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7일 화요일

[불교---1]불교의 위대한 점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윤회에서, 삼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른은 아라한 성자부터라고
했습니다.
아라한부터 빙의가 없습니다.
명부에도 못 들어간 영가귀신가 빙의된다면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의 몸은 청정하며 보살은 청정하다못해 발광發光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발광 정도가 아니라 빛덩어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성자는 자기 나라의 말로 자기만의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공空을 깨쳐서, 혹은 묘유 속으로 헤엄쳐 나가며 부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 노래는 착이 없고, 상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도송을 읊고, 법거량하는 것은 공부의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옛 스님의 것을 표절하여 흉내나 낸다면 더더욱 안될
일입니다.

먼저 불성을 보왔다면, 나의 본질도 보아야 합니다. 인간 영혼체의
비밀도 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영혼체를 영체라고도 부릅니다.
중생의 영혼체는 다층구조이며 4개의 영혼체가 겹쳐져 있습니다.
아라한 도道 이상을 이뤄야만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삼매에 자재해야 해탈이 가능합니다.

3번 영체로 몸을 빠져 나간다면, 그것은 삼매가 아니고 하늘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소신한다 해도 3번 영체로 빠져 나가는 삼매진정한 삼매가
아니라면 그를 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2번 영체로 몸을 자유로이 나고 든대도 그것 역시 진정한 삼매가 아닙니다.
1번 영제로 나갈 수만 있다면 극락정토까지 갈 수 있어서 여기부터가 진정한
삼매의 시작입니다.

삼매에 들려면 심신이 맑고 청정해야 합니다. 우주가 이 몸 안에 있고,
내가 우주 안에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무너진 이 경계는 아라한부터
가능합니다. 보살의 마음은 안과 밖이 수정같이 맑아 깨끗함과 더러움의
분별을 뛰어 넘습니다. 그저 깨끗하고 깨끗할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상대가 빙의됐는지 여부도 압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삼메에
들었는지도 압니다. 견성하고 도통했다지만 절반 이상은 빙의된 경우이고,
공부 많이 한 수행자가 명부에 못 들어가 수행자에게 빙의된 사례도
많습니다.

그가 빙의된 데다, 그리고 선서를 많이 보아서 오도송도 나오고, 법거량도
휼륭하게(?) 하기때문에 격외를 노래한다고 해서, 아라한 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아 속 삼매가 진정한 삼매이고, 완벽한 생사해탈, 즉 대열반은 무아 속 삼매에
자재해야 하며 무엇보다 자기의 불신을 얻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불신을 얻는다는 것은 대우주와의 완전 계합입니다. 업장과 번뇌, 그 습기의
찌꺼기까지 다 녹아야 불신이 생깁니다. 이 일은 부처님 경계이기에 윤회 안
중생과는 너무 거리가 먼 법문이라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단언하건대 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의 불신을 두지 못하면, 즉
청정법신과 원만보신을 구족하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는 것만 재삼
말씀해 둡니다.

불법, 정법을 만나 삼악도에 안 떨어지는 것만도 대단하게 여기지만
가능하면 여기에서도 큰스님을 만나 수행해서 윤회를 벗어나 성자,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성중의 반열에 들면 영원히 인간세계에 안 나오려면 안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다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아서 불법을 만나고 더구나 정법의 감로
법문을 듣고서도 우리 이대로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라한 성과를 이루면 보살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공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이타행만은 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선근공덕의 보따리가 문제입니다.
그 보따리가 커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진화합니다.
아라한 되고, 보살 될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근보따리입니다.
출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붓다_ 성중성 聖中聖


불교는 완벽한 생사해탈 곧 대열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붓다가 나올 수 없고 불 보살이
출세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만이 붓다가 나옵니다.
'성자 중의 성자' 라 할 수 있는
붓다가 탄생하십니다.
보살이 출세합니다.
이 점이 바로 불교의 위대한 점이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 위대한 가르침이여!

교학하는 이들은 불교의 무진연기 무아사상 등이 불교의 위대
한 점이라고 합니다. 법계의 위대한 경전 화엄경의 일중다一中多
사상, 보살의 원행願行 사상이나 신비로운 밀교사상, 정토삼부경에
기초한 정토사상 역시 위대한 발견이라고 하여 불교가 제일이라
주장합니다. 시방삼세를 회통하는 불교의 심오한 교의와 철학 사상
은 과연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불교경전의 방대함도 다른 종교의 그것과 비교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아함부만 해도 1만 8천여의 경들로 이뤄져 있
습니다. 그리고 방등, 반야, 화엄 등의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있습
니다. 티베트 쪽으로 흘러 들어간 밀교의 그 수많은 분량의 경전
들까지 합한다면, 분량에서도 가히 위대한 종교라 아니 할 수 없
습니다.

또한 불교는 그 화엄사상에서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양
자역학을 불 수 있어서 '과학의 과학' 이요, 선 반야 구사 유
식철학을 보면 가히 '철학의 철학' 이요, '학문의 학문'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토, 밀교 사상에서 본다면 '종교의 종교' 입니다.

과거 장엄겁 동안에 일찍이 불과를 이루셨던 삼천대천세계의 그
수많은 붓다들이 동서남북 상하에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불신佛身
은 없으나 불격을 갖춘 상수上首 보살님들도 무수히 계십니다. 그
래서 불교는 가장 힘이 있는 위대한 종교인 것입니다.

극락세계 위의 동방 약사부처님 정토정유리세계와 그 외 시방十方
에 산재한 정토세계에 있는, 무수 무량한 8지 이상 10지까지의
정토보살들과 상품등각 보살들의 수효는 더욱 많습니다.

이뿐입니까? 불 보살들을 받드는 성중들은 얼마나 되고요? 일
백사위 화엄성중의 대군단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사람이 죽어
서 가는 명부와 지옥도 지장보살의 수중에 있습니다. 이렇듯 불교
는 위대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자랑스러운 불자라는 긍지를 갖기 바랍니다.
'붓다 중의 붓다' 요, '부처님 중의 부처님' 은 다름 아닌 석가모
니부처님이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삼계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다음은 다보불입니다. 삼계의 지존이십니다.

붓다마다 좌우보처 보살이 배정됩니다. 그리고 붓다마다 50명
이상의 아라한급 성중이 호신합니다. 황금색 장삼과 빨강 가사 그
리고 불자佛子가 주어집니다.

불교는 위대합니다!


출처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

오늘날 수행자들이 구가(謳歌)하는 정신세계는 견성(見性), 즉 깨달음이다. 하지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수행자의 한계, 즉 견성을 초월하여 아라한, 보살, 붓다를 거론한다. 지극히 장엄(莊嚴)한 세계가 견성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극명하고도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까지 어느 누가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존재의 계층적 도식(Hierarchy Schema)과 붓다의 삼신설(三身說) 그리고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의 중요성을 이렇게 큰스님처럼 명료하게 서술하였던가?

우리 불제자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기존 선 불교를 건전한 시각에서 올바른 비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불제자들은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즉, 큰스님께서 선 불교가 100%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선 불교의 세계를 환골탈태시켜 더욱 고원하고도 지고하게 확장시키려는 각골쇄신(刻骨碎身)과 혼연(渾然)의 노력들을 엿 볼 수 있다.

선 불교는 엄연히 한국 불교의 수행적 토양을 다지는데 좋든 나쁘든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 모든 불제자들은 이 점을 명각(明覺)해야 한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볼 때 그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선 불교가 주장하는 견성, 깨달음(Elightenment),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모두 아라한을 한계점으로 갖는다. 큰스님 말씀대로 인간으로서 견성을 하여 보림 후 아라한에 이르는 것만도 엄청난 일이며 참으로 힘든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 불교의 이러한 아라한까지의 깨달음에 의해서 근본불교 당시 석가모니부처님의 삼신설 체계가 가리워지고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알리기 위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출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령 큰스님께서 단순히 선 불교의 폐단만을 비평하기 위해서 성작(聖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친술 하셨겠는가?

올바른 지견과 식견을 구비하여 큰스님의 서적과 법문을 대면한 불제자라면 큰스님의 심오한 대의(大意)를 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선 불교의 한계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선 불교를 근본불교에 기초하여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큰 스님의 염원에서 쓰여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힌두교의 범아일여 사상과 서양의 유대신비주의 인 그노시즘(Gnosticism 靈智主義)의 최종 목표와도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카발라에서는 아인 소프(Ayin Soph 히브리어로 무한이라는 뜻)로, 타로체계에서는 우아일체(宇我一體)로,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로, 그노시즘에서는 영지(靈智 Gnosis)로서 알려져 있다. 도가(道家)에서도 노자(老子)는 도가 수행 세계의 종지(宗指)를 현묘지도(玄妙之道)로 거론하고 있다. 현묘함이란 바로 불가(佛家)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비슷한 맥락을 한다. 따라서 전 세계의 수행문화가 20세기까지 그 최종 목적을 아라한 정도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시대는 급변하고 전 세계에는 아쿼리안(Aquarius)문명을 맞이하여 뉴에이지 열풍에 명상수행에 요가, 단전호흡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세태 속에는 세계 구도자들의 보다 큰 소식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관통하고 있다.

또한 견성의 수준으로는 생사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으며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거나 정립할 수 없다. 즉, 선 불교만이 한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영성문화와 종교 수행 체계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상에서 가장 심오한 수행체계이자 광대무한(廣大無限)한 철학사상을 함유하고 있다. 한편 지구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불교 박해와 탄압이 외부적이거나 묵시적으로 행해져 왔었다. 그러한 박해와 탄압의 어려운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너무 고차원적인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는 어쩌면 단순히 아라한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교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나름대로 일조를 했다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결국 선 불교는 불교의 맥(脈)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역할을 잘 이행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자각(自覺)의 눈을 크게 뜨고 오늘날의 위기에 몰린 불교를 복원시키고 중흥을 도모해야 할 때가 왔다. 불제자들 간에 너무 음계(淫戒)가 무시되고 막행막식으로 수행을 하는 경향이 불가에 만연해 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를 차마 그대로 방관할 수 없는 큰스님께서 친히<<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리라.

재차 강조하는바 선 불교는 강직한 행동과 난해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어려운 시절과 고비를 잘 넘겨왔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매우 높이 보이도록 했으며 불교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여러 형태로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잘못된 것은 아니니라, 진리(Truth)는 사실은 사실이라고 말할 때 증득된다.

즉 선 불교가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온 그동안의 공과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선 불교의 화두(話頭)와 공안(Koan)이라는 어휘는 전 지구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통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큰 스님께서는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선 불교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할 시기라고 사자후하신 것임을 명각(明覺)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저 유명한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고 말이다. 이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지니는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 설파하신 대로 “산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산에서 내려다본 정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일수록 크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사람만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수행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종교명상수행세계에 있어서 가장 높고 궁극적 경지라고 하는 붓다위에 이르셨다는 사실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어본 이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께서 증험한 최상승 경지에서 불교의 수행체계와 사상체계의 숭고(崇高)하고 광오(廣澳)한 면을 여실히 밝히셨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존평 p211~216






겁에 하나 출세하는 붓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불교에서는 이러한 붓다가 나온다는 점입니
다. 삼신을 구족한 붓다는 오직 불교에서만 출세합니다.

실제로 어느 대성자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원만보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모든
붓다의 청정법신을 한 몸뚱이로 하는 세존의 진불인 청정법신 비로
자나불 말입니다.

여름 한 낮의 햇살,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그런 빛을 백천만 개
합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밝은, 수미산만한 대지
의 빛 덩어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보고, 하나님이나 창조주 따
위를 넘어서 우주 자체가 되어 버린 무서운 그 부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득할 수만 있다면 불교의 위대함에 감읍하지 않고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분의 붓다는 그 위대함에 있어서 모두에서 소개한 여러 성자
들도 감히 따라오지 못합니다. 세존께서는 붓다의 출세를 "겁에 하
나, 천만 생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다"고 비유하십니다.

'중생 그리고 인간은 본래 불'이라 합니다만, 부처님께서는 그렇
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누구나 불성이 있기에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무명 번뇌를 다 거두어 내고 업장을 다 녹이면 성
자가 되고 나아가 공부가 날로 향상된다면 보살이 되고 언젠가는
붓다가 됩니다.

그리고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 덕상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경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마치 하나의 미세한 먼지 속
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화엄경>>의 도리 말씀과 비슷한 비유라
하겠습니다.

힌두교의 성정 <<베다>>에서도 인간이 백만 년을 수행해 날로
향상만 한다면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퇴전하지 않고 인신
을 받아 올 때마다 그렇게 백만 년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누구
나 윤회서 초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항상 태어날 때마다 공부해서 향상만 계속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생에 공부를 잘해서 상당 수준의 성과
를 얻은 후 다시 원을 세워 인간 몸을 빋아났다 해도 반드시 공
부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백천 생을 살면서 지은 악연
인연을 따라 방황하기도 하고 혹은 나락에 떨어져 형편없이 망가지
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 이루는 데까지는 3대아승지겁이 걸린다는
교가의 말이 맞습니다. 어쩌다 한 번 실수하여 여자에게 빠지면
공든 탑이 무너집니다. 짐승 몸을 받아 나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
지기도 합니다. 수행인은 이런 무서운 경우를 명심하여 뼈에 새기
고 정진해야 합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여!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알기바랍니다


뭇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불교사상은 우주적인 진리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불교도는 나의 생명과 똑같이 상대의 생명을 귀하게 봅니다. 따라서 불살생계는 우리 불교도의 첫 번째 계명인 것입니다. 불교만큼 평화를 애호하는 종교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사를一瞥하더라도 불교를 국교로 하거나, 불교의 이상을 정치 지도이념으로 해서 통치했던 국가가 이웃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불교 국가도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해서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거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그런 사례는 없습니다.

나는 이 난을 통해서 남의 종교를 험담 비방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무지한데서 죄악을 짓는 것이므로, 영적 무지를 깨우쳐서 모두가 선업을 쌓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0세기 말 경 - 우리 불교도라면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터키계의이슬람교 가즈니 왕조에 의해 17회에 걸쳐 북인도가 쑥대밭이 됐습니다.

불교와 힌두교의 사원이나 성지에 대한 파괴와 약탈, 승려의 학살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물만큼 철저하였습니다. 그 뒤 12세기 말 역시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비쿠라마시타 대불교사원의 파괴와 더불어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당唐의 무종武宗에 의한 ‘회창會昌의 폐불廢佛’이 가장 철저했고 대규모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동기는 도교의 불교 배격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만고의 사표라 숭앙받았던 공자의 가르침도 진秦의 시황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탄압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유서를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시킨 사건입니다. 공자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입니다. 인륜 도덕을 강조한 큰 공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미워하거나 험담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아니라 해서 무조건 비방하거나 폄훼해선 안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하물며 대성자, 부처님을 능멸하는 일, 깊은 수행적어도 삼매에 들 정도 없이, 학문적으로 충분한 이성적 검토 없이 불교라는 우주적인 메타종교를 이단시, 사탄시하면 중한 죄가 됩니다.
전각을 불태우고, 불상의 목을 자르고, 승려를 학살하는 일은 중대한 범죄인 것입니다.
화신化身佛이 들어있는 불상의 목을 치는 폭거는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극무간지옥행에 처해집니다. 불상은 우상이 아닙니다. 신행의 방편으로 조성한 것이지만 부처님의 화신이 듭니다.
필자는 깊은 삼매를 통해서 무엇이 진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죽으면 어딜 가는 지를 보고 중생들이 나고 죽는 세계를 봅니다. 지옥도 천상도 윤회를 벗어나 있는 정토 극락세계를 실제로 봅니다. 그리고 절대계에 법신불과 보신불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내면의 탐심과 진심, 어리석은 마음을 모두 한 티끌도 없이 정화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생사에 대한 문제를 끝까지 파헤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 공부를 많이 해서 재물과 여자에 대한 착이 없어져버리고 이 몸뚱이에 대한 애착이 완전히 끊어져버려 깊은 삼매에 들 수 있다면 중생이 윤회생사하는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음은 물론 윤회에서 해탈하여 정토에 날 수 있는 그런 지혜와 힘이 생깁니다.

≪불본행집경≫이나 ≪육도집경≫이라는 자카타Jataka 경전들을 보면 우리 부처님께서는 무량겁 이전에 불과를 이루실 때까지 백 생, 천 생을 자비의 보살로서 아름다운 이타행을 해 오신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날 적마다 항상 청정한 계율을 지키시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시면서 두타행으로 불도를 수행하셨습니다. 다만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중생을 불도로 이끄시고자, 그들을 대신하여 악도의 괴로움을 감수한 적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마치 예수Jesus가 인류의 원죄를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대신 속죄한 것처럼예수 역시 위대한 인류의 스승입니다 중생의 고통을 한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대수고代受苦하셨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지은 큰 공덕을 중생들에게 회향한 적도 무수히 많았답니다.

보살로 날 적마다 끝없는 자비의 행을 하셨으며 또한 오랜 겁의 세월동안 서원의 힘으로써 이윽고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고 아승기겁 전에 불과를 이루시어 법신‧보신‧화신 세 몸을 둘 수 있는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렇듯 위대한 어른이심을 확언합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성자가 부처님처럼 법‧보‧화 삼신을 갖추었답니까? 이런 성자를 폄하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종교가 다르다 해서 무조건 남의 종교를 사탄시하는 것은 지혜 있는 자들의 자세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상적광세계에 두신 당신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말할 것도 없고, 절대계에 두신 보신불불신의 광휘만 해도 중생은 상상 못할 그런 정도입니다. 여름날 햇빛 아래 노출된 크리스털 다이아몬드무량광‧억종광으로 이루어진 다이아몬드를 생각해 보십시오.

100%, 1000% 빛덩어리백종오색광인, 빛 자체이신 부처님의 불신을 최근의 한 실예를 통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무자년 O년 O일, 나는 광명 만덕 큰스님과 혜명정토27품 인가받은 스님과 함께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착하디착한 어느 불쌍한 신도를 돕고 싶어서 서울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비가 내리는 저녁 7시쯤 춘천 현지사로 돌아오는 도중입니다. 갑자기 차 안이 섬광보다 더 강렬한 빛으로 충만해집니다.

우리 교주 불 세존께서 차에 동승하신 것입니다. 광명 만덕 큰스님과 나의 영체는 각기 번개같이 몸에서 빠져나와 부처님께 오체투지 3배를 드렸습니다.

차 밖은 우리를 호신하는 일백 수십 명의 성중들 외에 부처님을 호신하는 수만의 무루 대아라한급 특별 성중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천지가 밝아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입니다.

10억Watt×10억 빛으로도 이 허공을 이렇듯 밝게 비출 순 없을 것입니다. 한량없고 수없는 빛깔의 광명이요, 마니구슬보다 더 빛나는 부처님 광명입니다. 동시에 안팎이 드러나고 청정무구한 빛입니다. 아름답고 영롱합니다. 굴러가는 승합차의 바퀴에 튕겨나가는 물방울들이 모두 억종광명이 되어 황홀할 지경입니다.

1시간 내내 부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보살펴 주고 온 선남자의 전생을 이야기해 주시고, 만덕 큰스님의 제석천왕에 대한 질문에 답해 주시고, 앞으로 우리들의 공부에 대한 그리고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의 음성은 부드럽고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그윽하고 청아한 미묘음이십니다. 천인이나 정토보살의 음색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경에는 “어일언음중於一言音中 구일체묘음具一體妙音 일일묘음중一一妙音中 구족최승음具足最勝音”이라 하였는데 잘도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묘음 가운데 가장 수승한 음성을 지니셨습니다. 현지사 거의 다 와서야 부처님께서는 떠나셨습니다.

나는 이 책 중간 중간에 밀장을 빼고는 조금씩 부처님에 관한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6일 만에 무無에서 이 천지만물, 우주 모두를 창조한 인격적 하느님은 없다고 나는 분명히 했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까지도 모든 것의 이전, 천지 이전은 분명히 영원불멸하는 우주 대생명입니다. 우주에 편만하고 스스로 있는 자존자 I AM입니다. 도道입니다. 공空입니다. 범梵입니다. 마음입니다-.

이것은 절대요 완전이요 최초의 원인으로서 사랑이며 지혜이고 힘이며 조화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인격적 이법입니다. 우주의 진리입니다.
여기에, 백천만겁을 두고 청정을 닦고 지혜를 계발하며 보살도를 완성하여 다겁생 동안의 업장, 악·습기를 지멸하고, 탐진, 108번뇌를 다 녹인 청정무구한 붓다의 지위에 오른 수행자의 분별을 떠난 여여의 지智, 평등성적 대원경지의 지智가 바로 우주의 본체, 진리와 계합되어 하나가 됩니다. 진리의 몸을 이룹니다. 이 진리의 몸을 법신불이라 합니다. 무형이지만 우주의 몸으로서 초월적 인격체라 볼 수 있어 여기서부터는 몸身을 붙입니다.

무형이라지만 빛, 존재의 근원인 빛, 그 빛의 빛인 백종오색광명덩어리입니다. 작열하는 햇빛 아래의 크리스털 억종광 다이아몬드 법신불입니다. 우주의 본체에 불과를 이룬 대성자의 지智라는 무루식이 깃든 이불理佛입니다.

다시 이 법신불에 보신불불신이 들면 우주의 진리, 우주의 이법을 부립니다. 힘과 이법을 부립니다. 진실로 우주의 주主가 됩니다. 우주적인 힘, 능력을 씁니다. 만물을 태초에 창조한 인격적 하느님은 없지만, I AM을 자체화自體化한 진정한 하느님이 곧 부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삼천대천세계이 세계의 에테르 본체를 집어 던질 수도 있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 자체가 됩니다. 하느님은 없으나 불과를 이룬 부처님은 절대계에 계십니다. 현지궁 현지사에서는 부처님 이후로 불의 삼신을 갖춘 두 분 큰스님이 출세한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10장 중에서





불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중생들은 각기 종자가 있다는 불가의 유식법상唯識法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귀 꽉 막

힌 지옥종자도 분명히 있습니다. 육도에 윤회할 종자가 있는 반면

윤회를 벗어날 종자, 특히 희유하지만 보살 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옥 종자라 해서 마냥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교화하면

됩니다. 마치 아무리 나쁜 나무라도 접接을 붙이면 좋은 나무를 얻
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된다, 남 못할 일 안하면서 바르게 살면 된

다' 고 합니다. 좋습니다. 인생을 대과大過없이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습니다만, 그렇게 산다 해도 윤회의 생사고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

탈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궁극에는 붓다가 되길 원하십니다. 여기
가 완전 해탈이요, 절대 자유요, 대열반이기 때문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



진여일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참됨의 본성을 뜻한다. 불

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에 일차적 목표를 둔다.

이 본성이란 본 면목, 자성, 참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바
로 우주의 체성이다.

자신의 마음이 근원 일성으로 돌아가면 본 고향에 돌아온다. 그

래서 유가에서는 이를 복명이라고 하여 명(목숨)을 태어나

기 이전의 원래 생명의 시기로 되돌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견성이다. 본성을 체화하여 증득하면 그것으로 성품과
계합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까지가 삶도 죽음도 없는 시공을 초월한

경지이다.

오온은 집착을 일으키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의미하며, 이 오온이라는 것에 의해 오감이 일어난다. 오온의 본

질이 텅 비어 있음을 관하기 위해서는 계율, 특히 음계를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한다.
사실, 불가의 가르침이 귀중한 이유는 계 정 혜 삼학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뼈를 깎는 노력과 눈물겨운 노력만

이 영혼을 환골탈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내면을 비춰 보는 것을 화광반조
라고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것, 또는 잃어버린 마음

을 찾는 것이 바로 복본심성이다.

견성을 하게 되면 심원하고도 고차원적인 세계로 증입해 들어

간다고 큰스님께서는 전하신다. 죽 청정하고 고원하며 지고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큰스님을 제외하고 견성 이후 아라한과

이상에 대해서는 언급한 선지식이 전무하다.

필자 수준에서도 이 논고를 작성하면서 알 수 없는 내용을 말할 수

없어 큰스님의 가르침을 열거하는 미흡한 수준을 면치 못한 점, 큰스

님께 그리고 불제자님들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큰스님의 법 세계를 필설로 언급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큰스님의 법

세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부사의하며 어마어마하고 장엄하고 거룩

하다는 점을 말해둔다.
타종교 어디를 봐도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체계적인 위계는 전무하
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불가에 귀의 귀명한 것을 큰 기쁨으로 삼고

열심히 구법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명료한 위계는 불제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더 지고한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향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자극제가 된다는 점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일체 중

생을 비롯하여 견성과 아라한과를 이룬 수행자라면 자력 수행만을 고

집하거나 고수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큰스님이 하사하신 칭명염불선

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아 타력 수행으로 아라

한과를 넘어서 보살과 그리고 불과로 증입해 나가는데 진력할 것

을 권청하는 바이다.
희유하시고 거룩하신 부처님의 법세계를 남섬부주 대한민국에 펼쳐

주신 두 분 큰스님께 오체투지하고 예배드린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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