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2일 일요일

[현지궁 현지사 특별법문]쌈예의 논쟁에 대한 논평/인류사에 내놓는 물음에 답하라



현지궁 현지사
자재 만현 큰스님  특별법문
부산 (영산불교대학 제2기 졸업식)



쌈예의 논쟁에 대한 논평/
인류사에 내놓는 물음에 답하라 


신불기14불기2555년 신묘년 음력11.17(2011.12.11.)


오늘 영산불교대학을 졸업하는 우리 학생들, 부처님을 대신해서 축하합니다. 내가 한 번쯤 특강을 해주었어야 되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특강을 한 번도 못했고, 그래서 오늘 졸업식을 맞이해서 특별 법문을 한 시간 정도로는 해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대부분 우리 신도분들일텐데 대중법회의 설법은 아무래도 학력차가 들쭉날쭉 해가지고 깊은 이야기는 못합니다. 오늘은 마침 적어도 우리 졸업하는 불자님들은 내가 알기로 대부분 최고학부를 나왔고, 내 법문을 6, 7년간 들은 분들이 대부분이고, 우리 영산불교 교학도 많이 연구를 했고, 또 우리 교수님들로부터 많은 교리, 비교 종교, 여러 경전 연구를 많이 했고 해서 오늘 내가 여러분한테 들려드리는 법문의 제목은 여러분 쌈예의 논쟁아시죠?

쌈예의 논쟁, 그러니까 인도불교와 중국 선종(禪宗) 간의 역사적인 논전(論戰)입니다. 쌈예의 논쟁을 영산불교의 시각에서 논평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여서 자재 만현이 이 세상에 역사 이후 출세했던 수많은 석학들 종교인들 과학자들 앞에 몇 가지 문제 명제를 제출하고자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법문입니다.

나는 평소 신심(信心)을 가장 소중히 알고, 신심(信心)이 있어야 된다하고 늘 강조를 합니다. 우리 영산불교에서 말하는 신심(信心)은 부처님에 대한 신심(信心)이올시다. 부처님에 대한 신심. 그래서 신심을 강조하는데, 신심의 그 뿌리가 깊고 실하게 착근(着根)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교학(敎學)을 해야 됩니다. 교학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내 뜻에 따라서 1, 2, 3년간 교학을 공부한 여러분들, 내가 보기에 참 든든하고 기쁘고 그렇습니다.
 
8세기입니다. 그러니까 쌈예의 논쟁이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되지? 티베트의 가장 대표적인 절 쌈예사, 티베트의 전설적인 인물로 대단히 추앙받는 '파드마 삼바바'가 창건한 절입니다. 그 쌈예사에서 중국 선종의 대가인 큰스님과 티베트에 들어와 포교하고 있는 인도불교의 거장 간의 법전(法戰)이올시다. 이걸 여러분이 알아둬야 됩니다. 오늘 우리 불자님들 대부분이 기초는 다져져 있고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오는 불교 술어(述語)의 해설같은 것을 생략합니다. 시간도 짧고 해서 양해를 해주십시오.

지금까지의 불교, 대승불교, 나아가 대승을 넘어 금강승이라고 하는 밀교까지 모두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희유하신 어른인가를 몰랐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래서 나는 지금의 불교,아함경을 소의(所依)로 해서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남방 상좌부불교-지금 소승불교라고 폄하받고 있지요. 그리고 소승대승을 바탕으로 해서 발달시킨 티베트 밀교, 그리고 인도불교가 중국의 도가사상과 교합해가지고 생긴 선불교(禪佛敎), 그 모두가 2600년 전에 오셨던 우리 부처님의 생신불(生身佛)), 육신불(肉身佛) 그리고 법신불밖에 몰랐습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법신불밖에 몰랐는데, 불행히도 그 법신불도 어떠한 의미를 지닌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신불, 잘 모릅니다. 그저 본체(本體)인 공()을 법신불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중심불인, 부처님의 핵심불인 보신불(報身佛)의 소식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당시도 그랬습니다. 그리해서 내가 항상 이야기하지만 현재의 불교는 왜곡되고 왜소화(矮小化)된 불교입니다.

나는 삼계를 통달하신, 그러니까 우주 자연 인간 이 세계, 그리고 현상세계를 넘어선 온 법계의 비밀을 통달하신, 진리의 대성취자이신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고, 그 몸은 어떻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수명은 어떻고.. 등등 부처님에 대한 소식을 지금까지 힘주어 노래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오늘은 이 마음, 선가(禪家)에서 이야기하는 마음, 그러니까 생각 이전입니다. 마음, (), 본체인 공()에 대해서 그걸 현재 잘 모르고 있으니까 영산불교에서 그걸 좀 해설할 필요가 있고, 그리고 21세기 인류 최고의 지성인들에게 몇 가지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제출합니다. 그러니까 철학이라든지, 여러 종교 과학-과학은 물리학이라든지 생리학, 수학, 그런 분야의 인류 최고 석학들에게 감히 답을 요구하면서 문제를 제출합니다. 그것은 우리 영산불교의 철학사상이 그만큼 위대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감히 그럽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영산불교의 칭명염불, 팔정도 칭명염불정법에 귀의했으면 싶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니까 서기 8세기경, 1200년 전 그 옛날입니다. 설원의 티베트, 서장(西藏)이라고도 하지요. 티베트 땅에서, 중국의 선종(禪宗) 선불교(禪佛敎)-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종파입니다. 여러분, 화두에 대한 용어도 해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부처가 되겠다고 수행하는 종파입니다. 한국불교는 통불교라고 하지만, 선불교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대세를 이루고 있는, 교종은 감히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하지 못하는 정도의 그런 선불교올시다.

그 중국 선종(禪宗)과 인도불교, 그러니까 그 당시 티베트에 들어온 중관사상을 기초로 한 대승불교인 그 인도불교가 성불의 방법상의 견해를 놓고 벌인 역사적인 논쟁입니다. ‘성불의 방법상의 견해를 놓고 두 종파가 벌인 역사적인 논쟁이올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티베트불교는 소승과 대승, 그리고 밀교를 망라하여 배우고 실천하는 통불교올시다. 소승 대승을 거쳐서 밀교로 발전해가는 인도불교의 흐름을 그대로 수용하여 정착시켜 나가는 와중에서 중국 선종(禪宗)의 대종사인 '마하연'이라는 큰스님이 그 당시 티베트에 들어와 가지고 선불교를 제창하고 적극적으로 선불교를 포교해 나가자, 아직 미처 불교의 교학적 기반이 확립되지 못해 티베트는 교리적인 혼란에 빠졌습니다.

선종이 주장하는 소위 슬로건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우리 한국불교는 선종의 풍토에서 1300여 년 간을 내려왔습니다. 선종(禪宗)은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도 여러분은 아실 거예요. 많이 들어도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설명을 합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닦는가? 마음을.
마음을 돈오(頓悟)-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돈수(頓修)-모든 업장이나 습기도 돈오하면, 크게 깨치면 다 닦아져 버린다고 하는 돈오돈수.
또 어떤 종사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합니다. 크게 깨쳤지만(돈오) 다겁생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익힌 업장이라든지 습기, 그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씻어가야 된다(점수) 하는 것이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분은 당나라 당시 혜능과 쌍벽을 이루었던 '신수'라고 하는 큰스님이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고려 '보조 스님'이올시다. 돈오돈수를 주장한 분은 '태고(太古)'라고 하는 '태고 보우 화상', 태고종의 종조이지요. 그리고 몇 년 전에 작고하신 '성철 스님'이올시다.
 
이 선종(禪宗)안에서도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는 두 주장이 팽팽하게 대결해옵니다. 이걸 돈점논쟁(頓漸論爭)이라고 합니다.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방금도 이야기했지만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고 하고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부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생각 이전 마음의 본성, 본성이 되는 마음 자리를 말합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다 그럽니다.

마음밖에 부처? '없다' 그럽니다. 따라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은 선종의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고, 그리해서 외도라고 합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거예요.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는 거예요.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마음만 깨쳐버리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선종(禪宗)입니다. 마음만 깨쳐버리면, 이걸 견성(見性)이라고 그래요.

그리해서 경전 보는 것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니 경전도 못보게 하고, 계율도 사실상 우리 현지사가 생명처럼 계율을 지키라고 하지 선종(禪宗)에서는 그러지 않습니다. 계율도 강조하는 편도 아닙니다. 염불? 외도라고 하지요. 선종(禪宗)에서는 그럽니다. 선종에서는 그저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 그 길만, 그것만 강조합니다.

그래서 선방(禪房)에서는 면벽(面壁)을 하고, 다만 면벽을 해서 이뭣고(是甚麽)?’ ‘()?’ 이런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뭣고라든지, ‘자 화두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테니까 또 이야기 않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말하자면, 선불교에서는 불교 교학을 한다든지, 교리에서 주장하는 소위 사성제 팔정도 육바라밀 보현행원이라든지, 복덕을 쌓는 일이라든지, 한 단계 한 단계씩 점진적으로 부처님을 향해서 붓다의 법위를 향해서 이렇게 계단식으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배척합니다.

오직 견성을 목표로 벽을 보고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이 수행법이 경절문(經截門)이라고 합니다. 붓다가 되는 아주 직통 지름길, 그래서 경절문(經截門)이라고 합니다. 선수행(禪修行)이야말로, 선종(禪宗)이야말로 정법종단이라고 합니다. 이게 선종의 주장이올시다.
 
이런 선가(禪家)에 몸을 담고 내가 수 십 년 동안 참선을 했습니다. 내 책에서 조금 언급을 했을 겁니다. 내가 그러다가 득력(得力)한 후에 용감하게 염불로 회귀해 버렸습니다. 선가에서는 득력(得力)하면, 견성(見性)하면 대단한 일이지요. 그러나 선가에서는 윤회를 벗어난다든지, 극락 지옥을 운운한다든지, 보살을 이야기 한다든지 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견성해서 대 자유인이 되라~!’ 그럽니다.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자유, 그 자유란 무슨 뜻이냐?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공포의 경계를 당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유.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스님이 가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탐심의 경계, 진심의 경계, 공포의 경계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 대상에 자유롭단 말이에요. 이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내가 해보니까 제한적이었습니다.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해서 염불로 돌아와 버린 거예요.화엄경을 보고법화경을 보고 하니까 아직도 거리가 멀고, 넘어야할 산이 많고, ‘이것이 선()이라면 나는 만족할 수 없다해서 염불로 돌아왔습니다.
 
1200년 전에 여기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 이것을 주장하는 선불교를 돈문(頓門)이라고 합시다. 돈문. 단박에 깨쳐가지고 들어가는 문이어서 돈문. 인도의 대승불교는화엄경이나보살영락본업경이나 점수(漸修)를 이야기합니다.화엄경》〈십지품은 그러지요. 점수(漸修)를 이야기합니다. 초지에서 쭈~욱 올라가지요. 삼현위(三賢位)에서 초지로 쭈~욱 올라가 가지고...보살영락본업경도 수행의 52위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수(漸修)를 주장합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맞는 거예요? 어는 것이 부처님 정법이냐? 부처되는 데는 점수(漸修)가 불설(佛說)이다 그거예요. 정법이다 그거요.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다 그거요. 그래서 이걸 점문(漸門)이라고 합니다. 점문. 그래서 점문과 돈문의 대결입니다.

당시의 티베트 왕이 '띳송데쩬'인데 불교를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호불왕(護佛王)이었습니다. 인도불교에 대해서 대단히 매력을 갖고 많이 공부를 한 분입니다. '띳송데쩬'이 고민이 깊었습니다. 왜냐? 중국의 선불교(禪佛敎)가 들어와 가지고 자기네들 선불교의 종지(宗旨)와 수행이 제일이라고 떠들어대니까 많은 사람들이 선불교의 주장에 따라 갑니다.

그래서 고민이 깊었습니다. 마침내 왕은 결정을 했어요. 왕명으로 인도불교의 대표적인 큰스님, 티베트에 와있는 '까말라씰라(Kamalashila, 蓮華戒, 740~795)'라고 그래. 한문으로는 '연화계(蓮華戒)'라고 번역을 합니다. '까말라씰라'와의 법전(法戰)을 통해서 논전(論戰)을 통해서 승부를 가려야 되겠다. 지금부터 1200년 전입니다.

그리해서 마침내 '띳송데쩬'이라고 하는 당시의 티베트 왕이 돈점(頓漸)대결 논쟁을 명했습니다. ‘왕도 친히 그 자리에 임석할 것이다그랬어. 왕도 참석 했어요. 1200년 전의 이 사건이 사실은 동북아의 대승불교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 쌈예의 논쟁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이 쌈예의 논쟁을 들고 나와서 영산불교의 시각에서 여러분한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선불교(禪佛敎)의 실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조금씩만 말했지요. 남의 종단의 종지(宗旨)를 비판하는 것이 덕스럽지 못해서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졸업생들한테는 해줘야지요. 선불교가 어떠한 종지를 지니고 있고, 어떻게 수행을 하고 있는데, 그 선법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부처님의 경전에 입각해서 부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옳은지 그른지 평가를 해줘야 되요. 그래서 내가 지금 준비를 해왔습니다. 선불교에 대한 고언(苦言)비교종교학에서 내가 말해준 것은 한 40~50개 될 거예요. 그런데 30개만 써놨더군요. 시간이 있으면 이것을 다 설명해 주고 싶은데... 모르겠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옛날 티베트의 대표적인 큰 사찰 쌈예사에서 벌어졌던 성불의 방법상 견해를 놓고 중국 선종(禪宗)의 주장과 인도 대승불교가 주장하는 그 양쪽의 주장을 엄격하게 객관적으로 소개하면서 평가를 하고자 합니다. 시간관계상 우선 중국 선승의 주장을 엄밀히 요약했습니다. 중국 선종을 대표하는 '마하연 화상'의 주장을 요약했습니다.

일체를 사유하지도 말고 분별하지도 말고 오직 화두일념으로 화두를 들고 나가면 마음자리, 곧 자성을 깨달아 부처를 이룬다.’

이게 종지(宗旨)이지요. 이 선불교에서는 화두를 타파하면 곧 부처된다 하고. 부처라는 법위하고 견성하고를 같이 봅니다. 그런 등식이 고수되고 있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교가(敎家) 교종의 점수(漸修)의 방식, 그 교학을 배격합니다. 또한 방편과 차제(次第)를 배제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를 이루려면, 부처가 되려면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은 경전의 말씀은 방편과 차제를 이야기합니다. 공부해서 지혜도 구해야 하지만, 지혜만 구하는 일방적인 수행은 보살이 되고 성불을 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한편으로 방편 차제 공덕, 쉽게 말해서 보살도를 행해야 된다. 보살행을 해야 된다 그거예요. ‘지혜와 복덕을 함께 닦아야 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대승의 정설입니다. 이건 맞습니다. 우리 현지사에서도 이걸 강조합니다. 지혜를 구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칭명염불 하고, 칭명염불만 한다고 해서 부처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덕을 지어야 됩니다. 그리해서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선근공덕을 이야기하고 보현행원을 이야기합니다. 육바라밀, 보현행원을 이야기하지요. 새는 날개가 둘이 있어야 하늘을 납니다. 이건 모든 대승경전의 골수올시다. 또 이건 내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에서는 안 그럽니다. 오로지 자성(自性), 이 뭣고~ 이뭣고~... 면벽하고 공부해서 사무쳐 깨달으면 곧 성불이다 그거예요. 이것을 돈오견성법(頓悟見性法)이라고 합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소승이 되었건 대승이 되었건 간에 그 핵심은 사성제 팔정도를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사성제 팔정도를 오늘 자세히 해설할 수 없습니다만 이걸 잘 공부해야 됩니다.

사유를 깊이 해야 됩니다. 사유를 깊이 하면 ! 이게 불교이구나. ! 기독교, 이거 아니구나!’ 하고 알지요. 단순히 마음을 깨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나는 견성이, 마음을 깨치는 것은 부처가 되는 머나먼 여정의 출발 시작이라고 내 책에 선언했습니다. 감히 선언했습니다. 견성은 이제 시작이다 그거예요. , 선승(禪僧)'마하연'은 그렇게 주장을 했고,
 
인도불교를 대표한 '까말라씰라(蓮華戒)' 스님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반드시 한걸음씩 올라가야 한다. 삼현(三賢)의 위()를 넘어서 보살의 초지를 얻는 것만 해도 지극히 어려운데(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되요), 부처님 가르침대로 계율을 지키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삼법인 사성제의 진리를 알아야 되고 육바라밀 보현행원이라는 이 보살도, 이것을 전혀 행함이 없이 실천행이 없이 성불을 주장한다고 하는 이것은 경전의 말씀과 크게 위배된다. 어떻게 일체종지를 얻는다고 하느냐?

문사수(聞思修)’의 세 지혜(三慧)에 의해서 법의 뜻을 전도됨이 없이 바르게 이해한 뒤-문사수(聞思修)라는 것은,

지혜는 큰스님의 법문, 부처님 같은 대선지식의 경전 강의 법문, 이것을 문()이라고 그래. (). 들어야 된다는 말이어. 들어야 돼.

(), 사유(思惟)해야 되는 거예요. 사유해야 돼.

(), 그 말씀대로 수행해야 돼.

이렇게 함으로서 지혜가 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경전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없이 막바로 강원(講院)을 가고, 동국대학을 가고 해서 경전을 학자들의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위험한 거예요. 이것은 공부를 많이 하고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교학도 하고, 한편으로 수행도 해야 되는 거예요.

수행도 해야 돼. 무섭게 수행해야 돼. 한 달 혹은 100일씩... 수행을 해야 돼. 그러면서도 또 교학도 하고, 그러면서 수행을 하고... 그래서 지혜를 증장시킨 후에 경전을 보면 또 달라. 1년 전에 본 것하고 더 달라. 견성을 해놓고 보면 이제 정말 달라. 자력으로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되어가지고 보면 정말로 달라. 불과를 증해놓고 보면 정말로 달라. 하기 때문에 교학을 하면서 수행을 겸수해야 된다.

십법행(十法行), 십법행은 서사(書寫)-경전을 서사(書寫)하는 것, 간경(看經)-경전을 보는 것, 독송하는 것, 법문을 듣는 청법, 예불, 기도, 공양, 포교, 사유(思惟), 수습(修習), 이것을 십법행이라고 그래. 이 십법행을 배우고 닦아서 보살의 초지에 들어간다 그거예요. 정성(正性, 깨달음 혹은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 다음, 청정한 반야의 지혜로서 나머지 9(2지에서부터 10지까지), 지금 9지들을 차례로 수습하여 10바라밀을 수학(修學), 의식의 흐름을 정화하고, 복과 혜-앞에서 이야기한 복덕과 지혜 복혜(福慧)의 두 자량을 온전히 구족한 뒤 비로소 성불하는 것이다라는 것이어요. 이 것이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까말라씰라' 스님의 주장입니다.

면벽하고 이뭣고~ 이뭣고~만 해서 너희들은 깨닫는다고 하는데... , 이제 내 말입니다.
깨달을 수는 있어. 깨달을 수는 있어. 전생에 선근이 있으면 깨달을 수는 있어. 그러나 그 깨달음이 곧 불지가 아니야.’
이것을 지적했어야 되는데 여기서는 지적을 못했더라고.
'까말라씰라'의 말입니다.
당신네들 선승처럼 두 자량도 쌓지 않고-복혜(福慧, 복덕과 지혜)를 말이어. 자량이라고 그래. 불지에 이르는데 필요한 두 가지 양식. 두 자량도 쌓지 않고, 의식의 흐름도 정화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생각 생각 생각의 그 생각들을 정화하지도 않고 그 말이어. 세간사(世間事)도 또한 알지 못하고, 세간사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일체종지를 성취한단 말이오?

단지 공성 하나만 깨닫는 것은 자리(自利)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어떻게 이타(利他)의 의리를 완수할 수 있겠소. 당신들처럼 경과 론, 경론의 전고도 없으며 방편과 반야가 함께 하지 않는 법은 곧 부처님을 훼손하고 기만하는 것이오.’

이렇게 논박을 합니다. 요약을 하면 그래요. 인도 대승불교를 정설로 보는 당시 티베트 불교 교단의 몇몇 큰스님들도 '까말라씰라'의 주장에 가세합니다. 선불교는 부처님의 교설이 아닌, 배격해야 할 이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인 대론 중국 선승의 패배로 끝납니다.
 
끝나는데, 국왕이 충분히 경청한 후에 명을 합니다. 명을 해요. 당시 1200년 전의 국왕의 말 한마디는 법 이상입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단박에 깨쳐들어 간다고 주장하는 중국 화상의 돈오선법(頓悟禪法)은 십법행을 훼멸하는 법이므로 행하지 말라. 이제부터 티베트 불교는 마땅히 나가르쥬나(부처님 다음가는 위대한 스님이라고 일컫는 인도의 용수보살)의 법을 따르고, 도행은 육바라밀과 십법행을 실천하며, 수행은 삼밀(三密-신구의 삼업을 밀교식으로 표현한 말)을 통해서 마음을 닦고 방편과 반야를 겸수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도록 하라.’

이렇게 명령을 내려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것을 듣고 선불교 측에서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자살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티베트 불교의 흐름은 이제 완전히 달랐습니다. 중국의 선종(禪宗)은 발붙일 수가 없어서 다 철수한 거예요. 그래서 1200년 동안 티베트 불교는 밀교를 착실하게 발전시켜 놓은 거예요. 지금 티베트 밀교의 지도자들은 내가 알기로 ‘1200년 전에 쌈예의 논쟁에서 우리가 패했더라면 아이쿠! 생각만 해도 오싹 하구나! 우리 티베트 불교가 어찌 될 뻔 했나!’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 선종의 종지이기도 한데, 6바라밀과 십지(十地)-초지 23...십지 해서 보살의 수행계위를 말하지요.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6바라밀과 수행의 십지 계위를 떠나서 단박에 깨달아 부처 이룬다고 하는, 돈오성불이니 견성성불이니 또 이 말을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고 그래.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주장은, 이런 말은 일찍이 부처님 말씀과 불경(佛經)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선불교를 심교(心敎)라고 했어. 심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 마음의 종교, 마음을 깨닫는 것이 전부인 종교. 그것이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알고 있는 종교, 그렇게 주장하는 종교.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부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외도의 설이라고 당시 티베트 스님들이 입을 모아서 한 말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서 선불교의 막행막식하는 광행(狂行),또 딴뜨라 좌도밀교(左道密敎)의 광행(狂行, 미친 짓), 우리 현지사에서는 부처님 정법에서는 선불교의 막행막식을 딴뜨라의 광행과 똑같이 불법과 거리가 먼 사마외도의 짓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것은 정법을 능멸하는 행위에요. 우리는 정법을 능멸하는 선종(禪宗)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격한다 그거예요.

()쪽의 이야기를 좀 해줍니다. ()의 비조는 달마예요. 6세기초 보리달마예요. 여러분 아시죠? 선종(禪宗)을 당나라 때 하나의 종파로 굳힌 이가 7세기 '혜능'이어요. 혜능. 선종으로 보면 육조(六祖-여섯번째 조사)가 되는 거예요. 혜능이 독립종파로 완전히 굳힌 분이어요. 혜능까지는 선의 법통이 한 줄기로 쭈~욱 내려갔어요.

그런데 이후로는 복수로 내려갑니다. 두 사람 세 사람 다섯 사람...이렇게 복수로 내려가요. 혜능의 입실제자만 해도 30명이 넘어요. 그 유명한 '마조 도일'문하에는 139명이 입실제자로 인가받은 분들이 나옵니다. 물론 성철스님도 말하기를 선종의 정맥은 견성에, 돈오견성에 있다고 그랬거든.

그러면 붓다가 된 사람이 수 백천 명이라고 할 수 있어. 화두 수만 해도 1,700가지가 나와 있어. 화두가. 우리 현재 한국불교, 선불교가 주류인 종단에 지금 정식으로 견성했다고 인가받은 분이 한두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그런 사람들이 다 조사(祖師)로 붓다로 자처하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볼 때에는 아니어요. 이건 아니어요. 절대로 아니어요.

내가 시간이 있으면 혜능 조사의 오도송과 양나라 당시 '선혜'라고 하는 부대사가 있지요. 유명한 부대사(傅大師, 중국 양나라 때의 스님)입니다. 이 분의 법어를 소개해 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백장 대지 선사(百丈大智禪師)의 법어를 소개합니다. 오늘 백장 선사(百丈禪師), 당대에 유명한, 혜능 조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혜능에 버금갈 정도의 반열에 올라가는 큰스님이지요. 그 사람의 법어를 소개합니다.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밝아 육근 육진경계를 다 벗어났다.
그 바탕이 그대로 드러나 참되고 항상하여 어떤 문자에 걸려있지 않다.
항상 고요한 삼매가 본래로 구족하니 다만 망상만 여의면 곧바로 여여한 부처니라.’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眞性無染 本自圓性, 但離妄緣 卽如如佛)
 
이건요 마음의 본바탕을 깨달은 것 뿐이어요. 그래서 이 마음을, 온전히 공성을 증득한 분이라면, 우리 영산불교의 이 마음 ()에 대해서, ()에 대한 내 설명에 대해서 박수를 칠 거예요. 방금 백장 선사가 하는 법어송이라든지, 혜능의 오도송이라든지, 그 유명한 부대사의 법어송이라든지를 보면 공()에 대한 체험, 마음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겼나 하는 공() 체험 정도에 불과해요. 그것 갖고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어요. 그것을 가지고 부처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건 아니어요. 거기서 한참 가야 이제 아라한의 성과(聖果)를 얻습니다. 아라한도 보살이 되려고 하면 붓다 회상을 만나지 않으면 백생 천생을 가야 됩니다. 보살도 붓다회상을 만나지 않으면 백겁 천겁을 닦아야 불()이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본체인 공()은 그 본성이 마음입니다. (), 마음. 지금까지 선불교를 포함해서 많은 불교의 종파들이 마음, ()의 한쪽만을 보고 공성을 증득한 것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견성한 사람들이 공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또 횡변시방(橫徧十方) 하고 수긍삼제(竪亘三際). 그러니까 마음이 온 우주에 두루해 있다 그거예요. 천지미분 전이고, 주객미분 전이고, 무시무종, 불생불멸이다. 이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묘하고 밝다. 소소영영(昭昭靈靈)이다. 공적(空寂)이다. 허령공적(虛靈空寂)이다. 이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화두타파해서 드러나는 마음의 자리, ()의 모습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지, 그 공()속의 속성 전부를 가지고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신성(神性)을 갖다가, · 하나님을 갖다가 철학적으로 스스로 있는 자존자라고 했어요. 이것은 참 좋은 표현이에요.
영산불교는 여기에다가 한 4가지를 덧붙입니다.
()순수정신과 물질의 질료인(質料因)을 구비한 청정무구한 불생불멸의 궁극적 실재요 영원불멸의 우주 대생명체이다.’
우리는 지금 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과 자비, 지혜, 조화, 연기성,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 유지하는 지속력과 통제력을 지니며, 또한 인과법 · 인연의 도리를 실현하는 우주적 힘을 구족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우주본체이다.’
굉장히 깊이 그 성격을 그려 놓은 거예요.

있다 없다를 초월해 있으면서 허공같이 텅 비어 있고,

안과 밖이 없고, 가고 옴이 없어서 여여 부동하고

인격적 실체가 없다.

광명인 빛이요 이 빛의 본원은 무량억종광이다. 부처님 빛이다.

이 빛의 본질은 이때가지 비밀이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현지사에서 공()의 그 깊은 속성까지 다 이야기해 놓은 거예요.
 
법신불, 마음과 공()을 이야기하면서 내친 김에 법신불을 이야기해 줍니다. 공성을 증득하는 수준으로서는 공()과 계합 합일하지 못합니다. 절대 깨쳐 가지고는 그 수준에서 합일 못해요. 계합 합일 해버려야 되요. 이건 불지(佛地)에 가서 합일되는 거예요.

불지에 이르러야 그것을 적절히 운용하신다. 법신불이 그래요. 당처를 떠나지 않고도 삼천대천세계를 다 안다. 이건 법신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영산불교 밖에 아무도 보신불 이야기는 못하고 있어요. 보신불은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테니까 생략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마음, ()을 깨쳤다 해서 붓다가 아니어요. 그것과 완전히 계합 합일, 그래서 그 속에 있는 질료와 힘을 적절히 운용할 수 있어야 붓다인 거예요. 이런 말을 오늘 덧붙여 둡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본체인 공()에 대해서 영산불교만의 이야기를 해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선()에 대해서 상당히 애정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 거의 토착화된 우리나라의 종교이다시피 생각을 해가지고 그저 많이 지지를 하고 따르고 그러는데, 우리는 정말 객관적 입장에서 이성의 자리에서 냉철하게 봐야 되요. 한번 빠지면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을 잘해야 되는 거예요. 나는 불자들이 선불교(禪佛敎)를 따르는 것을 못마땅해 합니다. 우리 부처님께 선불교에 대해 평가한 점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여기에서 그런 말을 못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여담이지만 이 서방이 술을 마시면 박 서방이 취한다.’ 이건 말도 안 되지. 이걸 격외(格外)라고 그래요 여러분. 선문답, 선문답이 하도 이상하니까 이거 정말 도인 종교다고 지금 그러거든. 알고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어요. 앞에서 스님이 말했듯이 본성의 자리를 보면, 천지미분 전, 의식 이전, 상대를(이원을) 초월해 있는, 그러면 그건 뭡니까? 절대이지요. 양극이 없어요. 절대예요. 일체가 하나여. 한 몸이어.

그렇기 때문에 이 서방이 술을 마시면 박 서방이 취한 거예요. 그래도 못 알아들어? 이걸 가지고 ~! 희한한 종교다. 이건 최고의 무슨 진리가 있구나하는데, 별것 아니라니까. 여러분! 이걸 다시 더 쉽게 해석해 줄까?

나하고 어떤 상대하고 탁구를 치잖아. 나하고 A라는 사람하고 탁구를 치는데 여러분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다고. 왜 그런 줄 알아? 그 소식을 알아야 돼. 모든 것은 한 몸뚱이어. 진리로 보면 모든 게 한 몸뚱이어. 그렇게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 말이어. 이런 것을 알았다고 뭐 부처된다고? 부처라고? 내가 조금 뒤에 말하겠지만 이 세상에 제출하는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제불의 스승은 누구냐? 묻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여러 부처님의 스승은 누구입니까하고 큰스님한테 물으니까 판전의 송공이니라.’ 이런 말을 해. 판전(版殿)의 송공(松公)이니라. 판전(版殿)이라는 말은 나무 판자대기로 지은 집을 말해. 부처님을 모신 전각. 판전이라고 해. 판전의 송공이니라. 송은 소나무 송()자예요. 주인 공()자여. 판전의 송공이니라. 그러니 여러분, ()을 물었는데 서(西)로 대답했잖아.

어젯밤 목마(木馬)는 울고, 목마(木馬)-나무 말(),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조각한 말(). 그 목마가 울더라 그거요. 석인(石人)은 춤을 추더라 그거요. 석인(石人)은 돌로 만든 사람이어요. 석인(石人)이 춤을 춥니까? 나무로 만든 말이 울겠습니까? 이게 이제 절대계의 소식이어요. 절대계의 이야기예요. 절대계의 입장에서...

절대계는 크고 작은 것이 없어요. 착하고 악한 것이 없어요. 길고 짧은 것이 없어요. 위아래가 없어요. 전부 한 덩어리예요. 그 입장에서 해석하는 거예요.
 
본성이 드러나게 되면 그건 일체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감옥소에서 나온 기분은 맞아요. 있어요. 그 자유는 맛봐요. 만끽해요. !~ 그래. 궁둥이 춤을 추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 거기가 부처자리는 아니어요. 절대 아니어요. 그런데 지금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이게 문제입니다. 심각한 문제예요.

보라! 큰 바다로부터 먼지구름이 일어나고말이 되요? ‘대지로부터 파랑의 소리가 높다이건 선승들이 하는 말이어. 그런다고 해서 이게 무슨 뭐 대단한 것이냐? 뭐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런 동문서답의 말, 여러분! 이 격외의 문구가 너무너무도 이상하고...기가 막혀서 이거 도인인가 보다. 이거 부처다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영산불교에서 주장합니다.

무엇을, 어디를 성불로 보느냐? 이때까지 잘 몰랐어요. 무엇을, 어디를 성불로 보느냐? 선가(禪家)에서 마음을 깨친 것을 성불로 봐버렸어. 이건 아니어.

마음, 깨치고 보면 투~욱 터졌어. 주객(主客)이 없어. 허공과 같이 비어버렸어. 청정무구해. 이게 마음이야.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런데 이걸 깨달은 후에 보림을 잘 해가지고, 정말로 깨달을 때까지의 노력보다도 더더욱 그 보다 더욱 더 쏟아가지고 용맹정진 해가지고 이 육신에 대한 착을 끊고, 그래야 이제 거기가 아라한이어. 무아행(無我行)으로 들어가서 육신의 이 탐진치를, 집착을 끊어버려야 이제 거기가 아라한이어. 자력으로 갈 때 말입니다. 이제 여기는 시작이어.
 
지금까지 그 인도 대승불교의 주장은 맞아요. 점수(漸修)가 맞는 거예요. 한 걸음으로 정상에 올라갈 수 없는 거예요.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지. 한 걸음에 뛰어서 정상을 정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인도 대승불교 그 종사(宗師)가 마음을 불()로 보는 선가(禪家)의 그 제일의 주장을 철저하게 깨지 못한 것이 아쉽고,

그 다음, 인도불교도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어르신인 줄 몰랐어요. 몰랐어.화엄경법화경을 그렇게도 잘 알지마는 몰랐어.화엄경에서는 위대한 부처님을 잘도 그렸어.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의 수명을 잘도 표현했어요. 그렇지만 우리 영산불교처럼 그렇게 투철하게 알지 못했어요.

부처님은, 불과(佛果)를 증한 붓다님은 반열반 한 후에 어디로 가느냐 그거예요. 어디로 가느냐? 아무도 몰랐어요. 부파불교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그걸 몰라요. 그래서 선()에서는 적멸(寂滅) ()과 계합해버렸을 거다 그러지. , 적멸(寂滅) ()과 계합해버렸단 말이어. 그러면 어떻게 부처님이 다시 사람 몸을 받아가지고 중생을 교화하려고 올 수가 있나?

()이 되어버렸는데?법화경을 보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본화보살을 부처님이 교화해서 만든 분이야. 그 삼계의 붓다님들이 부처님들이 다 그렇게 많이 오시고, 지금 불과(佛果)이룬 제자가 사바세계에 나와 가지고 현지사에 있잖아. 또 많은 부처님들이 현지사에 와 계시잖아.

선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 보신 부처님을 알 수가 없지. 실제로 이 보신부처님을 전혀 몰랐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어떻게 계시는지도 모르고, 어떤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지도 모르고, 수명은 어떤지도 모르고, 삼신설(三身說)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불교사를 보면 부처님 가신지 1400~1500년 후에 무착 세친 대에 와서 삼신설이 정립됩니다.

여러분들도 유식(唯識)에서 이야기한 삼신설을 봐 보십시오. 이거 무슨 소리인 줄 몰라. 그리고법화경에 기록되어 있는 부처님의 수명, 불과를 이룬 붓다의 수명을견보탑품이나종지용출품이나여래수량품에서 잘도 그려놨어요. 그런데 이것을 해석 잘 못해. 잘 모르고 강의해. 이런 지경이지.
 
선가(禪家)의 견성은 이원을 벗어난 본래 면목, I AM () () () 절대의 우주본체 우주대생명체의 한 가지 속성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거야. 마음은 이법(理法)의 영역인 거예요. 결코 불()이 아닙니다. 그건 비인격인 거예요. 마음을 부처라고 보는 것은 큰 잘못인 거예요.

법화경》〈비유품에서 사리불존자가 독백하는 것이 있어요. 자기는 부처님 교단에 들어와서 크게 깨친 분이어. 아라한이지. 사리불존자가 말입니다. 그런 후 30~40년 흐른 후에 독백을 한 거예요.

나는 오늘 성불의 수기를 받고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 교단에 들어와서 크게 깨쳐가지고 스스로 나는 멸도를 이루었다, 해탈과 열반을 이루었다. 죽지 않는 법을 깨쳤다. 붓다가 되었다고 이렇게 생각했지만, 오늘 부처님 수기를 받아놓고 보니까, 아니다!’ 하는 거예요.

법화경을 보면 사리불존자한테도 십대제자한테도 많은 오백제자한테 수기를 주잖아요. 가령, ‘너는 몇 백 생 후에 보살도를 다 배워가지고 부처가 되는데 이름은 무엇이고 어느 국토이다라고 수기를 주잖아요. 깨친 게 붓다라고 하면 무슨 수기를 줘요? 깨치면 이제 시작이지. 잘 보면 아라한이지. 그래서 다시 수기를 주잖아요.

깨쳐가지고 보살도를 완성하고,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완성하면 절대계에 32상을 지닌 보신을 색신을 갖춘다 그거예요. 둘 수 있다 그거예요. 여기가 붓다인 거예요. 부처가 되면 육도의 중생들을 교화해서 건지잖아요. 교화해서 건져야 돼. 중생들을 교화할려면 몸이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육도중생들이 볼 수 있어야 돼. 법신은 아니어. 법신은 빛이어. 우주적인 빛이어. 조금 뒤에 가서 말할 거예요.

육도중생들이 볼 수 있고, 육도 중생들을 볼 수 있는 색신(色身)을 절대계에 두어야 붓다인 거예요. 이걸 보신불(報身佛)이라고 그래. 이 색신을 얻는 법은 거듭 지적하지만 지혜와 방편 중에 복덕 자량을 선근공덕을 쌓아야 돼. 그리고 지혜를 증장해서 복덕과 지혜를 아울러서 닦아야 색신을 얻는 거예요. 붓다가 되는 거예요.

선종(禪宗)의 교설은 법신만을, ()을 깨치고 공성만을 증득하는 것이 다야. 이것이 불법의 전부인 줄 알아. ()을 깨칠 것을 주장하고 단지 마음을 보는 것, 깨치는 것으로 성불이라고 하는 그 주장은 절대로 옳지 않다. 부처님을 전혀 모르는, ()의 법위를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주장이다 하는 것. ()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8세기경 인도의 '불공(不空)'이라고 하는 밀교의 대종사(大宗師)가 있었습니다. 당나라에 밀교를 전파한 분인데,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화두로 성불한다는 것은 누런 나뭇잎 가지고 황금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고 그랬어. 누런 나뭇잎 가지고 황금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단적으로 정리를 해버렸습니다.

티베트는 4개의 밀교 교파가 있는데, 겔룩파(格魯派)를 개창한 총카파 (宗喀巴)라는 스님이 있습니다. 15세기 사람인데, 그 큰스님은 선불교는 대승의 가르침을 벗어난 이설(異說)임을 확실히 말했고, 불법(佛法)을 훼멸하는 사견(邪見)이자 색신(色身-보신)의 성취를 막는 악견(惡見)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쌈예의 논쟁에서 인도 대승불교와 중국 선종이 대립한 중요 쟁점은 성불하는데 있어서 선업(善業) 복덕행 이타의 보살행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한 것이고, 깨달음만으로 성불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으로 귀결이 되요. 대승불교의 지적은 맞았지만, 그들도 불과를 이룬 붓다는 반열반 후에 과연 적멸로 회귀하는 것인지, 말하자면 공()으로 합일되어 버리는 것인지,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어요.

부처님이 되면 미래제가 다하도록 극락의 극락세계, 말하자면 상적광세계에 계신다는 그것도 몰랐고, 수명도법화경에서 그렇게 자세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했지만 이해를 못한 것 같습니다. 재확인 하지만 반열반 후에도 인격적인 붓다는 초월적 세계에 계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확실히 말합니다.
 
다시 또 말합니다. 선종(禪宗)은 붓다의 법위(지위)가 생각이전 본래면목 () I AM , 곧 마음을 깨친 그 자리로 봤습니다. 크게 잘못 본 것입니다. 인도 대승불교는 비교적 주장이 옳았지만 등각을 넘어서 묘각을 말하면서도 선종(禪宗)의 그러한 그릇된 견해를 지적하지 못했고, 불지에 든 붓다의 위신력을 몰랐습니다.

우리 현지사에서는 불지에 든 붓다의 위신력에 대해서 여러 번 법문에서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위신력의 근거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붓다는 대적정삼매에 들수 있다는 것. 대적정삼매는 백천삼매를 수용해야 들어가는 삼매입니다.

다음은 무량억종광입니다. 무량억종광? 빛의 본원광이어요. 이건 불과를 증하지 않은 분은 무량억종광을 몰라. 무량억종광은 모든 빛의 본원이어.

부처님의 위신력을 말하자면 한이 없어. 붓다는 천백억화신을 낼 수 있거든요. 이건 어마어마한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삼신(三身)을 몰랐지만 우리 현지사에서는 명확한 삼신론을 정립했습니다.

붓다는 우주적인 능력을 지닌 삼매화로 외도를 완전히 몰살시킬 수 있는 그런 힘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런 위신력을 지닌 지도 몰랐습니.

대승불교에서는 또 우리 인간 내면의 영적실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효, 국가를 사랑하고 스승을 공경하라 하는 등 인륜도덕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선종의 영향을 받아서 강력하게 펴질 못했어.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보면 말이에요 . 그랬다면 이조불교가 이조혁명가인 정도전 일파들에 의해서 매도당하지 않았지. 효를 주장했다면, 국가를 사랑하라고 역설했으면 말입니다. 우리 현지사는 그래요.

우리 부처님을 비롯한 삼계의 붓다님들은 한 말씀으로 하신다고요.

()를 주장해요.

국가를 사랑하라. 국가를 사랑하라고 그래요.

국법질서를 지켜라. 국법질서를 지키라고 그래.

스승을 존중하라. 공경하라.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 보살행을 굉장히 주장합니다.

이 사랑과 자비, 보살행이 없으면, 그걸 실천하지 않으면 이건 불교가 아닌 거예요.
선종(禪宗)에서 대승경전을 소의로 한다고 하면서도 보살행 합디까?

사마외도로 보는 저 기독교 보세요. 얼마나 복지사업을 잘하는지. 그래서 그들은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배워야지요.

그리고 말보다는 실천, 계율, 이것을 강조했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정말로 선종은 배워야 되요. 오늘 이렇게 지적하는 것을 겸허한 자세로 배워야 됩니다. 내가 흉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어.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어. 미워해서가 아니어. 바른 길로 들어가야지요. 바른 길로 가야지. 불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는데 이것을 모르면 중생을 오도(誤導)합니다.
 
다시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만 지금까지 2600년 동안의 불교는 육신부처님과 법신부처님만 알았어요.

보신부처님? 32상의 빛의 몸, 그 부처님이 계심을 몰랐어요. 그래서 부처님들은 그러셔요. “광명 만덕 자재 만현은 지금 죽어도 너희들은 할 일 했다그거예요. 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선언했기 때문에. 큰 일 했다 그거예요.

우리들 더러 천마(天魔)에 섭했느니, 마경(魔境)에 빠졌느니 운운합니다. 천마에 섭했으면 15년 전에 미쳐버렸어야 돼. 천마가 뭣인 줄도 몰라요. 아무것도 없다면서 또 그때는 천마가 있다고 그래.

어떻게 공부를 해가야 붓다를 친견할 수 있는가도 모르고,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고, 어떤 능력을 지니셨고, 부처님의 생각은 어떻고, 이걸 몰라요.

우리 수행승들은 이러면 안 되어요. 많은 스님들이, 말세의 스님들이 이럽니다. ‘내세도 없고, 죽으면 끝이야. 인과(因果) 없어. 인과설(因果說)? 그건 한낱 권선징악적인 방편으로 하는 이야기야.’ , 이런 말을 공공연하게 합니다. 친구들끼리는 그러지. 신도들 앞에는 금방 말이 바뀌지. ‘염불하시오. 다음 세상 있어요. 지옥 천상 있어요.’ 인과법문을 하고 그러지. 또 멋지게 연기설을 강의 하지. 마음만 깨치면 성불이라고 한다면 인과가 무슨 소용이 있고, 계율이 무슨 소용이 있고, 경전의 학습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전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도한(屠漢, 백정)이가 견성을 해버렸어. 소의 정수리를 쇠망치로 내리치니까 그 소가 ~!’ 하면서 내지르는 그 소리를 듣고 깨쳐버렸다 그거요. 그렇게 깨치면 부처입니까? 그렇게 깨친 것이? 그게 올바른 깨침인가? 그건 사각(邪覺)이어 사각.
불보살의 교법을 훼멸하면서 위아래가 없고, 껍질만 불교이지 알맹이는 아니어.
 
오늘 대단히 중대한 말씀이 됩니다.
19세기말 독일의 유명한 생리학자입니다. '뒤브와레이몽(Emil DuBois-Reymond)'이라는 유명한 분입니다. 이분이 자연의식의 한계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제출했어요. 이건 테이프에 나오니까 거듭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7개의 수수께끼를 내놨어요. 이 세계에다가.
생명의 기원.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말해봐라.
유기체의 합목적성
사유와 언어의 발달. 나라마다 말이(언어가)다르잖아요.
이거 참 수수께끼지...
물질과 힘의 본질
운동의 원인
감각과 의식의 발생
의지의 자유

이 일곱 가지를 학계에다가 내놨습니다. 인류사회에다가 내놨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모른다. 또 어느 누구도 모를 것이다그랬어. 누가 말해봐라 그거예요. 그런데 나는 여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일곱 가지의 수수께끼는 무루대아라한 정도 수행해 들어가면 압니다. 그래서 우주 자연 인간 인식의 한계라는 새로운 8대 불가사의를 제출합니다. 영산불교에서는 아승지겁의 인류역사 이래로, 아승지겁입니다.

인류역사 이래로 세계적인 대종교를 창시한 여러 교주들, 여러분들 답해보시오. 여러분들과 철학사상의 거성들, 현 인류역사 5000년만 가지고 본다면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라든지 플라톤이라든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단한 분들입니다. 더 나와서 데카르트라든지 칸트 헤겔 하이데거라든지, 대단한 분들입니다.

중국에 가서 주자(朱子)라든지 양명학을 내놓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이라든지, 우리나라에 와서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이라든지 이퇴계(李退溪, 李滉), 이율곡(李栗谷)등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이러한 거성들,

여러분들아! 내 지금 8가지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보시오. 곧 나옵니다. 인류가 낳은 뉴튼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물리학의 거성들, 생리학자 수학자 등 대석학들에게 제출합니다.

첫째,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뒤브와레이몽(Emil DuBois-Reymond)'은 내놨는데, 나는 거기에다가 인간 생명의 기원으로 바꿉니다. 생명의 기원이라고 하면 생리학자 생물학자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생명의 기원을 말하라고 하면 말 못할 거예요. 우리 생물학자 김병기 교수, 그렇지요?

둘째, 인간 영혼의 실체 및 인간의 사() ()과정을 말해봐라.
이건 누구나 말 못해요.

셋째, 보살 아기의 탄생. 왕생극락 하는데 절대 필요한 요건입니다. 이 비밀을 말해봐라 하면 누가 말하겠소?

넷째, 불신(佛身) 보신(報身)의 비밀을 말해봐라.

다섯째, 자존자(I AM)의 정체를 말해봐라. 자존자, I AM의 정체.

여섯째, 시간의 처음.

일곱째, 빛의 본질과 그 본원광.

여덟째,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우주와 하나 된 무량광자체인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이 여덟 가지의 문제를 아승지겁 이후로, 인류역사 이후로 세계적인 대종교를 창교한 교주들, 너희들. 당신들 대답해 봐라 그거요. 말해봐라 그거요. 철학사상의 거성들, 과학의 대석학들아! 대답해 봐라. 절대 대답 못합니다. 모르지요. 모르지요.

이것은 십지보살을 넘어서 불과를 증하지 않고는 모릅니다. 그래서 '뒤브와레이몽(Emil DuBois-Reymond)' 이 일곱 가지를 학계에 내놨는데, 나는 여기에다가 여덟 가지를 덧붙여가지고 내놓습니다.
 
그러나 깊은 사유를 통해 대충 이해를 하고, 대충 답을 짜 맞추려고 한 사람이 나올 거예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확실히 불과를 증했는지, 대적정삼매에 자유로이 들고나는지, 법보화 삼신을 구족했는지, 삼계의 지존이신 부처님께서 불()의 안목으로 불안(佛眼)으로, 그리고 크신 위신력으로 다음을 가지고 시험하실 겁니다.

그 사람의 네 영체가 번개의 섬광(閃光)칼을 당해 내던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오? 번갯불, 섬광. 불과를 이룬 영체는 섬광을 막아냅니다. 이거 얼마나 무섭습니까? 누가 대답한다고 합시다. 섬광으로 때리면 지금까지 내가 거시했던 저 교주들 외도의 수장들, 석학들, 될 수가 없지요. 당해 낼 수가 없지요. 백천만분의 1도 능력 없지요.

천문학적인 고도의 무량억종광의 광도에도 눈은 정상으로 반응하는지. 부처님께서 무량억종광의 빛을 더 고도(高度)로 높이면 외도의 수장들이 부복해버립니다. 눈을 뜨지 못해버려. 뜨지를 못해버려.

그 영체가 부처님의 수천억도()의 삼매화에 던져도 상관없는지. 이말 알아야 됩니다. 수천억도()의 삼매화에다가 던져버리면 모든 중생의 영체가 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불과를 증한 분의 4영체는 끄떡없어. 여기서 통과하면 적합한 거예요. OK예요. 붓다인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1시간20분 되었어? 이 선불교에 대한 고언(苦言)을 더 이상 안하겠습니다. 40~50가지를 지적했는데, 30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 영산불교가 이러합니다. 지금 인류문화사에다가 대단한 불가사의를 제출한 거예요. 이게 보통이 아닙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조금만 부처님 칭명을 하고 끝내겠습니다.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구원실성 석가모니불 ~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
고아일심귀명정례
 
여러분, 영산불교를 사랑해 주세요. 영산불교를 사랑해 주세요. 지금 21세기에 정법은 없습니다. 진정한 불교는 없습니다. 여기를 떠나면 없습니다. 우리만이 정법이라고 하면 배타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영산불교를 모독하고 능멸하지 마십시오. 영산불교에서 구원 받는 길을 여러분에게 제시합니다. 여러분들 구원 받고 싶으면 언제든지 있습니다.

절대로 죄를 짓지 말고,

악한 생각 갖지 말고,

착하게 살고,

보살행을 하고,

열심히 칭명염불 하고,

계율 지키고,

효도하고 그러십시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오늘 불교대학 졸업식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에게 특별 법문을 하는데,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받들고 정법을 선양하는 훌륭한 부처님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숨쉬고 부처님의 가피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