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7일 화요일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3]






미증유의 성서로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아! 만현 큰스님, 21세기 불교 수행 문화의 신지평을 여시다


머리글

금세기 유례 없이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세계 열강의 세력 속에서 국운의 성패와 흥망을 놓고 쟁패(爭覇)를 벌이는 암운(暗雲)의 그림자 아래, 한국의 수많은 영혼들이 긴장하고 방황하고 있다. 아니 세계적으로 불안과 공포가 끊이지 않으며 종교적 갈등의 골이 심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어떤한 해법의 실마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명실상부한 최고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에서도 미래에 대한 정확한 방향타를 설정하지 못하는 불제자들이 많이 있다. 불교 수행자들은 바야흐로 더 절실하고 시급히 구원의 손길을 찾아야 할 때가 도래했다.

그 구원의 손길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2500년 전 영상 당시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불세존(佛世尊)의 가르침을 회고하고 되새겨 봐야한다. 그러나 지금 부처님의 존엄한 말씀과 거룩하신 가르침을 되살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 버렸다. 따라서 그 시절 그 장소에서 친히 설하신 가르침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친견해서 들어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불제자들로서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불제자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원시불교를 온고지신(溫故知新)하여 바로 21세기에 맞는 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적 원형(元型)이요 정수(精髓)를 증득하는 것이다. 아! 정녕 그 누가 21세기에 맞는 불교의 가르침을 근본불교를 살려서 온고지신하고 일신(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하여 자세히 밝힐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여기에 한 분의 성스러운 큰스님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자재통왕불이신 만현 큰스님이시다. 그 거룩하고 희유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지극히 순수한 가르침과 청정한 친설(親說)을 토대로 만현 큰스님께서<<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친술하셨다. 이 진경(眞經)을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그 누가 이토록 읽는 이로 하여금 시종일관 법열(法悅) 속에 있도록 강렬한 어조와 지고한 경지에서 글을 써내려 갈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부처님의 그 위대하신 가르침의 맥을 이어받고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분이 영산 당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시다. 영산 당시의 아난존자께서 다시 와 부처님의 법을 세상에 펴니 그 서막이 바로<<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인 것이다.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

오늘날 수행자들이 구가(謳歌)하는 정신세계는 견성(見性), 즉 깨달음이다. 하지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수행자의 한계, 즉 견성을 초월하여 아라한, 보살, 붓다를 거론한다. 지극히 장엄(莊嚴)한 세계가 견성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극명하고도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까지 어느 누가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존재의 계층적 도식(Hierarchy Schema)과 붓다의 삼신설(三身說) 그리고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의 중요성을 이렇게 큰스님처럼 명료하게 서술하였던가?

우리 불제자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기존 선 불교를 건전한 시각에서 올바른 비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불제자들은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즉, 큰스님께서 선 불교가 100%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선 불교의 세계를 환골탈태시켜 더욱 고원하고도 지고하게 확장시키려는 각골쇄신(刻骨碎身)과 혼연(渾然)의 노력들을 엿 볼 수 있다.

선 불교는 엄연히 한국 불교의 수행적 토양을 다지는데 좋든 나쁘든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 모든 불제자들은 이 점을 명각(明覺)해야 한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볼 때 그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선 불교가 주장하는 견성, 깨달음(Elightenment),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모두 아라한을 한계점으로 갖는다. 큰스님 말씀대로 인간으로서 견성을 하여 보림 후 아라한에 이르는 것만도 엄청난 일이며 참으로 힘든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 불교의 이러한 아라한까지의 깨달음에 의해서 근본불교 당시 석가모니부처님의 삼신설 체계가 가리워지고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알리기 위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출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령 큰스님께서 단순히 선 불교의 폐단만을 비평하기 위해서 성작(聖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친술 하셨겠는가?


올바른 지견과 식견을 구비하여 큰스님의 서적과 법문을 대면한 불제자라면 큰스님의 심오한 대의(大意)를 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선 불교의 한계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선 불교를 근본불교에 기초하여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큰 스님의 염원에서 쓰여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힌두교의 범아일여 사상과 서양의 유대신비주의 인 그노시즘(Gnosticism 靈智主義)의 최종 목표와도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카발라에서는 아인 소프(Ayin Soph 히브리어로 무한이라는 뜻)로, 타로체계에서는 우아일체(宇我一體)로,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로, 그노시즘에서는 영지(靈智 Gnosis)로서 알려져 있다. 도가(道家)에서도 노자(老子)는 도가 수행 세계의 종지(宗指)를 현묘지도(玄妙之道)로 거론하고 있다. 현묘함이란 바로 불가(佛家)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비슷한 맥락을 한다. 따라서 전 세계의 수행문화가 20세기까지 그 최종 목적을 아라한 정도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시대는 급변하고 전 세계에는 아쿼리안(Aquarius)문명을 맞이하여 뉴에이지 열풍에 명상수행에 요가, 단전호흡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세태 속에는 세계 구도자들의 보다 큰 소식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관통하고 있다.

또한 견성의 수준으로는 생사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으며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거나 정립할 수 없다. 즉, 선 불교만이 한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영성문화와 종교 수행 체계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상에서 가장 심오한 수행체계이자 광대무한(廣大無限)한 철학사상을 함유하고 있다. 한편 지구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불교 박해와 탄압이 외부적이거나 묵시적으로 행해져 왔었다. 그러한 박해와 탄압의 어려운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너무 고차원적인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는 어쩌면 단순히 아라한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교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나름대로 일조를 했다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결국 선 불교는 불교의 맥(脈)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역할을 잘 이행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자각(自覺)의 눈을 크게 뜨고 오늘날의 위기에 몰린 불교를 복원시키고 중흥을 도모해야 할 때가 왔다. 불제자들 간에 너무 음계(淫戒)가 무시되고 막행막식으로 수행을 하는 경향이 불가에 만연해 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를 차마 그대로 방관할 수 없는 큰스님께서 친히<<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리라.

재차 강조하는바 선 불교는 강직한 행동과 난해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어려운 시절과 고비를 잘 넘겨왔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매우 높이 보이도록 했으며 불교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여러 형태로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잘못된 것은 아니니라, 진리(Truth)는 사실은 사실이라고 말할 때 증득된다.

즉 선 불교가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온 그동안의 공과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선 불교의 화두(話頭)와 공안(Koan)이라는 어휘는 전 지구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통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큰 스님께서는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선 불교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할 시기라고 사자후하신 것임을 명각(明覺)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저 유명한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고 말이다. 이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지니는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 설파하신 대로 “산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산에서 내려다본 정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일수록 크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사람만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수행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종교명상수행세계에 있어서 가장 높고 궁극적 경지라고 하는 붓다위에 이르셨다는 사실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어본 이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께서 증험한 최상승 경지에서 불교의 수행체계와 사상체계의 숭고(崇高)하고 광오(廣澳)한 면을 여실히 밝히셨다.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

그렇다면 큰스님께서 어떻게 이러한 지고(至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다름 아닌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에 있다 하겠다.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 할 수만 있다면 윤회를 벗어나 극락정토까지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信),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願), 그 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염불선(行)을 해 나가야 합니다.”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마음으로 자상하게 설파하신 가르침이 아니랴! 큰 스님께서는 단언하시길 염불선 수행을 잘하면 극락정토까지 왕생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지복의 법문인가? 그리고 명료하게 신(信), 원(願), 행(行)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계신다. 이러한 요긴한 가르침을 서양의 노하우 – 전승(Knowhow –Lone) 용어를 빌리자면 구도자들에게는 수행팁(Tip 비법또는 비결)이라고 부른다. 고대로부터 구전심수(口傳心授)되어지는 가르침들은 대부분 수행팁에 속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곳곳에 불제자가 수행하는데 필요한 요긴한 수행팁들을 소상히 드러내 놓으셨다. 눈밝고 지혜로운 이라면 이러한 수행팁들을 잘 간파하고 그 의미를 해득할 수 있으리라.

큰스님의 염불선 수행팁과 가르침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신다. “진여실상을 관하면서 염불하는 실상염불이나 부처님 상호의 공덕장엄을 관하면서 염불하는 관상염불은 좋습니다. 그러나 보다 좋은 것은 고성으로 칭명하는 염불입니다.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염불을 권하는 것입니다.”여기 크게 중요하고도 요긴한 수행팁들과 가르침이 있다. 첫째는 실상염불과 관상염불의 차이에 대한 수행팁이다.

둘째는 “고성으로 칭명해야 효과적이다.”라는 수행팁이다. 그리고 “염불선은 부처님이 실재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는 가르침이다. 불제자나 구도자가 수행을 할 때 선전이 없고 발전이 없는 것은 수행팁과 요긴한 가르침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 해득하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하시는 가르침들에는 그냥 맹목적으로 읽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다음의 큰스님 말씀을 살펴보자.

“부처님께서는 <<관무량수경>>에서 ‘극락국에 태어나고자 하면 마땅히 부모를 효양하고 스승께 봉사하며, 10선도를 닦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정업의 기본입니다.”

이 말씀에는 극락국에 태어나기 위한 요건이 상술되어 있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스승을 잘 모시고, 십선도, 즉 열 가지 선함(살생, 도둑질 ,사음, 망어, 양설, 악구, 기어, 탐욕, 분노 사견을 멀리 여의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실재(Reality)의 양대 축인 이데아적이고 형이상학적 법설과 형이하학적이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잘 조화시킨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큰스님의 성서(聖書)<<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불제자가 지향해야 할 뚜렷한 비전(Vision)을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제시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 궁행(實踐躬行)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명료하고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의 구절은 더욱 실재적이다. “길 잃은 자식이 어머니를 찾듯 간절히 아미타불을 부르며 사십시오. 반드시 좋은 일이 있습니다. 큰 액운도 비켜가고, 죽을 때 잠자듯 편히 갈 수 있으며 최소한 하늘 천상에 날 수 있습니다.”이 말씀의 요체는 간절하고 간절하게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는 가르침이다. 간절하다는 것은 지극히 부처님을 숭상하고 존재계의 상위존재자들 앞에서 하심(下心)을 지니라는 것이다. 존재계의 윗분들을 존숭함으로서 겸손과 겸허의 미덕을 수양하고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포용력을 갖는 것이 수행자의 도리임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이 얼마나 보편타당하고 진지한 가르침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의 구절은 정말 지극 정성으로 치열하게 수행하는 불제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가르침이 함의되어 있다. “삼매에 든다면 여기서부터 성자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삼매에 들수록,더 깊은 삼매에 들어갈수록 청정이 더해지고 지혜가 증장되며 삼매력이 생겨 죽음을 마음대로 하고 윤회에서 벗어납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역시 만현 큰스님이 친히 뼈저린 고행정진으로 실증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말씀은 감히 체험에서 우러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무릇 수행자들은 삼매에 대해서 너무 희박하게 알고 있다. 삼매에 대한 서양 영성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로 단순히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깨어있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으며 어떤 현상이 전개되는 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큰스님께서는 삼매라는 주제를 통해서 성자가 되고 청정과 지혜가 더 증장되며 더 나아가 생사에 자유자재하며 윤회를 벗어난다고 하셨다. 이것이 진실로 삼매의 힘(功 power)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삼매를 얻어야 하며 삼매를 얻으면 어떤 소식을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구도자들에게는 사실 묘연했다.

또한 여기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자유자재로 마음 속의 내가 독자적으로 말을 잘 하는 정도가 되면 이제 생각을 하나로 모아 한 점 속을 뚫어 가십시오. 염불삼매로 들어갑니다.” 이 말씀은 큰스님께서 친히 증험하신 바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염불삼매로 증입해 가는 과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 한 점 속을 뚫어 가라.”는 가르침이라고 본다.

인도의 요가 체계에서는 빈두(Bindu)라는 말이 있다. 빈두란 점(點)이란 뜻이다. 의식이 빈두로 투사되어 빈두가 세계를 현현시킨다는 가르침이 있다. 아마 필자가 알기에 이는 점을 뚫고 지나가면 결국 새로운 세계로서의 삼매에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염불선은 그 이후에도 붓다에 도달하기까지 무수한 단계를 밟아가며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세계로 진입해 나간다고 하신다.

한편 큰스님께서는 실제로 염불선 수행을 통해서 수많은 큰 스님들이 배출되었다고 말씀하신다. 다음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원문을 인용해 보자. “인도의 마명, 용수, 무착, 세친, 중국의 혜원, 선도, 천태, 청량, 영명, 신라의 원효, 의상, 서산, 기화, 일본의 법연, 친란 등 대선사들을 포함한 당대의 큰스님들도 염불 수행을 최선의 공부법으로 권장하고 고취시켰습니다. 물론 자기들 스스로도 정토업(염불공부)에 매진한 분들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역대 큰스님들을 열거하시면서 실제적으로 염불선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셨다. 심오한 증험을 통해 붓다의 반열에 오르시고 불교사상과 전세계 수행문화에 박학다식하신 큰스님의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염불선이 왜 중요하며 왜 가치가 있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여실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붓다의 삼심설(三身說)

한편 큰스님께서는 염불선 뿐만 아니라 붓다의 삼신설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 설해 주셨다. 붓다의 삼실설은 그동안 승가(僧家)에서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최고의 비결(秘訣)이라 할 수있다.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사자후 하신다. “붓다를 이룬이는 법, 보, 화 삼신을 구족해서 평등적인 무아 속 절대세계와 차별적 중생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라 밝힙니다.” 이는 인류 최대의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최근 컴퓨터 시스템은 3계층 구조로 구축되어진다. 3계층은 바로 3단계로 처리(프로세스)가 이루어 진다는 뜻이다. 이 3계층 컴퓨터 시스템은 서양철학에 의하면 플라톤의 이데아( 여기서는 붓다의 삼신)를 모사(模寫)한 시뮬라크로(Simulacra)에 해당한다.

즉, 부처님의 법신을 근간으로 보신이 있고 보신을 배경으로 응화신을 나툰다는 점은 인류 최대의 이기(利器)인 컴퓨터 문명의 핵심 프레임워크(뼈대)로서 3계층 컴퓨터 시스템에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어찌 지고한 붓다의 삼신을 현상계의 단지 하나의 미물(微物)인 컴퓨터 시스템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다만 포괄적 이해를 위해서 이데아가 바로 붓다의 삼신이라면 이 이데아를 모사한 시뮬라크르가 바로 3계층 컴퓨터 시스템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강조하는 바 이러한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실재의 복사는 아니다. 다만 불가의 고승(高僧)께서 “삼라만상이 설법을 한다.”는 이치를 올바르게 해득한다면 이 이치가 삼천대천세계의 핵심 메타포(Metaphor)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만현 큰스님께서는 삼신설은 인도의 무착, 천친 큰스님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하셨다. 그 다음으로는 <<보성론>>의 삼신을 들 수 있다고 하시며 여기서는 불신, 곧 원만보신은 무량광, 즉 억종광, 백종오색광, 열반광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맞다고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금광명최승왕경>> 제 二권 3<분별삼신품>, 용수의 삼신관(三身觀), 인도의 마명과 용수(주저<<대지도론>>) 큰 스님과 몇몇 중관의 논사들 그리고 유가행(瑜伽行)학파 기타 논서(가령 무착<<섭대승론>>, 견해 <<보성론>>)등 붓다의 삼신설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역대 불가의 최고의 큰스님들과 그 분들의 주저(主著)를 모두 꿰뚫어 보시는 탁월한 안목과 식견을 겸비하셨다는 점에 필자는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큰스님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신을 얻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며 사바세계에 한 분의 붓다가 나오려면 삼계왕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주로 선근 보따리가 붓다 되기에 충분한 수행승이 낙점됩니다. 선택된 이가 바로 상품상의 보살입니다. “이 얼마나 자세한 말씀인가? 큰스님이 자상하게 밝히신 붓다의 삼신설 내용들은 어느 하나하나 경천동지(驚天動地)가 아닌 사자후가 없다.


여기에 큰스님은 연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수행승은 공부 중에 무량광을 봅니다. 그런 다음 또 하나의 큰 관문을 거쳐서 자기를 찾아온 많은 부처님들을 뵙고 직접 법문을 듣게 됩니다. 거룩하신 부처님들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지도 받는 것입니다. 보다 자주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붓다로서의 공부를 마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심도 있게 정신계를 공부하거나 정신계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구족한 수행자 또는 구도자라면, 물론 그러한 구도자가 지구상에 드물지마는 여타의 종교와 영성세계를 수행한 구도자건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할 내용이다. 왜냐하면 서양의 신지학(神智學) 등에서도 모든 수행이 정신계의 스승으로부터 공부를 배워야 진실된 공부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수행자들 간에 회자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큰스님의 말씀을 살펴보자.

“불과를 이룬 이의 4개의영체는 각기 독립해서 분리하여 활동합니다. 바람과도 같이 이거짓몸뚱이서 빠져 나와서 말입니다. 죽을 때는 4개의 영체가 자기 불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자기 불신과 하나로 계합합니다. ‘지복의 몸’과 하나가 됩니다. 그 불신(원만보신)은 무아 속 절대세계, 즉 상적광토에 청접법신 을 둡니다. 자기의 법신, 곧 ‘우주적인 몸’을 둡니다. 이제 우주 자체(시공을 자체화함)인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큰스님께서 생사(生死)의 과정(Process)과 흐름 속에서 우리의 영혼체가 어떻게 변전(變傳)하는 지를 여실지견으로 파악하고 계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개의 영체에 대한 설명은 힌두의 수행체계에서 취하신 것이나 원래 근본불교에서 전해져왔는데 어느 순간 누실되었다고 하신다. 이 4개의 영체에 대한 이론은 신지학에서도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 세계에는 불신으로서 원만보신이 그리고 무아 속 절대세계인 상적광토 (연화장세계)에는 청정법신을 둔다는 것은 가히 큰스님이 친히 증험한 붓다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그누가 할 수 있는 말이겠는가?

큰스님께서 하신 다음의 가르침을 해석해 보자. “사실은 부처님의 법신이야말로 진불(眞佛)입니다. 거래도 없고 머묾도 없습니다. 법계를 비추는 대지의 광명체로서 초월이요, 평등입니다. 초월적 인격적 실존이신 보신의 근본이 되어 이미 인격이 아닙니다. 대우주아입니다. “여기서는 석가모니부처 님의 법신이 우주적인 몸으로서의 법신이며 진불임을 소상하게 밝히셨다.

여기서 우리는 법계를 비추는 대지의 광명체로서 초월적이고 평등적인 법신과 인격적 실존으로서 보신을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극명한 설명인가? 어느 누가 붓다의 삼신설에 이렇게 자세하게 증험(證驗)적 차원에서 서술 할 수 있을까? 수행의 진검승부는 바로 고강한 내공으로 얼마나 고난이도의 승탑(僧搭)을 쌓느냐, 즉 자신의 내면에 최고의 경지를 구축하고 완성하느냐에 있다 하겠다.

더 나아가서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밝히신다. “붓다 세계에 계신 불신이 보신입니다. 보신은 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의 법신을 둡니다. 그래서 법신은 보신과 화신의 근본체입니다.” 이제 법신과 보신의 관계는 자명해 졌다. 법신이 체라면 보신은 용이며 보신이 체라면 화신은 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가에서 진부하게 거론되고 있던 체용철학(體用哲學)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찬탄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대한 설명을 큰스님은 보다 간명하고 확실하게 적고 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이 언제나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전 우주적인 몸뚱이’가 그의 본질적인 성품입니다. 대우주이시며 절대와 동일한 변조 광명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로서 모든 붓다들의 청정법신을 총섭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거룩하고 희유한 사자후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선근을 지닌 모든 불제자라면 부처님에 대한 신심(信心)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고 발심(發心)을 내어 수행정진하게 해주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추가로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언제나 온 법계를 두루 비추고 계십니다.”라고. 우리는 왜 시방세계와 삼천대천세계에 부처님이 두루 상주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의미를 이제야 보다 실재적으로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 다음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글을 원용해 본다. “ 그 렇듯 붓다님들은 빛으로 일체처 일체시에 아니 계신 곳 없기 때문에 법신 개념에서 볼 때 천수천안이 문제가 아니며 가고 오고하는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무소종래이며 역무소거입니다. 삼천대천세계 우주 자체가 바로 붓다의 몸입니다.” 참으로 희유한 가르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구절 ‘ 삼천대천세계 우주 자체가 바로 붓다의 몸’이라는 내용은 붓다의 삼신설의 백미(白眉)요 압권(壓卷)이다. 이 말씀에는 불제자가 만약 붓다를 이룬다면 진실되고 완벽하게 우주와 계합된 우주대아(宇宙大我)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

필자는 유(儒), 불(佛), 선(仙), 주역(周易), 천부경(天符經)그리고 카발라(Kabbalah), 그노시즘(Gnosticism 영지주의), 타로(Tarot), 신지학(神智學) 등의 각종 신부주의(Occultism)에서부터 스토아 학파,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훗설, 하이데거, 야스퍼스, 샤르트르, 화이트헤드 등 미약하나마 동서고금의 철학, 외계문명 등의 서적 들을 두루 공부하고 나름대로 수행분야의 선지식(善知識)들을 친견해 봤지만 진실로 알곡이 되는 가르침은 그렇게 많이 대면하지 못했다.

책 한 권에서 한 가지 가르침만 증득하여도 그 책은 책의 가치를 다 한 것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붓다를 이루신 대선지식 만현 큰스님과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그 어느 선지식이나 책과는 다르다. 큰스님의 가르침 하나가 일파만파(一波萬波)확장되어 필자가 알고 있던 가르침을 합종시키고 체계화하였으며 새로운 가르침들을 배태하고 잉태시켰다.

또한 이 진경(眞經)에는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는 가르침이 현란하고 황홀하게 펼쳐져 있으며 모두 주옥 같은 가르침들이다. 이런 말하면 안 되지만 정말 남 주기에 아까운 가르침들로 가득 수놓아져 있다. 특히 붓다의 삼실설과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은 그 어느 종교명상 수행서적에서도 대면하기 어려운 지극히 희유한 내용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희유하고 거룩한 성서(聖書)로서 전대 미문의 미증유 설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불제자들은 만현 큰스님의 대자대비함에 지극한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다. 금세기 한국 불교계 더 나아가 전 세계 불교계에 기여한 만현 큰스님의 업적은 불교의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불제자로서 앞으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제 2부의 탄생을 고대한다. 끝으로 펜을 놓으며 만현 큰스님께서 힘든 사바세계에 오셔서 지극히 심원한 불가(佛家)의 정수를 펼쳐 보이시 데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오체투지한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나는 이와 같이 보았다


“無量光 發見”–시대를 초월한 성서

*송도현(송주복) 님은 西江大 史學科를 나와 20여 년 간 礪山書塾을 운영하였으며 國史編纂委員會 草書史料科程 2年 을 마쳤고 成均館大 大學院 漢文學科 碩士를 거쳐 礪山漢學研究所長 으로 있으며, << 朱子書當은 글을 어떻게 배웠나 >>(淸溪) 등의 著書가 있다.


차례

I서론


1. 著述의 動機 6 천도와 효

2. 천도의 문제 1)문제의 출발

3. 간화선 실체 2)천도의 목적

4. 論考의 方向 3)천도의 기원

5. 마무리 말 * 천도재주관자격


* 천도재절차의미

* 천도재비용문제


Ⅱ 본론

1. 問題의 提起 4) 薦度와 鬼神

2. 宣布의 意味 5) 薦度와 孝道

3. 붓다의 존재 *佛家의 孝
4. 三身說 意味 *儒家의 孝

5. 無量光 發見


1) 話頭打破頌 Ⅲ 결론
2) 寂靜三昧頌





I서론


1. 著述의 動機

한 인물에 대한 탐구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사상 문제를 더듬으려고 한다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필자가 큰스님을 알게 된 시점은 불과 한 해 전의 일이다. 그러나 필자가 자재 만현 큰스님에 대하여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스님께서 지금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의문되는 점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과, 실로 방대한 자료의 불경(佛經)이지만 그 사상을 가장 핵심적인 언어로 아주 간결하게 담아내는 큰스님과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신도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커다란 장점이었다. 만약 이러한 자료가 없었다면 논고에 필요한 정보만을 수집하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필자가 큰스님과의 인연을 맺은 것은 불교TV를 통하여 큰스님 법문을 듣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지난 겨울 불교TV는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해명 없이 갑자기 큰스님 법문만을 중단하였다. 이 때 필자는 법문 내용을 판단하는 것은 시청자들의 고유한 몫이니 이미 방송된 내용을 불교TV 자체로 시비를 판단하여 좌지우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뜻을 불교TV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서 전하였다. 더구나 사전에 아무런 해명 한 마디 없이 갑자기 중단하는 것은 시청자를 우롱하는 처사임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다 첨언하였던 내용은 정(正)과 사(邪)가 혼재된 우리 이 시대는 진정한 메시아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해명은 오리무중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불교의 역사를 위해서도 공개적으로 해명하고 넘어가야 한다. 필자는 그저 들어앉아 공부를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어디에 나서는 것은 싫어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눈감고 싶지 않았다.

필자가 본 당시 불교TV 무상사는 큰스님 법문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입추의 여지없이 꽉 매워지고 있었다. 이것은 동원된 인원이 아니라, 전국 불자들 스스로 큰스님 법문을 직접듣고 업장 소멸을 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큰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필자가 아는 바로는 당시 현지사 신도 수로는 그런 수치에 절대 이를 수 없었다.

이것은 엄청난 법력이 아니고서는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자금 문제 등으로 침체되어 있던 불교TV도 모처럼 활기차 보였고 뭔가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스님 법문의 방송이 중단되자 필자를 비롯한 시청자들은 매우 의아해 하였던 것이다.

‘판단은 시청자의 고유한 몫’이라는 것은 새삼스런 말이 아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공기의 방송에서 어떤 특정한 프로그램이 중단될 수는 없을 것이다. 급기야는 전국 사찰 내의 서점에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판매 금지가 되었다. 이 조직적인 공작에도 최근 들어 이 저서 만큼 불교서적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책은 없었다.

이것은 세상이 그만큼 정법을 알리는 메시아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왜 방송이 중단되었는지, 왜 판매가 금지되었는지, 누구도 떳떳하게 나서서 그 이유를 설명한 사람은 있지 않다.

지금까지 공식채널을 통해서 해명이 없는 걸로 보면 그 원인은 법문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위기 의식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그동안 간화선을 추구한 문중들이 아무런 비판의 여과없이 자생해 오다 일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화두 타파 이후의 수행 문제에 대해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있긴 뭐가 있어’하다가 철퇴를 얻어맞은 셈이다.

둘째, 불교는 어느 종교보다 계행이 생명이다. 그 가운데 지키기 어려운 것이 색(色)과 식(食)이다. 이른바 사대생불(四大生佛)의 한 분으로 알려진 틱낫한 스님이 대중을 상대하는 법석에서 언제나 빼놓지 않는 단골메뉴가 바로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청정 도량이라 할 수 있는 곳은 아마 다섯 손가락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멸의경(滅義經>>1) 은 비록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라 하지만 현재 불가의 타락한 모습을 설함에 있어 이 보다 앞서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지금 우리나라 불교 모습을 내다보고 기술한 것이 틀림없다. 마치 뎃생과도 같다. 너무도 닮은 꼴이다. 이런 모습의 불교가 뼈를 깎는 자성의 성찰 없이는 큰스님의 통렬한 사자후(獅子吼)2)를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10회에 걸친 큰스님 법문의 요지는 21세기에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할 수 있는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3) 이었다.

그간 간화선(看話禪)4)에 찌든 여느 선사들과는 감히 비교될 수 없는 ‘대원의 경지’였다. 이러한 수행기는 붓다 입멸 후 처음으로 나온 것이라 실로 충격적일 수도 있다.

석가 세존이 실제로 존재하며 천만의 모든 사항을 관장하신다는 말씀이나, 오늘날 간화선 수행 방법으로는 윤회조차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씀이나, 불가사상은 공을 철견하여 진공묘유 전과정5)을 거쳐 무아 속 절대세계의 불과(佛果)를 이루는데 그 목적이 있지만 그 근저에는 효(孝)가 있으니 선망의 부모 영가를 천도시켜 주라는 말씀이나,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부처님 위신력을 빌려 지옥의 영가를 천도할 수 있다는 말씀이나, 출가 승려들은 많지만 청정한 도량은 없다는 말씀 등은 기존의 교단을 뿌리째 뒤흔드는, 그야말로 산천초목까지 덜덜 떨게 하는 사자후(獅子吼)였다.

그동안 많은 선사들이 법장(法杖)을 들고 나와 전파를 탔지만 큰스님의 그 위엄은 아마도 불교TV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을것이다. 지금까지 출현한 선사들 대부분이 아라한과6)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위용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인터넷에서는 불교 TV 방영을 계기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가장 큰 이슈는 뭐니뭐니 해도 큰스님께서 제안하신 칭명염불과 천도재였다. 이 방송분을 필자는 어느 부분보다 잘 기억하고 있다.

세계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인류의 보편의 가치관을 띠고 있는 ‘효사상’을 제창 하셨기 때문이었다. 이 효의 가치관에 대해서는 오늘날 어떤 철인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큰스님께서 이것을 불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앞서 천도제를 주재(主宰)할 수 있는 자격과 효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물론 이 고리들이 얽혀지는 것은 본론에서 자세하게 검토할 것이다. 당시 방송된 그 내용의 일부를 정리하면 이렇다.
“부처님은 실제로 존재하십니다. 무량광으로 존재하시는데 투명한 그 빛은 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불자 여러분은 업장을 소멸해야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데, 칭명염불(稱名念佛)7)을 권해드립니다. (∙∙∙∙∙∙∙∙∙중략) 관광도 보내시고 좋은 옷도 사드리고 맛있는 것도 해드리세요. 그러나 이런 것은 작은 효도일 뿐이며 큰 효도는 아닙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기르기 위해서 어떤 허물도 감수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착(着)들 때문에 육도(六道)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큰 효도는 영가를 천도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실재로 존재합니다. 그 고통스러움을 여러분들에게 차마 말씀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너무 고통스런 곳이 많습니다. 또 정명을 하지 못한 경우는 대체로 무주고혼8)으로 허공을 떠돌게 됩니다. 그런데 불과를 증득하신 큰스님만이 지옥의 영가를 건져 낼 수 있습니다.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이 계신다고 하면 그곳에 가서 조상을 천도해 드리세요.”

이 대목에서 천도의 자격을 논하신 것은 기존 교단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나라 간화선의 위세 앞에 누구도 주눅 드는 현실이고 보면 칭명염불의 수행법이야말로 일대파란을 예고하는 소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간화선은 문중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서로 그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맥 또한 매우 애매모호하고, 경지 또한 확실하지도 않다.

이러한 구도에서 대각을 하였다는 선사들끼리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나는 어디까지 이르렀고 상대는 어느 경지까지 갔다’ 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면, 후인들은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대원의 경지를 의심받지 않으려면 자신의 전생과 내생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우스갯소리로도 알려진 바가 없다. 솔직하게 말해서 필자의 견해로는 그런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일겁에 붓다 한 분이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방송에서 천도재 문제가 거론되자 인터넷에서도 현지사 천도재가 도마 위에 올랐고 이것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현지사를 옹호하는 사람들 간에 각각 사이트를 만들어 논쟁이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언사로 순전히 비방만을 일삼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논쟁이라기 보다는 순전히 비방을 일삼기 위한 비방이었다.

남의 사찰 재의식 비용을 갖고 따지는 것은 정말 유치한 짓일 뿐이다. 필자가 현지사 천도재를 직접 살펴본 바로는 칭명염불의 수행법이 여기에 근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럼에도 자재 만현 큰스님 자신이 스스로 이런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시지 않고 뒤로 감추어 버리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이다.

불교는 이런 사항을 흔히 밀장(密藏)의 범주로 말한다. 사실 큰스님 법문을 자세히 들어 보면 제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우회 하시는 부분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필자가 불교TV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릴 적에도 시간을 갖고 좀 더 지켜본 뒤에 논쟁을 하는 것도 늦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때부터 현지사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큰스님 법문 테이프를 모으고 현지사 신도들의 인연을 찾아 정보를 수집하고 큰스님 저서를 탐독하였다. 물론 현지사 행사가 있다고 하면 직접 탐방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지를 살펴보았다. 물론 필자의 성격은 매우 긍정적이어서 처음부터 문제를 부정으로 보지는 않는다.

큰스님께서 21세기 인류에게 던지는 화두는 바로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 이었다. 그 사상의 가장 핵심은 수행의 방법론에 있는데, 왜 여기에 ‘천도재’가 개입되어야 하고 21세기를 이끌 사상의 하나로 평가되는 ‘효(孝)’가 개입되어야 하느냐는 점이다. 효는 민족과 종교를 초월하여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사상이다. 이 논고가 노린 것은 이 문제의 연결 고리를 밝히는 일이다.


각주 해석
1) 석가세존 께서 말법시대를 말씀하셨다는 경인데, 불교의 타락상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음. 新修大藏經
바람

2) 佛敎用語

1. 涅槃經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적에 온 세상을 진동시키는 것이 마치 사자가 울부짖으면 모든 동물들이 두려워 엎드리는 것과 같은 까닭으로 사자후라 한다.

2). 維摩經 佛國品- 演法無畏 猶如獅子獅
부처님께서는 두려움 없이 법을 설하심이 마치 사자가 같았다.
3). 이 빛은 그냥 일반적인 빛이 아니라 불과를 증득한 붓다만이 얻을 수 있는 무량광을 말한다. 석가 세존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은 이 빛을 의미하는 것이다.

4) 간화선 - (話)란 화두의 준 말이며, 화두란 고칙(古則) 공안(公案)의 첫마디를 화두 하나로 해결하면 차례로 다음 화두를 들어 그것을 해결하며, 철저한 큰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선풍을 말한다. 묵조선(默照禪)이라는 평을 받은 조동종(曹洞宗)선풍에 대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이 그것이다. 송(宋)나라 때 조동종의 굉지 정각(宏智 正覺)이 묵조선을 표방하고 나오자, 임제종의 대혜 종고(大慧宗杲)일파가 그것을 비난하면서 화두를 참구(參究)함으로써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5)성중 하늘 도솔정토 천녀정토 극락 27품 약사정토 27품의 경지를 의미한.

6)이것은 金剛經에 나온 용어로 수행의 단계를 말하는데, 佛果를 증득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아래 단계 해당하는 것이다.

7) 자재 만현 큰스님이 새롭게 주창하시는 염불의 일종인데, 부처님들의 불호를 입으로 크게 외우면서 마음을 모아 정진하는 수행법이다. 그 가운데서 '석가모니불'을 표적으로 염송하는 것을 제안하신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현지사 홈페이지에 나온다.

8) 無主孤魂 자손이나 모셔 줄 사람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혼령





천도제문제

인터넷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거리가 되었던 분야가 바로 천도재였다. 이것은 사실 일의 수순이 뒤바뀐 것이다. 일을 추진하는 데는 그 선후가 있다. 진정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으면 큰스님 정신세계를 갖고 따져 물었어야 한다. 만약 불과를 증득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행위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바로 금기사항에 들어간다. 그 업보는 너무도 지중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릴 수가 없었다면 왜 그렇게 되는 지에 대하여 좀 더 세부적인 점검을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수순의 절차를 무시한 채 마치 모든 것을 검증한 것 처럼 몰아세웠다. 지금도 필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그렇게 많은 불교 지식으로 자신의 의식 속에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비추어 보았다면 분명 투영된 뭔가를 발견하였을 터인데도 그런 언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필자하고 불교TV 게시판에서 논쟁을 벌였던 분들은 필자보다 훨씬 많은 불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인연의 소치인지는 모른다.

비용의 많고 적음을 입에 담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일 뿐이다. 비용은 정성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마음 그릇을 갖고 어디에다 판을 벌려 시비를 일삼는 것은 그 시비 자체를 유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다 못해 조그만 물건을 사는 데도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업(業)이란 다른 말로 바꾸면 결국은 빚에 불과한 것이다. 얽히고 설킨 것 자체가 빚이 아니었다면 바로 공하였을 것이다. 수 없는 과거 생을 스치고 지나갈 적에 그냥 무아였다면, 이 생에서도 얽힌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본래 면목을 찾고자 할 적에 그 장애가 나타나 대가를 지불해 달라는 것이다. 비용의 문제는 좀 더 깊이 본론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가장 무서운 빚은 그 가운데서도 바로 ‘빙의(憑依)’이다.

지난 봄 춘천 법석에서 큰스님께서 “그 당사자와 얽힌 영가를 불러와야 하는데 허공에 떠있는 영가들은 어딘가로 숨어 버리면 지장보살님의 능력으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능력만이 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툭 튀어나오는 순간 성중들이 잡아옵니다.” 라고 하신 것을 필자가 들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천도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이 문제되는 것이다. 영가를 수색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지난 해 불교TV 법문 때 큰스님께서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사기행위입니다.” 라고 준엄하게 법장을 내리치셨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대목과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가 무간지옥에 빠져있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결국은 부처님 신통으로 천도 된 일을 묶어서 생각해 보면, 천도라는 것은 본래부터 붓다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큰스님께서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 이 말을 쉽게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이다. 필자가 현지사의 천도재를 살펴본 바로는 영산 시절의 목련존자 어머니 천도와 그 절차나 의식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 천도재 문제는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던 부분이므로 본론에서 필자의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려고 한다.

자재 만현 큰스님을 탐구함에 있어 큰스님께서 제창한 칭명염불의 실천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천도재에 있다. 이것을 단순하게 기존의 재의식의 하나로만 바라볼 경우 현지사의 칭명염불의 수준 또한 기존의 염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현지사의 수행 과정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결론에 이르게 된 동기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감을 .”잡았고, 불교TV를 비롯한 여타의 자리에서 설하신 테이프 등을 통해서 그렇게 결론을 맺어도 큰무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그동안 간화선이나 염불등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수행을 일삼은 체험자들의 입담을 통해서 마무리하였지만, 다시 한 번 사실 확인을 위하여 큰스님을 친견하는 자리에서 “불교사상을 연구해 보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것인데········.” 라는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재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천도재와 효의 함수관계는 누구라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 불가와 유가가 개입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이미 천도재에 대해서는 송대(宋代)나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유생(儒生)을 자처하는 자들일지라도 다수가 공유하였던 것이므로 굳이 사족을 붙여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효’라는 것은 동양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로서 자리매김되어 온 보편적인 가치관일 뿐이다. 중국 유가에서 효를 거론하며 마치 유가의 고유한 사상의 근저인 것처럼 포장해서 도가나 불가 등을 싸잡아 공격한 것은 분명 억지이다.

가치관이란 것은 어떤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또는 시대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고정된 어떤 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폭을 상실한 것이므로 보편적인 가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가(儒家)에서 인(仁)을 구하는 문제나 불가(佛家)에서 자성(自性)을 찾는 과정에무엇 때문에 굳이 조상을 끌어들여 효를 논해야 되느냐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첨예하게 대립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 논쟁에서도 이미 제기된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모두가 선으로 받아들인 인(仁)이란 것을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방법론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양자가 아니면 묵자한테 간다. 10) 라고 맹자가 한탄하였던 것은 유가의설자리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러나 그 이후 양묵의 세는 사라지고 유가의 사상은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심성에 뿌리를 둔 유가의 보편성에 있었던 것이다. 인의 실천은 자신을 기준해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친친인야(親親仁也)’ 11) 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가의 한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보는 것까지는 그 인식에 있어서 씨앗을 거두었지만, 그 이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다. 이것은 경지의 한계이므로 누구를 탓할 일은 절대 아니다.





간화선 실체
지금 우리나라 불교는 조사선(祖師禪)이 주도하고 있다. 이것을 일명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는데, 그 정통성을 따져보면 사실 족보가 없다. 교단 안에서조차도 그 핏줄이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정법 수행과 코드가 맞는 것도 아니다. 각각 문중마다 그 맥을 짜 맞추어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간화선이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한국 불교를 대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화두 탐구로 공을 타파한 이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무아 속 절대세계로 들어가기 전후의 수행록을 제시해야 하는데, 간화선을 추구한 수행자 가운데 그런 대원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있긴 뭐가 있어’, 보림을 잘 해야지’ 이 정도의 법거량이 오고갈 뿐 확실하고도 명확한 지표를 제시하지 못한다. 때만 되면 ○○대회니 이름 붙여 수행자들을 불러모아 자파 문중(自派門中)의 위상을 높인다고 하지만 오고가는 언어를 살펴보면 며칠만 연습해도 누구든 따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장난일 뿐 어떤 경지의 의미를 함축한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아라한과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공의 현상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일 뿐이다.

그들이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근본 원인은 스스로 말한 것을 스스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병마를 여의기 위해서 수행을 일삼았다고 말하고, 그 수행자들은 생전에 스스로 어느 경지에 이른 것처럼 뉘앙스를 풍겼지만, 그들이 법석에서 말한 그 병마의 덫에 스스로 걸렸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어느 한 두 수행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면 표본을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금생에서 큰 공을 쌓아 내생에서 일어날 업장까지 차생에서 받는 사례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이미 대중 앞에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르렀다는 경지가 문제이든지 아니면 스스로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마침내 실존의 붓다의 세계를 부정하고 육도윤회를 부정하며 무애(無碍)를 들어서 걸림 없이 행하는 것을 마치 묘유(妙有)인양 그행위를 포장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성숙된 사회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한갓 만행일 뿐이다.

필자는 연전에 학인들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물론 취화선이 담아낸 한국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소감을 피력한 것이지만, “경허선사의 행적을 영상에 담아 ‘무상의 도리’를 유럽에 소개한다면 그 보다 더 나은 우리 문화의 소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면서도 필자의 뇌리 한편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극과 극을 달리는 그의 만행 모두가 공을 설명하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구렁이가 가슴에 똬리를 튼 상태에서도 정진하는 그 모습은 더 없는 두타행 이었지만 유부녀를 희롱하는 행위까지 과연 공의 도리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대선지식을 독대하는 자리면 이것을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금년 7월 하순 경, 큰스님을 뵌 자리에서 큰스님께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이후 그런일을 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수행자가 공을 타파하면 천상에서 그 때부터 특별 관리하게 되는데 음행은 그 그릇을 깨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소상히 법을 설하여 주셨지만 지면이라 차마 싣지 못함을 독자들이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큰스님 저서 곳곳에서 이미 언급된 사항이다.

그리고 만행 가운데 가장 용서될 수 없는 일은 실존의 붓다를 부정하는 것인데 이 과보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진정 매혹적인 말이다. 자존을 한껏 세워주는 이 말이야말로 정말 귀에 와 닿는다. 그러나 이 말이 달콤한 만큼 무서운 독소가 들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바로 부처는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수행자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부처로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순일 뿐이다.

자존(自尊)은 비록 수행자가 아닐지라도 누구라도 갖고 싶어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수행에 있어서는 몽땅 버리고 가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만행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자존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생각이 결국은 자기 이외에 누구도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셈이다.

그들 앞에서 교학(敎學)을 수행으로 삼거나 독송(讀誦)을 소임으로 삼는 수행자들은 근기가 매우 천박한 자들로 낙인찍혀 언제나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점, 그동안 간화선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친 것인지, 지금 철저히 반성하여도 늦지 않다. 붓다와 경전을 무시가 아니라 멸시하게 한 점, 이것은 분명 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역사적인 사건은 한 단락만을 요구한다. 그동안 무량광을 채험한 수행자가 없었기 때문에 몰라서 저지른 행위로 용서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밝혀진 상황에서 과거의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을 역사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 로마 교황청은 십자군 전쟁 등에 대해서 ‘만행’이었음을 정식으로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지금 간화선이 이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때이다.






論考의方向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목적은 과거의 경험에서 얻어진 잣대로 현실을 꾸려가는 지렛대를 삼아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예측하고자 함이다. 공자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한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온고’는 과거를 배운다는 뜻이고 ‘지신’은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다.

이말이 이른바 여타의 예언과 다른 것은 과거의 경험에서 얻어진 합리성을 갖고 다수의 선을 추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약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불가의 핵심사상에 오버랩 시켜서 그 원형과 일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참이 아니다.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등의 사상은 대승의 진수라고 하는 사실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비추어보면 참과 거짓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불교 TV를 통하여 10회분의 큰스님 법문이 나가자 큰스님 경지에 대한 찬반의 논란이 인터넷에서 일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마장(魔障)에서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저서가 이미 앞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면 아래에서 논란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 가운데는 큰 스님 저서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어서 얼토당토 않게 자기의 시각만으로 비판을 일삼는 사람도 있었고, 저서나 법문 내용과 는 전혀 상관없는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또 검증을 하기 위한 선의의 비판도 있었다.

필자가 이 텍스트 분석을 근간으로 자재 만현 큰스님을 조명해 보려고 하는 것은 ‘선의의 비판’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있다. 전혀 근거될 수 없는 사실을 들먹여 ‘대원의 경지’를 폄훼하는 것은 논리의 비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저서를 헐뜯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런 사람들의 비판까지 논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애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견해까지 이 논고의 범주로 삼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둔다.

먼저 큰스님이 무아 속 적정삼매에서 부처님께서 받아 적게 하셨다는 추천사를 분석하여 본론(本論)의 전체 방향을 잡기로 한다. 왜냐하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내용들의 근간을 이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 이상의 범주는 사족일 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추천사는 어느 누가 봐도 사람이 썼다고는 볼 수 없는 글이다. ‘불필(佛筆)’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논리가 깔끔하다. ‘무량광의 발견(無量光 發見)의 반증’은 과연 무엇인지를 더듬어 볼 것이다.

아울러 <<법화경(法華經)>> <기편(授記篇)>의 아난존자의 전후생을 통해서 ‘정법수호’와 부처님, 가섭존자와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이 시대에 갖는 의미를 짚어볼 것이다. 이 부분 또한 상당한 원고가 할애될 것이다. ‘천도와 효’에서는 그동안 문제삼아 비판되었던 문제들을 제기하여 그에 대한 반증을 시도할 것이다. 때문에 천도재의 기원, 목적등이 거론될 것이다. ‘효의 문제’ 에서는 무엇 때문에 천도재와 연관되어야 하는 지를 밝히려고 한다. 그동안 경학을 배워오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유가의 효란 무엇인지를 밝혀 이것이 큰스님께서 제창하시는 천도재와 어떤 함수관계를 갖고 있는 지를 밝혀 보려고 한다.

지나가는 길에 ‘귀신문제(鬼神問題)’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려고 한다. 사실 필자는 주자학파(朱子學派)에서 토론된 귀신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원고를 갖고 있다가 출간 직전에서 그만두고 말았는데, 잠시 그 때 기억을 되살려 언급하려고 한다.

그동안 불가를 연구한 사람들은 붓다의 삼신설(三身說)을 갖고 많은 주장을 하였지만, 그들은 삼신설을 정확하게 설명할 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에 그치고 말았다. 필자 또한 경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해서 큰 스님께 직접 묻고 확인해서 정리하는 수준으로 정리하여,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필자는 20여 년이 넘게 한적(漢籍)의 텍스트를 분석하여 글을 가르친 사람이다. 논리학이 오고가는 송대의 성리학의 자료는 필자도 항상 탐독하는 분야라 어느 정도 사료를 보는 안목은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필자가 근세 들어 처음으로 강독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번역하고 해설을 단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일부 자료가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에 의해서 세미나가 열린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을 말한 수행자는 영산 이후 현지사 광명 만덕, 자재만현 두 큰스님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없다. 때문에 두 분의 수행일지는 그 어떤 자료보다도 소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석가 세존의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을 증명해 준 수행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래서 이 자료가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세상에 던지는 화두는 실로 엄청난 사실들이다.

불교사상의 깊이야 어떤 철학자든 인정하는 사실이다. 우주의 신관체계는 종교마다 각각 나름대로 그 체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선악의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며, 모든 체계를 한 자리에 모아 그 서열을 정한 것은 있지 않다. 있다고 해도 수평적인 구조에서 논한 것이며 수직관계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결론 부분에서는 큰스님의 메시지에 위상과 저술의 의미 등을 정리하여 이 논고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 본론
1. 問題의 提起

저서를 추천하는 일은 대체로 저자와 인연이 있는 주변 인물의 몫이다. 때론 신분의 겪을 떠난 파격적인 예외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그추천부터 첨단의 과학문명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글은 3천여 년 전 영산 당시의 석가 세존께서 자재만현의 삼매를 통하여 그 의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비스러울 것도,더 나아가 이상할 것도 전혀 없다. 그렇게 인식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정신문명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다. 현상의 불가사의 한 일들을 모두 과학의 잣대로만 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우주 속에는 너무나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추천서를 갖고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바의 ‘문제의 제기’로 삼는 것은 이 글이 자재 만현 큰스님의 저서<<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 그 이유의 하나이고 다음으로 이 저서의 모든 내용은 석가 세존의 법설로부터 단 한 걸음도 떻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만현 큰스님 속명인 이형범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석가 세존이다. 이 저술의 제목 밑에 붙은 부제 에서도 저자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자신의 저술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저술의 추천사도 석가 세존께서 쓰셨고, 저술도 석가 세존이 쓰신 것이다. 단지 저자 이형범은 석가 세존께 손을 빌려 드린 것뿐이다. 그러므로 석가 세존께서 이 저서의 내용 파악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하고 계시다는 점이 필자로 하여금 이글을 분석케 한 것이다.

이 글을 뜯어서 보면 크게 세 대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대목은 이 저서의 주인공에 대한 위상을 ‘선포’하는 것이고, 둘째 대목은 이 저서의 내용을 ‘사실 증명’ 하는 것이며, 셋째 대목은 ‘수행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나머지 마지막 부분은 부연 설명으로 당부하는 대목이다.

이 글의 진위 여부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텍스트가 가장 문제삼고 있는 것은 선포의 내용과 그리고 이른바 인격신(人格神)으로서 붓다의 존재, 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논란이 되었던 삼신설(三身說). 간화선(看話禪)에서 부정되고 있는 윤회설, 지금까지 혼란에 빠져 있는 화두 타파 이후의 수행 단계의 문제,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천도재 문제이다.
이 텍스트에서 부처님께서는 ‘효(孝)’로 말씀하신다. 아마도 이 문제는 붓다 자신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이므로 각론의 몫은 자재 만현 큰스님께 맡겨 두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은 장문에 속하지만 엑기스로 추출할 경우 ‘믿음’과 그 ‘내용들’일 뿐이다.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 ‘믿음’ 부분에서 정법을 매개로 한 인연의 관계를 살필 것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붓다의 존재, 삼신설, 천도재로 국한할 것이다 지옥의 존재나 윤회설은 믿고 안 믿고의 생각을 사이에 둔 문제이므로 논외(論外)로 한다.





5. 마무리 말

그동안 필자가 성리학 자료를 대하면서 늘 벽에 부딪치곤 하였던 문제들이 참으로 많았다. 이를테면 주자와 그 제자들이 귀신(鬼神)의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는 논쟁을 하였지만 인식의 수준에 머물러 그 이상의 기대를 엿볼 수 없게 하였다. 이럴 적에는 참으로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큰스님의 자료는 인문사회 과학이나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동안 의문으로 남았던 문제들에 대한 답을 분명하게 주신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수행의 방법에 대해서 더 이상의 논쟁을 종식시킨 점, 또한 더없이 고마운 자료이다. 이 논고의 근간은 05년 7월 5일 재판된 자료임을 밝혀 둔다. 아울러 천박한 재주로 대원의 경지를 감히 논한다는 것, 그 자체가 더 없는 불경죄임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불교TV 게시판에 내가 이 자료를 분석해서 문제에 답을 하겠다고 공언한 약속, 지키려고 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필자를 각별한 애정으로 살펴 주신 현지사 큰스님들 은혜, 현지사 신도들의 애정에 이 논고로 만 분의 일이라도 대신하였으면 한다.
고려대장경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글씨는 한 본으로 쓰여졌고 한자의 오자도 없다. 한 자를 새길 적마다 삼배의 예를 올렸다고 한다. 불과를 이루는 일, 인간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진이라는 것은 수행을 조금이라도 흉내내보려고 하는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이러한 구도 정신에 내 자신을 빗대보았다.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 일구신 경지의 구도에 억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들여 보았는지를 생각하였다 육신의 안일함은 늘 이를 외면하고 있었고 출판 직전까지 내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필자가 원고에 미련을 두는 것은 좋다. 산고가 있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게으르고 흐트러진 정성으로 이것은 변명할 수는 없다.

다시 후기를 약속한다는 것은 정말 미안한 말이다. 하지만 이생에 내 이 육신이 있는 한 필자가 지금 이 논고에서 말한 사실들을 좀 더 구체화하고 싶다는 것은 말하고 싶다. 이것이 큰스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라고 생각하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2. 宣布의 意味




남섬부주 선남자 선여인에게 전하노라







불세존은


가섭과 아난이


남섬부주 대한민국 따에 왔음을


선포하노라.






영산당시


아난이 다시와


가섭을 보좌해


불과를 이루게 하고,


그 공덕으로


자재통왕불 되었노라.






문수의 법왕자로서


부처님의 법을 전하노리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공덕이 많은


선남자 선여인들은


이 책을 의심 말고 믿을지니라.






이번에


법왕자 자재만현이 펴낸


붓다의 메시지의 내용은


분명한 사실임을


나, 불세존은 증명하노라


불과를 이룬 붓다는


무아 속 절대세계에 여여히 계시느니라






자기 불신을 얻고


법ㆍ보ㆍ화 삼신을 구족한다는


삼신설의 법문


이 모두는 틀림이 없노라.






지옥과 천상이 있고


업보중생이 육도에 윤회생사하느니라.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존재의 근원을 철견해야 하느니라.






이후부터 중요하노니


음계 등 중계를 호지하면서


나 없는 공부 두타행으로 나아가라


그래서 증득하면 성중아라한이니라.






성중이 되면


삼계의 윤회를 벗어나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느니라.






성중들이 다시 몸을 받아와


보살이 되는 공부를 할 때에는


음계를 생명처럼 지켜


이타행하면서 대승경전을 읽고


염불선 되도록 정진하라.


부모님께 효도를 다함으로써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야


보살의 성과를 얻어


정토에 가 나리라.






보살이 붓다 되려면


여러 생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바라밀 수행함으로써


선근보따리를 키울지니라.






불과를 증하면


무량광으로 된


자기의 불신이 생기느니


미래제가 다하도록 멸도하지 않으리라


백천삼매,


대적정삼매를 자유로이 수용해서


삼명 사지 오안 육통 그리고 지혜와 자비


복덕을 구족해 일체에 자재하느니라.


그 우주적인 능력은 무한하여


실로 불가능이란 없노라.






붓다는 빛이라


삼천대천세계에 주변하여


일체처 일체시에 아니 계신 곳 없도다.


가고 옴도 없고 머묾도 없어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도다.


백천만억 화신을 내어


중생을 교화하지만


적정삼매당처를


한걸음도 떠남이 없느니라.






재가의 신도들은 제악막작하고 중선봉행하며
자정기의하라.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하늘이나 인간의 몸을 받도록 하라.






출가하여 수행하는 수행승들은


삼보에 귀의한 승려의 본분을 잊지 말고


청정 무소유로 살도록 하라.


자신을 제어하라.


만일 음계를 범하면


분명히 무간지옥에 떨어지나니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길지니라.






남섬부주 교주 불세존




이 글은 자재 만현 큰스님이 불과를 이루고 붓다의 정법이란 무엇인지를 세상에 전하려고 할 적에 삼매(三昧) 속에서 그 붓다께서 친히 받아쓰게 한 추천서이다. 저자가 제목 부제로 ‘염불삼매 속에서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들었다’라고 밝혔듯이 저술은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가기 전까지 모든 과정은 삼매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삼매 또한 그 종류가 다양하여 무아(無我)의 선정(禪定)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삼매 속에서 붓다를 친견하는 것은 결코 대단한 것도 아니다. 붓다의 유지로 불상이 조성되지 못했던 초기시절 불탑 앞의 정진을 통해서 붓다의 현신(現身)을 경험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이 경험한 것은 화신불(化身佛)이었다.

하지만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 대적정삼매 속에서 붓다를 친견하였다는 것은 그 저술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이와는 분명 다르다. 화신불이 아닌 진신(報身佛)을 만난 것이다. 불과를 증득하고서 붓다를 친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 입멸 후 무량광(無量光)으로 존재하시는 붓다의 보신불(報新佛)을 친견할 수 있었던 보살은 오직 사리불, 수보리, 가섭, 아난의 네 분뿐이었다. 빛(無量光)으로 이루어진 지복(至福)의 인격적인 붓다의 몸이다.

이 글은 추천사라기 보다는 하나의 선포문이다. 육하원칙으로 따져보아도 어디 빈자리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는 완벽한 텍스트이다 이 보다 더 완전하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자료 가운데에 이른바 신필(神筆)이란 것은 많다. 필자도 그런 자료를 많이 갖고 있다. 운율등을 맞추어 쓰여진 것을 보면 모두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 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 속의 내용과 그 속에 흐르는 기(氣)는 다르다.

이 추천사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내용과 견주어서 어디 한 점 부족함이 없고 기(氣) 또한 준엄하다. 그야말로 영산 당시의 사자후(獅子吼)를 느끼게 한다. 흔히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하면 금강경(金剛經)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가 이런 비유와 다른 까닭은 붓다 자신이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기존 아난의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것과 이 저서 부제의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들었다.”는 말의 강도, 또한 이미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의 ‘보고’란 한 마디는 3천 년의 군더더기를 일순에 허물어 이제 더 이상의 위경(僞經)이나 주소(註疏)의 존재를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아난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금세기의 ‘붓다의 추천사’는 ‘매우 준엄한 경고’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텍스트에서 중요한 요소 하나는 이 메시지를 받는 수신자(受信者)의 범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두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일부에 국한된 사람만으로 볼 것인지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불가(佛家)의 사상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으로 나누어져 있고 또한 불보살의 대발원과도 연계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범주 문제는 첨예한 논란을 불러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일종의 선포문으로 볼 경우 귀를 가진 모든 사물이 다 해당한다. 붓다의 위치 또한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아울러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사항은 기존의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불러들이는 오류도 현혹에 불과할 뿐이다.

모두(冒頭)의 단락에 나오는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 공덕이 많은 선남자 선여인들은”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인연(因緣)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헤아릴 수 없는 과거’, ‘선근 공덕이 많다’는 대목도 여기에 견주어 보아야 한다. 서두의 이 말은 마지막 단락의 ‘재가의 신도들;, “출가하여 수행하는 수행승들’이란 용어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미 도출된 셈이다.

금세나 미래제에 메시지를 받을 자는 대단한 선근 공덕자이다. 이 말은 그만큼 정법을 만나 수행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는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역시 공간은 ‘남섬부주’ 대상은 ‘선남자 선여인’이란 것은 이를 밑바탕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인연(因緣)만의 소치로 봐서는 안 된다. 믿고 따르는 자는 모두 선남자 선여인 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승의 큰 수레라는 것은 자기만의 해탈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들이 성현과 차이나는 것은 그 추구가 형이상학(形而上學)에 있음이다. 사실 형이상학의 가치는 ‘믿음’에 있다. ‘믿음’이란 것은 단지 그렇게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그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따지려고 한다면 그 가치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과거로부터 경험한 사실을 갖고 선(善)을 정의한다고 할 적에 그것은 단지 우리 마음 속에 그렇게 받아들이는 지고(至高)한 그 무엇일 뿐이다.

여기에 수학의 잣대나 과학이 실험이 개입하게 되면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장애적인 요소가 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이란 실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논증을 거쳐서 결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인식은 그 믿음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나는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옛 것을 믿고 좋아하여 힘써 구했을 뿐이다. 라고 말한 공자의 형이상학은 한갓 ‘믿음’에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반증하는 말들이 ”나는 기술하되 짓지 않았으며 믿되 옛 것을 좋아하였으니 노팽(老彭)에게 비유될 수 있겠구나!“ 라고 한 것이며, ”두텁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라고 하는 말들이다.

‘믿음’이란 것은 화자와 청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믿음은 현상도 아니고 바로 과거의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믿었던 것이다. 사실 공자의 믿음에는 그의 뼈 속이 시린 아픔이 있었다. 그는 평생동안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가 노년(老年)에 들어 “꿈 속에서 조차도 이제는 주공(周公)을 만날수가 없구나!” 라고 회한하였던 대목은 이 아픔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구도(求道)가 만약 붓다의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을 만날 수 있었다면, 그는 당대에 대원의 경지에 이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옛 것’이란 성현이 남긴 것을 말한다. 하물며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도 못 믿는다면 그것은 인식의 문제도 아니다 사실 이 ‘불신병(不信病)’은 어떤 명의(名醫)도 치유할 수 없는 ‘무지(無知)의 병(病)이다.

정법(正法)이 정법 되고, 정법이 되지 않는 것은 순전히 믿음과 믿지 못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 붓다의 추천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은 ‘정법을 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정법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있음이다. 모두(冒頭)의 ’이 책을 의심말고 믿을지니라‘라는 간곡한 당부는 정법이 수행으로 옮겨 질 적에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말씀인데, 3천년 전의 영산시절(靈山時節)에도 석가 세존은 이 불신벽(不信癖)에 끊임없이 시달리셨고, 그 3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불신벽에 또 다시 시달리신 셈이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이 그야말로 제격이다.

한편 이것을 뒤집어 보면 이 저서의 출현과 동시에 뜨거운 시비의 논쟁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의미도 함 담겨져 있음을 또한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불가의 인연이란 사실 믿음의 소치일 뿐이다. 붓다는 이것을 두고 “헤아릴수 없는 과거로부터 선근공덕”이라 하고,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선근자만이 영체(靈體)가 귀먹지 않는다”고 하신다.

불경 결집(佛經結集)도 여타의 성경(聖經)처럼 탄생부터 이미 그 신화를 안고 있었다. 결집 당시 습기 찬 인도 땅은 인쇄문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구전(口傳)도 달빛을 쏘이면 퇴색하기 마련이다. 도중에 첨가된 논서(論書)나 주석(註釋) 또한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 한 세기 안에서도 그 맥이 제대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만큼 변질되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중간에 첨가된 주석 또한 해석에 따라서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간화선이 그 정통을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라면 영산 당시의 붓다의 정법은 그 빛을 잃게 되어 있다. 하지만 21세기의 첨단문명의 시대는 더 이상 이런 현상을 묵과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대적인 사명감이 이 저술의 동기를 부여한 셈이다. “모든 불경(佛經) 위에다 이 저서를 놓겠다.”고, 만현 큰스님께서 전하는 붓다의 의지는 이 저서의 위상이 무엇인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정(正)은 (邪)처럼 많은 언어로 포장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정곡(正鵠)으로 그 실체(實體)를 드러낼 뿐이다.

이 텍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석가 세존, 문수, 가섭, 아난으로 모두 정법(正法)의 법통(法統)으로 맺어진 사이다. 사실 오늘날 정법이 존재하는 것은 가섭과 아난의 공로이다. 붓다 입멸후 왕사성의 제1차 결집을 주도한 인물은 가섭이었다. 이 때 내몰린 아난을 불러들여 경을 암송케 한 것 또한 가섭이었다. 가섭과 아난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법통을 주고받았다.

지혜(智慧)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의 한 손의 칼은 정법의 수호를 의미한다. 금세기에 불과를 이룬 아난은 문수의 법왕자(法王子)이다. 큰스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문수보살님께서 지혜를 주셨다고 하였다.”그렇다면 정법(正法)은 이 네 붓다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정법은 석가 세존한테서 나왔지만 그것을 지키고 이어가는 몫은 세 붓다의 손에 달려 있음이다. 그 가운데 용사(用事)를 하시는 분은 자재통왕불(自在通王佛)이다.

그렇다면 자재 만현 큰스님의 전생과 정법에 얽힌 일화를 더듬어 보아야 한다. 지난번 인터넷에서 전생문제(前生問題)을 놓고 논쟁을 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은 불가(佛家)의 형이상학(形而上學) 자체를 모르고 하는 것이다. 수행(修行)이란 과거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내는 작업이다. 적정삼매(寂靜三昧)는 무량광의 체험이기도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것이므로 과거ㆍ현재ㆍ미래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인데 전생 이야기쯤은 당연히 그 이전에 나와야 되는 것이다.

큰스님 수기(授記)는 법화경(法華經)에 나온다.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난과 석가 세존의 인연이 매우 깊다는 사실이다. 영산 시절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석가 세존과 아난은 공왕여래(空王如來)를 스승 삼아 수행하던 도반 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석가 세존은 용맹정진의 두타행(頭陀行)을 하셨고 아난은 정법을 하나라도 더 듣고자 하셨던 것이다. ‘아난의 전후생의 수행기’는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 정법(正法)’을 홍보하여 전하는 일로 발원을 삼으신 것이다. 그 보살원도 이 다문(多聞)의 정법홍보(正法弘報), 수호(守護)등인 셈이다.

이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난은 보살들이 깨달음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듣고 기억을 보유하는 자가 되었다.” 라는 붓다의 말씀이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듯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듣는 데도 돌아서면 각각 말이 달라지는 법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놀란 과정에 군더더기가붙게 되고, 게다가 세월 흐르면 어느새 ’정(正)‘과 ’사(邪)‘는 혼돈에 빠져 사가 성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사물에 절목이 있듯이 정법의 관리는 일정한 시기가 되면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그 소임이 바로 아난에게 있음을 이 수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을 헤아려 보면 아난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붓다의 생멸이 다할 때까지 영원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남게 됨을 알 수 있다. 모든 붓다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지만 오직 아난이 이룬 붓다의 수명만이 붓다와 영원함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붓다는 아난이 없으면 ’정법용사(正法用事)를 하시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부처님께서 수기하실 적에 꼭 나오는 사실 가운데 하나가 불호(佛號)를 그 미래불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수기품에서 아난에게 주시는 불호는 단순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산해혜자재통왕여래(山海慧自在通王如來)’는 그의 공덕과 지혜가 산과 바다와 같이 높고 크고, 마음이 자재하여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통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수기품을 살펴보면 아난이 수기를 받을 적에 ‘주변 상황’이 매우 소상하게 기술되고 있다. 굳이 다른 보살이나 성문의 수기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자리를 함께 하였던 2천 명이라고 하는 수행자들이 아난이 불과를이룬 그 한량없는 공으로 모두 과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치 및 가정은 모두 상징적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산 당시 그 인연들이 아난과 함께 불과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타의 보살행과는 그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자신만의 보살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공유하는 공간 폭이 엄청나게 넓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아난의 공덕에 대한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 수기품(授記品)>을 갖고 아난의 불과를 이룰 당시 세속의 그의 보살행을 더듬어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영산의 인연들이 한 자리에 모여들어 아난의 정법기치를 보좌하게 되므로 교단의 세 또한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나게 늘어나서 아난의 ‘명성과 명예도 국경을 넘어 세계 각국으로 떨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불보살의 원력까지도 함께 하므로 사법(邪法)은 하루 아침에 그 뿌리까지 뽑히게 된다.

정법을 전해주고 수호하는 아난의 공덕은 참으로 크다. 이<수기품(授記品)>을 보면 붓다에게도 멸(滅)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아릴 수 없는 수명과 모든 종류의 공덕을 갖춘 여래로 극찬되는 것을 보면, 절대무아(絶對無我)의 세계나 이 현상세계(現像世界)에서의 아난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모든 붓다의 보살행의 발원을 살펴보면 어느 한 분 빼 놓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 한 몸에 모든 기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붓다의 보살행도 마찬가지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아난의 자리가 결코 비어서는 안 된다.

산해혜자재통왕불(山海慧自在通王佛) 성수(聖手)에 쥐어진 칼은 삼천대천세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정법이 흔들려 질서가 깨질 경우 그 혼란이 불러들이는 재앙은 실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계가 아무 탈 없이 하나로 엮여져 돌아가게 하는 데는 그 숨은 보살행(菩薩行)의 대발원(大發願)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광명불(光明佛)의 배후를 생각해야 한다. 배후란 병풍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용(用)에 대한 체(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도 같아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의미한다. 두 분은 붓다 입멸후 이 생까지 삼생(三生)을 같이 하신 인연이다.

맨 먼저 중국에서 태어나 한 생을 같이 하셨고, 다음은 일본에서 그리고 차생은 대한민국 땅에서 함께 하신 것이다. 처음 만나 도반이 되시자고 약속을 하실 적에 ‘부처님 정법을 펴시자’고 하셨다니 이미 각본에 짜여진 지중한 인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추천사에서 석가 세존께서 “가섭을 보좌해 불과를 이루게 하고 그 공덕으로 자재통왕불 되었노라.”라고 밝혔듯이 이것은 필연의 인연임을 암시한다.

사마천은 그의 열전(列傳)에서 사귐의 표본을 들춤에 춘추시절 제(濟)나라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을 거론하였다. 관중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욕심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를 평생토록 변함 없이 지켜준 사람은 포숙이었다. 환공(桓公)이 즉위할 무렵 관중은 그의 이복동생 규(糾)의 편에 섰고 포숙은 환공을 도왔다. 이 때 규는 패전하여 노(魯)나라로 망명하였고 관중은 잡혀서 죽게 되었다. 하지만 포숙은 환공을 설득하여 그를 재상으로 기용케 하였다. 제나라는 관중의 등용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포숙이 마음을 다한 것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둘이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맡았으나 이익금은 관중이 독차지하였다. 그럼에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 여겼다. 함께 전쟁에 나아갔을 적에 관중은 3번이나 도망을 쳤는데도 포숙은 관중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변호하였다. 이와 같이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어 주었다. 훗날 관중은 “나를 낳아 준 자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자는 포숙이었다.”라고 술회하였다.

필자가 이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논리의 전개 과정에 끌어들인 것은 “이 생에서 광명불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또 다시 불과를 이루지 못한 채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지난 봄 춘천법석에서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다. 노자(老子)는 이것을 두고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청중을 숙연케 하셨던 이 말씀은 광명불과의 인연의 소중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 영산 시절의 아난이 금세기에 몸을 나툰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큰스님께서는 자신의 저서에서 광명불과의 인연은 석가 세존의 명이었다고 말씀하시고 그 일화의 소개는 훗날로 미루고 계신다.

사실 일찍이 아난의 그릇을 알아보신 분은 붓다였고, 가섭은 바로 그 마음을 헤아리신 것이다. 가섭은 아난의 도반이자 스승이다. 붓다 입멸 후 출가 수행 오백의 성중이 아난을 물리쳤을 적에 일주문 밖의 아난을 불러들인 보살은 가섭이었다. 붓다에게서 받은 법통을 어느 누구 한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서슴없이 그에게 전수하였던 것도 가섭이었다. 3천 년이 다 되도록 그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큰스님께서 는 자신의 저서에서 광명불이 자신을 이끌어주셨던 몇 가지 법문을 소개하셨다. 큰스님께서 일반대중이 아닌 현지사 신도만을 상대하는 자리면 광명불의 공덕을 빼놓지 않고 설하신다.

광명불을 체(體)로 놓고 자신을 용(用)으로 삼는 것, 또한 언제나 잊지 않으신다.

불과를 이루면 실로 불가능이 없는 능력을 소유하였음에도 스스로는 그런 말을 금구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필자가 지금까지 지켠본 바로는 큰스님 자신은 그냥 정법의 도구일 뿐 그 자신의 존재를 그 자신에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섭을 보좌해 불과를 이루게 하고 그 공으로 자재통왕불 되었노라.”는 붓다의 메시지는 그 이타행(利他行)의 실체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 저술의 시간과 공간의 바탕은 지금까지의 저술 가운데 가장 폭이 큰 자료이다. 세인의 수기(手記)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석가 세존의 수기(授記)를 받아 불과를 증득한다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보살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섭, 아난 두 분 모두 인도의 영산당시 최상수(最上樹)의 보살 경지를 이룬 분들이다. 이 메시지의 시간의 흐름은 3천 년을 그 사이에 둔다. 공간의 폭은 인도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남섬부주의 땅이다. 행여 독자는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 시간과 이 공간의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이 두분의 공과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불법이 가장 타락한 곳이 대한민국 땅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멸의경>>의 내용대로 무계(無戒)를 바탕으로 매불자생(買佛資生)하는 곳은 아마도 대한민국뿐일 것이다. 소승이 주류인 동남아 불교는 제도적으로 엄격한 승려생활을 해야 한다. 대체로 불교를 국교(國敎)롤 신봉하는 국가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엄격한 수행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국민들 또한 그들이 계행을 지킬 수 있도록 안전 장치를 마련해 준다.

사실 우리나라 불교는 재가자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다. 그들 스스로 보신을 위한답시고 계율에 어긋나는 음식들을 만들어 공양하고서 돌아서면 욕을 하는데, 필자는 사실 이러한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동업중생이라 해도 그렇다. 이웃 나라 대만 같은 경우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조차도 수행자를 ‘채식식당’으로 안내하고 그들의 음식을 팔지 않는다고 하는데, 신도 들까지 나서서 그러한 행위를 부추기는 것은 사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도량은 절대 청정해야 한다. 중생이 발원하면 불보살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청정한 도량을 가꾸는 것은 결코 승려들 만의 문제는 아니다. 재가자들의 의식도 같이 어우러져야 한다.

3천년의 시간이란 불법의 한 사이클을 이루는 시간이다. 대체로 초기500년, 또는 1000년을 정법시대(正法時代)라고 하는데 부처님 정법이 제대로 지켜져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들이 많이 나온다는 시기이다. 그 다음 1000년을 상법시대(像法時代)라고 하여 수행자는 많으나 증과(證果)에 이르는 사람이 드물다는 시기이다 그 다음 500이나 1000년을 말법시대(말법시대(末法時代)라고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이 퇴색하는 시기로 타락한 불교의 모습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정법’과 ‘상법’이란 말은 초기 경전에 해당하는<<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데 중국 규기에 의해서 ‘말법시대’까지 덧붙여 해설되는 것을 보면 시대적인 변화도 가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말기 야운(野雲)의 자경문(自警文)을 빌어 말하자면“말법시대에는 마(魔)는 성하고 법(法)은 미미하여 중생을 바르게 이끌어 주는 이는 적고 남을 그르치게 하는 사람은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달은 차면 기우는 것’이 이치이다. 메시아의 출현은 바로 이 끝자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수순이다.
인도와 대한민국의 공간적인 구도는 불교가 전파되어 있는 모든 영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끝자락은 일본이 아니냐고 따질 사람이 있을 지 모른다. 풍수지리의 형국론상 일본은 한국 땅의 좌청룡일 뿐 천지의 맥이 들어오는 본체가 아니다.정법을 바로 잡아줄 메시아는 본체(本體)에서 나오는 것이며 좌의 사(砂)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필자가 수 년 동안 고찰한 풍수지리의 형국을 갖고 따지자면 ,우리나라 땅에서 위대한 대성자(大成者)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주의 힘을 끌어들이는 대맥(大脈)은 우선 시발점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이 그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지맥(地脈)을 대혈(大穴)로 끌어서 보내 줄 동정호(洞庭湖)같은 큰 호수가 필요한데 백두산 천지못이 제격이다. 풍수지리상 어디 하나 빈자리 없이 딱 들어맞는 못이다.

동정호가 그 역할을 할 없는 까닭은 지맥의 줄기가 그곳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주의 기운을 끌어들인 대연(大淵)이 있으면 아래로 땅의 기운을 당겨오고 위로 하늘의 기운을 끌어오는 수천수만 의 화성(火星)이 필요하다.

화성이란 바위 끝이 수직으로 하늘을 향하여 뾰쪽뾰쪽 날이 선 산자락의 형체를 말한다. 이 세상에 서 금강산처럼 이 화성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는 산은 없다. 흔히 비결(秘訣)을 희론 삼는 자들이 우리나라에서 1만2천 현인(賢人)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바로 금강산의 1만2천 봉우리를 갖고 한 말이다.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이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무너지는 것이 있어야 일으켜 세울 곳이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를 받아들여 나름대로 발전시켰고, 그동안 원효(元曉), 의상(義相)을 비롯해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불(佛)이 있는 곳에 마(魔)가 있다. 무너진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곳은 대한민국 땅 뿐이다. “가섭과 아난이 대한민국 땅에 왔음을 선포하노라.”라고 죽장을 땅에 치신 금구성언(金口聖言)은, 그래서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화엄의 세계를 이 시대에 다시 누군가가 이야기한다며 세상에서 그를 믿어줄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현상계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 문제인 셈이다. 이 믿음의 문제는 영산 당시에 부처님께서도 끝없이 시달린 문제였다.

교단 내부의 수행자들의 불신(不信)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의심병은 아상(我相) 때문이다. 초각의 경지에서 약간의 맛을 보고 마치 모든 것을 얻은 것인 양 차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항은 대승경전에 수없이 언급되고 있는 일이다.

세존께서 “내가 찬양한 칠불여래(七佛如來)의 명호와 공덕은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경계라서 실로 알기 어려우리라. 너는 의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라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 아난존자는 “부처님! 저는 의심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믿음이 부족하여 여러 부처님의 지극히 깊은 경계를 듣고도 ‘어찌 한갓 칠불여래의 이름만 염송해야 하겠어. 그것만으로 그렇게 큰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고 하겠어’ 라고 생각하여 믿지 않고 비방하옵니다. 그래서 덧없는 한 세상에 큰 이로움과 즐거움을 잃고서 모든 악도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법문은 칠불의 이름만 염송해도 그 공의 얼마나 큰지를 설한 것으로 <<약사경(藥師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영산 당시 아난은 상수보살의 경지였다. 그런 아난에게까지도 부처님께서 ‘믿음’이란 인식의 문제를 확인했어야만 하는가 의문을 갖게 한다. 붓다는 아난의 믿음을 의심한 것은 아니다.

 이 질문 자체를 대중에게 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불과를 이루신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세계를 설하실 적마다 예외 없이 제기된 것은 ‘믿음’의 문제였다. 믿음이 문제되는 것은 아난의 지적처럼 ‘비방’으로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비방은 엄청난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삼지삼청(三止三請) 이 나왔던 것이다.

공자는 평생동안 천하를 주류하였다. 춘추시대는 그의 진정한 정치철학을 현실과 괴리문제를 내세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세상은 양자가 아니면 묵자한테로 간다.” 는 맹자(孟子)의 푸념 또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세(勢)란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역사는 성인을 ‘믿음’으로 평가해 주었지만 당 시대는 ‘비방’으로 빛을 가리게 한다 비구니를 수행자 반열에 세우고자 한 것 도 아난의 지혜였지만 당시 교단은 그것만을 갖고도 그를 따돌림하였다.

지혜는 과거의 반추를 통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성인은 지혜의 상징물로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미래일 뿐이다. 미래는 현실이 안주를 담보하는 무형의 재산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더구나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믿음은 미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개개인의 인식 여하에 따라 그 가치를 달리한다.

진불 출현(眞佛出現) 또한 세상의 따돌림이 따르고 누리꾼들이 비방을 일삼게 된다. 누구를 기리고 비판하는 것이나, 누가 참이고 거짓인가 가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고유한 권리가 아니다. 근거에 의한 기림이고 비판이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 전체 분야에서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호도하는 것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자재 만현 큰스님이 만약 참이 아닌 가짜라면 그가 저서에서 밝힌 오도송도 분명 어딘가에 허점이 있어야 한다. 다름 아닌 불교사상의 맥락에서 그 맥을 같이 하지 못하는 필연의 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 텍스트를 분석하여 무아설(無我設)과 진공묘유설(眞空妙有設)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話頭打破頌



다겹생(多劫生)의 업(業)의 나무 무성하더라


팔만사천 가지마다 줄기마다


망상 꽃이 피었더라


내 이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더니


하늘도 없고 땅도 없더라






거짓몸뚱이 산산이 부셔져


가루되어 없는데


착(着)할게 어디 있는가


마음 마음


본래부터 없는 것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네


이 글은 아난의 후신인 자재 만현 큰스님이 화두를 타파하고 공(空)을 체험하는 순간 읊은 오도송(悟道頌)이다. 이런 글귀는 조사어록(祖師語錄)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자재 만현 큰스님만의 언어일 뿐이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큰스님께서 공을 철견하시고 그 희열 을 노래하신 것이다.

당시 오도(悟道)의 순간을 큰스님께서는 “며칠 화두가 잘 들리더니 <<금강경(金剛經)>>을 큰소리로 봉독하던 중에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데도 없다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온몸이 폭발하듯 하면서 세상이 확 뒤집혔습니다.”라고 술회하신다. 화두 타파(話頭打破), 여기까지는 기존의 선지식들과 똑 같은 경험을 하신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많은 선사(禪師)들의 시(詩)를 보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오도송(悟道頌)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실 세간살이의 모습을 읊은 것이야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에서 보면 모두 한갓 망상을 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의 무상함을 백천 번 노래한들 그 무상이 실상화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끝 간 데서 자신이 오도의 희열로 나오는 소리, 그게 바로 오도송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가 부정되는 맨 끝자락의 언어와 비언어의 세계가 만나는 바로 그 곳에서, 다시 무아의 언어로 나오는 소리이다. 때문에 언어의 세계를 부정하는 오도송처럼 우리 뇌리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가끔씩 기존의 오도송을 모방하여 흉내내는 선사도 있지만, 자신의 언어가 부정되는 천둥보다 무서운 소리 끝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오도송은 언어의 시체 썩은 냄새만 풍길 뿐이다.

이 짧은 텍스트가 주는 신선함은 그동안 언어의 인식 속에 갇힌 우리의 좁은 의식을 일순에 우주 밖으로 내팽개쳐 드넓은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텍스트 분석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이 글을 분석하면, 인간 육신과 영혼의 참모습을 가장 과학적으로 설명한 글이 바로 이것이다. 영산 당시 부처님 수기(授記)로 금생에 오신 붓다의 오도(悟道)가 아니고서는 이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기절(起節)을 살펴보면 오욕(五慾)으로 가득 찬 우리 육신을 ‘업(業)나무’에 비유했다. 여기에서 만약 단순한 업나무만으로 우리 육신이 갖고 있는 문제를 견주었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절름발이 빗됨 밖에 되지 않는다. ‘다겁생’, ‘팔만사천’, ‘망상’의 수식어는 이 인간의 몸뚱이를 가장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겁생’은 무한한 시간을 상징하는 말이다. 사실 이 생의 우리 육신이 거친 시간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그 간격을 잴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우주의 모습이 과거와 다르고 그 진행의 속도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드러냄에 있어서 ‘다겁생’이란 말이 가장 적합한 말이다 업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팔만사천’에 비유한 것은 우리 번뇌가 가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의미한다 붓다의 팔만사천의 법문도 이것을 뿌리 삼아 설하였다 고한다.

‘망상’이란 말을 가지 끝에 핀 꽃의 수식어로 삼은 것, 또한 팔만사천의 번뇌를 달리 이름 붙인 것이다. 불가(佛家)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비롯해서 꽃과 많은 인연을 갖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무상한 사물의 본질을 설함에 있어 꽃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꽃은 화려하지만 그 생명은 아침 이슬처럼 매우 짧다. 그런데 이 망상의 꽃은 연꽃의 덕성을 상징하는 개부구족(開敷具足) 처럼 꼭 열매를 맺는다.

만약 그 꽃에 망상의 열매가 맺으면 세세생생 육도윤회를 돌아야 하고 무아의 열매가 달리면 이것을 벗어날 것이다. 번뇌망상 없이는 과(果)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일 터이다. 하지만 꽃은 꽃일 뿐이다. 하루 저녁에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고, 하루 저녁에 석숭의 부를 축적하는 것도 망상이다. 하지만 ‘그 실체(實體)는 없다’는 것이다.

승절(承節)은 ‘존재의 근원을 철견’하는 대목인데 시간으로 따지면 대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 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무성한 꽃잎의 업나무는 이 세상에 고정된 실체란 하나도없는 것임에도 그것을 있는 것처럼 속게 만든 장본인이다. 수억 겁 동안 자생의 생명력을 길러온 이것을 모조리 뽑아버렸다는 것, 역시 대선지식(大善知識)의 통쾌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저 단순하게 뽑아서는 각(覺)이 될 수는 없다. 실뿌리 하나하나까지 뽑아내지 않으면 무아(無我)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잔뿌리에 붙은 실뿌리 하나만 남아도 “하늘도 없고 땅도 없더라.”란 말은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 ‘내’라고 하는 주체는 공의 세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이 글 전체에서 이것을 조명하면 더 없는 강조형이다. 업나무에 대한 상대 주체를 ‘내’라고 내세움으로써 모조리 뽑아서 버리는 행위자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래서 대오(大悟)는 이렇게 한 치 한 푼의 어긋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절(轉節)은 ‘무아(無我)’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한 것이다. 무아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짓 정보에 놀아나는 인식의 주체 가 없다는 것이다. ‘거짓몸뚱이’는 기절의 ‘꽃이 무성한 업나무’와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지금 그 거짓 정보에 놀아났던 인식의 꿈을 깬 순간 ‘산산이 부서져 가루로 없어졌다’는 것은 팔만사천의 꽃이 떨어지고 비로소 무아의 열매가 맺었다는 것이다. 30년이 지나 이루어지는 자재 만현 큰스님의 불과는 여기에서 그 씨앗이 발아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읊은 “착할 게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마지막 뒷마무리를 하는 말이다. 결절(結節)에 해당하는 부분이 갈무리가 아니다. 화두 타파의 무아 공을 이루는 행위는 여기에서 이미 끝난 것이다. 이 말을 되돌려 보면 업나무를 무성하게 만든 것은 결국 ‘착(着)’이라는 것이다.

업(業)이란 범어로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고대인도 언어로 ‘행위’라는 뜻이다. 행위의 이면에는 신(身)이 있고 구(口)가 있으며 의(意)가 있다. 이것을 이름하여 삼업(三業)이라 한다.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표업(表業)이라 하고 속으로 감추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윤회(輪廻 sasra)를 일으키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착(着)’이란 무아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큰스님 저서 후기는 “있는 그대로를 보라. 분별하지 말라. 끄달림, 집착, 머묾 없이 보라 .”고 충고한다. 단지 “인연 따라왔다가 그 인연 다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인 데도 스스로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고리를 비로소 바로 정견(正見)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절(結節)은 그 실상을 본 순간 ‘이것이 아니었구나’라고 그간에 허상에 속은 어리석음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말하면 기쁨인데, 자재 만현 큰스님의 적정삼매(寂靜三昧)의 오도송(悟道頌)에서는 ‘환희’라는 말을 쓰고 있다. 마음은 이 업나무 육신을 지배하는 주인이다. 본래부터 비어서 붙을 것이 없음에도 팔만사천 가지의 꽃을 피워 온갖 밖의 사무에다 그 향기를 뿌려댔고 그것도 모자라 갖은 유혹으로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필자는 모든 성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허물을 너에게 돌려라’라는 말을 갖고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을 고민하였다. 물론 이 말뿐만이 아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경학(經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논어(論語)에 나오는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 않아야 비로소 효라 할 수 있다.”는 대목도 이해하지 못하다가, 선친(先親)을 땅에 묻은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알았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을 맺자면 내 존재 자체가 허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 인식의 주체가 나라는 인식 없이 행한다면 상대도 허물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소리는 ‘내 탓이요’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절(結節)에 ‘마음’이란 단어가 3회에 걸쳐 나온다. 하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다르다. 앞의 겹쳐 있는 ‘마음’은 양면성을 갖는다. 하나는 중생들이 인식하고 있는 마음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각자가 이해하고 있는 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시각에 따라서 인식하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세 번째 나오는 ‘마음’은 진정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무착무아(無着無我)의 공(空)이다.

육신이 공하다는 사실은 화두 타파를 하는 순간 어느 수행자라도 체험하는 일이다. 오도하는 수행자 누구라도 희열에서 춤추고 손뼉치며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필자가 접한 오도송에서 이처럼 과학적인 논리 구조를 갖고 육신이 공함을 설한 것은 지금까지 없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 오도송은 금생에서 이루어진 진공묘유의 적정삼매송을 그 복선으로 깔고 읊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눈 여겨 볼 대목은 업식(業識)으로 가득찬 육신의 공함을 터득하고 난 그 이후의 행동 양식이다. 둘째 대목의 ‘뽑다’는 행위는 아직은 버릴 것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것이다. 여기에서 만약 그 행위만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면 토굴에서 죽비를 더 맞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는 오도송(悟道頌)이라 할 수 없다. 시를 논평할 적에도 분명 문제로 삼게 된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셋째 대목의 ‘부서져 가루 되다’는 말은 이 글의 생명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다. 굳이 그 가치를 따진다면 천금 만금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 글의 구도 또한 기승전결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부서져 가루 되다’는 것은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두 가지 행위 모두 완전한 공(空)을 이루기 위함이다. 어디 한 구석에도 착(着)이 붙을 곳이 있으면 그것은 무아(無我)가 될 수 없다. 뽑아서 가루로 부셔 날려 버려야만 비로소 공(空)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는 문제의 제기에서 업나무 형태를 매우 세밀하게 그린다. 팔만사천의 망상 꽃이 피었으면 팔만사천의 열매가 나와야 한다. 만약 이 글에서 열매에 관한 언급이 없다면 이 텍스트는 생명이 없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쓰레기일 뿐이다. 필자가 이 텍스트는 공을 과학적인 구조로 설명한다고 하는 것은 공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더 이상의 치밀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대목의 ‘망상’, 둘째 대목의 ‘거짓’, 셋째 대목이 ‘본래부터 없는 것’은 모두 육신의 ‘공’함을 의미한 말들이다. 이 수식어들의 주체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팔만사처 꽃의 ‘열매’에 해당한다. 모든 불경(佛經)의 모두(冒頭)에 나오는 말,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다시 한 번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천도와 효

1) 문제의 출발


사실 자재 만현 큰스님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 가운데 하나가 ‘천도재’이다. 그리고 이 속에 ‘효(孝)’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재 만현 큰스님을 연구함에 있어서 이것을 빼놓고 문제를 논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를 벗어나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는 것인데, 해탈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천도재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부처님 당시에도 이 문제는 수없이 언급만을 하셨고, 그 궁극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밀장(密藏)으로 숨기셨다. 자재 만현 큰스님 역시 천도재의 중요성을 언급하시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조차도 언급하시지 않는다. 분명히 이 문제를 짗고 넘어가야 현지사의 신화를 밝힐 수가 있다.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삼아 내린 결론은 이렇다.

수행에서 가장 근간을 이루는 것은 천도에 있다. 수억 겁동안 쌓아온 우리 영혼이 때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제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가능하면 우선 그런 쓰레기를 거둬내서 영체를 맑게 한 연후에 수행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장애 요소가 제거되어 일사천리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이 비밀은 ‘불보살들과의 교감’을 비로소 이룰 수 있다는 것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칭명염불의 목적 또한 불보살의 가피를 받고자 하는 것 이므로 서로 부합되는 일이다

천도는 어찌되었든 간에 이 생에서 저편의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현지사 천도는 시공을 초월한 것이어서 그것이 과거일수도 있고 내세일 수도 있으며 현세일 수도 있다. 내가 정리해야 할 인연의 대상은 윤회에도 있고 윤회 밖에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중음신의 세계이다. 나머지 영가들은 모두 이른바 적(籍)을 갖고 있지만 이들은 그런 적을 갖고 있지 않다. 대체로 비명횡사한 영가들로 이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의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갈곳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산자들에게 기생하고 자 한다. 그래서 빙의(憑依)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빙의는 적(籍)이 없는 무주고혼들이 인연 따라 산 자의 몸으로 달라붙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정명(定命)하지 못한 영혼들로 윤회(輪廻)에도 들지 못하고 명부(冥府)에도 들지 못한 영가들이다. 객사나 자살, 중병 등으로 죽음 자체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스로 무주고혼으로 남아 죽은 자의 세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와 함께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도 없고 이것을 받아주는 곳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의식과 현상은 언제나 괴리를 일으키게 된다. 마침내 심술은 더 고약해지고 드디어 “살아 있는 후손들에게 달라붙어 식색(食色)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 한편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목숨을 잃을 때의 행위를 전가시켜 “그 후손들로 하여금 객사하고 자살하고 몹쓸 병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동안 정신의학 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각도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지금까지 뚜렷한 대안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빙의를 치유한다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 빙의된 자들이다. 무엇보다 죽은 자의 혼백을 불러들이는 장소나 또는 그것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색이 나지 않는다. 빙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빙의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빙의된 신의 능력에 따라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신을 제압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대다수 종교에서 주신(主神)을 내세워 그 능력을 빌어 빙의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영구적인 해결책 또한 아니다. 그 때와 장소만을 피하게 하는 것이므로 틈이 생기면 다시 다가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민속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사석에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특정 종교들이 거론되기 때문에 필자도 더 이상 언급을 할 수가 없다.

천도에서 만나는 인연은 차생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부계로 부모, 형제, 조부모, 사촌의 구조로 퍼져 나아가고 모계의 인연으로는 외조부모의 인연으로 이어져간다. 이 핏줄의 인연만 따져도 엄청난 숫자의 영가가 동원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얽혀진 실타래를 푼다는 것은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하여 천문학적인 수치를 계산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컴퓨터는 인간의 감정의 수치를 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식(識)에 쌓인 문제까지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천도재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이 문제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라도 한 평생 자신의 삶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상의 온갖 현상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생노병사의 과정이 ‘고해(苦海)로 이름 붙여질 정도이니 결코 아름다운 세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툭 털어 버리고 산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자기 존재 때문에 스스로 안은 문제들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적에 모두 빚으로 남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이것을 주관하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착(着)이 생기는 원인이야 자신의 존재만은 아닐터이다. 대체로 부모들은 자식 때문에 착(着)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이 짐 때문에 다음 생은 보장되지 못한다. 따라서 천도는 이 착을 근원에서 지워내는 작업인 셈이다. 그 작업의 어원을 ‘효(孝)’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다.






천도의 목적

천도란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일이다. 사물은 그 존재 자체로 허물이다. 우리가 본성을 회복하려고 한다면 그 존재로 인해서 쌓여진 쓰레기를 치워내야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업장소멸(業障消滅)이라 한다.

누구라도 영혼의 정화를 원하겠지만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허물을 짓는 데는 바로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상대가 이미 의식 속에 갖고 있는 정보를 내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또는 내 편리한 대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우리는 상대가 무엇을 어떻게 생가하고 있는 지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업이란 것은 우리가 아무런 의지 없이 그 무엇인가를 행하였다고 해도 그 선악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얽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힘의 한계인 셈이다. 완전한 무아(無我)를 이루기 전에는 적어도 그렇다는 말이다.
수행자나 재가자나 수행하여 자기 본성을 찾으려고 다가설 적에 그동안 우리 영혼의 하드에 저장되어 있던 업식(業識)들은 엄청난 코드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그 양은 너무도 많아서 우리의 힘만으로 그것을 삭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것을 두고 큰스님께서는 ‘정업불면(定業不免)’이라 하셨다.

재시(財施)ㆍ법시(法施)ㆍ무외시(無畏施)를 수행과 함께 동시에 추구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며, 수행 과정을 점검하고 토론해 주는 도반과 장애물을 거둬주는 대선지식과 함께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며, 양명한 터자리 찾아 귀신을 멀리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며, 푸줏간을 멀리하고 푸성귀만으로 주린 배를 채워 영혼을 맑게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며, 쉼 없이 들고 나며 그 향할 바를 알지 못하는 마음을 정근으로 다잡는 것도 이런 까닭이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욕망을 붓다의 이름으로 지워내는 것도 이런 까닭이며, 청산을 벗삼아 세속의 습을 지워내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천도의 기원


천도재의 기원은 우선 문헌적으로 보자면 목련존자가 지옥에 있는 어머니를 구하는 장면이 <<목련경(目蓮經)>> 과 <<우란분경(盂蘭盆經)>> 등에 나오는 것을 보면 불가에서 시작한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그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행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 교단 내부에서도 가능하고 당시 많은 외도(外道)가 있었으므로 거기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 이것을 꼭 목련존자에만 국한시켜 그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불교가 생성될 즈음의 고대 인도에는 이미 조상숭배사상이 있었다. 이런 것이 불교로 유입되지 않았나 하고 추정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을 바탕하여 추론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와 있는 자료로는 그것을 반증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그 기원은 불교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중국 서진시대(西晉時代) 월지국(月支國) 출신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 <<목련경(目蓮經)>>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등을 살펴보면 목련존자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 어긋나고 있다. 이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간단하게 필자의 소견으로 내용을 조합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목련존자 어머니 청련부인(淸漣婦人)은 남편이 남긴 유산을 갖고 외간 남자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가무를 즐기고 음행을 일삼던 여자였다. 따라서 이 여인이 받아야 할 과보는 여지없는 지옥행이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 십대제자 가운데 신통(神通)으로 제 일인자였으나, 어느 날 지옥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부처님께 고하자, “너의 어머니가 지은 죄는 너무 무거워 너의 힘만으로 구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안거(安居)’를 마치는 7월 17일 시방 세계에 계시는 불보살들의 가피를 받아야 한다. 그 때 공양을 올리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그 공덕으로 너의 어머니는 아귀지옥(餓鬼地獄)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체로 이런 정도로 목련존자의 천도의 내용을 이해하였으면 한다. 안거(安居)가 끝나는 스님들에게 공양하라는 설도 있지만 자재 만현 큰스님 설에 비추어보면 불보살님께 올리는 공양이 맞을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첫째 천도를 주관 할 수 있는 자의 자격이며, 둘째 정상적인 의식을 갖춘다는 것이며, 셋째 공양의 비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넷째 천도재의 의미이며, 다섯째 지옥의 존재 이다. 이 가운데 필자는 앞의 세 가지 사항만 논하기로 한다. 나머지 사항은 세인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사항이고 또 한편 믿음의 문제이므로 굳이 필자가 나서서 언급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천도재 주관자격

목련존자가 신통의 제 일인자로서 지옥의 어머니를 구제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바로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육도윤회의 실상은 보려면 십지(十地) 이상(以上)의 대보살(大菩薩) 경지여야 만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신통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만은 절대 아니다. 신통은 그 행위를 하는 순간 그 자체로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을 신통에 의지한다고 하면 신통을 부릴 수 있는 자만이 세를 형성할 수 있으며 우주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주는 무서운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과(佛果)를 이룬 순간 모든 능력을 갖춘다고 하는 것과는 상치되지만 우주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과 맞물리는 것이므로 “불과를 이룬 붓다조차도 신통만큼은 경계하신다”고 한다. 따라서 천도는 “육도윤회의 실상을 질서,파괴 없이 온전하게 처리하실 수 있는 붓다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이 큰스님의 주장인데, 필자가 고찰한 바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지난 봄 춘천 법석에서 큰스님께서 “ 그 당사자와 얽힌 영가를 불러와야 하는데 허공에 떠있는 영가들은 어딘가로 숨어 버리면 지장보살님의 능력으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능력만이 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툭 튀어나오는 순간 성중들이 잡아옵니다.”라고 하신 것을 필자가 들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천도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이 문제되는 것이다. 지난 해 불교TV 법문 때 큰스님께서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사기행위입니다.”라고 준엄하게 법장을 내리 치셨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대목과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가 무간지옥에 빠져있는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결국은 부처님 신통으로 천도하는 사연을 묶어서 생각해 보면, 천도라는 것은 본래부터 부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큰스님께서 “불과를 증득한 큰스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필자가 현지사의 천도재를 살펴본 바로는 영산 시절 4회에 걸쳐 이루어진 목련존자 어머니 천도와 그 절차나 의식이거의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4회’가 갖는 의미는 바로 그 단계를 한꺼번에 격상시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만큼 천도는 어렵다는 것이다. 부처님 무량광(무량광)의 능력으로도 단 한 번으로 끝내지 못하는 것은중생의 업장 소멸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현시(顯示)한 것이다.






천도재 절차의식

천도재를 신통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때와 장소에 구애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목련존자의어머니 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장소와 시간이 정해지고 초대되는 불보살도 이미 사전에 정해지며 천도될 영가의 명단도 정해진다. 철저하게 사전 각본에 의해서 절차가 진행되는 셈이다. 목련존자의 자료에서는 그 구체적인 모습을 그릴 수는 없다. 분명 당시에는 성대한 행사가 치러졌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대 불과를 이루시고 천도재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계시는 현지사 큰스님 천도재 집행을 통해서 그 절차를 엿본다면 영산의 장엄한 모습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지난 봄 현지사를 방문하는 날 마침 당시 진행 중인 천도재를 눈여겨보았다. 이 절차는 현지사 자료 등을 통해서 정리하는 수준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맨 먼저 사전에 영가 수배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지장보살 주관 하에 이루어지는데 그 좌우보처인 도명존자 무독귀왕과 명부의 10시왕 그 병종 권속들에 의해서 며칠 전부터 영가가 수배되어 지장궁 별궁에 감금되어 있다가 천도 때 대령한다. 중한 죄를 지어 물 속이나 땅 속으로 꼭꼭 숨은 영가의 경우 문수, 보현, 지장보살님을 대동하고 부처님께서 직접 수배하신다고 한다. 관욕 시간이 되면 몇 명의 신중들이 신통으로 목욕시키고 변식진언 에 따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마련해 준다.

‘나무아미타불’ 장엄염불 때 서방극락세계 미타부처님과 좌우보처 관음, 세지보살님이 참석하신다. 염불이 끝나면 영가들은 지장보살이 방사하는 빛을 타고 지장궁으로 돌아간다. 천도재를 지내는 사람은 부처님께서 직접 현신하셔서 업장 소멸을 시켜 주신다. 천도재가 끝나면 관음보살이 천수천안으로 나투셔서 나쁜 기를 거두시기 때문에 현지사는 다시 깨끗하게 원상태로 돌아간다.

천도 회수를 4회 정도로 하는 것은 목련존자 어머니 천도에서 유래된 것이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많이 한다고 해서 나쁠 것 없고, 또 자신들과 인연 있었던 영가들을 천도해 줌으로해서 선업 쌓는 방편이 이 것보다 앞설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도 수직과 수평 모두 형평의 원리 세워주는 것도 삶의 지혜로 보인다. 끝으로 절차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다.


1부, 영가 수배

2부, 영가 관욕 및 공양 그리고 지장궁 가서 재심


3부, 부처님 직접 현신하시어 천도재를 지내는 자손의 업장 소멸






천도재 비용문제


지난번 인터넷에서도 천도재 비판론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바로 비용이었는데, 많다는 것이었다. 사실 천도는 우리가 진 빚을 갚는 일이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기 때문에 부처님 위신력(威信力)을 빌고 또 그 위신력을 빌기 위해서 불과를 이룬 큰스님을 중간에 산파 역할로 내세운 것이다. 한 집안의 가계에 딸린 영가의 숫자만도 보통 80~100명에 달한다. 만약 그 가운데 한 영가가 갖고 있는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가령 “강간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영가라면 그 원한은 한 생의 갚음으로 끝나지 않고 세세생생 이어진다.” 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런 원한을 삭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푸닥거리로 갚아질 것이면 이 세상의 원한 품은 영가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누가 달랜다고 달래지고 내가 풀고 싶다고 풀어지는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도 자체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천도는 영산 당시의 목련존자의 어머니 천도와 현지사 천도일 뿐이다.

필자가 천도재를 치룬 사람들을 대상하여 탐문한 결과 천도재가 진행되는 순간에 이미 성중들이 그 집안을 샅샅이 뒤져 숨어 있는 귀신들까지 제거하였다는 사실을 확인 하였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학자란 사람이 이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귀신의 문제를 집요하게 연구하였던 사람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귀신편(鬼神篇)>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대낮에 귀신이 나와서 행위하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 다수가 공동으로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주자의 답변은 이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의 세계로 이해하라.” 주자의 대답은 귀신의 세계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의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 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현상에 몸을 드러냈다고 해서 뭐가 그리 이상할 게 있느냐 라고 도리어 반문한 것이다.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 희유의 사건으로 등장한 목련존자의 지옥의 어머니 천도 사연을 통해서 그 비용을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해 보면 실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모든 의식 절차는 사람 손길, 발길 닿는 곳마다 비용이 들어간다. 당시 이 사연은 무엇보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수행자 한 사람한테 들어가는 비용만을 감안해도 수월찮은 비용이었을 것이다. 최상품으로 올렸을 공양물에 들어간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어지간한 부자의 곳간이 아니고서는 실로 불가능할 일이다 오늘날 이라고 해서 천도의 형태가 바뀌어진 것은 아니다.

막스가 종교의 부패 문제를 지적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를 너무 경제의 잣대만으로 재려고 하였던 것에 문제가 있었고, 결국은 그의 사상의 합리성 결여로 인하여 당대에 만 빛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막스의 시각으로는 천도재의 비용은 정말 미친 짓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혼의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나라가 어려울 적에 먼저 덜어야 할 문제를 묻자 ‘공자가 맨먼저 거론한 것’ 은 전쟁을 하는 병기였고, 그 다음으로 먹을 식량을 믿음 앞에 두었다. 죽음이란 시간의 문제일 뿐 인간의 아름다운 가치는 ‘믿음’에 있다는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 하루 일찍 죽고 하루 늦게 죽는다고 해서 그 죽음 자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실정법에서는 대체로 죄를 대물림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과에서는 때로는 그러한 고리가 이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지은 죄를 그 자식이나 손자한테까지 그 죄가(罪價)를 몰리게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런 경우는 깊은 원한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세속법에서 대역죄는 보석도 불가능하다. 한 영가를 천도함에 있어 이러한 대중죄(大重罪)가 없으리란 것을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가 만약 걸린다고 한다면 과연 돈의 액수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사실 천도의 비용을 논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하신 말씀도 돌이켜보면 불가능한 비용으로 천도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현지사천도재를 참관할 적에 살핀 바로는 정명(定命)을 한 영가는 눈을 씻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영가의 호명을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모습이다. 오늘날 중죄를 저질러 대법원 확정판결이 날 경우 보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만약 이러한 영가들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구제를 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천도재를 주재할 수 있는 자격이 문제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薦度와 鬼神

학문에서 귀신 문제라고 하며 상당히 경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특히 무신론자들의 경우 희한한소리라고 치부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귀신의 문제는 형이상학에 있어 가장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동양의 사상을 접근하는데 있어서 이것을 무시하면 어느 분야도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주자어류>> 강독을 오랜 시간 동안 주재한 사람이다. 이 <<어류>>는 퇴계 선생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부분이다. 왜냐하면 송대(宋代)의 언어(言語)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 주자어류>>의 단어의 해설을 어류 문장에 접목시켜 보면 문맥이 통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그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대의 성리학을 논하는 학자들은 어류의 <성리편(性理篇)>을 들어서 논할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말하면 이것은 성리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성리를 말하기 전에 <귀신편>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리는 뒤집어 말하면 귀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의 세계를 말하는데, 그 이면의 근간이 바로 귀신의 세계이다. 이 문제를 도외시하고 도학적인 이야기만을 논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고한 학문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생(生)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死)를 알 수 있느냐.” 고 말한 공자를 들어서 필자를 논박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상 공자(孔子)와 사(死)의 세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제례(祭禮)는 귀신(鬼神)과의 접목을 의미한다. 공자가 제례에 얼마나 심혈을 쏟았는지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공자는 귀신의 세계에 대하여 ‘경이원지(敬而遠之)라는 예(禮)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어찌 보면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생각인 지도 모른다.

그 세계의 영역을 맘대로 넘나들며 좌지우지할 수 없다면 공자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인간이 풀어야 할 숙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가 사실은 귀신의 문제이다. 멀리도 가까이도 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며, 모른 척도 할 수없고 아는 척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지구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이 귀신의 문제를 제대로 풀어줄 수 있는 곳은 불교(佛敎)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없다. 귀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종교는 많지만 그 실체를 인정하고 제도 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말이다. 귀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현상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누구든 죽어서 귀신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귀신을 제도하려고 하면 그만한 경지가 따라야 하는데 그런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드물다는 것이다. 귀신은 힘있는 자에게는 복종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덮치는 습성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상식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중음신의 경우 그들이 주거하는 세계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들과 공생하는데 그들을 받아들여도 문제가 되고 부정을 해도 문제가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적(籍)이 있는 귀신들이야 심판을 받아 가는 곳이 있다고 하지만 무주고혼(無主孤魂)들이야 적이 없기 때문에 산 자들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바로 이것을 통제하려면 우주 질서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필요한데 그런 수행자는 일 겁에 한 분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악순환의 고리는 세세생생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검토해 보면 실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 염불(念佛)이었다. 이것은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힘을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 귀의귀명(歸依歸命)을 항시 강조하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생(來生)의 근기가 되고 가피(加被)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붓다들이 중생들에게 보살행을 할 수 있는 방편도 오직 이것뿐이라고 보여진다.

지난 역사에서 위정자들이 가끔씩 자신의 신앙을 믿고 귀신의 존재를 무시하다가 정치를 실패한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그 참모들을 탓하기 전에 본인의 무지가 불러들인 재앙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행위는 위정자 한 개인의 실패로 끝나면 문제가 없지만 그 과보를 무고한 국민들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의 과보가 무겁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인물들은 정치지도자로 나서면 절대로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남들보다 나서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IMF를 불러들인 것에 대하여 갖가지 원인들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순(舜)이 요(堯)한테 선양(禪讓)을 받은 것은, 신하들의 몇 마디의 간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순의 시험은 요즘 시대처럼 시민의 몇 장의 투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보다 실로 엄청나게 어려운 관문에 의해서 치러진 것이었다. 오늘날 각국 정상들한테 순의 처지에서 대권을 노리라고 한다면 단 한 사람도 당선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순의 시험은 수신제가(修身齊家)에서 그쳤던 것이 아니었다. 요는 순에게 사회 윤리를 맡겨서 그 정화의 능력을 시험하였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게 하여 그 지휘 능력을 살폈으며,외교를 맡겨 사방의 국가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지를 엿보았고, 깊은 산 속을 들어가게 하고 천둥 번개를 치게 하여 그의 위기관리 능력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요는 순에게 섭정(攝政)을 맡겨서 하늘의 뜻을 살피기로 하였던 것.”이다.

순은 이 모든 과정이 끝난 다음에 “천지 사방에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신고식과도 같은 의례이다. 이 때 하자가 생기면 바로 재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요의 시험은 결국 하늘의 뜻과 모든 신들의 세계에 다가서기 위해서 순으로 하여금 이 많은 시험을 치게 하였던 셈이다. 권모술수를 써서라도 대권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무시하는 처사인데, 그 재앙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을 위정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대권의 자리는 사람만을 다스리는 자리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면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위정자는 결코 성공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역(周易)의 효(爻)는 여섯이다. 이 효의 순서는 사회적인 신분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왕(王)의 자리는 제 5효로서 밑에서 위로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맨 위의 이른바 상효(上爻)는 왕사(王師)를 상징하는 자리이다. 왕사의 역할은 아래로 왕을 제도하고 위로 천지신명(天地神明)의 뜻을 살피는 것이다.

대체로 국가를 파국으로 본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 왕사들의 보좌가 없는 사람들이다. 설령 있다고 해도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경지를 갖춘 수행자가 아니라 외도(外道)의 신을 믿는 자들로 그 자신의 문제조차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백천만 명이 있다고 해도 그런 위정자에게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위대한 위정자는 우주의 질서에서 수직과 수평의 구조를 잘 어우러지게 하는 사람이다. 위로는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다스리지만, 한편 귀신의 세계도 도리에 맞게 처리할 줄도 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아무리 하늘을 잘 섬기고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고 해도 그 누수 현상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 겨울 필자가 현지사를 처음 방문하던 날은 삼불보전(三佛寶殿) 점안식(點眼式)이 거행되었다. 불교TV에서도 마침 그 행사를 녹화하고 있었다. 당시 매우 혹독한 한파가 중부지방을 엄습한 때라 도로가 빙판으로 얼어붙어 차량들이 제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는 행사를 치르기는 몹시 열악한 조건이었다. 더구나 노천에서 진행해야 하는 행사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큰스님께서는 여름에 입는 납의만을 입고 계셨는데도 불안에는 전혀 변화가 없으셨다. 그 테이프는 이미 불교TV를 통해서 전파를 탄 내용이지만 큰스님께서 이르시기를 “제석천”께서 날씨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아주 따뜻한 햇살이 삼불보전의 터를 감싸고 있었다. 물론 삼불보전 자리는 대혈(大穴)이기 때문에 아무리 혹독한 추위가 닥친다고 해도 터가 갖고 있는 온화한 기운을 몰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 필자가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점안의 행사가 끝나고 점심공양을 마치자 큰스님께서 잠시 지신재(地神齋)를 지내시겠다는 것이었다. “지신재라! 역시 ‘무상의 정각을 이룬 붓다 이시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행사에는 모든 불보살님들이 나투시는 장엄한 자리인데 지신(地神)들이 약간 위축되어 있어 그마음을 풀어주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귀신관인 셈이다. 이것은 절대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순간 그 붓다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고 하는 데도 귀신(鬼神)의 세계를 대하는 모습이 이정도인데 일개 위정자(爲政者)가 그들을 깔아뭉갤 수 있다고 하는 발상 그 자체가 정말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한 이 세계는 필연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위정자가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은 이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감화시킬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질 때 그 국가는 안정 속에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천도라는 것은 내면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이지만 외면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이면의 세계와 얽힌 고리를 풀어서 서로 간에 무아로 존재하게 하는 작업이다. 이 세계는 우리 현실의 사회적인 신분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한 국가의 통치자라고 해서 이 이면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 단지 삶의 흔적을 어떻게 남겼느냐가 이 세계의 모습을 결정할 뿐이다. ‘선업과 악업은 절대 적으로 상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지은 대로 주고 받고 할 뿐이다. 업은 상대가 있고, 이것은 우주 질서를 유지시키는 근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천도의 자격이 문제되는 것은 이 깰 수 없는 금기사항을 건드려서 서로 풀게 할 수 있는 것은 풀게 하고, 그렇지 못 할 경우 문제를 일으키는 쪽을 가두어서 한 쪽이라도 무아(無我)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때문에 천도만큼은 삼계(三界)의 지존이신 석가 세존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금기사항에서 우주의 질서를깨지 않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상쇠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薦度와 孝道

佛家의 孝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대승경전(大乘經典)으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경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만들어 졌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설령 이것이 위경(僞經)이라해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길도 없는 셈이다. 모든 종교 단체들의 자료들이야 시대를 거치면서 그 시대의 필요한 요구 조건에 의해서 각색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불가의 효사상이 원래 없었던 것인데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유가의 효사상에 대응하기 위해서 삽입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승경전에 나타나는 효에 관련된 사실들을 검토해 보면 결코 불가의 사상이 효에서 거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경(經)이 만들어졌다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사실 경이란 수행자들이 수행의 길목에서 등불을 삼기 위한 나침반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내용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21세기의 붓다의 메시지>>는 사실상 수행 부분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효’이다. 여기에 밀장(密藏)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 본질의 문제를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앞서 본론에서 필자가 추론으로 언급하였듯이 여기에는 ‘영체의 정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부모은중경>>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그 구성이 매우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뭔가를 심상치 않게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처음부터 복선을 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어떤 상징성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죽은 자들의 뼈들이 쌓여 있는 어느 외진 곳을 지나가시는 장면이나, 여기엣 한 무더기의 뼈 무덤이 발견되는 일, 그리고 삼계(三界)의 지존으로서 불경사에 길이 남을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정중한 예배를 올린 것,’ 물론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지만 동행한 3만8천의 인원의 숫자, “이 한 무더기의 뼈는 혹시 나의 전생의 오랜 조상이거나 부모님의 뼈일 수도 있기에 내가 지금 예배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들은 부처님께서 뭔가를 크게 노린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난으로 하여금 그 뼈를 직접 갈라보게 하시고 ‘그 속이 검은 것은 여자의 뼈라고 친히 일러주신 것’은 모두 고도의 전략이 그 내면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뼈’는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 가장 상징성을 지닌 것이며, ‘오체투지(五體投止)’는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존엄성의 행위를 의미한다 삼계(三界)의 왕으로서 그 지엄성을 스스로 내보였다는 것은 어떤 상징성에서도 가장 으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뼈 무더기를 향하는 오체투지가 갖는 의미는 분명히 불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위경을 따지기 전에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임은 매우 자명한 사실이다.

여기에서 보여준 오체투지는 법을 금구로 설 한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뭔가를 설해야 한다는 밀장(密藏)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효(孝)’란 진정 무엇인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뼈 무더기를 향한 오체투지의 사건’이다.

부모(父母)은혜의 무게를 어디에 두느냐를 따지는 것은 그것에 손상을 입히는 일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낳아서 길러주는 직접적인 공으로 따지자면 아무래도 어머니 쪽이 더 깊을 것이다. 이 <<부모은중경>>을 보더라도 그렇다. 거의 모두 어머니 쪽의 공으로 꽉 채워져 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적에 이렇게 진 빚을 어떻게 갚느냐가 관건이다. 우리가 이 윤회를 벗어나고자 무아(無我)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묻어진 흔적들을 모두 지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의 컴퓨터의 계산이 아무리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도 부처님 지혜를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내리신 결론은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갚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벗고 가기에는 너무 버거운 짐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수행(修行)의 첫 관문에서 천도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속인들이 말하는 ‘인간의 힘의 한계’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과학이 좀 더 발전하고, 좀 더 발전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두 손으로 사물을 가리고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면 그것은 쓸데없는 만용에 불과한 것들이다. 하지만 부모한테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작은 소망이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진정한 힘의 한계를 말 한 것이다.

“붓다를 만나는 것은 일겁이 걸려서도 어렵다.” 고 하니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할 수는 없다. 붓다를 만나고자 해도 붓다의 무량광 때문에 불가능하며, 불과를 이룬 수행자를 만나는 인연도 시절이 따라야 하니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래저래 천도는 사실상 불가능한 숙제로만 남게 되는 셈이다.






儒家의 孝

우리는 빈 공간을 활용하고 산다. 여기에서도 충돌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업의 작용도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허물이란 것은 사물들 과의 마찰이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 있고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선에 그치는 데 있다.


이것은 유가의 가장 근본적인 성리(性理)를 말하는 <<대학(大學)>> 제 1장에 나오는 말이다.

‘대학’이란 우리 말로 풀이하면 ‘큰 배움’이란 뜻인데, 주자가 이를 일러 성인을 배우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물론 ‘소학’이란 형이하학적인 문제로 이를테면
부모를 봉양하는 데 갖추어야 할 세부적인 예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큰 배움이란 그야말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밝혀 서 그것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것까지를 그 범주로 삼는다는 것이다.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해도 되는 말을 굳이 ‘있다’라고 한 것은 실천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학문이 실천을 담아내지 못하면 죽은 학문으로 삶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큰 배움’이란 결국 우주의 근원적인 질서를 궁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본성(本性)’을 밝히는 일이다 ‘명덕을 밝히는 것’,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것’, ‘지선에 이르는 것’은 모두 큰 배움을 구성하는 말인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철학이다.

<<대학(大學)>>이란 본래 한 대(漢代)에 다듬어진 <<예기(禮記)>> 제 42편이었다. 송대(宋代) 사마광(司馬光)이 따로 떼어서 <<대학광의(大學廣義)>>를 만들었고, 그 후 주자(朱子)의 손에 의해서 ,,대학장구(大學章句)>>가 만들어지고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구분하여 주석(註釋)을 붙임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주자의 경(經)은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傳)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명덕을 밝히는 것’,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것’, ‘지선에 이르는 것’을 삼강령(三綱領)으로 삼고,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條目)을 실천의 세목으로 삼아 유가사상의 근간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의 해석이 훗날 명대 왕양명(王陽明)에 의해서 비판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해석의 문제일 뿐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자는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대학의 글이란 옛날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다. 하늘이 사람을 내릴 적에 본성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지만 그 기질의 차이로 인하여 그 본성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만약 그 가운데 총명 예지한 자가 있으면 하늘은 그를 군사(君師)로 삼아 그 본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가르치게 한다. 이것이 복희, 신농, 황제 요순이 하늘의 뜻을 이어 법을 세운 까닭이다.” 라고 하였다.

주자(朱子)의 이 말은 ‘진정한 학문이란 무엇이며 성현이란 누구인가’라는 것을 정의한 것이다. 물론 유가(儒家)의 도맥(道脈)이 어디에서 출발하였으며 또 무엇을 전한 것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준 말이기도 하다. 필자가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접근하기 위하여 많은 자료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필자가 평생 업으로 삼은 분야를 거론해서, 이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명덕(明德)’;이란 우리 본성(本性)을 말한다. ‘명(明)’이란 우리가 색깔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그런 빛은 아니다. 주자는 ‘허령불매(虛靈不昧)’란 용어로 이 실체의 색깔을 설명한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비어 있고 신령스러우며 어둡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은 “갖다 붙일 말이 마땅하지 않아 ‘강명왈도(强名曰道)라고 하는 것’ ”과 같은 의미이다.

‘허령불매(허령불매(虛靈不昧)’에 대하여 송대(宋代)의 옥계노씨(玉溪盧氏)는 ‘허(虛)’란 마음의 고요함이고 ‘령(靈)을 마음의 체용(體用)으로 보았다. ’불매(不昧)‘란 밝음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야 말로 완전한 ’무아(無我)‘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자가 이 명덕을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에 대응하는 주체”로 설명하는 것도 이것을 의미하는데, ‘밝힌다’는 것은 수양의 실천을 의미하는 말이다. 주자도 언급했듯이 본성은 그 대로지만‘ 후천적인 기질’로 인해서 가려지므로 그 가려진 부분을 닦아내는 것이 ‘밝힌다’는 작업이다. 이것은 물론 후천의 기질을 두고 한 말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 텍스트에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사항은 이것은 우주의 근원적인 본체를 설명하는 것이지 통치의 수단을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만약 혼돈하게 되면 유가사상을 이해함에 전체가 뒤틀리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새롭게 한다’는 말은 마치 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처럼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원문은 ‘친민(親民)’이었으나 정자(程子)가 이 ‘친(親)’을 신(新)‘으로 풀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후 ’신(新)‘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사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수양의 단계에서 그 순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란 개념은 ’나‘라는 존재 이외의 사물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대학의 도‘라고 하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지 ’ 군(君)‘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덕(明德)’의 덕(德)‘이란 우리 마음의 본체를 이름한 것인데, 조합된 글자를 파자하여 보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서로 얽혀져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개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인(人)‘자는 본래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본뜬 것이므로, 나 혼자만의 존재는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우주의 섭리를 말하였다는 주역(周易)의 태극 원리(太極原理)도 바로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명(明)‘이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으로 공한 그 상태를 말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바로 이 주체를 두고 낮과 밤을 바꾸는 것일 뿐이다. ‘밝힌다’는 것이나 ‘새롭게한다’는 것은 모두 나를 주체로 삼아 수양하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존재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내 본성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말이니, 즉 나와 사물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말이다. 나 한 개인의 수양만으로 수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승의 사상과도 맥을 같이한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밝힌다’나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 구습을 지워낸다는 뜻으로 서로의 관계를 투명하게 본래 상태로 되돌린다는 말이다.

‘그치다’라는 말은 먼저 목적지가 있음을 의미하고 다음으로 극점에 이르면 다시 경계해야 할 사항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주자는 이것을 두고 “여기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 것” 이라 해석하였다. 물론 여기에서 ‘여’란 ‘지선’을 두고 한 말이다. 이 끝점에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중용의 도리를 요구한 셈이다.

‘명덕을 밝히는 것’과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것’의 두 양쪽의 수레바퀴가 끌고 가는 것은 ‘지선(至善)’의 경지인 셈인데, 그렇다면 이 지선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 이 용어는 한적자료사(漢籍資料史)에서 처음으로 여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 ‘지선(至善)’에 대하여 주자는 “하늘의 이치를 다하여 한 오라기의 삿됨이 없는 것”으로 풀이한다. ‘인욕의 삿됨이 없다’는 것은 ‘나’라는 집착이 모두 끊어져야만 가능한 경지이다. 굳이 선가(禪家)의 언어로 옮겨서 말하면 공(空)의 개념 정도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자의 이 해석 이외에 다시 지선을 설명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할 뿐이다. ‘지선’이란 혼자만의 이룸을 의미한 것이 절대 아니다. 큰스님 저서는 이렇게 말한다. “출가해서 불법 공부하는 스님들도 선망 부모, 동기 일신들이 한 분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과(聖果)를 얻기 어렵습니다.”

천리(天理)가 드러나고 인욕(人慾)이 사라진다는 것은 대원의 경지로 유가가 가장 추구하고자 한 그 무엇이다.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은 자기 혼자만의 해탈이 아니라 바로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모두 주역의 태극사상에서 나온것이다. 이 자료는 대승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있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나 유가가 추구하는 인류보편의 가치관은 원론의 측면에서 상당히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 유가는 그 맥을 잃어버린 나머지 그 정체성을 찾는데 급급하다 성리학이 나왔고 급기야는 양명학이 나온 것이다.

설령 이런 문제를 유가가 안고 있었다고 해도 유가가 제신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은 더 없는 진리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들이 말한 ‘인(仁)’을 체용론을 들어 말하면 체(體)로는 사물의 존재 가치를 말하는 것이며 용(用)으로는 사랑을 의미한다. 사실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는 사랑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충돌이 생기는 것은 이 애정의 결핍에서 온 것이다.






유가의 효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그 애정을 실천 할 것인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묵자(墨子)의 겸애설(兼愛說) 양자(楊子)의 위아설(爲我設)등이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사분오열로 갈라져 다투는 시대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상이란 것이 보편의 가치 기준을 갖지 못하고 한쪽으로 쏠릴 경우 그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로 자리매김 되지는 않는다. 이들의 주장에 유가가 내세운 것은 ‘친친인야(親親仁也)였다.

나한테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그들과의 얽힌 고리를 푼다는 뜻이다. 그드한테 자신의 존재는 없는 것이다. ‘인’이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물을 대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있을 경우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자신과 상대는 서로 얽혀서 갈등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가 죽어야 상대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순간부터 사물은 나누어진다.

그러나 인은 하나를 의미한다. 갈등은 이분에서 오는 것이다 내 자신만을 아낀다는 것이나 친소의 구별 없이 똑같이 사랑을 배푼다는 것은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위아(爲我)’는 상대의 존재를 끌어안지 못한 것이며 ‘겸애(兼愛)’는 그 실천에서 순서를 잃어버렸다.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미루어 나아가는 것이다 유가의 ‘인’이란 사물을 둘로 보지 않는 것이다. 나 아닌 남을 나와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전쟁은 사물을 둘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은 그냥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먼저 죽일 것을 요구한다. 언젠가는 없어지는 육신덩어리 하나에 얽매여 모든 현상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스스로한테 속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내가 소유한 것을 모두 버릴 때 남을 사랑 할 수 있는 마음이 내 가슴속을 파고드는 것이다.

<<주역(周易)>>은 우주 근원을 설명한 것이다 한갓 점복술(占卜術)로 이해한 것은 크게 잘못 된것이다. 물론 <<서경(書痙)>>에도 나오는 사실이지만 주대(周代)에 점을 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세속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점은 아니다. 하늘의 뜻을 물은 것이다. 지금의 행동이 허물되는 지를 매우 단순하게 물은 것이다. 문제는 하늘의 존재를 믿었다는 것이고 인간의 지헤의 한계를 알았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동그라미 하나로 그려진 태극(太極)은 우주의 본체를 상징한다. 이것이 음양을 의미하는 양의(兩義)를 낳았고 양의는 다시 사철, 사방 등을 뜻하는 사상(四象)을 낳았으며, 사상은 다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물, 불, 바람 등을 팔괘를 낳았다. 한 사이클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상징하는 64괘는 여기에서 나왔다.

우리가 수억 겁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의 원형을 찾아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태극을 향하는 것이다. 역을 갖고 하늘의 뜻을 물은 것은 변화하는 우주를 역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형 회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우주는 마냥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주의 질서 변화로 보면 지금의 시계는 점심을 마치고 약간의 휴식을 거쳐 오후를 준비하는 때이다. 비로 여기에서 가는 길은 두 길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우주의 진행 방향을 두고 한 말이다.

12시는 오행으로 화(火)를 상징하는 시간이다. 오던 방향 따라 흘러가는 길이 있고 중앙무기토(中央戊己土)로 방향을 바꾸는 길이 있다. 이 길은 그 간의 영혼이 걸어온 모든 행적이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다. 금세기에 출세하는 메시아를 두고 그동안 역을 연구하여 미래를 예측한 사람들이 ‘옥석을 구분하여 알맹이만 거둬간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미토(未土)는 강인한 힘과 칼을 상징하며, 말법(末法)과 정법(正法)을 의미한다.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릇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래서 우주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다. 가을은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영글게 익은 곡식을 구분케 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놓고 다시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불기를 시간 개념으로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단지 시대 상황이 그것을 대변할 뿐이다. 더 이상의 밀릴것이 없다는 말은 시간의 끝자락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로 가는 것도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둘로 가는 것도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우주 질서는 어리석은 자의 시간을 기다려 주지는 않는다. 그냥 짜연 진 각본의 순서대로 진행 될 뿐이다.

‘효(孝)’라는 것은 사물의 존재에 있어서 우주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 범주 또한 넓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온 인류에게 사물을 한 뿌리로 인식시켜 주는 것도 효이다. 그동안 세계를 갈등과 반목의 대립에서 벗어나 평화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도 효이다. 어떤 사물이라도 그 출생의 비밀은 이 효에 달려 있는 셈이다. 살아 있는 그 자체가 허물이라면, 그 허물을 허물되게 한 장본(張本)이 효이다. 불가의 카르마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존재의 빚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진 빚은 효에 있다. 부모에게 진 빚만 큼 큰 것은 없다. 모태의 열 달 동안의 진 빚만 해도 평생을 다하여 갚아도 모자랄 것이다. 이 빚의 탕감은 인간의 힘으로 는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일 지도 모른다. 한 번의 출생만으로도 진 빚은 이렇게 엄청나다. 거기에다 평생동안 가슴 조리게 한 빚까지 얹게 되면 그 수치는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대문에 우리가 본성을 회복하려고 하면 맨 먼저 풀어야 할 숙제가 바로 이 문제이다.

인류가 평화를 바탕으로 공존을 모색하려고 한다면 각각 자신의 존재의 정체성을 돌아다보아야 하는데,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지 않고 평화를 외친다고 해도 이미 그 수순을 잃어버린 것이므로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 해도 그것은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는다. 미사일 발사 명령을 내릴 적에 단 한 번이라도 전쟁에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자신의 어버이의 마음에 빗대서 헤아려 본다면 그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찾아오는 죽음이야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지만 일부러 비명(非命)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인류는 평화를 위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두 번의 걸친 세계의 전쟁을 통해서 얻은 값비싼 교훈은 공생공존하는 것이다. 상대가 죽어야 내가 편히 살 수 있다가 아니라 상대가 존재해야 내가 편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의 충돌이 빚어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전쟁뿐이다. 살기 위해서 죽여야한다는 생각은 정말 짧은 생각이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려고 할 적엔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문제이다. 만약 여기에서의 충돌로 얽히게 되면 악순환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마침내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묻히게 된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자재 만현 큰스님이 세계에 던지는 화두는 바로 인간 본성의 회복에 있다. 하지만 이것을 사상적으로 밑바탕하고 있는 것은 바로 ‘효(孝)’이다. 이 근원의 숙제를 풀지 않고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법석마다 거론되는 천도재는 그 근저에는 효가 깔려 있다. 일반의 재가자 뿐만 아니라 참선 수행자들에게도 천도를 권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효라는 것은 영가를 천도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동안의 효의 개념에서 차원을 벗어나 우주적인 질서에서 효란 무엇인가를 설파한 것이다. 21세기가 자재 만현 큰스님에게 주목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세계 평화를 아무리 외쳐 보아야 자신의 본성의 정체를 돌아보지 않는 한 인간의 탐욕스러운 욕망은 더욱 더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삼황오제시절의 요임금은 그의 정권을 초야에 묻혀 있던 순에게 주었다. 물론 정권 이양의 과제인 만큼 순의 처지에서는 험난한 몇 개의 시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순이 보위에 오르기까지 그의 인생 역정은 실로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삶이었다. 그의 환경은 모든 조건이 칡넝쿨 보다 더 단단하게 옮아 매는 형국이었다.
이것은 <<주역(周易)>>의 곤괘(困卦)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의 아버지는 앞을 못 보는 고수였고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로 맞은 서모(庶母) 말만을 믿었다. 그녀가 낳은 이복동생 상(象)까지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 지붕아래 살면서 뜻이 맞지 않을 경우 그 삶이란 오직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싶은 마음뿐일 터이다.

정당한 도리가 모든 일에서 먹혀들지 않을 적에 일어나는 갈등은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청개구리와 같은 심술을 부렸다. 이것이 옳다하면 저것이 옳다하고 동쪽으로 가라하면 서로 가는 사람이었다. 집안 형편 또한 몹시 어려웠고 모든 걸 순에 의존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얹혀 사는 사람들이 모든 권리는 행사한 셈이다. 순만 박차고 나서면 모든 것은 정리될 수도 있는 환경 구조였다. 그러나 순은 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않고 집안을 꾸려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고 마침내 요가 선양(禪讓)의 뜻을 신하들에게 말하는 과정에서 순의 이름이 거론되었던 것이다. 요는 자신이 직접 순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우선 아영과 여가 명으로 조정의 특별감시의 눈초리가 있음에도 서모의 간악함은 극에 달하여 순의 생명까지 노렸다. 지붕을 잇게 하고는 밑에서 불을 질렀고 우물을 파게 하고는 위에서 흙더미로 덮으려고 하였다.

물론 이 때 아버지의 밀명을 받은 아영과 여영의 기지로 목숨을 건지는데 성공한다. 지붕에서는 우산을 주어 뛰어내리게 하였고 우물을 팔 적에는 옆에 구멍을 파서 위기를 모면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권 이양의 전초전은 마무리한 셈이었다.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지의 본격적인 시험은 정치무대에서 시작되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는 민자건(閔子騫)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한 사람으로 효행에 뛰어났던 사람이다. 사마천(司馬遷)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서 안회(顔回) 다음으로 그를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차지하고 있는 공문에서의 위치와 덕행을 알 수 있다. 공자는 그의 효행을 “효자로구나! 민자건은! 그 부모 형제들의 말을 사람들이 틈낼 수 없었으니.” 라고 말하고, 그의 덕행을 “벼슬살이 나서지 않았고 더러운 임금의 녹을 먹지 않았다.”라고 짤막하게 말하였다.

노(魯)나라 계씨(季氏)는 그를 정권에 이용하기 위하여 비(費) 땅의 읍장을 제수하였지만 그는 매우 단호하게 “다시 한 번 나를 부르면 문수(汶水) 가에 있을 것이다.” 라고 잘라 말하였다. 문수는 노나라 북쪽 제나라에 있다. 이것은 국가를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함부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극도로 꺼려하였던 인물이었다.

민자건 역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서모(庶母) 밑에서 자랐다. 물론 이복동생이 있었던 것도 순(舜)과 같다. 하지만 민자건의 아버지는 순의 아버지와는 정반대였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민자건은 아버지를 위하여 마차를 몰고 있었다. 설한의 추위는 그의 손을 굳게 하였고 급기야는 수레 고삐를 놓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갑자기 떨어뜨린 말고삐를 본 그의 아버지는 퍼렇게 시린 아들의 손을 잡아보고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하였다.

아무리 겨울 날씨라고는 하지만 차린 의복으로 봐서는 그럴 수는 없었다. 두껍게 기운 옷 속을 헤집어 본 결과 솜 대신 갈대꽃이 누벼져 있던 것을 발견하였다. 집에 도착한 그이ㅡ 아버지는 “내가 새로 여자를 맞아들인 것은 자식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서모를 곧장 내쫓으려고 하였다. 이 때 민자건은 아버지의 소매 자락을 붙들고 간언하였다. “지금 어머니가 나가시면 또 다른 자식이 고아가 됩니다.”

우리는 이 두 사건에서 효(孝)란 무엇인가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요가 순을 선택한 까닭과 공자가 민자건의 덕행을 극찬 하였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순이나 민자건 모둔 정치인들이다. 한 사람은 때를 만났고 한 사람은 때를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다. 요임금도 공자도 모두 정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인물들이다.

순이나 민자건 모두 맺고 끊음이 분명하였다. 정치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 무대에서 무엇 때문에 효가 그 덕목이 되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통해서 21세기가 원하는 보편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야에 묻힌 순의 행적을 살펴보자면 사람의 힘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경계가 닥치면 그는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던 것이다. <<서경(書經)>>은 이 덕목을 ‘효(孝)’라고 말하면서 “순은 고수의 자식으로서 아버지는 완악하고 어머니는 어리석었으며 동생은 방자하였지만 효로서 화합하게 하여 차츰차츰 다스려서 간악함에 이르게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순이 지닌 효이 힘은 여기에 그치지 않앗다. “그가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을적에 1년이 지나자 역산의 사람들은 밭두둑을 양보하였고,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삶을 꾸릴 적에 뇌택의 사람들은 자리를 양보할 줄 알았으며, 물가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는 도공들이 찌그러진 그릇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가 사는 곳은 1년이 지나면 촌락을 이루었고, 2년이 되면 읍을 이루었으며, 3년이 지나면 도읍이 생겼다.” 고 하였다.

하지만 순의 아버지는 계모와 이복동생 사이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들과 합세하여 정실의 자식 순을 언제나 코너로 몰아붙였다. 공자의 제자 민자건의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행위를 한 셈이다. 민자건 역시 효행을 실천한 사람이었는데 그 역시 계모와 이복동생이 있었고, 계모 또한 순의 계모와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들의 행위는 달랐지만 효를 실천한 순과 민자건의 행동은 같았다.

이들의 닮은 점은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고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가 순을 선택하여 나라를 맡긴 것이나 공자가 민자건을 효행의 덕목으로 극찬하였던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인들이 한결같이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말라.”고 한 말은 모든 허물은 자신의 존재에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오늘날 심리학에서 남을 탓하기 시작하는 데서부터 정신이상의 시초로 보는 것 또한 이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 어떠한 경계도 닥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자신의 존재로부터 일어난다. 사람의 그릇됨은 극한 상황에서 그 크기가 결정된다. 이 그릇을 키우는 수양은 가장 가까운 경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필자는 경학(經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를 고민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 적에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경우가 있지만, 상대가 실수하여 잘못된 경우도 있으며, 제삼자의 개입으로 잘못된 경우 등이 있다. 이 경우의 수에서 내가 잘못한 거이면 스스로 인정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지만 남의 잘못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나한테 허물을 돌리라고 하는 것은 책임 소재를 다져 볼 적에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이 ‘내 탓이요’하는 이 문제에 고뇌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효(孝)라는 덕목은 과연 무엇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성인들이 무슨 까닭으로 수양의 첫걸음을 여기에서 떼게 하는 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부모한테 순종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인 지, 아니면 철학적인 다른 깊은 뜻이 그 속에 숨어있는 것 인 지 한번 짚어보아야 한다. 효는 크게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우선 시간의 개념으로 보면 효는 살아 있는 자와의 관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은 자의 제사 도한 한 생(生)만의 순종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부모, 증조모ㆍㆍㆍ 시조의 제사까지 헤아려보면 결국 시간의 경계가 무너진다.

‘효(孝)’자를 파자(破字)로 보면 ‘고(考)’와 ‘자(子)’로 구성된 글자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子)>>를 보면 육서(六書)의 원칙을 갖고 조합되었다. ‘고’는 죽은 부모를 의미하므로 죽은 자를 상징하고, ‘자’는 자식을 의미하니 산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효라는 것을 시간적 개념으로 보면 죽은 자와의 관계 설정에 좀 더 무개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살아 있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죽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죽은 부모는 우리 눈앞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공자가 “아버지의 도를 3년 동안 바꾸지 않아야 비로소 효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대목은, 선망의 부모를 섬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말을 극도로 아꼈던 공자였지만 제사에서 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내가 참석하지 않는 제사는 마치 제사를 지낸 것 같지 않다.”

<<시경(詩經)>>을 통해서 은*주대의 죽음관을 보면, 그들은 조상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서 자기 후손을 살펴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물론 이 관념적인 생각이야 그들만의 소망일 수 있다. 진실의 사정을 따지기 전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탓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시절의 민심 또한 소박하였으므로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필자가 문제를 삼는 것은 조상의 죽음을 시간의 단절로 여기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하고 있음을 그렇게 믿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유식(唯識)으로 이해할 필요는 굳이 없다고 본다. 그들이 선악의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를 단지 조상들이 그렇게 믿었고 그 후손들 도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보자는 것뿐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죽음의 문제는 삶에 있어서 화두이지만 공자의 스쿨에서는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을 매우 꺼려하였다. 코앞에 닥친 사람의 도리는 행하지 않고 쓸데없는 곳에다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심산이다. 죽음의 세계는 산자의 모습으로 보면 사실 매우 간단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사실 미래는 그 삶의 흔적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자로(子路)가 죽음의 세계를 묻자 “생(生)도 모르면서 어찌 사(死)를 알 수 있느냐.”고 공자가 면박을 주었던 일화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생(生)이전과 사(死) 이후는 시간의 추이야 다르지만 한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모순은 사(死)에 대하여 언급 자체를 부정하였지만, 효(孝)에 있어서는 오히려 사(死)이후를 더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사마천도 지적하였듯이 유가(儒家)는 매우 복잡한 예문화(禮文化)를 갖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상례(喪禮)는 정말 정교함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공자는 사(死)의 언급 자체를 꺼려하였지만 그가 손질한 예(禮), 추구한 효(孝)는 사(死0의 문제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는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이 참석하지 않은 제사는 제사를 지낸 것 같지 않다.” 고 술회를 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사(死)의 세계를 얼마나 경건하게 대하였는 지를 알 수 있다.
공자가 사(死)의 문제를 접근한 것은 바로 효(孝)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효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고리인 셈이다. 그리고 한편 제사에서 시동(尸童)을 내세워 봉행의 주체로 삼은것, 또한 사(死)의 세계를 살아 있는 자의 시각으로 인식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조상과 후손이 한 뿌리로 이어진다고 믿었던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제례(祭禮)를 통해서 살펴보면 신관체계(神觀體系)도 그런대로 뚜렷하게 갖추어진 유가(儒家)이지만 사(死)의 자체 논쟁을 꺼려 하였던 만큼 그 구체적인 면에 있어서 결국 커다란 빈자리로 남게 되었다. 송대(宋代) 유가(儒家)의 사상까지 통째로 유가를 볼 적에 사후 세계는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의 영혼이 윤회한다는 것까지 인정을 하면서도 그 구체성을 띠지 못하였던 것은 그 경지를 산 자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맹자(孟子)가 기(氣)까지 언급하였던 것을 보면 정신세계의 수양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후의 맥은 역사에서 단절된 채로 송대의 정주(程朱)로 이어졌으므로 후대에서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이런 반면 도가(道家)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영혼의 세계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삼혼칠백설(三魂七魄說) 같은 것을 들수 있는데, 그들이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이른바 ‘4차원의 정신세계’를 유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 뚜렷한 한계를 드러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우주의 신비는 깨달은 경지만큼 열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붓다로 향하는 수행에서 계행(戒行)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절대세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수행도 절대적이지만 이타행(利他行) 없는 절대세계 또한 상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찾아야 하는데, 오늘날 대승의 모습은 그 본래 면목을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어찌 되었든 한중일 삼국(三國)가운데에서 동양의 문화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곳을 한 곳 선택한다면 단연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공산주의로 인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일본은 자국의 문화를 접목시킨 과정에서 너무 변질되어서 원형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요즘 들어 간화선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원형으로 회귀를 도모하는 일이 여기저기에서 싹트고 있다. 그들은 세(勢)를 모을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지 주춤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추신/"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은 이 시대 최고의 성서인<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각 계의 대표적 불자 지성인들이 읽고 진솔하게 밝힌 찬사와 감동의 평론을 담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