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9일 화요일

三. 선, 위빠사나 등 자력불교

 三. 선, 위빠사나 등 자력불교



특히, 티베트 밀교의 즉신성불에 대하여

우리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힌두교, 자이나교, 도교, 유대교, 이슬람 수피즘, 유교적 수행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空 체험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인 공의 진리를 깨칠 수는 있습니다.

이후 윤회생사를 벗어나려면 나에 대한 착着이 떨어져버려야 하는데 이 공부를 마치려면 부처님의 청정계를 지키면서 두타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라한이 됩니다.

나아가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보살이 되려면 부모 조상님께 효를 다하면서 보살행을 해가야 합니다. 부처님께 선근을 심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염불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티베트 밀교의 수장 달라이라마와 그 윗대 스승들을 향해 잠깐 고언을 드리고 밀교의 삼신설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분들은 대단히 훌륭한 불자입니다. 달라이라마는 당초 극락정토 상품보살입니다. 사바세상에 와서 학문과 덕행을 쌓아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입적하신 스승들 역시 지계持戒에 충실했고 수행 잘하셨으며 보살행 잘하다 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러나 한 가지 - 윤회생사를 거슬러 해탈과 적멸로 향상해가야 되는 것을, 정법연기正法緣起로 아라한이 되고, 보살 되고, 불과를 증하도록 정진해 올라가야 하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않고 반복해서 사람 몸 받아 환생을 거듭해 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또한 윗대 스승들 역시 명부에 들어 심판 결과에 따르는 것이 우주의 질서인데도 밀교 교단을 위한답시고 이승에 머물러 있는 것은 논죄 받을 일인 것입니다. 이 점을 간과하고 우주의 이법에 역행하고 있는 점을 깊이 뉘우치고 이제부터라도 자재 만현의 충고를 섭수해주기 바립니다.

그리고 티베트 밀교에서는 비밀한 수행으로써 금생 한 생으로도 무상한 이 육신 속에 삼신三身 혹은 四身을 현증해서 진실로 생사를 초월한 붓다가 될 수 있다 합니다. 또한 밀교의 즉신성불卽身成佛로서 십력 등 부처님의 능력과 32상의 색신을 실현할 수 있다합니다.

바르도中陰에 의생신意生身을 얻어 정광명淨光明과 화합하면 보신불에 해당하는 불신을 성취한다 합니다. 의생신은 밀교의 빔리한 방편도인 의식전이意識轉移로 얻는다 하는 바, 나 자재 만현은 밀교에서 보신불이라 하는 것을 진정한 보신불로 보지 않습니다.

진정한 보신은 유무를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에서 생깁니다. 바르도에 두지 않습니다. 절대계의 자기 보신報身은 억종광이라는 부처님 광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정광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광명은 진여의 광명, 자성의 광명입니다. 그 보다 몇 차원 높은 빛이 억종광, 무량광입니다.

백종오색광으로 이루어졌기에 불신은 영원히 멸도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무아 속 절대계, 부처님 세계인 지복의 세계에 32상 80종호가 갖추신 보신불이 계십니다.

정광명으로 바르도에서 이루어지는 의생신은 32상이 아닙니다. 의생신이 정광명과 화합된다 해서 영원히 멸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광명과 화합한다고 해서 의생신이 보신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보신불은, 절대계의 불신은 대적정삼매의 힘으로 우주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어 항하사의 신통 묘용을 쓸 수 있습니다. 지혜, 자비, 공덕을 구족하십니다.

억겁 다생 실로 삼아승기겁의 수행과 바라밀의 공덕, 보살도를 완성함으로써 천만겁 이래 지은 업장이 한 티끌까지도 소멸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탐진 번뇌가 모두 녹아져버려야 보신불이 생깁니다. 다겁생의 악습과 탁기와 악이 모두 없어져야 합니다. 또한 다겁생 동안에 갚아야 할 은혜와 빚이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법계 지존이신 우리 교주 불 세존 원만보신의 필수적인 작업이 있어야 나의 불신이 생깁니다.

법신불에 대한 밀교 측의 해석은 바르지 않다는 말씀도 덧붙이겠습니다. 또 밀교의 보신에선 백천만억 이상의 자기 화신불을 나툴 수도 없습니다.

 자재 만현의 지적은 진실한 것이라고 다시 강조해 둡니다. 밀교의 즉신성불은 사실상 허구임을 단정하는 바입니다. 밀교의 삼신·사신설은 진정한 삼신설이 절대 아닙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2권 10장 중에서







선불교의 삼신설, 자성삼보설

 선불교의 삼신설, 자성삼보설


든 부처님들께서 원만보신으로 절대계에 계실 때는 머리를 말끔히 깎으시고 황금 장삼에 빨강 가사를 두르시는데 불 세존은 108쪽 가사, 오여래 부처님은 55쪽, 여타 부처님들은 32쪽 가사를 수하십니다. 모든 부처님들은 절대계에 자기 궁宮이 있습니다.

불과를 증득한 분의 보신부처님은 사실상 진짜 하느님이라 할 만합니다. 일부러 신격화하거나 초인화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불과를 증득한 현지궁 두 분 큰스님이 실제 보고 경험한 내용을 전하는 생생한 육성肉聲의 가르침입니다. 불교 경전을 연구해서 강의하는 그런 논서의 삼신설이 아닙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삼신三身이 인간 자성 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선불교<육조단경>의 삼신설은 이설異說임을 확실히 해둡니다. 

삼신은 ≪금광명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해심밀경≫ ≪능가경≫ ≪30만송 반야바라밀다경≫ 보성론 섭대승론 등 여러 대승경론의 부처님 말씀처럼 붓다에 한정된 용어입니다. 곧 불과를 증한 붓다의 불신을 세 방면에서 보는 것입니다.


인간 색신 안의 청정법신불에 귀의하고, 색신 안의 원만보신불에 귀의하고, 색신 안의 천백억화신불에 귀의한다는 이러한 선가禪家의 법설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단경壇經에서는 절대계에 여여히 계시는 불신을 전혀 몰랐습니다. 대승경론에 나오는 삼신관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선불교에선 본래 구족한 청정한 마음 성품을 법신으로 보고, 생각 생각 자성을 보는 지혜를 보신으로 하고, 지옥이나 천당을 만들어 내는 한 생각을 화신으로 봅니다. 

즉 사람 사람 자성 속에서 삼신을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산심을 전혀 모르는 이설異說임을 다시 분명히 해둡니다.

다만 한 차원 더 깊이 정진해 들어가 진정한 삼신관을 오득悟得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불‧법‧승 삼보까지도 이를 관념화시켜 자성삼보로 해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지옥 극락은 마음의 산물?

 지옥 극락은 '마음의 산물'?



자, 복잡한 사안을 두고 성굽하게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자.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서구의 지식사회는 그들 나름의 제한된
틀 속에서나마 인간 생사관을 정립하려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
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 종교를 가진 사람, 아니 가진 사람들을
막론하고 서구의 근대과학이 적지 않은 일정한 '세속 종교'의
구실까지 해내고 있다는 발견도 해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설 것이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
교들의 직무유기부터 탓해야 할 지 모른다.

그 점에서 만현 스님의 지적대로 현재의 한국 불교가 "마음
이 곧 부처요, 마음자리가 곧 극락"이며, "지옥과 극락이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식의 단순논리는 도무지 설자리가 없다. 그런 섣부른 단순논리
를 앞세울 경우 불교는 거의 유사 불교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
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 올바른 생사관에 목말라하는 우리
시대의 갈증을 외면하는 결과를 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혹세무민에 불과한 무당이나 도인들의 검증되지 아
니한 신통력에 빠져들어 헛 인생을 살 가능성도 농후하다. 확
실히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그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세계에서
헤매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이 정신 없는 정보화의 세
계화 세상, 동시에 법이 죽어가는 말법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 세상이란 없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믿는 극도의
허무주의 속에서 그저 부대끼며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수행자들의 경우 무애라는 높은 경
지를 자신의 것인양 희롱하며, 음계를 지키지 않는 막행막식에
빠져들 가능성도 배졔할 수 없다. 반면 만현 스님의 메시지가
전하는 불교의 모습은 심히 장대 장려하다. 엄격한 위계를 가
진 장엄한 세계는 거의 전율스럽기 조차하다. 또 깨달음의 단
계와 맞춰 수미일관하는 틀을 가지고 정교하게 움직인다. 윤회
와 전생이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로 다가
온다.

이런 상황에서 지옥이나 하늘과 천상은 빼도 박도 못할 위계
질서 속에 층층으로 구분되어 있다. 54개 층의 하늘로 낱낱이
구분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하늘 세계란 모두가 윤회에
서 벗어나지 못한 세상에 불과하다. 훨씬 아래의 지옥도 존재
하며, 제대로 명부에도 들지 못해 중천을 떠도는 무주고혼들의
중음의 세계 역시 엄연하다. 반면 부처와 보살 역시 구체
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대목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실은 적지 않은 불자들이 당혹스러워하는 핵심 대목이기도
한데, 만현 스님에게 부처와 보살들은 그저 추상적인 법신
의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현존인 보신
의 차원에서 지금 여기에 여여하게 존재한다. 즉 석가모니 부
처는 지금도 인도 영축산의 영산정토에서 법을 설하고 있으며,
보살들을 교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 화두를 타파한 수행자가 자력의 힘으로, 즉 인간의 능력
으로 오를 수 있는 구경각의 단계는 아라한 단계일 뿐이며,
그 이후 부처의 가피라는 타력의 힘으로 비로소 보살 단계
에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라한이란 나를
죽이는 무아의 공부로 들어가 중생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
지임이 분명하지만, 아라한의 단계는 결코 골인 지점이 아니다.
그 단계란 아직은 '작은 열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놓치면 안 될 대목은 이런 작은 열반이란 다양한 수행에서
가능한 세계이다. 경계가 온통 뒤집힘으로써 환해져 자성(마음자
리)이 드러나는 것은 조계종의 핵심 수행법인 간화선으로도 가
능하지만 남방 불교의 위빠나사 수행, 그리고 밀교 수행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라한 단계 이후 '큰 열
반'의 세계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간화선 실체

 간화선 실체



지금 우리나라 불교는 조사선이 주도하고 잇다. 이것
을명 간화선이라고 하는데, 그 정통성을 따져보면 사
실 족보가 없다. 교단 안에서조차도 그 핏줄이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정법 수행과 코드가 맞는 것도 아
니다. 각각 문중마다 그 맥을 짜 맞추어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
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냉정하게 말
하면 간화선이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한국 불교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화두 탐구로 공을 타파한 이후 진공묘유
의 무아 속 절대세계로 들어가기 전후의 수행록을 제시
해야 하는데, 간화선을 추구한 수행자 가운데 그런 대원의 경
지에 이른 수행자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있긴 뭐가 있어', '보
림을 잘 해야지' 이 정도의 법거량이 오고갈 뿐 확실하고도 명
확한 지표를 제시하지 못한다. 때만 되면 ㅇㅇ대회니 이름 붙
여 수행자들을 불러모아 자파 문중의 위상을 높인다고
하지만 오고가는 언어를 살펴보면 며칠만 연습해도 누구든 따
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장난일 뿐 어떤 경지의 의미
를 함축한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아라한과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공의 현상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일 뿐
이다.

그들이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근본 원인은 스스로 말한 것
을 스스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병마를
여의기 위해서 수행을 일삼았다고 말하고, 그 수행자들은 생전
에 스스로 어는 경지에 이른 것처럼 뉘앙스를 풍겼지만, 그들
이 법석에서 말한 그 병마의 덫에 스스로 걸렸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어느 한 두 수행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면
표본을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금생에서 큰 공
을 쌓아 내생에서 일어날 업장까지 차생에서 받는 사례와는 분
명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 어떤 경지에 이르렀
다고 이미 대중 앞에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르렀다는 경지가 문제이든지 아니면 스스로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마침내 실
존의 붓다의 세계를 부정하고 육도윤회를 부정하며 무애
를 들어서 걸림 없이 행하는 것을 마치 묘유인양 그   행위를
포장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성숙된 사회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한갓 만행일
뿐이다.

필자는 연전에 학인들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
다. 물론 취화선이 담아낸 한국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소감을
피력한 것이지만, "경허선사의 행적을 영상에 담아 '무상의 도
리'를 유럽에 소개한다면 그 보다 더 나은 우리 문화의 소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면서도 필자의 뇌리 한편에 스치고 지나가
는 것은 극과 극을 달리는 그의 만행 도두가 공을 설명하는 범
주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구렁이가
가슴에 똬리를 튼 상태에서도 정진하는 그 모습은 더 없는 두
타행이었지만 유부녀를 희롱하는 행위까지 과연 공의 도리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대선지식을 독대하는 자리
면 이것을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금년 7월 하순 경, 큰스
님을 뵌 자리에서 큰스님께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이후 그런
일을 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수행자가 공을 타파하면 천상
에서 그 때부터 특별 관리하게 되는데 음행은 그 그릇을 깨버
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소상히 법을 설하
여 주셨지만 지면이라 차마 싣지 못함을 독자들이 이해해주었
으면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큰스님 저서 곳곳에서 이
미 언급된 사항이다.

그리고 만행 가운데 가장 용서될 수 없는 일은 실존의 붓다
를 부정하는 것인데 이 과보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 '우리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진정 매
혹적인 말이다. 지존을 한껏 세워주는 이 말이야말로 정말 귀
에 와 닿는다. 그러나 이 말이 탈콤한 만큼 무서운 독소가 들
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바로 부처는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수행자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부처로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일 뿐이다.

자존은 비록 수행자가 아닐지라도 누구라도 갖고 싶어
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수행에 있어서는 몽땅 버리고 가야 하
는 문제이기도 하다. 만행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자존
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생각이 결국은 자기 이외에 누
구도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셈이다.

그들 앞에서 교학을 수행으로 삼거나 독송을 소임
으로 삼는 수행자들은 근기가 매우 천박한 자들로 낙인찍혀 언
제나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점, 그동안 간화선이 얼마
나 많은 해악을 끼친 것인지, 지금 철저히 반성하여도 늦지 않
다. 붓다와 경전을 무시가 아니라 멸시하게 한 점, 이것은 분명
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역사적인 사건은 한 단락만을 요구한다. 그동안 무량광을 체
험한 수행자가 없었기 때문에 몰라서 저지른 행위로 용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밝혀진 상황에서 과거의 잘
못된 행위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을 역사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 로마 교황청은 십자군 전쟁 등에 대해서
'만행'이었음을 정식으로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지금 간화선이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때이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선불교의 선지식을 따를 것인가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선불교의 선지식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선불교의 선지식을 따를 것인
가를 고민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분명 아함경에서 육도 윤회가
있다고 설하셨으며, 법화경에는 묘희의 세계를 많이 설해주셨
고, 화엄경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의 세계를 말씀하셨다.

정토삼부경에선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약사여래본원경에서는
동방 만월세계를 말씀하셨다. 선불교의 선지식은 이러한 부처님의 대
승경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로지 화두 타파 이야기만 한다. 어찌된
것인가? 부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가 선불교의 선지식들을 추종
해야 하는가?

지혜로운 식견을 구비한 불제자라면 답은 훤히 결정되어 있다. 뭐라
고 해도 우리 불교의 교주가 되시는 분은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선불
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달마 조사는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은 28대
법손에 지나지 않는다. 달마 조사가 더 높을까 부처님이 더 높을까?
선불교의 선지식들은 부처님과 달마 조사의 경지가 동일하다고 평
가하고 있는 듯하다.

정말 부처님과 선사들은 동일한 경지일까?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에
만연된 선가의 선서들에 찌들어서인지 분간이 안 된다. 정말 선사들이
부처님과 동일한 경지인가? 많은 불제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급기야 이러한 의문은 제차두고 선사들이 부처님과 동일한 경지
라고 확고한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좀 무언가 석연치 않다. 달마 조사는 왜 그렇게 박식하지 못
했을까? 부처님은 수많은 경전을 설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가르침들을
많이 베풀어 주셨는데, 달마 조사가 남긴 서적들은 거의 손에 꼽을 정
도이니 말이다.

달마 조사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분들은 제자들을 많이 육성하고 좋은 경전
을 많이 남기며 자비와 지혜가 출중하고 변재하다는 것으로 전하고 있
다. 그러나 달마 조사는 석가모니부처님보다 제자 유성이나 경전 찬술
그리고 자비와 지혜면에서 부족하다고 보여진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선불교의 폐습과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출현

 선불교의 폐습과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출현



오늘날 선불교의 여러 가지 폐습, 즉 공허한 선문답, 뚜렷하지
못한 경지, 계율을 중시하지 않는 막행막식, 육도 윤회를 관하지 못함,
생사관의 미확립, 공사상의 허무주의화 등등으로 인해 수많은
수행자들이 막연한 이상향을 기대하거나 수행의 한계를 겪고 있고 불
교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수행자들은 선불교의 폐습에 가리어 불교 공부를 너무 어렵게 느끼
며 불교 수행체계에 대한 명료한 안목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선불교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종교 명상세계가 공성과 
신성을 철견하는 경지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공성이나 신성이라는 것은 어떤 확고한 경기가 아니다. 그것은 고요
한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경지이다. 이 경지가 마치 최고의 경지인양,
그리고 더 나아가 궁극적인 경지인양 수행자들의 의식 속에 만연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두뇌에서 번뇌를 지멸시키는 것이 수행의
완성이라면 종교의 시원적 근거이면서 종교가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
서 간직해온 사후 세계에 대한 해답은 어떻게 풀어야 할 까? 

사후 세계는 이론이고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세계의 최대 종교들에 속하는 불교와 기독교, 이슬
람교 등의 교주들께서 모두 사후 세계를 설파한 것은 거짓이요 위선
이란 말인가?

우리는 진실로 정신 차리고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종교는 차지하고 불가에 소속한 불제자로
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육도 윤회와 사후 세계를 부인해야
할까? 그렇다면 정녕 부처님께서는 거짓을 말씀하신 것일까?

선불교의 선지식들은 마음이 극락이고 지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의 육도 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의 말씀이 맞다면 선불교의 선지식이 틀린 것이고 선불교의 선
지식이 맞다면 부처님께서 틀리신 것이다.

이러한 이분적인 구분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으나 지
금은 현실세계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불교 수행문화의 오류들을 많이
보는지라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할 때이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화두선(간화선)수행법

 화두선(간화선)수행법



한국에서는 도의국사를 기원으로 해서 천여 년이 넘게 전승된 유서
깊은 화두선이 화두 일념을 통해서 일념삼매를 통과하여 무념삼
매로 증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까지 훌륭한 수행법으로 인정되어
왔다. 화두선도 위빠사나선이나 일반 염불선과 동일하게 삼매를 얻을
수 있다. 

그 점으로도 충분한 가치는 있다. 하지만 수행자의 채질이
화두선에 적합해야 하며 시간을 많이 소비한다는 단점과 함께 현대 한
국불교 수행 문화를 선양하고 수행 세계를 고취시키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두선은 이제 더 이상 한국불교, 더 나아가 전 세계 불교의
21세기 수행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실정에 와 있다.


한국과 티베트을 왕래하고 달라이라마로부터 공부를 배우신 유명한
청전 스님께서도 "한국에는 부처같은 큰 소리는 많은데 부처같은 행동
은 왜 없나 ."라고 일갈한 것처럼 선불교에 찌들은 한국불교계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화두선의 문제점과 병폐를 지적하여 더 이상 화
두선은 21세기 대표 수행법이 될 수 없음을 말해두고자 한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중국불교의 산물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중국불교의 산물



밀교의 우수한 수행 체계, 타력 염불 수행의 우수성 외에도 힌두교
의 삼매에 드는 요가 수행, 유대 신비주의의 심오함,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의 신비주의 유교의 격물치지 수행, 도가의 기동 수행법으로도
달공하여 불교의 아라한위까지 진입 가능하다.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중국불교의 산물이자
경전 상 명문 근거가 없다. 

화두선에 대해서는 정말 언급하고 싶지 않으나 너무 오랫동안 우리 
한국불교를 병들게 해서 별도의 단원으로 다루었다.

큰스님 말씀대로 화두선을 통해서도 견성을 할 수 있으므로 화두선
이 100% 나쁜 것은 아니다. 수행자의 체질이나 전생 선근에 따라 화
두선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다.

하지만 일부 수행자들에게나 효험이 국한되는 수행법으로는 21세기
한국 불교 아니 전 세계 불교를 견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만약 화두선이 그렇게 휼륭한 수행법이라면 왜 청전 스님처럼 한국
불교에는 위대한 큰스님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왜 스님들의 명성이
널리 선양되지 못하고 있는가 말이다. 화두선 수행자들은 깊이 이 점
에 대해서 숙고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출처/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선불교의 흠결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신행, 즉 부처님의 존재를 믿는 불제자로서의
기본 수행 마음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부차라고 하는
실정인데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마음이 부처라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인데 수행은 왜하고 불교는 왜 믿는지 의문스럽다. 

마음이 부처라면 종교는 종교도 아니고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않다는 것을 신심 깊은 불제자들은 알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종교는 세계 그 어느 종교에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둘째, 견성, 즉 깨달으면 부처가 됐으니 막행막식하고 사음도 가하다
고 하는 것이 오늘날 선불교의 현주소다. 

계율이 없는 불교는 불교가아님을 알아야 한다. 
계율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2500여 년을 존속 유지되어 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셋째, 경전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잘해야 아라한 자리에
불과한 조사들의 어록들을 부처님의 경전보다 더 소중히 하는지 이유
를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한국불교가 살아남으려면 대승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넷째, 염불을 하근기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염불 수행을 제대
로 해본 적이 없이 하근기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염불 수행의 오묘한 맛과 쉽고 빠른 경지 증득을 모르고서는 절대 
염불선을 하근기 수행이라고 모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화두선은 상기병, 정신질환, 주화입마에 걸리기 
쉬운 수행법인 반면 염불수행은 부작용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효를 다해야 한다. 부처님이 주관하시고 불과를 중한 청정하
신 큰스님이 집전하시는 천도대재를 치르고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
그리고 친인척들을 하늘로 천도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부처님은 마음의 산물이 아니다. 어찌 마음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마음이 부처님이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모욕하고 능멸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법화경 비유품의 부처님 말씀처럼 공성의 증득으로 붓다라
할 수 없다. 32상 그리고 10력 등 모든 붓다의 공덕을 갖춘 색신보신
을 성취해야 붓다인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불신을 얻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고 확인하신다.

일곱째, 생사관이 없고 육도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지옥이
없고 천상이 없다면 아함경에서 설한 육도 윤회는 거짓이란 말인
가? 그것은 부처님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덟째, 참선만이 유일무이한 깨달음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독선
적이고 배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위빠사나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라 분명히 하셨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117~119


마음이 곧 부처는 아니며 견성은 성불이 아니다

 마음이 곧 부처는 아니며 견성은 성불이 아니다



선 불교의 구습에 물들어 있는 수행자나 학인, 특히 도올 선생과 같은 분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마음의 공성을 철견하였다고 해서 붓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공을 철견하면 바로 그것이 견성이요 아라한이 되는 길목임을 알아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천여 년이 넘게 내려온 선 불교의 구습을 청산시키는 "마음이 곧 부처가 아니다."라는 최초의 사자후를 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우롱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부처라면 그것은 큰스님 말씀대로 심교지 불교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선 불교 수행자와 중간 계통 유식 불교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강력한 문제 의식을 제기하셨습니다. 

즉 "선 불교에서 주장하는 무아와 마음이 곧 부처라 하면, 다시 말해 나가 없다면 불과를 증하신 부처님께서 적멸로 돌아가서 계합하시고 근원 자리(공)이 되어 실체가 없어져서 불과를 증하신 붓다님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화신으로 인간 몸을 받아오시는 분이 있는데 그 무엇이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해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단 말인가? 

육도 윤회를 하려면 윤회를 하는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육도 윤회를 인정은 하는 것인가? 

그런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불공을 하고 천도재를 지내는가?

이건 완전히 허무주의 아닌가? 그리고 가끔 자신들의 의견과 다르다고 법문하면 천마에 섭했다고 하는데 그럼 천마는 실체가 아닌가? 실체가 없다고 하는 당신들이 말하는 천마는 무엇 이냐?"라고 말입니다.

과연 무엇이라 큰스님께 대답해야 할까요? '마음이 부처라는 논리로는 결코 큰스님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해소시킬 수 없다 는 것을 학인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모르는 것에 대해서 는 함구하고 알려거든 큰스님께 공손히 여쭈는 것이 진실한 학인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마음이 부처가 아니며, 견성이 성불이 아니라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강조하신 가르침은 선 불교에 찌들어 있는 전 세계 불교계에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사자후 입니다. 

그만큼 신선하고도 전대 미문의 사자후이며 매우 중차대한 말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불제자들이 그동안 답습해오던 선 불교 수행에 종지부를 찍고 견성을 넘어서 붓다를 증위하도록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기존의 간화선 일변도에서 탈피하고 염불선으로 희귀하여 새로운 각오와 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권청하고 계십니다.

정법을 걷는 불제자라면 큰스님의 의중을 깊이 있게 관철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수많은 가르침을 심득하신 큰스님께서 아낌없는 마음으로 불제자들을 위해 베풀어주신 사자후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목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내용들로 가득 차 있고 책을 읽는 불제자들의 의식을 송두리째 환골탈태시키는 가르침들로 영롱하게 아로새겨져 있음을 명각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영혼체 / 영체

 


영혼체 / 영체

 

 

 

오늘 1,000여 명이 왔다고 하는데,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대단히 좋은 일이어요. 그래서 이 사람(자재 만현)이 법상에 와서 입정을 딱 하게 되면, 붓다가 들어오고, 우리 부처님께서 정수리에 좌정하시고, 모든 붓다님들이 쭈~욱 오셔서 부처님의 빛을 쏘아주는데, 그때 쏘지 않으면 중간에 쏘고, 마지막 때 꼭 쏘아 주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정법교단의 법문은 업장이 씻겨나가고 소멸되니까 꼭 와서 들어야 돼. 그 누구도 업장소멸을 해 줄 수가 없어. 부처님 아니면 없습니다. 이건 분명하니까 스님이 강조 강조합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 앞으로도 계속 나오셔서 업장을 많이많이 씻고 닦고 소멸해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여러분들이 삽니다. 죽으면 대부분이 지옥을 가는데, 이렇게 붓다 회상의 법회에 나오는 여러분은 지옥을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속에 진짜 여러분이 있어. 스님이 항상 이야기하잖아요. 진짜 여러분의 몸뚱이가 있어. 그것을 영체라고 하잖아요. 경전에도 간간이 나옵니다. 영혼체, 무슨 건달바, 무슨 식신, 신식 등 여러 가지 말이 나와요.

 

그런데 그것을 간과(看過) 해가지고 무아(無我)를 엉뚱하게 해석해서 불교가 망해버린 거예요. 무아(無我)를 잘못 해석해 가지고 인도에서 쫓겨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스님은 시간 시간마다 이것을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의 몸속에 보이지 않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불(佛)의 경계에 가서 보이는 그런 진짜 여러분이 있다고요.

 

그것을 영체라고 그래. 그 영체는 여러분의 정신 ․ 생각 ․ 마음 ․ 업의 종자를 담고 있는 그릇이어요. 정신, 유식에서는 이것을 식(識)이라고 해. 식(識)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식(識)은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무아(無我)에 대해서 법문을 많이 들으셨으니까 알 거예요. 식(識)이 또 대승 유식(唯識)에 와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윤회의 주체다’라고 지금까지 그래왔습니다. 그것은 아니어. 식(識)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되는 가?

 

식(識)은 판단하고, 생각하고, 업을 저장하고 할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식(識)은 반드시 근(根)과 외경이 있어야 그것이 존재하는 거예요. 근(根)과 외경이 없이 식(識)하나가 어떻게 극락을 갑니까? 식(識)은 감정도 없어. 감수가 없어(생각도 없어). 판단도 못해. 그런 식(識)이 어떻게 극락을 가나요? 왕생하라는 말이 틀리지.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몸속에 있는 진짜 여러분이(눈 코 입 달린 그 영체가) 모든 업장을 벗어버리면, 그러니까 마음공부를 해서, 지혜를 닦아서, 또 선근 공덕을 지어서 부처님의 가피를 얻으면, 그 영체가 아주 많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업의 찌꺼기를 다 떼어버리고 맑아져(맑혀져)서 이제 유아(有我)가 돼. 무아(無我)가 아니라 유아(有我)가 돼. 진짜 나(我)가 돼. 그래가지고 극락을 가게 되면 눈 코 입이 달린 놈이 가. 그 영체가 청정하고 밝아져서 빛이 되어서 간다고. 32상을 갖춰 가지고 간다고. 그러면서 극락세계의 그 장엄(기쁨)을 만끽한다고.

 

‘아! 참 내가 잘 왔구나. 내가 영산불교를 만나지 못했으면 영원히 그 무서운 지옥에 가고, 또 짐승이 되고, 짐승도 수없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하면서 다른 몸뚱이를 받고 입고해서 사람이 되어가지고 거의 영원히 악도에서 윤회할 것인데, 영산불교 큰스님을 만나서 이렇게 극락에 왔구나’ 하는 것을 알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귀가 있고, 생각이 있으니까 알아. 식(識)이 가는 것이 아니어요. 몸뚱이가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외경을 보고 ‘아! 참 볼만 하구나. 이 아름다운 절경! 아! 우리 다른 불자님들이 이곳에 와야 되는데, 이곳에 오게 되면 영원히 사는데...’한단 말이어요. 극락세계에 가면 불퇴전(不退轉)입니다. 불퇴전이어요. 왜냐? 자기의 애기(꼬마)가 있어요. 자기가 있어. 그 자기와 내가 하나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면 또 그 자기의  애기는 거기에다가 그대로 놔두고 와. 극락에서 오게 되면 여기서는 죄를 별로 짓지 않습니다. 또 반드시 붓다 회상을 만납니다. 그 때 옵니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교화하고, 그리고 극락세계의 자기한테로 간다고요. 그래서 불퇴전이라고 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으로 안 떨어진다고 해. 우리는 꼭 그런 성과(聖果)를 얻어야 됩니다. 꼭 얻어야 돼.

 

그러려면 붓다 회상을 만나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리 자기 홀로 수행을 하고, 부처님의 가피 없이는 절대로 거기(극락세계)에 갈 수 없습니다. 갈 수 없는 이유가 네다섯 가지가 있어.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꼭 스님 말씀을 유념해서 우리 현지사의 진짜 신도가 되기를 신묘년 한 해 부탁을 하고, 또 여러분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심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출가한 제자 분들이 70명이나 됩니다. 속속 과거 전생이 드러나고 있어요. 속속 드러나요. 영산당시 1,250명 중에서 지금 많이도 왔어요. 이 붓다 회상을 만나기 위해서 발원을 하고 한국 땅에 왔어요. 외국에도 나가 있어요. 지금 못 만났지. 70명의 제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1,250명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1,250명 중 일부가 지금 있더라고. 지금 있어.

 

그런 분들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대단해요. 확실해요. 이번에 몇 사람이(다섯 명 정도가) 1,250명이었고, 그 중에서도 500명의 비구에 뽑혀가지고 1차 결집할 때 참석한 비구들이었습니다. 지금 다 드러난다고요. 붓다 회상이라는 것이 증명 되잖아요. 우리 부처님께서 와계시기 때문에 증명이 되지만, 우리를 따르는 그 제자들이, 우리 신도 분들이 대부분 영산당시 1,250명의 비구들이더라 하는 것입니다.

 

 

 

출처/ 현지사 정기법문 2011.2.6.일요일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