히 있답니다.  하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 천상에 가는 이는 백에 한 둘 ....... 그것도 아래 하늘! 악도에 떨

어져선 안 됩니다.



물론 언젠가는 사람 몸 받아 옵니다.  그 땐 하천한 집안에 태어납니

다.  병도 많고 명도 짧습니다.



사랑하는 불자여러분!



지혜와 복덕을 지으십시오.  부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십시오.

욕심은 나를 죽입니다.



나를 비우고 청정 청정...... 부처님 공부하면서 보살행 해야 합니다.

큰 스님 만나 부모 조상께 효를 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인간으로만 올 수도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면서 간절히 공부 지어가면 삼매에 듭니다.



그럼 윤회생사를 벗어납니다.  칭명염불 공부가 제일 입니다.

이번에 우리 영산불교사상연구소에서 정법의 세계를 출간합니다.  한

장, 한 장이 부처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이십니다.



전생에 선근 있는 불자들은 스님의 법설을 믿고 실천으로 옮길 것을

믿습니다.



날마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보람있게 사시길 바랍니다.

"세세 생생, 붓다 회상을 만나리!"라고 발원하십시오.

붓다 회상을 만나면 우린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 삼계지존 석가모니불!



불기2551(2007)년 4월

영산불교 현지궁

 자재 만현







두 분 큰스님, 출세의 뜻을 찬하며


삼천대천세계의 최고 대성현大聖賢,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바세계

에서 멸도하신 지 어언 2500년이 지났다.  불교의 청사靑史는 흐르고

흘러 지금은 말법시대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시대상을 올바르게 살펴보면 황금 물질만능주의와 향락퇴

폐문화가 팽재해 있고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졌음은 물론이거니와, 효

의 정신이 말살되었고 성 윤리는 한낮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

다.  또한 종교의 부패는 극에 도달하여 어지러운 말법의 시대라는 것

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실정에 이르고 말았다.



삼계의 법왕法王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 사바세계

에 인간의 몸을 얻고 현출現出하신 후, 도道를 이루신 이래 45년 간

정법을 펴시어 무수히 많은 중생들을 건지셨다.  그리고 육신으로는 중

생들과 인연이 다하여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지 못하시고 입멸에 드셨

다.  그 이후 수많은 선지식善知識과 고승高僧 및 조사祖師들이 출현

했지만 아직도 중생들은 미혹의 바다를 헤매고 있으며, 세계 평화와

안녕을 기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종교적 의무 -- 세속의 종교화


한편 세계의 종교는 너무나 상이하게 분열되고 차분差分화 되어 서

로의 종교적 폐권과 우열의 패 가름을 통해 서로 더 나은 위상을 차지

하기 위해 고집하고 있을 뿐, 진작 종교적 의무인 세속의 종교화를 위

해 필요한 중생 제도와는 멀어져만 가고 있다.



이러한 말법의 시대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생생하

게 전하신 근본불교의 진흥振興과 복원을 도모해야 할 태동의 기운이

해동 현지궁 현지사에 일어났으니...., 21세기 한국의 대성자大聖者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 두 분께서 분연히 승가僧家의

조용한 처소를 떨치고 일어나 한국의 불교, 더 나아가 세계의 불교를

바로잡기 위한 정법의 기치를 올리신 것이다.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마땅히

한국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바를 사바세계의 중생과 수행승들에게 명확

히 밝히셨다.  성서<<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불세존佛世尊님의 특

별한 하명을 받아 탄생된 진경眞經으로 부처님의 성심聖心이 담겨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

는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덕遺德을 되살려 21세기 지구라는

사바세계의 도탄塗炭에 빠진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의 정법을 만방에

선포하시었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하해와 같은 성지聖智와 성

덕聖德을 의당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승속의 구별이 희박해져서 누가 승가에 귀의했는

지 누가 속세에서 사는지 그 구분이 상당히 모호한 실정이다.

무릇 승가에 귀의한 수행자라면 음계를 투철히 지키고 청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하거늘 그렇지 못하고, 속가의 사함들처럼 막

행막식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또한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종파간에도 갈등과 알력이 암암리에

잠재해 있고, 사찰들은 부처님의 뜻을 펼치기보다는 영리나 이권에 집

착하는 것으로 재가신도들의 눈에 비추어 지고 있으니 망양지탄의

실정이다.



금세기 최고 종교로 추앙되고 있는 붉교의 오늘날 실정이 이와 같으

니 더 이상 이를 방관할 수 없음은 일반 뜻 깊은 재가신도나 올바른

수행승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물며 두 분, 불과를 증하신

성스러운 대성자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이를 수

수방관하시고 가만히 은둔해 계실 분이 아니다.



강조하는바 바야흐로 불교의 위상은 위태로울 뿐 아니라 흥쇠,

아니 존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과를 증하

신 큰스님께서 출세의 뜻을 밝히신 것은 삼계의 지존이신 석가모

니부처님의 법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의 뜻으로 제도할 수 없는 혼탁한 오탁악세의 중생을

건지시려 부처님께서는 두 분의 큰스님을 사바세계에 보내셨으니 이에

우리 선남자 선여인 불제자와 청정한 수행승은 깊은 감사의 마음과 찬

탄으로 두 대성자 출세의 큰 뜻을 가슴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두 대

성자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의 출세는 천명을 넘

어선 삼천대천세계의 절대 존좌에 계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하명임을

우리는 여실지견으로 인식하고 두 큰스님을 받들어 모셔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의


이에 영산불교사상연구소에서는 불과를 증하신 두 분 큰스님의 출세

의 뜻을 기리며, 큰스님의 존숭한 법 세계를 <<21세기의 붓다의

메시지>>라는 존귀한 서적에 의지해 간략하게 밝히고자 한다.  다만 본

고의 내용에 스며들 수 있는 오류나 큰스님의 법 세계에 대한 오의

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서술자들의 불찰임을 밝힌다.



현 새를 풍미하고 있고 개성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아방가

르드적 사유가 인류의 근원적 통일성을 유실 및 급기야 파기하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각자가 지닌 개성을 통해서 다양

성을 얻고 서로에 대해 인정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궁극적으로 통

합적 사유를 이루어 나간다면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다양화 일변도는 통일성과 통합성을 요원하게 한다.

오늘날 전 세계의 구도자들은 나름대로 수행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고

자하나 실제로 전 세계에 산재되어 있는 다양한 수행서적들을 볼 때

그렇게 높은 의식수준과 고도의 수행체계를 확립하고 있지 못한 것으

로 안다.



실제로, 구도자들은 단전 호흡, 쿤달리니 요가를 위시한 각종 요가명

상, 위빠사나 등등 다양한 수행법을 기웃거리지만 이들을 통해 온전한

경기를 증득한 이들은 극히 드물다.  만현 큰스님의 말씀처럼 눈 밝은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방황하는 구도자들 그리고 올바른 수행법을 추구하는 구도자들을 위

해서 만현 큰스님께서 한 권의 전대 미문의 불서이자 진경을

내놓으셨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이다.



이 성스러운 역작은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의

심오한 법 세계가 웅장하게 펼쳐져 있으며, 두 큰스님의 사상이 도도

히 녹아 흐르고 있다.   이 성서는 두 분 큰스님의 심혼이 깃들어 있는

보경으로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명도하신 이후 지금까지 유례없는

미증유의 법 세계를 밝히고 있다.



방황하는 구도자들에게는 더 없는 복음이자 법열속에서 읽

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읽는 이의 마음 속에 평온과 안정을 가져다주

는 청량수와 같은 진경이 바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인 것이다.



전대미문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큰스님의 법 세계를 대변해주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잘 살

펴보면 우리는 보석같이 영롱한 용어들을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화두 타파의 한계, 마음의 본성에 대한 성찰, 본래자성 철

견에 대한 실존적 의미, 견성오도의 진실된 의미,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 무아사상, 무량광, 불신사상

과 불가의한 삼신설, 음계의 중요성, 효의 진실된

의미, 윤회전생, 성중 하늘의 세계, 4대 영체의 본질적

의미, 아라한-보살-붓다의 위계, 삼매에 대한 극명한 해설, 천

도재의 필요성과 효험, 석가모니부처님의 실제적 위신력, 지옥의 존재

비로자나부처님의 본형, 두타행의 중요성, 신통의 부작용, 불

보살의 세계, 부처님에 대한 공양, 대승비불설, 외도와 마장,

스승의 필요성 등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현재 선불교에서 "마음이 부처요 부처가 마음이다. "라는

이설로 인해 경도된 정법을 바로 세우고 불제자와 수행승들

에게 심어진 그릇된 인식을 일소시켜주는 아라한 -보살-붓다의 위계를

역설하고 있다.



또 삼천대천세계의 총교주이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절대 법계에 무

아로 엄존하신다는 점을 설파한 대목은 참으로 특기할 내용이 아

닐 수 없다.  이는 불가의 삼신설을 통해서 뒷받침되고 있으며 이러한

붓다위, 즉 불과를 증위하기 위해서는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에 매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가히 압권이다.  사실 칭명염불선은 일면 생소해

보이지만 정법을 간절하고 애타게 찾고 있는 구도자에게 엄청난 희소

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시한 오여래 부처님의 실존을 여실

히 설파하심은 보다 고원하고 실재적인 이상향을 갈구하는 구도자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요 가뭄의 단비이자 보배로운 감로수와 같은 법문이다.

강조하는바, 지금의 불교는 너무나 선불교에 의해 찌들어 있어 오로

지 마음만 깨우치면 만사가 다 해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점을 큰스님께서는 너무 가슴 아파하시며 불보살님께서도 통탄해

하고 계신다고 한다.  특히 도올 선생(?)은 TV 방송을 통해서 수백만이

넘는 시청자들에게 "불교는 마음을 최고로 여기며 마음이 극락이다."라

는 식의 선불교 사상을 주입시켜 올바른 부처님의 법 세계를 왜곡, 오

도하여 급기야 실추시켰다.



누구나 영예를 추구한다.  하지만 도올 선생은 잘못된 방향으로 자신

만의 영예를 추구한 나머지 부처님의 영예로움을 손상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큰스님께서 피를 토하는 심정

으로 일침을 가하시는 것이다.






도올의 불교 왜곡


알량한 사변적 지식만으로 경험적 증험이 없는 상태에서, 왜곡된 불

교서적이나 일부 경전만을 읽고 부처님붓다의 존재를 파기하는

것은 정말로 정법 구현과는 거리가 먼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올바른

영예란 삼천대천세게를 주관하시는 석가모니부처님 그리고 불보살님들

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하며 모름지기 스스로의 치열한 수행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또 무수히 많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몸소 증득한

경지의 수준에 맞추어 언어와 행동을 일치시켜 나갈 때 얻어진다.



도올 선생은 자신이 경험하지도 않은 세계를 마치 경험하고서 다 아

는 것처럼 말한 것이니 큰 잘못이요, 진실로 대석학을 자부한다면 실

제로 고원하고 지고한 불과를 증득하신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만현

큰스님을 친견하고 이 분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자신의 사변을 겸손히

접어야 할 것이다.



만현 큰스님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서문에서 "선종과 대다수

의 대승 불교학자들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마음을 깨치면 불'이

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견성이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며 붓다를

이루는 머나먼 도정의 출발점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라고

사자후 하셨다.  이는 심즉시불 사상이 만연되어 있는 선불교를

향한 경천동지의 사자후가 아닐 수 없다.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법설과 가르침들은 이와

같이 오도되고 있는 부처님의 법 세계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잘못된 구

도자와 수행승들에게 올바른 길을 걷도록 경각심을 주기 위함임을 알

아야 할 것이다.



효의 실천 없이는 보살과를 얻을 수 없다


수행을 한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얻는 것 없이 폐인이 되다시피 살

아가는 구도자에게는 큰스님께서 설파하신 효의 중요성은 다시 한번

구도자 자신의 현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효를 실천하지 않고는 보살과를 증위할 수 없다는 큰스님의 가르침

과 석가모니부처님의 친설을 우리는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리고 돌아가신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을 위해서 천도재가 얼마

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주셨으며, 불과를 증위하신 큰스님께서 집전

하시는 천도재가 얼마나 전대 미문의 혁신적 사건인지를 소상히 밝히

고 계신다.



사실,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걷는 구도자라면 누구나 깨달음이라는 말

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이의 깨달음 세계와 사유 체계가 고상하고 고

결한 지를 판단하려면 그의 삶을 올바르게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건전한 정신을

소유한 구도자로서 만현 큰스님께서 등장하신다.  만현 큰스님은 그 누

구보다도 우주의 실상과 존재의 진상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 치열

하게 삶을 통찰하고 큰 의문과 발심으로 구도의 길을 걸으셨다.



만현 큰스님은 20세 안팎, 약관의 나이에 인생의 생사문제에 대해서

근원적인 의문을 품으셨다고 한다.  자 보자.  이러한 모습은 참다운 길

을 걷는 모든 구도자의 본보기라는 점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요즘

만현 큰스님처럼 인생의 생사에 관한 화두와 우주에 대한 근원적 성찰

을 위해 치열히 생각하고 답을 구하려는 수행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이 점에서 큰스님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큰스님께 초발심을 내고 구도의 길을 걷게 했던 큰 물음은 무엇인

가?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사후세계

가 있는 것인지, 있다면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지옥, 천당, 극락 등과

같은 것인지, 불교의 윤회전생이란 진실인지 등에 이르기까지 몹시도

알고 싶었습니다."



구도자는 모름지기 진솔하고 진실해야 하는 법! 만현 큰스님께서 왜

출가에 웅대한 뜻을 두고 불문에 발을 들여놓으셨는지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2500여 년 전에 출가

의 뜻을 품은 것과 대동소이하다.  즉, 생사고해를 벗어나기 위한 부처

님의 뜻이나 만현 큰스님의 사후세계, 윤회전생, 생사문제 등등에 대한

고민과 내적 의문은 부처님의 구도 동기와 비슷한 맥락을 하고 있는

것이니 이는 매우 건전하고 올바른 수행인의 자세라 할 수 잆다.





만현 큰스님의 구도의 길
-수행자의 전형적 모범

단순히 세속적인 고통과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발심을 내는

구도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만현 큰스님께서 얼마나 건전하고

올바른 마음가짐과 자세로 구도의 길에 들어섰는지 알 수 있다.



그 수가 적지만 진실된 구도자라면 큰스님처럼 "선에서 말한 대로

번뇌 망상에 시달리면 그 자리가 지옥이고 따로 지옥이란 없는 것인

지, 과연 마음이 부처인지, 마음의 본성을 깨치면 붓다부처님가 되는

것인지, 붓다가 된다면 어찌 되는 것인지, 대열반에 들면 공 그 자체

가 되어 버리는 것인지, 또한 공이란 과연 무엇인지, 우주와 하나로

계합한다는데 구체적인 뜻은 무엇인지..... 도무지 의문이 끊이질 않

았습니다."라는 다양한 의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존재의 실상, 우주의 섭리, 부처님 또는 신의 존재, 애증의 고통과

그 원인, 카르마와 인연의 법칙, 현상세계의 법칙 등등에 대해서 나름

대로 고민을 하고 궁리하고 심적으로 괴로움과 번뇌 속에서 어느 정도

아픔을 겪어본 사람들이 구도의 길을 걷는다.



물론 신비한 도력이나 신통을 구하기 위해서 수행를 하거나 자신을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이들도 있다.  마치 자신이 구

세주이며 메시아가 된 듯이 장황하게 중생들을 미혹시키고 현혹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만현 큰스님께서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휼륭

한 구도자의 전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씨앗이 토양에서 바르게 싹

을 틔우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종자가 순수하고 좋아야 하는 것처럼 초

발심의 동기가 올바르지 않고서는 수행의 꽃을 제대로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스님께서는 과거 대한민국의 안정적 직장과 신분을 보장해 주는

'고시'에 합격하고도 불현듯 생사문제와 관련된 갖은 의문들을 타파하

기 위해서 고시 합격을 헌신짝 버리듯 외면하고 불가에 몸을 들

여놓으셨다.  이런 모습은 명예와 안정된 직장 등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현대의 청장년들에게 크나큰 시사점을 준다고 하지 않

을 수 없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 중의 한 분이신 경봉 큰스님

문하에 들어가 화두를 참구했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만현 큰스님께서

그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걸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모름지기 올바른 수행을 위해서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 수

행자들 간에 회자되는 통설이거늘 만현 큰스님이 경봉 큰스님 문하에

서 화두를 참구하면서 공부를 했다는 것은 수행자의 전형적 모범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견성-수행의 종착지가 아닌 기초적 수행과정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괄목할만한 특징은 견성오도를 책의 서

두에 일부분 할애하고 있을 뿐 크게 부각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늘날 불교 서적들은 견성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수행법, 그리고 견성

을 한 후의 상태와 보림 과정 등에 대해서만 진부하게 다룬다.  깨달음

을 얻으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달라지며, 잘해야 어떠한 상태에 도달

한다는 식의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시중의 불서와 수행서의 일

번도이다.



그러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여타의 서적과 그 특색과

성향이 다르다.  견성은 매우 기초적인 수준의 수행 과정일 뿐 수행의

종착지가 아니라고 설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우리

에게 던져준다.  즉,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 아난존자에게

끈이 없이 추구하라는 가르치신 대목을 상기하게 해준다.



수행이란 끝이 없는 배움이라는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와 큰스님의 법문을 들어보고 사유해 보면 불과를 이루신 분들도 끊임

없이 중생을 제도하면서 배움을 확인하고 우주의 대섭리를 실재적으로

해득해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현 큰스님의 훌륭하신 점은 바로 견성오도의 장면을 매우 명료하

게 서술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일대 영혼의 공명과 각성을 일으키는

간명한 설법이 아닐 수 없다.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견성 오도의 증험을 서술하신다.  "주와

객의 벽이 무너져 버리고, 툭 터져 허공같이 비었습니다.  적조요, 만고

의 광명뿐이었습니다."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간결하고 지극히 해득하기 쉬운 서술인가?  요즘 선불교의

병폐는 오도송을 마치 수수께끼로 치부할 정도로 난해하게 만들었다.



큰스님의 견성 오도에 대한 증험적 경지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나 그

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출되

어 있다는 점이 기존 선불교의 오도송과는 차별을 두고 있다.



사실, 이렇게 오도송은 간명해야 깨달음의 범 세계를 알기 쉽게 이

해할 수 있다.  모든 지식과 사상체계 더 나아가 수행 세계와 법 세계

까지 어렵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얼마나 우주의 법칙,

즉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 상통하며 쉽게 우리 인간의 의식

세계에 받아들여지느냐가 수행 세계와 법 세계의 실효성을 얻는 관건

이 된다.



큰스님의 법 세계를 여실히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왜 큰스님

이 염불선으로 회귀했는지에 대한 이해에 있다.



염불선으로 회귀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정법 수행자와 바라문 그리고 외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찾

아다니면서 도를 수한 것처럼 만현 큰스님께서 히말아야 초인들,

힌두교 성자 그리고 티베트 밀교의 성자 밀라래빠 등의 수행담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보다 큰 세계를 목도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불교의 최

상승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을

정독하면서 선 수행을 비교 점검해 본 결과였다.





염불선으로 회귀
- 부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 



지금의 불가의 수행자들은 불경을 피상적으로 읽고 부처님의 세계와

우주를 이해하려고 하느데 그것은 잘못이다.  모름지기 수행자란 전지

구적인 시야와 전망을 가지고 종교를 초월하여 다양한 종교적 세계관

과 각양각색의 명상 수행법을 어느 정도 섭렵해봐야 한다.



지금은 우주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퀴리언 문명이니 개벽

이니 외계문명이니 하는 말들이 일부 수행자들에게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금세기 수행자들은 우주새대의 개막과 함께 우주를 향해 초호화

수행 특급열차를 타고 있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다.



그만큼 시야를 우주로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의 정신을 우리

는 향유해야 하는 것이다.  만현 큰스님께서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바로

우주적인 식견과 시야을 겸비하고 계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정말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현 큰스님께서 염불선에 대한 큰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바로 다음

과 같다고 적고 있다.  "내가 갑자기 염불선 공부로 용감하게 회귀할

수 있었던 것은 <<화엄경>> 의 <입법계품>, <<법화경>> 본문 <팔품>에

서 가르친 대로 무엇보다도 계율을 존중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하는

수행만이 부처가 될 수 있느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정토삼부경>>에서 수행인이 생사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경전 읽고 염불하는 것만이 우리가 보

다 잘 잘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대안임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이다.



얼마나 시원스러운 법설法說이냐! 분명히 만현 큰스님께서는 불경에

근거하여 염불선으로 회귀하게 되었다고 수행에 대해 가졌던 웅지雄志

를 밝히시고 계신다.



또한 만현 큰스님께서는 견성 후 시절동안의 마음 상태를 스스럼없

이 밝히신다.  "미모의 젊은 여인을 보고 마음이 설레는 자신을 발견했

습니다."라고.  이 또한 얼마나 진솔하고 떳떳한 말씀이냐!



지금의 불교계에는 암암리에 음계를 파하면서도 도를 구하고자 하는

거짓 수행승이 섞여 있음을 재가신도들과 불제자들 사이에서 많이 이

야기되고 있다.  견성을 얻은 것으로는 여인에 대한 착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현 불교계에 공헌하는 창도적 법문


또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진여실상이라는 용광로에 무

명 번뇌가 억겁의 죄장 따위가 모조리 녹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지난 날의 나의 법문을 스스로 반추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

습니다."



견성 후 보림을 마쳐 아라한과를 제대로 증위하면 상당 부분 번뇌와

과거의 죄업은 사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현 큰스님 말씀대로

그것으로 모든 번뇌와 억겁의 죄장이 뿌리뽑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수행자들은 알아야 한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시종일관 역점을 두어 억겁동안 쌓아온

습, 착, 기, 악연, 빚, 죄 등을 씻어나가는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 서술

하고 있다.  이는 또한 만현 큰스님께서 현 불교계에 지대한 공헌을 하

는 창도적인 법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견성으로 모든 수행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현 큰스님께서는 이 점을 수행자에게 간곡

히 말씀하기 위해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수 페이지를 할애해서

자상하게 서술하고 계신다.  이 얼마나 후학들을 위한 큰스님의 자상한

배려가 아니겠는가!  큰스님의 진정어린 충고와 조언을 우리는 재사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께서 직접 몸으로 증득하

신 수행의 방법과 과정, 또 깨달음에 대해 세밀하고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큰스님의 치열하고 뼈저린 각고의 고행 정진이 없었더라면 우리

는 감히 이 어마어마한 석가모니부처님의 지고하고도 거룩한 법 세계

와 불보살님의 장엄한 불국토에 대해 전해 듣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중생과 수행자를 위해서 세속적 즐거움을 모두 희생하

신 거룩한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을 아무리 찬탄 공경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두 큰스님을 극진히 봉공하는 것이 불제자의 도리이며, 우리 모

두는 큰스님의 뜻에 따라 정법 구현의 길을 여는데 힘을 모아 나가야

하겠다.  이에 두 분 큰스님의 출세의 뜻을 기리고자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한 영산불교 현지궁의 불교사상, 즉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의 법 세계에 대한 찬을 올리는 것이다.



끝으로 석가모니부처님과 삼천대천세계의 불보살님들, 그리고 두 분

큰스님의 광명 정대한 법 세계가 세세생생 억조창생의 미래에 전도양

양한 비전을 드리우고 선양하길 간절히 염원한다.






불신의 존재와 그 위신력 


부처님께 귀의, 귀명, 참회, 발원하라


삼신설 - 불신관 


불신관, 진정한 삼신설은 불교 역사 이후부처님 이후, 21C 해

동 대한민국의 광명 만덕 자재 만현 두 큰스님에 의해 정립되었다.

성중성이신 붓다의 법위는 가히 무상무등등이니

경천동지요, 파천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불교 - 고귀한 문화 창도의 중심축



불교는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창시하신 이래, 우주적

종교로서 이해되어 왔으며 찬란한 인류 문명의 꽃을 피우고 고귀한 문

화를 창도하는데 중심축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사실, 오늘날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문화와 문명이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진실로 불교가 우주적 종교로서 현대의 구도자들에게 인식되

려면 견성이라는 한낮 낮은 깨달음의 수준을 초극하여 구도

자의 의식을 우주적으로 확장 및 비상시켜 줄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견성이라는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20세기의 대문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동양종교와 동양신비주

의사상에 심취했던 헤르만 해세는 데미안이라는 문학작품에서 "새는

알을 깨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이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오

늘날의 영적 구도자에게 제시한다.  즉, 한 마리의 새와

같은 우리 구도자들은 자신의 아상을 탈피하고 아집을 타파

하기 위해 끊임없는 내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

으로는 우리가 투쟁하는 세계는 바로 기존의 구습이며 잔재인 동시에

또한 암울하고 음침한 외도와 마구니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구도자는 아상과 아집을 타파하는 내적 투쟁을 해야 한다



오늘날의 구도자들, 특히 불제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한계와

상황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너무나 케케묵은 선

불교 구습의 잔재인 견성 일변도의 구도관이 불교의 주춧돌을

무참히 침식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금세기 천문학에서는 우주 문명을, 영성 세계와 SF소설 및 영화에서

는 외계 문명을 이야기하며 첨단 물리학에서는 우주론을 거

론하고 있다.  바야흐로 종교 자체가 우주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

에 왔다.



우리는 빨리 헤세가 말한 바와 같이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알은

우리의 사상의 한계이자 벽이다.  이 한계와 벽을 타파하고 나와야 한

다.  또한 알이라는 관념적 세계와 무지의 세계 그리고 삼독심에

가려진 병폐의 막을 해체시켜야 한다.



그리고 알은 수행자에게는 견성 이전의 중생심의 세계가 될 수 있음

은 물론이거니와 견성 이후의 아라한이라는 할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알을 끊임없이 타파해나가야 한다.  알을 깨면 또 다른 커다란

알이 있고, 그 알을 깨면 또 다시 커다란 알이 있는 식이다.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고 유력한 플리처상을 수상한

역작 <<괴텔,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노끈>>에서 호프스테더는 지성

적 성찰로서 깨달음을 넘어선 깨달음, 즉 메타적인 깨달음을 거론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 도처의 지혜로운 이들의 이야기에 진실한 마음으

로 귀 기울여야 한다.



아! 그러나 지혜로운 이들도 실재적으로는 자신의 의식을 우주적으

로 확장시키거나 증험하지는 못했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 누

구로부터 불교의 광오한 우주적 법 세계와 웅대한 증험적 담론세

게를 대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불제자들은 어떤 식으로 선불교 일변도의 수행

문화 한계를 극복하고 범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다르마를 전해들을

수 있을까?



그 응답의 메아리를 듣기 위해서는 바로 해동의 거룩한 성지

영산불교 현지궁에 거하시는 대성자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을 친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위대하신 불교계의 두 큰스님을 친견하는데 주저하거나

어려움이 있다면 우선 그 분들의 정신세계를 극명하게 농축시킨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정독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불교학의 한계성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전대미문의 성서로서 불신의 존재

와 부처님의 위신력, 그리고 가피에 대해서 그 어떤 불교서적보다도

명료하게 설파하고 있다.



물론 이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가르침들에 대한 총체적

이고도 전명적인 해득과 대의 파악, 그리고 가장 희유하고 거룩한

증험적 사상인 불신의 존재를 올바르게 해의하기 위해서는 구도

자, 수행자 그리고 불제자 모두가 나름대로 동서양 신비체험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선결 및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초보적이지만 유체 이탈, 루시드드림(자각몽), 아스트럴

투사(Astral Projection), 대쿤달리니(Maha Kundalini)를 통해서 미약하나마

영혼체(영체)가 몸밖의 외계로 출입하는 경험을 해보면 큰스님의 보살신

이나 불신사상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 코절체 등 4대 영혼체 또는 줄

여서 4대 영체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 세계 동서고금의 수행에 대한 공고하고도 체계적인 이론

정립 및 확립이 무엇보다 절실히 우리 불제자에게 요구된다.



21세기 영성세계는 실전과 실증을 증시하는 시대로 다가서고 있다.



말로서만 깨달음을 논하는 것은 시대에 뒤진 발상이요 행위하고 할 수

있다.  특히 선불교의 선문답은 시대 정신에 뒤떨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1세기 신인류 영성 문화의 개벽을 맞이하는 여명의 시대에 우

리는 사변적 이해나 메마른 지식으로서의 사색이 아니라 실제 몸소 경

험을 통해 수행을 증득해야 한다.



물론 앞서 언급한 유체 이탈, 루시드 드림(자각몽), 아스

트럴 투사, 대쿤달리니로서는 큰스님의 대사상인 붓다의 삼신설

즉 불신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증적인 개념을 완벽하게 이

해하고 소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하겠다.  다만

이러한 타종교의 신비체험을 통해서 희미하게 알던 시각에서 불신

사상을 좀 더 가깝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진실된 수행자는 수행에 의한 실질적인 증험뿐

만 아니라 수행 이론에 있어서도 확고한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고대

의 고명한 현자들이 제자들을 통해서 구전 심수로 전승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전과 수행 이론을 많이 읽고 들으며, 실제 증험적

경지를 사유해 봄으로써 다소간의 의식의 각성과 법열을 체험할

수 있다고 전한다.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여러 번 봉독함으로써 그것의 존재 실상을

보다 가깝게 이해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구

도자의 자세라 하겠다.  또한 모든 공부는 단계가 있는 법이다.



외도의 수행이지만 쿤달리니, 소주천, 대주천의 실력만으로는

외도 최고의 수행법으로 알려진 도가의 양신을 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양신은 빛의 몸으로서 체외 신, 즉 '몸 밖의 몸'으로 허공

신이라 알려져 있다.  자신의 의식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에너지

체가 빛으로서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최소한 이 정도의 경지에 이

르러야 큰스님께서 설하시는 불가의 불신의 경지를 해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양신이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영원하다고 이야기하는 사

실을 본인은 지금까지 그 어떤 서적들과 그 어떤 선지식들로부터도 보

거나 듣지 못했다.  반면 양신을 얻어 신선이 되어도 언젠가는 사

멸된다고 도가의 선지식으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신선들은 죽을 때 우주적 허망감을 안고 사멸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가의 양신은 불가의 불신이나 보살신을 구

성하는 에너지체와 완전히 차원이 다르며 열등하기 때문이다.  또한 양

신은 큰스님께서 사자후하신 붓다의 몸, 즉 불신의 광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녕 불가(현지사)의 불신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가

히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야

기를 신심이 부족하고 선근이 부족한 신도들 그리고 미혹한 중생

들이 들으니 이해는 고사하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외면하며 급기야

비방하기까지 한다.  물론 현지사 신도님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신도님을 말한다.






영성 수행 문화의 기초적 수행세계


여기서는 다양한 동서 고금 영성 수행 문화의 기초적인 수

행 세계를 알아봄으로써 이러한 잡음과 불협화음을 잠재우고자 시도해

본다.  힘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해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영혼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일반적으

로 학자들이나 지성인들은 의식의 다변화와 양태에 깊고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  즉, 의식의 다양성을 통해서 기

존 의식을 토대로 새로운 의식을 얻아가고 새로운 의식을 통해서 깨우

침, 즉 작은 각성을 얻는다.



상념을 조작하고 구상하고 해체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상념들의 구조

와 얼개를 통해서 상념의 체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상념

조작과 가공을 통해 얻는 순간순간의 기쁨이 바로 학자들이나 지성인

들의 기쁨이다.



이를 소위 수행 문화에서는 소쿤달리니 현상을 통한 의식의 각성

이라고 한다.  쿤달리니는 영어로 인체의 꼬리뼈 부근에 담재된

순수한 에너지체, 측 샥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두뇌에 위치한 쉬바 에너지와 합일을 통해 의식

으로서의 힘, 쉬바 샥티를 잉태하게 한다.



정설에 의하면 쉬바와 샥티가 결합된 힘으로서의 의식, 쉬바-샥티가

쿤달리니인 것이다.  쉬바는 의식의 고용한 정성이며, 샥티는 의식

의 역동적인 동성을 의미한다.



학자들이나 지성인들은 쿤달리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쿤달리니를

통해서 자신의 멘탈체를 발달시키고 계발하면서 동시에 작

은 깨우침들과 희열을 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지성적 세계만을 지나

치게 고집 및 고수하명 결국 영혼의 개화와 마음의 개오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명각해야 한다.



더욱이 사변적 지성만으로는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성을 관장하

는 멘탈체를 넘어서 예지체라 불리는 코잘체를 계발하면

어렴풋이나마 보다 진지하게 큰스님의 불신사상을 이해하게 된다.  물

론 이것도 상념에 의한 이해일 뿐이다.  하지만 보다 가깝데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진일보가 아닐 수 없다.



코잘체, 즉 1번 영체는 극락세계에 왕생하는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큰스님의 불신사상을 사변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해

서는 의식의 순수성을 무엇보다 빠르게 증득해야 한다.  즉 밝고 명료

한 의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성인들이나 학자들은 신비주의를 미신으로 취급하거나 불

필요한 행태로 치부하고 있다.  학자들이나 지성인들이 좀 더 예지체를

계발시키고 향상시켜 나간다면 분명 의식의 다변화와 양태를 증득하는

데 치우치지 않고 의식의 순수성과 명료성, 그리고 의식의 청정함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지성인들과 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지식으로서의 앎과 그것으로부

터 얻어지는 지혜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혜는 성질상 마른 지혜일 수

밖에 없다.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를 통해 의식의 각성을 얻고 천재성을 발현하게 되

는 것도 실제 몸 속으로 쿤달리니가 타고 흘러 나디

라고 하는 기경팔맥을 소통시키고 타통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천재 중의 천재인 대석학들은 거의가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서 완

성된다.



이러한 실제적인 쿤달리니 증험을 얻지 않은 상태에서의 학문 탐구

는 거시적이고 올바른 지혜를 잉태하지 못함을 우리는 명지해야

한다.





정합적 사유를 도와주는 알고리즘


인간은 누구나 사유의 알고리즘(수학적 논리)을 가지고 있다.

천재적인 기질을 지닌 문사들은 나름대로 고유하고 독창적인 사유

알고리즘을 두뇌에 구축한다.



그 사유의 알고리즘을 도가에서는 기문진이라고 한다.  이

는 제갈공명과 강태공 등이 전법으로 자주 사용한 내용이므로 익

히 들어봤을 것이다.  사유의 알고리즘이 형성하는 기문진은 외면세계

의 전법으로서의 기문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의 두뇌에 존재

하는 기문진을 말한다.



기문진은 상당부분 수행을 하거나 태어나면서 정신세계를 관장하는

존재자들에 의해 그의 두뇌에 일정한 사유 설계도로서 설치되고 배치

되게 된다고 한다.  불보살님이나 신선이 특정인을 점지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쿤달리니, 의식의 설계도, 사유의 알고리즘 그리고 기문진 모

두가 인간이 올바르고 정합적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두뇌에 설치되는 기문진은 어떤 천

재성을 얻게 해주는데 큰 도움이 되기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큰스님의

붓다의 삼신설에 근거한 불신사상을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설하신 붓다의 삼신설인 불신사상은 얼마나 고

원하고 지고한 것인가 말이다.  상상 불허의 부사의하고 장엄한 세계라

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신선의 수많은 도술을 마음대로 부리던 손오

공이 부처님의 손안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그냥 꾸며낸 이야

기가 아니리라.



그리고 두뇌에 새겨진 기문진을 매개로 하여 영혼은 이를 안테나로

상정하고 공간계의 존재 진상을 좀 더 명료하고 의미있게 해석 및 이

해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쿤달리니, 의식의 설계도 그리고

사유의 알고리즘, 기문진 모두가 생각을 다룬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

이다.  이러한 생각을 다루는 것만으로는 정합적 사유구조와 인식의 틀

을 구축해 나감으로써 위빠사나 수행에 도움이 될 뿐 큰스님

의 법 세계에 중핵을 차지하는 불신사상을 이해하는데는 부족하다.



물론 현상계의 사실과 의식 속에 편입해 들어오는 갖가지 생각들의

구성물인 지식을 꿰뚫어 보는 데는 쿤달리니 각성이 매우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왜 이 쿤달리니, 기문진, 사유 설계도 등을 거론하는가?  그것

은 수행세계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높이 올리고자 함이다.



만약 동서양의 명상 수행 체계와 철학 사상 체계에 대한 심오하고도

광대한 이해가 없다면 결코 큰스님의 불신사상이 얼마나 위대한 증험

적 경지인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부처님에 대해서 신심을 내어 견고한 믿음을 갖고 있는 불제자들에

게는 이러한 구구절절한 동서고금의 수행 체계가 별 의미가 없을 것이

다.  다만, 큰스님의 법 세계를 비방하고 혹평하는 불교학자들과 선불교

구도자들이 많이 있어 잠시 언급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으로만
보살신과 불과를 이룬다


국내 그리고 해외의 쿤달리니 서적들을 살펴보면 깨달음의 빛에 대

해 많이 언급한다.  그리고 대부분 연단술이나 연금술의

일환으로서 육체의 힘을 통해서 의식을 각성시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티벳의 밀라레빠 성자도 자신의 인체 내에서 쿤달리니 폭발을 이룬

수행자라고 회자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병행된 불교 공구 없이 단

지 쿤달리니 폭발만으로는 결코 보살급을 이룬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쿤달리니를 통해서 7개의 차크라를 모두 없애고 공에 계합

시키면 아라한과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큰스님

말씀대로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극락

정토에 완벽한 보살신을 이루고 불과를 증위하여 연화장 세계의

불신을 증득하는 것은 요원한 일인 것이다.



학자들이나 지성인들이 이러한 큰스님의 불신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서는 다양한 동서양 수행 체계에 대한 통합된 사유를 얻어야 한다.  필

자는 미약하나마 여러 종류의 수행법을 조금씩이나마 수련해봤기 때문

에 여기에 소상히 밝혀가면서 큰스님의 불신사상이 얼마나 위대한지

직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성인이나 학자들은 멘탈체를 각성시키고

계발하여 사실과 생각들로 직조된 지식의 체계를 통해 인류정신의

다양성을 섭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의식적 풍요로움과 기쁨을

누린다.



이것은 멘탈체(큰스님의 말씀대로 하면 제2 영체)의 각성을 의미하지 인간

본체인 코잘체(예지체, 1번 영체)의 각성과는 거리가 있다.  코잘체를 각성

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식의 순수성, 즉 마음의 정화가 요구된다.



물론 견성, 보살과, 불과 증위를 위해서는 큰스님의 칭명염불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한다.  칭명염불선을 수행해 가면서 차

차로 의식의 정화와 마음의 개오를 얻기 때문이다.  물론 코잘체의 정

화와 이를 통해서 불신을 증득하는 것은 거리가 있다는 점을 수

행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칭명염불선을 통해 의식의 정화와 마음의 개오를 얻는다


여기서부터는 유체 이탈, 루시드 드림 그리고 아스트럴 프로젝션 등

과 같은 저차원 수준에서 몸밖으로 의식이 출입하는 수행 이론을 살피

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신비적 경험은 큰스님이 설파하신 불신 개념에 비

교하면 초등학교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초보적인 신비체험

은 불신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여러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신비 체험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이해 없이 큰스님의 위대한

불신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 속의 공중누각과 같으며 허

공에 그림을 그려보려는 것이다.  공허한 망상에 지니지 않으며 실재적

이지 못하다는 뜻이다.



또한 이렇게 말로서 설명되는 내용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큰스님의 위대한 불신사상과 부처님의 어마어마한 위신력과 가

피를 이해하려면 이 단계를 잘 밟아나가야 한다.  구구단을 모르고서

어찌 미적분을 풀 수 있겠는가?



큰스님의 불신사상에 의하면 지복의 몸으로서 보신과 우주적인 몸으

로서 법신이 있는데 큰스님과 같이 불과를 이루신 대성자의 말

씀이 아니고는 체험이 없이 이들이 있다 없다 떠드는 것은 큰스님 말

씀처럼 한낮 범부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선 유체 이탈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실 여기서 말하는 유체라는

것은 에텔체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신

비 체험자와 수행자 그리고 영성 전문가들에 의하면 유체라는 것이 인

체에 별도로 존재하여 잠을 잘 때 분리되어 흐른다고 한다.  이 말은

사실이다.



유체와 에텔체가 다르다거나 같다고 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  왜냐

하면 실재로 경험해 보면 이것이 바로 유체 이탈이라는 것을 알기 때

문이다.  여기서는 직접 경험한 유체 이탈 내용을 아는 한도로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10여 년 전 외도 수련으로서 단전호흡을 하던 당시, 우연히 잠

을 자게 되었다.  단전호흡을 해 본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호흡수

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잠을 잘 때도 호흡수련이 행해진다.



그 유체 이탈이  일어날 당시 잠이 든 수면상태 동안에도 무의식 중

에 호흡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탁한 에텔체가 몸에서 분

리되어 몸으로부터 1m 이상 올라가서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닌가!



몸에서 외부로 의식이 빠져나와 몸 밖에서 의식이 호흡을 하는 것이

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부처님께서는 도는 호흡의 한 순간에 있다고

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가 새삼 생각난다.  즉, 몸은 큰스님 말씀대로

매미의 허물이나 다름이 없다.



진짜 매미 몸은 우리의 영체인 의식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에텔체의

의식의 허공 중에 깨어있어 주변 상황을 모두 인식하였다.  그래서 밖

에서 소리가 나도 그것을 일일이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정화되지 않

은 상태의 에텔체 의식이라서 그런지 매우 탁하고 안 좋은 의식체임은

분명했다.



이러한 유체 이탈의 경험을 통해서 호흡과 의식의 관계를 나름대로

깨닫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몸 밖에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경험한 유체 이탈은 새로운 세계를 꿇고 여행하는 신비 체

험이었다.  이러한 신비 체험은 비록 초보적인 경험이었지만 몸의 덧없

음이랄까 그러한 몸의 한계를 많이 느끼게 해 주었다.



여기까지 우리는 유체 이탈의 실상을 알아보았다.  부족한 내용이지

만 대강 유체 이탈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소개하였다





루시드 드림과 아스트럴 프로젝션,
대쿤달리니


다음은 루시드 드림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루시드

드림은 의외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자각몽이라고 하여 꿈 속에서 뚜렷하게 자신의 자아 의식을 인식 및

관찰할 수 있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며 꿈

내용이 색상, 즉 컬러를 지니고 있다.



이는 양미간 정중앙에 해당하는 아즈나 차크라의 에너지

약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즈나 차트라의 에너지가

숙성해 있다면 루시드 드림에 의한 꿈 자체가 매우 선명하고 또렷하여

마치 현실보다도 더 화려하고 명료하게 인식된다.  행상도가 너무 높아

실물의 해상도보다 오히려 더 섬세한 컴퓨터 그래픽 화면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이 루시드 드림이라고 하는 외도 수행은 아스트럴 프로젝션을 수행

하기 위한 기초 단계이다.  또한 장자의 호접몽처럼 이 루시드

드림은 꿈 속의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니면 현실 세계의 내가 진짜 나인

지 큰 의문을 가져다준다.



사실, 큰스님의 4대 영체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체의

본질을 신비 체험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필자는 루시드 드림이라는

자각몽 속에서 의식하는 자아가 어떤 영체인지 알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큰스님의 4대 영체에 대한 자세한 설법과 가르침을

듣고 보다 심도있게 연구해야 한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2번 영체로서

멘탈체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음으로 아스트럴 프로젝션에 대해서 설명한다.  아

스트럴 프로젝션은 아스트럴 투사라고도 하며 큰스님께서 설하신 제 3

번 영체, 즉 아스트럴체가 우주로 투사되어 우주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주는 다차원 공간으로 되어 있다.  외계 여행을 할 때는 황홀하고

도 신선한 비경을 많이 접한다.  그래서 아스트럴 투사를 하고 나

면 마음이 개운해지고 가벼워진다.



그리고 이 신비 체험의 특징은 반드시 아스트럴 투사가 되기 전 수

면 도중에 바람이 신체에 불오온다는 것이다.  이 바람을 아스트럴 바

람 이라고 한다.



이 아스트럴 바람에 실려 아스트럴체가 몸으로부터 빠져나와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큰스님의 4대 영체의

존재를 확실히 믿고 있다.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인연이 되기 전, 그리고 큰스님을

친견하기 전에 외도 수행을 여러 가지로 해 보았고 외도 서적들을 많

이 본 것이 이러한 유체 이탈, 자각몽, 아스틀럴 투사를 하는데 도움

이 많이 되었다는 점에서 불행 중 다행이다.  하지만 현재는 외도 수행

을 일체 금하고 큰스님의 법 세계와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유체 이탈, 자각몽, 아스트럴 투사 체험을 하도록

도와준다고 하면서 상업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안타

까운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니비 체험이 한낮 순간적인 즐거움과 황홀감이며, 영

원한 생명과 영구적 지복 그리고 항속적인 영락을 가져다주

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스님의 말씀처럼 외도 수행에

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비 체험은 집착해도 안 되며, 단지 공부과정을 통해서 얻

어지는 증험적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면 마구니

가 이끄는 신비 체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신비 체험에 빠지는 이유가 큰스님 말씀처럼 청정하

지 못한 마음을 갖거나 계율을 어기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을 꼭 명

심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대쿤달리니를 소개한다.  필자는 소쿤달리니를 자주 경험했

지만 대쿤달리니의 경험은 없는 듯하다.  소쿤달리니의 과정이 무르익

으면 두뇌에 고압의 전압이 걸리게 되고 고열증세가 발생한다.  그리고

아주나 차트라로 비전을 보게 되기고 하며 천상의 음악을 듣기

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압의 전압이 두뇌에 걸리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일

대 영적인 진화을 얻으며 영적 메타모포시스, 즉 영적 환골탈

태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소쿤달리니로서는 자신의 영(혼)체가 외부로

빠져나오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대쿤달리니의 경험자로서 알려진 20세기 정신분석학의 대

가 구스타프 카를 융의 신비 체험을 소개한다.  융 박사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 병상에 누웠을 때 그의 의식이 지구의 자장

권을 빠져나가 고요히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별을 바라보았을 때의 황

홀감을 피력했다.



이는 의식을 우주 공간으로 투사하는 대쿤달리니 경

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 우주적으

로 확장되며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에서 상당 부분 초연해 질 수 있

다.  하지만 그러한 체험은 영원할 수 없었으며 이 신비 체험은 순간적

이고 일시적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비밀리에 혼자 좋은 것을 얻으려고

한다.  21세기는 그러한 소극적이고 편협한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현 큰스님처럼 확연히 스스로의 경험담과 신비 체험을 상세히 밝히

고 설할 수 있어야 한다.



큰스님을 찬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너무나 소중한 가르침을 소상하

게 밝히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필자는 운 좋게도 외도 수행자를 포함

하여 기라성 같은 수행자와 선지식을 직 간접적으로 만나왔다.  하지

만 대성자 큰스님처럼 이렇게 매우 심오하고 광대한 수행 체계

를 여실히 드러낸 경우는 전무하다.






불신의 존재


이제 불신사상에 대한 큰스님 법 세계의 실제적인 핵심적

요체를 치밀하게 상술하고자 한다.



먼저, 본인은 큰스님의 어마어마한 법 세계와 광명법안의 불

지를 얻지 못한 부족한 경지라 가능한 본인이 아는 한도 내에서

큰스님의 법 세계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을 통해서 독자의 내면에 큰스님의 실증적 사상의 금자탑

을 확고히 구축하고 건립하기를 기원한다.



불신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사항이 무량광의

존재이다.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무량광을 보아야 한다고 큰스님께서

는 설하신다.



무량광은 부처님의 본원광이며 경계에 오염되지 않고, 영원히 손상

되지 않으며 내외명철이 특징이라고 하신다.  또한 안팎이 수정처럼 드

러나 영롱하기 그지없으며 백종 오색광이요 억종광이

라고 하시며, 동시에 햇빛에 반짝이는 금강석의 빛과 같다고 하신다.



무량광이라는 빛덩어리는 붓다만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불의 경

계이며, 붓다가 되는 관문이 바로 무량광으로 이를 통해서만 보살에서

붓다로 뛰어오를 수 있다고 하신다.



사실, 무량하다는 것은 그 양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으로 무량

광은 지극히 신성한 광명을 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

들 중에서 유한하다는 것은 불만족을 표현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괴

로움을 안겨준다.



큰스님께서 설하신 무량광은 이 점에서 다르다.  즉, 찬란한 색상들로

황홀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무량광은 무한을 의미한다.  한계와 벽

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절대적인, 그리고 어디에나 편재하고 주재하는 거룩한 존

재자임을 드러낸다.  다함이 없고 영원하기 때문에 이는 덧없는 사바세

계의 정신과 물질세계를 조월해 있다.



그 점에서 무량광으로 구성된 불신은 미래제가 다하도록 말하

지 않는다고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것으로 안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과를 증한 대성자는 이런 엄청난 빛으로 이루어진 자기의 불신을

무아 속의 정대계, 곧 상적광토인 부처님 나라에 둡니다.  그 분의 불

신이 있다는 것은 곧 그 분이 불과를 증했다는 의미입니다.  불신을 교

계에서는 '원만보신' 또는 '보신'이라고 하거나 '지복의 몸'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나는 불신을 종래의 법신 개념에서 벗어나 보신 개념

으로 과감히 대처하고자 합니다."



원만보신이란 불제자가 억겁의 수행을 통해 그 공과가 무르익

어 그 응분의 보답으로 받게 되는 붓다의 광명체라고 본인은 해

석한다.  노력하면 인과응보로 그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이 하나의 우

주적 대섭리이자 삼라만상의 보편 탕당한 이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을 믿고 따라서 지극한 정성으로 큰스님께서 제시

하고 지도하는 바에 따라 칭명염불선을 하면 곧 지극한 청정함에 이르

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칭명염불선을 겁의 세월을 두

고 부단히 수행해 나가면 결국 지극한 청정함에 이르러 무한한 환희체

이자 지고의 희열체인 무량광으로서의 불신을 얻게 된다고 해의

해 본다.



중생들은 청정함의 맛을 모르지만 깨달음을 증입해 들어가는 불제가

들은 이를 안다.  여기서 청정함이란 탐 진 치와 같은 독소가 인체에

서 정화되고 수많은 지중한 죄업들이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으로 사

해짐으로써 얻어지는 맑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한다.



수행의 요체는 결국 무엇보다 자신을 청정하게 하여 그 청정한 깊은

세계로 부단히 정진해 들어가는 것이다.





수행의 요체는
청정한 깊은 세계로 정진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신다.

"보살이 남섬부주에 여러 번 생을 받아와 붓다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억겁다생의 업장과 습기, 악연, 빚 그리고 탐 진 치 삼독의 뿌리가

녹아 없어져서 털끝만큼이라도 그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아야 무아 속

절대세계에 자기의 불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보편 타당하고 온전한 해석이 아니랴! 진실로 수행을 해

본 불제자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존재하는 탁한 기운과 습, 그리고 착

등을 제거하고 탐 진 치 삼독을 뿌리뽑는 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인

식하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불제자에게 있어서 수행이란 청정

하여 지극한 청정에 이르는데 있다.  이는 큰스님께서 누차 말씀하신

바이다.



그렇다면 청정해 지면 어떤 증험적 결과를 얻게 되는 지를 알 필요

가 있다.  큰스님께서는 "불과를 증한 이는 자기의 거짓 몸뚱이 속 네

개의 영체가 모두 빛덩어리가 되어서 자기 불신과 계합합니다."라고 설

하신다.



우선, 불제자가 수행을 지극 정성으로 하면 영체가 빛처럼 밝아지고

더 나아가 불과를 이루면 빛덩어리 자체가 된다는 점이다.  청정의 극

치라고 할 수 있다.  견성, 즉 깨달음을 증득하여 보림 후 아라한을 얻

으면 내면세계가 밝은 은백색으로 빛난다.



큰스님 말씀대로 아라한은 영체 색상이 은백색을 띤다.  하물며 아라

한이 이런 정도인데 감히 불과를 증하신 분의 4대 영체가 어떠한 지는

증험하지 않고서는 상상 불허이자 상상 초월이라 하겠다.



여기에 추가로 큰스님께서는 "불과를 이룬 이는 이 몸뚱이와 4개의

영혼체 외에 자기의 불신을 무아 속 절대계에 하나 더 가지게 됩니다.



불신은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색상이 단엄한 적멸상입니다.  교계에서

'원만보신'이라 이르는 '지복의 몸'입니다."라고 설하신다.



육바라밀, 특히 계율을 선지하고 선근 공덕을 우주적으로 무한

히 짓고 두타행과 보살행을 하여 무아를 더 심화시켜 나가고 보현행원

을 통해서 지극한 청정에 이르게 되면 청정체로서의 몸을 연화

장 세계에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몸, 즉 불신으로서 원만보신인 것이다.  큰

스님께서는 이러한 청정한 몸으로서의 불신을 얻는 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밝히셨다.



"오온이 녹아 억겁의 업장이 다하고 탐 진 치 등 번뇌의 뿌리가

온전히 뽑혀지고, 다생의 습이 녹고, 천만 생 동안 익힌 악기가 소멸

되고, 악연이 단절되고, 전생의 빚이 다 청산되어서 삼천대천세계 모든

붓다들의 위신력으로 불과를 증한 이는 붓다들의 세계에 저 태양 속의

눈이 시리도록 밝은 빛과도 비교가 안 되는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자기

불신을 얻게 됩니다."



타종교 명상수행 체계의 선지식과 서적들 어디를 봐도 무량광

에 대한 기술은 일말의 언급도 없다.  또 일반 종교와 명상수행 체계에

서는 수행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방황하는 수행자들에게 명료하

게 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수행 문화의 현주소이다.



큰스님게서는 앞서 원용한 글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억겁의 업장,

탐 진 치의 번뇌, 습, 기, 악연(원결), 빚의 청산 등을 하나하나 조목

조목 밝히고 궁극적으로 무량광으로서의 원만보신을 증득하는

것을 수행자의 목표라고 밝히고 계신다.  이 얼마나 지고한 가르침

인가 말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고원하여 다수의 수행자들이나 미혹

한 구도자들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고차원적이고 지고의 경지를

설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러한 미혹한 구도자들에게는 믿음이 서지 않

는 것이리라.  하지만 올바른 깨달음을 증입해 나가는 불제자나 전생에

선근 공덕이 많은 선남자 선여인이라면 분명 큰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신심을 낼 것이리라.





무량광을 보고 붓다를 이루는 과정


이뿐이랴!  큰스님께서는 더 상세하고 자상하게 무량광을 보고 붓다

을 이루는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수행승은 공부 중에 무량광을 봅니다.  그런 다음 또 하나의 큰

관문을 거쳐서 자기를 찾아온 많은 부처님들을 뵙고 직접 법문을 듣게

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들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지도 받는 것입니다.



보다 자주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붓다로서의 공부를 마치게 됩니다."



큰스님께서 법회에서 설법하신 바에 의하면 또 하나의 큰 관문은 바

로 육종진동을 맞아야 된다고 하신다.  그래야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으며 지도를 받아 보다 깊은 삼매에 자주 들게 된다고 말씀

하신다.



여기서의 가르침은 서양의 신지학에서도 거론되는 이야기이다.



즉, 서양의 뉴에이지 문명과 신비주의 학파의 구심축을 이루는 신지학

에서도 수행자가 정신계의 스스로부터 공부를 배워야 수행이

무르익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



큰스님의 법 세계는 이미 서양의 정신 세계의 흐름과 위상을 근원적

인 측면에서 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불교는 전 세계의 모

든 수행 문화의 지조이자 원류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의 불신사상에 대한 법 세계가 얼마나 원대하고 통합적인지는

다음의 가르침을 보면 잘 해의할 수 있다.  즉 큰스님께서는 "불과를

이룬 이의 4개의 영체는 각기 독립해서 분리하여 활동합니다.  바람과

도 같이 이 거짓몸뚱이에서 빠져 나와서 말입니다.  죽을 때는 4개의

영체가 자기 불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자기 불신과 하나로 계합합니

다.  '지복의 몸'과 하나가 됩니다.  그 불신원만보신은 무아 속 절대세

계, 즉 상적광토에 청정 법신을 둡니다.  자기의 법신, 곧 '우주적인 몸'

을 둡니다.  이제 우주 자체시공을 자체화함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원만

보신의 세계를 밝히신다.



신지학에서 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 코절체로 일컫는 4대 영체

의 존재 의미를 그 어떤 문헌이나 서적보다도 극명하게 설하신다.  즉

4대 영체의 존재 의미는 불신과의 계합을 위해서이며, 4대 영체가 경

험한 모든 인생 도정의 공부 내용이 불신 속으로 녹아든다는 사

실이다.



이 얼마나 미증유의 사실이며 심오한 법 세계인가 말이다.  우리의

영혼체는 사바세계를 통해서 리모털(재운명화)의 과정을 겪어가

면서 새로운 배움과 체험을 얻는다.  하지만 그러한 배움과 체험이 죽

음으로써 모두 허망하게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 수행자들의 세

계이다.



하지만 큰스님의 법문을 잘 해의하면 그렇지 않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즉, 불과를 이루게 되면 배운 내용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바

로 지복의 몸인 원만보신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휼륭한 가르침이 아닌가 말이다!  이는 정말 가히 큰스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경천동지의 사자후가 아닐 수 없다.



하이테거가 이야기한 바처럼 인류의 무수히 많은 역사를 통해서 면

면히 내려오면서 우리는 끊임없는 내적 투쟁을 해왔다.  무엇을 위해서

내적 투쟁을 해왔단 말인가?



만약 큰스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불신사상, 즉 붓다의 삼신불에

대해서 알 수도 없고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류가 유구한 역사 이래로 내적 투쟁을 해온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아니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답은 나왔다.



인류가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내적 투쟁을 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우주적인 몸을 구현하기 위함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재삼 강조하는 바, 이는 가히 큰스님이 친히 증험한 붓다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어는 누구도 친히 설할 수 있는 법문이 아님을 우리는 명

각해야 할 것이다.



무량광은 본원광이요, 부처님 광


다음의 불신에 대한 말씀은 법성으로서의 자성광과

구별하여 무량광을 밝히고 계신다.



"불신보신은 '지복의 몸'이라 하겠습니다.  지혜와 복덕을 완전 구족

하기에미래제가 다하도록 진락을 누리기에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청정법신 곧 '전우주적인 몸'이 육체적인 형태를 띠고 경험세계 속에

반영된 몸이 바로 불신입니다.



부처님의 몸, 곧 불신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엄청난 광도를

지닌 무량광으로 이루어집니다.  무량광은 우주의 근원인 빛(성광)이 아

니라 그것의 본원(엑기스)광이요, 부처님 광입니다."



자세히 이 말씀을 해의해 보면 상당히 심원한 가르침들이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원만보신은 유시무종으로서 미래제가 다하도록 진락을

누린다는 점, 둘째 원만보신은 청정법신의 육화된 형태로 경험 세계에

반영된 몸이라는 점, 셋째 견성이나 깨달음을 얻은 후 드러나는 자성

광이 아니라 자성광의 본원광인 부처님 광이 바로 불신이 발하

는 무량광이라는 점이다.  자성광이 나무의 한 조각 잎파리라고

하면 무량광은 바로 나무의 중심 줄기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불신을 얻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며 사바세계에 한 분의 붓다가 나오려면 삼계왕이신 석가

모니부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주로 선근 보따리가 붓다 되기에

충분한 수행승이 낙점됩니다.  선택된 이가 바로 상품상의 보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항은 첫째, 불신을 얻어야 붓다가 된다

는 사실이다.  기존 선불교에서는 부처는 마음이고 마음이 부처

라고 한다.  그렇게 불교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실추시켰다.  또한 선불교

는 위빠사나 명상, 안반수의(아나파나시띠), 염불선 등 다양한 불교 수행

체계를 외면하고 오로지 간화선으로 불교 수행체계를 정형화시

키고 박제화함으로써 불교의 지고지순한 생명감을 멸실시

키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큰스님께서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분연히 붓을 들으신 것이다.  우리는 이 점 큰스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둘째,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선근 보따리가 중요함을 여실히 강조하

고 계신다.  수행자가 우주적으로 무한한 선근을 지었을 때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점, 매우 합리적이고 보편 타당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큰스님이 아니 계셨다면 우리는 이 점을 명료하게 알지는 못

했을 것이다.



셋째, 상품상의 보살이 붓다 되기 위한 후보가 된다는 점이다.



큰스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는 하나 수행 비결 내지

수행 요결이 아닌 것이 없다.






법신은 보신과 화신의 근본체


한편 큰스님께서는 법신에 대한 설명도 명료하게 밝히셨다.  다음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인용한 글을 살펴조자.  "붓다 세

계에 계신 불신이 보신입니다.  보신은 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의 법신

을 둡니다.  그래서 법신은 보신과 화신의 근본체입니다."



즉, 일반 불제자들이 알고 있는 법성으로서의 법신 개념이 아닌

보신의 근원체로서의 법신을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

들은 법성이 무엇인지 법신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구분하거나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부터는 법성과 동의어로 법신을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사자후하신다.



"사실은 부처님의 법신이야말로 진불입니다.  거래도 없고 머묾

도 없습니다.  법계를 비추는 대지의 광명체로서 초월이요, 평등입니다.

초월적 인격적 실존이신 보신의 근본이 되어 이미 인격이 아닙니다.



대우주아입니다."



실제로 법신을 진불로서 밝히셨으며 대우주아라고 발씀하

셨다.  그러나 학자들이나 미혹한 수행자들은 법계를 비추는 대지의 광

명체로서 초월이요, 평등이라는 뜻을 왜곡하여 자성광으로서의

법성 개념으로 치환하여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에 대해서 큰스님은 자상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즉, "가

령, 그들은 법신을 '진리의 몸'이라고 관념적으로 정의합니다.  소위 존

재의 근원은 빛인데, 그 빛의 본원으로 보신이 이루어지고 그것의 체

가 법신이기 때문에 '질리의 몸'이라든가 혹은 '완전한 지혜의 몸', '궁

극적인 실재'라고 법신을 해석하는 것까지는 들어줄 수 있으나, 법신의

의미를 시공을 초월해 있고 동시에 시공에 변재해 있는 '우주 생기기

이전의 면목', '사람의 마음 본체'라 하여 법성 혹은 자성과 같은 의미

로 보는 것은 붓다의 경계를 모르는 말이요, 중생의 안목을 흐리게 하

는 잘못된 해석입니다."라고 설법하신다.



과거는 몰라서 짓는 죄로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는 큰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올바른 이해를 구족해야 할 것이다.  즉 그동안

가지고 잇던 잘못된 법신 개념에 대한 오의를 개선해야겠다.  즉

자성광으로서의 법성 개념과 우주대아로서의 법신

개념을 확연히 구분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법 세계


큰스님께서 모든 법신을 총섭하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법 세계를

살펴보자.  큰스님께서는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이렇게 피력하신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이 언제나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전 우주적인 몸뚱이'가 그의

본질적인 성품입니다.  대우주이시며 절대와 동일한 변조 광명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로서 모든 붓다들의

청정법신을 총섭하고 있습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하고 지고한 법 세계인가!  말로만 들어서 그렇지

실제로 수행을 통해서 신비 체험을 경험해 본 수행자라면 분명 이러한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내면의 정화와 두뇌에 강렬한 법열을 느꼈

으리라.



어느 경전 어는 불교 수행 서적에 이러한 비로자나 법신에 대한 이

야기를 이토록 간명하고 극명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  여기서 더 나아

가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자후하신다.



"불과를 이룬 붓다가 죽거나 입적할 때는 이 몸뚱이 육체는 버리고

그 안의 4 영체가 불계에 있는 자기 불신과 하나로 계합이 되고

다시 자기의 청정법신불과 합일합니다.  또 모든 붓다님들의 청정법신

불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안으로 뭉칩니다.  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입니다.  청정법신불은 원만보신의 빛보다

훨씬 광도가 높습니다."



컴퓨터 사이언스 세계에서는 '구조적'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

다.  이 구조적이라는 용어는 조화물의 구성과 얼개를 가리킨다.



일반 사상가나 철학가의 사유가 건전할 경우 매우 구조적인 사유를 하

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유가 조화를 이루고 사유의 구성 요소들이 건전한 균형 관

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을 일종의 우주의 모사

라고 했을 때 의식이 조화, 즉 코스모스를 이룰 때 건전한 사

유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큰스님의 비로자나 법신불 세계는 일반 불제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법 세계로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 불제자의 정신

세계가 매우 구조적이고 정합적으로 탈바꿈된다.



왜냐하면 큰스님의 법 세계는 허황된 가설이나 꾸며낸 허위가 아니

며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유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힌두의 베다학파에서는 인체는 육체를 포함하여 미묘한 코

샤(몸) 와 거치른 코샤 등 세 개의 덮개로 구성되어 겹쳐 있다고

전한다.



데이비드 플로리가 지은 <<베다 입문>>에서는 음식과 호흡의 표피는

거친 육체의 몸, 스튤라 샤리라를 만들며, 호흡 마음 지

성의 표피는 미묘한 아스트럴 몸인 슈슈마 샤리라을 만

들며, 지성과 희열의 표피는 원인(코절)의 몸인 카라나 샤리라

를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힌두 사상의 한계이다.  큰스님께서는 정확하게 4대 영체를

제시하였으며 그들이 인생이라는 배움과 체험을 통해서 얻은 정보

를 가지고 자신의 원만보신인 불신과 합일을 하고 그

것이 다시 자신의 법신과 합일하여 궁극적으로 비로자나 법신과

합일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우주는 이 장엄한 비로자나불과 각 붓다의 법신불들

그리고 붓다의 보신불들이 공생하고 연동하여 우주의

평화와 안녕 그리고 자유와 질서를 관장하고 주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세계이며 웅대한 사상체계가 아니겠는가!



도한 큰스님께서는 이와 같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언제나 온 법

계를 두루 비추고 계신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붓다님들은 빛으로 일체 처, 일체 시에 아니 계신 곳 없기

때문에 법신 개념에서 볼 때 천수천안이 문제가 아니며 가고 오고 하

는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무소종래이며 역무소거입니다.  삼천대천세계

우주 자체가 바로 붓다의 몸입니다."라고 설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하신 부처님의 세계를 한 번 볼 수 있다면 정말

로 큰스님 말씀대로 감읍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