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8일 수요일

영산불교의 사상

 영산불교의 사상 


현지사 부산분원 15층은 지금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있습니다. 불상과 탱화 모두 수리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법회는 약1,000여명, 부산 경남북 지방의 새로운 신도들 약1,000여명이 올 것으로 알고, 그 외 이북지방의 신도 분들은 오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그래서 스님 법문은 새로운 신도 분들을 상대해서 말씀하고 싶어서 그렇게 준비해 왔습니다.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자재 만현 스님의 법문 스타일(형식)은 선불교(禪佛敎)의 선법문(禪法門) 형식도 아니고, 저기 위빠사나나 밀교 쪽 형식의 법문도 아니고, 또 교학을 하는 강사들의 용어를 많이 쓰는 것도 아니고, 모두를 아우르고 되도록이면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처럼 하는데, 선(禪)에서 하는 것처럼 주장자(拄杖子)를 든다거나(선에서는 그러지요)주장자를 내리치고, 부제를 넣고 한다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 15층은 지금 수리중입니다만, 약 1달간의 수리를 마치면 이다음 달 음력 정월25일(2011.2.27.일)날 15층을 개원하면서 대설법회가 있을 겁니다.

우리 현지사를 찾아오면 눈에 팍 들어오는 것이 불상(佛像)이지요. 그런데 그 불상은 이 나라 어느 사찰에 가도 볼 수 없는, 세계의 불교나라 곳곳을 다 다녀 봐도 볼 수 없는 그런 불상과 탱화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하지요. 머리를 깎았고, 눈을 뜨고 있지요. 이것은 지금까지의 불교, 부처님 열반하신 이후 2500년 불교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오셔서 의아해 하실 겁니다.

지금까지는 스님이 가끔 강조했지만,
‣무상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이, 조금 어려운 말로 교가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보리열반(菩提涅槃)을 증득한 부처님이 반열반 하신 후(돌아가신 후)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부처님은 열반한 이후 초월적인 인격체로 어디에 가 계시는가?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그것을 이야기하지만, 지금까지의 불교는 그것을 상상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주만법이 공(空)에서 왔는데(선가에서는 공(空)을 일심(一心) 진여(眞如)라고 하지요), 다시 그 공(空)으로 회귀했다(돌아갔다, 계합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불교의 어떤 스님이나 학자들은 우리 사람 개개인의 마음속에 하나의 도덕으로 살아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지사를 와보면 전혀 다릅니다. 머리를 깎고, 두 눈을 확 뜨고 계신다고요. 여기서부터 우리 영산불교 현지사와 한국의 불교, 그리고 저기 남방이나 티베트 불교와 다른 점입니다. 

부처님은(불과를 이룬 붓다는) 바로 절대계에 계신다 하는 말입니다. 절대계에 계신다. 그 절대계는 무아속 절대계, 유무를 초월한(상대세계를 초월해 있는) 본체계의 저 깊숙한 상적광세계, 그 절대계에 빛의 몸으로 이루어진 32상80종호의 거룩한 모습으로 계시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없다고 하는 세상에 ‘부처님은 분명히 계신다. 여여히 계시더라’하는 것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 현지사에 오면 불상이 모두 머리를 깎았어요. 머리 깎은 불상을 봤습니까? 세계의 여러 불교국을 다녀본 사람도 많이 있을 겁니다. 

어느 불교나라의 불상이나 탱화, 머리를 깎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깎지 않은 지금의 불상은 2500년 전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하셨던 그 모습을(머리를 깎지 않은 그 모습),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해서 삼매에 든 그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부처님, 불과(佛果)를 이룬 대성자가 열반한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또는 없다고 하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모셔왔습니다. 그러나 현지사는 아닙니다. 이것은 불교사에 큰 혁명입니다. 혁명 올 시다.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절대계에 계신다. 그 절대계는 어디입니까? 마음도 아니고, 마음밖에도 아니고, 유무를 초월한 상적광세계라고 하는 절대계에 여여히 계신다(그 계신다라는 말의 앞에다가 여여히를 더하여 ‘여여히 계시더라’). 계시는데, 빛의 몸으로 계시더라. 

빛도 무량억종광의 빛의 몸으로 계시더라. 그러면서도 32상80종호를 갖춘 너무너무도 아름답고 예쁘고 깨끗하고 지혜스럽고 자비스럽고 일체 복덕을 갖춘 그런 모습으로 계시더라’ 하는 것을 큰스님들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절대계의 보신(報身)부처님 모습으로 우리는 모셨습니다. 그 부처님을 보신(報身)이라고 해. 이건 혁명입니다.

며칠 전에 이 청정법신비로자나 부처님에 대해서 점안(點眼)을 했습니다. 여기는 점안을 한(점안을 거친) 부처님이올시다. 점안(點眼)이라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스님이 법좌이기 때문에 단연코(단호히) 이야기하는데, ‘지금까지의 모든 탱화와 불상, 여러 나라의 탱화와 불상은 점안이 안 되어 있습니다. 점안이 안 되어 있습니다.’

점안(點眼)이라는 것은 붓다가 그 불상에, 그 탱화에다가 위신력을 넣어줘야 됩니다. 남섬부주에 와서 불과(佛果)를 이룬 붓다가, 혹은 저 절대계에 계신 부처님께서 불상과 탱화에다가 위신력을 넣어줘야 됩니다. 

이게 점안(點眼)입니다. 우리 현지사 부산분원 여기 지하 2층에 있는 청정법신비로자나 부처님은 큰 빛(부처님의 빛)의 덩어리 올 시다.

경에서 부처님의 빛을 무량억종광이라고 합니다. 또는 백종오색광, 열반광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을 본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600년 동안 부처님의 빛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불과(佛果)를 증하려면 부처님의 빛을 봐야 됩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의 빛은 너무도 강렬하기 때문에, 너무도 밝기 때문에, 지금까지 견성하여 큰스님이라고 역사에 기록한 그런 스님도 일찍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논장에서 기록한 사람도 없고,《화엄경》에서 잘도 표현했지만 그것은 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런 부처님의 빛, 그 빛은 곧 지혜요 자비요 복덕이요 위신력 올 시다. 법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그 빛을 이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나 혹은 불상에 쏟아 붓습니다. 

이게 점안(點眼)이올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탱화나 혹은 불상 앞에서 기도하고, 공부하고, 발원하면 일찍이 다른 절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크나큰 신비체험을 할 것입니다. 소원이 이루어지고, 공부가 더 진척이 되고, 업장(業障)이 떨어져나가고 그럽니다.

지금 스님이 부처님을 뵌 후로 5년 전부터 책을 좀 쓰고 있습니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권, 이 책은 정말로 종교상 하나의 큰 전기(轉機)가 되는 책입니다. 이건 혁명입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그런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큰스님들이 공부를 해서 견성(見性)까지는 했지만 부처님을 뵌 분은 없습니다.

견성이란 본래의 마음자리를 봤다는 말이어요. 본래 마음자리, 교학에서는 공(空)이라고 하지요. 마음자리(空), 현상세계가 나온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드러난 것, 그 자리를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견성까지 한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 확 트인 본래의 자리를 봤으니까(주객이 다 무너져버린 그 자리를 봤으니까, 모든 현상세계를 낳은 그 본성의 자리를 봤으니까), 이제 견성을 넘어서 일체제법에(바깥 경계에) 집착함이 없이(주착함이 없이) 나 자신을 거짓으로 보고(이 육신은 거짓 몸뚱이니까, 나는 거짓 몸뚱이니까 거기에 속지 않고) 부처님을 부르면서 두타행을 해나가면(나 없는 공부를 해나가면), 이제 아라한이 되고(아라한이 되면 아라한 삼매에 들어가고), 그리고 더욱더 공부를 하고 보살행을 하면(보살행 중에서도 보살행인 부처님을 모시는, 붓다회상에 선근공덕을 짓고 하면), 이제 극락정토(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보살이 되고, 보살이 또 사람 몸 받아와서 보살도를 다 마치고 보현행원을 다 행하고 하면 불격을 갖춘 최상수보살이 되고, 그리해서 붓다가 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자력으로는 깨닫고(깨치고) 아라한 되는 것이 한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타력이 없으면 절대로 보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 보살이 출세를 못했어요.

우리 영산불교 현지궁 현지사는 부처님이 와계신 부처님 도량(道場)입니다. 부처님께서 상주하시는 도량(道場)이랍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불과를 증하면(붓다가 되면) 우주와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우주의 체(體)와 하나로 계합이 되어버립니다. 

깨달아가지고는 안 됩니다.   견성해가지고는 안 됩니다. 견성해서 그 공(空)의 세계를 격외로 노래하지만, 견성한 사람들끼리 거량(擧量)을 하지만, 그것은 공부의 시작이고, 거기는 완전한 생사의 해탈은 아닙니다. 거기는 공부의 시작이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나(我)없는 공부를 하는 거예요.

처음 오신 분들은 지금 스님의 말씀이 어려울 거예요. 여러분, 정말  불교의 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말 정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부 많이 한 분들이 굉장히 당황해 할 것입니다. 당황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정법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거예요. 불교대학을 나오고, 불교대학 대학원을 나오고,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 석학이라는 분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오리무중(五里霧中)이어요. 지금 정글에서 헤매고 있어요. 

그런데 불교의 그 어렵고 난해하고, 도저히 알 수 없고  풀리지 않는 의심들을《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권에서 다 밝혀 놨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는 마치《법화경》이 모든 경전을 총정리 한 것처럼 정말로 그것까지 총정리를 하고 안내서가 되는 불서(佛書)입니다. 정말로 부처님께서 인정하는 모든 경전 중의 경전이라고 하는《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권을 꼭 봐주시기 바랍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권에는 교가에서 쓰는 그런 어려운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소위 무명이라든지, 해탈을 하려면(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번뇌장(煩惱障)이라든지 소지장(所知障)의 이장(二障), 그것을 두 장이라고 해. 

이장(二障)은, 번뇌장과 그리고 소지장입니다. 이것을 끊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어려운 말도 쓰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듯이,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려면
‣업장을 정화하고 소멸해야 되고
‣탐진치(貪瞋痴) 삼독 등 번뇌의 뿌리를 뽑아야 되고
‣다겁생으로 내려오면서 지은 습과 악, 습의 탁한 기를 모두 뽑아버려야 되고
‣다겁생으로 내려오면서 지은 나쁜 인연, 나쁜 악연을 모두 단절해야 되고
‣원결(怨結)을 해소해야 되고
‣다겁생의 업연을 정리해야 되고
‣은혜와 모든 빚을 갚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알기 쉬운 말로 썼습니다. 그래야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된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견성을 하고 보림을 하면 보살이 될 줄 알지만, 절대로 보살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너 댓 가지 이유가 있다. 정토에 왕생하려면 8지보살이 되어야 되는데, 자력으로는 절대로 8지보살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화엄종(화엄가)에서도 '무착'이라든지, '세친'이라든지, '용수'라든지 하는 분들을 화엄 초조(초지)로 본다. 8지는 갈 수가 없다. 그 말이 맞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가피에 의해서(가피를 얻어야만)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왜?

‣여자가 정토에 가려면 네(4)개의 영체에 고추가 달려야 되고(남자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어요. 이것을 교가에서 변녀성남이라고 해. 그 말이 옳은 거예요), 그런데 자력으로 어떻게 네(4)개의 영체에다가(모든 사람들은 하나 둘 셋 넷의 영체가 있습니다) 고추를 달리게 합니까? 부처님의 가피(위신력)아니면 안 되는 것이어요.

‣그리고 적어도 보살이 되려면 다겁생으로 익힌 사중죄(四重罪)를 전부 소멸해야 돼.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고요.

‣그리고 관문을 통과하고 통과해 갈수록 어려운 천마(天魔)가 들어와. 무서운 마(魔)가 들어온다고. 그것을 이길 도리가 없어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피에 의해서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그 천마(天魔)나 용신의 세력을 제압하는 그런 큰 위신력을 지닌 부처님의 힘이(가피가) 아니고는 될 수가 없다(정토에 갈 수가 없다). 

이것을 영신불교에서는 알았어요. 그것을 알고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도 다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붓다 회상을 만나면 될 수 있어요.

불과(佛果)를 이룬 분이 우주본체와 계합한 것을 법신불이라고 해요.

둘째, 그 법신불을 이룬 분들은 무아속 절대계에 자기불신을 두게 되요. 지금 이것은 어느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대단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또 묘하게도 유식에서, 저 '용수' 쪽, 중관 쪽에서도 보신(報身)을 이야기해요. 그 보신(報身)은 아무리 읽어봐도 해석할 수가 없어. 그건 참 어려워. 관념적으로 썼기 때문에, 자기들이 불과(佛果)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듣기 쉽게 해석할 수가 없어.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대단히 깊이 해석해 줍니다.

절대계에 자기보신이 생긴다. 자기의 진짜 몸이 생긴다는 이 말, 그 어느 나라 큰스님들도 이해를 못하지요. 그 경계에 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이해를 못하지요.《화엄경》에 나오는 그 부처님이 지상과 하늘을 오가면서 설법을 하고, 수 백 천 만억 화신을 내면서 그렇게 교화를 하고 하는 것을 이해 못하지요.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주 깊이 압니다. 부처님의 세계에 대해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압니다.

상락아정의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지금까지의 불교,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세계화 되었지만, 아주 왜곡되고 왜소화(矮小化)되어가지고 다른 일신교(一神敎)만큼도 교세가 신장(伸張)이 안 돼. 

그 들로부터 불교가 사탄의 종교라는 둥, 우상의 종교라는 둥, 이런 말을 듣도록 까지 했어. 이건 종교지도자의 책임이지요.

불상이나 탱화는 우상숭배(偶像崇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이 아닙니다. 점안을 해놓으면 진짜 부처님같이 봐야 됩니다. 부처님의 지혜의 빛이 완전히 뭉쳐있습니다. 부처님의 빛(억종무량광)이 들어와 있으니까요. 지금까지의 점안(點眼)은 어느 절, 어느 나라 절의 모든 불상이나 탱화는 점안(點眼)을 거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기의 붓다님들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그 본원력(원력) 때문에, 점안을 안 거쳤지만 ‘아! 그 절은 신도 분들이 많고 하니까 화신이라도 꼭 나투어 가야 되겠다’해서 화신이 가 있는 거예요. ‘와 계십시오’하고 점안을 했다고 해서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화신이 가 계신 곳도 절반이 안 돼. 화신까지도 계시지 않은 절은 완전히 귀신 소굴이어요. 영가들이나 하늘 신들이 내가 부처라고 불상에 앉아 있어. 그것도 모르는 신도 분들은 거기에다가 대고 절을 하는 거예요. 부처님! 부처님! 하거든요.

지금 여기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석가모니부처님)의 법신불 이름입니다. 이 청정법신비로자나부처님이 붓다가 출세했을 때에는 가끔 작업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떠서 작업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때 모든 붓다님들이 청정법신비로자나불 속으로 들어가 버려요. 합일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인격신이 되는 것입니다. 무지무지한(무시무시한) 인격신이 되는 거요. 우주적인 인격신이 되는 거예요. 이 현상세계 우주를 넘어서, 저 온 법계까지 아우르는 우주적인 능력을 지닌 부처님이 되어 버려요. 

그래서 붓다가 출세했을 때에는 그분들이 가끔 떠서 작업을 해줘. 이 작업까지는 여러분들에게 구체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없어요. 어쨌든 우주적인 작업을 해준다 그거예요. 우주적인 작업을 해. 그런 탱화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큰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한다고 하여 현지사 가봤는데, 속으로 그럴 거예요. ‘무슨 초라한 그림 한 장 붙여놓고 저게 뭐요’할 거예요. 그건 그렇고.

오늘 처음 오신 분들, 사람이 죽으면 아주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끝나버리는 것으로 압니다. ‘죽어버리면 그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 죽어서 또 어떻게 된다, 또 어떻게 된다, 또 어떻게 된다...하는 것을 끝까지 완벽하게 보아서 아는 것을 ‘생사관(生死觀)을 뚫었다’그럽니다.

생사관을 뚫었다. 영산불교처럼 생사관(生死觀)이 확실히 정립된 종교(교단)는 일찍이 없습니다.

여러분, 많은 절을 가봤지요. 많은 큰스님들을 뵜을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지요?’하고 물어보세요. 어떻게 되지요? 자기가 증득해서(눈을 떠서), 그러니까 우선 견성이라도 해가지고 보림을 잘해서, 아라한의 눈을 떠서(아라한의 눈을 떠가지고는 부족하지만), 어쨌든 눈을 뜬 큰스님은 별로 없지만 찾아가서 물어보라고.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하고 물어보라고.
‘도대체 다음 내세(來世)가 있는 것이오, 없는 것이오?’하고 물어보라고. 어느 일신교(一神敎)는 ‘죽으면 지옥 아니면 천국’그럽니다. 거기까지 봤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번 법문 때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산불교는 에베레스트 산봉우리라고 비유했을 거예요. 산정(山頂), 정상(頂上)으로 비유했어. 모든 세계적인 종교라든지, 지금 한국에 3대 4대 민족종교가 있잖아요. 

그런 종교의 수준은 중턱에도 못 이른 종교(교단)도 있고, 중턱 정도에 올라온 교단도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오늘 조금 이야기해드릴게요. 사람이 죽으면, 이 몸에서 주인공 노릇하다가 이제 살 수 없으니까 빠져나오는 놈이 있습니다. 빠져나오는 놈이 있어. 그것을 세속에서는 영혼(혼)이라고 해. 혼(魂), 영혼(靈魂)이라고 그래. 

그것까지는 봤어. 저 유교나 도교에서도 그까지는 봤어. 그건 맞아. 혼이 나와. 이것은(육신은) 이제 영 쓸모가 없으니까 나와.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 

이것을 알아야 돼.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 업이 지중한 사람은 갈 곳을 못갑니다.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업이 지중한 사람은 갈 곳을 못 갑니다. 죽으면 갈 곳이 있어요. 그걸 명부(冥府)라고 하지요. 또는 저승이라고도 합니다.

 맞습니다. 명부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 명부(冥府)를 못 들어가. 어떤 사람이 명부(冥府)에 들어가지 못하느냐?
▸자살한 사람(자살해 죽은 사람)

▸타살(他殺)로 죽은 사람(타살 당해서 죽은 사람)

▸나쁜 병을 얻어서 신음 신음하다가 죽은 사람(암이라든지, 더 이상의 무서운 병 따위로)

▸사고사(事故死) 당한 사람(집안에서나 집밖에서 사고사 당한 사람, 집밖에서 사고사 당해서 죽은 사람을 객사(客死)라고 하지요. 횡사(橫死)한 사람)

그런 사람들은 명(命)대로 다 살지 못했기 때문에 명부(冥府)를 못 들어가.

▸집착(執着)이 강한 사람은 명부(冥府)에 못 들어가. 무슨 집착? 돈에 대한 집착, 자기 처자(妻子)에 대한 집착, 이 세상에 대한 미련, 이것이 너무 특별하게 집착이 강한 사람은 못 들어가.

이런 이유로 해서 명부(冥府)에 못 들어간 영가들이 많습니다. 죽으면 절반 정도는 됩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종교도 여기까지 몰랐습니다.《아함경》을 봐도,《아함경》에 많은 이야기가 쓰여 있지요. 경전도 그 중음(中陰)과 명부에 들어가서 49일을 대기하고 있는 중유(中有)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편집자가 안목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부처님 가신지 100년 200년 300년 400년 500년 만에 경전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래서 이제 현지사에서 시원하게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명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그 정도 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영가들은, 명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우선 저승을 들어가면 먹을 것이 해결되지요. 마치 아무리 건달이라고 하더라도(직업이 없다고 하더라도) 감방에 들어가면 밥을 주지요. 깡밥을 주지요. 그나마 먹는 것이(식사는) 해결 돼. 그런데 명부를 못 들어갔어. 마치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친한,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는 정도의 친구 혹은 자손들한테 와서 붙습니다. 의지해. 그런데 화장(火葬)을 해버렸다? 이제 자기의 몸뚱이가 없어져 버렸어. 몸뚱이를 떠난 영가는 그래도 의지할 곳을 찾습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지고 시신을 건져서 자손이 화장(火葬)까지 해버렸어. 자기 몸뚱이가 없어요. 몸뚱이가 땅속에 파묻혀가지고 분묘라도 있으면 그리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영가는 대단히 춥고 배가 고픕니다. 특별히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이 세상이 어두컴컴해.

그러나 단종(端宗, 1441~1457,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되었다. 이후 단종 복위운동을 하던 성삼문 등이 죽음을 당하자 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과 같이 일국의 왕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들의 죽음, 사약을 먹고 죽었으니 그건 객사이지요. 그건 무주고혼이 되었어. 세조당시니까 그분이 죽은 지 600여년 되지요.

그분이 지금까지 태백산에 무주고혼으로 있었어요. 한 5년 전만 해도 우리는 태백산에 현지사 암자가 있어서 가끔 갔었어요. 그분이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면 그분이 부복하고 살려달라고 해. 우리의 능력을 아니까 무주고혼에서 건져달라고 해. 

그래서 결국 그분을 건졌어요. 지금 4하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기를 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충분히 먹고는 살 수 있었어. 그렇게 춥고 배고프고 하는 그런 처지는 아니었어.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대부분의 무주고혼들은 춥고 배고픕니다. 여러분, 영하20℃ 내려 갈 때 옷을 든든히 입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견딜 수 있습니까? 그것도 한두 시간도 아니고. 또 하루 이틀 굶은 분들, 참기 어렵지요. 

그것도 한 달, 1년 먹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되도록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녀요.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녀. 절에서 시식(施食)하면 먹으려고 한없이 와. 절에서 제사지내고 시식하면 음식을 조금씩 덜어내어 아귀들한테 주는 것이 있지요. 

그걸 먹으려고 많이도 와. 그런데 또 그 도량(道場)에 진을 치고 있는 그 영가들이 주인 노릇을 한다고요. 텃세를 부려가지고 못가. 그곳에도 못 와. 달려가서 먹고 싶지만 그 영가들한테 두들겨 맞아가지고 오지도 못한다고. 여러분, 이건 대단히 슬픕니다. 춥고 배고픈 슬픔 이상이 없어요. 이거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절반 정도는 죽어서 명부에 들어가기도 해. 절반정도는 죽어서 명부에 들어갑니다. 명부에 들어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지옥 아니면 짐승세계로 떨어지더라 하는 것을 알았어요. 확실히 안 거예요. 여러분, 이건 진실이니까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스님이 이 법상에서 말하는 것은 2500년 이후 처음 진실을 말하니까 여러분들이 잘 들으시라고요.

여러분, 아들딸 낳으면 참 예쁘지요. 금이야 옥이야 기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길렀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부모가 아니어도 살 수 있을 만큼 나이가 20대 30대가 된 이후로는 불효(不孝)를 많이 했어. 

불효를 많이 했습니다. 그 아버지 어머니가 이제 70이 되고 80이 되어서 돌아가셨는데, 여러분들은 돌아가신 부모 생각을 안 해버려요. 생각을 안 해버려. 우리 여기 오신 분, 우리 현지사 분들은 안 그래. 보니까 참 착했어. 참 착해요.

많은 저 세상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효도, 부모에 대한 생각은 하고 있겠지만, 어떻게 그 영가(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어 줄 방법을 모르니까, 또 진짜로 이것을 알고 인도해 주는 그런 성직자가 없으니까, 그저 그냥 내 눈에 안보이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 뭐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한다고 해야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렇고, 성직자한테 물어도 시원한 대답을 못하니까 그저 그렇게 살아. 그런데 지금까지의 불교가,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어요. 큰스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전에만 그저 매달리고, 학승들은 그저 그것이 100%옳다고 하고, 공부를 해봐도 시원한 답으로 정리가 안 돼. 그러니까 이것을 주장한 사람, 저것을 주장한 사람이 있어. 내세(來世)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승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 

윤회도 없다, 영혼도 없다고 하는 그런 학승들이(사람들이) 이 불교 안에도 태반이어. 이런 풍토에서 우리 신도 분들이 살았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지도자들 밑에서 법문을 듣고, 법문이라고 한답시고 하면 가서 들어봐도 하도(너무)어려운 용어를 쓰고, 어려운 용어를 쓰면서 어쩌고 하니까 이건 뭐 그렇고 해서 와 닿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보니까 ‘정말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아라’하는 현지사의 말을 한 데가 없어.

현지사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고, 저 사람은 어디로 가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주의를 줘요.

지금까지 사람들이, 신도 분들이, 그 스님들이, 죽어서 어디로 어떻게 간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불교는 정화해야 되겠다. 정말로 정법불교를 세워야 되겠다. 

그래서 한 달에 두 번씩 이렇게 법문을 하고, 그리고 진짜 천도재(薦度齋)를 한 거예요. 스님이 항상 극한 용어를 써서 미안 하지만, 역사 이후로 처음 있는 천도재(薦度齋)를 한 거예요. 다른 절에 가서, 다른 어느 종교단체에 가서 천도재를 한답시고 열 번도 하고 스무 번 한 사람이 있어. 보면 알아. 천도가 되었는지의 여부를 알아. 하나도 안 되었다 하는 것이 거의 맞는 말이어요.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많기 때문에, 또 우리 현지사 신도 분들한테도 또다시 이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역설을 해주는 것입니다. 
출처/2011. 1. 26. 수(음12.23) 현지사 자재 만현 큰스님 부산법문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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