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0일 화요일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 3]견성,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수승한 공덕의 염불 수행법


     2011년 초파일 13만등 작업하는 모습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


 현지사 두 분 큰스님의 법 세계(法世界)는 정말 희유하고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분 큰스님의 법 세계를 조용히 관조해보면 초 인류의 신성(神性), 아니 우주적인 성심(聖心)이 내재되어 있음을 여실히 목도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분 큰스님의 법 세계를 통해서 희유하시고 거룩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법 세계를 대면할 수 있어 정말 복된 이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인연을 얻기는 참으로 힘들다고 본다.



 이 점 깊이 석가모니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께 감사드리며 본고에서는 현지사의 법 세계 중에서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의 위계에 대해서 논고하고자 한다.



 무릇 불제자라면 엄연히 견성, 즉 깨달음과 여기서 더 나아가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의 경지에는 모두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후의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는 시종일관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의 위계(位階)에 대해서 역설하셨다. 이는 서양에서 일컫는 존재의 하이어라키(Hierarchy)에 대한 불교적 실재 세계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의 위계



고대 유가(儒家)에서도 전해내려 오는 장유유서(長幼有序) 사상을 아라한, 보살, 붓다의 위계를 통해서 여실히 목견(目見)할 수 있다. 즉, 장유유서의 사상이 우주적 법계의 위상으로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장유유서의 사상보다 더 이전에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 오셨을 당시에도 불문(佛門)에 먼저 들어온 스님이 불문에 늦게 발을 들여놓은 스님보다 서열이 높았다고 경전에는 전한다.



 하물며, 이와 같이 사바세계 현상계에서도 스님들의 위계와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어찌 우주 법계라는 지고한 존재계에 거하시는 불보살님과 아라한(聖衆)들의 세계에 위계와 질서가 없겠는가?



큰스님께서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법계의 구도(構圖)를 설하신 것은 지극히 탁월하신 지견(智見)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큰스님께서 이를 사자후하시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선지식들과 불제자들은 아라한, 보살, 붓다의 위계를 간과하거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큰스님의 광명광대(光明廣大)한 법 세계에서 아라한, 보살, 붓다의 위계만을 떼어내어 고찰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법 세계의 일면만을 바라볼 수 있어 우리 불제자의 시각을 제한시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서(聖書)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의 법 세계는 수많은 보석같이 영롱한 가르침들이 화엄사상(華嚴思想)처럼 상호융섭(相互融攝), 상즉상입(相卽相入), 원융회통(圓融會通)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을 조망하는 것은 큰스님의 법 세계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한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시각을 지양하고 통합적이고 유기적이며 거시적 관점에서 큰스님의 아라한, 보살, 붓다의 위계에 대한 법 세계를 언급하고자 한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서문을 친설(親說)해 주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 중에서 불가(불가)에 귀의한 구도자가 아라한에 이르는 도정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옥과 천상이 있고

 업보중생이 육도에 윤회생사하느니라.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존재의 근원을 철견해야 하느니라.



 이후부터 중요하노니

 음계 등 중계를 호지하면서

 나 없는 공부 두타행으로 나아가라

 그래서 증득하면 성중(아라한)이니라.



먼저, 불가에 귀의한 부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지옥과 천상 등의 육도 윤회가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윤회를 벗어나고 해탈하여 사바세계의 중생심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청정인(淸淨人)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Sein)의 근원을 철견해야 한다. 이 존재의 근원을 철견하는 것을 견성(見性), 또는 큰스님 말씀대로 현성(現性)이라고 한다.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신다. “조사선을 공부하는 이는 의단이 자리잡아 화두 타파하는 순간 경계가 확 뒤집히는 과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때 드러나는 것은 자성 광명뿐, 내 앞의 모든 게 공이 되어 나도 없고 나라는 생각까지도 사라집니다.

 아공, 법공, 구공입니다. 생각 이전의 본래 면목, 진여 자성입니다. 태양광과 달라서 여여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빛이요, 공적 영지입니다. 법계를 비추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정화된 마음의 빛’입니다.”라고 말이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주와 객의 벽이 무너져 버리고, 툭 터져 허공같이 비었습니다.적조요 만고의 광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음은 실체가 없어서 가고 옴이 없고 여여 부동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라고 자상히 밝히시고 계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 큰스님께서는 “소위 견성에 이름으로써 저 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상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창조주란 없다!’고 선언하는 단계가 바로 견성의 경지였습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서 이 몸뚱이란 4대(지수화풍)로 이루어진 옷이나 집과 같은 ‘가짜 나’라는 것과, 나라는 것도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연 소생의 가아(가아)이며 이 세상은 꿈이나 그림자 또는 이슬과 같은 무상한 존재라는 사실도 발견하였습니다. 분별하고 사량하는 것은 생각일 뿐, 마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대열반 광명이 중생의 털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는 불도를 이룬다


 견성이 완벽한 수행의 완성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수행자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무량광(無量光)을 깊은 대적정 삼매 속에서 봐야 한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리고 대적정 삼매 속에서 봐야 한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리고 대적정 삼매를 통과하기 전에 이미 보살과를 증위해야 한다.



 보살과 증위 과정에 대해서는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즉 “대열반 광명이 중생의 털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불도를 이루리라는 말씀대로, 수행인이 공부하는 중에 선정에 들어 빨강 가사, 장삼을 수하신 문수·보현보살 그리고 관음·세지보살께서 방사하시는 부처님의 광명(대열반 광명)을 온 몸의 털구멍 속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종종 만나면 보살의 위에 든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이다.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선사들 어느 누구 한 분 제대로 이렇게 보살과를 증위하는 과정에 대해서 여실지견으로 설명한 말씀이 있는가?



 그리고 견성을 했다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사관(生死觀)을 확립한 것이 아니다.

큰스님께서 생사관이란 바로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거기서 명이 다하면 다시 어디로 가고, 또 그곳에서 업연이 다하면 어디로 가는지, 중생이 각자 지은 업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을 어떻게 전생하게 되며, 윤회 안의 세계와 삼계를 뛰어넘어 해탈을 이룬 성중(아라한 혹은 조사), 보살, 붓다들은 또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하게 관하고 세운 견해로써 붓다의 경계에 들지 않고서는 알 수도 없고 정립할 수도 없다.”고 사자후하신다.



 진실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고 자부하시는 선사들은 이제 스스로의 경지를 다시 가늠해 보고 큰스님의 말씀처럼 명료한 생사관을 얻지 않았다면 자신이 붓다가 되었다거나 깨달음이 수행의 종착지라고 말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부디 오늘날의 모든 선지식과 선사들께서 생사관과 불신(佛身)사상 그리고 깨달음의 증입 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현지사의 두 분 큰스님을 보좌해 함께 펴나가는 날을 기원하면서 삼가 불과(佛果)를 증위하신 거룩하신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님의 존좌(尊座) 하에 오체투지를 하며 예배드린다.





견성에 이르는 과정,
선(禪)과 팔정도(八正道)


수행자가 견성을 얻으면 집착, 번뇌, 세속적 욕구 등이 표면적으로는 거의 사라진다. 즉 무의식에만 잠재된 상태로 남아있을 뿐 표면적이고 외면적으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편안한 해탈 몸을 얻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한시 바삐 해탈 몸을 얻기 위해서는 불과를 이루신 큰스님의 회상을 만나 큰스님을 믿고 끊임없이 과거의 습기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집착을 벗어나는 길은 무엇보다 세속적인 것들은 모두 덧없고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는 데 있다. 그리고 알아야 한다. 인도의 요가에서는 즈나나(Jnana)라고 하며 불가에서는 식별지(識別智)로 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식별지라는 것은 분별지와는 달리,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대해서 그리고 현상세계의 사건(Event)과 상황(Situation)을 포괄하는 법 세계와 자신의 마음 자리를 잘 살펴보아 중생심(세속적 욕망)과 청정심을 잘 식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별지를 위해서는 팔정도의 정사유(正思惟)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즉 허망한 망상과 덧없는 망상을 여실지견으로 통찰 및 파악하는 것은 정사유로서 바르게 생각할 때 가능하다. 정사유는 행동에 대한 마음의 일치를 의미한다. 심신일여(心身一如)를 얻어가는 과정에서 정사유가 확립된다.



 즉 심신일여(心身一如)와 정사유는 상호 보완적이다. 따라서 수행자의 경우 하루하루 생활하면서 마음으로는 딴 것을 생각하면서 몸으로는 일을 하면 그것은 정사유가 아니다. 정사유란 일과 생활을 하면서 시시각각 철저히 몰입하여 마음이 일을 통해서 만족을 하고 즐거움을 누릴 때 얻어진다. 정사유는 몸과 맘이 하나가 되어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행동이 마음과 하나가 이루어지는 지행합일이 될 때 얻어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얻어지지 않는 사유는 정사유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수행자가 일과 생활에서 행위들 하나하나에 대해 명확한 성찰(省察)을 얻게 해주는 것이 정사유이다. 반면 정사유를 통해서 지행합일(智行合一)이 이루어진다.



 한편 모든 것을 바친다는 헌신(獻身)의 개념도 정사유를 각성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헌신을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는 수행자가 마음으로 가장 바라는 바를 몸을 바쳐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에 대해 헌신하는 것이다. 수행자 자신이 만약 나는 이렇게 열심인데 왜 남은 열심히 하지 않는가? 또는 나라면 열심히 할 텐데 왜 남은 열심히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망상으로서 독선(獨善, 홀로 옳다고 생각함)이다.



 독선은 정사유를 파기(깨뜨림)한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으로 세상만사와 타인의 세계를 한정짓거나 규정짓는 것 그리고 판단하고 예단(豫斷)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과거 생각과 고정 관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라면 이렇게 할텐데 왜 타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결국 무의식의 습기로서 타인들에 대한 원망을 내재하게 된다. 무의식에 원망이 내재하게 되면 청정심을 가리는 먹구름이 드리운다. 그래서 타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알고 그 사람을 배척하고 싫어한다.



수행자가 올바른 마음으로 일과 생활을 통해서 심신일체(心身一體)가 될 때,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판단하는 마음을 없앨 때 더 나아가 수행자의 마음과 반연하고 작용하는 인연(因緣)들을 소거(消去)해 나갈 때 수행자의 마음은 하나로 모아지고 집중과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정사유와 상호 작용하여 생활과 일이 한 마음으로 집중하고 몰입할 때 중생심과 착, 습기 등을 하나 둘 탈각되게 한다.



 또한 정사유의 능력을 배양시키고 이렇게 배양된 정사유는 지혜(智慧, Wisdom))를 증장시킨다.  사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선(禪)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禪定)을 의미하면 텅 빈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무집착의 일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定)이란 바로 안정성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Stability라고 하는데 이 안정성은 바로 고요함, 평화로움, 조용함 등 호숫가의 고요한 상태를 지켜보듯 그러한 편안함을 의미한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서는 집중과 몰입이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삼매(Samadhi)는 더욱 요원한 일이다. 정사유(正思惟)는 현재 수행자 자신이 하는 생활에 대해서 일념으로 몰입하여 생활에 따른 행위 하나 하나에 마음을 합일시키는 것이다. 팔정도의 정사유를 강조하는 이유가 큰스님의 말씀대로 바로 그만큼 견성(見性)을 얻는데 정사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사항은 선(禪)이란 위빠사나선, 염불선, 화두선 모두 카르마를 제거하는데 목적을 둔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행자는 현재 삶의 메시지로부터 어떠한 카르마가 작용하고 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카르마를 올바르게 보는 시각을 정견(正見), 즉 카르마에 대한 바른 이해(Understanding)로 알고 있다. 그리고 카르마를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정사유(바른 생각)가 부가적으로 필요하다.



팔정도의 8가지는 매우 유기적인 시스템(체계)으로서 어느 하나 하나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톱니가 얽히고 물려 있듯이 작용하고 있다.  카르마를 바르게 보고 이해하고 해석할 때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이 일어난다. 현재의 사건에 대해 올바른 카르마적 이해를 얻을 때 현 상황이 몰고 온 번뇌는 소멸되기도 한다.



 큰스님께서는 춘천 대법회에서 사람이 죽으면 30~40%가 무주 고혼으로 떠돌며 명부에 들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착, 금전, 명예, 권력 등에 대한 탐착 때문에 기인한다고 하셨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여러분도 생활을 통해서 느껴봐서 익히 아실 것이다.



집착(執着)이란 사전적 뜻으로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한고 매달림”을 의미한다. 흔히 유루(有漏)라고 한다. 에너지의  소실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집착은 영혼을 지치게 하는 독(毒)이다. 맑고 맑은 청정심을 가리고 있는 중생심이라고 흔히 말하는 그것에서 비롯된다.



 중생심은 물론 삼독심으로서 탐·진·치를 일으킨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독을 담고 있는 중생심이다. 이 중생심이 억겁의 죄, 영혼의 독, 삼독심, 집착, 빚, 습기(Vasana)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게 되면 영혼이 청정해지고 억겁의 죄가 소멸되고 빚이 청산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가슴을 적시는 설법이 아닌가?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며 부처님의 성호(聖號)를 염하고 석가모니불 정근, 칭명염불을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본다.

 또한 석가모니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의 일을 도와 공덕을 쌓는 것이 수행 못지 않게 중요하리라. 큰스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기 위해서는 칭명염불선과 함께 팔정도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견이다. 정견은 글자 뜻 그대로 바르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대상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서 들어와 인식될 때 정견을 바로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그 대상이 왜곡되고 곡해되어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때문에 인간의 정신이 전도 망상으로 휘말리고 정신이 혼탁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인식의 틀을 확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많은 수행자들이 알고 있듯이 바로 정견(正見)을 내면에 확립하여 바로 하는 것에 있다. 큰스님께서는 가장 명확하게 사자후하셨다.즉 정견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일체 세상과 만유의 속성은 무상(無常, 항상 같지 않음)하다.”고 여실지견으로 관하는데 있다고 말이다.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이며 진귀한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큰스님의 심오한 법문을 통해서 불제자들은 존재의 속성이 무상하다는 것, 즉 덧없다는 것을 관함으로써 공관(空觀)을 증득하고 결국에는 초견성을 이루어 표면적인 탐·진·치 삼독심이 다소간 해소되고 지멸되어 버린다는 것을 심득(心得) 할 수 있다.



 많은 수행자들도 체험으로 아는 것처럼 선한 마음에는 악한 마음이 상대적으로 상존(常存)하고 있고 즐거움에는 괴로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윤회 세계’는 일체가 ‘고(苦)’이며 삼계는 편안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본성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실재Reality)의 진상을 여실히 철견(徹見)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영원한 내 것은 없다.”는 것으로 ‘회귀공(回歸空, 공으로 되돌아감)’을 역설하셨다.



 회귀공이란 바로 선가(禪家)에서 흔히 말하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본래 면목을 찾아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지난날을 참회하여 청정한 마음을 얻고, 둘째 목숨을 바칠 정도의 강한 구도심으로 부처님께 믿음을 보여야 하며, 셋째 부처님께 발원해야 한다고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또한 팔정도 중에서 정념(正念)을 얻기 위해서는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을 하여야 하며 이렇게 염불선을 닦음으로써 생각이라는 염을 바르게 확립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될 때 정정이라는 바른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정(定)이란 선정(禪定)에서 말하는 안정과 고요함을 뜻한다.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서 선정에 이르러야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정명(定命)은 바른 명(命)을 확립하는 것이다. 명이란 바로 목숨, 삶, 생활로서 여기서 정명은 바른 삶을 의미한다. 수행자의 경우 바른 생활은 바른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로서 선악을 초월한 행위를 의미한다.



 큰스님께서는 팔정도(八正道)는 견성을 하여 보림을 마치고 아라한 위를 얻는 가르침이라고 설하신다. 실상, 큰스님 말씀대로 견성까지만 해도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며 아라한 위는 더 어렵다. 그래서 많은 수행자들은 견성과 아라한 위에서 만족하고 더 이상의 공부를 중지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스스로 공부를 더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자. 그렇다면 왜 자신이 공부가 완성되었다고 확신하고 자부하는가? 그것은 수행자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모르면 함구해야 한다.



 견성, 즉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임을 큰스님께서는 설파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겸허하게 견성과 깨달음의 견처에 머물지 말고 더 수행을 하여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붓다를 향한 도정을 걸어야 할 것이다.







견성에 이르는 길, 위빠사나선과 염불선



 사실,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은 염불선과 위빠사나선이다. 염불선, 특히 칭명염불선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주로 위빠사나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해 볼까 한다.



 혼자서 위빠사나선만을 잘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불가능하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스승의 지도 없이 단지 위빠사나선 수행만으로는 완전한 아라한 위를 얻는 것이 사실 너무 힘들고 어려우며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선은 화두선, 간화선, 조사선보다 효과적이며 부작용이 적다. 그리고 선 수행(禪修行)을 올바르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들 간의 관계를 완벽하게 꿰뚫어 알고 있어야 한다.

 큰스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삼법인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세상의 번뇌를 타파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다고 하셨다.  결국 우리가 겪는 두카(Dhuka)로서의 고통과 108가지 번뇌들은 모두 배움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고통과 시련 그리고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발심(發心)이 약해진다. 고통이 크고 시련이 매몰차고 번뇌가 치성하게 일어나 자신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 질 때 세상에 대한 허무함과 세속적 욕망에 대한 집착 그리고 세상 인연에 대해서 초연해지고 달관해 질 수 있는 정견(正見)을 얻게 된다.  사실, 현상계의 일체가 덧없음을 인식했을 때 그러한 인식이 바로 정견이라고 큰스님으로부터 배워 알고 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고통은 집착(흔히 갈애, 탐욕, 욕망, 갈망 등으로 표현되기도 함)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 이 고통의 원인인 집착, 갈애 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중생심으로서 아상(我相)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인연의 관계를 파악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이러한 아상으로서의 견해를 아견(我見)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정신 과정(행위)과 육체 과정(행위)이 부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아견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리고 정신 과정과 육체 과정의 부조화는 바로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상태가 안 되었기 때문이며 정신 과정과 육체 과정이 하나의 통합적 흐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고 위빠사나선의 선지식들은 이야기한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했을 때 그것을 예의 주시하여 자신이 한 바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이 위빠사나선이다. 만약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행동하고 있거나 모르는 사이에 생각하고 있다면 심(心)과 신(身)이 일여(一如)의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지)와 행(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염불선을 할 때도 입으로는 석가모니불 정근을, 뜻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하라고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 상태가 하나로 통일될 때 삼매로 들어가 견성을 하게 되는 것으로 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실(마을)가는 놈으로부터 속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상시에도 항상 솟아나는 생각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내면에서 이 마실가는 생각들이 분명하게 보여지지 않는다면 외면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잘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 모든 일에 대해서는 원인과 결과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통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지혜가 창생(蒼生)한다. 연기의 실상(實相)을 관(觀)해서 성찰해보면, 무지로부터 잘못된 견해(我見)가 성립되고 그 잘못된 견해로부터 갈애와 집착이 생기고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업을 짓고 그로부터 고통이 생긴다고 한다.



 이 고통의 근원인 무지(無明)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심신일여(心身一如, 마음과 몸의 행위가 하나로 같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신이 작용하는 법과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 뜻을 주도면밀하게 예의 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체의 행위는 의식과 무의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식은 심(心)에 비견할 수 있으며 무의식은 신(身)에 해당한다. 따라서 심신일여(心身一如)는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생멸(生滅)이 끊임없이 전개되어 사념이 두뇌에 확산되는 현상인 빠빤차를 차단하고 자신도 모르고 행동하는 일체의 행위를 삼가함으로써 언제나 생각과 행위를 주시하고 조심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의식과 무의식을 정화(淨化)하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칭명염불선의 경우 석가모니불을 염송하고 눈으로 부처님 성상(聖像)의 양미간을 관함으로써 집중하고 몰입하게 되면 결국 의식과 무의식이 정화되어 간다.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정화되어 가면 내면에 빛이 생기고 결국 의식과 무의식이 합일된다고 본다.



 그 경지가 견성(見性)인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성상의 양미간으로부터 백호 광명을 보고 깊은 삼매에 들어 부처님의 화신(化身)을 본다면 보살과까지 증위해 갈 수 있다고 하신다.



 큰스님께서 현지사 법회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든 괴로움의 근원은 집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역대 선사들과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들은 말은 많은데 정확하게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사자후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분들의 다양한 설법들을 두 시간을 들었을 때 한 가지 지혜를 얻으면 성과가 있을 정도였다.



 이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큰스님을 다르다. 큰스님의 설법은 한 시간만 들어도 의식이 각성되며 심오함을 느끼며 더 나아가 분명 깨달음 이후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는 바로 어마어마하게 장대한 세계라는 것을 매번 확신하게 된다. 특히 사후 세계에 대한 설법은 다른 선사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처님의 인가를 받으면
종국적으로 불과를 증득


견성 수준에서 더 나아가 보림을 해 나가면 자신이 공간에서 녹아서 무아(無我)를 체험해 가며 ‘나’없는 수행으로 계속 정진하면 궁극적으로는 ‘가득찬 허공’과 계합되며 은광색의 영혼의 빛을 얻어 아라한과를 증위한다. 그리고 두타행과 염불 삼매, 효 등을 계속하면 불, 보살의 가피를 받아 보살과를 증위한다고 만현 큰스님은 말씀하신다.



공(空)을 철견(徹見)하고 깊은 묘(妙)함의 세계를 지나 대적멸(大寂滅)의 세계를 지나면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고, 부처님의 인가를 받으면 종국적으로 불과를 증득한다고 하신다. 큰스님께서 견성은 공부의 시작이라고 하신 말씀이 타당한 이유는 부처님의 경지와 아라한의 경지는 비교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어찌 불과를 얻어 삼천대천세계의 한량없고 무한한 공덕과 복덕을 구족한 경지에 일개 공(空)을 체험한 깨달음, 즉 견성의 경지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저울질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견성을 해야 고요함과 약간의 밝음을 느낄 뿐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붓다가 되면 마음은 고요한 희열과 정화된 환희 그 자체이며 평화로움과 고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신다. 또한 견성은 심여일반(心如一返)의 경지를 일컫는다. 선가(선가)에서 흔히 말하는 한 소식했다는 말이 이 말이다. 즉 본래의 면목, 또는 본 자성 그리고 참나 등은 고향을 찾는 것이라고 서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본래의 면목이자 마음의 고향은 심여일반(心如一返)이 되어야 한다. 즉 마음이 하나가 되고 돌아와야 하는 거다. 이것을 큰스님께서는 내면에서 공(空)이 터져 나와 허공이 뒤집힘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공(空)이 처음에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공이 깨졌다가 다시 이루어졌다를 반복하다가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정신으로 임했을 때 공(空)이 안정된 상태를 갖추게 된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공(空)은 물론 비어있음을 말한다. 텅 빈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어있으나 눈 감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묘함이 있다.



 그래서 고승께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셨다.

참된 공에는 묘함이 있다고 말이다. 그 묘함이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을 통해서 증득하면 안다. 왜 그 많은 스님들과 불제자들이 오늘도 수행에 정진할까?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얻고자 함이다. 실재(Reality)는 바로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세상의 변화에도 여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질적 체성(體性)이 하늘 또는 허공과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걸리지 않음(無碍)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남으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으려면 자신의 체성이 본질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여실지견으로 철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외부세계와 자꾸 피곤한 인연을 쌓게 된다. 인연을 녹일 수 있는 약(藥)이 바로 불가에서는 공(空)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空)은 모든 종교적 깨달음의 기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空)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은 없다.



불가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空)의 세계를 잘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진실된 공의 세계로 증입해 들어가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청정한 마음을 밖으로 꺼내는데 있다. 그렇게 되면 진실로 생각이 지멸되고 청정한 마음의 체성이 현전 한다.



재차 강조하는 바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선이나 염불선이 매우 효과적이다. 존재계의 실상을 여여히 통찰하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위빠사나선이나 부처님을 믿고 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하여 닦는 염불선은 공(空)의 세계를 철견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염불선의 모범적 전형으로서 과거의 그 어떤 염불선보다 우수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현재 현지사 신도 분들 중에 견성에 가까운 상당한 경지에 이르신 분들이 많이 있다. 참고로 이러한 공(空)의 체성(體性)과 큰스님의 위대한 사자후인 법신(法身)의 체성(體性)과는 비교할 바 없이 현저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임을 명각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 견성을 하여 초견성에 이른 수행자와 불과를 이룬 수행자간에  공 세계(空世界)에 대한 이해 또한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수행이 깊어갈 수록 공의 세계는 본질적 특성상 집착이 더욱 없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 즉 삼라만상을 포함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것으로 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과를 증위해 갈수록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無碍)함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어찌 견성 수준에서의 무애(無碍)한 자유와 불과를 증위해서 얻은 무애(無碍)한 대자유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현격한 차이를 가지나 공(空)을 철견하면 공 세계(空世界)는 모든 것을 함용하고 있으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이리하여 철학적인 세계관을 매우 단순하고도 광범위하게 포용하게 된다.



 그리고 공(空)사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순간순간 자신을 돌아다보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끊임없는 겸허함과 하심(下心)을 갖도록 해 준다. 공(空)사상의 특징은 단순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여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공(空)의 본성이다.

 삼천대천세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복잡한 것은 없을 것이지만 실제로 증득되어 경험하는 상태는 단순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모든 스트레스와 번뇌는 복잡한 사유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상황과 사건을 온전히 풀이해 내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공(空)은 문제에 대한 해결을 담고 있다.



사바세계의 현상계가 문제 공간이라면 절대 세계로 가는 문턱인 공 세계는 해답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 세계는 맑고 깨끗한 빛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空)을 체득하게 되면 항상 머리가 맑고 고요하며 밝다. 그리하여 ‘나’라는 주관이 사라지고 객관적 세계, 즉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집착없이 대하고 바라본다.

공(空)을 얻으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며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이런 자리를 철견하면 그 어떤 물질적인 욕망보다도 더 큰 고요한 즐거움을 얻으며 모든 물질적, 세속적 욕망을 얻은 것 이상의 기쁨을 얻게 한다.



한편 현실적으로 가장 깨달음에 가까운 삶을 사는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나’라는 관념을 버린 사람이다. 이를 관념적인 ‘나’를 타파한 수행자라고 한다. 관념이라는 것은 생각들의 덩어리로서 모든 아상(我相)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아상을 일으키는 관념을 타파하는 게 중요한 일이다.



 관념은 선입관과 편견을 일으키며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걷는데 방해가 된다. 물론 올바른 지식과 건전한 양식(良識)은 구도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올바른 지식과 양식이 바로 팔정도(八正道)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팔정도가 없이는 결코 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신의 존재와 세상에 대해 여실지견으로 통찰할 수 없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리고 관념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쓸모없는 지식과 체계화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지식들을 의미한다.



견성,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전도된 지식과 잘못된 정신적 오류들을 그리고 편향된 상념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견성을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망각(妄覺, lapse of memory; forgetfulness; oblivion)이란 바로 ‘기억하지 않은’의 의미로써 깨달음은 자신의 기억을 깨끗이 지워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는 관념적 존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없다는 생각마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동양 고전에 하늘은 큰 일을 시키기 전에 마음을 괴롭힌다고 하였다. 모두가 부처님께서 수행자를 큰 그릇으로 키우려고 하심이다. 자신의 마음이 괴롭지 않아 보고서는 타인의 마음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으며 남을 지도하거나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괴로움을 통해서 면역 에너지(免疫意識)를 얻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면역 에너지와 면역 의식이 바로 견성(見性)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면 증득되는 공(空)의 에너지와 청정심의 에너지로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수행자의 내면에 쌓여있는 중생심이라는 독소와 깨끗하고 맑은 아름다운 청정심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습, 기, 착, 업, 빚 등을 모두 청산하여 중생심을 지멸(止滅)시키지 않고서는 청정심을 깨어낼 수 없다. 헤르만 헤세가 말한 대로 새가 새로운 세계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이 있어야 한다.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염불선이나 위빠사나선 등의 선(禪)공부 그리고 경전 공부를 통해서 살아있는 지혜를 내면에 얻어야 한다. 지혜가 생기면 집착과 습기 그리고 무지와 두려움의 먹구름은 소멸된다. 초발심을 한 수행자는 세속적인 습, 기, 착, 업, 빚 등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불교 공부의 중요성을 좀 더 깊이 각인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성(耐性, 견디는 힘)을 키우는 것이 선(禪)의 핵심이다. 수행자는 정말 여러 가지로 마음이 힘들어도 끊임없이 인내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다. 정말 이것은 수행자 스스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하는 한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의 개오(開悟)가 일어난다. 불성(佛性)이라는 불종자(佛種子)가 내면에서 자라서 점점 견고해지고, 내면에 꽉 차게 되면 큰스님 말씀처럼 천지를 뒤집어 엎으면서 터져 나온다. 그것이 견성 체험이다. 내면에서 불종자가 자라고 터져 나오기까지 정말 힘든 각고의 정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수행자가 올바른 스승의 지도 하에 몇 년만 정말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정진하면 분명 견성(見性)을 얻을 수 있다고 선지식들은 이야기 한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보다 확실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으로, 많은 현지사 신도분이 큰스님이 직접 지도하신 칭명염불선으로 수행한 결과 깨달음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진해진다.







견성, 깨달음 이후의 솔직한 경지



아라한과를 얻으면 세상이 텅 빈 허공과 같음을 통찰(Insight)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없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모든 것이 없는 공관(空觀)을 얻고 공심(空心)을 심득(心得)한다. 우주 전체가 꽉 찬 허공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내면에서 빛이 생긴다. 그럼으로써 삼라만상 우주 대자연을 하나의 ‘가득 찬 공허’로 인식하고 깨닫게  되며 이로 인해 음욕(婬慾)이 지멸(止滅)된다. 빛은 번뇌와 음욕을 녹이고 잠재운다.



만현 큰스님께서 아라한과는 수행자의 영체가 은백색을 띤다고 하셨는데 윤회, 즉 흔히 세간에 알려진 말로서 매트릭스(Matrix)를 벗어나야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일단 견성을 해야 ‘가득 찬 공허’를 철견(徹見)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견성은 공간계의 변형을 의미하지 생사경(生死境)에 완전히 도달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라한 삼매는 멸진정삼매로서 여기서 더 나아가 보살들이 드는 삼매인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어야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불과를 증위하는 대적정삼매(大寂定三昧)를 통과해야 한다고 큰스님께서는 설하신다.



이는 깊은 삼매를 통해서 고차원으로 의식의 상승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큰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불과를 증득하면 법신(法身)을 얻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생사관(生死觀)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사관을 얻지 못하고는 결코 자신이 붓다라고 자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이삼백년 전 중국(唐)에서 골격을 갖춘 소위 선불교(禪佛敎)에선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마음을 깨치면 성불로 본다. 부처가 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마음의 본성, 곧 공성(空性)을 증득한 것만으로 성불이라 보는 견해는 사과 씨를 사과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이제 겨우 깨달음을 증험한 것만으로 부처라 주장함은 사실과 천지차이가 나는 위험천만한 사견(邪見)인 것이다.



<<법화경>> (비유품)에서 사리불 존자는 자기가 공의 법을 증득하고, 참된 완전한 멸도로 생각했으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보니 분명 사견이었다고 고백한다. 천인과 야차, 용신들이 공경하여 따르는 곧 32상과 지혜, 자비, 복덕과 항사의 신통으로 천백억 화신, 32응신을 나투어 육도 중생, 성중, 보살을 구제할 수 있는 색신(불신)을 성취해야 비로소 붓다라 선언했다.



 이 색신의 성취는 공성의 증득과 더불어 무량 겁을 두고 쌓은 온갖 공덕으로 인하여 가능하다는 것. 아라한 성문들에게 먼 미래세에 색신의 몸으로 성불하게 된다는 부처님의 수기를 싣고 있다. 우린 이를 주목해야 한다.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불신(색신)을 얻지 못했다면 결코 성불이 아니라고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강조하심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금강승이라고 하는 밀교에서는 무상한 육신 속에 사신(사신 또는 삼신)을 현증해서 생사를 진실로 초월한 붓다가 된다고 하지만 자재 만현 큰스님께서는 밀교의 법신·보신설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단언하신다.



 미세한 분별의 마음이 완전 탈각한 일체공(一切空)의 빛 곧 정광명(淨光明)과 화합한 상태에서, 바르도(中有)에서 얻은 의생신을 불신(報身·色身)이라 보는 것은 진정한 보신을 모르는 견해라 하신다.



티베트 밀교의 수행 체계 등을 가장 높이 평가하시는 자재 만현 큰스님은 붓다의 삼신설에 대한 보다 깊은 법설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Ⅱ>>에서 다룰 것이라 하시니 자못 기대가 크다.





한 생각을 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염불선



이렇게 한 생각을 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큰스님 말씀대로

‘석가모니불’을 찾는 것이다. 염불선이 강력한 이유는 무성하고도 불과 같이치성(熾盛)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석가모니불’명호를 사용해서 녹일 수 있다는데 있다. 고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큰스님께서 비유하신 바대로 용광로라는 삼매에 잡념들이 녹아버린다. 집중이 제대로 안 되면 불처럼 치성하게 일어나는 중생심에게 ‘금강반야바라밀’을 외우게 하는 것이다.중생심이 발동하려고 해도 ‘금강반야바라밀’을 중생심에게 먹이면 석가모니불을 보다 뚜렷하게 할 수 있다.



한편 스토아학파(금욕주의학파)의 현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일어나는 일 자체가 아니라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매우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조용히 생각을 지켜봄으로써 생각이 힘을 잃고 사라지도록 하는 위빠사나선이나 염불선을 통해서 일념삼매에 들어가는 방법 그리고 화두를 들어 오직 화두에만  전심전력하는 화두선 모두가 선 수행법이다.

 불교는  여하튼 선을 모르면 안 된다. 선(禪)의 글자 뜻은 하나(單)를 보는 것이다. 그 하나라는  것은 허공처럼 충만하고 충일한 마음이다. 중생심과 대비되는 청정심이 그것이다. 생각을 지켜보는 마음을 볼 수 있다면 그 주시하는 마음을 강화하여 청정심을 이룰 수 있다.

 이 청정심을 얻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큰스님의 염불선은 위빠사나선이나 화두보다 안정적이고 부작용이 없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항상 큰스님 말씀처럼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느 장소 어느 순간이나, 즉 일체 처, 일체 시에 석가모니불을 억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잡념과 망상이 있기 때문에 불교 공부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잡념과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들, 즉 망상이 없다면 공부감이 없는 것이다. 공부감이 없다면 배움도 없다. 사바세계는 인고의 땅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깨우치고 세상의 이치와 우중의 섭리를 배우기 위해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도자는 비록 견성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상당한 인고의 세월을 요구한다고 해도 용기를 갖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공자님 말씀대로 공부를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훌륭하다는 점을 상기하고 이 불교 공부가 힘들지만 이왕이면 즐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은 내면에 있다’라는 가장 기초적인 마인드를 잘 숙지하고 항상 내면을 성찰하고 염불선을 생활화하면서 지내야 할 것이다. 물론 내면에서 일어나는 중생심을 너무 과소평가하지는 말아야 하며 항상 진지한 마음과 긍정적 마인드로 염불선에 임해야 할 것이다.



달마 조사는 견성, 즉 깨달음을 위해서 이입사행을 역설했는데 이입사행이란 이입(二入)과 사행(四行)을 합한 말이다. 이입(二入)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말하며, 사행은 행입의 내용으로 보원행(報怨行)·수연행(隨緣行)·무소구행(無所求行)·칭법행(稱法行)을 말한다.

 여기서 이입(理入)은 경전에 의해 그 근본 정신을 파악하고 일체 중생의 마음이 진성(眞性)임을 알아서 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즉 이입사행은 수행의 근본을 설명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행입에 대해서만 거론한다.



행입 중 보원행은 현세의 원망과 증오가 모두 과거에 자신이 지은 업(業)의 대가이므로 인간 본래의 도를 닦는 데에만 전념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보원행이 바로 전생과 현생에 지은 타인에 대한 원망을 갚는 수행이다. 이것이 수행자에게 가장 큰 문제이며 여기서 수행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남이 나를 원망하건 내가 남을 원망하건 그 원망심을 없애는 것이 보원행(報怨行)이다.

 서양에서는 용서(forgiveness)로서 알려져 있다. 타인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죄업을 사할 수 없다. 즉 보원행을 행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전생부터 지어온 악업과 빚을 청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결을 소멸시키고 원망을 제거해가는 행(行)을 수도(修道)로 삼아야 한다.



수연행은 순리에 따라 도에 합치되도록 하라는 말, 즉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인연을 잘 살펴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며 인연에 거부감을 갖거나 지나치게 인연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편 무소구행은 구하는 것을 없애서 애착과 집착·탐욕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다. 또 칭법행이란 모든 불법을 항상 공경하고 찬탄하라는 가르침이다. <<법화경>>에도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는 공덕은 그 어떤 공덕보다도 수승하다고 전하고 있다.



스승에 대한 지극한 공경과 감사 없이는 수행은 불가능하다. 공경과 감사가 무르익을 때 스승의 가르침을 찬탄하고 믿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귀의, 귀명하는 마음이 더욱 강화된다. 사실 죄업이라는 것이 알 수 없는 먼 과거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멸시한 죄업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명(無明)이라고 하여 가장 원천적인 연기(緣起)의 시작은 부처님의 12연기의 처음이자 고통의 근원이다. 이 무명(無明)은 다른 말로 말하면 ‘어두움’이다. 어두움은 공포, 두려움, 불안 등을 말하며 이러한 두려움은 결국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결여에 있다고 알고 있다.



 무시 이래의 헤아릴 수 없는 과거시절부터 불과를 이루지 못한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도 했지만 진실로 받아들여 목숨을 걸고 매진하고 정진하여 완전한 죄업을 다 사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가장 큰 죄는 바로 부처님을 믿지 않고 세속적 욕락(慾樂) 속에서 살아가면서 얻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집착이 아닐까 한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되어야 염불선


만현 큰스님께서도 "행주좌와 어묵동정(행하거나 머무르거나 않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거나)이 되어야 염불선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다.  항상 구도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마음 속으로 깊이 억

념(강하게 마음으로 기억)하고 발생하는 모든 번뇌와 슬픔, 분노, 원망 등

을 지워나가야 한다.  지혜는 내면의 밝은 빛으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더욱 확장되고 강화될 것이다.



견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염불선, 위빠사나선, 화두선 등

에 대한 일목요원하고도 체계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사실, 중생심을 잘

이겨내는 것은 어찌 보면 불교 공부의 스릴이자 긴장감이 도는 전율이

요 즐거움이다.



부처님께서도 아라한 위는 무학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아라한에

개는 중생심이 탈각되어 내적 번뇌가 어느 정도 소진되기 때문에

공부감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로 알고 있다.  따라서 중생심이라는 공부

감이 있을 때 열심히 배워 두는 것이 필요하다.



세속적 공부감이 없어졌다고 해서 더 이상의 공부가 없는 것은 아니

다.  큰스님 말씀대로 꾸준히 선근 보따리를 키우고 대승경전을 보아가

면서 보현행원을 해 나가고 동시에 칭명염불선에 매진하여 보살과를

증위하고 더 나아가 불과를 증위하도록 노력애햐 할 것이다.



수행자들이 익히 아는 것처럼 사실, 선은 생각을 뚜렸하게 지켜

보고 그 생각들을 지멸할 수 있는 일념삼매를 목표로 한

다.  이는 큰스님께서 친히 설하신 가르침과 일치한다.  큰스님께서도 역

점을 두어 일념삼매를 강조하셨다.



삼매에 들면 모든 잡념들이 지혜의 눈으로 비춰 안다.  휴정 서산 대

사께서 "천 가지 만 가지 생각,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한 점 눈과 같

도다."라고 한 말씀은 깨달음의 상태를 여실히 알려준다.  하지만 서산

대사로부터 전해오는 선시들 중에는 너무 선불교에 영향을 받아

모호한 면이 많이 있다.  큰스님은 그러한 수수께끼와 같은 방법을 쓰

지 않고 시원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원래 최상승 법력을 구비하신 분은 감추거나 아까워하지 않는

다.  큰스님께서는 여실히 깨달음은 삼매를 얻는데 있다고 설파하였다.

즉, 견성으로서의 깨달음을 얻은 구도자는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욕계

정삼매에서 시작하여 멸진정삼매(아라한 삼매)에 들게 되고 결국 상당수

의 잡념이 소멸된다.  결국 뭐라고 해도 이 생각들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 거리이고 생각들을 멸진시키기 위해서는 삼매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의해 판가름난다.



중생심이라는 것은 악업, 전현생의 죄, 습(관), (탁)기, (집)착, 빚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물려서 온갖 잡념들로 형상화되어 일어난다.  이러한

잡념들을 집중적으로 다스리지 못하면 대표적으로 애증(선심과 악심)에

의한 증오심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계속해서

과거를 벗어 버려야 한다."고 설파하셨다.  악업, 죄, 습, 기, 착, 빚 모

두가 과거 우리의 허물들이다.  중생심이라는 허물로서 그것이 우리를

옮아매고 있는 것이다.  나쁜 생각이나 좋은 생각 가릴 것 없이 이러한

모든 생각들에 먹이(마음, 의식, 에너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어는 인디안 추장도 그의 제자들에게 잡념이라는 독사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하였다.  생각에 끄달리면 생각에 휘말리게 되어 생각이

더 커져서 인간은 생각의 주인이 아닌 생각의 노예가 된다.



견성이나 깨달음의 목표는 생각을 이끌고 더 나아가 지배하는 생각

의 주인이자 영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구도자는

잡념을 제아할 수 없으면 차선책으로 잡념들을 무시할 줄 알아야

한다.  생각이 일어난다고 그곳에 끄달리면 절대로 안 된다.  이를 방하

착이라고 한다.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고 있는

생각들을 모두 놓아버려야 한다.  어는 고승께서는 한 생각이 일면

손에 불덩어리를 든 것처럼 놓아 버리라고 하셨다.






견성, 깨달음의 세계


여기서부터는 견성, 즉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

고자 한다.  견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은 바로 중

생에 대한 정견을 얻는 것이다.



중생이란 선악이라는 관념들이 무분별하게 취산되는 형태를 따

르기 때문에 '무리 중'자와 '생명의 생'자를 사용해서 무리 속에서 살아

가는 존재를 말한다.  그리고 이 '무리 속의 생명 존재'는 윤회의 바퀴

에 의해 변화하는 관념적 정신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희로애락의 사

슬 구조에 얽매여 마음을 한 시간도 고요하게 하지 못하고 요동치면서

살아간다.



 <<능엄경>>에는 나그네 살림을 중생이라고 하였다.  견성을 하게 되

면항상 주인공으로 살지만 그렇지 못한 중생은 나그네 살림을 하게

된다.  잠시 부연 설명하면 삿된 기운이란 것이 바로 중생들의 마음인

중생심이다.  수행자들로서 우리는 영적 수행을 통해서 한 껍질 한 껍

질 차근차근 우리의 중생심을 벗겨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중생심이 탈각되어 사라질 때 우리의 본 성품이 밝게 드러

난다고 할 수 있다.  한 껍질 벗겨나갈 때 우리는 아품을 느끼고 괴로

움과 고통을 느끼지만 그러한 고뇌와 고통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인내의 힘이 무엇보다도 수행자에게 요

구된다.



수행자들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잉태된 진공묘유

라는 말을 익히 알고 있다.  공한데 묘함이 있다는 뜻이다.  정통

도가에서는 현묘지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검고 묘한 도라

는 뜻이다.  햇빛이 없을 때 우주 공간은 검은 색이다.  그리고 단순한

빈 허공이 아니라 프라나, 오르곤, 기라고 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

다.  그래서 묘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묘함을 일으키는 기는

만유에 상호 침투되어 있어 어디를 가나 없는 곳이 없다.



물론 이 기 중에서 후천기가 아닌 선천기로서 묘광

으로 빛이 난다.  전우주가 이 묘광에 의해 빛을 발하고 있고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일반 중생들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

들의 내면의 눈은 오탁세상의 다섯 가지 더러움으로 (命濁, 衆生濁, 煩惱濁

見濁, 劫濁을 으른다)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을 깨끗이 정화하지 않는이상 이 '우주 만유' 삼라만상에

가득찬 묘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억종 찬란한 광명

으로 절대 법계에 빛을 방사하고 계서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것

처럼 마음이 청정해지고 청정해지지 않는 이상 빛을 볼 수 없는 것이

다 이와 같이 도가에서 신묘한 광명으로서 묘광을 거론하는

데 어찌 선불교는 한낮 견성 수준만을 옹호하고 이야기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견성은 어떻게 해야 도달할 수 있을까?  명상 수련을 하면

서 얻은 최종 결론은 견성은 내성(견디는 마음의 성질)을 키우는 것이

라 본다.  내면의 힘이 모진 비바람과 고통을 이겨낼 때 불종자라고 하

는 불성의 씨앗은 싹을 틔우는 법이다.



그래서 그러한 내성을 키우게 해주고 불성을 꽃피우도록 어떤

면에서 안 좋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수행자에게는 수

행의 은인이자 어떤 면에서 또 한 분의 스승이 된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다.  수행자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안 좋게 반연(작용)하도록 만든 사람이 수행자 자신의 스

승이라니 말이다!  이는 수행자가 억겁 동안 쌓아온 업 속에 존재하는

중생심(대표적으로 사람, 사물 등등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습, 기, 착, 삼독심, 빚, 죄, 악업, 감각애(맛있는 것, 향기 좋은 것, 좋

은 소리 등등의 감각을 추구하는 것)는 큰스님처럼 불과를 증위하지 않는 이

상 그리고 사바세계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는 누구를 만나던

수행의 경지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뿐 현현하게 되어 있

다는 사실을 우리 구도자는 명각해야 한다.



수행이 무르익으면 업이 플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업이

플릴 때 고통이 수반된다.  이러한 고통을 잘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실타래가 모두 풀려서

자신의 체성이 허공처럼 드러날 때 그때 수행자는 견성이자

현성을 증험하게 된다.  참다운 성품을 증득하게 된다는 뜻이다.



수행자의 내면에서 분노나 슬픔, 원망 등등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수

행자는 지혜의 눈으로 잘 관찰해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순수할수록

조그마한 번뇌, 분노, 원망조차도 유리알처럼 잘 드러난다.  또한 순수

한 마음의 구도자일수록 타인과 자신과의 인간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

는 애증은 보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도자는 이러한 애증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전도된 중생심에 의

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착함도 잊고 악함도 잊으라는 고

승의 가르침은 타당한 이야기이다.  즉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

도 생각하지 말라고 혜능 조사는 이야기했는데 깨달음을 위해서는

필요한 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화두선이나 염불선도 결국은 집중하여 이러한 선심과 악심을

여의고 일념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견성

적 측면에서 몇몇 선사들의 가르침들 중에는 괜찮은 참된 가르침이 있

다.  만현 큰스님께서도 그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하신다.  즉, 화두 일념

을 위해서 지옥, 극락, 불, 보살 등일체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취

지로 이들을 부인하는 것을 뭐라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견성과 깨달

음 그리고 대오철저가 된 후에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어 붓다가 되었

다고 선언하는 것은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행자들의 진실된 도정은
거울 속의 참된 모습을 찾는 과정


한편 구스타프 카를 융 박사도 우리들의 가면(페르소나, Persona)을 하

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으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이야기하고 있다.

그 가면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통을 겪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나이가 많아도 이 가면을 제대로 벗어버리고 죽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 가면은 바로 고대 성현의 가르침에 의하면 타아의 마음에 비추인

다고 하였다.  <<화엄경>>에서는 '실재의 거울'로서 사람들의 마음이 무

수히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수행자들의 진실된 도정은 페르소나를 하나하나 벗어버리고 거울 속

의 참된 모습을 찾는 과정이라 할 수있다.  물론 거울이 없으면 나를

알 수 없고 거울만 봐서는 나를 영원히 찾을수 없다.  타인의 마음이

라는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때 불가

에서 말하는 견성에 도달한다고 한다.



견성은 선사들의 전유물만이 아니며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라고 말하

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얻은 깨달음이 한낮 정신

분석학자의 수준 밖에 못 미치겠는가!



물론 존재의 근본을 철견하여 견성을 얻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

는데 있어서 훌륭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견성이 수행의 종착

점이요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생사관에 대한 미

정립, 지옥을 관하거나 육도 윤회를 관하는 능력의 결여 그리고 자신

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함 등등은 견성이나 아라한 그리고

보살의 한계임을 명각해야 한다.



물론 견성의 한계를 실감하고 아라한을 넘어서 더 나아가 보살 위를

얻고 붓다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자는 참으로 거룩한 여정을 하는 것이

리라.  이러한 구도자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세상의 섭리를 파

악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우주 창력의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우주적 사명감이자 우주적 합목적성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장 심오한 경험을 추구하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마음이 피어나는 것은 수행자가 숭고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내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만약 견성이나 아라한 위에 모든 수행의 도정을 한계 짓고 막을 내

리도록 수행자들의 정신세계를 미혹시킨다면 그것은 수행자의 웅대한

꿈을 산산이 와해시키는 것이다.  선사들은 이 점을 유심히 새겨들어야

하리라.





삼신설의 법신을 자성이나
본 면목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지금도 많은 불교서적과 불교관련 명상서적에서 자성을 불신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불성은 자성이라고 할 수 있

으나 법신을 자성이나 본 면목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단지 견성을

한 후 지고한 환희와 지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선사는 진실

하지도 못하고 솔직하지도 못한 견처임을 알아야 한다.



견성을 해보면 알지만 그냥 환희 트인 인식의대변환을 얻는 것이며

자성광을 얻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환희와

희열 그리고 지복의 열락은 견성이나 아라한 위에서 얻

을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견성은 단순히 자각의 눈이 뚜렷하고 명료하게 확장되고 집착

에서 벗아나고 음욕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지멸되는 경지

일 뿐이다.  견성이나 아라한 위를 얻고 환희, 희열 운운하는 것은 잘

못되고 솔직하지 못한 위선적 견처임을 우리 불제자들은 명지해야 한

다.  견성을 보다 더 훌륭하게 설명하자면 큰스님 말씀대로 "주와 객의

벽이 무너져 머리고, 툭 터져 허공같이 비어 적조요 만고의 광명"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을 보다 선명하고 명료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인

식하고 자각할 수 있다.  이것이 견성의실제적인 의미다.  내면에서 참

성품이 깨어나 마치 진리의 빛이 탄생하는 것을 견성이라 보면 좋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의 빛, 자성광은 은백색의 빛일 뿐, 억종 찬란한

불신과는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또한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달마 조사가 말씀하신 청정심과 중

생심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달마 조사는 선불교에 있어서

창시자에 해당하므로 견성과 깨달음 그리고 아라한 위에 대해서는 여

실지견으로 잘 상술하고 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게 판단

하고 가르침들을 취사 선택해야 한다.



여하튼 달마 조사는 근본 마음 자리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여 청정

심이라고 한다.  이 청정심은 선하다 착하다는 뜻의 선심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선심과 악심은 대비를 이루어 음양의 이원론적

환영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청정심은 근본마음으로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행이 높고 고행을

많이 하고 인내를 하고 절제 및 금욕 수련을 하면 궁극적으로 내면의

근본 마음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천지가 뒤집어 진다.



이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 사자후하신 말씀으

로 견성, 즉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 매우 정곡을 찌르는 정확하고 명료

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큰스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과거의 업연이 어는 정도 소멸되거나

지멸된다.



자신을 둘러싼 주객의 벽이 허물어지고 흔히 수행자들 간에 회자되

는 세상의 개벽을 몸소 체험하는 경험이 바로 견성이다.  이

견성을 얻게 되면 자신의 살림살이를 갖게 된다.  선 수행을 많이 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면 마음이 화공과 같이 탁 트인 광대한 인식의 전환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주체로서의 '나와 객체로서의 '너'라는 분리된 상과 분별심

이 다소간 사라진다.  별도의 나라고 할 만한 실재가 없다는 무

아 사상을 어는 정도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허무주의로 들릴

수 있다.  실상 견성이 허무주의로 격하되고 있는데 대해서는 선사들의

잘못이 크다.  모든 것이 비어있고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만을 가르치

기 때문이다.



사실 견성의 자리는 바로 갓 깨달음을 얻은 자리이지 붓다를 이룬

자리는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여기서 어느 고승의 가르침을

새겨들어야 한다.  고승께서는 견성, 즉 깨달음을 고목나무에서 꽃피운

다고 비유했다.  꽃이 피는 것이 견성이다.  영적 재생이자 영혼의 부활

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견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차이를 갖는 불과는 고

목이 죽고 그곳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

운 나무가 다 자라나 완벽한 나무로 성장했을 때를 불과를 증위한 것

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사변적 견처일 뿐 견성과 불과에 대한 보다 실재적인 비

유는 실증적인 경험으로 대성과를 이루신 큰스님의 가르침을 친

견해서 들어봐야 할 것이다.  여하튼 견성과 불과는 땅과 하늘의 차이

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 선사들이 견성을 얻으면 청정한 성품을 봄으

로써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을 알지 그 이상은 모르기 때문에 신도들이

나 선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진상이 공허하고허무

주의로 밖에 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극명

하게 상술되어 있으므로 참고 바란다.



한편 견성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망각의 강을 지나게 된다.  그리

하여 망각의 강을 지나게 되면 과거의 업들이 어느 정도 탈각되어 나

가면서 몸에 존재했던 탐  진  치 삼독심도 어느 정도 사라져 간다.



이렇게 업들이 녹아 없어지고 습기가 없어져 가면서 내면에서

빛이 영롱하게 현출하게 된다.



명심해야 할 사항은 견성, 즉 깨달음을 통해서 억겁동안 쌓아온 습,

기, 착, 빚, 죄, 삼독심 등등을 모두 송두리째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것

이다.  얼마간의 소멸은 있다.



하지만 견성을 하고 보림을 마쳐 아라한 위를 얻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이 부처라고 자부하는 것은 부처님을 능멸하는

오만방자한 행위임을 명각해야 한다.



실재로 표면적으로 인식상으로 느껴지는 모든 중생심은 탈각되어도

무의식 깊이 도사리고 있는 업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큰스님의 말씀처럼 불과를 증위해야만 완전한 악업, 죄, 착, 습의 소멸

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견성,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


큰스님의 법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견성

의 의미부터 하나하나 이해해 가면서 본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견성이란 글자 뜻 그대로 성품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품이란 무엇일까?  성품이란 일심, 여여함,

본래 면목, 자성, 밝고 고요한 마음, 청정한 마음, 순수하고 명료

한 마음, 깨끗한 마음, 참 나 등등으로 언급되고 있

다.  사실, 사과는 깨물어봐야 맛을 안다.  그렇듯 견성은 체득해야

아는 것이다.



생각이나 사변적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는 해오

이지 증오가 아니다.  신비적인 체험으로 뚜렷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본마음인 성품을 철견하지 않는 이상 견성의 올바른

뜻을 해득 할 수 없는 것이리라.



견성에 대한 올바른 해의를 위해서는 오늘날의 '깨달음의 프레

임위크'에 근거하여 견성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

라 생각한다.  깨달음의 얼개 또는 틀 구조는 다름 아닌 견성이라는 깨

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들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은 고도의 난행고행, 각골정진으로 고도의 정신 세계로서의

승탑을 내면에 구축해 나가는 어려운 과정이다.



그리고 존재를 바라보는 인식의 대변환이 일어나야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일대 인식의 대변환을 가져오기 위해서,

즉 존재에 대한 인식의 혁명이 있기까지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

만 큰스님 말씀대로 팔정도, 사념처, 칭명염불선 등을 대표적으

로 거론할 수 있다.



또한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가적인 여러 가지 제반 사항을 알

고 있어야 한다.  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사상의 완벽

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비 체험을 해봐야 하며, 실재와

존재의 의미를 체득해야 한다.



또한 업연이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이해해야 하며, 중생심

과 청정심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을 타파해

야 한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빚, 죄, 악연, 습(기), (탁)기,

(집)착, 그리고 삼독심을 제거해야 하며 중생의 의미와 윤회해탈

의 의미에 대한 올바른 정립이 필요하다.  물론 지옥이 존재하며 육도

윤회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선정과 삼매의 세계를

증득하여야 하며 선과 악을 초월하여 이원성을 해체할 수 있어야 한

다.  이를 위해서는 선,  교,  율  모두를 겸수하여야 하고

계.  정.  혜  삼학을 무엇보다 잘 도야해야 한다.



한편 수행자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워내는 것이 무

엇보다 중요하며 야망으로 표출되는 에고들을 올바르게 활용하고

무모한 관념은 타파하는 것이 요망된다.



견성을 보다 수행자적 관점에서 정의하자면 수행자의 영혼이 일련의

시간적 공간적 상황들을 통과하여 자각의 눈을 키워나가는 과정,

즉 프로세스라고 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영혼은 무수히 길

고 긴 영겁 동안 쌓아온 업장이 어는 정도 소멸되고, 습기

를 제거해 가며 빚을 청산하며 더 나아가 인연들과의 애증을 제

거해 나간다.



깨달음의 터널은 구도자, 불제자, 수행자의 통과 의례라 할 수 있다.



터널을 통과하면서 구도자는 인간 세상의 모든 허망한 맛을 겪게 된

다.  큰스님 말씀대로 세상이 무상하고 고,(괴로움)이며 무아

라는 것을 여실히 철견하게 된다.



그리고 깨달음의 의미와 가치를 아주 뼈저리게 인식할 수 있는 가르

침들을 배우게 된다.  그것에는 주로 고독, 인내, 용기, 절제, 금욕, 자

비, 헌신, 희생, 이해, 용서, 겸허, 관용 등등의 덕목 등이 있다.  이러

한 덕목들을 하나하나 소양해 나가고 궁극적으로 마스터해 나감으로써

터널의 저 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뚜렷하게 빛나는 마음을 증득

하게 된다.  여기가 바로 견성의 자리인 것이다.



물론 견성을 했다고 해서 만현 큰스님께서 설하신 고대 근본불교 이

래로 은장되었던 미증유의 가르침, 즉 붓다의 삼신설로 알

려진 불신관을 얻는 것은 전혀 아니다.



불신과 견성에서 말하는 마음의 자성은 엄청나게 현격한

차이가 있다.






깨달음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며,
수행의 종착지가 아니다


만현 큰스님께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통해서 견성, 즉 깨

달음만이 모든 문제의해결이 아니며 결코 깨달음이 수행의 마지막 종

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설파하셨다.



무엇보다 수행 중에 대적정삼매를 통과하여 무량광을 체험함

으로써 불신을 구족하여 생사관을 확립하는 것이 불제자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

못한 채 상적광토에 법신을 그리고 연화장 세계에 원만보신을 얻지 않

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볼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사바세계의 무상함을 극복하는 길이며

이것이 바로 생사관 정립인 것이다.  이에 불제자는 무엇보다도 견성

이 곧 완벽한 생사관 확립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아야 할 것이

다.  그러므로 견성, 즉 깨달음은 수행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

야 한다.



여기 자상하고도 상세하게 몸소 설하신 큰스님의 법설을 들어보자.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깨달음의 정의는 그렇습니다.  깨달음은 본성이라고 하고 자성이라고

하며 일체우주 만물의 근원자리 법성이라 하는 그 자리를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 경험상 그리고 많은 화두 타파한 분들의 이야기로 볼 때

부처님의 말씀으로 볼 때 그 깨달음의 경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면

됩니다.  하지만 그 청정 무구한 단계의 경계가 드러나게 되는 데, 그

경계가 드러나는 것이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한 식경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이유는 우리가 억겁을 통해 살아오면서 많은 업을 짓고,

따라서 습이 붙고 기가 생기고 그럽니다.



그것이 완전히 소멸되어야 계합이 되는 겁니다.  원래 생각 이전의

자리로 나가 뚫기는 뚫었지만 뚫는 것이 깨달음인데, 그 청정 무구한

본성과 나라고 하는 것이 계합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람의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삼독심 모든 번뇌가 다 뿌리 채 뽑혀져야

합니다.  순수가 되어야 합니다.  또 습이나 기라든지, 나쁜 인연까지도

찌꺼기까지 완전히 소멸이 되어야 하는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달음이 종착점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이제 깨달

아서 나라는 생각을 죽이는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걸 두타행이라

고 합니다.  가장 좋은 공부는 두타행입니다.  두타행으로 나아가야 합니

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권하는 것이 바로 두타행입니다."



또한 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지요.  깨달음 이후에 보림

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경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본

성과 계합하기 위해서 삼독을 녹이고 습을 녹이고 기를 녹이려고 보림

을 합니다.  그러나 보림을 한다 하더라도 결코 정화는 일부 될 수 있

을 지언정 소멸은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깨달음은 그런 찌꺼기가 완전 불식이 되어야 합니

다  그래서 집착이나 상이 뚝 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수행을

잘하다 보면 그 자리까지 갑니다.  아라한 자리.  그러나 보살이나 붓다

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명료한 가르침이신가?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선불교의 선지식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부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선불교의 선지식을 따를 것인

가를 고민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분명 <<아함경>>에서 육도 윤회가

있다고 설하셨으며, <<법화경>>에는 묘희의 세계를 많이 설해주셨

고, <<화엄경>>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의 세계를 말씀하셨다.



<<정토삼부경>>에선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약사여래본원경>>에서는

동방 만월세계를 말씀하셨다.  선불교의 선지식은 이러한 부처님의 대

승경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로지 화두 타파 이야기만 한다. 어찌된

것인가?  부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가 선불교의 선지식들을 추종

해야 하는가?



지혜로운 식견을 구비한 불제자라면 답은 훤히 결정되어 있다.  뭐라

고 해도 우리 불교의 교주가 되시는 분은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선불

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달마 조사는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은 28대

법손에 지나지 않는다.  달마 조사가 더 높을까 부처님이 더 높을

까?  선불교의 선지식들은 부처님과 달마 조사의 경지가 동일하다고 평

가하고 있는 듯하다.



정말 부처님과 선사들은 동일한 경지일까?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에

만연된 선가의 선서들에 찌들어서인지 분간이 안 된다.  정말

선사들이 부처님과 동일한 경지인가?  많은 불제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서 궁금해한다.  급기야 이러한 의문은 제차두고 선사들이 부처님과 동

일한 경지라고 확고한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좀 무언가 석연치 않다.  달마 조사는 왜 그렇게 박식하지 못

했을까?  부처님은 수많은 경전을 설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가르침들을

많이 베풀어 주셨는데, 달마 조사가 남긴 서적들은 거의 손에 꼽을 정

도이니 말이다.



달마 조사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분들은 제자들을 많이 육성하고 좋은 경전

을 많이 남기며 자비와 지혜가 출중하고 변재하다는 것으로 전하고 있

다.  그러나 달마 조사는 석가모니부처님보다 제자 유성이나 경전 찬술

그리고 자비와 지혜면에서 부족하다고 보여진다. 













선불교의 폐습과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출현


오늘날 선불교의 여러 가지 폐습, 즉 공허한 선문답, 뚜렷하지

못한 경지, 계율을 중시하지 않는 막행막식, 육도 윤회를 관하지 못함,

생사관의 미확립, 공사상의 허무주의화 등등으로 인해 수많은

수행자들이 막연한 이상향을 기대하거나 수행의 한계를 겪고 있고 불

교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수행자들은 선불교의 폐습에 가리어 불교 공부를 너무 어렵게 느끼

며 불교 수행체계에 대한 명료한 안목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선불교의 문제만이 아니

라 전 세계의 종교 명상세계가 공성과 신성을 철견하는 경지

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공성이나 신성이라는 것은 어떤 확고한 경기가 아니다.  그것은 고요

한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경지이다.  이 경지가 마치 최고의 경지인양,

그리고 더 나아가 궁극적인 경지인양 수행자들의 의식 속에 만연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두뇌에서 번뇌를 지멸시키는 것이

수행의 완성이라면 종교의 시원적 근거이면서 종교가 수천 년 동

안 내려오면서 간직해온 사후 세계에 대한 해답은 어떻게 풀어야 할

까?  사후 세계는 이론이고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실재적으로 존재하

는 것은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세계의 최대 종교들에 속하는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교주들께서 모두 사후 세계를 설파한 것은 거

짓이요 위선이란 말인가?



우리는 진실로 정신 차리고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종교는 차지하고 불가에 소속한 불제자로

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육도 윤회와 사후 세계를 부인해야

할까?  그렇다면 정녕 부처님께서는 거짓을 말씀하신 것일까?



선불교의 선지식들은 마음이 극락이고 지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의 육도 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의 말씀이 맞다면 선불교의 선지식이 틀린 것이고 선불교의 선

지식이 맞다면 부처님께서 틀리신 것이다.



이러한 이분적인 구분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으나 지

금은 현실세계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불교 수행문화의 오류들을 많이

보는지라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할 때이다.





견성, 깨달음은 이제 시작


불교는 세계 최고의 종교로서 미국 및 유럽에서도 수많은 찬사와 호

평을 받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열풍릉 일으키고 있다.  요가 명상,

단전 호흡, 마인드 컨트롤, 초월 명상 등 무수히 다양한 명상 수행단

체들의 수행 붐이 서방 세계를 강타한 이후로 이제는 제대로 된 가르

침에 귀의하기 위해 대부분의 구도자들이 최종적으로 찾아서 입문하는

곳이 바로 불교다.



진실된 법, 즉 다르마를 만나기 위해서는 때가 되어야 하며

인연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스승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

고 시기가 도래한 제자만이 자신의 스승을 만나 뵐 수 있다고 고대로

부터 전한다.  간절히 원하고 시절 인연이 되면 스승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일생을 좌우할 스승을 그냥 인연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옳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분을 스승으로

간택해야 할까?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수행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화두

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구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각 영성 분야의 여러 선지식들을 친견하고 수많은 종교 명상서적들

을 섭렵하였다.  하지만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봤다.  그것은 바로 치열

하고 진지하며 사생결단하는 결연한 자세로 수행에 임하는 구

도자가 극히 적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음계를 파하여 폐인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스님이면서 스님이 아닌 분, 수행자이면서 형식만 수행자인 분, 그리고

구도자이면서 방황만 하는 구도자가 너무나 많다.  이것응 바로 비단

한국불교만의 문제는 아닐지니, 이 문제는 바로 전 세계 종교 명상수

행자들의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여 하나의 선불교의 화두 아닌 화두가

되어버렸다.



즉, 수행자들의 모범적 전형에 대한 최대의 절대적인 화두가 되

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특별한 모범적 수행자는 찾기 힘들다.  그래서

다시 고대 종교의 교주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가장 아릅답고 계율을 중

시하는 불교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래서 재차 강조하는바, 바로 수행

자들과 구도자들이 발걸음을 돌리는 곳이 바로 불가가 되었다.  하

지만 그들이 찾은 불교의 가르침은 너무나 석가모니부처님 제세시 근

본불교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뚜렷한 대선지식을 배출하지 못

한 선불교가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어느 누구를 자신의 스승

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석가모니불 칭명염불이 좋은 이유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은 앞 단원에서 언급한 일반 염불선이나 염

불 수행과는 달리 단순히 부처님의 명호만을 구창하는 것이 아니라 마

음속으로 금강반야바라밀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말씀하신 대로 석가모니불 칭명염불이 좋은 이유

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석가모니불 칭명염불시 석가모니부처님의 화신불이 오신다.

둘째, 석가모니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칭명염불시 자성광이 환히

비친다.



셋째, 석가모니부처님을 칭명염불함으로써 내 마음은 석가모니부처님

과 동화되어 마음이 정화되고 업장이 소멸된다.



넷째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최단의 지름길이며, 보살이 되고 붓다

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를 받는다.  즉, 무량무수 견줄 곳이

없는 공덕을 받을 수 있고 무량무수 불가칭량 복덕을 얻으며 항상 석

가모니부처님과 일체 부처님의 호념을 입고 모든 보살의 보호를 받으

며 호법 선신들이 옹호한다.



여기에 추가하여 계율(3귀의 5계 10선)을 지키고 부모, 조상님께 진정

한 '효'를 다하며 불 보살님 전에 가끔 공양도 드리면서 불과를

이룬 큰스님 회상의 대작 불사에 크게 시주한다면 더욱 좋다.



정리하자면, 큰스님께서는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저는 중 하근기 수행자에게는 어려운 만큼, 일심불란한 염

불을 통해 드디어 삼매에 드는 염불선을 권합니다.  구체적인 행법을

말한다면 먼저 정좌한 눈높이에서 1~2m 앞에 작은 점을 찍어 둔 다

음, 두 눈을 뜬 채 시선을 점에 고정합니다.  가능한 눈을 깜빡거리지

않은 채(5~10분 정도는 가능) 염불하되 관세음보살이나 석가모니불, 아미

타불,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 자신과 인연 있는 불보살을 칭명하면 됩

니다.



이때 시간이 지날수록 일심불란의 상태가 무너져 마음이 도망가기

쉬운데, 눈 앞에 염불하는 불보살이 계시다고 관상염불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귀의, 참회, 발원의 염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번뇌망상이 자연히 사라져 마침내 염불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염불선을 통해 염불삼매를 얻어 보살과를 이룬 다음, 부처님의 무량

광을 보고 자기 불신을 얻는 더욱 더 어려운 공부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큰스님의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

법은 미증유의 염불 수행법으로서 불과를 증할 수 있는 불교사적

으로 유일무이한 수행법이라는 점, 그리고 부작용이 적고 부처님의 가

피와 위신력을 받는 수행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티베트 명상 수행법에는 고요한 집중 속으로 들어가는 사마

타 명상과 삶을 통찰하고 호흡을 관하는 위빠사나 명상

이 있으며, 여기에 추가하여 다양한 분석 명상으로서 공성을 깨

닫거나,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거나,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거나, 무상함

을 깨닫거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적개심을 없애거나, 사랑의 기운을

복돋거나, 나쁜 기운을 없애는 명상들이 존재한다.



또한 관상명상으로서 빛으로 된 몸을 관상하거나 내면을 정화

하는 관상을 하거나 금강살타 또는 관세음보살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

을 관상하거나 내면의 불을 일으키는 명상들이 있다.  또한 인도의 박

티(헌신) 요가에서 전승된 헌신의 명상과 기도 명상 등이 있다.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은 이러한 티베트 명상 수행법을 거의 모

두 아우른다.  즉, 우선 석가모니부처님의 성상의 양미간을 관함으

로써 한 지점을 향한 집중 명상을 통해 사마타 명상에 진입할

수 있다.  그리고 마실가는 마음(중생심)에게 금강반야바라밀을 주고 그

중생심을 청정심과 분리하여 관찰 염함으로써 기본적인 위빠사나 명

상의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성상에서 빛이 나거나 수행자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성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받는 신비 체험을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몸과 내면의 죄업

과 업장을 소멸하게 된다.  티베트의 빛의 정화 명상을 별도로 할 필요

가 없다는 것이다.



성상을 응시함으로써 관상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관상염이

이루어지게 된다.  칭명염불 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면 결국 내면의 눈

으로 자신의 몸을 응시하면 자신의 몸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님이 와

서 자신의 몸을 장식하고 계신다는 만다라 명상을 얻게 되기도 한다.

물론 만다라 명상을 올바르게 체득하기 위해서는 견성을 하고 아

라한과를 지나가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부처님의 성상에서 방광하는 빛은 수행자의 모든 악한 요소, 악

한 죄업 등을 씻어 주신다.  즉, 인생의 소중함을 인식시켜 주고, 죽음

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주며, 무상감을 꺠닫게 해주고, 고통에서 벗어나

게 해주며, 적개심을 없애주고, 사랑의 기운을 복돋아주며, 나쁜 탐

진  치 기운을  제거해 주신다.






현지사 칭명염불 수행법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은 일심불란으로 집지명호할 수만 있다면

윤회를 벗어나 극락 정토까지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信), 간절히

바라고(願), 이루어지도록 염불 수행을 해야 한다.



구체적인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1.  칭명염불 하기 전 후 부처님께 3배를 올린다.

2.  먼저 정좌한 눈높이에서 1 ~ 2m 앞 벽에 작은 점을 찍어 둔다.

3.  벽을 바라보고 눈은 편하게 한 점을 응시한다.

4.  반가부좌 상태에서 편안하게 가슴에 합장을 하고 손끝이 하늘로

향하게 한다.

5.  입으로는 염불을 하고, 눈은 한 점을 응시한다.

6.  이때 시간이 지날수록 일심불란의 상태가 무너져 마음이 도망가

기 쉬운데 눈 앞에 부처님(빛의 존재)이 계신다고 관상(觀想)하면서

그 도망가는 마음을 공부시키기 위해 마음 속으로 귀의, 참회, 발

원의 염을 일으킨다.



* 망상이 계속 들어올 때는 망상이 오거나 말거나 상관치 말고 자

기가 찾는 부처님을 일심봉청으로 찾아 들어간다.



석가모니불 염불

((금강경))을 1번 읽은 후

비로자나총구진언 을 5번, 15번, 25번, 55번, 108번 일고(여건 따라)

입으로는 석가모니불을 찾으면서

마음(생각) 속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염한다



아미타불 염불

<<아미타불삼부경>> 중 하나의 경전을 선택하여 1번 읽은 후

아미타불 무량겁멸죄진언'을 108번 읽고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을 찾으면서

마음(생각) 속으로는 무량겁멸죄진언 '옴 모니모니 새야모니 사바하'를

염한다.



관세음보살 염불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을 1번 읽은 후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108번 읽고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을 찾으면서

마음<생각> 속으로는 멸업장진언인 '옴 아로늑계 사바하'를 염한다.



지장보살 염불(집안에 영가로 인한 장애가 있는 신도들에게 권함)

<<지장보살본원경>>이나 또는 시간이 부족할 경우에는 <<지장보살

예찬문>>을 1번 읽은 후

'츰부다라니'를 49번이나 108번 읽고

입으로는 '지장보살'을 찾으면서

마음(생각) 속으로 멸정업진언인 '옴 바라 마니다니 사바하'를 염한다.



염불은 공부할 때뿐만 아니라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부처님을 언제,

어디서나 마음 속으로 계속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삼계의 왕, 남섬부주 대교주, 최초 불) 석가모니 부처님

공부,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해 말씀드린다.





1.  먼저 3배 드리고, 자기의 주소와 생년 드리고 이름을 댄다.

   서울시 은평구 불광1동 대호아파트    동     호에 사는 경술생 ㅇ ㅇ ㅇ

입니다.





2.  발원을 한다.



부처님 저 ㅇㅇㅇ  은

금생이 다하고 다음 생이 다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이 목숨, 이 마

음 다 바쳐 오직 석가모니부처님과 과거 현재 미래에 불과를 증한

삼천대천세계에 계시는 붓다님들께만 귀의 귀명하겠나이다.



부처님 저 ㅇ ㅇ ㅇ  은

금생에도 전생에도 다겁 생을 내려오는 동안 신 구 의 삼업으로

지은 죄가 태산같습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참회하나이다.



부처님 저는 정법을 만나고 큰스님을 만나 기어이 윤회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리 인도하소서.



3.  독송을 한다.

  <<금강경>> 1편 봉독



4.  비로자나총귀진언을 1번, 5번, 25번, 55번, 108번을 한다.



나무시방삼세 일체제불

나무시방삼세 일체존법

나무시방삼세 일체보살

나무시방삼세일체현성



오호지리 바라지리 리제미제기사은제지 바라타니 옴 불나지리익 오공

사진사 타해 바라달마 사타해 아라봐좌나 원각승좌도진나 사공사진사타

해 나무항상사 아승지불 무량삼매 보문삼매 옴 바마나사타바 탁타니아

나 나무아심타 아심타 자심도류 사바하 나무 옴 아밀리 다다바베 사바하

나무 이바이바제 구아구아제 다라니제 니하라제 비니마니제 사바하





5.  석가모니불 정근을 30분 내지 1시간 간절히 한다.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구원실성

석가모니불................(정근)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 고아일심귀명정례





이와 같이 하되, 되도록 비로자나총귀진언을 25번 또는 55번, 108번

씩 많이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석가모니불 정근은 최소한 30분을 하

는 것이 좋다.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큰스

님에게 가르쳐 주신 수행법으로서 현지궁 칭명염불 수행으로 확실히

보살과를 이루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근본경전(아함부 경전), <<지장

보살본원경>> (제9 칭불명호품), ((법화경))(본문 팔품) 등을 교학적 근거로

한다.  대승경전인 <<금강경>>을 읽고 입으로 석가모니불을 칭명하고,

뜻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부르도록 한다.  금강반야바라밀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을 내기 때문이다.



억겁을 내려오면서 지은 지중한 죄업장을 씻고 다생의 부모의 은혜

를 갚고 빙의된 영가를 뗄 수 있는 효를 다하는 천도대재(부처님께서 주

관하시는)를 반드시 모신 후에 삼계 왕 남섬부주 대교주 붓다 중의 붓다

최초 불이신 석가모니부처님 앞에서 과거 생의 잘못을 참회하고 목숨

바쳐 귀의 귀명할 것을 다짐 다짐하고 불과 이룰 때까지 항상 붓다

회상을 만나기를 발원하고 음계와 중계 십선도(十善道)를 지키면서 석가

모니불 칭명염불 수행을 잘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중생 구제하는 보살

행을 하면서 말이다. 






다양한 염불 수행법 중에서
칭명염불 수행이 주가 된다


염불의 염은 억념, 작의 등의 의식 작용을 의미하며 생각

과 음성이 결합되어 일념이 되어야 염불삼매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염불은 부처님의 존재를 믿음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할 경우 부처님

께서 억겁 동안 내려온 지중한 업장을 소멸시켜 주고 부처님의 광염으

로 자신의 불성, 자성, 본래 면목을 밝히게 된다.  물론 참회하고 부처

님을 찬탄하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이 절절히 흘러야 한다.



염불은 타력 수행을 지향하며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수행이 쉽

고 성불하기 쉬운 수행법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도 쉽고 수행하기도

쉽다고 하는 타력염불의 종지, 즉 이왕이수의 행법이다.



그리고 극락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보리심을 발하고 십선을

닦아야 하며 팔정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



또한 염불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신, 원, 행을 구비해야 한

다.  수행의 기본은 뭐라고 해도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다.  부처님께서

절대 법계에 여여히 무아삼매로 그리고 극락정토에 보살들을 제도하시

고 계심을 믿고 그리고 자신도 불과를 증하여 부처님 나라에 태어나고

보살과를 증하여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바램을 세우고 실천

행으로서 염불을 해야 할 것이다.



신,  원,  행은 삼자량으로서 먼 길을 가는데 비축하는 자재

와 양식과 같으며 이것이 없으면 수행이라는 긴 도정을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또한 믿음 돈독해 지면 바램이 생겨나고 바램이

굳건해지면 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삼자량은 상호 연관성을 지

니고 있다.



여기서 믿음은 무엇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실히 아주 절실히 믿

고 의지하여 부처님 법을 자신의 몸과 같이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선행을 갖추어야 자신의 본래 고향인 근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만

행이 구족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선행은 이타행으로

연결되며 보살도를 이룬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민의 마음으로서 대비

심을 내야 한다.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제거해 주려는 마음 그

것이 바로 보살심이다.



구도자에게는 보리심, 즉 불도의 최상승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을 얻고 그 무상정등정각으로써 널리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이 필요한데 이 또한 염불 수행의 기초가 된다.



부처님께서도 <<대집대처공장보살소문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

신다.  "선남자야, 일체 법성은 오직 허공과 같아 보살심의 종자를 삼는

다.  닦은바 복은 모두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보리심에

대한 대표적인 가르침이 다음의 사홍서원에 잘 새겨져 있다.



맹세코 모든 중생을 구하리라.

맹세코 모든 번뇌를 끊으리라.

맹세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리라.

맹세코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리라.



경전에는 이렇게 전한다.  "선남자야, 보살이 처음 발심하고 나서 선

법을 닦아 쌓으며, 많은 법문을 듣고 사유하여 법계를 관찰하며

초심을 깨끗이 하라.  처음 마음이 이미 깨끗하면 다 모든 부처님과 보

살들이 공경하는 생각을 지으며 곧 정인삼매를 획득할 것이

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수행의 일반 과정을 자세히 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보리심과 발심을 내야 한다.  그 후 모든 선행을 닦아 만행을

구족해야 하며 법계를 관찰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럼으로써 삼매

를 얻는다.  보리심은 모든 불교 공부의 기본이다.  따라서 염불 수행을

할 때도 부처님의 거룩하신 법을 배우고 자신도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한 깨끗한 마음을 내야하며 중생들의 아품을 함께 나누고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거름이 될 때 그 곳에 깨달음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염불 수행은 보리심을 기반으로 하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공경 그

리고 찬탄 더 나아가 발원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추가하여 <<관무

량수경>>에서 극락 왕생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복을 닦을

것을 권하고 있다.



첫째, 부모이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지성으로 열 가지 선업을 닦는 것이다.



둘째, 삼보에 귀의하여 여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행동과 예의

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 보리심을 일으켜 깊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

며 한편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힘써 포교하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복에는 유루복과 무루복이 있다고 하셨

다.  유루복은 쓰면 다하는 복으로서 인간적인 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무르복은 부처님을 믿고 염불 수행하는 등의 부처님을 위한 공부에 힘

써서 얻은 복이다.



염불 수행은 단순히 입으로 부처님과 보살님의 명호를 염송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반 사항을 갖추고 또한 많은 휼륭한 마음 자

세를 구비해야 한다.  많은 염불 수행자들은 염불 수행을 열심히 하지

만 제대로 공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이

다.  토굴에서 30년 수행을 해도 하늘 나라밖에 못 가는 스님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아 할 것이다.



보리심, 신,  원,  행,  스승 존경, 효도, 십선, 삼보에 귀의.

귀명, 계율 준수, 인과법에 대한 믿은, 대승경전 독송, 포교 등 다양한

복덕이 갖추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도한 염불 수행과 함께 십념에 대해서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다음의 경전 내용을 살펴보자.



"그때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께서 아미타불의 공덕

이익을 말씀하시면서, 만일 십념을 끊어지지 않게 계속해 그 부처

님을 생각하면 곧 왕생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

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범부의 생각이 아니요  나쁜 생각이

아니며 잡된 번뇌의 생각이 아니니, 만일 그런 생각을 두루 갖추면 곧

안양 국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무릇 십념이 있으니 그 십념이란 이른바



첫재는 모든 중생에 대해 항상 인자한 마음을 내고 모즌 중생에

대해 그 행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니 말일 그 행을 비방하면 끝내 왕생

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켜 해칠 생각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보호할 마음을 일으켜 신명

을 아끼지 않고 일체의 법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인욕하는 가운데서 결정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신심이 청정하여 이양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는 일체종지의 마음을 내어서 날마다 늘 생각하면서

잊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아만을 버리고 겸손한 말을 쓰는 것이며,



여덟째는 세속 이야기에 맛을 붙이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각의를 가까이 하여 갖가지 선근의 인연을 깊이 일으키고

시끄럽고 산란한 마음을 멀리 떠나는 것이며,



열째는 바른 생각으로 부처님을 관하면서 모든 감관을 제어하는 것이다."



한편, 염불 수행은 다음의 <<능엄경>>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해

야 할 것이다.  <<능엄경>>에 보면 대세지법왕자가 그 동료 오십이 보

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다음과 같이 이뢰었

다고 한다.



"저는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항하사 겁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시니

이름이 무량광이시며 일부 부처님이 일 겁 동안 계속하여 나셨는데,

그 최후 부처님이 이름이 초일월광이시라.  그 부처님께서 염불

삼매를 가르치시되 '마치 한 사람은 전심으로 생각하니, 한 사람은 전

심으로 잊기만 하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나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간절하면 이 생에서 저 생에 또 저 생에 이르도록 몸에 그림자 따르듯

이 서로 어긋나지 아니 하느니라.



시방 여럐께서중생 생각하시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 하거니와

만일 자식이 도망하여 가면 생각한들 무엇하랴.  자식이 어미 생각하기

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이 하면 어미와 자식이 세세생생 서로 어긋

나지 아니하리라.  만일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염하면 이 생에서나 혹은 저 생에서 결정코 부처님을 뵈올

것이며 부처님과 서로 멀지 아니하여 방편을 쓰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

이 열리는 것이, 마치 향기를 쏘이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배는 것 같

으리니 이것이 향광장엄이니라'하시더이다.



저는 본래 인행 때에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 법인을 얻었고 지금도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인도하여 서방정토로 가게하나이다.  부

처님이 원통을 물으시니 저의 경험으로는 이것 저것을 가리지 말고 육

근을 모두 가져다가 항상 염불하되 깨끗한 생각이 서로 계속되어 삼매

를 얻는 것이 제일이 되겠나이다."



여기서 보듯 부처님과 세세생생 인연을 맺고 부처님을 어머니로 그

리고 자신을 자녀로 생각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일심불란으로 집지

하면 언젠가는 부처님의 극락세계에 가게 됨을 설명해 주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염불선은 오직 하근기만이 닦는 수행법이라고 비난하

여서 그렇지 않음을 여기서는 말하고자 한다.  실제로 육조 혜능 대사

도 염불선을 중시했다고 전한다.  다음의 전문은 육조 혜능 대사의

이야기이다.



옛적에 한 사람이 육조대사에게 묻기를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나이까?"



그 물음에 육조대사 답하기를

일구,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이

만세의 괴로움을 뛰어 나는 묘도요,

불을 이루고 조사가 되는 정인이요,

삼계 인천의 안목이요,

마음을 밝히고 성을 보느

혜등이요, 지옥을 깨뜨리는 맹장이요,

많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베는 보검이요,



오천대자의 골수요,

팔만총지의 중요한 길이요,

흑암을 여의는 명등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양방이요, 고해를 건너는 배요,

삼계를 뛰어넘는 지름길이요,

최존 최상의 묘문이며 무량무변의 공덕이니라.



이 일구, 나무아미타불을 기억하여

염념이 항상 나타나고,

시시로 마음에 떠나지 아니하며,

일이 없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고,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안락할 때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병고가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살았을 때에도 이렇게 염불하고,

죽어서도 이렇게 염불하여,

이와 같이 일념이 분명하면

또 무엇을 다시 남에게 물어서 갈 길을 찾으랴.



이른바 오직 아미타불 지니고 다른 생각 없으면

손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극락 가리라."



물론, 나무아미타불 염불로서는 극락 왕생까지는 가도 불신을 얻지

는 못하는 것으로 안다.  다만 석가모니부처님을 염불할 경우에는 불신

까지 얻는다고 알고 있다.



앞의 혜능 조사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육조 혜능 대사께서도

염불선을 중요시하였고 결코 하근기가 하는 수행법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주의해서 들어야 할 것이다.



사실, 어느 수행법은 상근기가 어는 수행법은 하근기가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본다.  다 적성과 체질에 맞추어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큰스님께서 설해주신 칭명염불 수행법은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 상

관없이 모두 할 수 있는 안전하고 부작용이 없는 그리고 부처님의 가

피를 받는 수행법이라는 점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현지사의

칭염염불 수행법에 대해서 소개한다.






수승한 공덕의 염불 수행법


염불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부처님의 상호, 즉

그 모습을 마음으로 관찰 관상하면서 그 공덕을 기리는 일"

이라고 한다.



염불과 비교해서 다라니가 있는데 다라니의 사전적 의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요로서,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을 뜻한다.  원어명은 dharanl라고 한다.  또한 백과

사전에 의한 설명으로는 "비교적 긴 장구로 되어 있는 주문으로

총지  능지  능차라 번역하며 불법을 마음 속에 간

직하여 잊지 않게 하는 힘이다."



다라니들 중에서 좀 더 짧은 다라니인 진언, 즉 만트라에 대

해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 서원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신주

주  신주  밀주  밀언   등으로도 번역한다."  본 단원에서는 염불수행과

관련 제반 내용을 집중 조망할 것이다.

먼저, 석가모니불 칭명염불 그 효시, 즉 염불 수행의 원류를 교

학적 근거에 기초하여 논구하고자 한다.



첫째, <<잡아함경>>에 "바사닉왕이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

무여래응정등각' 하니......"라고 되어있으며 둘째, <<중일아함경>>에는

"부처님의 명호, 여래  지진등정각  선서   세간해 ..... 등 여러 가지 명

호를 부르면...., 이 공덕에 의해 두려움이 소멸되고, 신통을 얻고....

죽으면 천상에 난다."라고 되어 있다.



셋째, <<중일아함경>> <억념품>에는 "1.  거닐 때도,  2.  머무를 때도,

3.  앉아 있을 때도,  4.  누워 있을 때도,  5.  항상 어디서나 부처님을 억

념하라."고 되어있으며 넷째, <<대방편보은경>>에는 "석존의 제자 한

사람이 '나무석가모니불'을 부르게 하자, 5백 명의 도둑 신체의 고통이

제거됐다."라고 되어 있다.



다섯째로 <<여환삼마지무량인법문경>>에는 "'나무석가모니불' 부르는

것에 의해, 선근이 증장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과가 있다"고 하

였다.  그리고 여섯째, 부처님은 <<증일아함경>>에서, 모든 비구들에게

수행의 한 법을 염불이라고 설했다.  즉,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

르시기를 마땅히 한 법을 수행하고, 마땅히 한 법을 널리 펴라, 큰 과

보를 이루며, 모든 선이 널리 이르게 되고, 감로의 맛을 얻어 무위

처에 이르며, 문득 신통을 이루어,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제거하

여 아라한과를 얻어, 열반에 이른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고 하

는가?  이른바 염불이다."고 하셨다.



이는 염불하는 공덕에 의해서 무위처에 이르고 신통을 얻어

열반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한 것은 불교의 수행 중에서도 염불이 중요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관무량수경>>에서는 "부처

님께서 위제희 부인에게 16관을 .........."이라고 전한다.



한편, 정토종의 염불 수행인 나무아니타불 칭명염불에 대해서 설명

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정토종은, 서방 극락정토가 분명하게 존

제하고 염불의 목적이 왕생 극락정토에 있음을 주장한다.



아미타불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대승경전 전체의 1/4 정도에 해

당하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다.  정토사상의 발생과 <<정

토삼부경>>의 성립 연대는 불입멸 후 대승불교가 발생할 무렵

어느 대승인 학장에 의해 이루어졌으리라.



그러나 신앙의 근원은 석가모니불 제세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정토신앙은 인도의용수(불멸 후 6~7백년 경), 세친 보살에 의해

서 그 골격을 잡았고, 중국으로 전래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의 진나라 때 혜원(육경에 통달, 노장에도 밝았다), 불타발타라

후위의 담란, 수의 지자 대사, 당의 선도 화상, 도작 스님에 의해

서 염불 수행은 크게 진작되었다.



특히 도작 스님은 하루에 칠만 번씩 염불하였다.  규봉 종밀 스님은

염불법을 칭명염불, 관상(觀想)염불, 관상(觀像)염불, 실상염불로

구분하였다.



염불 수행이 선종과 결합하여 염불선이 대두되었는데 염

불선의 효시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종에서 수용하는 정토

는 내생이 아닌 지금 현세에서 도달한다는 것이고, 타력에 의한 성취

가 아니라 자력에 의한 자각이란 점을 들고 있다.



그래서 정토란 곧 자기 마음의 청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심 정토

의 사상은, 정토의 개념을 선에서 수용하여 선정일여의 염불선을 표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선종에서 정토를 일심에서 통함, 선정일여의 염불선을 언급한

것은 사조 도신스님의 <<밉도안심요방편법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말 나옹 혜근 선사(태고 보우와 더불어 고려말의 선품을 진작

한 대선사)의 염불선을 음미해 본다.



아미타불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붙들고서 간절히 잊지 않는다면

염불하는 일념은 일념마저 끊어진 무념처에 도달하여

육근문에 항상 자마금색 광명을 놓으리.



나옹 스님은 자성미타인 유심 정토를 설하고 있다.



또한 참구염불선이 있는데 이는 염불을 참구한다.  즉 지금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것이다.  당대에는 서방 정토를 유심 정토로

해석해서 선과 정토가 이념적으로 통합되었고, 송대에는 법안 문익, 영

명 연수 스님이 염불선을 주창했으며, 원대에는 남송시대에 발전

한 간화선의 영향을 받아 염불과 화두 공안이 방법적으로 융합되어 임

제종의 몽산 덕이, 중본 명본 스님 등이 있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

2011년 8월 27일 토요일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 2 ]21세기 거룩한 우주적 메타종교, 불교의 법 세계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중국불교의 산물


밀교의 우수한 수행 체계, 타력 염불 수행의 우수성 외에도 힌두교

의 삼매에 드는 요가 수행, 유대 신비주의의 심오함, 이슬람 수피즘,

기독교의 신비주의 유교의 격물치지 수행, 도가의 기동 수행법으로도

달공하여 불교의 아라한위까지 진입 가능하다.



선불교의 참선 수행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중국불교의 산물이자

경전 상 명문 근거가 없다.  화두선에 대해서는 정말 언급하고 싶지 않

으나 너무 오랫동안 우리 한국불교를 병들게 해서 별도의 단원으로 다

루었다.



큰스님 말씀대로 화두선을 통해서도 견성을 할 수 있으므로 화두선

이 100% 나쁜 것은 아니다.  수행자의 체질이나 전생 선근에 따라 화

두선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다.



하지만 일부 수행자들에게나 효험이 국한되는 수행법으로는 21세기

한국 불교 아니 전 세계 불교를 견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만약 화두선이 그렇게 휼륭한 수행법이라면 왜 청전 스님처럼 한국

불교에는 위대한 큰스님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왜 스님들의 명성이

널리 선양되지 못하고 있는가 말이다.  화두선 수행자들은 깊이 이 점

에 대해서 숙고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선불교의 흠결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신행, 즉 부처님의 존재를 믿는 불제자로서의

기본 수행 마음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부차라고 하는

실정인데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마음이 부처라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부처인데 수행은 왜하고 불교는 왜 믿는지 의문스럽다.  마음이 부처라

면 종교는 종교도 아니고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신심 깊은 불제자들은 알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종

교는 세계 그 어는 종교에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둘째, 견성, 즉 깨달으면 부처가 됐으니 막행막식하고 사음도 가하다

고 하는 것이 오늘날 선불교의 현주소다.  계율이 없는 불교는 불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계율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2500여 년을 존속 유

지되어 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셋째, 경전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잘해야 아라한 자리에

불과한 조사들의 어록들을 부처님의 경전보다 더 소중히 하는지 이유

를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한국불교가 살아남으려면 대승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넷째, 염불을 하근기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찌 염불 수행을 제대

로 해본 적이 없이 하근기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염불 수행

의 오묘한 맛과 쉽고 빠른 경지 증득을 모르고서는 절대 염불선을 하

근기 수행이라고 모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화두

선은 상기병, 정신질환, 주화입마에 걸리기 쉬운 수행법인 반면 염불

수행은 부작용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효를 다해야 한다.  부처님이 주관하시고 불과를 중한 청정하

신 큰스님이 집전하시는 천도대재를 치르고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

그리고 친인척들을 하늘로 천도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부처님은 마음의 산물이 아니다.  어찌 마음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마음이 부처님이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모욕하고 능멸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법화경>> <비유품>의 부처님 말씀처럼 공성의 증득으로 붓다라

할 수 없다.  32상 그리고 10력 등 모든 붓다의 공덕을 갖춘 색신보신

을 성취해야 붓다인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불신을 얻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고 확인하신다.



일곱째, 생사관이 없고 육도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지옥이

없고 천상이 없다면 <<아함경>>에서 설한 육도 윤회는 거짓이란 말인

가?  그것은 부처님을 능멸하는 행위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덟째,  참선만이 유일무이한 깨달음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독선

적이고 배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위빠사나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라 분명히 하셨다.





화두선(간화선)수행법


한국에서는 도의국사를 기원으로 해서 천여 년이 넘게 전승된 유서

깊은 화두선이 화두 일념을 통해서 일념삼매를 통과하여 무념삼

매로 증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까지 훌륭한 수행법으로 인정되어

왔다.  화두선도 위빠사나선이나 일반 염불선과 동일하게 삼매를 얻을

수 있다.  그 점으로도 충분한 가치는 있다.  하지만 수행자의 채질이

화두선에 적합해야 하며 시간을 많이 소비한다는 단점과 함께 현대 한

국불교 수행 문화를 선양하고 수행 세계를 고취시키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화두선은 이제 더 이상 한국불교, 더 나아가 전 세계 불교의

21세기 수행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실정에 와 있다.



한국과 티베트을 왕래하고 달라이라마로부터 공부를 배우신 유명한

청전 스님께서도 "한국에는 부처같은 큰 소리는 많은데 부처같은 행동

은 왜 없나 ."라고 일갈한 것처럼 선불교에 찌들은 한국불교계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화두선의 문제점과 병폐를 지적하여 더 이상 화

두선은 21세기 대표 수행법이 될 수 없음을 말해두고자 한다.



 

티베트의 밀교 수행법


밀교에서는 신행으로서 무드라를, 언행으로서

만트라 그리고 의행으로서 만다라대일여래부처

님에 대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지궁 현지사의 신도라면 효나 천

도제 등의 신행을 쌓고 비로자나총귀진언과 칭명염불 수행을 통해

서 언행을 닦아야 하며 부처님 성상을 관함으로써 의행

을 쌓아야 한다.  진리라는 다르마는 우주에 대한 세

가지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신행 언행  의행이 그것이다.  이 삼행

을 통해서, 즉 차례대로 무드라, 만트라, 만다라 수행을 통해서 신

구 의 삼업을 정화한다고 본다.



명상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정적인 장소에서 명상

하는 것과 하나는 역동적인 생활 속에서 명상하는 것이다.  이 들은 조

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즉, 생활 속에서 바르게 신행을 하고 바

르게 언행을 하고 바르게 의행을할 때 무드라, 만트라, 만다라 명상

도 잘 된다.  역으로 무드라, 만트라, 만다라 명상을 잘 하면 생활 속에

서 잘 된다.  역으로 무드라, 만트라, 만다라 명상을 잘 하면 생활 속에

서 바른 신행, 바른 언행, 바른의행을 구족하게 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이 삼행은 바로 영혼의 각성과 신성한 인격체를 창조해 나

가는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생활 속의 삼행과 명

상의 삼행의 양자 관계는 상호 조화와 상호 균형을 이루면서 큰

스님께서 설하신 붓다의 삼신 중에서 우주적인 보신을 형성

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큰스님께서는 우주적인 선근을 쌓아 키울 때 그 공덕으로 보신불

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억겁동안 내여온 악업과 죄업, 그리고 빚,

원결, 삼독심을 모두 녹이고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을 모두 제

거할 때 무량광을 보고 육종진동을 맞은 후 석가모니부

처님께서 최종으로 인가를 하시면 붓다가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연화장 세계에 보신불이 생성된다고 하신다.  결국 불교 수행

의 핵심은 보신불을 얻는데 있는데 어찌 보면 그러기 위해서 신행 언

행 의행의 삼행을 닦아 다겁 생을 통해 쌓아온 신업 구업 의업

의 삼업을 청산하는 것이 요체라고 생각이 된다.



만약 선행이 부족하다면 무드라 명상, 즉 자세를 바르게 하고 반가

부좌나 결가부좌로 명상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통해서 이 신업

을 닦을 수 있다.  만약 반가부좌를 하는 무드라 수행에 약하다면 생활

속에서 신행을 닦을 필요가 있다.  상호보완적이다.  명상은 조용한

수행이라면 생활은 활발하고 역동적인 수행인 것이다.



인간은 사바세계의성대 세계 속에서는 두 가지 양태를 지닌다.  즉

내성적인 측면과 외향적인 측면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은 내성적인 마음의 상태가 있고, 어느 말은 외향적인 마음의 상태를

얻는다.  명상은 마음의 상태를 조율하고 균일하게 하는데 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 사회 생활에 피곤함이 생긴다면 무드라 명상을

하면된다.  무드라 명상이란 연꽃 자세로 앉는 것, 즉 가부좌를 말한

다.  이렇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을 하면 그것으로 신행을 닦

는 것이 된다.  신행에 대한 활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무드라 명상, 즉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기가 힘들 때는 적극

적이고 동적으로 사회생활의 신행을 더 열심히 하면 된다. 마찬가

지로 언행에 있어서 잘못이나 실수를 했다면 만트라 수행, 즉 비로자

나총귀진언과 칭명염불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칭명염불 수행이 잘 안 되는 날에는 경전이나 좋은

글을 읽거나 도반과 좋은 대화를 나누어 언행을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의업의 정화를 위해서는 조용히 만다라 명상, 즉 부처님

성상을 흥시하고 관조하면서 명상하기 바란다.  그러면 마음의 잘

못된 뜻과 생각들을 정화하게 된다.



만약 사회 생활에서 잘못된 뜻을 가진 경험이 있다면 꼭 성상을 잘

관상하고 부처님의 정심 정의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

다.  물론 여러분도 평상시 잘하는 부처님에 대한 기도는 이 삼행

을 모두 포괄한다고 본다.  기도도 일종의 명상으로 중요시된다.

여기서 소개한 티베트의 밀교 수행법은 삼업을 정화하고 청산하는

삼행으로서 삼밀이라고 한다.






생각은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단발적이며 변화한다



우리는 생각리아는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지속적이지 못

하고 단발적이며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삿된 욕망과 결부되어 일어나는 생각들을 조심스

럽게 관찰하고 예의 주시해야 한다.  만약 생각이 영원 불변하다면 그

것은 우리의 본 마음인 청정심과 다를 바가 없다.



큰스님께서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초창기 당신께서 수행

할 당시 마음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우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

다고 솔직히 고백하셨다.



여기서의 마음은 중생심이 아닌 청정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

스님의 말씀은 진실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음은 정신을 환골탈태하여 얻어진

청정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면 생각도 깨끗한 것이다.  반대로 마음

이 탁하다면 그것은 생각도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욕구나 사고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본

면목, 즉 자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옥이라는 것

은 이러한 덧없고 본질적이지 못한 삿된 욕구와 생각들에 휘말려 본질

적인 자신의 참나, 즉 본래 면목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이렇게 무상한 생각들과 수시로 치성하는 중생심

을 여실지견으로 진지하게 꿰뚫어 보고 조용히 가라앉히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빠사나선은 미혹된 생각과 정사유 및 정견을 엄

격하게 구분한다.  만약 자신이 미혹된 생각인지 그리고 정견인지를 모

른다면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모든 잡념들에게 하나의 공부감(먹이감)

을 주어 그 잡념들을 잠재운다.  위빠사나선은 바로 이렇게 수행자에게

발생하는 부질없고 무상한 생각들과 욕구들을 하나하나 알아차려 총체

적인 무지를 타파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총체적인 무지의 구름을 일소시켜 감으로써 올바른

정견과 정사유를 증득해 나가게 된다.  하지만 거해 스님께서 <<깨달음

의 길>>이란 책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위빠사나선 도중에 잡념이 치성

하게이러나면 '망상, 망상, 망상'이라고 반복함으로써 잡념을 잠재운다

고 한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으로 잡념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 쉽지

가 않다.  왜냐하면 잡념을 완전히 일소하기 위해서는 잡념의 근원인

카프마(업)에 대한 성찰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빠사나선은 올바른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구나, 그리고 잘못된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구나를 여

실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의식을 명료하게 하

여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사실, 위빠사나선은 조용히 마음

을 가라않힌 사마타 상태에서 수행해야 제대로 된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

전해내려 온 정혜쌍수에서 정은 고요하고 맑음을 의미하는

사마타 상태를 의미하며 혜는 밝음으로서의 헤아림을 의미하는 위

빠사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위빠사나는 사마타에 기반을 두고 주도면밀하게 생각들을 관

철하여 빛의 광도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중생심이 탈각되고 번뇌의 원

인들이 하나하나 규명되어 잡연과 탁한 의식(에너지)이 제거되어 가면

자연히 오롯하게 본 성품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혼자서 위빠사나선을 수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큰스

님의 말씀대로 무릇 수행을 위해서는 큰스승을 만나야 한다.  스승이

없이 수행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불장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매우

위험한 일이므로 반드시 눈밝은 스승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우리 불

제자는 두 분의 큰스님을 모시고 있으니 더없는 복운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혼자 하다보면 치성하게 일어나는 망상을

대처하지 못해 몇 번이고 어려운 고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어떤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위빠사나선은 너무 자력에 의해서 세계의 진상을 이해하고

내면을 탐구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당연한 문제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잘못하면 때로는 잘못된 인연과 안 좋은 인연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다.



또한 위빠사나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법계(세상)와 내면의 진상

을 여실지견 파악하는 수행법이므로 너무 과도하게 몰입하면 초긴장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위빠사나선을 잘못 수행한 결과이다.  위빠사나선은 진지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항상 마음의 고요함 위에

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수행자의 내면에서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잘못된 생

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려서 그것을 올바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우주적 다르마로서의 카

르마와 인연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안 좋은 생각들과 고통은 바로 악한 카르마와

안 좋은 인연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악한 카르마는 전생과 현생

의 잘못된 신 구 의 삼업이라 할 수 있으며, 안 좋은 인연은 전

생과 현생에서 빚을 진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팔정도의 정견을 구족하는 데 매우 요긴한 수행법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왜냐하면 큰스님께서도 현지사 법회에서 말씀하

신 것처럼 수행이란 칭명염불 수행, 팔정도, 그리고 육바라밀(계율 포함)

를 병행해서 함께 닦아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재세시 설

하신 팔정도는 수행의 중심부를 점위하고 있다.



한편 수행자 자신의 의식이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수행

법이 위빠사나선인데 만약 수행자의 의식이 미혹되면 자신은 바르지

못한 삼업을 짓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본 자성인 청정심에서 저지른

죄업이 아니라 바로 마구니나 빙의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의 전생과 현

생의 죄업에 의해 이루어진 습기, 집착, 탐  진  치 등의 중생심

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빠사나선에서 선은 사유수라고 하여 생각을 닦는 것이며

정려라고도 하여 고요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위빠사나

명상이라고도 하는데 명상이란 바로 생각을 그윽하게 하고 깊이

참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명상함으로써 잡념의 뿌리는

사라지게 된다.



근래에는 미얀마 등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서 아라한 위를 증한

분이 있다고 회자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유를 다듬음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위빠사나선에 다가가는 분이 있다.



종교 명상서적들을 많이 읽고 깊이 책의 내용을 참구하는 것으로도

위빠사나선에 다가설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내부의 적'의 동태를 관

찰, 분석, 파악하여 그들을 종국적으로는 타파하여 영원히 잠재우는데

목표를 둔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운 올바른 가르침을 투명한 통

합적 사유를 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들을 타파해 나가

야 한다.  이러한 통합적 사유는 번뇌를 뿌리 채 뽑는데 큰 도움을 주

는 금세기 최고의 철학 사조이자 추세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언금한 것처럼 위빠사나선은 한계를 지닌다.



첫째, 위빠사나선은 아라한에 목표를 둔다.  즉, 위빠사나 수행법은

아라한 위에 한계를 둔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둘째,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지나치게 두뇌

를 긴장시켜 상기병을 일으키거나 바르지 못한 사유와 계율 중에서 특

히 음계를 준수하지 못할 경우 망상에 휘말려서 정신질환이 일어

날 수 있다.



따라서 옆에서 수행자를 잘 돌보아주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 또

한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바처럼 위빠사나선의 중요성은 집중 명상을

통해서 일념삼매를 통과하고 무념삼매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빠사나선은 아라한까지만 가능하다.  그 이상의 수행

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

행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바르지 못한 식욕, 삿된 음욕은
 자신의 삿된 생각에서 비롯된다 


결국 바르지 못한 식욕이나 삿된 음욕은 바로 자신의 삿된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문제는 바로 삿된 생각이

근원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삿된 생각은 바로 중생심에서 발현되며

반대로 올바른 생각은 청정심에서 발현된다.



위빠사나선은 과학적 사유처럼 실험과 관찰을 무수히 많이 반복함으

로써 중생심과 청정심의 차이를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다.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이러한 중생심을 억겁을 통해 쌓아온

습기,  집착,  죄업,  탁기,  탐,  진,  치(어리석음)의 삼독심 등으로

언급하시는 것으로 안다.



수행이란 번뇌의 근원이 되는 이러한 주생심을 타파하고 척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는 바, 우리가 식욕과 음욕을 느

낄 때 그것은 순간적 욕망이지 결코 영원하고 지속적인 욕망이 아니라

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고 불행한 것이며 고통의 근원

이 되는 것이다.



욕구나 삿된 욕망은 자신의 '참나'인 본 성품, 즉 청정심과는 무관하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모성애적 욕구를 통해

서 음욕을 일으키며,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정복욕을 통해서 음욕을

일으킨다.



이러한 두 가지 욕구들은 삿된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잘못된 욕구가 발동하는가?



남성들은 원시시대부터 밖에서 사냥하고 다른 부족과 투쟁하였으며

다른 부족을 정복하였다.  오늘 날에는 밖에서 사회적 생존을 위해 투

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정복욕을 여성에게도 작용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오류라고 본다.



한편 여성들은 원시시대로부터 남성들이 밖에서 활동한데 반하여 집

안에서 아이들을 키움으로서 모성에적 욕구를 갖게 되어 남성에 대해

서 그러한 모성애적 본능욕이 작용하는데서 오는 정신적 오류라고 알

고 있다.



이러한 정복욕과 모성애적 욕구는 사람들의 중생심에서 비롯된다.

반면 청정심에는 이러한 정복욕은 뛰어나고 현명한 지도력과 카리스

마, 진취적 기상, 호연지기로 그리고 모성애적 욕구는 아가페적인 사

랑, 보편애, 우주적인 사랑으로 승화된다.  왜냐하면 청정심 자체는 모

성적 욕구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정복 욕구를 통해 정복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의 욕구는 상대적으로 남녀 서로를

끌어당겨 올바르지 못한 음욕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심의 덫에

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이라한 잘못된 욕망에 대한 여실한 통찰과 성찰을 얻

어내어 올바른 지견과 정견을 자신의 내면에 확립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의 기초는 따라서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등,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즉 팔정도의 토대 위에서 행해진다.  부처님의 위빠사나 가르침은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칭명염불 수행처럼 동등하게 팔정도에

토대를 두고 있는 매우 수승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림 -- 위빠사나선 수행법


여기서는 앞서 논급한 성과 명을 수행하는 관법으로서 위빠사

나 수행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위빠사나선의 본질을

핵심적으로 논한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현자로 알려진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한 것처럼 알아차림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김열권 법사가 말한 대로 보면 욕망과

잡념이 사라지게 된다.  심오한 통찰과 지속적인 주시를

통해서 번뇌와 잡념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의 뿌리를 뽑아버

리는 것이 위빠사나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미심쩍은 생각이 일어난다면 무엇인가 문제의 소

지가 자신의 환경과 주변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위빠사나선도 휼륭한 수행법이라고

하셨으며 다만, 이 수행법을 통해서도 아라한 위 정도까지 얻을 수 있

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안다.



왜 아라한 위까지 얻을 수 있느냐는 위빠사나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면 된다.  사실, 위빠사나선은 생각을 다듬고 정리하고 생각을 타파하

는 수행으로서 생각에 끄달리지 않는 수행법으로서 서양철학자 헤켈이

말한바대로 절대정신을 증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절대 정신이 바로

참나 또는 본래 면목이라는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사념처관이

라고 해서 신(몸), 수(느낌), 심(마음), 법(현상)을 있는 그대로

살펴서 참 자아, 즉 본 면목을 찾는데 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그토록 강조하신

수행의 요체는 깊은 삼매에 도달하는 것이다.  수행법은 이러한 깊이

있고 그윽한 삼매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휼륭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깊은 삼매를 얻도록 도와주지 못한다면 그 수행법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위빠사나선은 생각을 타파함으로써 중생심을

제거하고 내면의 공인 청정심의 본 자성을 깨어내는데 있다.  큰스

님께서는 견성의 순간을 내면의 자성이 터져나와 하늘과 땅을 뒤엎는

경지라고 설하신다.



큰스님의 견성에 대한 오도송은 매우 휼륭한 말씀이 아닐 수 없으며

가장 명료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삼천대천세계가 눈앞에서 허

물어지고 태평양의 물을 모두 마실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마찬

가지로 위빠사나선이 증위하는 경지도 바로 생각을 지멸하고 단멸하여

맑은 본 성품이 오롯이 두되에 깨어나와 내외명철이 되는 경지이다.



사실 수행을 하면 자타불이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자타불

이를 얻기 위해서는 무아를 체험해야 한다.  하지만 견성 수준에서의

무아와 아라한 수준에서의 무아 그리고 보살 수준에서의 무

아와 최고 수준인 불과에서의 무아는 그 차이를 갖고 있다.



즉, 욕계정삼매, 명진정삼매, 해인삼매, 대적정삼매 각각의 삼매의

심화 정도에 따라 자타불이의 경험을 다르게 느낀다는 점이다.  이는

견성을 얻은 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 번 읽어보면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위빠사나선은 바로 욕계정삼매를 넘어 명진정삼매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을 하기 전에, 즉 수행에 대한 초발심 이

전에는 주관적이고 주체적인 자신과 객관적이고 상대적인 타인과의

분명한 구분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위빠사나선을 하게 되면 보다 분명

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내면에 혼재하는 자신의 의식과 타인의 의식

들을 간파하게 된다.



<<능엄경>>에서는 나그네를 모두 쫓아내어 자신의 몸에 주인공이 되

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잘못된

의식과 빙의적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의 청정심을 도야하는 것

이 위빠사나선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빙의를 제거하고 불순한 영혼을 제거하는 것은 혼자서

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위빠사나선을 잘못하면 상기명, 주화입마, 청

신질환 등을 겪게 되기도 한다.  참고로, 큰스님의 바르고 청정한 칭명

염불 수행은 먼저 부처님이 주관하시는 천도대재를 지내야 한다는 것

을 명시하고 계신다.



따라서 큰스님께서 제시하는 수행법은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 하에

수행되는 매우 체계적이고 부작용이 없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자

세한 내용은 칭명염불 수행에 대한 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한편 청정심은 수행자 마음의 본체로서 진실된 것이며 중생심

은 수행자 마음의 때처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덧없는 것이

다.  즉, 청정심은 영원한 빛이라면 중생심은 어둡고 지저분한 탁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청정심과 중생심의 구분은 삿된 욕망이라는 매개

를 통해서 구분된다.  만약 우리가 아침, 점심, 저녁 공양시간이 아닌데

무엇인가 먹고 싶고,  자녀를 두고자 하지 않는데도 음욕이 일어난

다면 그것은 올바른 욕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식욕과 음욕은 순간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여실지견으로 통찰

해야 한다.  만약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1초의 순간이라도 끊

이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영구적으로 지속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청

정한 본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식욕이나 음욕은 모두 순간적인 만족이고 만족을 얻

으면 욕망은 잠둘어 버린다.  이러한 삿된 욕망이 바로 인간을 윤회시

키는 무지의 그물이요 어둠의 굴레이다.  참고로 큰스님께서도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원각경>>을 언급하시면서 음욕이 바로 윤회

생사를 일으킨다고 사자후하셨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칭명염불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불신을 얻는데 있다
 

한편, 도가에서도 정, 기, 신을 삼보라고 하여 하단

전에 위치하여 행위와 신업을 실현시키는 정을 명으로 보

고, 반면 두뇌의 상단전에 있는 신을 성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물론 정 자체가 명이 아니고 신 자체가 성인 것은 아니다.



정을 통해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신을 통해서 성을 깨우

친다.  정은 명의 원동력이며 원료라면 신은 성의 원동력이

며 원료라고 할 수 있다.



성과 명의 상호 작용이 중요한 것처럼, 즉 성품을 통해서 세상살이

를 깨우쳐가고 세상살이를 통해서 성품을 깨우쳐 나가는 것처럼 정

과 신도 정을 통해서 신을 각성시키고, 신을 통해서 정

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주로 외도로서의 고가

수행법을 해설한 것이다.



성명쌍수를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참구해 들어가면 수행자는자신의

명에 의한 행위를 통해서 세상살이를 경험하고 결국 법계의

묘리를 깨달아 나가는 것이 하나의 수행이고 반면 자신의 성에 의

한 참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회광반조하여 내면의 묘

리를 깨달아 가는 것이 수행의 또 다른 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 명은 육체를 지닌 우리의 인간 존재의 행동 반

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은 우리의 맑은 영혼이며 삶을 경험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주로 각각 수행자 자신의 신 구 의를 관찰

하고 인연과 카르마를 성찰함으로써 견성을 얻어가는 수행법이다. 한

편 칭명염불 수행은 석가모니부처님 성상의 양미간을 집중적으로

관하면서 석가모니불을 염송함으로써 깊은 집중을 통해 삼매에 진입해

가는 수행법이다.



둘 다 아즈나 차크라를 각성시키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명쌍수에서 성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인 것이다.



또한 거시적 관점에서 성명쌍수를 봤을 때 지구의 역사라는 것은 명

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를 타고 창출된 문화와 문명을

성에 비유할 수 있다.  명은 성을 깨닫기 위한 기반이 되며 성은 명

을 이해하기 위한 기반이다.



둘은 상부상조이며 불가분이고 상호 회통되어 있는 것이다.  고대 요

가에서는 문화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문화는 성

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은 지구의 생명을 의미하며 인류의 영혼을 의미한다.



한편 역사가 없이는 결코 문화와 문명이 창출되지 못하는 것처럼 문명

과 문화가 없는 역사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의 개체로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전 과정이 의미있게 갈무리되기 위해서는 반

드시 의식이자 영혼인 성을 각성시키고 깨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유인즉 인생의 고락과 애환이 모두 진귀한 가르침으로서 이 성

에 갈무리되기 때문이다.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도 최종적으로 불과를 증

위하게 되면 사바세계에서 몸을 버리고 열반을 하게 될 때 4대 영체가

부처님 세계에 있는 자기의 불신과 하나로 계합한다고 사자후하였

다.



물론 큰스님의 사상의 폭과 깊이는 성명쌍수를 보다 고차원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훨씬 광대하고 심오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칭명염불 수행법의 이론적 토대 - 성명쌍수 
 

수행자가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한 든든한 이론적 토대를 얻기 위해

서는 성명쌍수에 대해서 이해하면 좋다.  흔히 동양 철학과 동양 수행

을 하는 수행자라면 고대 성현들로 부터 전승된 성명쌍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성명쌍수란 성(성품)과 명(생명, 삶)을 함께 공부하라는 것을 학

인에게 당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이란 성품을 말하며, 성품은

마음의 자성을 말한다.  이는 또한 불성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목숨, 즉 생명을 말하며, 더 포괄적으로는 삶

이란 점에서 성품을 공부하는 것이 명을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적으

로 영원하게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으로서의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 내재한 법리와 인연법 그리고 연기사상

을 통찰 및 철견하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성으로서의 자성을 닦는 것이 명으로서의 삶

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성과

명은 함께 닦아야 한다는 성명쌍수를 성현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힌두의 철학 사유에서도 본질 또는 존재를 공부하는 것과 인

연 또는 관계를 공부하는 것 두 가지를 나눈다.  어느 것이 우선이고

어는 것이 차선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을

통해서 내면의 자성 세계로 회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내면과 외면은 뻥 뚫려 내외명철이 된다.  이 내외명철

이 확연히 인식되어 자신의 인식 구조와 존재론적 세계가 하나가 될

때 내외의 벽은 허물어지고 완전히 허공과 같이 충만한 공을 철견

하게 된다.



인도의 쿤달리니 요가에서도 쉬바로서의 정적인 성품 의식과 샥티로

서의 동적인 육체 에너지를 이야기한다.  쉬바는 성에 해당하며 샥

티는 명에 해당한다.  성은 관조적 힘이자, 주시적 힘이자, 관찰

자로서의 힘이다.  명은 행위적 힘이자 삶의 영위자로서의 힘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불가의 팔정도에서 정견, 정사유 등은 쉬바 의식

을 도야하는 바른 길에 해당하며 정업, 정정진 등은 샥티 힘을 도야하

는 바른 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은 우리의 마음을 의미한다면 명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신 구 의 작용을 의미한다.  성은 체요 명은 용인 것이

다.  21세기 과학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시스템을 비유로 들면 프로그

램들 하나하나의 실체가 바로 성이요 그 프로그램의 행위 또는

작동이 바로 명인 것이다.



체와 용이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성명도 불

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마음에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염불선이나 위빠사나선이나 모두가 일차적으로 성을 도야하

는데 있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은 성을 도야하는 것을 넘어서 부처

님의 가피와 위신력으로 불신을 얻는데 있다.  큰스님의 법 세계에

서는 성이라는 것은 작은 불씨라면 불신은 태양으로 비유할 수

있다.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 


인간이라는 존재는 중생심이 있고 삼독심이 있어 잡념과 번뇌가 수

시로 치성하게 일어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잡념과 번뇌는 그리

스 신화의 메두사 머리카락처럼 하나하나가 뱀의 형상을 지닌다.



물론 이는 비유이지만 번뇌가 뱀이라는 비유는 많은 수행자들 사이

에서 이야기되어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의 뱀의 형상이 잡

념이요 번뇌다.  그래서 이러한 미혹한 생각들에서 비롯되는 뱀을 모두

소거하는 것이 수행자의 임무이다.



수행을 열심히 해나가면 과거에 지었던 업장들이 녹아 내리고 과거

에 저질렀던 망상과 타인에 대한 증오심들이 하나하나 탈각되어 가면

서 마음은 순수하고 청정해진다.  반면 이렇게 과거에 물들었던 잡념,

번뇌, 망상, 중생심, 증오심, 삼독심 등등이 모두 지혜의 눈에 형상화

되는데 이때 뱀의 형상으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자신의 업

장을 의미한다.



칭명염불 수행을 지속해 나가면 부처님께서 가피와 위신력으로 항상

수행자를 보호해 주시며 결국 뱀의 형상으로 보이는 중생심의 의식(에

너지)이 사라지게 된다.  사실 번뇌와 잡념, 그리고 망상을 포함한 일체

의 중생심은 마귀들의 농간에 의해서 나타나는 불순한 의식이다.  이러

한 불순한 의식을 인간 중생의 두뇌에 심어서 그것을 먹이로 먹고 살

아가는 지저분한 의식체가 마귀라고 할 수 있다.  마귀는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하며 살기가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칭명염불을 하는 도중에 외부 경계에 부딪혀 망상

이나 잘못된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것에 끄달리지 말고 항상 청정한 마

음으로 '석가모니불'을 열심히 억념, 즉 간절한 마음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하여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행을 하기 전에는 지혜의 눈이 막히어 잡념들이 보이지 않다가,

칭명염불을 지속하면 잡념들이 지혜의 눈에 형상화된다.  그 잡념들이

바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염불 수행자의 지혜의 눈에 보이곤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뱀은 실체적인 것이며 마구니들이 그동안 수행

자의 의식을 잠식하여 번뇌와 잡념들을 주입시켜 놓았던 것들이다.



동시에이러한 번뇌와 잡념들은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수행자를 괴

롭히기도 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이지만 매우 실제적이

며 번뇌와 잡념의 실체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염불선 수행자는 이러한 마구니들의 농간에 휘말리지 말고 지

혜의 눈으로 잡념과 번뇌들을 소진시키도록 정진해 나가야할 것

이다.  수행 도중 아무리 힘든 경계가 나와도 이겨내지 못할 경계는 없

다고하였다.  즉, 극복할 수 있는 고통만 주어진다는 것이 우주 대자

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혼자서 이겨내려고 하지말고 부처님

의 명호를 지성으로 염송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생각을 단멸시키는 것이 불가의 수행이라는 것은 익히 많은 고

승들에 의해서도 주창되어 왔다.  스즈끼 순류 선사도 <<선심초심

>>이라는 책에서 모든 문제가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맑은 마음을 어

지럽게 하는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생각을 지멸시키고 본 성품을 밝히는 것이 모든 수행의 일

차적 관문이라면 어려운 코스를 돌아서 갈 것이 아니라 쉬운 길을 선

택하는 게 지혜로운 수행자가 아닐까?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빠른 시일 내에

거의 부작용 없이 공과를 증득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는 것을 우

리는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재차 강조하지만 큰스님이 알려주신 칭

명염불 수행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기 때문이다.






  잡념과 번뇌의 실체


먼저 염불이나 위빠사나선 등이 불가의 수행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잡념과 번뇌의 실체를 규명하고 설명하기에 앞서 수행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수행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단도직입적으로 수행이란 글자

뜻 그대로 행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극락정토의 중품 보살이신 공자님께서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고 하셨다.  먼저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신

이란 행을 의미한다.



먼저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게해야 하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머리 속으로 불교 공부를 위한 지식을 쌓는 것보다도 행을 닦

아 나감으로써,  즉 수행을 통해서 몸으로 직접 불교 공부를 증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만약 지금 우리 불제자들이 수행정진

이 조금 힘들더라도 그것이 행을 닦음으로써 불제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확립하고 결국 우리들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 맑고 견고하게 만

드는데 일조 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는 수행 또는 과 수심의 공조라고 할 수 있다.

즉, 몸을 정법에 맞추는 수련과 마음을 눈부시게 그리고 청정하게

만드는 수련이 함께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동서고금의 모든 수련이 먼저 몸 공부를 통해서 마음 공

부로 나아가는 것이라 알고 있다.  그리고 진실된 지혜는 부처님의

가피와 조응하는 몸 공부와 마음 공부가 겸비될 때 얻어진다고

본다.



한편 집에서 하는 효도행은 우리 불제자에게 더없이 크나큰

수행이라고 부처님과 큰스님께서는 강조하신다.  수행이라고 반드시 호

흡 수련을 하고 좌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하루하루 바르게

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

가 수행이며 특히 부모님께 효도행을 다하는 것은 바른 삶을 영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겠다.



아라한이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효도행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

신다.  그러므로 효도행을 자신을 닦는 수행으로써 생각하고 항상 부모

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염불을 위시한 위빠사나선 등을 포함한 모든 불가의 수행은 억겁 동

안 내려온 잡념과 번뇌들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

다.  수행을 왜 하냐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 마음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일체의 잡념과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견성과 깨달음의 견처에 목표를 두고 수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다만, 수행은 단순히 잡념과 번뇌만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억겁 동안 내려온 업장, 습기, 악연(원결) 그리고 탐 진 치

삼독심 모두를 지멸시키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견성을 넘고 아라한위를 넘어 보살위에 도달할 수 있

고, 그리고 여기서 더 정진해야 불과를 증위할 수 있다고 큰스님께서

사자후하신다.  두 분 큰스님의 법 세계를 조용히 관조해 보면 불교 수

행의 궁극적 종착지는 바로 연화장 세계에 불신을 얻어 불과

를 증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불가의 수행들 중에 위빠사나선, 화두선(간화선), 묵조선, 염불 등이

있는데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칭명염불만이 독보적인 수행 체계를 지니

고 있어 보살과는 물론 잘하면 후생에 언젠가 불과를 증할 수 있다고

하신다.  여기서는 견성, 즉 깨달음의 한계 내에서 잡념과 번뇌를 타파

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한다.



무릇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므로 수행을

하게 되면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칭명염불의 수행법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설하신 칭명염불 수행법

은 가히 미증유의 수행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대정각을 이루시고 45년 간의

중생 제도 후 멸도하신 이래로 지금까지 불과를 증위하신 분이

수보리 존자, 사리불 존자 그리고 광명 만덕 큰스님과 자재 만현 큰스

님 네 분밖에 없는데, 이 모든 분들이 칭명염불 수행에 근거

를 두고 수행을 하셨기 때문이다.



불과를 증위하면 얻게 되는 공능에 대해서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자세히 나오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자 한다.  다만, 불

과를 증위하기 위해서는 한 생각 집중하여 일념삼매에 증입해

들어, 무엇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아야 한다.  그 점

을 큰스님께서는 역설하고 계신다.  이유인즉 불가에 귀의, 귀명한 사람

이라면 엄연히 불교의 교주는 석가모니부처님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

로 의당 석가모니부처님을 마음 깊이 간절하게 찾는 것은 당연한 수행

자의 도리일 것이다.




칭명염불 수행은 불과를 증위하는 근거


그런데 큰스님 말씀대로 오늘날 불교 수행 문화에서 왜 석가모니부

처님을 전면에 내세워 수행을 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본인은 여러

곳의 절을 찾아다녔지만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는 것을 익히 듣지 못했

다.  관세음보살님을 찾는 곳이 너무나도 많은 실정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아미타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큰스님과 같이 불교의 교주로서 석가모니부처

님을 무엇보다도 존숭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삼천대천세계의 총교주이시고 삼계의 법왕이신 석가모니부처님

을 간절히 염하면 그 어떤 불보살님보다 거대한 가피와 해아릴 수 없

는 위신력을 받는다는 것은 올바른 정신과 양식을 갖춘 불제자라

면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친히 큰스님께 하사하신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법의 위대함을 논하기 전에 수행법의

근저를 이루는 잡념과 번뇌의 실체, 성명쌍수등에 대해서 논

구하고 그 다음 불가에서 전해 내려온 대표적 수행법인 위빠사나

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로 석가모니부처님 재세시 근본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에는

크게 첫째 위빠사나선과 둘째 염불이 있었다.  따라서, 위빠사나선

수행법을 살펴보는 것은 불제자에게 의미있는 공부가 될 것이다.  그리

고 티베트의 밀교 수행법을 간략히 언급하고 화두선 수행의 병폐에 대

해서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또한 염불선과 현지사의 칭명염불 등을 아우르는 염불 수행에 대한

고찰을 하고자 한다.



염불에 대한 자료가 워낙 부족하여 다각도로 염불에 대한 자료를 구

하려고 하였으나 어떤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나 다행히 큰스님께서 염

불에 대한 글과 자료를 주셨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의 박상수님이

쓰신 <염불 수행의 타력과 자력 연구>가 본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기쁨을 얻었다.  큰스님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리며 박상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붓다 삼신설과 불신사상을 진작하고
흥성시키는 초석 

수많은 불교 경전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는 부처님의 삼신설

을 왜 오늘날의 우리 불제자들과 수행승은 외면해 왔는가?  정말 큰스

님이 아니셨다면 영영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

다.  단지 메마르고 희미한 삼신설은 글자만이 빛 바랜 경전에

새겨져 후손에게 전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참으로 불교의 존망과 사활이 걸린 위기에서 큰스님께서 출세

하셔서 과감하게 붓다의 삼신설과 불신 사상을 진작시키고

흥성시키는 초석을 놓으셨다 할 수 있다.  이 점 우리는 다시 한

번 두 분 큰스님께 뜨거운 눈물로써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불신사상은 엄청난 것이며 가히 큰스님이 아니고서는 필

설로 언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큰스님께서말씀하신 불신사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불신을 얻지 않고서 붓다(부처님)가 되었다고 한

다면 그것은 사이비이며, 외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능엄경>>

에도 완전한 붓다가 되기 위한 과정과 수순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 역력히 불신을

얻어야 붓다가 된다고 사자후하셨다.



우리는 불신을 일개 법성이나 자성과 혼돈해서는 안 되며 불신

이 없이 부처라고 하는 것은 망언임을 알아야 한다.  여하튼, 우리는

큰스님을 모범적 전형으로 삼고 무한한 동경과 향상심을 가지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말씀하신 것처럼 만족하지

말고 끝없이 추구해야 한다.



부처님 세계에 자신의 불신을 얻를 때까지 말이다.  수행을 통해서

만족한다는 것은 자신의 수행에 한계를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부는 끝이 없는 것이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이 험한 사바세계에 오신 두분 큰스님께 가슴 속 깊이 감

사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분 큰스님께서 불교사에 공헌하시고 21세

기에 이루신 빛나는 업적은 찬란하게 우주 법계와 부처님 세계에 기록

될 것이리라.  끝으로, 이 험한 사바세계에 오셔서 불교사상에대한 웅

흔한 사자후와 미증유의 원대한 가르침을 설해주시고 하루하루 영혼체

정화 및 천도대재를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두분 큰스님께

지성으로 오체투지를 드림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  


부처님을 우리의 영혼의 의사라고 굳게 믿는 마음, 즉 신심을

가진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병이 나아 무량한 광명과 지혜 그리고 자비

와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믿음이 굳건해 졌다면 이제 부처님께 마음과 목숨을 바쳐 귀의 귀

명하고자 해야 한다.  큰스님께서 전해 주신대로 앞으로 금생이 다하고

다음 생이 다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오직 우리 석가모니부처님께만

"이 목숨, 이 몸뚱이, 이 마음 다해서 귀의 귀명하겠나이다."라고 마음

깊이 뼈 속에 새겨야 한다.



독을 먹어서 제 정신이 아닌 우리 전부를 부처님께 맡기고자 하는

결연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

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어떠한 일을 하든 직심과

강한 마음의 자세 그리고 물러남이 없는 정진이 필요하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하는 필사적이고 사생결단하는 자세

로 부처님께 귀의 귀명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자신을 믿고 따르

는환자들을 막거나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으시겠는가?  우리는 환자

로서 귀의 귀명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자비와 지혜와

온갖 방편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 다음으로 참회해야 한다. 왜 부처님께서 이토록 힘든 사바세계에

오셔서 고행을해야 했단 말인가?  우리는 가슴 깊이 되새겨 봐야 할

사항이라 생각한다.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서 이

토록 힘든 사바세계에 오셔서 우리 어리석은 불제자들의 영혼을 치유

하셔야 한단 말인가.



진실로 이에 대해서 깊고 진지한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모두는 깊은

감사의 눈물과 목메어 울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억

겁을 두고 지은 죄를 참회해야 한다.  어는 훌륭한 현지궁 현지사 신도

님 말씀처럼 자신이 태어난 것을 증오하거나 자신을 학대한 것, 그리

고 부모님께 잘못한 것, 형제 자매에게 잘못한 것에서부터 가까운 이

웃에서 타인에게 잘못한 것 등을 낱낱이 참회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참회하는 순간 뜨거운 감격의 눈물도 나고 삼독심을 녹이는

맑은 콧물을 흘릴 정도라면 항상 우리를 지켜봐 주시는 부처님께

서 그에 대한 응분의 도움을 주신다는 점을 깊이 마음 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누구나 부처님에 대해 감사하고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성심에

탄복하고 뜨거운 눈물과 맑은 콧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경배하고 고귀

한 영적 스승이신 부처님께 귀의, 귀명 한다면 분명 부처님은 도와주

시리라.



참회는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석가모니부처님, 이 몸뚱이는 알

고 모르고 지은죄가 너무 너무도 많습니다.  전생에도 그랬고 억겁을

살아오는 동안에 너무 너무도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진실로 참회합니

다.  소명해주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깊이 있는 반성과 사죄의 마음으로 부처님께 매달리면 부

처님께서는 우리 불제자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갸륵하게 생각하실 것이

다.  물론 타인에 대해 저지른 죄들에 대한 참회가 어려우면 부처님의

거룩하신 경전과 가르침을 통해서 깊이 감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도

죄가 사해진다고 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약을 제공해 주시니 어떻게 해서든

지 자신에게 맞는 약을 선택해서 꾸준히 복용해야 할 것이다.  즉,

자신의 중생심과 탐 진 치 삼독심에 물들은 영혼체를 정화하

기 위해 꾸준히 부처님을 믿고, 귀의 귀명하고, 참회하고, 감사하고,

감탄하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경의를 표하며 숭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는 강요가 아니라 우리 불제자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야 될 것이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부처님을 깊은 마음에서 지극한 존경심을

갖고 우러러 보며 칭송하는 일인 것이다.  절실히 간절하게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의 세계를 동경하는 불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약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 불제자들을

살펴봐 주시고 보살펴 주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발원해야 할 것이다.



"정말 지금부터 열심히 석가모니부처님을 부르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쁜 일 하지 않고 열심히, 열심히 좋은 일

하고 불쌍한 이웃을 돕고, 그리고 큰스님의 불사를 돕겠습니다.  그러니

제 죽을 때 잠자듯 편히 가도록 해주소서(죽은 복이 큼) 그리고 다음 생

에는 꼭 정법을 만나 큰 스승을 만나서 기어이 윤회를 벗어나고 싶습

니다.  부처님 그리 이끌어주소서."라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발원을 꼭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석가모니부처님

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정법을 펴시고 다시 2500여 년이 흐른 뒤 남섬

부주 대한민국에 두 분의 큰스님을 붓다를 만들어 주신 부처님께 감사

드려야하며 큰스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절을 올려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죄가 많고 악업이 많은 우리들은 부처님을 믿고, 우리를

항상 일체 처, 일체 시에서 돌보아주시는 부처님께 무궁한 감사를 표

하고, 부처님에 대한 끝없는 찬양과 찬탄 그리고 예찬을 하며 진심에

서 우러나오는 경의, 경배를 표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부처님께 마음

과 몸을 바쳐 귀의하고 귀명해야 하며 부처님의 거룩하신 자비에 울고

또 울고 더 나아가 통곡함으로써 감사의 눈물로 우리의 영혼을 정화해

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양에서 고대로부터 전해온 군사부일체의

주인 되시는 분이 바로 우리 부처님이시라는 것을 명각해야 할 것이

다.  즉, 부처님은 우리 영혼의 정의로운 임금이시요, 영혼의 자비로

운 스승이시고, 영혼의 거룩하신 아버님이시며 그리고 여기에 더

하여 영혼의 성스러운 의왕이시라는 점을......





부처님께 귀의 귀명, 참회 발원하라


먼저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부처님께 귀의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부처님께 귀명해야 하는가?  우

리 불제자는 먼저 이러한 화두, 즉 문제 의식부터 하나하나 해결해야

한다.  그냥 믿어야 하니까 믿는다는 말보다는 전체적인 식견과 합리적

이해 그리고 철저한 지혜로운 안목을 통해서 귀의 귀명의 의미를 되

새겨 봐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귀의 귀명해야 불보살님의 가피도 받게 된다는 사실이

다.  성중님이 도와주고 호법신장님이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강제

적인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화두는 잘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영적 스승이신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아이와도 같은 우리는 크게 위

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법왕이신 석가모니부처님과 불과를 증위하신 두 분 큰

스님께 무한한 감사와 경배를 올려야 할 것이다.  많은 휼륭하신 신도

님도 체험하고 있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의 크나큰 은혜와 가피 그리고

두 분 큰스님의 이 험한 사바세계에서 우리 불제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구제하시는 데 대해서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부처님이 얼마나 지극한 뼈를 깎는 정진 끝에 대성과인 불과

를 증위하시고 두 분 큰스님께서 얼마나 지극한 정진으로 불과를 증위

하셨는 지를 상상한다면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을 향하여 뜨거운 눈물

을 금할 길이 없다 하겠다.  아니 오열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법화경>>에서 전하는 것처럼 불과를 증위하지 못

한 우리들 모두에게는 다소간의 차이지만 독이 묻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 부처님과 두 분 큰스님께서는 갖

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우리를 돌보아주고 계시다.



부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자비의 청정한 에너지, 즉 약을 먹어

야 한다.  그런데 아들로서 우리가 의사이신 부처님을 믿지 않으면 어

떻게 약을 먹을 수 있겠는가?



먼저 부처님을 믿고 그 분의 가르침과 주의사항을 따라야 할 것이

다.  이 약을 먹으면 홀연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데, 즉 견성하여 깨

달음을 얻으면 그럴 수 있는데 여기서 중단하지 말고 계속 약을 먹어

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꾸준히 약, 즉 부처님이 주시는 자

비와 지혜의 청정한 에너지를 복용하면 언젠가는 병이 낫게 될 것이라

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 병이 고쳐진 아라한과나

좀 더 고쳐진 보살과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바램이

시다.



완전한 치유가 되어 불과를 증위할 때까지 다겁 생을 두고 끊

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왜 우리가 독을 먹었는지 물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

는 독화살 비유 이야기처럼 그 독을 먹은 이유를 알려면 그러는 동안

결국 우리는 독이 퍼져 죽게 되기 때문이다.





자재 만현 큰스님의 불의 삼신설 


넷째, 자재 만현 큰스님의 '불의 삼신설'이다.  위에서 든 것

같이 불과를 증한 붓다만이 법 보 응 삼신을 구족한다는 경

전적 근거는 <<금광명최승왕경>> 등에 있다.



불교사적으로 보살이라 존칭을 부여받은 바 있는 인도의 마명, 용수

큰스님과 몇몇 중관의 논사들 그리고, 무착, 세친..... 등 유가행 학파

의 조사들의 연구 논문인 <<대지도론>> <<섭대승론>><<보성론>>등에

의해 불신관은 삼신설로 정립이 된다.



1)  자재 만현 큰스님은 다음 같이 불의 삼신설에 대해 법문하신다.



번신(불)은 만유의 본체인 여여한 이 (법신)에 우주의 본

질 실재에, 불지에 오른 수행자의 보신불의 여여의 지가 합일

한 우주적인 광명(자기 원만보신의)을 법신불이라 한다.



(원만)보신은, 보살의 위에서 무량겁을 두고 어려운 수행 (무주상 보신

-육바라밀, 보현행원)을 한 결과로 비아를 털어 버린 수행자의 영아

가 청정을 넘어선 빛(광도와 강도가 햇빛 섬광보다 더한 안팎이 드러나 하나

된 아름답고 영롱한 무량광)으로 자라면서, 이루어진 모든 영구성이 있는 유

형의 불신, 지복의 몸을 말한다(바로 보신에서 응화신, 분신, 변화신을 냅니다).



응(화)신은 중생의 마음이 탁하고 어두워 광명으로 이루어진 불신을

보지 못해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불신으로 (a)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음 (b)원만보신에서

신발이나 옷, 머리, 때로는 성별까지 바꾸고, 방사하는 빛을 흡수해서

사바세계에서 보살의 모습으로 활동하는 변화신을 말한다.  화신은 불

신이 전제되고 따라서 불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2)  큰스님은 법설하시기를 법신불은 우주적인 몸으로소 분별을 떠나

있고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있는 광명 지로서의 존재이고, 보신불

(원만보신)은 불지에 오른 이만 볼 수 있으며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삼

명, 육통, 삼신, 사지, 대자대비, 복덕..... 등 일체에 자재하는 삼매력

을 지닌 신격적인 지복의 존재라 하시고 인행시 서원에 따라 보품(계

인)을 지니신다 하신다 (문수보살-칼, 관세음보살-버들가지, 지장보살-석장, 약사

여래불-약병...등).



3)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나투실 때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부처님들

이 각기 법신불이 되어 이 비로자나불 하나의 부처님으로 흡수된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능력은 하늘 창조주(창조주란 없습니다)적 능력을

지니신다.  석가모지부처님의 청정법신 이름이기도 하다.



4)  불과를 증한 이는 불신(원만보신)을 지닌다는 것, 법  보 화 삼신

을 갖춘다.  법신 보신 응(화)신은 하나이지만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각

각 달리 활동한다.



5)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염부제(남서부주)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고

수미산정에 올라 도리천 제석궁으로 가서 법을 설하고, 다시 보리수와

제석궁을 떠나지 않고 야마천궁으로 가서 법을 설하시고, 또 다시 위

여러 곳을 떠나지 않고 도솔천궁으로 가서 법을 설하신다.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부처님의 위대하시고 희유한 신력을 확인해야

한다.  이때는 부처님의 원만보신이 보리수 하 석가모니불 자기 색신으

로 합일해서 법을 설하시고, 그 색신(응화신)은 그 자리에 놔두고 수미

산정 제석궁으로 나아가신다.



이때 부천님은(원만보신)은, 물론 그 안에 4 영체를 흡수해 계합한 상

태이다.  제석궁에서 법문이 마쳐지고 다시 야마천궁으로 가서 법이 설

해질 때 역시 보리수 하 그리고 제석궁의 부처님(화신)은 그대로 놔둔

다.  붓다의(원만)보신은 이렇듯 백천만억의 화신을 낼 수 있다.



이 얼마나 부사의한 장관이 아니랴! 세계 어는 성인이 이러한 장면

을 연출한 적 있는가?  삼신을 구족한 붓다들은 이것이 가능하지만 최

초 불이요 붓다 중 붓다이신 석가모니불의 위신력은 특히 괄목하다 할

수 있다.



삼신을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적정삼매를 자재하는 데서 오는 것

이지, 신통이 아니다(선불교의 육조 혜능 조사에 의해서 주장된 인간 정신 내면 자

성 속, 마음의 채용을 불의 삼신으로 해석함은 붓다의 참 경계를 전혀 모르는 법설이라

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다섯째,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설과 힌두교의 브라마

비슈누 쉬바의 삼신일체설은 불가의 삼신설과 전혀 다르다.  우주

법신(부라마 비슈누 쉬바)에서 화신은 나올 수 없다.  원만보신에서 (응)화

신이 나온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의지가 있고, 욕구가 있다는 것은 중생이며 그곳 (보신, 하느님)은 대자

대비 원력과 지혜와 위신력만이 존재한다.  법신은 무시무종이니 우주

를 내고 유지 상속하는 이법일 뿐이다.



여섯째, <<화엄경>> 삼현위에서 보이는 불신은 화신(분신)불이

고, 초지에서 십지 보살이 볼 수 있는 것은 붓다의 변화신이

며, 불지에 든 붓다만이 원만보신을 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 자재

만현 큰스님의 법문이다(오직 십지에 오른 보살들만이 보신불을 볼 수 있다는 것

은 몇몇 논사들 의견임을 철언한다).



앞에서 소상히 밝힌 바와 같이 만현 큰스님께서는 삼신설은 인도의

무착, 세친 큰스님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하셨다.  그 다음으로는 <<보성

론>>의 삼신을 들 수 있다고 하시며 여기서는 불신 곧 원만보신은 무

량광, 즉 억종광, 백종 오색광, 열반광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맞다

고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금광명최승왕경>> 제二권 <3 분별삼신품>, 용수의

삼신관, 인도의 마명과 용수 큰스님과 몇몇 중관의 논사들 그리

고 유가행 학파 기타 논서 등 붓다의 삼신설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역대 불가의 최고의 큰스님들과 그 분들의 주저들을 모두

꿰뚫어 보시는 탁월한 안목과 식견을 겸비하셨다는 점에 필자는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중의 불서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득도한 수행승들도 올바르게

삼신설과 불신사상에 대해서 논하는 바가 없다.  비록 논한다고 해도

메마른 지혜로서의 사변적 지식에 불과하다.



 

 삼신을 구족한 붓다는
오직 불교에서만 출세


또한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자후하셨다.

"붓다들의 현신했을 때의 모습은 해탈신이기에 그렇겠지만

보살의 그것과도 하는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붓다의 음성 역시

그러합니다.  일거수일투족이 자비롭습니다.  보신의 미간, 눈, 입, 손바

닥 등 열 군데서 '빛'을 방사할 때에는 녹색이나 무색 광명같이 단색을

방광할 때도 있고, 백종 오색광명을 놓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억종

광명을 방사할 때도 있습니다.



붓다께서 방광사히는 빛은 마왕 파순이나 하늘 마는 물론 귀신들도

모두 무서워하는 대상입니다.  탐  진  치 삼독이 녹아버린 성자의 마

음 빛이기에 악심이나 사악한 기를 물리치고 녹이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량광은 영롱하고 청정하며, 내외명철합니다."



중요한 점은 마왕과 마구니들도 부처님의 무량광 앞에서는 꼼짝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사실이 아닌가.  마구니와 외도들

의 세력에 시달려봤던 수행자라면 부처님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되

고 고마운지를 알 것이다.



부처님이 계심을 믿고 부처님의 위신력이 이렇게 희유하며 거룩하다

는 것을 절실히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그만큼 더 정화되

고 맑게 치유된다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불교의 위대한 점은, 불교에서는 이러한 붓다가 나온

다는 점입니다.  삼신을 구족한 붓다가 오직 불교에서만 출세합니다.  실

제로 어는 대성자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다면 감격의 눈

물을 흘릴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여기서 나는 말합니다.  무

아 속 절대 초월의 세계가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는 오직 불과를 이룬

붓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세계이며 우리 교주 불세존께서 최초로 발견

하셨습니다."라고 사자후하신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정말 감사에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우주에 불교가 없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어

두운 세력에 휘말리게 될지 감히 상상만 해도 두렵지 않을 수 없다.



큰스님께서는 법문 도중에 말씀하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크게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열거하셨다.



첫째 붓다를 내실 수 있는 큰 지혜와 힘, 둘째 중생의 지중한 업장

을 소멸할 수 있는 삼매력, 셋째 지옥, 아귀, 축생(악도) 중생을 건질

수 있는 위신력 넷째 땅의 일부, 전부까지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길 수

있는 부사의한 큰 힘 등을 지니신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힘이 있으나 밀장이라서 공개할 수 없다고 하

셨다.  큰스님 말씀대로 붓다가 나오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는 유일무이

한 종교라는 점을 감사히 생각하고 항상 부처님을 억념하면 그에 상응

하여 부처님께서 우리를 호념하신다는 것을 명각해야 할 것이다.


항상 부처님을 억념하면, 상응하여 우리를 호념

참고로,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9판의 부록

에 '무량광! 불신을 이루는 빛'에 대한 서술 내용을 여기에 싣는다.



1.  미래제가 다해도 없어지지 않는, 따라서 일찍이 생긴 적도 없는

불생불멸의 빛 그래서 훼손 될 수 없다.



2.  그 빛은 오염될 수도 없다.  불구부정인 것이다.



3.  지극히 청정하고,



4.  한없이 예쁘고 아름답다.



5.  안팎이 드러나 영롱하기 그지없다.



6.  어던 빛보다 차원이 다르게 밝다.  중생이 본다면 가루가 될 것이

다.  일생 보처의 보살도 선정에서 보지만 실명할 정도다.



7.  천둥 번개 칠 때의 섬광과도 비교 안 되는 강도이다.



8.  천만억의 빛깔로 되어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백종 오색광, 억종

광이라 한다.



9.  한량없이 방사(방광)해도 끝이 없어 무량광이라 하겠다.  삼천대천

세계를 감싸고도 남는다.



10.  땅 속이든 물 속이든 마음 속이든 삼천대천세계 어디든(지옥이든

천상이든, 윤회 안이든 밖이든) 비친다.  그러니 자연의 빛과도 다르다.  이미

이 빛은 입자가 아님은 물론이다.



11.  중생의 지중한 업장을 소멸도 하고,



12.  그래서 신통력을 지닌 빛이요.



13.  물 속 깊이, 땅 속 깊이 숨어버린 영악스런 무주 고혼을 잡아

낼 수 있기도 하는 그런 지혜 광명이요.



14.  백천삼매, 대적정삼매를 들 수 있는 부사의한 빛이요.



15.  중생이 그 앞에 있는 빛인데도 이를 볼 수 없는 신비스런 빛이

요.



16.  일체 자재한 신력을 지닌 빛이요.



17.  사바세계를 들어 던져 버릴 수 있는 큰 힘을 지닌 빛이요.



18.  외도를 조복받는 빛이요(참 진이 남아 있는 외도는, 두더지와 같이 그들

은 햇빛무량광에 결정적으로 약하다)



19.  부처님들은 이러한 청정 무량광(모든 빛-자성광이나 극락정토의 빛의)

으로 불신이 이루어져 있으므로 부처님은 32상 80종호를 구족하고

삼신, 사지, 오안, 자비, 복덕 등 18불공법을 구족하게 됩니다.





 불신에 대한 문헌학적 고증

큰스님께서는 <<대반열반경>>을 원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대열반광(부처님의 광명)이 중생의 털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불

도를 이루리라' 이르신 대목과, '만약에 부처님(불신)을 보는 자는 곧 일

체 번뇌가 다 끊어지고 부처님 말씀을 듣는 자는 반드시 불도를 이루

이라'하신 말씀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께는 부처님의 대승경전 외에도 수많은 기라성 같은 대선지식

께서 집필하신 불서와 논서를 인용하시면서 불신사상과 붓다 삼신

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하신다.  큰스님의 불신사상, 즉 붓

다의 삼신설에 대한 대의를 받아 정리한 내용을 소개한다.



첫째,  <<금광명최승왕경>> 제 二 권 <3 분별삼신품> 을 보면, 부처님께

서 허공장 보살에게 " 모든 부처님에게 세 가지 몸이 있다.  화신

응신  법신이 그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셨고, 이러한 "세 가

지 몸이 구족하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거두어준다"고 이르셨다.



"가지가지 몸을 나타내는 것이 응신이라 하고 오직 여여와 여여의 지

혜만이 있는 것 그것을 법신이라 한다"고 하셨다.



법신은 앞의 두 몸의 근본이 되며 "부처님은 큰 삼매의 힘으로 온

갖 선정, 대자대비, 온갖 다라니, 온갖 신통, 온갖 자재를 나타낸다.  큰

지혜의 힘으로 열 가지 힘, 사무소외, 네 가지 걸림없는 변재,

280(18)불공법.... 온갖 희유하고 생각할 수 없는 법을 모조리 나타낸

다."고 하셨다.



이러한 전거로 미루어보면 부처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알 수 있다 하겠다.  견성한 도인과 깨달음을 얻은 수행승들은 과연 이

러한 부사의한 능력과 힘을 구족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용수의 이신관을 거론할 수 있다.  석존 재세시에는 인간

석가모니불 이외에는 아무런 불신관도 없다가, 석존께서 열반에 드신

후 경전이 결집되면서 <<아함경>>에는 육신불, 그의 교법을

뜻하는 정도의 법신불의 이신관이 나오게 된다.  불멸 후

6~7백년 경에 태어난 용수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대지도론>>

에는 부모생신과, 단순한 교법의 의미를 훨씬 벗어난,

언제 어디서나 여러 가지 몸, 여러 가지 방편을 내어 시방 중생을

제도하는 근원적 존재이며, 항상 광명을 내고, 항상 설법하는 존재인

무상의 혜인 법성신의 이신관이 나온다고 하셨다.



이 또한 큰스님의 지혜가 아니면 경전으로부터 감히 초출할 수 없다

하겠다.  사실 오늘날 견성이나 깨달음도 제대로 구족하지 못한 수행승

이나 불제자가 어디 이러한 지극히 미묘한 경전 내용을 알려고 하겠는

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이제 큰스님의 불신 사상과 붓다의 삼신설 사상은 복원

되어야 하고 불제자들 간에 크게 추앙되어야 할 사상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유가행 학파 기타 논서..... 제 논사의 주창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무작은  <<섭대승론>>에서 모든 부처님들

은 진신  보신  응신  세 몸을 갖춘다라고 하였으며, 세친의 <<대

승장엄경론>>에서는 불과를 증한 모든 붓다님들은, 자수용신, 타

수용신,  변화신의 삼신을 구족한다고 하였다.  4C말 경 인

도의 논사  견해의  <<보성론>>  즉,  <<구경일승보성론

>>에는 모든 붓다님들은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을 구족한다고 주찰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의 소론도 거룩하고 희유하신 붓다의 삼신 설명이 너

무 관념적일 수밖에 없어 불교학을 공부하는 이들로서는 이해하기 어

려운 게 사실이었다.  큰스님의 이 부분에 대한 법설은 체험하지 않고

이리 말할 수 없을 만큼 극명하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와 10회에 걸친 TV 법문, 현지사 그리고

부산분원에서 정기적으로 설법하신 내용 등을 들어보면, 불의 삼신에

대한 법설은 너무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영산 당시 아난이 아니고서는, 불과를 증하지 못하고서는, 자기 불신

이 없는 이로서 그 누가 만고에 비밀이요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삼신

설에 대해 이리도 분명하게 자신 있게 설할 수 있겠는가?



11세기 티베트의 전설적인 수행자인 밀라레빠도 "붓다라면 삼신

을 구족해야 붓다"라고 했지만, 그의 <<밀라레빠 10만 송>> 어디를 보

아도 원만보신에 관해서 만은 실제로 보고 체험하여 법설한 것으로 보

이지 않는다.



참고로 선불교의 삼신 해석을 간략히 소개한다면 우리 인간 마음 가

운데 삼신을 갖추고 있다면서, 우리가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본래 청

정한 마음, 성품을 법신불로 보고, 자성의 변화 한 생각 사량분별

을 화신불로, 생각 생각 자성을 보는 지혜를 보신불로 본다.



산심은 부처님에 한한 말인 것이다.  붓다의 삼신까지도

유심화,  관념화시켜 보는 것은 불의 경계를 전혀 모르

는 소의다.



티베트 밀교에서는 공성의 증득만으로는 진실한 멸도, 성불일 수 없

고 무량한 선업으로 색신을 성취해야 대승의 진정한 성불이라면서 선

불교를 비판하다.



<<법화경>> <비유품>에서는 "공의 법을 증득하고, 32상의 색신을 성

취했을 때 성불"이라 한다.  이러한 밀교의 견해들은 전적으로 옳은 말

이지만 바르도에서 의생신을 얻어 보신불의 몸으로 성불한

다며, 육신 속에 삼신을 성취하는 위가 불이라 주창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견해라 사자후하신다.



진정한 불신은 티베트 밀교의 의생신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불신은 바르도가 아닌 상적광 세계의 정광명보다 몇 차원 높은

무량광으로 이루어진다.  영원히 멸도하지도 않고 자비와 지혜, 그리고

복덕을 구족한다.  또 항사의 신통 묘용을 쓰며, 대적정삼매에 자유로이

들어 백천만억 화신을 내어 삼천대천세계의 인연 중생을 구제하는 것

이다.



이같이 대승불교에 와서야 유가행 학파의 몇몇 논사들이 <<화

엄>> <<법화>> <<능가>> <<열반>> <<반야>> 그리고 <<해심밀경>>등을

깊이 꿰꿇어 연구하여 부처님들은 중생이나 보살과 달리 세 몸(법.보.응)

을 지닌다는 결론에 따라 삼신설은 확립이 된다.



여러 경론 <<금광명최승왕경>> <<반야바라밀다경>> <<십지경론

>> <<금강반야바라밀경론>> <<장엄경론>> <<섭대승론>> <<보성

론>>에서 표현은 약간씩 다르나, 법신은 영겁토록 변치 않는 만유

의 본체를 법으로 보고 신은 이 본체에 인격적 의미를 붙여

법신이라 했다.



보신은 보살의 위에서 무량겁을 두고 어려운 수행을 한 결과로

얻는, 영구성이 있는 유형의 불신을 뜻한다(아미타불과 같이)고

되어 있다.  응신은, 보신불을 보지 못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

나는 불신, 역사적 존재로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음으로 되어 있다.





붓다는 삼신을 구족하고 
절대계와 중생계를 넘나들면서 교화하는 분

그리고 부처님의 위신력은 천도대재 등을 통해서 중생을 천도하고

천도대재를 지낸 복위자의 업장을 녹여준다는 점에서 정말 희유하다는

사실을 명각해야 한다.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렇게 설하신다.  "명부에 들지 못

해서 떠도는 고혼 영가들을 찾아내서 붙들어 오는 일, 지금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영가를 천도하는 법석으로 데려오는 일, 짐승 몸을

받아 난 영가의 영체를 빼내어 데려오는 일은 오직 붓다만이 할 수 있

습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영체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오죽하랴!  부처님께서 어떠한 위신력을 구족하시고

계시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며 마음이 붓다라고 하는 세태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말이다.  오호 통재라!  우리는 큰스님의 장엄하고 웅대한

법 세계를 통해서 하루빨리 쇠락해 가는 불교를 진작 및 중흥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게 된다면 인류는 숭고한 불교 문화의 광명과 그

종적을 망각하고 불교사에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위신력을 구비하시고 계

시는가?  그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큰스님게서는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다.  "붓다 이룬 이는 법, 보, 화 삼신을 구족해서 평등적인 무아

속 절대세계와 차별적 중생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중생을 교화하

는 분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중생이 아라한과를 이룰 때까지는 반야

바라밀이 중요하지만, 보살이나 붓다 되기 위해서는 큰 삼매력이 아니

면 안됩니다.  백천 삼매, 대적정삼매에 자유로이 들 수 있어야 자기의

불신을 얻고, 그 깊은 삼매력으로 생사를 자재하며 14무외려과 지혜와

자비, 항사의 신통을 얻고 천백억 화신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큰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삼매력을 얻는 것이 관건이라

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높은 삼매를 얻느냐가 자신의 불신을 얻고 생

사를 자재하고 다양한 권능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 위신력에 대한 해답의 황금열쇠는 바로 고강

한 삼매력에 있다 하겠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붓다 중의 붓다라고 할

수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밝히신다.  "여름 한 낮의 햇살,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그런 빛을 백천

만 개 합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밝은, 수미산만한 대지

의 빛덩어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보고, 하나님이나 창조주 따위를

넘어서 우주 자체가 되어 버린 무서운 그 부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

득할 수만 있다면 불교의 위대함에 감읍하지 않고 견딜 수 없을 것입

니다."라고 말이다.



과거 현지사와 인연된 공덕으로 두 분 큰스님의 불신들께서 전

해주신 메시지들 두뇌를 통해 원격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체험은

참으로 밝고 밝아서 두뇌를 시원하게 정화하는 것 이상의 환희심을 가

져다 주었다.



너무나 깨끗한 광명의 에너지였다.  그렇다면 부처님 법신의 무

량광명체로부터 빛을 받는다면 그것은 정말 얼마나 거룩한지

통절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리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회,

아니 세상에 태어나 겪은 모든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최대의 희열

을 경험하리라.


붓다 삼신의 경계는 붓다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부처님의 상모의 훌륭함을 큰스님께서는

상세히 설하신다.



"보신불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 자비를

갖추고 있어서 백천만억의 화신을 내어 중생을 교화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과 모습은 필설로 그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상모를 다

갖추십니다.  음성 역시 미묘하여 모든 붓다들은 그 거룩하고 희유하심

이 우리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붓다 삼신의 경계는 붓다가 아

니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부여되는 최고의 극찬이라 할 수 있는 진 선 미

를 모두 구족하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큰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면 정말로 인간 중생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하찮으며 미물에

불과한지 여실히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불제자들은 지저분한 사바세계로부터 벗어나 고원하고 거룩하

신 부처님 세계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내딛어 결연한 마음으로

정진해 나가야 하리라.



부처님께서는 상모만이 아름다우신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모범을 보

이신다는 것을 또한 큰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붓다를 이룬 이는 법 보 화 삼신을 구족해서 평등적인 무아 속

절대세계와 차별적 중생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라 밝힙니다."라고 큰스님게서는 말씀하셨다.



우리 불제자들은 부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힘써주고 계시는 것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우리에게

그토록 부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

다고 말씀하신 것이리라.  또한 이와 같이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귀

명하고 그동안에 지은 죄를 참회하고 발원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또 부처님의 위신력은 다음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중생이 불신을 본다면 즉시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100볼

트 전구에 수십억 볼트 고압이 들어와 산산이 부서지듯 말입니다.  그

래서 붓다들은 32응신으로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의 중생들을 위해 베푸시는 한량없는 자비심에 감사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법화경>>을 보면 독을 먹은 자녀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방편으로

아이들에게 돌아가셨음을 알리는 구절이 나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방편으로 열반하셨지만 지금도 일체 시, 일체 처 우리들을 보이지 않

는 곳에서 알게 모르게 살펴보시고 우리들의 영혼의 질병을 치료해 주

시는 자비로운 의사와도 같으시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법 세계


큰스님께서 모든 법신을 총섭하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법 세계를

살펴보자.  큰스님께서는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이렇게 피력하신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고 같이 언제나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전 우주적인 몸뚱이'가 그의

본질적인 성품입니다.  대우주이시며 절대와 동일한 변조 광명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로서 모든 붓다들의

청정법신을 총섭하고 있습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하고 지고한 법 세계인가~  말로만 들어서 그렇지

실제로 수행을 통해서 신비 체험을 경험해 본 수행자라면 분명 이러한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내면의 정화와 두뇌에 강렬한 법열을 느꼈

으리라.



어느 경전 어는 불교 수행 서적에 이러한 비로자나 법신에 대한 이

야기를 이토록 간명하고 극명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  여기서 더 나아

가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자후하신다.



"불과를 이룬 붓다가 죽거나 입적할 때는 이 몸뚱이 육체는 버리고

그 안의 4 영체가 불계에 있는 자기 불신과 하나로 계합이 되고

다시 자기의 청정법신불과 합일합니다.  또 모든 붓다님들의 청정법신

불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안으로 뭉칩니다.  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체입니다.  청정법신불은 원만보신의 빛보다

훨씬 광도가 높습니다."



컴퓨터 사이언스 세계에서는 '구조적'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한

다.  이 구조적이라는 용어는 조화물의 구성과 얼개를 가리킨다.



일반 사상가나 철학가의 사유가 건전할 경우 매우 구조적인 사유를 하

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유가 조화를 이루고 사유의 구성 요소들이 건전한 균형 관

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을 일종의 우주의 모사

라고 했을 때 의식이 조화, 즉 코스모스를 이룰 때 건전한 사

유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큰스님의 비로자나 법신불 세계는 일반 불제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법 세계로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 불제자의 정신

세계가 매우 구조적이고 정합적으로 탈바꿈된다.



왜냐하면 큰스님의 법 세계는 허황된 가설이나 꾸며낸 허위가 아니

며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유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힌두의 베다학파에서는 인체는 육체를 포함하여 미묘한 코

샤(몸)와 거치른 코샤 등 세 개의 덮개로 구성되어 겹쳐 있다고

전한다.



데이비드 플로리가 지은 <<베다 입문>>에서는 음식과 호흡의 표피는

거친 육체의 몸, 스툴라 샤리라를 만들며, 호흡 마음 지

성의 표피는 미묘한 아스트럴 몸인 슈슈마 샤리라를 만

들며, 지성과 희열의 표피는 원인(코절)의 몸인 카라나 샤리라

를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힌두 사상의 한계이다.  큰스님께서는 정확하게 4대 영체를

제시하였으며 그들이 인생이라는 배움과 체험을 통해서 얻은 정보

를 가지고 자신의 원만보신인 불신과 합일을 하고 그

것이 다시 자신의 법신과 합일하여 궁극적으로 비로자나 법신과

합일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우주는 이 장엄한 비로자나불과 각 붓다의 법신불들

드리고 붓다의 보신불들이 공생하고 연동하여 우주의

평화와 안녕 그리고 자유와 질서를 관장하고 주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세계이며 웅대한 사상체계가 아니겠는가!



또한 큰스님께서는 이와 같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언제나 온 법

계를 두루 비추고 계신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붓다님들은 빛으로 일체 처, 일체 시에 아니 계신 곳 없기

때문에 법신 개념에서 볼 때 천수천안이 문제가 아니며 가고 오고 하

는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무소종래이며 역무소거입니다.  삼천대천세계

우주 자체가 바로 붓다의 몸입니다. "라고 설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하신 부처님의 세계를 한 번 불 수 있다면 정말

로 큰스님 말씀대로 감읍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불신의 위신력


지금까지 불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

러한 불신이 얼마나 큰 위신력을 지니고 있으며 부처님의 가피가 얼마

나 소중한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자후하신다.  "부처님들은 모두 무량광으

로 이뤄진 몸을 지니셔서 무량수가 되므로, 삼세의 여래가 똑 같습니

다.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불신에서 백천만 억의 화신이 현현하는 것입

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에 평술을 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할 것

이다.  큰스님의 문장 그대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큰스님께서는 말이 백천만 억 화신이지 그 이상의 화신을 낸다고 하

신다.  어찌 이를 수치로 계산할 수 있으랴!  그만큼 부처님은 위대하시

고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일부 수행자들은 백천만억 화신을 천백억 화신으로 격하시키거

나 아예 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과학 문명에서는 카오스와 프렉탈 이론을 제

창하여 우주가 동형 구조로 자신을 복제하고 자신의 정보를 자기 유사

성을 지닌 복제로 무한 상속시킨다고 한다.  이는 서양 과학기술에서도

이미 불교 수행세계를 관통하는 학설을 주창하고 있으며 이는 천백억

화신에 대한 타당성을 입증하여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고로, 부처님의 화신으로는 싯다르타 태자 외에도 구마라즙 대사,

아쇼카왕, 이차돈, 일본의 성덕태자 등으로 사바세계에 오셔서 불교의

증흥을 위해 희생 및 헌신하시고 가겼다고 큰심께서는 말씀하신다.



또한 부처님의 불신의 위신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불신에서 법보화 삼신, 부처님의 8만

4천 신통, 백천 삼매, 지혜와 자비, 복덕이 우러나옵니다.  바로 무량광

이 지혜 자비 복덕 삼매 신통능력 자체인 불가사의한 빛덩이기 때문입

니다."



우리는 이로서 왜 부처님을 믿고 귀의 귀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우리 인간 존재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서양 철학자

파스칼이 말한 대로 생각하는 갈대에 자니지 않는다.  중생들에게 무슨

무량광이 있으며 법보화 삼신이 있으며 지혜, 자비, 복덕, 삼매, 신통

능력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자비로움으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보다 상위 존재로서의

부처님께 몸을 맡기고 부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우주적인 섭리에 대한 지견을 확립해 나가는 과

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큰스님께서는 불과를 증해야 생사관이 확립된다고 다음

과 같이 밝히셨다.  즉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거기서 명이 다

하면 다시 어디로 가고, 또 그곳에서 업연이 다하면 어디로 가는지

중생이 각자 지은 업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을 어

떻게 전생하게 되며, 윤회 안의 세계와 삼계를 뛰어넘어 해탈을 이룬

성중(/아라한 혹은 조사), 보살, 붓다들은 또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히 관하

고서 세운 견해, 즉 생사관은 붓다의 경계에 들지 않고서는 알 수도

없고, 정립할 수도 없다고 말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선불교의 구습과 병폐에 찌들은 수행자들이

나 선사들은 제대로 생사관을 확립하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지

옥을 관하지도 못하고 그냥 안 보인다고 없다로 치부하는 실정이며 마

음이 붓다이며 붓다가 마음이라고 부처님의 위상을 실추 및 격하시켰

기 대문이다.



타종교 신자들도 자신의 교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마당에 어찌 실제

로 최고의 종교인 불교에 귀의한 불제자들이 이토록 불교의 가르침을

일종의 심교로서 희석시켜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부처님 세계에 대해서 큰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즉 "붓

다는 빛으로 계십니다.  빛이시기에 삼세의 여래는 한 티끌, 한 생각이

모두 같습니다.  모든 붓다들이 무량광으로 이루어졌기에, 빛 그 자체이

시기에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붓다끼리는 서로 항상 상속되어 있고 그

래서 한 티끌 한 생각이 똑같습니다.  말 그대로 삼세여래 일체동입니

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일체의 삼천대천세계를 아우르는 우주 속에 거하시는

모든 부처님들은 하나같이 생각이 같으시고 뜻이 같기 때문에 그 분들

의 총체적 힘이란 가히 어마어마하며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또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과를 이룬 성자에게

는 좌우보처가 배정되고, 대아라한 급의 금강역사 50명이 항상 호신합

니다.  그리고 보살과를 이룬 이에겐 두 명의 금강역사가 따릅니다."라

고 말이다.



고대 힌두교나 이집트문명 그리고 유대교나 기독교에 이러한 가르침

과 위신력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새삼 부처님의 세계를 다른

종교와 비교할 바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불교의 세계는 월등히 수승하고 탁월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다

만, 그동안 가리웠던 부처님 세계의 웅대한 법력을 오늘날 큰스님

께서 사자후하심으로써 복원했다고 할 수 있다.  큰스님 말씀대로 우리

불교는 힘이 있는 종교라는 것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펴낸곳/현지궁 현지사 영산불교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