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7일 화요일

[불교---2]왜곡되고 왜소하된 오늘날의 불교

왜소화된 오늘날의 종교


2600여 년 전 영산 당시 이후로 불신관佛身觀, 불佛의 삼신설三身設은 두터운 장막 속으로 가려져 버렸습니다. 사람 사람 마음 속 자성에서 삼신三身이 해석되고 있습니다. 크게 왜곡된 것으로, 눈 먼 선량한 중생을 오도誤導하고 있습니다.

우주적인 불교는 여기서부터 왜소화矮小化돼 버렸습니다. 축소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의 여러 나라 불교, 특히 한국의 선禪불교는 깨달음만을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이 목표요, 수행의 종착지입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음계‧중계를 철저히 지키면서 나없는 공부, 두타행으로 공성空性을 증득하여 아라한과를 증해야 합니다.

나아가 자·타력수행으로 정토업을 닦아 삼계를 완전히 탈출하여 보살이 되어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영원히 불퇴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살도를 완성하여 절대계에 빛으로 이루어진 자기 부처를 이뤄야하고, 상적광세계에 자기의 청정법신불을 두어야 비로소 수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위대한 우주적인 메타 불법佛法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왜곡된 부처님의 가르침

오늘의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이도 왜곡되어 있습니다.
생사관生死觀 하나 뚜렷하지 않고 불교수행의 기본은 철저한 지계持戒에
있는 데도 승려들의 승행僧行은 심각할 정도로 타락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크게 눈뜬 성자가 없어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요, 마음자리가 극락이라고 합니다.
지옥과 극악을 마음 안에서만 찾으며 "지옥과 극락은 따로 존재하고
있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음 밖의 지옥 극락, 불 보살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눈을 뜨고 나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요? 불안佛眼이나
오안五眼을 갖추고 나서 하는 말인지요? 실제로 지옥과 극락이 안
보입니까? 정말로 마음에도 안팎이 있다는 말입니까? 공空에도
안팎이 있습니까?

마음眞如自性은 수긍삼제竪亘三際요, 횡변시방이며 불생불명不生不滅입니다.
일심一心 혹은 법성法性은 시방법계 어디에도, 심지어 티끌이나
먼지 속에도 주변하여 뻗쳐 있습니다.

동시에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영원히 경계에 물들지
않습니다.
자성自性은 청정무구요, 여여如如부동不動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자기를 깨친 정도로는 아직 지옥과 극락이 안보입니다.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결코 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려분! 지옥과 극락은 실제로 있습니다. 불 보살도 계십니다.
윤회도 사실입니다. 200여 불교 경전에서 지옥 등을 분명히 말씀
하신 부처님이 거짓말쟁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공空을 지나, 무아 속 삼매에
들어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간략히 줄여 전합니다. 공부해서 뚫은
바를 수행인의 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왜소화된 불교

붓다님들이 계신 절대계 - 여기를 공空에 못 미치는 세계로 보고, 따라서 마경‧환영으로 보고 또는 천마의 소작所作으로 보고 비방한다면 법法을 모독‧능멸하는 대망어로서 무간지옥행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해둡니다. 천마는 하늘1~6하늘의 외도 마魔일 뿐입니다.

붓다는 하늘天上을 지나 성중하늘, 천녀정토, 서방극락, 약사정토를 지나서 연화장세계의 무아 속 삼매에 들어계십니다. 법‧보‧화 삼신을 구족하시며 상모 단엄하시고 백종오색광의 광휘光輝 속 32상의 불신佛身을 갖추시고 자비‧지혜‧삼매‧자재한 신통력이 있어서 실로 어느 존재神와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습니다.

붓다는 겁劫에 한 분 출세할까말까 하는 그런 어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실체 - 불신이나 덕성과 실제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거나 묻히기 마련입니다.

불멸 후 600년쯤 출현한 인도 대승불교의 거성이요, 제2의 석가라고 불리는 용수龍樹에 의해 이신설二身設_生身, 法性身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이신설에는 보신의 개념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의 법성신법신 개념 속에는 색상 단정, 상호 장엄, 엉ㄱ종광명 등 보신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불멸 후 900년쯤 가서 유식의 조사 무착Asnga보살이 불신을 삼신설三身設로 자리매김합니다. 그것도 당시 잠깐 왔다 간 미륵Maitreya불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님은 법신, 보신, 화신을 구족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사실인데도 먼 훗날 선불교에 와서는 자성불自性佛을 말하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을 주장합니다. 부처는 사람이 지닌 마음자리 이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옥도 극락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고통 떠난 자리가 극락이요, 고민이 있으면 무간지옥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한낱 마음 깨친覺 이로 전락하여 이해되고 급기야 저 우주적 메타종교인 불교는 심교心敎로 왜소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왜소화된 불교/삼신


우리 불교는, 위대한 우리 불교는 왜소화 되어버렸습니다. 현재 아라한이 목표입니다. 아라한도 아닌 깨달음을 종착지로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부한 바로는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썼고,
70여회에 거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의 불교로 올려줘야 됩니다. 불교는 위대합니다. 본래 불교는 아라한을 넘어서 보살, 보살을 넘어서 붓다 이루는 것입니다. 붓다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우주 진리․ 우주 본체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우주 본체와 하나가 된 것을 법신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법신불이라고 하는 개념을 학자들도, 그 어떤 스님들도 모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법신불에서 보신불이 나옵니다. 불과를 증한 분은 유․무를 초월한‘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 불신을 두는 겁니다. 이건 대단히 엄청나고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불신에서 천백억 화신을 냅니다. 천백억 화신을 내어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 국토에 가서 그들을 교화 합니다. 그리고 그 보신에서 이 사바세상에 사람 몸을 받아 옵니다. 인신을 받아 옵니다. 그 인신을 응신, 응화신, 화신 그럽니다. 이렇게 불과를 이룬 어른은 세 몸을 둡니다. 법신불․보신불․화신불. 이제 조금 더 깊이 이야기 해드립니다.

보신불은 상대세계(경험세계)를 초월해서 저 절대계에 몸을 둡니다. 그 절대계에 몸을 두는 그 보신의 모습은 32상80종호를 갖춥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 몸뚱이는 부처님의 개끗하고 청정한 광명의 빛입니다. 무량광입니다. 그 무량광으로 이루어집니다. 무량광은 소위 모든 존재의 근원인 빛, 그것을 자성광명이라고 하는데 그 자성의 광명보다도 훨씬 더 깊이 들어가야 정토(극락세계의 빛)세계의 빛이 나오고,

거기서 한없이 수행하고 보살행을 완성해서 절대계에 이르는데 그 절대계는 무량광의 세계입니다. 그 무량광으로 붓다의 몸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몸뚱이를 원만보신(줄여서 보신불)이라고 합니다. 빛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래제가 다하도록 영원히 멸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 없습니다. 그 절대세계는 환희의 세계입니다. 환희의 세계. 여러분, 극락을 표현 할 수 없어서 극락(즐거움의 극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계의 부처님 세계는 극락을 백 천 만 배 보다도 훨씬 뛰어 넘어서 환희 자체입니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지, 환희 자체입니다.

환희 자체인 그 세계는 대적정삼매(대적광삼매)를 통과해야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원만보신(보신불)의 세계는 그러합니다. 이 지구가, 이우주가 완전히 파괴되어도 거기는 미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자는 목표를 붓다 이루는데 두어야 됩니다. 원만보신이 필요에 따라서 자기 몸뚱이를 백 천 만억의 몸으로 동시에 나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수많은 중생국토에 가서 교화를 합니다. 인간 몸으로 받아 온 이 몸뚱이를 화신불(화신, 응화신)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한테 스님이 간곡히 말씀해 드릴 바가 있는데, ‘광명 만덕 ․ 자재 만현’을 우리 입으로 부처님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내 책<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이 나가고 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앞으로 부처님․ 붓다라고 부르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기 화신은 어디까지나 화신입니다. 저기 절대계에 있는 불신(원만보신)은 부처님이올시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깨달았건, 어떤 겁 전에 불과를 이룬 분이 사람으로 와서(인신을 받아와서) 다시 불과를 이루었던 간에 이 몸뚱이는 화신입니다.

화신과 보신은 대단히 차이가 있습니다. 화신과 보신은 한 몸이지마는 유한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신의 능력과 지혜는 저 보신의 능력과 지혜를 따를 수 없습니다. 저 보신이 이 육신(화신)속으로 들어와도 그 무량한 지혜와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내가 받으면 이것이 가루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을 때 이 네 개의 영체가 자기 불신과 합일이 됩니다. 계합이 되어버려요. 그 때의 그 불신의 능력은 무한하지요. 합일이 안 된 상태의 그 절대계에 있는 보신불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능력이 무한합니다.

자, 삼신을 갖추고 있지요, 소승이나 대승에서 이야기하는 18불공법이 있는데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붓다라고 하면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한 70여회를 두고 가끔 가끔 부처님세계의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실 겁니다.

2008. 9. 7. 토(음8.8)큰스님 춘천법문중 발췌






왜곡되고 왜소화된

세계 불교의실상을 안타까워하며
무량겁 전에 우주 법계 최초로 불과를 이루시고, 다
시2600여 년 전에 사바세계에 몸 받아오셔서 위없는
가르침을 주시고 대열반에 드신 후, 무아 속 절대계에
빛의 인격체로 여여히 살아계신 거룩하신 우리 교주
불세존께 백천만 번의 오체투지로 예경 드리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우주적 진리의 불교가 2600
여 년의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너무도 많이 왜곡
되고 왜소화 되어 위대한 불교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
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왜곡된 우리 불교의 실상을 반성
적 차원에서 냉철하게 파악하고 왜곡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새로운 불교
의 방향을 정립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우리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내어 정법을 세상에 널
리 알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는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 불교도들이 깨어나야 합니
다. 긴긴 잠에서 깨어나,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크게 벌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진리의 말씀 - 정법의 사자후를 드러야 합니다.

한구절 진리의 게송을 듣기 위해 흉악한 나찰에게 한 몸
을 기꺼이 던지는 설산동자와 같이 진리를 갈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야 합니다.

수천 년 간 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해설하고 주석을
해놓은, 그래서 불교의 정설로 굳어진 교설조차도 때
로는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합
니다. 이제까지 나의 분신처럼 가지고 있던 불교에 대
한 지식도 버릴 줄 아는 아픔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불교는 남방불교, 북방불교, 티베트불교라
는 세 갈래의 큰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중 어느 불교도 부처님의 법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왜소화되어 있습니다.
정법불교의 위대한 면면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
다. 이제 우리 불교의 실상을 아주 포괄적으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로서 현행 불교
를 비판할 목적은 추호도 없음을 미리 밝혀 드립니다.
오로지 우리 불교의 앞날을 위해서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 아쇼카왕 때 스리랑카로 전해
져 꽃을 피운 동남아시아 중심의 남방 상좌부불교는
스스로의 틀에 갇혀 감히 그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것은 높이 사줄만합니다. 위빠사나
수행법도 불교 경론에 있는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그 수행법에만 집착하다 보니 부처님의 위신
력을 받는, 보다 수승한 수행법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
다. 아라한이 수행 목표이고 해탈신을 갖는 보살이나
불신을 두는 붓다의 경지는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
습니다.

부처님의 어마어마한 위신력과 심원한 적멸의 해탈
세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방불교는 이런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크게 왜곡
되지 않은 것만이라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북방으로 전해진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소위 선불
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태동 초기부터
외도사상과 혼합되어 불교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
습니다.

심즉시불이니 견성성불이니 하면서 그럴듯한 교설을
내세우고 있지만, 부처님의 참 경계를 이해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불교를 왜소화시키고 부처님을 격하
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의 간화선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화두를 들
려면 부처님의 성호가 가장 좋은 화두가 되어 밤낮
으로 불러야지, 왜 경전에도 없는 조사 스님의 말씀을
화두로 들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 성과도 없고 본격적인 수행의 시작단계인
견성,즉 공을 깨치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것
을 위해 고생스럽게 오랜 기간 수행을 해야 하는지 이제 한
번쯤은 되돌아볼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최후의 보루로서 티베트불교가 있지 않느냐
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참 좋겠
습니다. 티베트불교는 수행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긴
합니다.

그러나 수행의 어는 단계에서 하고 있는, 힌두교 요가
수행이 가미된 밀교 수행법은 정법이 아닙니다. 또한 티베
트불교의 지도자는 신통을 사용하여 환생을 함으로써
정법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티베트불교를 위한다고 하지만 정법에 반하
는 것은 하면 안 됩니다. 티베트불교의 우수성으로 주
장하고 있는 즉신성불의 교설은 불자들의 안목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불신보신불이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하고 차원
높은 존재인지도 모른 채, 중음계에서 우주 본성의 빛인
정광명을 받은 의생신을 보신불이라 여기는 어처구니
없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세계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
점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정리해봅니다.

1. 세계 불교는 부처님의 실존과 위신력을 믿지 않
는 부처님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2. 세계 불교는 인간의 실체인 영혼체을 부정하고 윤회
주체마저 없다고 하는 주인공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
습니다.

3. 우리 불교는 붓다가 되고 보살이 되는 완전한 생사
해탈을 이루는 수행법이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4. 우리 불교는 해탈법위와 해탈의 적멸세계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차원 낮은 불교가 되어버렸습
니다.

불교는 우주 법계의 법왕이신 부처님을 교주로 모시
고 있으며 완벽한 교리체계와 구원사상을 갖추고 있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신도 수로 보면 기독교
천주교 포함, 이슬람교, 힌두교 다음으로 겨우 네 번
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도 수가 종교 평가의절대적인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오늘날 불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하나의 지표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고향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져 버렸
습니다. 불교가 세계로 뻗어나가 널리 정착되지 못하
고, 아시아 일원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쇠
퇴했습니다.
불교 교리의 위대함과 우주 법계영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이는 초라하
기 그지없는 성적표인 것입니다. 그럼 불교가 왜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요? 이제 그 이유를 한 번 찾아보겠
습니다

출처/2천년간 무아윤회 논쟁에 종지부
영혼체 윤회론
펴낸곳/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





대승불교 경전을 쓴 붓다의 화신들


대승경전들을 보면 상당 부분이 붓다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부분들이 발견됩니다. 따라서 붓다의 소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
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닌 다른 어느 붓다님들께서 경전 편찬의
대임을 띄고, 이 땅에 화신으로 오셔서 여러 대승경전들을 기록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학자들이 첨삭, 보정, 가필, 윤문해 오늘 날 우리가
보는 대승불전이 되었음을 이 자리에서 천명합니다.

(1) 화엄경 열반경 반야경 법화경 능가경 능엄경 지장십륜경
 등에서, 부처님의 미간 등 불신의 여러 부분에서 빛을 방사
함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불과를 증함이 없는 학자
가 필요에 따라 부처님께서 방광하시는 것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2) 부처님 화신불의 설법이 바른 가르침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과 땅이 육종으로 진동하는데, 대승경전 곳곳에 '육종
진동'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3) 수많은 보살들과 성중, 하늘 사람들이 설법의 장에 운집
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4)법화경 여래수량품의 말씀은 거의 사실인 바, 불과
를 증하지 못하고서는 이를 알 수 없습니다.

(5) 법화경 신력품에 부처님의 혀가 삼천대천세계를 덮
는다는 부분도 사실입니다.

(6) 백천만억 화신을 붓다께서 나투신다는 말씀 등은 붓다 이
루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대목들입니다.

(7)화엄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은 붓다가 아니고서는 말
할 수 없습니다.

(8) 32상 80종호는 불신원만보신의 거룩한 점인 바 붓다만이 알
수 있습니다.

(9) 다보탑의 다보불을 알 수 있는 이는 오직 붓다뿐입니다.

(10) 법화경 종지용출품에서 볼 수 있는 항하사수의 불
격을 갖춘 보살의 존재도 붓다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11) 지옥의 수와 그 소름이 오싹할 정도의 형벌 받는 상황을
어떻게 꾸며낼 수 있겠습니까?

(12) 극락을 누가 그토록 자세히 그려냈겠습니까? 윤회 안과
밖, 모두 가볼 수 있는 붓다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13) 백천삼매, 해인삼매, 적정삼매 등은 오직 붓다만이 알
수 있습니다.

(14) 법 보 화 삼신을 어찌 알았을까요?

(15) 유마경의 부사의품의 내용 등도 사실입니다.

(16) 사음이 무서운 계율이라는 것도 불과를 증한 이만이 그
이유를 압니다.

(17) 불마다 인행시에 세운 서원이 있다는 말씀도 맞습니다.

(18) 법당 탱화에 있어서도 가령 관음보살의 아미타불을 정대
한 관, 여러 불 보살의 영락 등 장신구, 지장보살의 석장, 문수
보살의 지혜의 칼 등 이 모두는 진정 불과를 이뤄 원만보신의 변
화신을 보았기에 말할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나는 거듭 선언합니다. 대승경전들은 붓다의 화신들이 쓴 것을
불교학자들이 증보, 윤문해서 편집한 것이라고!
남섬부주에 부처님 이후로 오셨던 다른 붓다님들의 후신을 소
게하겠습니다. 인도의 유마힐 거사 아쇼카왕, 중국의 구마라즙
삼장, 한국의 이차돈 성사, 일본의 성덕태자는 석가모니부처님 후
신이 아닌 다른 붓다들의 화신으로서 보살행만 하고 가셨습니다.

소승의  아함경   대승의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은 대부분 붓다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거나, 진실을 담은 경
전입니다. 동서고금 아니 시공을 뛰어넘어 가장 심오하고 위대
한 종교는 불교뿐입니다. 불교는 희유하고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
르침을 전하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중생들은 과거 도인들이 신통을 부린 행적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고 도인, 기인들이 행한 기사이적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가집니다.

신통은 우리들 범부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영통이나 신통만 있어도 그 사람을 따르고,
그 주변에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많이 배워 학문
이 있는 분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통을 약간이라도 가진 자는 일부러 자기를 과대 포장합니다.
이를 따르는 눈 먼 인간들은 무조건 그의 말을 믿고 추종합니
다. 우리는 신통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영통 신통이 왜, 어떻게 오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영통 신통을 믿고 따르면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
헤쳐 여러분이 참고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부처님의 본 뜻을 왜곡한 대승불전



아육왕의 비문 등에 따르면 우리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
신지도 약 3000년이나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정법
의 상당 부분이 땅에 묻히고, 불법이 적잖게 왜곡되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불멸 후 약 1~2백여 년 간은 합송 형태로 전승
되어 오다가, 제3회 결집 때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을 비로
소 문자화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대승경전은 대략 기원 전 2세기 후박~1세기 혹은 서기 1
세기부터 약 1,000여 년 사이에 부처님의 삼법인 사상에 입각
하여, 대승불교 학자들이 편찬한 이후 증광, 보정, 첨삭을 거듭하
여 완성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유력한 정론입니다.

그래서 '대승비불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까지만 해도 불교신도들은 대승경전이 '부처님께서 친히
설하신 경전'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실증적 역사학이 소개
돼 불전의 성립 시점 등을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대승경
전에 기록된 내용을 부처님이 모두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2500여 년 전에 출세하신 우리 부처님의
행적도 처음 20년과 마지막 2년 정도 밖에 추적할 수 없다고 합
니다.

분명히 지금의 대 소승 경전의 말씀 모두가 그대로 불설이라
고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아난 존자는 암기의 천재였지만
어찌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법문하신 모두를 정확히 송출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상과 집착에서 벗어나 이미 보살과 성과를 얻
었다고 하지만 '붓다 중 붓다'이신 부처님의 깊은 뜻을 분명하게
헤아린다는 것도 무리였고, 더구나 아난은 부처님을 25년 밖에
시봉하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산스트리크 문자 역시 당시로서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인도에는 수백의 방언들이 있어서
기록의 정확성 역시 의심받기도 합니다.

이 밖에 경전의 최초 결집 때 참여하지 못한 비구들에 의해서
칠엽굴 밖에서 별도로 결집이 있었다는 사실, 구어체가 문어체로
바뀔 때의 문제, 산스크리트 등으로 기록된 불교 원전이 약 서기
2세기에서 12~13세기 사이에 1~2백 명의 번역사에 의해 한자 등
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역의 문제 등 이런저런 이유로
대승견전의 원전에서 적잖은 왜곡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불교 내부에서도 불멸 100여 년 경, 제2차 결집을 계기로
근본분열에 뒤이어 지말분열을 거듭해 18~20부파가 생겼고, 여러
부파들은 각각의 소의삼장을 두었습니다. 이 역시 왜곡
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특히 지금의 대승불전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는 본래 부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부분이 많이 눈
에 뜁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결정한 많은 종파불교에
의해 해석의 차이가 생기고, 또 불교가 세계화하는 과정에서 상당
히 이질적인 다른 나라의 토속 종교와 접목해서 생긴 불교도 있
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선불교의 가르침에는 부처님의 본 뜻과 많은 괴
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부처님 이후 4번째로 출세할
불에 의해서 대 소승 불전은 재조명되어질 것입니다. 과거
장엄겁 동안 수많은 붓다들이 출세하여 설한 법설이 고스란히 용
궁에 차례로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 비장된 법보를 곧 출현할 붓
다산해혜자재통왕불가 공부하여 진정한 정법을 사자후할 것입니다.

또한 영산 당시의 저 유명한 마하가섭 존자는 지금 여인의 몸
을 받아와 불과를 증하고 삼신을 구족하여 출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수보리 사리불 존자처럼 조용히 떠날 확률도 있으나,
21세기의 세계불교를 위해 우리 모두 간절히 원한다면 보살행을
하기 위해 출세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불교학자들이 깊은
삼매에 들어 구전되어 내려온 여러 부처님 말씀인 삼법인사상에
기초해 대승경전들을 편찬해냈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청정한 계율의 용맹전진에 따라 깊은 삼매에 들 수 있고, 깊은
삼매를 통해서 불경을 펴낼 만한 지혜가 생기는 데 학문을 하는
학자들로서는 무리입니다.

공를 깨쳐 무아가 되어야 삼매다운 삼매에 듭니다. 나와 대
상이 없고 동시에 '나'라는 생각까지 없으면서 성성적적해야 비로
소 아라한 삼매입니다.
더욱이 불전을 쓰려면 최소한의 진정한 삼매인 상품보살 삼매
인 해인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행인이 여자를 안다면 절
대로 삼매에 들 수 없습니다. 또한 학승들도 전정사유를
해야만 간경으로서도 미생전의 본성을 깨칠 수 있으나 이
수준으로는 경을 쓸 수 없습니다.

상품보살의 삼매 정도에는 들어야 하는데 실천궁행 염불선이라
야 됩니다. 그것도 필요조건일 뿐이요, 몇 가지 조도행을 더
해야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학문하는 이들은 평생 어구에만 천착하므로 정토보살이 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보살의 깊은 삼매에 들기란 불가능한 것입니
다. 다만 구마라즙 삼장은 붓다의 화신이셨음에도 불과를 증하지
못해 대승경전은 제작하지 않으시고 역경만 하셨습니다. 보살행만
하고 가신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의 대승경전


불교의 대승경전 - ≪법화경≫ ≪화엄경≫ ≪대반열반경≫ 등의 부처님 말씀이 많은 방편과 비유火宅喩 窮子喩……, 상징을 들어가며 설하셨다 해서 다분히 픽션허구으로, 한낱 문학작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음을 보고, 사실을 진실하게법문하고 싶어 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에서는 직설법을 썼음을 강조해 두는 바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대반열반경≫같이 큰 법을 설하실 때는 먼저 깊은 삼매에 드신다는 것과 하늘에서는 여러 아름다운 꽃비를 내리고, 대지는 육종으로 진동하고, 머리 정수리에서, 입 속 치아에서, 미간에서, 몸 전체에서…… 억종광명을 놓으셔서 무량 아승기 국토 저쪽의 소천세계 모두를 비추시기도 합니다.

이때 많은 보살, 호법성중104위, 하늘 왕등, 용왕…… 그 서열 높은 권속들이 구름같이 몰려와서 저쪽 세계의 광경을 보면서 놀라 부처님께 예배 공경하고 찬탄합니다.

바야흐로 감로의 법문은 시작이 됩니다. 32상 거룩하신 상호의 부처님께서는 백천억의 화신을 내시고 자재와 신통…… 미묘, 최승의 음성으로 법을 설하십니다. ≪화엄경≫과 ≪법화경≫ 등의 말씀을 허구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방편과 비유를 드는 것은 반드시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법을 모독, 능멸하는 대망어를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은 거룩하시고 희유하십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名利_쾌락에 대한 집착을 다 놓아버리면,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자아에 대한 것까지도에 집착하지 말고 다 버릴 때 드러나는 반야 지혜반야공는 화엄의 세계를 열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화엄의 세계로 깨쳐 들어가면오입悟入 붓다 이룬 이들은 탄성을 지르면서
“아-. 이거다! 옳지, 그래…….”합니다.

공空을 깨치고, 곧 마음자리를 보고 보림保任을 잘해서 공성空性을 증득하여 무루 대아라한이 된 후 실로 ≪법화경≫ 말씀처럼 백천만겁을 두고 삼천대천세계 부처님들께 모두 공양드리면서 보살도를 완성해야 삼신을 갖춘 붓다가 될 수 있습니다.

무아 속 절대계 연화장세계에 천억 나유타 갖가지 빛깔로 이루어진 자기의 불신佛身을 얻습니다. 유형이며 지복의 몸입니다. 32상 80종호 이상을 갖춥니다. 붓다의 눈빛은 때 묻지 아니한 선정삼매의 빛입니다. 지계․인욕․정진․반야․자비의 빛입니다.

붓다의 거동 거동 일거수일투족은 태산이 움직이는 듯 하면서도 해탈, 무애, 자비, 지혜덩어리이십니다. 붓다의 음성은 미묘음으로서 어느 때는 단보시바라밀음 때로는 시라계율바라밀음, 인욕․정신․선정․반야․자비․해탈음이십니다.

사자후음․운뢰雲雷음을 내실 때도 있습니다. 불신을 이루는 백종오색광명이 몸 여러 군데에서 방광하며 분사될 때의 그 붓다의 빛은 청정, 적정, 지혜, 환희, 청량, 단엄……합니다.

삼천대천세게의 일부 혹은 전부를 비추실 때 그 빛들 모임은 마치 삼매의 구름, 길상․원만․지혜․자비의 구름이 됩니다. 향香구름, 꽃․보배․의복의 구름도 됩니다.

향 구름에서 향비香雨가 내리고, 꽃 구름에서 꽃비가 내립니다. 그 향과 꽃과 보배……에서 갖가지 미묘한 법法의 소리를 냅니다. 그 부처님 광명으로 인하여 병든 자 병이 낫고, 근심 고통 있는 이는 그 번뇌의 고에서 떠납니다. 10악의 마음도 부처님의 억 가지 빛깔 광명을 만나면 악심이 떠납니다.

부처님의 손가락, 입과 입속 치아, 코, 눈매…… 어느 부분이든 그 아름다움에 취합니다. 8고리 석장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불가능이란 없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천상천하의 지존의 느낌이 듭니다. 깨끗하고 청정한 부처님 광명의 기능은 밀장이어서 모두 소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업장을 씻어주고, 소멸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붓다는 절대계에 여여히 계십니다. 원만보신은 거룩하고 희유하십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점은 보살이 지니지 못하는 삼신과 대적정삼매와 부사의한 억종무량광명에 있습니다. 불교는 위대합니다. 대승경전의 장면들은 사실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불교를 왜소화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력수행으로 우주의 본체, 마음자리를 보는 소위 견성은 경계가 뒤집혀서 모두가 공空입니다. 공을 깨친 후 두타행을 하여 나에 대한 착을 완전히 떼어야 공을 증득합니다. 아라한의 깨달음 보살이 되면 수행자의 네 영체가 완전 분리되어서 1번 영체 안으로 겹치고 그 1번 영혼체가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극락세계 옷을 하사받고 극락 정토보살 인가증을 받습니다.


보살의 깨달음 처음으로 불과를 증하는 무상 정각을 이룰 때는 자기의 불신이 이미 절대계에 존재합니다. 그 불신과 거짓 몸뚱이가 계합이 되면서 부처님으로부터 불의 인가를 선언받고 인가증을 받으며, 삼천대천세계 부처님 대장에 오르게 됩니다. 붓다의 깨달음_無上正覺

≪화엄경≫의 서품격인 세주묘엄품 같은 일들이 현실로 등장하게 됩니다. 광명 만덕‧자재 만현에게는 부처님의 아버님 정반, 어머님 마야가 와서 배알하고 축하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중 발췌
펴낸곳/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

[불교---1]불교의 위대한 점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윤회에서, 삼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른은 아라한 성자부터라고
했습니다.
아라한부터 빙의가 없습니다.
명부에도 못 들어간 영가귀신가 빙의된다면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의 몸은 청정하며 보살은 청정하다못해 발광發光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발광 정도가 아니라 빛덩어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성자는 자기 나라의 말로 자기만의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공空을 깨쳐서, 혹은 묘유 속으로 헤엄쳐 나가며 부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 노래는 착이 없고, 상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도송을 읊고, 법거량하는 것은 공부의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옛 스님의 것을 표절하여 흉내나 낸다면 더더욱 안될
일입니다.

먼저 불성을 보왔다면, 나의 본질도 보아야 합니다. 인간 영혼체의
비밀도 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영혼체를 영체라고도 부릅니다.
중생의 영혼체는 다층구조이며 4개의 영혼체가 겹쳐져 있습니다.
아라한 도道 이상을 이뤄야만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삼매에 자재해야 해탈이 가능합니다.

3번 영체로 몸을 빠져 나간다면, 그것은 삼매가 아니고 하늘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소신한다 해도 3번 영체로 빠져 나가는 삼매진정한 삼매가
아니라면 그를 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2번 영체로 몸을 자유로이 나고 든대도 그것 역시 진정한 삼매가 아닙니다.
1번 영제로 나갈 수만 있다면 극락정토까지 갈 수 있어서 여기부터가 진정한
삼매의 시작입니다.

삼매에 들려면 심신이 맑고 청정해야 합니다. 우주가 이 몸 안에 있고,
내가 우주 안에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무너진 이 경계는 아라한부터
가능합니다. 보살의 마음은 안과 밖이 수정같이 맑아 깨끗함과 더러움의
분별을 뛰어 넘습니다. 그저 깨끗하고 깨끗할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상대가 빙의됐는지 여부도 압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삼메에
들었는지도 압니다. 견성하고 도통했다지만 절반 이상은 빙의된 경우이고,
공부 많이 한 수행자가 명부에 못 들어가 수행자에게 빙의된 사례도
많습니다.

그가 빙의된 데다, 그리고 선서를 많이 보아서 오도송도 나오고, 법거량도
휼륭하게(?) 하기때문에 격외를 노래한다고 해서, 아라한 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아 속 삼매가 진정한 삼매이고, 완벽한 생사해탈, 즉 대열반은 무아 속 삼매에
자재해야 하며 무엇보다 자기의 불신을 얻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불신을 얻는다는 것은 대우주와의 완전 계합입니다. 업장과 번뇌, 그 습기의
찌꺼기까지 다 녹아야 불신이 생깁니다. 이 일은 부처님 경계이기에 윤회 안
중생과는 너무 거리가 먼 법문이라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단언하건대 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의 불신을 두지 못하면, 즉
청정법신과 원만보신을 구족하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는 것만 재삼
말씀해 둡니다.

불법, 정법을 만나 삼악도에 안 떨어지는 것만도 대단하게 여기지만
가능하면 여기에서도 큰스님을 만나 수행해서 윤회를 벗어나 성자,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성중의 반열에 들면 영원히 인간세계에 안 나오려면 안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다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아서 불법을 만나고 더구나 정법의 감로
법문을 듣고서도 우리 이대로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라한 성과를 이루면 보살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공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이타행만은 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선근공덕의 보따리가 문제입니다.
그 보따리가 커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진화합니다.
아라한 되고, 보살 될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근보따리입니다.
출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붓다_ 성중성 聖中聖


불교는 완벽한 생사해탈 곧 대열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붓다가 나올 수 없고 불 보살이
출세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만이 붓다가 나옵니다.
'성자 중의 성자' 라 할 수 있는
붓다가 탄생하십니다.
보살이 출세합니다.
이 점이 바로 불교의 위대한 점이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 위대한 가르침이여!

교학하는 이들은 불교의 무진연기 무아사상 등이 불교의 위대
한 점이라고 합니다. 법계의 위대한 경전 화엄경의 일중다一中多
사상, 보살의 원행願行 사상이나 신비로운 밀교사상, 정토삼부경에
기초한 정토사상 역시 위대한 발견이라고 하여 불교가 제일이라
주장합니다. 시방삼세를 회통하는 불교의 심오한 교의와 철학 사상
은 과연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불교경전의 방대함도 다른 종교의 그것과 비교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아함부만 해도 1만 8천여의 경들로 이뤄져 있
습니다. 그리고 방등, 반야, 화엄 등의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있습
니다. 티베트 쪽으로 흘러 들어간 밀교의 그 수많은 분량의 경전
들까지 합한다면, 분량에서도 가히 위대한 종교라 아니 할 수 없
습니다.

또한 불교는 그 화엄사상에서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양
자역학을 불 수 있어서 '과학의 과학' 이요, 선 반야 구사 유
식철학을 보면 가히 '철학의 철학' 이요, '학문의 학문'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토, 밀교 사상에서 본다면 '종교의 종교' 입니다.

과거 장엄겁 동안에 일찍이 불과를 이루셨던 삼천대천세계의 그
수많은 붓다들이 동서남북 상하에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불신佛身
은 없으나 불격을 갖춘 상수上首 보살님들도 무수히 계십니다. 그
래서 불교는 가장 힘이 있는 위대한 종교인 것입니다.

극락세계 위의 동방 약사부처님 정토정유리세계와 그 외 시방十方
에 산재한 정토세계에 있는, 무수 무량한 8지 이상 10지까지의
정토보살들과 상품등각 보살들의 수효는 더욱 많습니다.

이뿐입니까? 불 보살들을 받드는 성중들은 얼마나 되고요? 일
백사위 화엄성중의 대군단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사람이 죽어
서 가는 명부와 지옥도 지장보살의 수중에 있습니다. 이렇듯 불교
는 위대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자랑스러운 불자라는 긍지를 갖기 바랍니다.
'붓다 중의 붓다' 요, '부처님 중의 부처님' 은 다름 아닌 석가모
니부처님이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삼계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다음은 다보불입니다. 삼계의 지존이십니다.

붓다마다 좌우보처 보살이 배정됩니다. 그리고 붓다마다 50명
이상의 아라한급 성중이 호신합니다. 황금색 장삼과 빨강 가사 그
리고 불자佛子가 주어집니다.

불교는 위대합니다!


출처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

오늘날 수행자들이 구가(謳歌)하는 정신세계는 견성(見性), 즉 깨달음이다. 하지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수행자의 한계, 즉 견성을 초월하여 아라한, 보살, 붓다를 거론한다. 지극히 장엄(莊嚴)한 세계가 견성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극명하고도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까지 어느 누가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존재의 계층적 도식(Hierarchy Schema)과 붓다의 삼신설(三身說) 그리고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의 중요성을 이렇게 큰스님처럼 명료하게 서술하였던가?

우리 불제자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기존 선 불교를 건전한 시각에서 올바른 비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불제자들은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즉, 큰스님께서 선 불교가 100%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선 불교의 세계를 환골탈태시켜 더욱 고원하고도 지고하게 확장시키려는 각골쇄신(刻骨碎身)과 혼연(渾然)의 노력들을 엿 볼 수 있다.

선 불교는 엄연히 한국 불교의 수행적 토양을 다지는데 좋든 나쁘든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 모든 불제자들은 이 점을 명각(明覺)해야 한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볼 때 그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선 불교가 주장하는 견성, 깨달음(Elightenment),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모두 아라한을 한계점으로 갖는다. 큰스님 말씀대로 인간으로서 견성을 하여 보림 후 아라한에 이르는 것만도 엄청난 일이며 참으로 힘든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 불교의 이러한 아라한까지의 깨달음에 의해서 근본불교 당시 석가모니부처님의 삼신설 체계가 가리워지고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알리기 위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출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령 큰스님께서 단순히 선 불교의 폐단만을 비평하기 위해서 성작(聖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친술 하셨겠는가?

올바른 지견과 식견을 구비하여 큰스님의 서적과 법문을 대면한 불제자라면 큰스님의 심오한 대의(大意)를 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선 불교의 한계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선 불교를 근본불교에 기초하여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큰 스님의 염원에서 쓰여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힌두교의 범아일여 사상과 서양의 유대신비주의 인 그노시즘(Gnosticism 靈智主義)의 최종 목표와도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카발라에서는 아인 소프(Ayin Soph 히브리어로 무한이라는 뜻)로, 타로체계에서는 우아일체(宇我一體)로,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로, 그노시즘에서는 영지(靈智 Gnosis)로서 알려져 있다. 도가(道家)에서도 노자(老子)는 도가 수행 세계의 종지(宗指)를 현묘지도(玄妙之道)로 거론하고 있다. 현묘함이란 바로 불가(佛家)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비슷한 맥락을 한다. 따라서 전 세계의 수행문화가 20세기까지 그 최종 목적을 아라한 정도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시대는 급변하고 전 세계에는 아쿼리안(Aquarius)문명을 맞이하여 뉴에이지 열풍에 명상수행에 요가, 단전호흡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세태 속에는 세계 구도자들의 보다 큰 소식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관통하고 있다.

또한 견성의 수준으로는 생사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으며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거나 정립할 수 없다. 즉, 선 불교만이 한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영성문화와 종교 수행 체계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상에서 가장 심오한 수행체계이자 광대무한(廣大無限)한 철학사상을 함유하고 있다. 한편 지구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불교 박해와 탄압이 외부적이거나 묵시적으로 행해져 왔었다. 그러한 박해와 탄압의 어려운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너무 고차원적인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는 어쩌면 단순히 아라한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교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나름대로 일조를 했다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결국 선 불교는 불교의 맥(脈)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역할을 잘 이행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자각(自覺)의 눈을 크게 뜨고 오늘날의 위기에 몰린 불교를 복원시키고 중흥을 도모해야 할 때가 왔다. 불제자들 간에 너무 음계(淫戒)가 무시되고 막행막식으로 수행을 하는 경향이 불가에 만연해 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를 차마 그대로 방관할 수 없는 큰스님께서 친히<<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리라.

재차 강조하는바 선 불교는 강직한 행동과 난해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어려운 시절과 고비를 잘 넘겨왔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매우 높이 보이도록 했으며 불교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여러 형태로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잘못된 것은 아니니라, 진리(Truth)는 사실은 사실이라고 말할 때 증득된다.

즉 선 불교가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온 그동안의 공과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선 불교의 화두(話頭)와 공안(Koan)이라는 어휘는 전 지구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통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큰 스님께서는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선 불교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할 시기라고 사자후하신 것임을 명각(明覺)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저 유명한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고 말이다. 이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지니는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 설파하신 대로 “산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산에서 내려다본 정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일수록 크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사람만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수행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종교명상수행세계에 있어서 가장 높고 궁극적 경지라고 하는 붓다위에 이르셨다는 사실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어본 이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께서 증험한 최상승 경지에서 불교의 수행체계와 사상체계의 숭고(崇高)하고 광오(廣澳)한 면을 여실히 밝히셨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존평 p211~216






겁에 하나 출세하는 붓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불교에서는 이러한 붓다가 나온다는 점입니
다. 삼신을 구족한 붓다는 오직 불교에서만 출세합니다.

실제로 어느 대성자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원만보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모든
붓다의 청정법신을 한 몸뚱이로 하는 세존의 진불인 청정법신 비로
자나불 말입니다.

여름 한 낮의 햇살,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그런 빛을 백천만 개
합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밝은, 수미산만한 대지
의 빛 덩어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보고, 하나님이나 창조주 따
위를 넘어서 우주 자체가 되어 버린 무서운 그 부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득할 수만 있다면 불교의 위대함에 감읍하지 않고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분의 붓다는 그 위대함에 있어서 모두에서 소개한 여러 성자
들도 감히 따라오지 못합니다. 세존께서는 붓다의 출세를 "겁에 하
나, 천만 생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다"고 비유하십니다.

'중생 그리고 인간은 본래 불'이라 합니다만, 부처님께서는 그렇
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누구나 불성이 있기에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무명 번뇌를 다 거두어 내고 업장을 다 녹이면 성
자가 되고 나아가 공부가 날로 향상된다면 보살이 되고 언젠가는
붓다가 됩니다.

그리고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 덕상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경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마치 하나의 미세한 먼지 속
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화엄경>>의 도리 말씀과 비슷한 비유라
하겠습니다.

힌두교의 성정 <<베다>>에서도 인간이 백만 년을 수행해 날로
향상만 한다면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퇴전하지 않고 인신
을 받아 올 때마다 그렇게 백만 년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누구
나 윤회서 초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항상 태어날 때마다 공부해서 향상만 계속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생에 공부를 잘해서 상당 수준의 성과
를 얻은 후 다시 원을 세워 인간 몸을 빋아났다 해도 반드시 공
부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백천 생을 살면서 지은 악연
인연을 따라 방황하기도 하고 혹은 나락에 떨어져 형편없이 망가지
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 이루는 데까지는 3대아승지겁이 걸린다는
교가의 말이 맞습니다. 어쩌다 한 번 실수하여 여자에게 빠지면
공든 탑이 무너집니다. 짐승 몸을 받아 나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
지기도 합니다. 수행인은 이런 무서운 경우를 명심하여 뼈에 새기
고 정진해야 합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여!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알기바랍니다


뭇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불교사상은 우주적인 진리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불교도는 나의 생명과 똑같이 상대의 생명을 귀하게 봅니다. 따라서 불살생계는 우리 불교도의 첫 번째 계명인 것입니다. 불교만큼 평화를 애호하는 종교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사를一瞥하더라도 불교를 국교로 하거나, 불교의 이상을 정치 지도이념으로 해서 통치했던 국가가 이웃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불교 국가도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해서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거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그런 사례는 없습니다.

나는 이 난을 통해서 남의 종교를 험담 비방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무지한데서 죄악을 짓는 것이므로, 영적 무지를 깨우쳐서 모두가 선업을 쌓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0세기 말 경 - 우리 불교도라면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터키계의이슬람교 가즈니 왕조에 의해 17회에 걸쳐 북인도가 쑥대밭이 됐습니다.

불교와 힌두교의 사원이나 성지에 대한 파괴와 약탈, 승려의 학살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물만큼 철저하였습니다. 그 뒤 12세기 말 역시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비쿠라마시타 대불교사원의 파괴와 더불어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당唐의 무종武宗에 의한 ‘회창會昌의 폐불廢佛’이 가장 철저했고 대규모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동기는 도교의 불교 배격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만고의 사표라 숭앙받았던 공자의 가르침도 진秦의 시황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탄압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유서를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시킨 사건입니다. 공자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입니다. 인륜 도덕을 강조한 큰 공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미워하거나 험담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아니라 해서 무조건 비방하거나 폄훼해선 안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하물며 대성자, 부처님을 능멸하는 일, 깊은 수행적어도 삼매에 들 정도 없이, 학문적으로 충분한 이성적 검토 없이 불교라는 우주적인 메타종교를 이단시, 사탄시하면 중한 죄가 됩니다.
전각을 불태우고, 불상의 목을 자르고, 승려를 학살하는 일은 중대한 범죄인 것입니다.
화신化身佛이 들어있는 불상의 목을 치는 폭거는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극무간지옥행에 처해집니다. 불상은 우상이 아닙니다. 신행의 방편으로 조성한 것이지만 부처님의 화신이 듭니다.
필자는 깊은 삼매를 통해서 무엇이 진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죽으면 어딜 가는 지를 보고 중생들이 나고 죽는 세계를 봅니다. 지옥도 천상도 윤회를 벗어나 있는 정토 극락세계를 실제로 봅니다. 그리고 절대계에 법신불과 보신불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내면의 탐심과 진심, 어리석은 마음을 모두 한 티끌도 없이 정화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생사에 대한 문제를 끝까지 파헤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 공부를 많이 해서 재물과 여자에 대한 착이 없어져버리고 이 몸뚱이에 대한 애착이 완전히 끊어져버려 깊은 삼매에 들 수 있다면 중생이 윤회생사하는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음은 물론 윤회에서 해탈하여 정토에 날 수 있는 그런 지혜와 힘이 생깁니다.

≪불본행집경≫이나 ≪육도집경≫이라는 자카타Jataka 경전들을 보면 우리 부처님께서는 무량겁 이전에 불과를 이루실 때까지 백 생, 천 생을 자비의 보살로서 아름다운 이타행을 해 오신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날 적마다 항상 청정한 계율을 지키시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시면서 두타행으로 불도를 수행하셨습니다. 다만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중생을 불도로 이끄시고자, 그들을 대신하여 악도의 괴로움을 감수한 적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마치 예수Jesus가 인류의 원죄를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대신 속죄한 것처럼예수 역시 위대한 인류의 스승입니다 중생의 고통을 한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대수고代受苦하셨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지은 큰 공덕을 중생들에게 회향한 적도 무수히 많았답니다.

보살로 날 적마다 끝없는 자비의 행을 하셨으며 또한 오랜 겁의 세월동안 서원의 힘으로써 이윽고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고 아승기겁 전에 불과를 이루시어 법신‧보신‧화신 세 몸을 둘 수 있는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렇듯 위대한 어른이심을 확언합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성자가 부처님처럼 법‧보‧화 삼신을 갖추었답니까? 이런 성자를 폄하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종교가 다르다 해서 무조건 남의 종교를 사탄시하는 것은 지혜 있는 자들의 자세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상적광세계에 두신 당신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말할 것도 없고, 절대계에 두신 보신불불신의 광휘만 해도 중생은 상상 못할 그런 정도입니다. 여름날 햇빛 아래 노출된 크리스털 다이아몬드무량광‧억종광으로 이루어진 다이아몬드를 생각해 보십시오.

100%, 1000% 빛덩어리백종오색광인, 빛 자체이신 부처님의 불신을 최근의 한 실예를 통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무자년 O년 O일, 나는 광명 만덕 큰스님과 혜명정토27품 인가받은 스님과 함께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착하디착한 어느 불쌍한 신도를 돕고 싶어서 서울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비가 내리는 저녁 7시쯤 춘천 현지사로 돌아오는 도중입니다. 갑자기 차 안이 섬광보다 더 강렬한 빛으로 충만해집니다.

우리 교주 불 세존께서 차에 동승하신 것입니다. 광명 만덕 큰스님과 나의 영체는 각기 번개같이 몸에서 빠져나와 부처님께 오체투지 3배를 드렸습니다.

차 밖은 우리를 호신하는 일백 수십 명의 성중들 외에 부처님을 호신하는 수만의 무루 대아라한급 특별 성중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천지가 밝아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입니다.

10억Watt×10억 빛으로도 이 허공을 이렇듯 밝게 비출 순 없을 것입니다. 한량없고 수없는 빛깔의 광명이요, 마니구슬보다 더 빛나는 부처님 광명입니다. 동시에 안팎이 드러나고 청정무구한 빛입니다. 아름답고 영롱합니다. 굴러가는 승합차의 바퀴에 튕겨나가는 물방울들이 모두 억종광명이 되어 황홀할 지경입니다.

1시간 내내 부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보살펴 주고 온 선남자의 전생을 이야기해 주시고, 만덕 큰스님의 제석천왕에 대한 질문에 답해 주시고, 앞으로 우리들의 공부에 대한 그리고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의 음성은 부드럽고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그윽하고 청아한 미묘음이십니다. 천인이나 정토보살의 음색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경에는 “어일언음중於一言音中 구일체묘음具一體妙音 일일묘음중一一妙音中 구족최승음具足最勝音”이라 하였는데 잘도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묘음 가운데 가장 수승한 음성을 지니셨습니다. 현지사 거의 다 와서야 부처님께서는 떠나셨습니다.

나는 이 책 중간 중간에 밀장을 빼고는 조금씩 부처님에 관한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6일 만에 무無에서 이 천지만물, 우주 모두를 창조한 인격적 하느님은 없다고 나는 분명히 했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까지도 모든 것의 이전, 천지 이전은 분명히 영원불멸하는 우주 대생명입니다. 우주에 편만하고 스스로 있는 자존자 I AM입니다. 도道입니다. 공空입니다. 범梵입니다. 마음입니다-.

이것은 절대요 완전이요 최초의 원인으로서 사랑이며 지혜이고 힘이며 조화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인격적 이법입니다. 우주의 진리입니다.
여기에, 백천만겁을 두고 청정을 닦고 지혜를 계발하며 보살도를 완성하여 다겁생 동안의 업장, 악·습기를 지멸하고, 탐진, 108번뇌를 다 녹인 청정무구한 붓다의 지위에 오른 수행자의 분별을 떠난 여여의 지智, 평등성적 대원경지의 지智가 바로 우주의 본체, 진리와 계합되어 하나가 됩니다. 진리의 몸을 이룹니다. 이 진리의 몸을 법신불이라 합니다. 무형이지만 우주의 몸으로서 초월적 인격체라 볼 수 있어 여기서부터는 몸身을 붙입니다.

무형이라지만 빛, 존재의 근원인 빛, 그 빛의 빛인 백종오색광명덩어리입니다. 작열하는 햇빛 아래의 크리스털 억종광 다이아몬드 법신불입니다. 우주의 본체에 불과를 이룬 대성자의 지智라는 무루식이 깃든 이불理佛입니다.

다시 이 법신불에 보신불불신이 들면 우주의 진리, 우주의 이법을 부립니다. 힘과 이법을 부립니다. 진실로 우주의 주主가 됩니다. 우주적인 힘, 능력을 씁니다. 만물을 태초에 창조한 인격적 하느님은 없지만, I AM을 자체화自體化한 진정한 하느님이 곧 부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삼천대천세계이 세계의 에테르 본체를 집어 던질 수도 있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 자체가 됩니다. 하느님은 없으나 불과를 이룬 부처님은 절대계에 계십니다. 현지궁 현지사에서는 부처님 이후로 불의 삼신을 갖춘 두 분 큰스님이 출세한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10장 중에서





불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중생들은 각기 종자가 있다는 불가의 유식법상唯識法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귀 꽉 막

힌 지옥종자도 분명히 있습니다. 육도에 윤회할 종자가 있는 반면

윤회를 벗어날 종자, 특히 희유하지만 보살 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옥 종자라 해서 마냥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교화하면

됩니다. 마치 아무리 나쁜 나무라도 접接을 붙이면 좋은 나무를 얻
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된다, 남 못할 일 안하면서 바르게 살면 된

다' 고 합니다. 좋습니다. 인생을 대과大過없이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습니다만, 그렇게 산다 해도 윤회의 생사고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

탈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궁극에는 붓다가 되길 원하십니다. 여기
가 완전 해탈이요, 절대 자유요, 대열반이기 때문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



진여일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참됨의 본성을 뜻한다. 불

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에 일차적 목표를 둔다.

이 본성이란 본 면목, 자성, 참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바
로 우주의 체성이다.

자신의 마음이 근원 일성으로 돌아가면 본 고향에 돌아온다. 그

래서 유가에서는 이를 복명이라고 하여 명(목숨)을 태어나

기 이전의 원래 생명의 시기로 되돌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견성이다. 본성을 체화하여 증득하면 그것으로 성품과
계합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까지가 삶도 죽음도 없는 시공을 초월한

경지이다.

오온은 집착을 일으키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의미하며, 이 오온이라는 것에 의해 오감이 일어난다. 오온의 본

질이 텅 비어 있음을 관하기 위해서는 계율, 특히 음계를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한다.
사실, 불가의 가르침이 귀중한 이유는 계 정 혜 삼학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뼈를 깎는 노력과 눈물겨운 노력만

이 영혼을 환골탈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내면을 비춰 보는 것을 화광반조
라고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것, 또는 잃어버린 마음

을 찾는 것이 바로 복본심성이다.

견성을 하게 되면 심원하고도 고차원적인 세계로 증입해 들어

간다고 큰스님께서는 전하신다. 죽 청정하고 고원하며 지고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큰스님을 제외하고 견성 이후 아라한과

이상에 대해서는 언급한 선지식이 전무하다.

필자 수준에서도 이 논고를 작성하면서 알 수 없는 내용을 말할 수

없어 큰스님의 가르침을 열거하는 미흡한 수준을 면치 못한 점, 큰스

님께 그리고 불제자님들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큰스님의 법 세계를 필설로 언급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큰스님의 법

세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부사의하며 어마어마하고 장엄하고 거룩

하다는 점을 말해둔다.
타종교 어디를 봐도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체계적인 위계는 전무하
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불가에 귀의 귀명한 것을 큰 기쁨으로 삼고

열심히 구법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명료한 위계는 불제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더 지고한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향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자극제가 된다는 점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일체 중

생을 비롯하여 견성과 아라한과를 이룬 수행자라면 자력 수행만을 고

집하거나 고수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큰스님이 하사하신 칭명염불선

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아 타력 수행으로 아라

한과를 넘어서 보살과 그리고 불과로 증입해 나가는데 진력할 것

을 권청하는 바이다.
희유하시고 거룩하신 부처님의 법세계를 남섬부주 대한민국에 펼쳐

주신 두 분 큰스님께 오체투지하고 예배드린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현지사 행사 사진





현지사 행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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