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9일 화요일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중국불교의 산물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중국불교의 산물



밀교의 우수한 수행 체계, 타력 염불 수행의 우수성 외에도 힌두교
의 삼매에 드는 요가 수행, 유대 신비주의의 심오함,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의 신비주의 유교의 격물치지 수행, 도가의 기동 수행법으로도
달공하여 불교의 아라한위까지 진입 가능하다.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중국불교의 산물이자
경전 상 명문 근거가 없다. 

화두선에 대해서는 정말 언급하고 싶지 않으나 너무 오랫동안 우리 
한국불교를 병들게 해서 별도의 단원으로 다루었다.

큰스님 말씀대로 화두선을 통해서도 견성을 할 수 있으므로 화두선
이 100% 나쁜 것은 아니다. 수행자의 체질이나 전생 선근에 따라 화
두선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다.

하지만 일부 수행자들에게나 효험이 국한되는 수행법으로는 21세기
한국 불교 아니 전 세계 불교를 견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만약 화두선이 그렇게 휼륭한 수행법이라면 왜 청전 스님처럼 한국
불교에는 위대한 큰스님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왜 스님들의 명성이
널리 선양되지 못하고 있는가 말이다. 화두선 수행자들은 깊이 이 점
에 대해서 숙고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출처/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선불교의 흠결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신행, 즉 부처님의 존재를 믿는 불제자로서의
기본 수행 마음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부차라고 하는
실정인데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마음이 부처라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인데 수행은 왜하고 불교는 왜 믿는지 의문스럽다. 

마음이 부처라면 종교는 종교도 아니고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않다는 것을 신심 깊은 불제자들은 알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종교는 세계 그 어느 종교에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둘째, 견성, 즉 깨달으면 부처가 됐으니 막행막식하고 사음도 가하다
고 하는 것이 오늘날 선불교의 현주소다. 

계율이 없는 불교는 불교가아님을 알아야 한다. 
계율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2500여 년을 존속 유지되어 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셋째, 경전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잘해야 아라한 자리에
불과한 조사들의 어록들을 부처님의 경전보다 더 소중히 하는지 이유
를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한국불교가 살아남으려면 대승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넷째, 염불을 하근기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염불 수행을 제대
로 해본 적이 없이 하근기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염불 수행의 오묘한 맛과 쉽고 빠른 경지 증득을 모르고서는 절대 
염불선을 하근기 수행이라고 모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화두선은 상기병, 정신질환, 주화입마에 걸리기 
쉬운 수행법인 반면 염불수행은 부작용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효를 다해야 한다. 부처님이 주관하시고 불과를 중한 청정하
신 큰스님이 집전하시는 천도대재를 치르고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
그리고 친인척들을 하늘로 천도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부처님은 마음의 산물이 아니다. 어찌 마음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마음이 부처님이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모욕하고 능멸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법화경 비유품의 부처님 말씀처럼 공성의 증득으로 붓다라
할 수 없다. 32상 그리고 10력 등 모든 붓다의 공덕을 갖춘 색신보신
을 성취해야 붓다인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불신을 얻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고 확인하신다.

일곱째, 생사관이 없고 육도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지옥이
없고 천상이 없다면 아함경에서 설한 육도 윤회는 거짓이란 말인
가? 그것은 부처님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덟째, 참선만이 유일무이한 깨달음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독선
적이고 배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위빠사나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라 분명히 하셨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1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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