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0일 화요일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 3]견성,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수승한 공덕의 염불 수행법


     2011년 초파일 13만등 작업하는 모습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


 현지사 두 분 큰스님의 법 세계(法世界)는 정말 희유하고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분 큰스님의 법 세계를 조용히 관조해보면 초 인류의 신성(神性), 아니 우주적인 성심(聖心)이 내재되어 있음을 여실히 목도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분 큰스님의 법 세계를 통해서 희유하시고 거룩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법 세계를 대면할 수 있어 정말 복된 이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인연을 얻기는 참으로 힘들다고 본다.



 이 점 깊이 석가모니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께 감사드리며 본고에서는 현지사의 법 세계 중에서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의 위계에 대해서 논고하고자 한다.



 무릇 불제자라면 엄연히 견성, 즉 깨달음과 여기서 더 나아가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의 경지에는 모두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후의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는 시종일관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의 위계(位階)에 대해서 역설하셨다. 이는 서양에서 일컫는 존재의 하이어라키(Hierarchy)에 대한 불교적 실재 세계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의 위계



고대 유가(儒家)에서도 전해내려 오는 장유유서(長幼有序) 사상을 아라한, 보살, 붓다의 위계를 통해서 여실히 목견(目見)할 수 있다. 즉, 장유유서의 사상이 우주적 법계의 위상으로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장유유서의 사상보다 더 이전에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 오셨을 당시에도 불문(佛門)에 먼저 들어온 스님이 불문에 늦게 발을 들여놓은 스님보다 서열이 높았다고 경전에는 전한다.



 하물며, 이와 같이 사바세계 현상계에서도 스님들의 위계와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어찌 우주 법계라는 지고한 존재계에 거하시는 불보살님과 아라한(聖衆)들의 세계에 위계와 질서가 없겠는가?



큰스님께서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법계의 구도(構圖)를 설하신 것은 지극히 탁월하신 지견(智見)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큰스님께서 이를 사자후하시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선지식들과 불제자들은 아라한, 보살, 붓다의 위계를 간과하거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큰스님의 광명광대(光明廣大)한 법 세계에서 아라한, 보살, 붓다의 위계만을 떼어내어 고찰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법 세계의 일면만을 바라볼 수 있어 우리 불제자의 시각을 제한시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의 법 세계는 수많은 보석같이 영롱한 가르침들이 화엄사상(華嚴思想)처럼 상호융섭(相互融攝), 상즉상입(相卽相入), 원융회통(圓融會通)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을 조망하는 것은 큰스님의 법 세계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한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시각을 지양하고 통합적이고 유기적이며 거시적 관점에서 큰스님의 아라한, 보살, 붓다의 위계에 대한 법 세계를 언급하고자 한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서문을 친설(親說)해 주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 중에서 불가(불가)에 귀의한 구도자가 아라한에 이르는 도정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옥과 천상이 있고

 업보중생이 육도에 윤회생사하느니라.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존재의 근원을 철견해야 하느니라.



 이후부터 중요하노니

 음계 등 중계를 호지하면서

 나 없는 공부 두타행으로 나아가라

 그래서 증득하면 성중(아라한)이니라.



먼저, 불가에 귀의한 부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지옥과 천상 등의 육도 윤회가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윤회를 벗어나고 해탈하여 사바세계의 중생심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청정인(淸淨人)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Sein)의 근원을 철견해야 한다. 이 존재의 근원을 철견하는 것을 견성(見性), 또는 큰스님 말씀대로 현성(現性)이라고 한다.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신다. “조사선을 공부하는 이는 의단이 자리잡아 화두 타파하는 순간 경계가 확 뒤집히는 과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때 드러나는 것은 자성 광명뿐, 내 앞의 모든 게 공이 되어 나도 없고 나라는 생각까지도 사라집니다.

 아공, 법공, 구공입니다. 생각 이전의 본래 면목, 진여 자성입니다. 태양광과 달라서 여여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빛이요, 공적 영지입니다. 법계를 비추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정화된 마음의 빛’입니다.”라고 말이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주와 객의 벽이 무너져 버리고, 툭 터져 허공같이 비었습니다.적조요 만고의 광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음은 실체가 없어서 가고 옴이 없고 여여 부동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라고 자상히 밝히시고 계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 큰스님께서는 “소위 견성에 이름으로써 저 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상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창조주란 없다!’고 선언하는 단계가 바로 견성의 경지였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서 이 몸뚱이란 4대(지수화풍)로 이루어진 옷이나 집과 같은 ‘가짜 나’라는 것과, 나라는 것도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연 소생의 가아(가아)이며 이 세상은 꿈이나 그림자 또는 이슬과 같은 무상한 존재라는 사실도 발견하였습니다. 분별하고 사량하는 것은 생각일 뿐, 마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대열반 광명이 중생의 털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는 불도를 이룬다


 견성이 완벽한 수행의 완성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수행자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무량광(無量光)을 깊은 대적정 삼매 속에서 봐야 한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리고 대적정 삼매 속에서 봐야 한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리고 대적정 삼매를 통과하기 전에 이미 보살과를 증위해야 한다.



 보살과 증위 과정에 대해서는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즉 “대열반 광명이 중생의 털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불도를 이루리라는 말씀대로, 수행인이 공부하는 중에 선정에 들어 빨강 가사, 장삼을 수하신 문수·보현보살 그리고 관음·세지보살께서 방사하시는 부처님의 광명(대열반 광명)을 온 몸의 털구멍 속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종종 만나면 보살의 위에 든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이다.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선사들 어느 누구 한 분 제대로 이렇게 보살과를 증위하는 과정에 대해서 여실지견으로 설명한 말씀이 있는가?



 그리고 견성을 했다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사관(生死觀)을 확립한 것이 아니다.

큰스님께서 생사관이란 바로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거기서 명이 다하면 다시 어디로 가고, 또 그곳에서 업연이 다하면 어디로 가는지, 중생이 각자 지은 업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을 어떻게 전생하게 되며, 윤회 안의 세계와 삼계를 뛰어넘어 해탈을 이룬 성중(아라한 혹은 조사), 보살, 붓다들은 또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하게 관하고 세운 견해로써 붓다의 경계에 들지 않고서는 알 수도 없고 정립할 수도 없다.”고 사자후하신다.



 진실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고 자부하시는 선사들은 이제 스스로의 경지를 다시 가늠해 보고 큰스님의 말씀처럼 명료한 생사관을 얻지 않았다면 자신이 붓다가 되었다거나 깨달음이 수행의 종착지라고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부디 오늘날의 모든 선지식과 선사들께서 생사관과 불신(佛身)사상 그리고 깨달음의 증입 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현지사의 두 분 큰스님을 보좌해 함께 펴나가는 날을 기원하면서 삼가 불과(佛果)를 증위하신 거룩하신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의 존좌(尊座) 하에 오체투지를 하며 예배드린다.





견성에 이르는 과정,
선(禪)과 팔정도(八正道)


수행자가 견성을 얻으면 집착, 번뇌, 세속적 욕구 등이 표면적으로는 거의 사라진다. 즉 무의식에만 잠재된 상태로 남아있을 뿐 표면적이고 외면적으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편안한 해탈 몸을 얻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한시 바삐 해탈 몸을 얻기 위해서는 불과를 이루신 큰스님의 회상을 만나 큰스님을 믿고 끊임없이 과거의 습기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집착을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 세속적인 것들은 모두 덧없고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는 데 있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인도의 요가에서는 즈나나(Jnana)라고 하며 불가에서는 식별지(識別智)로 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식별지라는 것은 분별지와는 달리,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대해서 그리고 현상세계의 사건(Event)과 상황(Situation)을 포괄하는 법 세계와 자신의 마음 자리를 잘 살펴보아 중생심(세속적 욕망)과 청정심을 잘 식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별지를 위해서는 팔정도의 정사유(正思惟)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즉 허망한 망상과 덧없는 망상을 여실지견으로 통찰 및 파악하는 것은 정사유로서 바르게 생각할 때 가능하다. 정사유는 행동에 대한 마음의 일치를 의미한다. 심신일여(心身一如)를 얻어가는 과정에서 정사유가 확립된다.



 즉 심신일여(心身一如)와 정사유는 상호 보완적이다. 따라서 수행자의 경우 하루하루 생활하면서 마음으로는 딴 것을 생각하면서 몸으로는 일을 하면 그것은 정사유가 아니다. 정사유란 일과 생활을 하면서 시시각각 철저히 몰입하여 마음이 일을 통해서 만족을 하고 즐거움을 누릴 때 얻어진다. 정사유는 몸과 맘이 하나가 되어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행동이 마음과 하나가 이루어지는 지행합일이 될 때 얻어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얻어지지 않는 사유는 정사유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수행자가 일과 생활에서 행위들 하나하나에 대해 명확한 성찰(省察)을 얻게 해주는 것이 정사유이다. 반면 정사유를 통해서 지행합일(智行合一)이 이루어진다.



 한편 모든 것을 바친다는 헌신(獻身)의 개념도 정사유를 각성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헌신을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는 수행자가 마음으로 가장 바라는 바를 몸을 바쳐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에 대해 헌신하는 것이다. 수행자 자신이 만약 나는 이렇게 열심인데 왜 남은 열심히 하지 않는가? 또는 나라면 열심히 할 텐데 왜 남은 열심히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망상으로서 독선(獨善, 홀로 옳다고 생각함)이다.



 독선은 정사유를 파기(깨뜨림)한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으로 세상만사와 타인의 세계를 한정짓거나 규정짓는 것 그리고 판단하고 예단(豫斷)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과거 생각과 고정 관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라면 이렇게 할텐데 왜 타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결국 무의식의 습기로서 타인들에 대한 원망을 내재하게 된다. 무의식에 원망이 내재하게 되면 청정심을 가리는 먹구름이 드리운다. 그래서 타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알고 그 사람을 배척하고 싫어한다.



수행자가 올바른 마음으로 일과 생활을 통해서 심신일체(心身一體)가 될 때,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판단하는 마음을 없앨 때 더 나아가 수행자의 마음과 반연하고 작용하는 인연(因緣)들을 소거(消去)해 나갈 때 수행자의 마음은 하나로 모아지고 집중과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정사유와 상호 작용하여 생활과 일이 한 마음으로 집중하고 몰입할 때 중생심과 착, 습기 등을 하나 둘 탈각되게 한다.



 또한 정사유의 능력을 배양시키고 이렇게 배양된 정사유는 지혜(智慧, Wisdom))를 증장시킨다.  사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선(禪)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禪定)을 의미하면 텅 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무집착의 일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定)이란 바로 안정성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Stability라고 하는데 이 안정성은 바로 고요함, 평화로움, 조용함 등 호숫가의 고요한 상태를 지켜보듯 그러한 편안함을 의미한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서는 집중과 몰입이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삼매(Samadhi)는 더욱 요원한 일이다. 정사유(正思惟)는 현재 수행자 자신이 하는 생활에 대해서 일념으로 몰입하여 생활에 따른 행위 하나 하나에 마음을 합일시키는 것이다. 팔정도의 정사유를 강조하는 이유가 큰스님의 말씀대로 바로 그만큼 견성(見性)을 얻는데 정사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사항은 선(禪)이란 위빠사나선, 염불선, 화두선 모두 카르마를 제거하는데 목적을 둔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행자는 현재 삶의 메시지로부터 어떠한 카르마가 작용하고 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카르마를 올바르게 보는 시각을 정견(正見), 즉 카르마에 대한 바른 이해(Understanding)로 알고 있다. 그리고 카르마를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정사유(바른 생각)가 부가적으로 필요하다.



팔정도의 8가지는 매우 유기적인 시스템(체계)으로서 어느 하나 하나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톱니가 얽히고 물려 있듯이 작용하고 있다.  카르마를 바르게 보고 이해하고 해석할 때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이 일어난다. 현재의 사건에 대해 올바른 카르마적 이해를 얻을 때 현 상황이 몰고 온 번뇌는 소멸되기도 한다.



 큰스님께서는 춘천 대법회에서 사람이 죽으면 30~40%가 무주 고혼으로 떠돌며 명부에 들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착, 금전, 명예, 권력 등에 대한 탐착 때문에 기인한다고 하셨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여러분도 생활을 통해서 느껴봐서 익히 아실 것이다.



집착(執着)이란 사전적 뜻으로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한고 매달림”을 의미한다. 흔히 유루(有漏)라고 한다. 에너지의  소실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집착은 영혼을 지치게 하는 독(毒)이다. 맑고 맑은 청정심을 가리고 있는 중생심이라고 흔히 말하는 그것에서 비롯된다.



 중생심은 물론 삼독심으로서 탐·진·치를 일으킨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독을 담고 있는 중생심이다. 이 중생심이 억겁의 죄, 영혼의 독, 삼독심, 집착, 빚, 습기(Vasana)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게 되면 영혼이 청정해지고 억겁의 죄가 소멸되고 빚이 청산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가슴을 적시는 설법이 아닌가?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며 부처님의 성호(聖號)를 염하고 석가모니불 정근, 칭명염불을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본다.

 또한 석가모니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의 일을 도와 공덕을 쌓는 것이 수행 못지 않게 중요하리라. 큰스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기 위해서는 칭명염불선과 함께 팔정도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견이다. 정견은 글자 뜻 그대로 바르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대상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서 들어와 인식될 때 정견을 바로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그 대상이 왜곡되고 곡해되어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때문에 인간의 정신이 전도 망상으로 휘말리고 정신이 혼탁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인식의 틀을 확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많은 수행자들이 알고 있듯이 바로 정견(正見)을 내면에 확립하여 바로 하는 것에 있다. 큰스님께서는 가장 명확하게 사자후하셨다.즉 정견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일체 세상과 만유의 속성은 무상(無常, 항상 같지 않음)하다.”고 여실지견으로 관하는데 있다고 말이다.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이며 진귀한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큰스님의 심오한 법문을 통해서 불제자들은 존재의 속성이 무상하다는 것, 즉 덧없다는 것을 관함으로써 공관(空觀)을 증득하고 결국에는 초견성을 이루어 표면적인 탐·진·치 삼독심이 다소간 해소되고 지멸되어 버린다는 것을 심득(心得) 할 수 있다.



 많은 수행자들도 체험으로 아는 것처럼 선한 마음에는 악한 마음이 상대적으로 상존(常存)하고 있고 즐거움에는 괴로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윤회 세계’는 일체가 ‘고(苦)’이며 삼계는 편안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본성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실재Reality)의 진상을 여실히 철견(徹見)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영원한 내 것은 없다.”는 것으로 ‘회귀공(回歸空, 공으로 되돌아감)’을 역설하셨다.



 회귀공이란 바로 선가(禪家)에서 흔히 말하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본래 면목을 찾아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지난날을 참회하여 청정한 마음을 얻고, 둘째 목숨을 바칠 정도의 강한 구도심으로 부처님께 믿음을 보여야 하며, 셋째 부처님께 발원해야 한다고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또한 팔정도 중에서 정념(正念)을 얻기 위해서는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을 하여야 하며 이렇게 염불선을 닦음으로써 생각이라는 염을 바르게 확립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될 때 정정이라는 바른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정(定)이란 선정(禪定)에서 말하는 안정과 고요함을 뜻한다.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서 선정에 이르러야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정명(定命)은 바른 명(命)을 확립하는 것이다. 명이란 바로 목숨, 삶, 생활로서 여기서 정명은 바른 삶을 의미한다. 수행자의 경우 바른 생활은 바른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로서 선악을 초월한 행위를 의미한다.



 큰스님께서는 팔정도(八正道)는 견성을 하여 보림을 마치고 아라한 위를 얻는 가르침이라고 설하신다. 실상, 큰스님 말씀대로 견성까지만 해도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며 아라한 위는 더 어렵다.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은 견성과 아라한 위에서 만족하고 더 이상의 공부를 중지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스스로 공부를 더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자. 그렇다면 왜 자신이 공부가 완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자부하는가? 그것은 수행자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모르면 함구해야 한다.



 견성, 즉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임을 큰스님께서는 설파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겸허하게 견성과 깨달음의 견처에 머물지 말고 더 수행을 하여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를 향한 도정을 걸어야 할 것이다.







견성에 이르는 길, 위빠사나선과 염불선



 사실,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은 염불선과 위빠사나선이다. 염불선, 특히 칭명염불선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주로 위빠사나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해 볼까 한다.



 혼자서 위빠사나선만을 잘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불가능하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스승의 지도 없이 단지 위빠사나선 수행만으로는 완전한 아라한 위를 얻는 것이 사실 너무 힘들고 어려우며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선은 화두선, 간화선, 조사선보다 효과적이며 부작용이 적다. 그리고 선 수행(禪修行)을 올바르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들 간의 관계를 완벽하게 꿰뚫어 알고 있어야 한다.

 큰스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삼법인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세상의 번뇌를 타파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다고 하셨다.  결국 우리가 겪는 두카(Dhuka)로서의 고통과 108가지 번뇌들은 모두 배움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고통과 시련 그리고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발심(發心)이 약해진다. 고통이 크고 시련이 매몰차고 번뇌가 치성하게 일어나 자신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 질 때 세상에 대한 허무함과 세속적 욕망에 대한 집착 그리고 세상 인연에 대해서 초연해지고 달관해 질 수 있는 정견(正見)을 얻게 된다.  사실, 현상계의 일체가 덧없음을 인식했을 때 그러한 인식이 바로 정견이라고 큰스님으로부터 배워 알고 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고통은 집착(흔히 갈애, 탐욕, 욕망, 갈망 등으로 표현되기도 함)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 이 고통의 원인인 집착, 갈애 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중생심으로서 아상(我相)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인연의 관계를 파악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이러한 아상으로서의 견해를 아견(我見)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정신 과정(행위)과 육체 과정(행위)이 부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아견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리고 정신 과정과 육체 과정의 부조화는 바로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상태가 안 되었기 때문이며 정신 과정과 육체 과정이 하나의 통합적 흐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고 위빠사나선의 선지식들은 이야기한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했을 때 그것을 예의 주시하여 자신이 한 바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이 위빠사나선이다. 만약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행동하고 있거나 모르는 사이에 생각하고 있다면 심(心)과 신(身)이 일여(一如)의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지)와 행(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염불선을 할 때도 입으로는 석가모니불 정근을, 뜻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하라고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 상태가 하나로 통일될 때 삼매로 들어가 견성을 하게 되는 것으로 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실(마을)가는 놈으로부터 속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상시에도 항상 솟아나는 생각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내면에서 이 마실가는 생각들이 분명하게 보여지지 않는다면 외면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잘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 모든 일에 대해서는 원인과 결과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통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지혜가 창생(蒼生)한다. 연기의 실상(實相)을 관(觀)해서 성찰해보면, 무지로부터 잘못된 견해(我見)가 성립되고 그 잘못된 견해로부터 갈애와 집착이 생기고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업을 짓고 그로부터 고통이 생긴다고 한다.



 이 고통의 근원인 무지(無明)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심신일여(心身一如, 마음과 몸의 행위가 하나로 같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신이 작용하는 법과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 뜻을 주도면밀하게 예의 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체의 행위는 의식과 무의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식은 심(心)에 비견할 수 있으며 무의식은 신(身)에 해당한다. 따라서 심신일여(心身一如)는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생멸(生滅)이 끊임없이 전개되어 사념이 두뇌에 확산되는 현상인 빠빤차를 차단하고 자신도 모르고 행동하는 일체의 행위를 삼가함으로써 언제나 생각과 행위를 주시하고 조심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의식과 무의식을 정화(淨化)하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칭명염불선의 경우 석가모니불을 염송하고 눈으로 부처님 성상(聖像)의 양미간을 관함으로써 집중하고 몰입하게 되면 결국 의식과 무의식이 정화되어 간다.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정화되어 가면 내면에 빛이 생기고 결국 의식과 무의식이 합일된다고 본다.



 그 경지가 견성(見性)인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성상의 양미간으로부터 백호 광명을 보고 깊은 삼매에 들어 부처님의 화신(化身)을 본다면 보살과까지 증위해 갈 수 있다고 하신다.



 큰스님께서 현지사 법회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든 괴로움의 근원은 집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역대 선사들과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들은 말은 많은데 정확하게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사자후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분들의 다양한 설법들을 두 시간을 들었을 때 한 가지 지혜를 얻으면 성과가 있을 정도였다.



 이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큰스님을 다르다. 큰스님의 설법은 한 시간만 들어도 의식이 각성되며 심오함을 느끼며 더 나아가 분명 깨달음 이후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는 바로 어마어마하게 장대한 세계라는 것을 매번 확신하게 된다. 특히 사후 세계에 대한 설법은 다른 선사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처님의 인가를 받으면
종국적으로 불과를 증득


견성 수준에서 더 나아가 보림을 해 나가면 자신이 공간에서 녹아서 무아(無我)를 체험해 가며 ‘나’없는 수행으로 계속 정진하면 궁극적으로는 ‘가득찬 허공’과 계합되며 은광색의 영혼의 빛을 얻어 아라한과를 증위한다. 그리고 두타행과 염불 삼매, 효 등을 계속하면 불, 보살의 가피를 받아 보살과를 증위한다고 만현 큰스님은 말씀하신다.



공(空)을 철견(徹見)하고 깊은 묘(妙)함의 세계를 지나 대적멸(大寂滅)의 세계를 지나면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고, 부처님의 인가를 받으면 종국적으로 불과를 증득한다고 하신다. 큰스님께서 견성은 공부의 시작이라고 하신 말씀이 타당한 이유는 부처님의 경지와 아라한의 경지는 비교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어찌 불과를 얻어 삼천대천세계의 한량없고 무한한 공덕과 복덕을 구족한 경지에 일개 공(空)을 체험한 깨달음, 즉 견성의 경지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저울질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견성을 해야 고요함과 약간의 밝음을 느낄 뿐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붓다가 되면 마음은 고요한 희열과 정화된 환희 그 자체이며 평화로움과 고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신다. 또한 견성은 심여일반(心如一返)의 경지를 일컫는다. 선가(선가)에서 흔히 말하는 한 소식했다는 말이 이 말이다. 즉 본래의 면목, 또는 본 자성 그리고 참나 등은 고향을 찾는 것이라고 서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본래의 면목이자 마음의 고향은 심여일반(心如一返)이 되어야 한다. 즉 마음이 하나가 되고 돌아와야 하는 거다. 이것을 큰스님께서는 내면에서 공(空)이 터져 나와 허공이 뒤집힘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공(空)이 처음에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공이 깨졌다가 다시 이루어졌다를 반복하다가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정신으로 임했을 때 공(空)이 안정된 상태를 갖추게 된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공(空)은 물론 비어있음을 말한다. 텅 빈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어있으나 눈 감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묘함이 있다.



 그래서 고승께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셨다.

참된 공에는 묘함이 있다고 말이다. 그 묘함이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을 통해서 증득하면 안다. 왜 그 많은 스님들과 불제자들이 오늘도 수행에 정진할까?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얻고자 함이다. 실재(Reality)는 바로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세상의 변화에도 여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질적 체성(體性)이 하늘 또는 허공과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걸리지 않음(無碍)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남으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으려면 자신의 체성이 본질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여실지견으로 철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외부세계와 자꾸 피곤한 인연을 쌓게 된다. 인연을 녹일 수 있는 약(藥)이 바로 불가에서는 공(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空)은 모든 종교적 깨달음의 기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空)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은 없다.



불가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空)의 세계를 잘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진실된 공의 세계로 증입해 들어가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청정한 마음을 밖으로 꺼내는데 있다. 그렇게 되면 진실로 생각이 지멸되고 청정한 마음의 체성이 현전 한다.



재차 강조하는 바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선이나 염불선이 매우 효과적이다. 존재계의 실상을 여여히 통찰하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위빠사나선이나 부처님을 믿고 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하여 닦는 염불선은 공(空)의 세계를 철견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염불선의 모범적 전형으로서 과거의 그 어떤 염불선보다 우수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현재 현지사 신도 분들 중에 견성에 가까운 상당한 경지에 이르신 분들이 많이 있다. 참고로 이러한 공(空)의 체성(體性)과 큰스님의 위대한 사자후인 법신(法身)의 체성(體性)과는 비교할 바 없이 현저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임을 명각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 견성을 하여 초견성에 이른 수행자와 불과를 이룬 수행자간에  공 세계(空世界)에 대한 이해 또한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수행이 깊어갈 수록 공의 세계는 본질적 특성상 집착이 더욱 없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 즉 삼라만상을 포함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것으로 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과를 증위해 갈수록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無碍)함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어찌 견성 수준에서의 무애(無碍)한 자유와 불과를 증위해서 얻은 무애(無碍)한 대자유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현격한 차이를 가지나 공(空)을 철견하면 공 세계(空世界)는 모든 것을 함용하고 있으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리하여 철학적인 세계관을 매우 단순하고도 광범위하게 포용하게 된다.



 그리고 공(空)사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순간순간 자신을 돌아다보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끊임없는 겸허함과 하심(下心)을 갖도록 해 준다. 공(空)사상의 특징은 단순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여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공(空)의 본성이다.

 삼천대천세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복잡한 것은 없을 것이지만 실제로 증득되어 경험하는 상태는 단순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모든 스트레스와 번뇌는 복잡한 사유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상황과 사건을 온전히 풀이해 내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공(空)은 문제에 대한 해결을 담고 있다.



사바세계의 현상계가 문제 공간이라면 절대 세계로 가는 문턱인 공 세계는 해답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 세계는 맑고 깨끗한 빛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空)을 체득하게 되면 항상 머리가 맑고 고요하며 밝다. 그리하여 ‘나’라는 주관이 사라지고 객관적 세계, 즉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집착없이 대하고 바라본다.

공(空)을 얻으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며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이런 자리를 철견하면 그 어떤 물질적인 욕망보다도 더 큰 고요한 즐거움을 얻으며 모든 물질적, 세속적 욕망을 얻은 것 이상의 기쁨을 얻게 한다.



한편 현실적으로 가장 깨달음에 가까운 삶을 사는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나’라는 관념을 버린 사람이다. 이를 관념적인 ‘나’를 타파한 수행자라고 한다. 관념이라는 것은 생각들의 덩어리로서 모든 아상(我相)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아상을 일으키는 관념을 타파하는 게 중요한 일이다.



 관념은 선입관과 편견을 일으키며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걷는데 방해가 된다. 물론 올바른 지식과 건전한 양식(良識)은 구도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올바른 지식과 양식이 바로 팔정도(八正道)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팔정도가 없이는 결코 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신의 존재와 세상에 대해 여실지견으로 통찰할 수 없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리고 관념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쓸모없는 지식과 체계화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지식들을 의미한다.



견성,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전도된 지식과 잘못된 정신적 오류들을 그리고 편향된 상념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견성을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망각(妄覺, lapse of memory; forgetfulness; oblivion)이란 바로 ‘기억하지 않은’의 의미로써 깨달음은 자신의 기억을 깨끗이 지워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는 관념적 존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없다는 생각마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동양 고전에 하늘은 큰 일을 시키기 전에 마음을 괴롭힌다고 하였다. 모두가 부처님께서 수행자를 큰 그릇으로 키우려고 하심이다. 자신의 마음이 괴롭지 않아 보고서는 타인의 마음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으며 남을 지도하거나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괴로움을 통해서 면역 에너지(免疫意識)를 얻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면역 에너지와 면역 의식이 바로 견성(見性)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면 증득되는 공(空)의 에너지와 청정심의 에너지로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수행자의 내면에 쌓여있는 중생심이라는 독소와 깨끗하고 맑은 아름다운 청정심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습, 기, 착, 업, 빚 등을 모두 청산하여 중생심을 지멸(止滅)시키지 않고서는 청정심을 깨어낼 수 없다. 헤르만 헤세가 말한 대로 새가 새로운 세계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이 있어야 한다.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염불선이나 위빠사나선 등의 선(禪)공부 그리고 경전 공부를 통해서 살아있는 지혜를 내면에 얻어야 한다. 지혜가 생기면 집착과 습기 그리고 무지와 두려움의 먹구름은 소멸된다. 초발심을 한 수행자는 세속적인 습, 기, 착, 업, 빚 등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불교 공부의 중요성을 좀 더 깊이 각인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성(耐性, 견디는 힘)을 키우는 것이 선(禪)의 핵심이다. 수행자는 정말 여러 가지로 마음이 힘들어도 끊임없이 인내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다. 정말 이것은 수행자 스스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하는 한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의 개오(開悟)가 일어난다. 불성(佛性)이라는 불종자(佛種子)가 내면에서 자라서 점점 견고해지고, 내면에 꽉 차게 되면 큰스님 말씀처럼 천지를 뒤집어 엎으면서 터져 나온다. 그것이 견성 체험이다. 내면에서 불종자가 자라고 터져 나오기까지 정말 힘든 각고의 정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수행자가 올바른 스승의 지도 하에 몇 년만 정말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정진하면 분명 견성(見性)을 얻을 수 있다고 선지식들은 이야기 한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보다 확실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으로, 많은 현지사 신도분이 큰스님이 직접 지도하신 칭명염불선으로 수행한 결과 깨달음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진해진다.







견성, 깨달음 이후의 솔직한 경지



아라한과를 얻으면 세상이 텅 빈 허공과 같음을 통찰(Insight)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없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모든 것이 없는 공관(空觀)을 얻고 공심(空心)을 심득(心得)한다. 우주 전체가 꽉 찬 허공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내면에서 빛이 생긴다. 그럼으로써 삼라만상 우주 대자연을 하나의 ‘가득 찬 공허’로 인식하고 깨닫게  되며 이로 인해 음욕(婬慾)이 지멸(止滅)된다. 빛은 번뇌와 음욕을 녹이고 잠재운다.



만현 큰스님께서 아라한과는 수행자의 영체가 은백색을 띤다고 하셨는데 윤회, 즉 흔히 세간에 알려진 말로서 매트릭스(Matrix)를 벗어나야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일단 견성을 해야 ‘가득 찬 공허’를 철견(徹見)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견성은 공간계의 변형을 의미하지 생사경(生死境)에 완전히 도달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라한 삼매는 멸진정삼매로서 여기서 더 나아가 보살들이 드는 삼매인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어야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불과를 증위하는 대적정삼매(大寂定三昧)를 통과해야 한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이는 깊은 삼매를 통해서 고차원으로 의식의 상승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큰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불과를 증득하면 법신(法身)을 얻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생사관(生死觀)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사관을 얻지 못하고는 결코 자신이 붓다라고 자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이삼백년 전 중국(唐)에서 골격을 갖춘 소위 선불교(禪佛敎)에선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마음을 깨치면 성불로 본다. 부처가 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마음의 본성, 곧 공성(空性)을 증득한 것만으로 성불이라 보는 견해는 사과 씨를 사과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이제 겨우 깨달음을 증험한 것만으로 부처라 주장함은 사실과 천지차이가 나는 위험천만한 사견(邪見)인 것이다.



<<법화경>> (비유품)에서 사리불 존자는 자기가 공의 법을 증득하고, 참된 완전한 멸도로 생각했으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보니 분명 사견이었다고 고백한다. 천인과 야차, 용신들이 공경하여 따르는 곧 32상과 지혜, 자비, 복덕과 항사의 신통으로 천백억 화신, 32응신을 나투어 육도 중생, 성중, 보살을 구제할 수 있는 색신(불신)을 성취해야 비로소 붓다라 선언했다.



 이 색신의 성취는 공성의 증득과 더불어 무량 겁을 두고 쌓은 온갖 공덕으로 인하여 가능하다는 것. 아라한 성문들에게 먼 미래세에 색신의 몸으로 성불하게 된다는 부처님의 수기를 싣고 있다. 우린 이를 주목해야 한다.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불신(색신)을 얻지 못했다면 결코 성불이 아니라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강조하심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금강승이라고 하는 밀교에서는 무상한 육신 속에 사신(사신 또는 삼신)을 현증해서 생사를 진실로 초월한 붓다가 된다고 하지만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밀교의 법신·보신설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단언하신다.



 미세한 분별의 마음이 완전 탈각한 일체공(一切空)의 빛 곧 정광명(淨光明)과 화합한 상태에서, 바르도(中有)에서 얻은 의생신을 불신(報身·色身)이라 보는 것은 진정한 보신을 모르는 견해라 하신다.



티베트 밀교의 수행 체계 등을 가장 높이 평가하시는 자재 만현 큰스님은 붓다의 삼신설에 대한 보다 깊은 법설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Ⅱ>>에서 다룰 것이라 하시니 자못 기대가 크다.





한 생각을 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염불선



이렇게 한 생각을 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큰스님 말씀대로

‘석가모니불’을 찾는 것이다. 염불선이 강력한 이유는 무성하고도 불과 같이치성(熾盛)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석가모니불’명호를 사용해서 녹일 수 있다는데 있다. 고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큰스님께서 비유하신 바대로 용광로라는 삼매에 잡념들이 녹아버린다. 집중이 제대로 안 되면 불처럼 치성하게 일어나는 중생심에게 ‘금강반야바라밀’을 외우게 하는 것이다.중생심이 발동하려고 해도 ‘금강반야바라밀’을 중생심에게 먹이면 석가모니불을 보다 뚜렷하게 할 수 있다.



한편 스토아학파(금욕주의학파)의 현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일어나는 일 자체가 아니라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매우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조용히 생각을 지켜봄으로써 생각이 힘을 잃고 사라지도록 하는 위빠사나선이나 염불선을 통해서 일념삼매에 들어가는 방법 그리고 화두를 들어 오직 화두에만  전심전력하는 화두선 모두가 선 수행법이다.

 불교는  여하튼 선을 모르면 안 된다. 선(禪)의 글자 뜻은 하나(單)를 보는 것이다. 그 하나라는  것은 허공처럼 충만하고 충일한 마음이다. 중생심과 대비되는 청정심이 그것이다. 생각을 지켜보는 마음을 볼 수 있다면 그 주시하는 마음을 강화하여 청정심을 이룰 수 있다.

 이 청정심을 얻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큰스님의 염불선은 위빠사나선이나 화두보다 안정적이고 부작용이 없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항상 큰스님 말씀처럼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느 장소 어느 순간이나, 즉 일체 처, 일체 시에 석가모니불을 억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잡념과 망상이 있기 때문에 불교 공부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잡념과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들, 즉 망상이 없다면 공부감이 없는 것이다. 공부감이 없다면 배움도 없다. 사바세계는 인고의 땅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깨우치고 세상의 이치와 우중의 섭리를 배우기 위해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도자는 비록 견성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상당한 인고의 세월을 요구한다고 해도 용기를 갖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공자님 말씀대로 공부를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훌륭하다는 점을 상기하고 이 불교 공부가 힘들지만 이왕이면 즐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은 내면에 있다’라는 가장 기초적인 마인드를 잘 숙지하고 항상 내면을 성찰하고 염불선을 생활화하면서 지내야 할 것이다. 물론 내면에서 일어나는 중생심을 너무 과소평가하지는 말아야 하며 항상 진지한 마음과 긍정적 마인드로 염불선에 임해야 할 것이다.



달마 조사는 견성, 즉 깨달음을 위해서 이입사행을 역설했는데 이입사행이란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을 합한 말이다. 이입(二入)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말하며, 사행은 행입의 내용으로 보원행(報怨行)·수연행(隨緣行)·무소구행(無所求行)·칭법행(稱法行)을 말한다.

 여기서 이입(理入)은 경전에 의해 그 근본 정신을 파악하고 일체 중생의 마음이 진성(眞性)임을 알아서 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즉 이입사행은 수행의 근본을 설명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행입에 대해서만 거론한다.



행입 중 보원행은 현세의 원망과 증오가 모두 과거에 자신이 지은 업(業)의 대가이므로 인간 본래의 도를 닦는 데에만 전념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보원행이 바로 전생과 현생에 지은 타인에 대한 원망을 갚는 수행이다. 이것이 수행자에게 가장 큰 문제이며 여기서 수행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남이 나를 원망하건 내가 남을 원망하건 그 원망심을 없애는 것이 보원행(報怨行)이다.

 서양에서는 용서(forgiveness)로서 알려져 있다. 타인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죄업을 사할 수 없다. 즉 보원행을 행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전생부터 지어온 악업과 빚을 청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결을 소멸시키고 원망을 제거해가는 행(行)을 수도(修道)로 삼아야 한다.



수연행은 순리에 따라 도에 합치되도록 하라는 말, 즉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인연을 잘 살펴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며 인연에 거부감을 갖거나 지나치게 인연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편 무소구행은 구하는 것을 없애서 애착과 집착·탐욕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다. 또 칭법행이란 모든 불법을 항상 공경하고 찬탄하라는 가르침이다. <<법화경>>에도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는 공덕은 그 어떤 공덕보다도 수승하다고 전하고 있다.



스승에 대한 지극한 공경과 감사 없이는 수행은 불가능하다. 공경과 감사가 무르익을 때 스승의 가르침을 찬탄하고 믿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귀의, 귀명하는 마음이 더욱 강화된다. 사실 죄업이라는 것이 알 수 없는 먼 과거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멸시한 죄업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명(無明)이라고 하여 가장 원천적인 연기(緣起)의 시작은 부처님의 12연기의 처음이자 고통의 근원이다. 이 무명(無明)은 다른 말로 말하면 ‘어두움’이다. 어두움은 공포, 두려움, 불안 등을 말하며 이러한 두려움은 결국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결여에 있다고 알고 있다.



 무시 이래의 헤아릴 수 없는 과거시절부터 불과를 이루지 못한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도 했지만 진실로 받아들여 목숨을 걸고 매진하고 정진하여 완전한 죄업을 다 사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가장 큰 죄는 바로 부처님을 믿지 않고 세속적 욕락(慾樂) 속에서 살아가면서 얻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집착이 아닐까 한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되어야 염불선


만현 큰스님께서도 "행주좌와 어묵동정(행하거나 머무르거나 않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거나)이 되어야 염불선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다.  항상 구도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마음 속으로 깊이 억

념(강하게 마음으로 기억)하고 발생하는 모든 번뇌와 슬픔, 분노, 원망 등

을 지워나가야 한다.  지혜는 내면의 밝은 빛으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더욱 확장되고 강화될 것이다.



견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염불선, 위빠사나선, 화두선 등

에 대한 일목요원하고도 체계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사실, 중생심을 잘

이겨내는 것은 어찌 보면 불교 공부의 스릴이자 긴장감이 도는 전율이

요 즐거움이다.



부처님께서도 아라한 위는 무학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아라한에

개는 중생심이 탈각되어 내적 번뇌가 어느 정도 소진되기 때문에

공부감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로 알고 있다.  따라서 중생심이라는 공부

감이 있을 때 열심히 배워 두는 것이 필요하다.



세속적 공부감이 없어졌다고 해서 더 이상의 공부가 없는 것은 아니

다.  큰스님 말씀대로 꾸준히 선근 보따리를 키우고 대승경전을 보아가

면서 보현행원을 해 나가고 동시에 칭명염불선에 매진하여 보살과를

증위하고 더 나아가 불과를 증위하도록 노력애햐 할 것이다.



수행자들이 익히 아는 것처럼 사실, 선은 생각을 뚜렸하게 지켜

보고 그 생각들을 지멸할 수 있는 일념삼매를 목표로 한

다.  이는 큰스님께서 친히 설하신 가르침과 일치한다.  큰스님께서도 역

점을 두어 일념삼매를 강조하셨다.



삼매에 들면 모든 잡념들이 지혜의 눈으로 비춰 안다.  휴정 서산 대

사께서 "천 가지 만 가지 생각,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한 점 눈과 같

도다."라고 한 말씀은 깨달음의 상태를 여실히 알려준다.  하지만 서산

대사로부터 전해오는 선시들 중에는 너무 선불교에 영향을 받아

모호한 면이 많이 있다.  큰스님은 그러한 수수께끼와 같은 방법을 쓰

지 않고 시원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원래 최상승 법력을 구비하신 분은 감추거나 아까워하지 않는

다.  큰스님께서는 여실히 깨달음은 삼매를 얻는데 있다고 설파하였다.

즉, 견성으로서의 깨달음을 얻은 구도자는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욕계

정삼매에서 시작하여 멸진정삼매(아라한 삼매)에 들게 되고 결국 상당수

의 잡념이 소멸된다.  결국 뭐라고 해도 이 생각들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 거리이고 생각들을 멸진시키기 위해서는 삼매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의해 판가름난다.



중생심이라는 것은 악업, 전현생의 죄, 습(관), (탁)기, (집)착, 빚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물려서 온갖 잡념들로 형상화되어 일어난다.  이러한

잡념들을 집중적으로 다스리지 못하면 대표적으로 애증(선심과 악심)에

의한 증오심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계속해서

과거를 벗어 버려야 한다."고 설파하셨다.  악업, 죄, 습, 기, 착, 빚 모

두가 과거 우리의 허물들이다.  중생심이라는 허물로서 그것이 우리를

옮아매고 있는 것이다.  나쁜 생각이나 좋은 생각 가릴 것 없이 이러한

모든 생각들에 먹이(마음, 의식, 에너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어는 인디안 추장도 그의 제자들에게 잡념이라는 독사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하였다.  생각에 끄달리면 생각에 휘말리게 되어 생각이

더 커져서 인간은 생각의 주인이 아닌 생각의 노예가 된다.



견성이나 깨달음의 목표는 생각을 이끌고 더 나아가 지배하는 생각

의 주인이자 영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구도자는

잡념을 제아할 수 없으면 차선책으로 잡념들을 무시할 줄 알아야

한다.  생각이 일어난다고 그곳에 끄달리면 절대로 안 된다.  이를 방하

착이라고 한다.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고 있는

생각들을 모두 놓아버려야 한다.  어는 고승께서는 한 생각이 일면

손에 불덩어리를 든 것처럼 놓아 버리라고 하셨다.






견성, 깨달음의 세계


여기서부터는 견성, 즉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

고자 한다.  견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은 바로 중

생에 대한 정견을 얻는 것이다.



중생이란 선악이라는 관념들이 무분별하게 취산되는 형태를 따

르기 때문에 '무리 중'자와 '생명의 생'자를 사용해서 무리 속에서 살아

가는 존재를 말한다.  그리고 이 '무리 속의 생명 존재'는 윤회의 바퀴

에 의해 변화하는 관념적 정신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희로애락의 사

슬 구조에 얽매여 마음을 한 시간도 고요하게 하지 못하고 요동치면서

살아간다.



 <<능엄경>>에는 나그네 살림을 중생이라고 하였다.  견성을 하게 되

면항상 주인공으로 살지만 그렇지 못한 중생은 나그네 살림을 하게

된다.  잠시 부연 설명하면 삿된 기운이란 것이 바로 중생들의 마음인

중생심이다.  수행자들로서 우리는 영적 수행을 통해서 한 껍질 한 껍

질 차근차근 우리의 중생심을 벗겨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중생심이 탈각되어 사라질 때 우리의 본 성품이 밝게 드러

난다고 할 수 있다.  한 껍질 벗겨나갈 때 우리는 아품을 느끼고 괴로

움과 고통을 느끼지만 그러한 고뇌와 고통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인내의 힘이 무엇보다도 수행자에게 요

구된다.



수행자들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잉태된 진공묘유

라는 말을 익히 알고 있다.  공한데 묘함이 있다는 뜻이다.  정통

도가에서는 현묘지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검고 묘한 도라

는 뜻이다.  햇빛이 없을 때 우주 공간은 검은 색이다.  그리고 단순한

빈 허공이 아니라 프라나, 오르곤, 기라고 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

다.  그래서 묘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묘함을 일으키는 기는

만유에 상호 침투되어 있어 어디를 가나 없는 곳이 없다.



물론 이 기 중에서 후천기가 아닌 선천기로서 묘광

으로 빛이 난다.  전우주가 이 묘광에 의해 빛을 발하고 있고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일반 중생들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

들의 내면의 눈은 오탁세상의 다섯 가지 더러움으로 (命濁, 衆生濁, 煩惱濁

見濁, 劫濁을 으른다)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을 깨끗이 정화하지 않는이상 이 '우주 만유' 삼라만상에

가득찬 묘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억종 찬란한 광명

으로 절대 법계에 빛을 방사하고 계서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

처럼 마음이 청정해지고 청정해지지 않는 이상 빛을 볼 수 없는 것이

다 이와 같이 도가에서 신묘한 광명으로서 묘광을 거론하는

데 어찌 선불교는 한낮 견성 수준만을 옹호하고 이야기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견성은 어떻게 해야 도달할 수 있을까?  명상 수련을 하면

서 얻은 최종 결론은 견성은 내성(견디는 마음의 성질)을 키우는 것이

라 본다.  내면의 힘이 모진 비바람과 고통을 이겨낼 때 불종자라고 하

는 불성의 씨앗은 싹을 틔우는 법이다.



그래서 그러한 내성을 키우게 해주고 불성을 꽃피우도록 어떤

면에서 안 좋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수행자에게는 수

행의 은인이자 어떤 면에서 또 한 분의 스승이 된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다.  수행자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안 좋게 반연(작용)하도록 만든 사람이 수행자 자신의 스

승이라니 말이다!  이는 수행자가 억겁 동안 쌓아온 업 속에 존재하는

중생심(대표적으로 사람, 사물 등등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습, 기, 착, 삼독심, 빚, 죄, 악업, 감각애(맛있는 것, 향기 좋은 것, 좋

은 소리 등등의 감각을 추구하는 것)는 큰스님처럼 불과를 증위하지 않는 이

상 그리고 사바세계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는 누구를 만나던

수행의 경지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뿐 현현하게 되어 있

다는 사실을 우리 구도자는 명각해야 한다.



수행이 무르익으면 업이 플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업이

플릴 때 고통이 수반된다.  이러한 고통을 잘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실타래가 모두 풀려서

자신의 체성이 허공처럼 드러날 때 그때 수행자는 견성이자

현성을 증험하게 된다.  참다운 성품을 증득하게 된다는 뜻이다.



수행자의 내면에서 분노나 슬픔, 원망 등등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수

행자는 지혜의 눈으로 잘 관찰해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순수할수록

조그마한 번뇌, 분노, 원망조차도 유리알처럼 잘 드러난다.  또한 순수

한 마음의 구도자일수록 타인과 자신과의 인간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

는 애증은 보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도자는 이러한 애증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전도된 중생심에 의

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착함도 잊고 악함도 잊으라는 고

승의 가르침은 타당한 이야기이다.  즉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

도 생각하지 말라고 혜능 조사는 이야기했는데 깨달음을 위해서는

필요한 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화두선이나 염불선도 결국은 집중하여 이러한 선심과 악심을

여의고 일념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견성

적 측면에서 몇몇 선사들의 가르침들 중에는 괜찮은 참된 가르침이 있

다.  만현 큰스님께서도 그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하신다.  즉, 화두 일념

을 위해서 지옥, 극락, 불, 보살 등일체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취

지로 이들을 부인하는 것을 뭐라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견성과 깨달

음 그리고 대오철저가 된 후에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어 붓다가 되었

다고 선언하는 것은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행자들의 진실된 도정은
거울 속의 참된 모습을 찾는 과정


한편 구스타프 카를 융 박사도 우리들의 가면(페르소나, Persona)을 하

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으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이야기하고 있다.

그 가면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통을 겪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나이가 많아도 이 가면을 제대로 벗어버리고 죽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 가면은 바로 고대 성현의 가르침에 의하면 타아의 마음에 비추인

다고 하였다.  <<화엄경>>에서는 '실재의 거울'로서 사람들의 마음이 무

수히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수행자들의 진실된 도정은 페르소나를 하나하나 벗어버리고 거울 속

의 참된 모습을 찾는 과정이라 할 수있다.  물론 거울이 없으면 나를

알 수 없고 거울만 봐서는 나를 영원히 찾을수 없다.  타인의 마음이

라는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때 불가

에서 말하는 견성에 도달한다고 한다.



견성은 선사들의 전유물만이 아니며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라고 말하

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얻은 깨달음이 한낮 정신

분석학자의 수준 밖에 못 미치겠는가!



물론 존재의 근본을 철견하여 견성을 얻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

는데 있어서 훌륭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견성이 수행의 종착

점이요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생사관에 대한 미

정립, 지옥을 관하거나 육도 윤회를 관하는 능력의 결여 그리고 자신

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함 등등은 견성이나 아라한 그리고

보살의 한계임을 명각해야 한다.



물론 견성의 한계를 실감하고 아라한을 넘어서 더 나아가 보살 위를

얻고 붓다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자는 참으로 거룩한 여정을 하는 것이

리라.  이러한 구도자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세상의 섭리를 파

악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우주 창력의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우주적 사명감이자 우주적 합목적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장 심오한 경험을 추구하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마음이 피어나는 것은 수행자가 숭고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내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만약 견성이나 아라한 위에 모든 수행의 도정을 한계 짓고 막을 내

리도록 수행자들의 정신세계를 미혹시킨다면 그것은 수행자의 웅대한

꿈을 산산이 와해시키는 것이다.  선사들은 이 점을 유심히 새겨들어야

하리라.





삼신설의 법신을 자성이나
본 면목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지금도 많은 불교서적과 불교관련 명상서적에서 자성을 불신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불성은 자성이라고 할 수 있

으나 법신을 자성이나 본 면목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단지 견성을

한 후 지고한 환희와 지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선사는 진실

하지도 못하고 솔직하지도 못한 견처임을 알아야 한다.



견성을 해보면 알지만 그냥 환희 트인 인식의대변환을 얻는 것이며

자성광을 얻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환희와

희열 그리고 지복의 열락은 견성이나 아라한 위에서 얻

을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견성은 단순히 자각의 눈이 뚜렷하고 명료하게 확장되고 집착

에서 벗아나고 음욕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지멸되는 경지

일 뿐이다.  견성이나 아라한 위를 얻고 환희, 희열 운운하는 것은 잘

못되고 솔직하지 못한 위선적 견처임을 우리 불제자들은 명지해야 한

다.  견성을 보다 더 훌륭하게 설명하자면 큰스님 말씀대로 "주와 객의

벽이 무너져 머리고, 툭 터져 허공같이 비어 적조요 만고의 광명"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을 보다 선명하고 명료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인

식하고 자각할 수 있다.  이것이 견성의실제적인 의미다.  내면에서 참

성품이 깨어나 마치 진리의 빛이 탄생하는 것을 견성이라 보면 좋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의 빛, 자성광은 은백색의 빛일 뿐, 억종 찬란한

불신과는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또한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달마 조사가 말씀하신 청정심과 중

생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달마 조사는 선불교에 있어서

창시자에 해당하므로 견성과 깨달음 그리고 아라한 위에 대해서는 여

실지견으로 잘 상술하고 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게 판단

하고 가르침들을 취사 선택해야 한다.



여하튼 달마 조사는 근본 마음 자리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여 청정

심이라고 한다.  이 청정심은 선하다 착하다는 뜻의 선심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선심과 악심은 대비를 이루어 음양의 이원론적

환영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청정심은 근본마음으로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행이 높고 고행을

많이 하고 인내를 하고 절제 및 금욕 수련을 하면 궁극적으로 내면의

근본 마음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천지가 뒤집어 진다.



이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 사자후하신 말씀으

로 견성, 즉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 매우 정곡을 찌르는 정확하고 명료

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큰스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과거의 업연이 어는 정도 소멸되거나

지멸된다.



자신을 둘러싼 주객의 벽이 허물어지고 흔히 수행자들 간에 회자되

는 세상의 개벽을 몸소 체험하는 경험이 바로 견성이다.  이

견성을 얻게 되면 자신의 살림살이를 갖게 된다.  선 수행을 많이 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면 마음이 화공과 같이 탁 트인 광대한 인식의 전환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주체로서의 '나와 객체로서의 '너'라는 분리된 상과 분별심

이 다소간 사라진다.  별도의 나라고 할 만한 실재가 없다는 무

아 사상을 어는 정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허무주의로 들릴

수 있다.  실상 견성이 허무주의로 격하되고 있는데 대해서는 선사들의

잘못이 크다.  모든 것이 비어있고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만을 가르치

기 때문이다.



사실 견성의 자리는 바로 갓 깨달음을 얻은 자리이지 붓다를 이룬

자리는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여기서 어느 고승의 가르침을

새겨들어야 한다.  고승께서는 견성, 즉 깨달음을 고목나무에서 꽃피운

다고 비유했다.  꽃이 피는 것이 견성이다.  영적 재생이자 영혼의 부활

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견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차이를 갖는 불과는 고

목이 죽고 그곳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

운 나무가 다 자라나 완벽한 나무로 성장했을 때를 불과를 증위한 것

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사변적 견처일 뿐 견성과 불과에 대한 보다 실재적인 비

유는 실증적인 경험으로 대성과를 이루신 큰스님의 가르침을 친

견해서 들어봐야 할 것이다.  여하튼 견성과 불과는 땅과 하늘의 차이

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 선사들이 견성을 얻으면 청정한 성품을 봄으

로써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을 알지 그 이상은 모르기 때문에 신도들이

나 선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진상이 공허하고허무

주의로 밖에 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극명

하게 상술되어 있으므로 참고 바란다.



한편 견성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망각의 강을 지나게 된다.  그리

하여 망각의 강을 지나게 되면 과거의 업들이 어느 정도 탈각되어 나

가면서 몸에 존재했던 탐  진  치 삼독심도 어느 정도 사라져 간다.



이렇게 업들이 녹아 없어지고 습기가 없어져 가면서 내면에서

빛이 영롱하게 현출하게 된다.



명심해야 할 사항은 견성, 즉 깨달음을 통해서 억겁동안 쌓아온 습,

기, 착, 빚, 죄, 삼독심 등등을 모두 송두리째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것

이다.  얼마간의 소멸은 있다.



하지만 견성을 하고 보림을 마쳐 아라한 위를 얻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이 부처라고 자부하는 것은 부처님을 능멸하는

오만방자한 행위임을 명각해야 한다.



실재로 표면적으로 인식상으로 느껴지는 모든 중생심은 탈각되어도

무의식 깊이 도사리고 있는 업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큰스님의 말씀처럼 불과를 증위해야만 완전한 악업, 죄, 착, 습의 소멸

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견성,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


큰스님의 법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견성

의 의미부터 하나하나 이해해 가면서 본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견성이란 글자 뜻 그대로 성품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품이란 무엇일까?  성품이란 일심, 여여함,

본래 면목, 자성, 밝고 고요한 마음, 청정한 마음, 순수하고 명료

한 마음, 깨끗한 마음, 참 나 등등으로 언급되고 있

다.  사실, 사과는 깨물어봐야 맛을 안다.  그렇듯 견성은 체득해야

아는 것이다.



생각이나 사변적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는 해오

이지 증오가 아니다.  신비적인 체험으로 뚜렷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본마음인 성품을 철견하지 않는 이상 견성의 올바른

뜻을 해득 할 수 없는 것이리라.



견성에 대한 올바른 해의를 위해서는 오늘날의 '깨달음의 프레

임위크'에 근거하여 견성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

라 생각한다.  깨달음의 얼개 또는 틀 구조는 다름 아닌 견성이라는 깨

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들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은 고도의 난행고행, 각골정진으로 고도의 정신 세계로서의

승탑을 내면에 구축해 나가는 어려운 과정이다.



그리고 존재를 바라보는 인식의 대변환이 일어나야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일대 인식의 대변환을 가져오기 위해서,

즉 존재에 대한 인식의 혁명이 있기까지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

만 큰스님 말씀대로 팔정도, 사념처, 칭명염불선 등을 대표적으

로 거론할 수 있다.



또한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가적인 여러 가지 제반 사항을 알

고 있어야 한다.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사상의 완벽

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비 체험을 해봐야 하며, 실재와

존재의 의미를 체득해야 한다.



또한 업연이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이해해야 하며, 중생심

과 청정심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을 타파해

야 한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빚, 죄, 악연, 습(기), (탁)기,

(집)착, 그리고 삼독심을 제거해야 하며 중생의 의미와 윤회해탈

의 의미에 대한 올바른 정립이 필요하다.  물론 지옥이 존재하며 육도

윤회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선정과 삼매의 세계를

증득하여야 하며 선과 악을 초월하여 이원성을 해체할 수 있어야 한

다.  이를 위해서는 선,  교,  율  모두를 겸수하여야 하고

계.  정.  혜  삼학을 무엇보다 잘 도야해야 한다.



한편 수행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워내는 것이 무

엇보다 중요하며 야망으로 표출되는 에고들을 올바르게 활용하고

무모한 관념은 타파하는 것이 요망된다.



견성을 보다 수행자적 관점에서 정의하자면 수행자의 영혼이 일련의

시간적 공간적 상황들을 통과하여 자각의 눈을 키워나가는 과정,

즉 프로세스라고 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영혼은 무수히 길

고 긴 영겁 동안 쌓아온 업장이 어는 정도 소멸되고, 습기

를 제거해 가며 빚을 청산하며 더 나아가 인연들과의 애증을 제

거해 나간다.



깨달음의 터널은 구도자, 불제자, 수행자의 통과 의례라 할 수 있다.



터널을 통과하면서 구도자는 인간 세상의 모든 허망한 맛을 겪게 된

다.  큰스님 말씀대로 세상이 무상하고 고,(괴로움)이며 무아

라는 것을 여실히 철견하게 된다.



그리고 깨달음의 의미와 가치를 아주 뼈저리게 인식할 수 있는 가르

침들을 배우게 된다.  그것에는 주로 고독, 인내, 용기, 절제, 금욕, 자

비, 헌신, 희생, 이해, 용서, 겸허, 관용 등등의 덕목 등이 있다.  이러

한 덕목들을 하나하나 소양해 나가고 궁극적으로 마스터해 나감으로써

터널의 저 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뚜렷하게 빛나는 마음을 증득

하게 된다.  여기가 바로 견성의 자리인 것이다.



물론 견성을 했다고 해서 만현 큰스님께서 설하신 고대 근본불교 이

래로 은장되었던 미증유의 가르침, 즉 붓다의 삼신설로 알

려진 불신관을 얻는 것은 전혀 아니다.



불신과 견성에서 말하는 마음의 자성은 엄청나게 현격한

차이가 있다.






깨달음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며,
수행의 종착지가 아니다


만현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견성, 즉 깨

달음만이 모든 문제의해결이 아니며 결코 깨달음이 수행의 마지막 종

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설파하셨다.



무엇보다 수행 중에 대적정삼매를 통과하여 무량광을 체험함

으로써 불신을 구족하여 생사관을 확립하는 것이 불제자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

못한 채 상적광토에 법신을 그리고 연화장 세계에 원만보신을 얻지 않

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볼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사바세계의 무상함을 극복하는 길이며

이것이 바로 생사관 정립인 것이다.  이에 불제자는 무엇보다도 견성

이 곧 완벽한 생사관 확립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아야 할 것이

다.  그러므로 견성, 즉 깨달음은 수행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

야 한다.



여기 자상하고도 상세하게 몸소 설하신 큰스님의 법설을 들어보자.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깨달음의 정의는 그렇습니다.  깨달음은 본성이라고 하고 자성이라고

하며 일체우주 만물의 근원자리 법성이라 하는 그 자리를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 경험상 그리고 많은 화두 타파한 분들의 이야기로 볼 때

부처님의 말씀으로 볼 때 그 깨달음의 경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면

됩니다.  하지만 그 청정 무구한 단계의 경계가 드러나게 되는 데, 그

경계가 드러나는 것이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한 식경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이유는 우리가 억겁을 통해 살아오면서 많은 업을 짓고,

따라서 습이 붙고 기가 생기고 그럽니다.



그것이 완전히 소멸되어야 계합이 되는 겁니다.  원래 생각 이전의

자리로 나가 뚫기는 뚫었지만 뚫는 것이 깨달음인데, 그 청정 무구한

본성과 나라고 하는 것이 계합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람의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삼독심 모든 번뇌가 다 뿌리 채 뽑혀져야

합니다.  순수가 되어야 합니다.  또 습이나 기라든지, 나쁜 인연까지도

찌꺼기까지 완전히 소멸이 되어야 하는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이 종착점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이제 깨달

아서 나라는 생각을 죽이는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걸 두타행이라

고 합니다.  가장 좋은 공부는 두타행입니다.  두타행으로 나아가야 합니

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권하는 것이 바로 두타행입니다."



또한 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지요.  깨달음 이후에 보림

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경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본

성과 계합하기 위해서 삼독을 녹이고 습을 녹이고 기를 녹이려고 보림

을 합니다.  그러나 보림을 한다 하더라도 결코 정화는 일부 될 수 있

을 지언정 소멸은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깨달음은 그런 찌꺼기가 완전 불식이 되어야 합니

다  그래서 집착이나 상이 뚝 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수행을

잘하다 보면 그 자리까지 갑니다.  아라한 자리.  그러나 보살이나 붓다

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명료한 가르침이신가?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선불교의 선지식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선불교의 선지식을 따를 것인

가를 고민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분명 <<아함경>>에서 육도 윤회가

있다고 설하셨으며, <<법화경>>에는 묘희의 세계를 많이 설해주셨

고, <<화엄경>>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의 세계를 말씀하셨다.



<<정토삼부경>>에선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약사여래본원경>>에서는

동방 만월세계를 말씀하셨다.  선불교의 선지식은 이러한 부처님의 대

승경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로지 화두 타파 이야기만 한다. 어찌된

것인가?  부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가 선불교의 선지식들을 추종

해야 하는가?



지혜로운 식견을 구비한 불제자라면 답은 훤히 결정되어 있다.  뭐라

고 해도 우리 불교의 교주가 되시는 분은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선불

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달마 조사는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은 28대

법손에 지나지 않는다.  달마 조사가 더 높을까 부처님이 더 높을

까?  선불교의 선지식들은 부처님과 달마 조사의 경지가 동일하다고 평

가하고 있는 듯하다.



정말 부처님과 선사들은 동일한 경지일까?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에

만연된 선가의 선서들에 찌들어서인지 분간이 안 된다.  정말

선사들이 부처님과 동일한 경지인가?  많은 불제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서 궁금해한다.  급기야 이러한 의문은 제차두고 선사들이 부처님과 동

일한 경지라고 확고한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좀 무언가 석연치 않다.  달마 조사는 왜 그렇게 박식하지 못

했을까?  부처님은 수많은 경전을 설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가르침들을

많이 베풀어 주셨는데, 달마 조사가 남긴 서적들은 거의 손에 꼽을 정

도이니 말이다.



달마 조사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분들은 제자들을 많이 육성하고 좋은 경전

을 많이 남기며 자비와 지혜가 출중하고 변재하다는 것으로 전하고 있

다.  그러나 달마 조사는 석가모니부처님보다 제자 유성이나 경전 찬술

그리고 자비와 지혜면에서 부족하다고 보여진다. 













선불교의 폐습과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출현


오늘날 선불교의 여러 가지 폐습, 즉 공허한 선문답, 뚜렷하지

못한 경지, 계율을 중시하지 않는 막행막식, 육도 윤회를 관하지 못함,

생사관의 미확립, 공사상의 허무주의화 등등으로 인해 수많은

수행자들이 막연한 이상향을 기대하거나 수행의 한계를 겪고 있고 불

교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수행자들은 선불교의 폐습에 가리어 불교 공부를 너무 어렵게 느끼

며 불교 수행체계에 대한 명료한 안목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선불교의 문제만이 아니

라 전 세계의 종교 명상세계가 공성과 신성을 철견하는 경지

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공성이나 신성이라는 것은 어떤 확고한 경기가 아니다.  그것은 고요

한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경지이다.  이 경지가 마치 최고의 경지인양,

그리고 더 나아가 궁극적인 경지인양 수행자들의 의식 속에 만연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두뇌에서 번뇌를 지멸시키는 것이

수행의 완성이라면 종교의 시원적 근거이면서 종교가 수천 년 동

안 내려오면서 간직해온 사후 세계에 대한 해답은 어떻게 풀어야 할

까?  사후 세계는 이론이고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실재적으로 존재하

는 것은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세계의 최대 종교들에 속하는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교주들께서 모두 사후 세계를 설파한 것은 거

짓이요 위선이란 말인가?



우리는 진실로 정신 차리고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종교는 차지하고 불가에 소속한 불제자로

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육도 윤회와 사후 세계를 부인해야

할까?  그렇다면 정녕 부처님께서는 거짓을 말씀하신 것일까?



선불교의 선지식들은 마음이 극락이고 지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의 육도 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의 말씀이 맞다면 선불교의 선지식이 틀린 것이고 선불교의 선

지식이 맞다면 부처님께서 틀리신 것이다.



이러한 이분적인 구분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으나 지

금은 현실세계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불교 수행문화의 오류들을 많이

보는지라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할 때이다.





견성, 깨달음은 이제 시작


불교는 세계 최고의 종교로서 미국 및 유럽에서도 수많은 찬사와 호

평을 받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열풍릉 일으키고 있다.  요가 명상,

단전 호흡, 마인드 컨트롤, 초월 명상 등 무수히 다양한 명상 수행단

체들의 수행 붐이 서방 세계를 강타한 이후로 이제는 제대로 된 가르

침에 귀의하기 위해 대부분의 구도자들이 최종적으로 찾아서 입문하는

곳이 바로 불교다.



진실된 법, 즉 다르마를 만나기 위해서는 때가 되어야 하며

인연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스승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

고 시기가 도래한 제자만이 자신의 스승을 만나 뵐 수 있다고 고대로

부터 전한다.  간절히 원하고 시절 인연이 되면 스승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일생을 좌우할 스승을 그냥 인연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옳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분을 스승으로

간택해야 할까?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수행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화두

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구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각 영성 분야의 여러 선지식들을 친견하고 수많은 종교 명상서적들

을 섭렵하였다.  하지만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봤다.  그것은 바로 치열

하고 진지하며 사생결단하는 결연한 자세로 수행에 임하는 구

도자가 극히 적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음계를 파하여 폐인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스님이면서 스님이 아닌 분, 수행자이면서 형식만 수행자인 분, 그리고

구도자이면서 방황만 하는 구도자가 너무나 많다.  이것응 바로 비단

한국불교만의 문제는 아닐지니, 이 문제는 바로 전 세계 종교 명상수

행자들의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여 하나의 선불교의 화두 아닌 화두가

되어버렸다.



즉, 수행자들의 모범적 전형에 대한 최대의 절대적인 화두가 되

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특별한 모범적 수행자는 찾기 힘들다.  그래서

다시 고대 종교의 교주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가장 아릅답고 계율을 중

시하는 불교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래서 재차 강조하는바, 바로 수행

자들과 구도자들이 발걸음을 돌리는 곳이 바로 불가가 되었다.  하

지만 그들이 찾은 불교의 가르침은 너무나 석가모니부처님 제세시 근

본불교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뚜렷한 대선지식을 배출하지 못

한 선불교가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어느 누구를 자신의 스승

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석가모니불 칭명염불이 좋은 이유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은 앞 단원에서 언급한 일반 염불선이나 염

불 수행과는 달리 단순히 부처님의 명호만을 구창하는 것이 아니라 마

음속으로 금강반야바라밀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말씀하신 대로 석가모니불 칭명염불이 좋은 이유

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석가모니불 칭명염불시 석가모니부처님의 화신불이 오신다.

둘째, 석가모니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칭명염불시 자성광이 환히

비친다.



셋째, 석가모니부처님을 칭명염불함으로써 내 마음은 석가모니부처님

과 동화되어 마음이 정화되고 업장이 소멸된다.



넷째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최단의 지름길이며, 보살이 되고 붓다

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를 받는다.  즉, 무량무수 견줄 곳이

없는 공덕을 받을 수 있고 무량무수 불가칭량 복덕을 얻으며 항상 석

가모니부처님과 일체 부처님의 호념을 입고 모든 보살의 보호를 받으

며 호법 선신들이 옹호한다.



여기에 추가하여 계율(3귀의 5계 10선)을 지키고 부모, 조상님께 진정

한 '효'를 다하며 불 보살님 전에 가끔 공양도 드리면서 불과를

이룬 큰스님 회상의 대작 불사에 크게 시주한다면 더욱 좋다.



정리하자면, 큰스님께서는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저는 중 하근기 수행자에게는 어려운 만큼, 일심불란한 염

불을 통해 드디어 삼매에 드는 염불선을 권합니다.  구체적인 행법을

말한다면 먼저 정좌한 눈높이에서 1~2m 앞에 작은 점을 찍어 둔 다

음, 두 눈을 뜬 채 시선을 점에 고정합니다.  가능한 눈을 깜빡거리지

않은 채(5~10분 정도는 가능) 염불하되 관세음보살이나 석가모니불, 아미

타불,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 자신과 인연 있는 불보살을 칭명하면 됩

니다.



이때 시간이 지날수록 일심불란의 상태가 무너져 마음이 도망가기

쉬운데, 눈 앞에 염불하는 불보살이 계시다고 관상염불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귀의, 참회, 발원의 염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번뇌망상이 자연히 사라져 마침내 염불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염불선을 통해 염불삼매를 얻어 보살과를 이룬 다음, 부처님의 무량

광을 보고 자기 불신을 얻는 더욱 더 어려운 공부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큰스님의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

법은 미증유의 염불 수행법으로서 불과를 증할 수 있는 불교사적

으로 유일무이한 수행법이라는 점, 그리고 부작용이 적고 부처님의 가

피와 위신력을 받는 수행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티베트 명상 수행법에는 고요한 집중 속으로 들어가는 사마

타 명상과 삶을 통찰하고 호흡을 관하는 위빠사나 명상

이 있으며, 여기에 추가하여 다양한 분석 명상으로서 공성을 깨

닫거나,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거나,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거나, 무상함

을 깨닫거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적개심을 없애거나, 사랑의 기운을

복돋거나, 나쁜 기운을 없애는 명상들이 존재한다.



또한 관상명상으로서 빛으로 된 몸을 관상하거나 내면을 정화

하는 관상을 하거나 금강살타 또는 관세음보살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

을 관상하거나 내면의 불을 일으키는 명상들이 있다.  또한 인도의 박

티(헌신) 요가에서 전승된 헌신의 명상과 기도 명상 등이 있다.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은 이러한 티베트 명상 수행법을 거의 모

두 아우른다.  즉, 우선 석가모니부처님의 성상의 양미간을 관함으

로써 한 지점을 향한 집중 명상을 통해 사마타 명상에 진입할

수 있다.  그리고 마실가는 마음(중생심)에게 금강반야바라밀을 주고 그

중생심을 청정심과 분리하여 관찰 염함으로써 기본적인 위빠사나 명

상의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성상에서 빛이 나거나 수행자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성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받는 신비 체험을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몸과 내면의 죄업

과 업장을 소멸하게 된다.  티베트의 빛의 정화 명상을 별도로 할 필요

가 없다는 것이다.



성상을 응시함으로써 관상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관상염이

이루어지게 된다.  칭명염불 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면 결국 내면의 눈

으로 자신의 몸을 응시하면 자신의 몸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님이 와

서 자신의 몸을 장식하고 계신다는 만다라 명상을 얻게 되기도 한다.

물론 만다라 명상을 올바르게 체득하기 위해서는 견성을 하고 아

라한과를 지나가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부처님의 성상에서 방광하는 빛은 수행자의 모든 악한 요소, 악

한 죄업 등을 씻어 주신다.  즉, 인생의 소중함을 인식시켜 주고, 죽음

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주며, 무상감을 꺠닫게 해주고, 고통에서 벗어나

게 해주며, 적개심을 없애주고, 사랑의 기운을 복돋아주며, 나쁜 탐

진  치 기운을  제거해 주신다.






현지사 칭명염불 수행법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은 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할 수만 있다면

윤회를 벗어나 극락 정토까지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信), 간절히

바라고(願), 이루어지도록 염불 수행을 해야 한다.



구체적인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1.  칭명염불 하기 전 후 부처님께 3배를 올린다.

2.  먼저 정좌한 눈높이에서 1 ~ 2m 앞 벽에 작은 점을 찍어 둔다.

3.  벽을 바라보고 눈은 편하게 한 점을 응시한다.

4.  반가부좌 상태에서 편안하게 가슴에 합장을 하고 손끝이 하늘로

향하게 한다.

5.  입으로는 염불을 하고, 눈은 한 점을 응시한다.

6.  이때 시간이 지날수록 일심불란의 상태가 무너져 마음이 도망가

기 쉬운데 눈 앞에 부처님(빛의 존재)이 계신다고 관상(觀想)하면서

그 도망가는 마음을 공부시키기 위해 마음 속으로 귀의, 참회, 발

원의 염을 일으킨다.



* 망상이 계속 들어올 때는 망상이 오거나 말거나 상관치 말고 자

기가 찾는 부처님을 일심봉청으로 찾아 들어간다.



석가모니불 염불

((금강경))을 1번 읽은 후

비로자나총구진언 을 5번, 15번, 25번, 55번, 108번 일고(여건 따라)

입으로는 석가모니불을 찾으면서

마음(생각) 속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염한다



아미타불 염불

<<아미타불삼부경>> 중 하나의 경전을 선택하여 1번 읽은 후

아미타불 무량겁멸죄진언'을 108번 읽고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을 찾으면서

마음(생각) 속으로는 무량겁멸죄진언 '옴 모니모니 새야모니 사바하'를

염한다.



관세음보살 염불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을 1번 읽은 후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108번 읽고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을 찾으면서

마음<생각> 속으로는 멸업장진언인 '옴 아로늑계 사바하'를 염한다.



지장보살 염불(집안에 영가로 인한 장애가 있는 신도들에게 권함)

<<지장보살본원경>>이나 또는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지장보살

예찬문>>을 1번 읽은 후

'츰부다라니'를 49번이나 108번 읽고

입으로는 '지장보살'을 찾으면서

마음(생각) 속으로 멸정업진언인 '옴 바라 마니다니 사바하'를 염한다.



염불은 공부할 때뿐만 아니라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부처님을 언제,

어디서나 마음 속으로 계속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삼계의 왕, 남섬부주 대교주, 최초 불) 석가모니 부처님

공부,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해 말씀드린다.





1.  먼저 3배 드리고, 자기의 주소와 생년 드리고 이름을 댄다.

   서울시 은평구 불광1동 대호아파트    동     호에 사는 경술생 ㅇ ㅇ ㅇ

입니다.





2.  발원을 한다.



부처님 저 ㅇㅇㅇ  은

금생이 다하고 다음 생이 다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이 목숨, 이 마

음 다 바쳐 오직 석가모니부처님과 과거 현재 미래에 불과를 증한

삼천대천세계에 계시는 붓다님들께만 귀의 귀명하겠나이다.



부처님 저 ㅇ ㅇ ㅇ  은

금생에도 전생에도 다겁 생을 내려오는 동안 신 구 의 삼업으로

지은 죄가 태산같습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참회하나이다.



부처님 저는 정법을 만나고 큰스님을 만나 기어이 윤회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리 인도하소서.



3.  독송을 한다.

  <<금강경>> 1편 봉독



4.  비로자나총귀진언을 1번, 5번, 25번, 55번, 108번을 한다.



나무시방삼세 일체제불

나무시방삼세 일체존법

나무시방삼세 일체보살

나무시방삼세일체현성



오호지리 바라지리 리제미제기사은제지 바라타니 옴 불나지리익 오공

사진사 타해 바라달마 사타해 아라봐좌나 원각승좌도진나 사공사진사타

해 나무항상사 아승지불 무량삼매 보문삼매 옴 바마나사타바 탁타니아

나 나무아심타 아심타 자심도류 사바하 나무 옴 아밀리 다다바베 사바하

나무 이바이바제 구아구아제 다라니제 니하라제 비니마니제 사바하





5.  석가모니불 정근을 30분 내지 1시간 간절히 한다.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구원실성

석가모니불................(정근)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 고아일심귀명정례





이와 같이 하되, 되도록 비로자나총귀진언을 25번 또는 55번, 108번

씩 많이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석가모니불 정근은 최소한 30분을 하

는 것이 좋다.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큰스

님에게 가르쳐 주신 수행법으로서 현지궁 칭명염불 수행으로 확실히

보살과를 이루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근본경전(아함부 경전), <<지장

보살본원경>> (제9 칭불명호품), ((법화경))(본문 팔품) 등을 교학적 근거로

한다.  대승경전인 <<금강경>>을 읽고 입으로 석가모니불을 칭명하고,

뜻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부르도록 한다.  금강반야바라밀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을 내기 때문이다.



억겁을 내려오면서 지은 지중한 죄업장을 씻고 다생의 부모의 은혜

를 갚고 빙의된 영가를 뗄 수 있는 효를 다하는 천도대재(부처님께서 주

관하시는)를 반드시 모신 후에 삼계 왕 남섬부주 대교주 붓다 중의 붓다

최초 불이신 석가모니부처님 앞에서 과거 생의 잘못을 참회하고 목숨

바쳐 귀의 귀명할 것을 다짐 다짐하고 불과 이룰 때까지 항상 붓다

회상을 만나기를 발원하고 음계와 중계 십선도(十善道)를 지키면서 석가

모니불 칭명염불 수행을 잘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중생 구제하는 보살

행을 하면서 말이다. 






다양한 염불 수행법 중에서
칭명염불 수행이 주가 된다


염불의 염은 억념, 작의 등의 의식 작용을 의미하며 생각

과 음성이 결합되어 일념이 되어야 염불삼매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염불은 부처님의 존재를 믿음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할 경우 부처님

께서 억겁 동안 내려온 지중한 업장을 소멸시켜 주고 부처님의 광염으

로 자신의 불성, 자성, 본래 면목을 밝히게 된다.  물론 참회하고 부처

님을 찬탄하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이 절절히 흘러야 한다.



염불은 타력 수행을 지향하며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수행이 쉽

고 성불하기 쉬운 수행법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도 쉽고 수행하기도

쉽다고 하는 타력염불의 종지, 즉 이왕이수의 행법이다.



그리고 극락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보리심을 발하고 십선을

닦아야 하며 팔정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



또한 염불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신, 원, 행을 구비해야 한

다.  수행의 기본은 뭐라고 해도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다.  부처님께서

절대 법계에 여여히 무아삼매로 그리고 극락정토에 보살들을 제도하시

고 계심을 믿고 그리고 자신도 불과를 증하여 부처님 나라에 태어나고

보살과를 증하여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바램을 세우고 실천

행으로서 염불을 해야 할 것이다.



신,  원,  행은 삼자량으로서 먼 길을 가는데 비축하는 자재

와 양식과 같으며 이것이 없으면 수행이라는 긴 도정을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또한 믿음 돈독해 지면 바램이 생겨나고 바램이

굳건해지면 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삼자량은 상호 연관성을 지

니고 있다.



여기서 믿음은 무엇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실히 아주 절실히 믿

고 의지하여 부처님 법을 자신의 몸과 같이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선행을 갖추어야 자신의 본래 고향인 근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만

행이 구족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선행은 이타행으로

연결되며 보살도를 이룬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민의 마음으로서 대비

심을 내야 한다.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제거해 주려는 마음 그

것이 바로 보살심이다.



구도자에게는 보리심, 즉 불도의 최상승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을 얻고 그 무상정등정각으로써 널리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이 필요한데 이 또한 염불 수행의 기초가 된다.



부처님께서도 <<대집대처공장보살소문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

신다.  "선남자야, 일체 법성은 오직 허공과 같아 보살심의 종자를 삼는

다.  닦은바 복은 모두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보리심에

대한 대표적인 가르침이 다음의 사홍서원에 잘 새겨져 있다.



맹세코 모든 중생을 구하리라.

맹세코 모든 번뇌를 끊으리라.

맹세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리라.

맹세코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리라.



경전에는 이렇게 전한다.  "선남자야, 보살이 처음 발심하고 나서 선

법을 닦아 쌓으며, 많은 법문을 듣고 사유하여 법계를 관찰하며

초심을 깨끗이 하라.  처음 마음이 이미 깨끗하면 다 모든 부처님과 보

살들이 공경하는 생각을 지으며 곧 정인삼매를 획득할 것이

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수행의 일반 과정을 자세히 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보리심과 발심을 내야 한다.  그 후 모든 선행을 닦아 만행을

구족해야 하며 법계를 관찰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럼으로써 삼매

를 얻는다.  보리심은 모든 불교 공부의 기본이다.  따라서 염불 수행을

할 때도 부처님의 거룩하신 법을 배우고 자신도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한 깨끗한 마음을 내야하며 중생들의 아품을 함께 나누고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거름이 될 때 그 곳에 깨달음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염불 수행은 보리심을 기반으로 하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공경 그

리고 찬탄 더 나아가 발원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추가하여 <<관무

량수경>>에서 극락 왕생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복을 닦을

것을 권하고 있다.



첫째, 부모이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지성으로 열 가지 선업을 닦는 것이다.



둘째, 삼보에 귀의하여 여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행동과 예의

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 보리심을 일으켜 깊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

며 한편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힘써 포교하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복에는 유루복과 무루복이 있다고 하셨

다.  유루복은 쓰면 다하는 복으로서 인간적인 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르복은 부처님을 믿고 염불 수행하는 등의 부처님을 위한 공부에 힘

써서 얻은 복이다.



염불 수행은 단순히 입으로 부처님과 보살님의 명호를 염송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반 사항을 갖추고 또한 많은 휼륭한 마음 자

세를 구비해야 한다.  많은 염불 수행자들은 염불 수행을 열심히 하지

만 제대로 공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이

다.  토굴에서 30년 수행을 해도 하늘 나라밖에 못 가는 스님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아 할 것이다.



보리심, 신,  원,  행,  스승 존경, 효도, 십선, 삼보에 귀의.

귀명, 계율 준수, 인과법에 대한 믿은, 대승경전 독송, 포교 등 다양한

복덕이 갖추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도한 염불 수행과 함께 십념에 대해서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다음의 경전 내용을 살펴보자.



"그때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께서 아미타불의 공덕

이익을 말씀하시면서, 만일 십념을 끊어지지 않게 계속해 그 부처

님을 생각하면 곧 왕생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

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범부의 생각이 아니요  나쁜 생각이

아니며 잡된 번뇌의 생각이 아니니, 만일 그런 생각을 두루 갖추면 곧

안양 국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무릇 십념이 있으니 그 십념이란 이른바



첫재는 모든 중생에 대해 항상 인자한 마음을 내고 모즌 중생에

대해 그 행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니 말일 그 행을 비방하면 끝내 왕생

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켜 해칠 생각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보호할 마음을 일으켜 신명

을 아끼지 않고 일체의 법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인욕하는 가운데서 결정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신심이 청정하여 이양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는 일체종지의 마음을 내어서 날마다 늘 생각하면서

잊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아만을 버리고 겸손한 말을 쓰는 것이며,



여덟째는 세속 이야기에 맛을 붙이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각의를 가까이 하여 갖가지 선근의 인연을 깊이 일으키고

시끄럽고 산란한 마음을 멀리 떠나는 것이며,



열째는 바른 생각으로 부처님을 관하면서 모든 감관을 제어하는 것이다."



한편, 염불 수행은 다음의 <<능엄경>>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해

야 할 것이다.  <<능엄경>>에 보면 대세지법왕자가 그 동료 오십이 보

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다음과 같이 이뢰었

다고 한다.



"저는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항하사 겁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시니

이름이 무량광이시며 일부 부처님이 일 겁 동안 계속하여 나셨는데,

그 최후 부처님이 이름이 초일월광이시라.  그 부처님께서 염불

삼매를 가르치시되 '마치 한 사람은 전심으로 생각하니, 한 사람은 전

심으로 잊기만 하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나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간절하면 이 생에서 저 생에 또 저 생에 이르도록 몸에 그림자 따르듯

이 서로 어긋나지 아니 하느니라.



시방 여럐께서중생 생각하시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 하거니와

만일 자식이 도망하여 가면 생각한들 무엇하랴.  자식이 어미 생각하기

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이 하면 어미와 자식이 세세생생 서로 어긋

나지 아니하리라.  만일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염하면 이 생에서나 혹은 저 생에서 결정코 부처님을 뵈올

것이며 부처님과 서로 멀지 아니하여 방편을 쓰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

이 열리는 것이, 마치 향기를 쏘이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배는 것 같

으리니 이것이 향광장엄이니라'하시더이다.



저는 본래 인행 때에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 법인을 얻었고 지금도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인도하여 서방정토로 가게하나이다.  부

처님이 원통을 물으시니 저의 경험으로는 이것 저것을 가리지 말고 육

근을 모두 가져다가 항상 염불하되 깨끗한 생각이 서로 계속되어 삼매

를 얻는 것이 제일이 되겠나이다."



여기서 보듯 부처님과 세세생생 인연을 맺고 부처님을 어머니로 그

리고 자신을 자녀로 생각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일심불란으로 집지

하면 언젠가는 부처님의 극락세계에 가게 됨을 설명해 주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염불선은 오직 하근기만이 닦는 수행법이라고 비난하

여서 그렇지 않음을 여기서는 말하고자 한다.  실제로 육조 혜능 대사

도 염불선을 중시했다고 전한다.  다음의 전문은 육조 혜능 대사의

이야기이다.



옛적에 한 사람이 육조대사에게 묻기를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나이까?"



그 물음에 육조대사 답하기를

일구,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이

만세의 괴로움을 뛰어 나는 묘도요,

불을 이루고 조사가 되는 정인이요,

삼계 인천의 안목이요,

마음을 밝히고 성을 보느

혜등이요, 지옥을 깨뜨리는 맹장이요,

많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베는 보검이요,



오천대자의 골수요,

팔만총지의 중요한 길이요,

흑암을 여의는 명등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양방이요, 고해를 건너는 배요,

삼계를 뛰어넘는 지름길이요,

최존 최상의 묘문이며 무량무변의 공덕이니라.



이 일구, 나무아미타불을 기억하여

염념이 항상 나타나고,

시시로 마음에 떠나지 아니하며,

일이 없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고,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안락할 때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병고가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살았을 때에도 이렇게 염불하고,

죽어서도 이렇게 염불하여,

이와 같이 일념이 분명하면

또 무엇을 다시 남에게 물어서 갈 길을 찾으랴.



이른바 오직 아미타불 지니고 다른 생각 없으면

손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극락 가리라."



물론, 나무아미타불 염불로서는 극락 왕생까지는 가도 불신을 얻지

는 못하는 것으로 안다.  다만 석가모니부처님을 염불할 경우에는 불신

까지 얻는다고 알고 있다.



앞의 혜능 조사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육조 혜능 대사께서도

염불선을 중요시하였고 결코 하근기가 하는 수행법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주의해서 들어야 할 것이다.



사실, 어느 수행법은 상근기가 어는 수행법은 하근기가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본다.  다 적성과 체질에 맞추어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큰스님께서 설해주신 칭명염불 수행법은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 상

관없이 모두 할 수 있는 안전하고 부작용이 없는 그리고 부처님의 가

피를 받는 수행법이라는 점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현지사의

칭염염불 수행법에 대해서 소개한다.






수승한 공덕의 염불 수행법


염불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부처님의 상호, 즉

그 모습을 마음으로 관찰 관상하면서 그 공덕을 기리는 일"

이라고 한다.



염불과 비교해서 다라니가 있는데 다라니의 사전적 의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요로서,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을 뜻한다.  원어명은 dharanl라고 한다.  또한 백과

사전에 의한 설명으로는 "비교적 긴 장구로 되어 있는 주문으로

총지  능지  능차라 번역하며 불법을 마음 속에 간

직하여 잊지 않게 하는 힘이다."



다라니들 중에서 좀 더 짧은 다라니인 진언, 즉 만트라에 대

해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 서원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신주

주  신주  밀주  밀언   등으로도 번역한다."  본 단원에서는 염불수행과

관련 제반 내용을 집중 조망할 것이다.

먼저, 석가모니불 칭명염불 그 효시, 즉 염불 수행의 원류를 교

학적 근거에 기초하여 논구하고자 한다.



첫째, <<잡아함경>>에 "바사닉왕이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

무여래응정등각' 하니......"라고 되어있으며 둘째, <<중일아함경>>에는

"부처님의 명호, 여래  지진등정각  선서   세간해 ..... 등 여러 가지 명

호를 부르면...., 이 공덕에 의해 두려움이 소멸되고, 신통을 얻고....

죽으면 천상에 난다."라고 되어 있다.



셋째, <<중일아함경>> <억념품>에는 "1.  거닐 때도,  2.  머무를 때도,

3.  앉아 있을 때도,  4.  누워 있을 때도,  5.  항상 어디서나 부처님을 억

념하라."고 되어있으며 넷째, <<대방편보은경>>에는 "석존의 제자 한

사람이 '나무석가모니불'을 부르게 하자, 5백 명의 도둑 신체의 고통이

제거됐다."라고 되어 있다.



다섯째로 <<여환삼마지무량인법문경>>에는 "'나무석가모니불' 부르는

것에 의해, 선근이 증장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과가 있다"고 하

였다.  그리고 여섯째, 부처님은 <<증일아함경>>에서, 모든 비구들에게

수행의 한 법을 염불이라고 설했다.  즉,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

르시기를 마땅히 한 법을 수행하고, 마땅히 한 법을 널리 펴라, 큰 과

보를 이루며, 모든 선이 널리 이르게 되고, 감로의 맛을 얻어 무위

처에 이르며, 문득 신통을 이루어,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제거하

여 아라한과를 얻어, 열반에 이른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고 하

는가?  이른바 염불이다."고 하셨다.



이는 염불하는 공덕에 의해서 무위처에 이르고 신통을 얻어

열반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한 것은 불교의 수행 중에서도 염불이 중요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관무량수경>>에서는 "부처

님께서 위제희 부인에게 16관을 .........."이라고 전한다.



한편, 정토종의 염불 수행인 나무아니타불 칭명염불에 대해서 설명

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정토종은, 서방 극락정토가 분명하게 존

제하고 염불의 목적이 왕생 극락정토에 있음을 주장한다.



아미타불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대승경전 전체의 1/4 정도에 해

당하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다.  정토사상의 발생과 <<정

토삼부경>>의 성립 연대는 불입멸 후 대승불교가 발생할 무렵

어느 대승인 학장에 의해 이루어졌으리라.



그러나 신앙의 근원은 석가모니불 제세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정토신앙은 인도의용수(불멸 후 6~7백년 경), 세친 보살에 의해

서 그 골격을 잡았고, 중국으로 전래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의 진나라 때 혜원(육경에 통달, 노장에도 밝았다), 불타발타라

후위의 담란, 수의 지자 대사, 당의 선도 화상, 도작 스님에 의해

서 염불 수행은 크게 진작되었다.



특히 도작 스님은 하루에 칠만 번씩 염불하였다.  규봉 종밀 스님은

염불법을 칭명염불, 관상(觀想)염불, 관상(觀像)염불, 실상염불로

구분하였다.



염불 수행이 선종과 결합하여 염불선이 대두되었는데 염

불선의 효시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종에서 수용하는 정토

는 내생이 아닌 지금 현세에서 도달한다는 것이고, 타력에 의한 성취

가 아니라 자력에 의한 자각이란 점을 들고 있다.



그래서 정토란 곧 자기 마음의 청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심 정토

의 사상은, 정토의 개념을 선에서 수용하여 선정일여의 염불선을 표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선종에서 정토를 일심에서 통함, 선정일여의 염불선을 언급한

것은 사조 도신스님의 <<밉도안심요방편법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말 나옹 혜근 선사(태고 보우와 더불어 고려말의 선품을 진작

한 대선사)의 염불선을 음미해 본다.



아미타불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붙들고서 간절히 잊지 않는다면

염불하는 일념은 일념마저 끊어진 무념처에 도달하여

육근문에 항상 자마금색 광명을 놓으리.



나옹 스님은 자성미타인 유심 정토를 설하고 있다.



또한 참구염불선이 있는데 이는 염불을 참구한다.  즉 지금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것이다.  당대에는 서방 정토를 유심 정토로

해석해서 선과 정토가 이념적으로 통합되었고, 송대에는 법안 문익, 영

명 연수 스님이 염불선을 주창했으며, 원대에는 남송시대에 발전

한 간화선의 영향을 받아 염불과 화두 공안이 방법적으로 융합되어 임

제종의 몽산 덕이, 중본 명본 스님 등이 있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