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9일 토요일

부사의한 빛, 무량광 그리고 무량수/현대불교신문

 자재만현스님의염불선 이야기(2)

부사의한 빛, 무량광 그리고 무량수
현대불교신문(2004년1월21일,18면)



무량광은 지혜이자 자비

‘이 마음의 곧 부처’라는 가르침이 보편화되어 있는 이 시대에 부처님들이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시다면, 우리는 결정코 팔정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붓다의 자비, 원력을 믿고 열심히 염불해야 합니다. 

죽어서 가져가지 못할 재물, 명예만을 좇는 범부짓일랑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소아(小我)를 버리고 선근공덕을 쌓고 보살도를 행해야 합니다. 부모님께 효를 다하고, 나라와 세계평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외도(外道)를 멀리 하고 계율은 목숨같이 받들어 지켜야만 합니다.

독자 여러분, 붓다의 대해로 드는 관문이 무량광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붓다의 경계입니다. 이제 무량광을 보아야만 붓다의 진신(報身)을 친견하게 됩니다. 

이 부사의한 빛덩이를 봄이 없이 ‘나도 붓다를 본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이기에 삼세의 여래가 하나입니다. 

무량광으로 이뤄진 불신에서 백천만억의 화신을 냅니다. 이 무량광은 지혜 자체요 자비 자체가 됩니다. 청정 자체여서 부처님의 8만4천 신통과 삼매의 원인이 됩니다. 

외도를 항복받는 힘이기도 합니다. 무량광의 기능은 실로 불가사의 합니다. 중생의 눈앞에 있지만 그 천문학적인 광도를 지닌 무량광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들은 중생을 교화하실 때 화신(응화신, 변화신)으로, 그것도 비몽사몽, 꿈에 나투시어 이끄십니다.

무량광은 ‘무아 속 절대계’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즉 진불에 근거합니다. <금광명최승왕경> 제2권에 “화신과 응신은 이름을 붙여 그냥 있다 하는 것이요, 법신은 참으로 진실하게 있다는 것이다. 법신은 앞의 두 몸(화신과 응신)을 위하여 근본이 되는 것이다”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경에서 말하는 800 눈(眼)의 공덕을 지은 수행자도 무량광만은 볼 수가 없습니다. 당대에 붓다 이룰 부처님 아들만이 봅니다. 

억겁의 업장과 습기가 녹아 없어져야 하고, 탐진치 삼독 등 번뇌가 녹아 삼천대천 세계의 모든 부처님 위신력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화엄경>에서 발바닥, 발가락, 양 무릎, 눈썹 사이 등 네 곳에서 부처님의 방광을 볼 수 있습니다. 무량광으로 이뤄진 불신이 필요에 따라 방광하는 것입니다. 

<대반야경>에선 무려 41군데 몸 부분 부분에서 방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열반경>에선 “부처님 입으로부터 가지가지 광명을 내어, 삼천대천 세계를 비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대승경전에서 많은 붓다들이 계심을 볼 수 있는데도, ‘마음의 부처’요 ‘마음 밖에 부처를 구하는 것은 사마외도’라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空)엔 안팎이 따로 없습니다.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에 나오는 불성(佛性)이라는 말은 부처될 수 있는 가능성, 종자(種子)를 뜻합니다. 

생각 이전의 마음, 본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마음자리가 드러나는 견성(見性)이 바로 성불(成佛)이 아니라, 붓다를 이루어 가는 기나 긴 여정의 첫 관문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마음 속에 보물창고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품자리, 내 주인공을 찾아 마음 속에 잠복해 있는 보물들을 개발해 낼 수만 있다면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견성해서 자유와 지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윤회의 속박을 벗어나 해탈 오계(悟界)에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불신은 빛덩이로 된 존재/현대불교신문

 자재만현스님의 염불선 이야기(1)

-佛身은 빛덩이로 된 존재
현대불교신문(2004년 1월7일,18면)


붓다,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신다.

자재만현은 먼저 오체투지하면서 삼가 삼계의 지존이시고 구원실성하신 최초불 석가모니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시고 보살들의 상수이신 대지문수 사리보살님께 귀명하나이다.

<화엄경> 십지품에 “보살이 제9 선혜지(善慧地)에 오르면 큰 삼매의 힘으로 부처님(化身)들을 뵙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다”는 말씀을 접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상주불멸하십니다. 붓다 이룬 분들이 계시는 곳이 있습니다. 다음은 약사 부처님의 법문입니다.

“부처님은 마음 밖에 계신 것도 아니고 마음 안에 계신 것도 아니다. 무아속 절대계에 계신다. 마음은 안과 밖이 없어 움직이지 않아 여여하듯, 부처님 또한 그리 계신다. 다만 중생들이 분별하여 있다 없다 할 뿐. 부처님들은 무아속 절대세계에 계신다.”

독자 여러분, 나는 그동안 무던히도 오랜 세월 동안 ‘과연 마음이 부처인지(心卽是佛), 마음의 본성을 깨치면 부처님이 되는 건지(見性成佛), 부처님이 되어 열반에 든 후에 어디로 가는지, 공(空) 자체가 되어버리는 건지’ 이를 화두로 삼고 ‘주인공, 마음’을 깨치고자 줄곳 씨름해 왔습니다.

드디어 나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이끌려 무아속 삼매에 들 수 있었습니다.

“비었어라 비었어라. 삼천 대천세계가 비었어라. 먼지 하나 티끌 하나 없는 공의 세계, 맑고 깨끗한 청정 자체. 환희 환희 환희 그 자체인 것을”. 좋구나 좋다, 좋구나 좋아. 본래부터 가진 것 없어 있는 그대로가 무아로다. 있다 없다. 

분별심 놔 버리면 무아 속 절대계의 빛인 것을 무아속 삼매의 환희는 이 세상 어떤 쾌락, 말초신경의 쾌감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아속 삼매, 적정삼매는 억겁의 공덕과 수행을 쌓아 들게 되는데, 처음에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삼매에 들기 전 ‘무량광(無量光)’이라는 부처님 빛을 보게 됩니다. <열반경>에선 이를 ‘열반광’이라 했고, 문수보살 관련 경전에서는 ‘억종광명(億種光明)’ <지장십륜경>에선 ‘백종오색광명(百種五色光明)’, <미타 삼부경>에선 무량광이라고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빛덩이는 소위 견성(見性)할 때 경계가 뒤집혀 온통 드러나는 자성광(自性光)과 비교할 때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무량광은 또한 ‘자연의 빛(태양광)’과도 다릅니다. 

안팎을 비춥니다. 광도로 말하면, 여름 한낮 햇빛 속,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태양 광도의 수 천배가 된다고 할까요?

부처님 되신 분은, 이 육신과 육신 속 자기의 본체 외에 무아속 절대계, 곧 불계(佛界)에 자기 불신(佛身)을 갖게 되는데, 그 불신은 무량광이라고 하는 빛덩이로 이뤄져 있습니다. 

붓다는 무량광이라고 하는 빛덩이를 하나 더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을 교학에선 보신(報身) 혹은 법신(法身, 금광명경)이라 합니다. 금강불괴의 진신입니다. 

붓다는 영원불멸하는 ‘빛의 몸둥이(불신)’를 지니기 때문에 미래제가 다하도록 멸도할 수 없습니다.

자재만현스님은 1960년 부산 선암사에서 율사인 석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 통도사 경봉 선사 문하에서 공부 했다. 

조계종 총무원 교무, 포교, 재무부장 등을 역임하고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서 전국에서 설법했으며 해동불교대학 학장을 맡아 재가자 포교에 나서기도 했다. 현재 춘천 현지사 회주로서 후학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