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0일 금요일

무주고혼 영가

무주고혼 영가


죄업을 많이 지은 사람들이 죽으면 상당수가 명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무주고혼으로 지냅니다.
객사한 사람, 자살한 분들, 몹쓸 병을 얻어 대소변 가리지 못하
고 죽은 이들, 처자에게 착이 많은 영가들의 대부분은 윤회에 들
지 못하고 명부에도 들지 못합니다.

이런 영가들은 반은 사람, 반은 귀신이기에 춥고 배고픕니다. 이
런 고혼들은 식색등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인연 있
는 자손의 몸에 빙의 합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 조상의 영가가 빙의
된 자손은 객사하고, 자살하고, 몹쓸 병을 얻습니다.
이런 불행을 막기 위해서 천도재가 필요하지만 완벽한 천도재를
감당할만한 큰스님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인간이나 하늘천상에
태어나도록 할 수 있는 길이 있는 데도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 10대 제자인 목건련은 당신의 어머니를 4번 천도해
드림으로써 하늘천상에 태어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일은 거룩하
신 부처님께서 주관하셨던 천도재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지은 업을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수
행이나 참회 보살행에 의해 정화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만이 중생의 죄업이 소멸됩니다.

또한 부처님만이 지옥 축생의 중생을 건질 수 있습니다. 부처
님의 위신력, 우주적인 구원의 힘에 의해서만 중생이 제도되는 것
입니다. 아라한도, 보살도 이 일만은 못합니다.



지옥 지장보살과 열시왕이 관장


지옥은 지장보살이 관장하는 곳으로, 남방의 지장궁 옆에 위치
해 있습니다.
상품보살 이상 붓다권 내에 든 대수행인은 삼매 속에서 지옥을
봅니다. 공을 깨친 후 무아 속 삼매에 들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이 남아 있어서 망상을 떨치지 못하는 수행인이라면 선
정에 들어서도 지옥의 진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수준의 선정으
로 보여지는 것은 요술쟁이의 마음이 그린 거짓 지옥 에 불과하
고, 진짜 지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은 '붓다 중의 붓다' 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붓다
이십니다. 열시왕은 상품보살들이십니다. 무독귀왕, 도명
존자는 상품보살 이상의 불격을 갖춘 상수보살급이십니다.
무간지옥이나 극무간지옥에서 온 영가는 지옥의 옥졸이 쇠사슬
로 묶어서 데려옵니다.

보통 천도재의 결과는 수일 후에 나옵니다. 부처님들의 위신력
으로써 올리는 천도재는 영가 모두를 특별히 지장궁 별당으로 구
인해 갑니다. 그러나 죄업이 지중해 무간지옥에 떨어진 영가는 천
도가 거의 안 됩니다.

오직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시고 우주적인 무한한 능력을 구족하
시지만 사바세계 남섬부주의 당대에 붓다 이룰 그 제자의 집전 발
원에 의해서만이 악도에 빠진 중생을 건질 수 있습니다. 태양빛이
쨍쨍 내리 쬐더라도, 화경불록렌즈을 조정해야만 검정 헝겊을 태우
듯, 큰 제자라는 인연을 만나야 지옥중생이 구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영가의 이름으로 공덕을 짓
도록 많은 불 보살께 먼저 공양을 드리는 겁니다.
이런 천도재를 모셔드리는 공덕은, 그 어떤 공덕보다 수승합니다.
영가 당사자들의 지은 업장이 씻어져서 보다 나은 세계로 천도
될 뿐 아니라, 천도재를 모신 이는 자손으로서 그만큼 큰 효를 해
드려서 더욱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중천을 떠도는 조상의
고혼들을 명부에 넣어줌으로써 후손이 나쁜 병을 얻지 않고, 자살
또는 횡사하지 않아서 다행인 겁니다.

물론 모든 나쁜 재액, 천병이 영가의 빙의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들 사람이 전생에 지은 큰
악업으로 인해 여러 재앙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두셔야 할 점은, 천도재를 집전하는 스님이 최소한
청정한 비구스님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도 청정이고, 둘째
도 청정입니다.
이제 승려의 양심으로 돌아가 상업화 되어가는 천도재는 즉각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의 죄업을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능력 없이 천도재를 많이 하는 사찰은, 저급 영가들의 역겨운 냄
새와 사악한 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이
꽉 차 있고, 귀신들이 득세하여 이미 성지가 아닙니다. 사찰은 청
정도량이어야 합니다. 절을 위해서도 상업화딘 천도재를 멈춰줄
것을 간절히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적어도 아라한과에 증입할 때까지는 사생결단 외길을 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 혜근-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010년 7월 28일 수요일

선불교의 한계

선 불교의 한계


선 불교에서는 인연을 멸하여 생각의 생멸까지 쉬게 하
는 것을 수행의 요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생멸을 그치게 하는 것은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바 아라한위나
잘해야 보살위에 지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더욱 아쉬운 사실
은 오늘날의 간화선 수행법으로는 아라한 이상으로 높이 올라
갈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수행자들의 실정임을 여실지견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화두선은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해 나가는 수행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화두선 또는 간화선을 통해
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해서 정신병, 주화입마, 상기병 등에 걸
린 수행자들이 적지 않다고 수행자들 간에 은밀히 회자되고 있
다고 합니다.

선 불교의 폐단은 너무 편협하고 독선적인 아성을 구축
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또 넌센스식의 화두를 제시하여
수행자들의 마음을 너무 많은 시간 동안 미로 속에서 헤메게
만드는 폐단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얻는 것은 흔히 말하는
대오각성, 즉 견성의 완성을 통해 얻은 아라한위까지입니다. 무
엇보다도 오늘날의 선사들의 가르침에는 원시불교를 아름답게
수놓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자비심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는 것입니다.

반면 염불은 실제로 부처님의 칭호를 염송하는 것으로서 직
접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칭호를 염송하는 염불 수행이 선 수행법 보다 못하다면 부처님
의 위신력에 우리는 회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며 실재로 과거에도 수행승들께서 아미타부처
님을 30년 간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여 절 천장을 뚫고 날아서
극락 왕생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미타불을 찾는 염불선이 많은 영험이 있다고 네티
즌 수행자들 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염불선의 위신력
이 선 수행보다 우월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염불선도 큰
스님의 지도에 따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염불
선도 외도 기운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
닙니다.

2500년 전 부처님이 이 세상에 몸을 입고 오셔서 전해주
신 위빠사나 수행이나 아나파니사띠 수행법도 좋은 효험이 있
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에서 설파한
대로 부처님의 칭호를 염송하는 칭명염불이 무엇보다도 중요함
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칭명염불선
은 새로운 불교 수행의 중흥을 이루고 새로운 불교 문화를 꽃
피우고 창당하는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존평



 
 

비아 윤회설

영산불교는
비아非我윤회설이 부처님의 정법임을 선언한다




-2500년간 잘못해석된 '무아無我'를 비판하면서




1. 무엇이 문제인가?

부파불교시대부터 지금까지 불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논란을 불러일으켜 오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무아와 윤회주체"의 문제입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점의 요지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나를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은 무아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회를 하려면 항상 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실체,본체)가 있어야 하는데 불교의 무아이론은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하는 주체”가 없다고 하니 무아와 윤회주체이론은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아이론과 윤회는 불교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서 한 가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아를 잘못 이해했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잘못된 무아론을 전제로 윤회이론을 포기해야 된다는 이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윤회이론을 포기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무아와 윤회주체이론을 양립시키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부파불교시대에서부터 논사들은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윤회의 주체가 없으면서도 윤회가 가능하다는 여러가지 이론들을 개발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른 바 무아윤회이론입니다. 이에 비해 윤회의 주체가 있다고 주장하면 유아윤회이론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론들은 대부분 윤회의 주체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심식류(心識類)의 어떤 존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부파불교시대의 근본식 사상(대중부), 푸드갈라 이론(독자부), 유분식 사상(상좌부), 세의식 사상(경량부) 등이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후에 대승불교에 이르러 무착,세친을 중심으로 전개된 유식이론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보는 것으로 대체적인 결론이 나게 되고 이것이 지금 불교계의 대세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심식류(心識類)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2. 무엇이 잘못 되었나?

(1) 무아에 대한 잘못된 해석-무아(無我)의 정확한 의미는 비아(非我)

무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 몸은 결국 늙고 병들고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나의 실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현상계에는 ”나의 실체(진정한 나)가 없다” 라고 말하면 “무아(無我)”가 되고, 이를 “나의 실체(진정한 나)가 아니다”고 하면 “비아(非我)”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아라고 하게 되면 나의 주체가 아예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 불교계의 무아에 대한 해석도 이런 오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비아”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나의 진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보다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생각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왜 무아라고 가르쳤을까요? 이는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너무나도 “나”에 집착하여 온갖 탐욕을 일으키고 그 결과 생로병사와 윤회전생의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무아란 가르침으로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여 고통에서 구제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2) 현상계에 국한된 무아 개념을 본체계까지 잘못 적용- 본체계는 아(我)

무아란 개념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우주법계는 현상계와 본체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윤회세계는 현상계입니다. 이에 대해 완전한 해탈을 이룬 세계를 본체계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보살이나 붓다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무아라는 개념은 현상계에 국한된 말입니다. 이를 본체계까지 확장해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지금 불교계에서 무아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보통 현상계에 대한 본체계의 특징을 한 마디로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표현합니다. 열반에 따르는 네 가지 덕(涅槃四德)이라고도 말합니다.


현상계 본체계

제행무상(諸行無常) ⇒ 상(常)
일체개고(一切皆苦) ⇒ 락(樂)

제법무아(諸法無我) ⇒ 아(我)

번뇌오염(煩惱汚染) ⇒ 정(淨)


이렇게 서로가 대비되는 현상계와 본체계인데 지금의 불교계는 현상계에 한해 적용되어야할 “무아”개념을 본체계까지 적용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인 본체계의 “아(我)” 까지 부정해 버린 크나큰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존재이유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지금의 세계 불교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리도 왜곡해 왔으니 크게 반성하고 참회해야할 것입니다.

3. 무아 해석의 잘못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나?

(1)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는 무아윤회이론은 우주 이법인 인과법에 위배됩니다. 진리의 불교가 우주이법을 위반할 수 있습니까?

인연법(인과법)은 우주이법입니다. 그리고 중생은 육도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 또한 인생의 진리입니다. 사람은 착한 일 많이 하면 천상 등의 즐거운 세계로 가고 악한 일 많이 하면 지옥, 축생 등의 악도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행위를 한 자가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행위를 한 자와 과보를 받는 자가 확실하게 같아야 함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요건입니다. 이것은 우주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동일성이 항상 보장되는 윤회의 주체 또는 본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주이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윤회의 주체 없이 연기적 흐름으로 윤회가 가능하다는 의견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우주이법은 칼날같이 명쾌하고 분명하게 적용되는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윤회주체이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식(識)은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 없는 식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된단 말입니까?

부파불교에서나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식(識)은 명칭여하를 불문하고 결코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윤회의 주체가 되려면 눈·귀·코·두뇌 등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식(識)자체는 그러한 기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식(識)은 우리가 신체적 기관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 기관과 객관적 대상이 만나 상호 작용하여 생기는 것이지 신체기관과 독립된 식(識)이 따로 주체로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간다면 내 몸에서 식(識)을 따로 떼어 감옥에 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아뢰야식도 아뢰야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주체가 있어야지 아뢰야식 자체가 주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識)을 가지고 있는 주체가 바로 영혼체입니다.

(3) 윤회주체를 부정하면 영혼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영혼체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문제 해결을 본질로 하는 불교의 존립기반이 무너지지 않을까요?

식(識)을 가진 영혼체가 윤회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무아윤회는 윤회주체인 이 영혼체를 부정합니다. 영혼체는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의 실체로서 본체계의 존재입니다. 인간문제 해결이 불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데 이 인간의 실체인 영혼체를 부정해 버린다면 불교의 존립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고 수많은 문제가 파생됩니다. 이 중차대하고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4) 무아라고 영혼체를 부정하면 육도윤회도 해탈론도 사실상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존재이유가 있을까요?

불교 수행의 목적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고통이 없는 해탈계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윤회하는 주체인 영혼체도 해탈계로 가는 주체인 영혼체도 없다면 결국 육도윤회도 부정하고 해탈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수행하고 해탈을 이루려고 합니까? 대상주체도 없는데 말입니다. 나의 주체인 영혼체가 있어야 윤회를 하든지 해탈을 이루든지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6년 동안 그렇게도 혹독한 고행·난행을 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혼체를 부정하면 불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5) 영혼체를 부정하면서 천도재는 무슨 이유로 지내는지요? 천도재를 지낼 때만 영혼체가 존재하나요?

최근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고 있다고 하는 어느 종단에서 발간한 금강경 표준해설집에서도 인간의 영혼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4상(四相)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중 수자상을 영혼으로 해석하고 이 4상을 모두 극복해야할 관념이라고 말함으로써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부정하면서도 대부분의 사찰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영혼체가 없다면 지옥 가는 주체도 짐승이 되는 주체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천도재를 지냅니까? 누구를 천도시키기 위한 천도재인지요? 천도재를 지낼 때는 영혼체가 있고 그 외의 경우는 영혼체가 없는 것입니까? 필요할 때는 있고 필요 없을 때는 없는 그런 것이 영혼체인가요? 돌아가신 분을 위해 극락왕생하라고 염불은 왜 합니까? 부처님께서 영산 당시에 목련존자 등 여러 제자의 어머니를 천도시켜 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런 모순들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6) 영혼체를 부정하면 불보살의 존재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 불교를 믿어야 하는지요?

영혼체를 부정하면 본체계에 존재하는 실체를 부정하게 되므로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계로 간 성자들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그 수많은 부처님, 보살님들을 부정하고 어떻게 불교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법화경과 화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엄청난 위신력은 모두 소설이나 비유로 본다는 말입니까? 특히 붓다가 되면 생기는 세 가지 몸 중 보신불은 네 개의 영체가 들어간 빛의 인격체로서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하는 본불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불공을 드릴 필요도 없고 예불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7) 영혼체가 없다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을 잘 섬기는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가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일입니다. 제사는 돌아가신 분의 영혼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예를 올리는 의식입니다. 제사 때 오는 영혼은 불교에서 말하면 저승에 못 들어간 영혼입니다. 무주고혼(귀신)이라고 합니 다. 따라서 영혼체를 부정한다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8) 영혼체가 없다면 부모의 수정시 무엇이 육신을 받는지요?.

영혼체는 인연에 따라 부모를 찾아 수정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때 식(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을 가진 영혼체가 들어갑니다. 영혼체가 육신을 받는 것입니다. 네 개의 영혼체 중 세 개의 영혼체가 들어가고 가장 바깥 쪽에 있는 4번 영혼체는 모태 안에서 생깁니다. 태교의 대상도 영혼체이지 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체가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9) 영혼체가 없다면 어떻게 업의 주인을 찾을 수 있나요?

영혼체는 업을 가지고 다니는 주인입니다. 영혼체가 없다면 업(業)을 가지 고 다녀야할 주인이 없어집니다. 업은 어디에 보관이 되고 그 주인은 어떻 게 찾을수 있나요? 부처님은 주인도 없는데 누구를 위해 업장소멸을 해 주시나요?
(10) 무아라 하여 열반하면“나”란 인격주체마저 완전히 없어진다면 누가 열반을 원할까요? 다음 세상에 어떻게 육신을 받나요?

열반하면 우주 본성인 공(空)에 “나의 실체”까지 완전히 녹아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무아이론이라면 과연 그런 열반을 하고 싶고 해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데 다음 세상에 어떻게 육신을 받아올 수 있을까요? 영혼체가 없다고 하니까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자꾸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11) 본체계의 아(我)를 부정하면 불교의 위대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같은 차원이기를 진정 원하는 것은 아니겠죠?

무아라 해서 본체계의 아(我)까지 부정해 버리면 불교는 왜소화 되고 다른 종교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는 육도윤회세계 뿐만아니라 아(我)의 세계인 해탈계에 대해서도 완벽한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단순히 우주본성인 공(空)을 깨친 차원인 견성의 단계는 다른 종교도 다 말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백천만리 더 들어간 정토계, 정토세계에서도 백천만리 더 들어간 절대계는 불교의 위대성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본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이런 차원의 보살을 내고 붓다를 내는 종교이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공(空)과 100% 계합한 붓다의 차원에서만 창조주적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2) 영혼체는 해탈을 이룬 대성자가 볼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무속인도 볼 수 있는 영혼체를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인간의 영혼체는 우리들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탈을 이룬 대성자들은 영혼체를 직접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영혼체와 대화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성자들의 말씀을 믿고 영혼체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무속인도 볼 수 있고 빙의된 사람도 볼 수 있는 이런 영혼체를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4. 힌두교와 기독교의 비판에 바르게 대응하지 못한 불교

(1) 힌두교측의 “무아” 비판에 잘못 대응한 것이 불교 쇠퇴의 한 원인

① 힌두교의 불교 무아이론에 대한 비판과 대응

힌두교측에서 불교를 비판할 때의 관점은 불교는 무아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나 해탈을 성취하는 주체는 무엇이냐고 질문하면서 무아사상과 윤회주체와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비판에 대해 불교는 이 두 가지를 양립시키려고 온갖 이상한 논리를 동원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봐도 궁색하기만 합니다. 한 마디로 엉터리 논리를 개발하여 대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합니다.

무아는 현상계에 국한된 이론이라는 것과 윤회의 주체는 본체계의 영역에 속하는 영혼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영원한 안락을 누리는 해탈의 세계로 갈 수 있는 “나의 주체”가 없다면 누가 불교를 믿으려 하겠습니까? 이는 오늘날 불교가 서구로 뻗어나가 활성화 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② 힌두교의 아트만과 불교의 영혼체

힌두교에서는 범(梵)에서 우주만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범이 다시 개별적인 주체 속으로 들어간 것을 아트만(Atman)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범과 아트만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트만이 윤회의 주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아트만은 범과 같으면서 개아(個我)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트만이 범(우주 본성)과 같다면 아트만은 행위를 할 수도 없고 업을 지을 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트만은 개별적인 자아로서 업을 짓기도 하고 과보를 받기도 하는 윤회의 주체라고 합니다.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주체인 영혼체는 매우 구체적이고 확실한 개념입니다. 네 개의 영혼체 중 가장 바깥 쪽에 있는 영혼체(4번)를 제외한 세 개의 영혼체(1·2·3번)는 영원히 죽지 않고 윤회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안 쪽에 있는 높은 차원의 영혼체(1번)가 인간의 본체라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영체와 우주 본성과는 다른 개념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육신에 존재하는 아뜨만을 바로 자신이라고 깨닫게 되면 이는 곧 범과 하나가 되어(梵我一如) 해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공을 깨친 수준으로 해탈의 수준과는 또 다른 경지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해탈의 차원도 상당히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모르고 있다는 점은 힌두교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사람을 행위(業)에 의해 판단하지 않고 출신성분에 따라 고착화 시켜버린 사성제(四姓制)는 큰 잘못이라고 보겠습니다. 아울러 동물의 피로 제사를 지내는 것도 잘못된 의식입니다.

(2)“영혼은 없다”라는 당시의 잘못된 불교교리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 기독교측과 영혼체 없음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잘못 대응한 불교

19세기 후반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대논쟁”에서 기독교측이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교의 교리로 전제하고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 당시 기독교측에서 윤회문제와 직접 관련지어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역사적 사건에서 불교의 교리상에 영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세상에 알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 영혼체 논쟁에서의 우문우답(愚問愚答)에 대하여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측에서야 당시의 불교교리대로 질문한 것이니까 우문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정법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불교의 부끄러운 한 단면입니다.




5. 무아와 윤회주체 문제에 대한 결론

(1) 무아의 바른 정의는 “현상계의 존재인‘나’는 오온의 집합체에 불과하여 실체로서의‘진정한 나’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무아를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무아이론과 윤회주체 간에 모순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비아(非我)의 개념에 보다 적합하지만 무아의 용어 속에는 현상계의‘나’에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2) 무아를 잘못 해석하여 본체계영역에 해당하는 영혼체까지 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외도의 교설(敎說)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윤회의 주체가 없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 무아윤회설이라면 이는 우주이법인 인과법을 무시하는 대망언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윤회설이 맞습니다.

(4) 생각과 판단을 하는 기능이 없는 심식류(心識類)는 어떠한 경우에도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식(識)의 주인인 영혼체 만이 윤회의 주체이고 동시에 해탈의 주체가 됩니다.






무아설(無我說)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는 삼법인(三法印), 혹은 사법인(四法印), 이러한 종래에 없었던(인도 철학계에 없었던) 새로운 사상을 내놨습니다. 그 중에서 특색이 무아(無我)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여기에서 이제 무아(無我)가 나옵니다. 얼마 전에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무아(無我)가 잘못 해석 되었느니라. 자재 만현이 맞느니라. 자재 만현은 법왕자로서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불교가 망한 원인이 되느니라.”

2600년이 흐르도록 그 어떤 종파(교파)에서 큰스님들이(학승들이) 무아(無我)를 ‘그저 내(我)가 없다 하는 식(단순히 내가 없다 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심지어 그런 맥락에서 육도윤회를, 그러니까 지옥 천상 아귀세계 중음세계 극락세계 그리고 불보살까지 외부현상으로 보지 않고 마음속에서(의식차원에서) 이것을 해석해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고민 번민 고통스러운 그 자리가 지옥이고, 그 번뇌 고민이 다 사라진 자리가 극락이다’ 하는 식으로 모두 유심화 시켰습니다.

지금까지의 불교가 그래왔습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교의 확실한 견해이고 주장입니다. 나는 여기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현지사 영산불교 교단이 탄생 된지가 지금 3, 4년밖에 안 됩니다. 이제 BTN TV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1년 계약을 했기 때문에 다 말을 못했지요.

이제 TV나 라디오가 전 국민 1,200만 명 우리 불자들에게 시청이 되고 청취가 되기 때문에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이 다음번에는 이보다도 더 중량감 있는, 정말로 중요한 불보살의 적멸세계를 들고 나올 것입니다. 이 적멸의 세계도 2600년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전번시간에 이어서 무아설(無我說)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무아설(無我說)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자 불교의 몸통입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됩니다. 그래야 불교가 살아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빠사나든, 밀교든, 선불교든 어느 나라 불교를 막론하고 불교는 사양길에 들것입니다. 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아(無我), 단순히 내가 없다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어요. 부처님께서는 그런 생각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 생각이 아니고, 현상세계의 이 몸뚱이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크나큰 요소로 인연 따라 이루어진 거예요. 이건 확실합니다. 이 몸뚱이는 인연이 다하면 오온(五蘊)은 제각기 돌아갑니다.

그러면 공(空)이죠. 실체가 없지요. 현상세계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큰스님이(자재 만현) 그 심의식, 그 생각(사람 마다마다 생각을 지니고 있잖아요)의 뿌리를 관해보니까 엄청난 소식이 있어요. 본체가 있어요. 본체가 없으면 이 현상세계, 또 이 몸뚱이는 한번 생겨났다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나 본체가 있기 때문에 우주는 성주괴공을 반복하고, 우리 사람은 생로병사를 반복하면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뿌리가(본체가)있어요. 기체(基體)가 있다고요. 이걸 모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바로 그것이 영혼체다’하고 '영혼체 이론'을 세상에 내놨습니다. 많은 반발이 있었지요. 그러나 그 누구하나라도 당당하게 나선 사람이 없지요.

학자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이나 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야 되는데, 그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해석에 그칩니다.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를 부정하지요. 윤회의 주체를 부정하는 2600년 동안의 불교는 육도는 맞다고 해. 그러나 지옥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아수라, 아귀세계라든지, 중음세계라든지, 또 해탈의 저 적멸세계인 극락세계라든지, 또 보살님이라든지, 부처님이라든지 하는 이것을 객관적으로 실재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무아설(無我說)을 내가 없다고 해석을 하니까 그것도 전부 없는 것이고, 지금까지 이 불교가 그것들을 마음차원에서(의식차원에서) 파악을 해왔다 그거예요. 이것이 문제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사상이 불교라면 인도국민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예요. 말이 되느냐 그거예요. 무아(無我), 아무것도 없다. 이게 말이 됩니까? 현상세계에서는 무아(無我)입니다. 현상세계는 실체가 없지요. 그러나 이 생각의 근원은(토대는) 있더라 그거요. 본체가 엄연히 있더라 그거요. 그런데 왜 이것을 몰랐느냐?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학승들이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계라는 것은 현상세계와 본체계입니다. 현상세계에서 본체계를 뚫고 들어가 봐야 되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부족하지요.

이 다음시간에 적멸의 세계를 들춰낸다고 했습니다. 눈을 떠서 적멸의 세계까지를 봐야 되는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그러지를 못하고, 부처님의 이 무아설(無我說)을 잘못해석 해버렸다고요. 잘못 해석했어. 여러분, 이게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엄청난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뭣 때문에 살아요? 나(我)가 없으면 행위 하는 주체도 없고, 생각하는 주체도 없고, 감정을 느끼는 주체도 없다고 하면 말이 됩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면 죽어서 갈 놈도 없어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다시피, 다시 사람 몸을 받아 올 때는 부모가 교합할 때(수정할 때) 영혼체가 들어가야 되어요. 영혼체가 안 들어가면 안 됩니다. 본체가 안 들어가면 안 되어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지요. 지금 그것을 모릅니다. 이 핵폭탄을 능가하는 엄청난 발언인 이 선지식의 말씀을 뭉개버린다고 하면,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마땅히 무간지옥행입니다. 무간지옥에 가지요. 왜 그렇게 불교를 훼손합니까? 당초 그렇게 위대한 불교를 왜 그렇게 짓밟아 버립니까?

이런 현지사 영산불교의 사상을 우리 불자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불자들이 들어야 됩니다. 나는 그러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불교와 인연 있는 수많은 착한 우리 단월들이 살아납니다. 악도에 가지 않습니다. 무아(無我)를 잘못 해석해 가면, 이거 적당히 살아야지요. 나(我)라는 실체가 없다면, 나(我)라는 자아(自我)가 없다면, 주체가 없다면, 죽어서 가는 것(곳)도 없고 오는 것(곳)도 없으니 뭐 적당히 살아야지요.

그런데 지금 불교가 제사(천도재)는 왜 합니까? 부처님, 보살님한테 공양은 왜 드립니까?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그러면 안 됩니다. 이건 불교가 아닙니다. 내가 바른말을 한다고 거부감을 가지고 도저히 방영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되지요. 한번 들어봐야지요. 지난시간에 ‘비아(非我)가 윤회의 주체다’하고 결론을 냈습니다. ‘비아(非我)가 윤회의 주체다. 영혼체가 윤회의 주체다.’

오늘은 스님이 영혼체설에 대해서 이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자상하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여러분들한테는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보다 먼저 우리 부처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받아 적은 것을 여러분한테 읽어드리겠습니다.

“무아(無我)는 잘못 해석한 것이니라. 나는 무아(無我)를 이야기했지만 저세상이 없다고 아니했다. 살아있는 것, 언젠가 죽는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말했다. 하늘에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오길 말했노라(처음 법문을 그렇게 했었어요. 그걸 생천설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고, 죽는 것도 고통이다.

육도윤회에 돌면서 고생하는 것을 끊어주기 위해 무아(無我)를 이야기 했노라. (전번시간에 스님이 부연설명을 했을 거예요. 또 의미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있다 없다를 확실하게 알면서 있다 없다를 초월한 자리, 더 나아가서 대적정삼매에 들어 무아(無我)의 환희는 붓다의 경계이니라. 여기까지 공부 못하고 법을 모독 능멸하여 중생을 오도한 죄는 무간지옥에 가느니라. 붓다와 법은 영원히 멸도하지 않느니라.”

출처/2010.5.6.목 자재 만현 큰스님 춘천법문 (BBS불교방송 제2회) 중에서 발췌






비아설(非我說) - 비아(非我)가 윤회한다


불교의 역사가 2600년이지요. 깊은 선정에서, 더 깊은 고요에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량겁 전이죠? 그건 우리가 다 아셔요. 이 점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어쨌든 우리가 이 인간세계에 사람 몸을 받아와가지고 지금 살고 있잖아요. 그 2600년의 불교역사가 너무도 왜곡 되었다는 말입니다. 뭐가 왜곡 되었느냐? 여러분, 이제는 이 노래를 자꾸 불러야 되겠어요.

뭐가 왜곡 되었느냐? 이 왜곡된 부분을 그 어떤 석학도, 그 어떤 큰스님도, 그렇게도 많이 출세했던 큰스님도, 이것을 이야기 못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부처님에 버금간다고 하는 인도의 '용수보살'도, '마명'이라고 하는 그 보살도(그 큰스님도), 그 다음에 200~300년 후에 출세했던 '무착', '세친'이라는 엄청난 논사도, '고법'이라는 분도 이걸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뭘 몰랐느냐? ‘비아(非我)가 윤회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비아(非我)가 윤회하는 거예요. 무아(無我)는 윤회할 수가 없어요. 무아(無我)는 윤회의 주체가 없습니다. 무아(無我)라는 것은 나(我)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없는데, 말할 놈도 없고 ․ 말할 주인도 없고 ․ 행위 할 주인도 없는데, 여러분들은 지금 말하고 행위를 하고 있잖습니까?

저 지금 비아(非我)를 모르는 우리 불쌍한 불교계 인사들,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 본체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건 상식이 아닌 거예요. 여러분, 나(我)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서 나갈 놈도 없습니다. 태어날 때 반드시 그 식신(識身)이 와야(영혼체가 와야) 잉태(수태)가 되는 거예요. 이걸 모르면 이건 불교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자격이 없는 거예요. 불교는 정말 위대한 종교입니다. 우리 영산불교, 정말로 위대한 종교올시다.

스님이 TV나, 라디오나, 세계적인 매스컴이 오면 터뜨리려고 한 거예요. 놔둔 거예요.《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권에는 싹만 보인 거예요. 2600년 동안 무아설(無我說)이 너무너무도 고착화 되어버렸어요. 이걸 때려 부숴버려야 되요. 그래야 정말로 불교가 사는 거예요. 21세기를 불교가 향도할 수 있는 거예요. 모든 불교와 모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는 거예요.

진리 앞에는 모두 다 무릎을 꿇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Ⅱ》탄에는 한 장(章)을 다루었습니다. 무아설(無我說)과 윤회의 주체에 대한 언급을 했지요. 그리고 이제 기회를 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들의 걸음으로 왔어. 자기들이 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자르지도 말고 그대로 방영하겠느냐? 그대로 내보내겠느냐?

 두 번 세 번 내가 다짐 받은 거예요. 그러면 계약을 하자. 그래서 도장을 찍었습니다. 자세한 기록은 자기들이 해오지 않고 도장만 찍어왔더라고. 그래서 내가 웃고 말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비아설(非我說)이 나가고, 무아설(無我說)을 부정하고, 이걸 때려 부수니까 교계가 발칵 뒤집힌 거예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들이 난리난 거예요. 그럴 만도 한 것이 무아설(無我說)은 불교의 생명이올시다. 이 무아설(無我說)은 그 동안의 생명입니다.

이런 무아설(無我說)을 부정하니까 난리가 난 것이지요. 여러분, 내가 인터넷을 보니까 여러분들이 그분들 보다 더 낫더라고요. 정말입니다. 유식의 권위자라고 하는 모 교수, 어느 큰스님의 말은 이렇답니다. 그리고 모 종단의 공식 성명은 이렇습니다. ‘영혼체가 없다’하는 것이 공식 성명입니다. 본분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되요. 그 사람, 소위 한국을 대표할 만한 석학이라고 하는 교수가 하는 말인 즉, ‘의식이라는 것은(심식이라는 것은, 식이라는 것은) 이 근(根)과 경(境)이 반연(攀緣)이 되어가지고 생기는 것이다.

근(根, 六根)이 없어져버리면(죽어버리면 그 말이어) 따라서 식(識)도 없어져 버린다.’ 이게 그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이고, 지금까지 불교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사설(邪說)이고, 사마외설입니다. 이 몸뚱이가 죽어버리면 영혼도 죽어버린다는 그 말이 맞습니까? 여러분, 이건 유물론적인 인식(관념)입니다. 이것은 유물론자들의 생각이올시다. 유물론에서는 생각이라는 것은 뇌의 산물이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육신, 뇌가 죽어버리면 그 산물인 것은 당연히 없다(죽어버린다). 이게 유물론자들의 생각이어요. 그런데 불교의 그 생각이 그 유물론적인 생각이라고 하면,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불교는 더 클 수가 없는 거요.
이 무아설(無我說), 윤회설이 2600년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의 사상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 무아(無我), ‘무아(無我)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 하고 힌두교의 여러 학파에서 막 포화를 뿜은 거예요(공격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부파불교의 석학들이 그걸 대답하려고(무아설(無我說)이면서 윤회 한다는 것을 양립하려고, 어느 하나를 포기해 버리면 되는데 이 두 사상은 불교의 양축이니까 이걸 둘 다 양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연구하고 연구한 것 들이 전번 시간에 이야기 했던 경량부의 심상속 이론, 독자부의 푸드갈라 이론, 그리고 여러 부파불교에서 이야기 했던 소위 여러 식(識)이론, 대승으로 넘어와 유식에서 제8아뢰야식을 내놨어요.

이건 안 되는 거요. 식(識)이 어떻게 윤회합니까? 전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가 대단히 불심이 장하고, 좋은 일도 많이 했다면 그 영전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시고 이러실 거예요. ‘우리 어머니는 좋은 일 많이 하시고, 불교를 돈독하게 믿으셨기에 부처님 나라로 혹은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하실 거예요. 안 그러겠습니까? 저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주체가 없는데, 누가 가느냐 그 말이어요. 식(識)이 갑니까?

식(識)은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식(識)이 가는 것이 아니어. 식신(識身)이 가는 거예요. 식(識)의 몸뚱이가 가는 거예요. 식(識)이 들어있는 몸뚱이, 그것을 영혼체라고 해요. 지금까지 영혼이라는 말은 했지만 영혼체라는 말은 그 어느 종교에서도, 철학에서도 나오지를 않았어. 다만, 몇 명의 힌두교 성자들이 영혼체라는 말을 했어. 기원전 그 사람들은 영혼체도 봤어요. 힌두교의 상키아학파의 이론을 들어보면 영혼체 이야기가 나옵니다.

붓다의 경계에서 영혼체를 자세히 압니다. 보살의 경계는 영혼체가 있는 것을 알아요. 영혼체를 봐요. 상품보살의 경계에서 영혼체를 봅니다. 그러나 영산불교에서 처럼 여러분이 영혼체에 대해서 잘 알지만 더욱 정리를 해드릴 거예요.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은 붓다의 경계에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을 바로 잡지 못했어요. 비아(非我)로 잡아야 되는데, 바로 잡지를 못했어. 2600년이 흐른 오늘, 이제 우리가 이것을 내놓는 거예요.

인도 땅에 세계적인 종교가 셋이 나왔습니다. 힌두교, 불교, 자아나교입니다. 자이나교도 대단합니다. 그 자이나교에서도 '업신' 정도를 봤어요. 그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체라고 안 하고 '업신'이라고 했어. 보기는 했습니다. 자이나교의 바르다마나(마하비라, 기원전 559~527년)교주는 그 정도 수준이 되었어요. 그러나 우리 현지사에서 말하는 그 자상한 영체의 내용은 몰랐습니다. 알 도리가 없지.

우리는 너무도 자세히 알기 때문에《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권에서도 그렇게 해왔지만, 보는 사람들은 우리 학자들도, 석학들도, 큰스님들도 이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해. 그게 당연해요. 그렇다면 적어도 '가섭이다', '아난이다'하고 나온 사람이 법문하고, 쓴 책이라면 정말인지 아닌지를 봐야지. 그런 분들이 아니면 이걸 쓸 수도 없는 거예요.

이것은 내놓을 수가 없어요. 힌두교(힌두이즘) 여러 학파의 석학들한테 무아설(無我說)이 완전히 깨어져버린 거예요. 사상적으로 눌려 버렸어. 논쟁에서 완전히 패배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쇼카 대왕이나 칸슈카 대왕, 그후 300~400년 후에 출세했던 그런 분들이 전 인도를 통일해가지고 불교화 했는데 밀려나와 버린 거예요. 여러분,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것을 지금 내가 들고 일어난 거예요. 이건 역사적인 사실이어요. 내가 지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코페르니쿠스라는 분을 알지요.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세상에 선포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는 중세였어요. 이태리 로마 교황권이 막강한 세력을 거머쥐고, 심지어 서구 열강들의 왕권을 쥐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거슬리면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기독교 성서에 어긋난 발언을 했다든지, 또는 그런 행위를 하면 신의 이름을 빌어 마구 처단했습니다. 스님이 언제 여러분에게 마녀사냥을 이야기 했나요? 기독교가 서구를 꽉 쥐고 있었을 때예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의 섬 쪽을 발견하고, 나중에 신대륙을 발견했는데, 그 신대륙에 진출하기 위하여 종교라는 미명으로 북미 중미 남미 원주민들을 마구 학살한 거예요. 자기들은 신의 군대다, 신의 교도다 그거예요. 얼마나 많이 죽인 줄 압니까? 여러분, 알아야 됩니다. 스님이 남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알아야 됩니다. 원주민을 죽인 수가 1,000만명, 아니 1억도 더 되요. 지금의 통계를 보면 2억이어요.

이렇게 많이 원주민을 죽여 버린 거예요. 그리고 땅을 뺏고, 부녀자를 강간 약탈하고, 방화하고, 정부 재산을 전부 도적질한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 아프리카로 가서 죄 없는 원주민들을 마구 죽이고, 노동력이 될 만한 청년들을 갖다가 노예로 팔아먹은 거예요. 죄 없는 원주민들은 아버지가 잡혀가니까 부인과 애기는 서럽게 살지. 당초에 노예도 아닌데 강제로 노예의 신분으로 만들어 미주로 데리고 가서 노예로 팔아먹은 거예요. 그 광활한 땅을 그렇게 해서 경작하여 돈을 벌어먹은 거예요. 이러한 죄악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부르짖은 거예요. 성경에 기록 되어 있는 것은 글자 한자, 한 획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다 그거예요. 한 글자, 한 획이라도 절대 고치지 못해.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 했어. 그 성경에 적혀 있는 것은 천동설이어. 하늘의 별이나 지구의 주위를 태양이 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천동설이라고 해. 그런데 지동설을 가지고 나오니까 어떻게 됩니까? 발칵 뒤집힌 거지.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발표하고 수 십 년 만에 저 세상으로 갔지만, 그 다음에 천문학자들이 천체를 관찰하고 실험해 보니까 코페르니쿠스가 한 말이 맞거든. '부르노'가 그래서 화형에 처해진 것 아닙니까? 지동설을 부르짖는다고 불에 태워서 죽여 버린 거예요.

나중에 그 유명한 갈릴레오가 잡혀가 공개재판에 회부 되었어. ‘너도 지동설을 주장하는데, 이 자리에서도 주장할 것이냐, 아니면 승복하겠느냐’고 했거든. 그러니까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해버렸어요. 그래서 살았습니다. 살아가지고 법정을 나오면서 혼자 투덜거리는 말이 있지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어. 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에, 어떤 사상과 정반대되는 사상을 ‘코페르니쿠스적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것도 아실 겁니다.

인도 남쪽의 섬나라 스리랑카를 아시죠. 19세기 후반에 스리랑카에서도 기독교와 불교의 대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교는 무아설(無我說)을 바탕으로 한 이론이고, 기독교의 철학은 유일신을 바탕으로 한 이론이죠. 여러분, 기독교의 철학을 아시죠? 양측에서 서로 논쟁한 것들은 지금의 영산불교 현지사에서 보면 둘 다 바보예요. 그걸 우문우답(愚問愚答)이라고 해. 그렇게 끝났습니다.

전번에 스님이 이야기했나? 이 과학계, 특히 물리학계에서 ‘진공이 있다 없다’하는 두 파가 2000년 전부터 싸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정점으로 하는 흐름은 없다고 하고, 원자론을 내놓은 데모크리토스를 정점으로 하는 그 흐름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2000년 동안의 논쟁으로 끌어 온 거예요. 끌어왔는데,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거두가 나와서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습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알지요? 전번에 스님이 말했지요.

에너지는 곧 질량이라는 것(E=mc^2). 1g의 질량을 가지고 완전히 연소해서 열량으로 빼면(열로, 에너지로 빼면) 10만㎾의 발전소가 250시간 쓸 수 있는 양이어요. 그런 세상이 되면 어쩐다고 했지요? 살기 편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석유가 없어도 되지요. 그렇잖습니까? 이인슈타인은 이런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이어요. 그리해서 그 분이 통일장이론을 내놓았는데, 그 통일장이론을 완성은 못했지만 그분의 업적에 의해서(물론, 그 앞뒤 과학자들의 업적으로 해서) '있다 없다'가 잠재워져 버립니다.

봉합되어 버립니다. 그걸 아십니까? 봉합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 두 논쟁이(있다 없다하는 논쟁이) 어떤 위대한 분에 의해서 이론 제기는커녕, 반론을 제기치 못할 정도로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그 두 논쟁은 잠자고, 새로운 이론이 힘을 얻게 되는 거예요(세계화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지동설은 두 논쟁이 아니고, 확고하게 믿었던 천동설, 그 기독교 세력 하에 있었던 그 당시에 새로운 설을 내놓는 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거예요. 어마어마한 위험이 따른 거요.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다면 화형 감이었지요. 그걸 아십시오.
그 다음, 선불교에서도 돈점논쟁(頓漸論爭)이 있습니다. 돈점논쟁(頓漸論爭)을 아시는 분은 아실 거예요. 선불교에서 돈점논쟁(頓漸論爭)이 있습니다. 선불교는 어떤 종교냐? '심즉시불'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부처다'하는 거예요. 마음이 부처다, 마음을 깨치면 부처다 하는 사상을 들고 나온 것이 선불교입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頓)자와 점(漸)자를 합해서 돈점논쟁(頓漸論爭)이라고 하는데,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최근 우리나라에서 입적했지만,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한 그 어떤 큰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죠?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창한 분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 스님보다도 몇 백 년 전 인물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스님인데, 그 인물을 아십니까? 한번 말해 보세요. 고려때 스님인 '보조국사 지눌'이예요. 보조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창했어요.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다겁생으로 내려온 우리 중생들은 번뇌망상 삼독번뇌 업장 습 등 이런 것이 있단 말이에요.

이것이 다 녹아야 되니까 충분히 보림을 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그것이 아니고, 그저 신문도 보지 말고, 라디오도 듣지 말고, 오직 화두일념으로 가라. 오직 화두일념으로 가라. 그래서 크게 깨쳐버리면 닦을 것, 무슨 번뇌망상, 업장, 이런 것이 전부 떨어져 버린다. 그냥 여래지에 든다 하는 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입니다. 그분은 가셨지만, 이 큰스님에 의해서 돈점논쟁(頓漸論爭)이 주창되니까 이것은 매스컴에 조명을 받으면서 다룰만한 깜이거든(다룰만한 기사거리거든). 그래서 한참 많이 다루었습니다. 그런데요 선불교는 불교의 한 지파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여러분이 또 아셔야 돼.

그러면 우리가 본단 말이어요. 영산불교에서 봅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점(頓漸)에서 돈(頓)이 맞느냐 점(漸)이 맞느냐? 둘 다 아닙니다. 내가 이 법상이 아니고, 여러분 몇 사람하고 앉아서 이야기한다면 참 웃기는 이야기를 해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둘 다 아닌 거예요. 인간의 한계는 잘 수행해야 어느 정도 간다고? 아라한입니다. 그런데 자력으로 어떻게 불과(佛果)를 증합니까? 보살과(菩薩果)도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지 아는 사람? 혼자 힘으로(자력으로) 보살과를 이루기가 왜 어려운줄 아십니까? 네 가지,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지요. 이거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이 이 정도를 아니까, 우리 현지사 신도 분들의 수준은 상당하지요. 내가 그분들을 다 알거든요. 나한테 오면 내가 그렇게 법문을 해줍니다. 그러면 아무 말 없이 듣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알아. 그 수준을 알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훨씬 낫지요. 훨씬 낫지.

정토보살이 자력으로는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첫째, 거기에 아기보살을 만들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붓다의(부처님의) 우주적인 능력이 아니면 정말로 안 됩니다.

������둘째, 변녀성남(變女成男)입니다. 여자 분들이 정토에 갈 경우 4영체 모두 다 고추를 달아줘야 돼. 누가 답니까? 자기혼자는 절대 안 돼. 그 변녀성남의 어려움입니다.

������셋째, 영체분리입니다. 이건 정말로 부처님 아니면 안 됩니다. 자이나교 교주인 '마하비라', 그분은 영체를 보기는 했지만 어떻게 영체를 꺼냅니까? 못 끄집어내. 영체를 끄집어내려면 붓다의 힘이 있어야 됩니다. 딱 꺼내려면 부처님이라야 돼. 그래서 분리를 딱․딱해 놓거든요(가지런히 해놓거든요). 우리 스님들 모두 다 보살을 만들려고 그 절차를 밟아줘요. 여러분도 해주는 사람 있어요. 영체분리까지 해준단 말이에요.

영체분리를 다해주고 정화해 주는 거예요. 씻어 줘. 빛으로 부어줍니다. 그래야 4영체가 밖으로 나와가지고... 4영체가 모두 다 막으로 싸여있기 때문에, 또 막으로 간격이 다 엉켜있기 때문에, 껌과 같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분리작업을 하고 그 무량억종광으로 퍼부어(씻어) 주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다시 하나로 해서 딱 넣어줍니다. 그러면서 또 이제 빛으로 해주는 거예요. 보살이 되려면. 그러니까 영체분리가 안 되죠? 그 어떤 성자도 못합니다. 여러분, 부처님 다음가는 성자들도 못합니다. 스님이 거명을 하고 싶지만 이 석상에서 말하기 곤란합니다.

어쨌든 다른 종교의 교주도 안 됩니다. 그 작업을 못해요. 우선 영혼체의 내용도 모르는데, 어떻게 끄집어 낼 실력이 있습니까? 또, 어떻게 분리할 실력이 있습니까? 어떻게 무량억종광으로 퍼부어 줍니까? 자기의 몸뚱이는 무량억종광이 아닌, 차원이 낮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요.(※한 삶 정리는 그 속에 포함이 안 돼. 물론 나쁜 원결이(그 사람하고 아주 상극의 원결이)태어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벌써 30대다 하면 만날 시간이 되잖아요. 만날 시간이 되면 저 사람이 이 사람한테 맞아 죽을 수도 있잖아요. 전생에 죽였으니까. 그 상극의 원결을 지었다면 말이에요. 그러면 그때 한 삶 정리를 해줘버립니다. 그러면 안 만납니다.)

������넷째, 마장(魔障)입니다. 잘 아시네요. 마장(魔障), 내마와 외마가 있는데, 내마는 색신이라는 것을 아시죠. 외마는 천마, 용신, 이매망량 등등인데, 자세히 보면 많아요. 어쨌든 이런 등등의 내․외마를 막아줄 사람이 없으면 아라한이 되고, 보살이 되려면 이거 엄청나. 도고마성이어요. 그 말이 맞는 거예요. 도고마성.

이거 막아줄 사람이 없어. 그렇기 때문에 보살을 하나 만들려면 보살이 함께 와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거나 영적으로 그 진짜 몸뚱이(보살 몸, 보신)를 가진 관음․지장․문수․보현 같은 불과(佛果)를 이룬 그 보살이 와서 그 사람을 공부시켜야 돼. 마장(魔障)을 딱 막아줘야 돼. 외마를 막아주고. 그리고 문제가 있으면 전부 제거해 주고. 빙의가 되어 있으면 제거해 주고. 업장이 크다면 씻어주고, 소멸해 주고. 그렇잖으면 안 돼.

������다섯째, 사중죄(四重罪)정도는 소멸해줘야 돼. 극락정토에 가려면 사중죄 정도는 반드시 소멸이 되어야 돼. 그런데 우리는 많은 과거생에 사중죄를 지었거든. 이 사중죄를 가지고, 이 업을 가지고는 극락을 못 가. 문수보살님의 사중죄 소멸은 그분의 고유권한으로 주어져 있어요. 고유권한, 아시죠?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심즉시불이다'라고 하거든. 여러분, 이게 1300년 동안 내려왔습니다. 깨치면 불(佛)이다 그거예요. 마음이 곧 불(佛)이니까 마음을 깨치면 불(佛)이다 그거예요. 마음을 깨치면 불(佛)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에서는 그건 아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반론을 제기 하는 것은, 깨쳐가지고 업장 ‧ 탐진 삼독 등등을 다 씻어버려야 한다. 보림이 필요하다. 보림이 다 잘 되어 버리면 부처이다. 여러분, 그게 부처입니까?

아니지요. 그건 아라한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아라한이지.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돈(頓)도 아니고, 점(漸)도 아니어요.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더 참고 될 말씀을 많이 해주는 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지금 아인슈타인이 유(有)다, 무(無)다(진공이 있다, 없다)하는 것을 거의 종식시킨 것 같이 되었는데, 나보고(우리보고) 물어보면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거예요. 진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영산불교에서 말하는 비아설(非我說)이 나옵니다. 비아(非我)라야 윤회합니다. 힌두교(브라만교)의 아트만 갖고는 윤회를 못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설명할 수 있어야 돼. 내가 가만히 보니까 이것을 몇 사람이 알더라고요. 아트만 가지고는 윤회가 안 된다. 아트만은 범(梵)과 본질이 똑같습니다. 그 범(梵)이 만물을 만들어서, 다시 범(梵)이 낱낱의 개아(個我)‧개물(個物)에 들어가 버렸다고 했지요. 그것이 아트만이어요.

그러니까 우리 사람도 아트만을(실체를) 지니고 있다 그거예요.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윤회가 안 된다고요. 그 아트만은 우리 영산불교에서 말하는 1번 영체(본체)예요. 본체 갖고는 윤회를 못하는 거예요. 그건 순수히 지고지선 하니까. 그것 갖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윤회 밖에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있었어요. 윤회하려면 2번 영체, 3번 영체, 4번 영체까지 생겨야 이 사람 몸을 받아가지고 악도로도 가고, 육도를 윤회하는 거예요. 여러분, 스님의 말을 꼭 알아들어야 됩니다. 이해해야 됩니다. 업을 지으면 인연 따라서 2번 영체, 3번 영체가 생긴 다고요.
그래서 1‧2‧3번이 생겼어. 우주법칙에 의해서 생겼어요. 그거 3번까지 생기면 어떻게 되느냐? 3번까지 생겨서 자그마한 업을 지으면 하늘과 성중으로 왔다 갔다 하지. 육도윤회는 못하지. 그러나 4번 영체가 생길 정도로 업을 지어 놓으면 1‧2‧3번 영체가(본체가) 엄마 뱃속에 탁 들어가잖아요. 4번이 이제 3번 영체에 딱 붙어가지고 똑같이 자라. 자라되, 이 몸하고 영체하고 딱 중간에 서서 접착 구실을 한다고.
그렇기 때문에 몸뚱이와 이 4번 영체는 털구멍하나도 틀리지 않아. 90살 먹은 꼬부랑 할머니가 죽으면 4번 영체가 어쩐다고? 무주고혼으로 있을 때에는 그대로 꼬부랑 할머니로 돌아다녀. 19살 먹은 애가 곱사(곱추)였으면 그 죽은 놈도 곱사예요. 그럽니다. 그런데 그 4번 영체는 어쩐다고? 이것이 이 사바세상의 조건에 맞아서 생기는 거예요.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밀도가 맞아야 돼. 밀도가 맞아서 여기에서 사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승을 가게 되면, 지옥을 가게 되면 지옥하고 이 사바세상의 기가(조건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4번 영체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나 4번 영체의 안쪽 것은 따라가요. 안쪽 것은 따라가기 때문에 대성자가 볼 때는 ‘아! 저 엄마가 다섯 살 먹은 놈하고 같이 물에 빠져 죽었구나. 혹은 어떻게 횡사해서 죽었구나’하고 아는 것은 지옥에서 엄마가 애기를 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겠습니까?

하늘을 갈 때에는 1‧2‧3번이 가되, 바깥 몸뚱이인 3번 안에 1번 2번이 그 속으로 겹쳐있어요. 밀도가 다르기 때문에 탁 겹쳐져요. 알았습니까? 3번 2번 1번 영체는 올라갈수록 입자가 적어져요. 이 정도는 이해할 거예요. 알아듣기 어려워도 이 정도는 알아야 돼. 그래서 1‧2‧3번 영체는 하나로 꽉 뭉쳐있습니다. 하나로 영원히 뭉쳐져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1번은 본체이고, 주인공이어요. 부처님께서 이것이(1번이) 주인공이라고 하셔요. 그래서 우리도 ‘아하! 이것이(1번이) 주인공이구나’하고 안다고. 선(禪)에서 말하는 주인공은 이것이(1번이) 아닌 이것의 본체, 소위 일심진여라든지, 불성이라든지, 우주본체, 이것을 주인공이라고 하잖아요. 진아(眞我)라고도 하고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은(불성은) 나의 진아(眞我)도 되고, 여러분의 진아(眞我)도 되고, 저기 우리 땡삐의 진아(眞我)도 되고, 저기 산의 진아(眞我)도 되고 해. 그 진아(眞我)와의 용어가 틀린 거예요. 그때는 본체라고 해야 돼. 주인공은 1‧2‧3번 영체입니다. 선(禪)에서는 이걸(일심진여, 불성, 우주본체) 주인공이라고 해. 그 주인공이라는 용어가 틀리는 거예요.

3번 영체가 하늘을 갈 때에는 관문이 있습니다. 하늘의 그 안락하고 평안한 것 등에 의해서 3번 영체가 활짝 핍니다. 어떻게 피느냐? 미스코리아보다도 더 예쁘게 핀다고요. 알았습니까? 지옥을 갈 때에는 1‧2‧3번 영체가 어떻게 되는 줄 압니까? 그 4번 영체 안부분이 지옥의 조건에 맞게 되고, 아귀세계에 갈 때에는 그 세계의 조건에 맞게 되는데, 배가 풍만하고 목구멍이 아주 가늘어요. 그렇게 탈이 바뀌어 진다는 말이어요. 그러나 1‧2‧3번 영체는 그대로 뭉쳐있다 그거예요. 이것이 본체입니다.

사람 몸을 받아 올 때에는, 수정할 때 본체가 들어가야 사람이 됩니다. 윤회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것까지 알았지요? 아귀세계나, 하늘세계나, 성중세계나, 보살세계나, 붓다의 세계는 몸뚱이가 없는 세계입니다. 알지요? 3번 영체가 성중하늘을 갈 때에는 2번 영체가 탁 와가지고 3번 1번이 그 속에 딱 겹쳐있단 말이에요. 입자가 적은 3번 영체부터, 무주고혼부터는 초미립자로 되어 있습니다. 소립자를 더 지나가서 초미립자로 되어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볼 사람이 없어. 삼매에 들어가서 지혜의 눈으로 보살, 상품보살, 붓다가 보는 거예요. 천인을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거의 없지요. 기독교에서 한 사람 있었어요. ‘돈 모드코비’인가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이름이 그 사람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생활에 관한 책을 썼잖아요. 그러니까 '칸트'가 그걸 부인(부정)했어요. 사람의 오성(悟性,감성·이성과 구별되는 인식능력)은 한계가 있어. 형이상의 세계는 못 보는 거예요. 칸트에 의하면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건 맞아. 그러니까 보려면 이 한계를 벗어나야 돼. 벗어나서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야 비로소 보는 거예요.

극락은 1번 영체가 갑니다. 그때 2번 3번은 속으로 들어갑니다. 1번 영체가 가지만 그 속에 2번 3번이 겹쳐있다. 그런데 극락은 너무너무도 여기에서 머잖아요. 우선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또 반박할 사람이 있어요. 거기는 적멸의 세계인데, 시공을 초월한 세계인데, 차별세계를 벗어나 버렸는데 뭘 멀고 가깝고 하느냐고 할 거예요. 그걸 몰라서 하는 것은 아니어.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하는 거예요.

저 극락세계, 서방으로 십 만억 불국토를 넘어서 있잖아요. 영적인 개념에서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거기의 조건은 여기의 사바세상하고, 하늘세계하고, 성중세계의 여건하고 아주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당신의 큰 위신력으로 여러분의 꼬마 아기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 놈은 거기의 여건에 충분히 살 수 있어요. 1‧2‧3번 영체가 그 꼬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믹스가 되어버려요.

그러면서 정말로 해탈신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앞에서 말한 하늘신이 문제가 아니어요. 성중 몸뚱이가 문제가 아니어. 정말로 경에는 32상을 갖춘다고 하지. 그러나 32상은 붓다만이(붓다의 저 보신들이) 갖추어요. 이 보살들의 얼굴은 하늘 천인들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기가 막히지. 그리고 몸에서 방광을 하니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방광을 상상해 보세요. 전번에 어느 TV에서 빛의 축제를 보여준 것 같은데, 한번 보세요. 현란할 거예요.

그러나 미타정토의 그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이 빛들, 그 많은 보살들에게서 나오는 빛들이 어우러져 가지고(빛들이 서로 교합해서), 그 분위기가 극치를 이루는 아름다움입니다. 여러분, 여름 한 낮에 다이아몬드를 밖에다가 놔두고 보세요. 이것이 발산해가지고 어떻게 됩니까? 참 아름답지요. 그 다이아몬드가 천만가지 색깔을 지닌 투명한 다이아몬드라고 합시다.

그때 나오는 빛깔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아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수승하겠지요? 그런 다이아몬드가 천개 만개가 있어서 어우러져서 스스로 발산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이 광경은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아십시오.

붓다의 세계는 또 어떠한 줄 압니까? 여러분들이 꼭 아셔야 할 것은 미타국토의 꼬마는 영원히 꼬마예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저기 붓다 세계의 불신(佛身)은 어떠한 줄 알아요? 애기가 커. 그래서 완전히 사람 몸을 갖추고 있어요. 그것이 달라. 그 몸하고 1‧2‧3‧4번 영체가 계합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불신(佛身)을 가지고 있는 이 수행자의 1‧2‧3‧4번 영체가 어찌나 빛과 같이 깨끗하든지. 무량광하고 털끝만큼 틀려도 계합이 안 돼.

그러니까 우리가 땡삐를 만져도 씻어주는 거예요. 바깥에만 갔다 와도 그 무량광 빛덩어리로 영체를 씻어 주는 거예요. 그걸 유지 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그 나하고 이것하고 믹스가 아닙니다. 이때는 그것이 들어가 버립니다. 그 불신(佛身)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불신(佛身)의 위력은 우주적이어요. 왜 우주적이냐? 붓다는 대적정삼매에 들어가서 우주 본체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자기의 법신불이 생긴다고 했지요. 그 법신불이 구체화 된 것이 불신(佛身)입니다. 아셔야 돼. 그래서 4영체까지 합해진 이 법신불은 우주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지금 우주라는 말이 나오는데, 지금의 천체물리학에서는 이 우주가 어찌나 넓던지, 끝도 갓도 없이 넓어요. 지구도 하나의 별이거든요. 지구만한 별 덩어리가 얼마나 많으냐? 여러분 아실 거예요. 2,000억 정도 지니고 있는 그 한 집단을 섬우주라고 해요. 그 섬우주가 수 천 개라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별이 얼마나 많지요? 물리학자들은 이걸 우주라고 봅니다.
그런데 영산불교에서는 그것은 현상계이고, 적멸 묘유 해탈오계가 또 그만큼 있어. 그래서 우리 영산불교의 어느 학자는 '우주정법계'라고 했단 말이어요. 그건 자기가 지은 주인 이름입니다. 그렇게 하더라고. '우주정법계'를 주관하시는 왕이 붓다의 붓다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이셔요. 이거 기가 막힌 거예요. 지금 천문학자, 물리학자들이 아는 우주만 해도 이건 수수께끼라고 했어요. 아인슈타인도 수수께끼라고 했어.
공부하면 할수록 이건 오리무중이라. 뉴턴은 뭐라고 했느냐? 뉴턴(Newton, Sir Isaac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1642~1727). 광학 연구로 반사 망원경을 만들고, 뉴턴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입자설을 주장하였다.)이라고 하면 대단한 분입니다. 고전물리학에서 최고의 자리를 찾으신 분인데, 그분은 자기가 아는 것은 저 강변의 모래 한 알 정도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에 와서는 ‘역시 우주는 수수께끼다. 나로서는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가 영원히 수수께끼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말한 거예요. 아인슈타인은 굉장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지만 이 불교의 화엄사상을 접했습니다. 여러분, 화엄사상을 접했어요. 그래서 무릎을 친 거예요. 오직 불교만이 진정 미래의 세대를 리더할(이끌) 만한 종교로구나. 그래가지고 종교를 3단계로 구분한 분이 그 분이어요. 세 종류로 말한 거예요. 여러분, 그거 아시는지 모르겠어.

▸첫 번째,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가지고 종교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원시의 애니미즘(정령신앙(精靈信仰)이라고도 함)이 있지요. 태양신을 믿는 다든지, 혹은 전쟁신도 믿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공포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공포냐? 그 당시는 기술도 떨어졌고, 지금처럼 이렇게 비옥한 땅도 개간할 능력도 없고 해서 하루하루의 삶이 참 고단했지요. 그런데다가 무서운 질병이 오잖아요. 오면 죽으니까 이것이 두려웠어. 전쟁 질병 천재지변 등은 지금의 사람들도 무서워하지. 지진 화산폭발도 무서워하지. 이런 것들 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런 원시 신앙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이것을 원시종교라고 합니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한 거예요. 이제 사회생활을 하잖아요. 사람들의 수가 많이 불어나기 때문에 서로서로 교류한단 말이에요. 우리나라 같으면 각 도의(각지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문물을 바꾸고, 사고팔고 해서 편하게 살아가잖아요. 국가 간에도 서로 교역을 하고, 교류도 하잖아요. 이것을 사회적이라고 해요. 이 사회적인 윤리종교가 나온 거예요. 이 사회가 안정되고 잘살려면,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해야 돼. 어떻든 이 두 번째 단계의 종교는 이런 것을 포함하되, 반드시 유일신(唯一神)이 나와요. 유일신(唯一神). 범(梵)과 같은, 그래도 힌두교의 범(梵)은 의인화했지만, 범(梵)보다도 더 심하게 인격화한 그런 종교가 나와요. 그렇게 인격화를 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어. 그걸 내가 ‘어떤 종교입니까’라고 묻지 않아도 알겠지요.

▸셋째, 아인슈타인이 그 우수한 두되로 연구를 하고 불교를 접해 보니까 '원리', '어떤 원리'를 알게 되어요. 무슨 원리인지 아시는 분? 연기의 원리(緣起의 原理)입니다. 좀 달리 말하면 인연의 도리(因緣의 道理), 인과법(因果法, 업의 법칙, 카르마의 법칙)등 이런 것이 나와요. 불교는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연기(緣起), 인연(因緣)에 의해서 전부 진화해가지고 된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도 깊고 깊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 연기(緣起) 안에는 의식적인 동인, 효율적인 동인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어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있어야지. 저 절대 신을 믿는 사람들은 거기까지만 본 거예요. 지휘자가 있어야 되지 않나? 그러니 이 원리 안에, 그걸 의식적 동인이라고 해. 의식적 동인(意識的 動因). 뜻 의(意), 알음알이 식(識), 의식적 동인이라고 그래. 저 하늘을 봐라. 별들이 저렇게 많은데, 다 각기 궤적을 따라서 운동(운행)을 하는데, 그 수억이 문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2천억×2천억을 해도 더 되어. ‘저 충돌하지 않고 정밀하게 돌아가는 저 별들을 봐라.
하나님 아니고는 누가 저런 것을 만들었단 말이야’하는 것이 저 종교야. 조물주가 아니고서야 누가 만들었단 말이야. 그러나 이것을 '효율적 동인'이라고 해. 효율적 조화, 효율적 동인이 있기 때문에, 또 '의식적 동인'이 있기 때문에 이 영혼체는 사람을 보면 오른쪽 눈하고 왼쪽 눈하고 구도가 똑 같아요. 안 그럽니까? 눈이 하나 있고 한쪽 눈이 세로로 있으면 어떻게 되나? 그건 아니어. 딱 지선을 그어놓고 양쪽을 보면 아주 정교하게 조화가 되어있어. 이걸 효율적 동인이라고 해. 그러니까 이 연기(緣起), 연기(緣起)에 대한 내용을 모르고 저 사람들이 우리 불교를 얕잡아 보는데, 그 깊은 철학사상을 들어야지.

그리고 이제 TV에 나가게 되면, 스님이 대 여섯 가지 엄청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처음 무아설(無我說)을 가지고 비아(非我)다 하고 나가는 거예요. 이것도 지금 핵폭탄이어. 그러니까 발칵 뒤집히지. 이 모든 종교를 포괄하고, 선도하고, 과학을 선도하고, 철학을 선도하는 것은 불교뿐이어요. 여러분, 불교뿐이어. 이런 고도의 철학과 과학을 지닌 종교가 없어. 불교밖에 없어. 어떻게 해서 이 불교가 이렇게 조그랑 망태기가 되었습니까?

이거 슬픈 일인 거예요. 정말 슬픈 일인 거요. 우리 불교에서만이 보살이 나오고, 붓다가 나오는 거예요. 위대한 불교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보살이 나오느냐고. 보살이 나오는 종교가 어디에 있느냐고. 없어. 그래서 때가 왔기 때문에 앞으로 스님이 하나씩 하나씩 터뜨릴 거예요. 그러면 나는 이 사상만 이렇게 전하고 가면 돼. 몫은 여러분한테 있어. 여러분이 수준을 높이라고. 현지사에서 나온 책, 이건 세상에 없는 책이어요. 이 책을 정독 했으면 좋겠습니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관음태교〉,〈관음태교에서 부처님천도재까지〉등등. 이러한 천도재가 없고, 이런 태교가 없는 거예요. 이런 것을 여러분이 숙지해야 되겠어.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해서 수준을 향상시켜 주시오. 현재 여러분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고 ‘아이구! 이거 어느 교수보다 났네’라고 했다고요.

무아(無我)인데 뭣 하러 천도를 해. 어느 종단에서 우리를 따라서 천도바람이 불었어. 우리를 따라서 한 술 더 떠가지고 49일×7일을 하네. 343일을 천도한다든가? 이거 웃기는 일이지. 여러분,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됩니다. 자기 소신에 살아야 됩니다. 자기의 철학이 무아(無我)이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가는 놈도 없고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는 놈도 없다고 하면, 그 철학을 바탕으로 해서 하루를 살더라도 바르게 살아야 양심이 있고 그게 사람이지 어떻게 변절 합니까? 이게 우리 영산불교의 주장이고 생각입니다.

무아설(無我說)은 윤회설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무아설(無我說)은 윤회설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만유는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오. 인연소생(因緣所生). 인연 따라 진화합니다. 인연생기(因緣生起). 이건 진리예요. 이건 자기들보다도 더 강하게 주장해. 그래서 지금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용수'때 와서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이 되어버렸어. 참말로 공(空)이 되어버렸어. 이게 큰일입니다. 사람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졌어요.

색(色)은 지수화풍으로 구성된 물질이어.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적인 것, 그러니까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이루어졌어. 이 정신적인 것을 스님이 삼매에 들어서 관해보니까, 이인슈타인도 선정정도에 들어간 분이 아니면 그 물리학이 안 나옵니다. 보니까 영혼체가 있어. 영혼체가 있더라 그거예요. 이 몸뚱이는 죽어도 나가는 본체가 있습니다. 1․2․3․4번 영체가 있습니다. 1․2․3번 영체는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가고, 어디를 가고, 사람 될 때가 되어도 요놈이(1․2․3번 영체가)와.

요놈이 와야 복사체인 몸뚱이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금생에 사람을 죽였으면 금생에 징역 가지. 그래도 그 업은 너무도 무겁기 때문에 지옥을 가요. 그러다가 언젠가 옵니다. 언젠가 오는 놈하고 나하고 같아야지. 내가와야지 보살이 오겠습니까? 보살이 온다고 하면 말이 되겠소? 무아(無我)라고 하면 그거예요. 그러나 본체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행위 하는 놈하고, 업보를 받는 놈하고 같아야 되는 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무아설(無我說)은 그것이 아니어. 이러한 무아(無我)해석을, 또 부처님께서 왜 무아(無我)라고 하셨느냐? 그걸 몰라. 이 상대세계(현상세계)에 사는 우리 인간은 고해(苦海)에서 산다고 하잖아요.

이 현상세계는 고해(苦海), 고(苦)가 충만 되어 있어. 그냥 고통이어요 고통. 하늘세계도 죽을 때 오쇠(五衰)현상이 있어. 그것까지는 이야기할 수 없고, 어쨌든 하늘도 죽어야 할 때가 있어. 거기서 영원히 살면 좋지. 죽는 고통이 있어. 그 서러움이 있어. 어쨌든 간에 육도는(현상세계는) 고통이 있어. 이 고통의 세계에서 건져 주려고 하는 분이 부처님이어요. 이게 부처님의 자비야. 정토보살부터 자기라는 생각이 없어. 자비야. 아상이 없어. 내 것도 없어.《금강경》의 말씀이 맞는 거예요. 불쌍한 중생을 건질 생각이어요.

그래서 나(我)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 나의 몸뚱이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라. 이 몸뚱이는 가짜니까(비아니까). 이 몸뚱이는 언젠가 죽어버릴 것이어. 이것은 가짜니까 여기에 집착하지 말라. 집착하고 보니까 죄를(업을)짓더라 그거예요. 업을 짓는 원인이 집착이어요. 집착의 원인은 욕심(탐욕)이어. 그러니까 그것을 끊어주기 위해서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거예요. 그리고 현상계의 고통에서 건져주기 위해서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현상세계에 적용되는 것이 무아(無我)예요. 그 무아(無我)를 저기 본체계까지 연결해 버리면 큰일나버려. 본체계에는 엄연히 그 아름다운 상호를 가지신 보살님이 계셔요. 지금 그걸 없다 한다고요. 그 보살도 없고, 부처도 없고, 극락도 없고, 지옥도 없고, 그 지옥에 가서 벌 받는 것을 일체 부인(否認)해버려. 영혼체도 없다고 해버려. 귀신도 없어. 제사지낼 필요도 없어. 그러려면 뭣 하러 살아? 뭣 하러 먹으려고 해? 뭣 하러 공부해?

저 유물론자들처럼 쾌락을 생의 목표로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멋지게 살아야지. 도덕이 필요 없는 거예요. 무아설(無我說)은 도덕의 기반이 무너져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무아설(無我說)을 잘 해석해야 됩니다. 비아(非我)로 대체해야 됩니다. 비아윤회(非我輪廻)인 거예요. 아셨지요?

이렇게 말을 해도 여러분들이 다는 이해 못할 거예요. 며칠 전에 온 사람은 참말로 모르고. 한 5년 다닌 분도 그 일부가 조금 알아들을 거야. 그렇잖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알 때까지 스님이 노래를 부를 거예요. 스님이 내 놓은 영산불교 비아(非我)의 사상, 이건 핵폭탄입니다. 그래서 지금 종단에서 야단 났는 거예요. 교수들이 야단나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최고의 학승이라는 사람, 석학이라는 사람들의 ‘근(根)이 없어져 버리면 식(識)도 없어진다’는 이야기, 이건 참 희한한 이야기이지. 여러분의 본체가 있는데 이걸 아예 모르니까 그러지요.

식(識)은 왜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느냐? 몸이 있어야 배경을 반연해서 식(識)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느낌 이후 생각을 하는 거예요. 몸이 없어 버리면 이 식(識)의 활동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체가 윤회의 주체가 되어야 되는 거요. 비아(非我)라는 것은 어찌나 많이 업을 지었던지 숯검정이 되어버렸어. 부처님께서 볼 때 진흙덩어리가 되었단 이에요. 여러분, 진흙덩어리가 되었는데 저것이 나(我)라고 하겠소?

‘저건 나(我)가 아니야’라고 말하겠지. 씻고씻고 씻으면, 다 정화가 되면, 자기의 몸뚱이인 1․2․3번 영체가 순수하고 깨끗하게 드러나. 이건 유아(有我)인 거예요. 이제 본체계부터는 유아(有我)인 거예요. 알았습니까? 지금 부처님께서 보실 때에는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정말 한심한 일이지.

지금 이 주제를 가지고 나왔는데, 이게 아니라고 해가지고 방영금지 한 거예요. 저들이 죽으니까. 현지사를 얕잡아 본 거예요. 영산불교를 얕잡아 본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천마나 섭해 가지고 무슨 아는 소리나 하는 줄 알았는데, 이론이 논리 정연한 엄청난 철학을 들고 나오거든. 이번에 우리 홈페이지에 게재된 성명을 봤지요. 그걸 보세요. 얼마나 논리정연 합니까? 모두 집에 가시면 빼보십시오.



출처/2010.4.21.수(음3.8) 큰스님 춘천 법문중 발췌

2010년 7월 27일 화요일

[불교---2]왜곡되고 왜소하된 오늘날의 불교

왜소화된 오늘날의 종교


2600여 년 전 영산 당시 이후로 불신관佛身觀, 불佛의 삼신설三身設은 두터운 장막 속으로 가려져 버렸습니다. 사람 사람 마음 속 자성에서 삼신三身이 해석되고 있습니다. 크게 왜곡된 것으로, 눈 먼 선량한 중생을 오도誤導하고 있습니다.

우주적인 불교는 여기서부터 왜소화矮小化돼 버렸습니다. 축소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의 여러 나라 불교, 특히 한국의 선禪불교는 깨달음만을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이 목표요, 수행의 종착지입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음계‧중계를 철저히 지키면서 나없는 공부, 두타행으로 공성空性을 증득하여 아라한과를 증해야 합니다.

나아가 자·타력수행으로 정토업을 닦아 삼계를 완전히 탈출하여 보살이 되어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영원히 불퇴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살도를 완성하여 절대계에 빛으로 이루어진 자기 부처를 이뤄야하고, 상적광세계에 자기의 청정법신불을 두어야 비로소 수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로 위대한 우주적인 메타 불법佛法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왜곡된 부처님의 가르침

오늘의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이도 왜곡되어 있습니다.
생사관生死觀 하나 뚜렷하지 않고 불교수행의 기본은 철저한 지계持戒에
있는 데도 승려들의 승행僧行은 심각할 정도로 타락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크게 눈뜬 성자가 없어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요, 마음자리가 극락이라고 합니다.
지옥과 극악을 마음 안에서만 찾으며 "지옥과 극락은 따로 존재하고
있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음 밖의 지옥 극락, 불 보살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눈을 뜨고 나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요? 불안佛眼이나
오안五眼을 갖추고 나서 하는 말인지요? 실제로 지옥과 극락이 안
보입니까? 정말로 마음에도 안팎이 있다는 말입니까? 공空에도
안팎이 있습니까?

마음眞如自性은 수긍삼제竪亘三際요, 횡변시방이며 불생불명不生不滅입니다.
일심一心 혹은 법성法性은 시방법계 어디에도, 심지어 티끌이나
먼지 속에도 주변하여 뻗쳐 있습니다.

동시에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영원히 경계에 물들지
않습니다.
자성自性은 청정무구요, 여여如如부동不動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자기를 깨친 정도로는 아직 지옥과 극락이 안보입니다.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결코 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려분! 지옥과 극락은 실제로 있습니다. 불 보살도 계십니다.
윤회도 사실입니다. 200여 불교 경전에서 지옥 등을 분명히 말씀
하신 부처님이 거짓말쟁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공空을 지나, 무아 속 삼매에
들어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간략히 줄여 전합니다. 공부해서 뚫은
바를 수행인의 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왜소화된 불교

붓다님들이 계신 절대계 - 여기를 공空에 못 미치는 세계로 보고, 따라서 마경‧환영으로 보고 또는 천마의 소작所作으로 보고 비방한다면 법法을 모독‧능멸하는 대망어로서 무간지옥행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해둡니다. 천마는 하늘1~6하늘의 외도 마魔일 뿐입니다.

붓다는 하늘天上을 지나 성중하늘, 천녀정토, 서방극락, 약사정토를 지나서 연화장세계의 무아 속 삼매에 들어계십니다. 법‧보‧화 삼신을 구족하시며 상모 단엄하시고 백종오색광의 광휘光輝 속 32상의 불신佛身을 갖추시고 자비‧지혜‧삼매‧자재한 신통력이 있어서 실로 어느 존재神와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습니다.

붓다는 겁劫에 한 분 출세할까말까 하는 그런 어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실체 - 불신이나 덕성과 실제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거나 묻히기 마련입니다.

불멸 후 600년쯤 출현한 인도 대승불교의 거성이요, 제2의 석가라고 불리는 용수龍樹에 의해 이신설二身設_生身, 法性身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이신설에는 보신의 개념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의 법성신법신 개념 속에는 색상 단정, 상호 장엄, 엉ㄱ종광명 등 보신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불멸 후 900년쯤 가서 유식의 조사 무착Asnga보살이 불신을 삼신설三身設로 자리매김합니다. 그것도 당시 잠깐 왔다 간 미륵Maitreya불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님은 법신, 보신, 화신을 구족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사실인데도 먼 훗날 선불교에 와서는 자성불自性佛을 말하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을 주장합니다. 부처는 사람이 지닌 마음자리 이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옥도 극락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고통 떠난 자리가 극락이요, 고민이 있으면 무간지옥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한낱 마음 깨친覺 이로 전락하여 이해되고 급기야 저 우주적 메타종교인 불교는 심교心敎로 왜소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왜소화된 불교/삼신


우리 불교는, 위대한 우리 불교는 왜소화 되어버렸습니다. 현재 아라한이 목표입니다. 아라한도 아닌 깨달음을 종착지로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부한 바로는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썼고,
70여회에 거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의 불교로 올려줘야 됩니다. 불교는 위대합니다. 본래 불교는 아라한을 넘어서 보살, 보살을 넘어서 붓다 이루는 것입니다. 붓다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우주 진리․ 우주 본체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우주 본체와 하나가 된 것을 법신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법신불이라고 하는 개념을 학자들도, 그 어떤 스님들도 모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법신불에서 보신불이 나옵니다. 불과를 증한 분은 유․무를 초월한‘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 불신을 두는 겁니다. 이건 대단히 엄청나고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불신에서 천백억 화신을 냅니다. 천백억 화신을 내어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 국토에 가서 그들을 교화 합니다. 그리고 그 보신에서 이 사바세상에 사람 몸을 받아 옵니다. 인신을 받아 옵니다. 그 인신을 응신, 응화신, 화신 그럽니다. 이렇게 불과를 이룬 어른은 세 몸을 둡니다. 법신불․보신불․화신불. 이제 조금 더 깊이 이야기 해드립니다.

보신불은 상대세계(경험세계)를 초월해서 저 절대계에 몸을 둡니다. 그 절대계에 몸을 두는 그 보신의 모습은 32상80종호를 갖춥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 몸뚱이는 부처님의 개끗하고 청정한 광명의 빛입니다. 무량광입니다. 그 무량광으로 이루어집니다. 무량광은 소위 모든 존재의 근원인 빛, 그것을 자성광명이라고 하는데 그 자성의 광명보다도 훨씬 더 깊이 들어가야 정토(극락세계의 빛)세계의 빛이 나오고,

거기서 한없이 수행하고 보살행을 완성해서 절대계에 이르는데 그 절대계는 무량광의 세계입니다. 그 무량광으로 붓다의 몸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몸뚱이를 원만보신(줄여서 보신불)이라고 합니다. 빛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래제가 다하도록 영원히 멸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 없습니다. 그 절대세계는 환희의 세계입니다. 환희의 세계. 여러분, 극락을 표현 할 수 없어서 극락(즐거움의 극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계의 부처님 세계는 극락을 백 천 만 배 보다도 훨씬 뛰어 넘어서 환희 자체입니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지, 환희 자체입니다.

환희 자체인 그 세계는 대적정삼매(대적광삼매)를 통과해야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원만보신(보신불)의 세계는 그러합니다. 이 지구가, 이우주가 완전히 파괴되어도 거기는 미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자는 목표를 붓다 이루는데 두어야 됩니다. 원만보신이 필요에 따라서 자기 몸뚱이를 백 천 만억의 몸으로 동시에 나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수많은 중생국토에 가서 교화를 합니다. 인간 몸으로 받아 온 이 몸뚱이를 화신불(화신, 응화신)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한테 스님이 간곡히 말씀해 드릴 바가 있는데, ‘광명 만덕 ․ 자재 만현’을 우리 입으로 부처님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내 책<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이 나가고 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앞으로 부처님․ 붓다라고 부르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기 화신은 어디까지나 화신입니다. 저기 절대계에 있는 불신(원만보신)은 부처님이올시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깨달았건, 어떤 겁 전에 불과를 이룬 분이 사람으로 와서(인신을 받아와서) 다시 불과를 이루었던 간에 이 몸뚱이는 화신입니다.

화신과 보신은 대단히 차이가 있습니다. 화신과 보신은 한 몸이지마는 유한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신의 능력과 지혜는 저 보신의 능력과 지혜를 따를 수 없습니다. 저 보신이 이 육신(화신)속으로 들어와도 그 무량한 지혜와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내가 받으면 이것이 가루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을 때 이 네 개의 영체가 자기 불신과 합일이 됩니다. 계합이 되어버려요. 그 때의 그 불신의 능력은 무한하지요. 합일이 안 된 상태의 그 절대계에 있는 보신불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능력이 무한합니다.

자, 삼신을 갖추고 있지요, 소승이나 대승에서 이야기하는 18불공법이 있는데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붓다라고 하면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한 70여회를 두고 가끔 가끔 부처님세계의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실 겁니다.

2008. 9. 7. 토(음8.8)큰스님 춘천법문중 발췌






왜곡되고 왜소화된

세계 불교의실상을 안타까워하며
무량겁 전에 우주 법계 최초로 불과를 이루시고, 다
시2600여 년 전에 사바세계에 몸 받아오셔서 위없는
가르침을 주시고 대열반에 드신 후, 무아 속 절대계에
빛의 인격체로 여여히 살아계신 거룩하신 우리 교주
불세존께 백천만 번의 오체투지로 예경 드리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우주적 진리의 불교가 2600
여 년의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너무도 많이 왜곡
되고 왜소화 되어 위대한 불교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
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왜곡된 우리 불교의 실상을 반성
적 차원에서 냉철하게 파악하고 왜곡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새로운 불교
의 방향을 정립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우리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내어 정법을 세상에 널
리 알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는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 불교도들이 깨어나야 합니
다. 긴긴 잠에서 깨어나,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크게 벌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진리의 말씀 - 정법의 사자후를 드러야 합니다.

한구절 진리의 게송을 듣기 위해 흉악한 나찰에게 한 몸
을 기꺼이 던지는 설산동자와 같이 진리를 갈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야 합니다.

수천 년 간 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해설하고 주석을
해놓은, 그래서 불교의 정설로 굳어진 교설조차도 때
로는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합
니다. 이제까지 나의 분신처럼 가지고 있던 불교에 대
한 지식도 버릴 줄 아는 아픔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불교는 남방불교, 북방불교, 티베트불교라
는 세 갈래의 큰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중 어느 불교도 부처님의 법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왜소화되어 있습니다.
정법불교의 위대한 면면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
다. 이제 우리 불교의 실상을 아주 포괄적으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로서 현행 불교
를 비판할 목적은 추호도 없음을 미리 밝혀 드립니다.
오로지 우리 불교의 앞날을 위해서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 아쇼카왕 때 스리랑카로 전해
져 꽃을 피운 동남아시아 중심의 남방 상좌부불교는
스스로의 틀에 갇혀 감히 그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것은 높이 사줄만합니다. 위빠사나
수행법도 불교 경론에 있는 수행법입니다.

그러나 그 수행법에만 집착하다 보니 부처님의 위신
력을 받는, 보다 수승한 수행법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
다. 아라한이 수행 목표이고 해탈신을 갖는 보살이나
불신을 두는 붓다의 경지는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
습니다.

부처님의 어마어마한 위신력과 심원한 적멸의 해탈
세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방불교는 이런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크게 왜곡
되지 않은 것만이라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북방으로 전해진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소위 선불
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태동 초기부터
외도사상과 혼합되어 불교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
습니다.

심즉시불이니 견성성불이니 하면서 그럴듯한 교설을
내세우고 있지만, 부처님의 참 경계를 이해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불교를 왜소화시키고 부처님을 격하
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의 간화선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화두를 들
려면 부처님의 성호가 가장 좋은 화두가 되어 밤낮
으로 불러야지, 왜 경전에도 없는 조사 스님의 말씀을
화두로 들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 성과도 없고 본격적인 수행의 시작단계인
견성,즉 공을 깨치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것
을 위해 고생스럽게 오랜 기간 수행을 해야 하는지 이제 한
번쯤은 되돌아볼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최후의 보루로서 티베트불교가 있지 않느냐
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참 좋겠
습니다. 티베트불교는 수행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긴
합니다.

그러나 수행의 어는 단계에서 하고 있는, 힌두교 요가
수행이 가미된 밀교 수행법은 정법이 아닙니다. 또한 티베
트불교의 지도자는 신통을 사용하여 환생을 함으로써
정법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티베트불교를 위한다고 하지만 정법에 반하
는 것은 하면 안 됩니다. 티베트불교의 우수성으로 주
장하고 있는 즉신성불의 교설은 불자들의 안목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불신보신불이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하고 차원
높은 존재인지도 모른 채, 중음계에서 우주 본성의 빛인
정광명을 받은 의생신을 보신불이라 여기는 어처구니
없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세계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
점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정리해봅니다.

1. 세계 불교는 부처님의 실존과 위신력을 믿지 않
는 부처님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2. 세계 불교는 인간의 실체인 영혼체을 부정하고 윤회
주체마저 없다고 하는 주인공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
습니다.

3. 우리 불교는 붓다가 되고 보살이 되는 완전한 생사
해탈을 이루는 수행법이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습니다.

4. 우리 불교는 해탈법위와 해탈의 적멸세계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차원 낮은 불교가 되어버렸습
니다.

불교는 우주 법계의 법왕이신 부처님을 교주로 모시
고 있으며 완벽한 교리체계와 구원사상을 갖추고 있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신도 수로 보면 기독교
천주교 포함, 이슬람교, 힌두교 다음으로 겨우 네 번
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도 수가 종교 평가의절대적인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오늘날 불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하나의 지표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고향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져 버렸
습니다. 불교가 세계로 뻗어나가 널리 정착되지 못하
고, 아시아 일원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쇠
퇴했습니다.
불교 교리의 위대함과 우주 법계영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이는 초라하
기 그지없는 성적표인 것입니다. 그럼 불교가 왜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요? 이제 그 이유를 한 번 찾아보겠
습니다

출처/2천년간 무아윤회 논쟁에 종지부
영혼체 윤회론
펴낸곳/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





대승불교 경전을 쓴 붓다의 화신들


대승경전들을 보면 상당 부분이 붓다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부분들이 발견됩니다. 따라서 붓다의 소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
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닌 다른 어느 붓다님들께서 경전 편찬의
대임을 띄고, 이 땅에 화신으로 오셔서 여러 대승경전들을 기록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학자들이 첨삭, 보정, 가필, 윤문해 오늘 날 우리가
보는 대승불전이 되었음을 이 자리에서 천명합니다.

(1) 화엄경 열반경 반야경 법화경 능가경 능엄경 지장십륜경
 등에서, 부처님의 미간 등 불신의 여러 부분에서 빛을 방사
함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불과를 증함이 없는 학자
가 필요에 따라 부처님께서 방광하시는 것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2) 부처님 화신불의 설법이 바른 가르침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과 땅이 육종으로 진동하는데, 대승경전 곳곳에 '육종
진동'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3) 수많은 보살들과 성중, 하늘 사람들이 설법의 장에 운집
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4)법화경 여래수량품의 말씀은 거의 사실인 바, 불과
를 증하지 못하고서는 이를 알 수 없습니다.

(5) 법화경 신력품에 부처님의 혀가 삼천대천세계를 덮
는다는 부분도 사실입니다.

(6) 백천만억 화신을 붓다께서 나투신다는 말씀 등은 붓다 이
루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대목들입니다.

(7)화엄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은 붓다가 아니고서는 말
할 수 없습니다.

(8) 32상 80종호는 불신원만보신의 거룩한 점인 바 붓다만이 알
수 있습니다.

(9) 다보탑의 다보불을 알 수 있는 이는 오직 붓다뿐입니다.

(10) 법화경 종지용출품에서 볼 수 있는 항하사수의 불
격을 갖춘 보살의 존재도 붓다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11) 지옥의 수와 그 소름이 오싹할 정도의 형벌 받는 상황을
어떻게 꾸며낼 수 있겠습니까?

(12) 극락을 누가 그토록 자세히 그려냈겠습니까? 윤회 안과
밖, 모두 가볼 수 있는 붓다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13) 백천삼매, 해인삼매, 적정삼매 등은 오직 붓다만이 알
수 있습니다.

(14) 법 보 화 삼신을 어찌 알았을까요?

(15) 유마경의 부사의품의 내용 등도 사실입니다.

(16) 사음이 무서운 계율이라는 것도 불과를 증한 이만이 그
이유를 압니다.

(17) 불마다 인행시에 세운 서원이 있다는 말씀도 맞습니다.

(18) 법당 탱화에 있어서도 가령 관음보살의 아미타불을 정대
한 관, 여러 불 보살의 영락 등 장신구, 지장보살의 석장, 문수
보살의 지혜의 칼 등 이 모두는 진정 불과를 이뤄 원만보신의 변
화신을 보았기에 말할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나는 거듭 선언합니다. 대승경전들은 붓다의 화신들이 쓴 것을
불교학자들이 증보, 윤문해서 편집한 것이라고!
남섬부주에 부처님 이후로 오셨던 다른 붓다님들의 후신을 소
게하겠습니다. 인도의 유마힐 거사 아쇼카왕, 중국의 구마라즙
삼장, 한국의 이차돈 성사, 일본의 성덕태자는 석가모니부처님 후
신이 아닌 다른 붓다들의 화신으로서 보살행만 하고 가셨습니다.

소승의  아함경   대승의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은 대부분 붓다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거나, 진실을 담은 경
전입니다. 동서고금 아니 시공을 뛰어넘어 가장 심오하고 위대
한 종교는 불교뿐입니다. 불교는 희유하고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
르침을 전하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중생들은 과거 도인들이 신통을 부린 행적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고 도인, 기인들이 행한 기사이적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가집니다.

신통은 우리들 범부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영통이나 신통만 있어도 그 사람을 따르고,
그 주변에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많이 배워 학문
이 있는 분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통을 약간이라도 가진 자는 일부러 자기를 과대 포장합니다.
이를 따르는 눈 먼 인간들은 무조건 그의 말을 믿고 추종합니
다. 우리는 신통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영통 신통이 왜, 어떻게 오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영통 신통을 믿고 따르면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
헤쳐 여러분이 참고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부처님의 본 뜻을 왜곡한 대승불전



아육왕의 비문 등에 따르면 우리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
신지도 약 3000년이나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정법
의 상당 부분이 땅에 묻히고, 불법이 적잖게 왜곡되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불멸 후 약 1~2백여 년 간은 합송 형태로 전승
되어 오다가, 제3회 결집 때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을 비로
소 문자화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대승경전은 대략 기원 전 2세기 후박~1세기 혹은 서기 1
세기부터 약 1,000여 년 사이에 부처님의 삼법인 사상에 입각
하여, 대승불교 학자들이 편찬한 이후 증광, 보정, 첨삭을 거듭하
여 완성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유력한 정론입니다.

그래서 '대승비불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까지만 해도 불교신도들은 대승경전이 '부처님께서 친히
설하신 경전'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실증적 역사학이 소개
돼 불전의 성립 시점 등을 여러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대승경
전에 기록된 내용을 부처님이 모두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2500여 년 전에 출세하신 우리 부처님의
행적도 처음 20년과 마지막 2년 정도 밖에 추적할 수 없다고 합
니다.

분명히 지금의 대 소승 경전의 말씀 모두가 그대로 불설이라
고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아난 존자는 암기의 천재였지만
어찌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법문하신 모두를 정확히 송출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상과 집착에서 벗어나 이미 보살과 성과를 얻
었다고 하지만 '붓다 중 붓다'이신 부처님의 깊은 뜻을 분명하게
헤아린다는 것도 무리였고, 더구나 아난은 부처님을 25년 밖에
시봉하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산스트리크 문자 역시 당시로서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인도에는 수백의 방언들이 있어서
기록의 정확성 역시 의심받기도 합니다.

이 밖에 경전의 최초 결집 때 참여하지 못한 비구들에 의해서
칠엽굴 밖에서 별도로 결집이 있었다는 사실, 구어체가 문어체로
바뀔 때의 문제, 산스크리트 등으로 기록된 불교 원전이 약 서기
2세기에서 12~13세기 사이에 1~2백 명의 번역사에 의해 한자 등
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역의 문제 등 이런저런 이유로
대승견전의 원전에서 적잖은 왜곡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불교 내부에서도 불멸 100여 년 경, 제2차 결집을 계기로
근본분열에 뒤이어 지말분열을 거듭해 18~20부파가 생겼고, 여러
부파들은 각각의 소의삼장을 두었습니다. 이 역시 왜곡
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특히 지금의 대승불전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는 본래 부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부분이 많이 눈
에 뜁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결정한 많은 종파불교에
의해 해석의 차이가 생기고, 또 불교가 세계화하는 과정에서 상당
히 이질적인 다른 나라의 토속 종교와 접목해서 생긴 불교도 있
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선불교의 가르침에는 부처님의 본 뜻과 많은 괴
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부처님 이후 4번째로 출세할
불에 의해서 대 소승 불전은 재조명되어질 것입니다. 과거
장엄겁 동안 수많은 붓다들이 출세하여 설한 법설이 고스란히 용
궁에 차례로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 비장된 법보를 곧 출현할 붓
다산해혜자재통왕불가 공부하여 진정한 정법을 사자후할 것입니다.

또한 영산 당시의 저 유명한 마하가섭 존자는 지금 여인의 몸
을 받아와 불과를 증하고 삼신을 구족하여 출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수보리 사리불 존자처럼 조용히 떠날 확률도 있으나,
21세기의 세계불교를 위해 우리 모두 간절히 원한다면 보살행을
하기 위해 출세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불교학자들이 깊은
삼매에 들어 구전되어 내려온 여러 부처님 말씀인 삼법인사상에
기초해 대승경전들을 편찬해냈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청정한 계율의 용맹전진에 따라 깊은 삼매에 들 수 있고, 깊은
삼매를 통해서 불경을 펴낼 만한 지혜가 생기는 데 학문을 하는
학자들로서는 무리입니다.

공를 깨쳐 무아가 되어야 삼매다운 삼매에 듭니다. 나와 대
상이 없고 동시에 '나'라는 생각까지 없으면서 성성적적해야 비로
소 아라한 삼매입니다.
더욱이 불전을 쓰려면 최소한의 진정한 삼매인 상품보살 삼매
인 해인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행인이 여자를 안다면 절
대로 삼매에 들 수 없습니다. 또한 학승들도 전정사유를
해야만 간경으로서도 미생전의 본성을 깨칠 수 있으나 이
수준으로는 경을 쓸 수 없습니다.

상품보살의 삼매 정도에는 들어야 하는데 실천궁행 염불선이라
야 됩니다. 그것도 필요조건일 뿐이요, 몇 가지 조도행을 더
해야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학문하는 이들은 평생 어구에만 천착하므로 정토보살이 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보살의 깊은 삼매에 들기란 불가능한 것입니
다. 다만 구마라즙 삼장은 붓다의 화신이셨음에도 불과를 증하지
못해 대승경전은 제작하지 않으시고 역경만 하셨습니다. 보살행만
하고 가신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의 대승경전


불교의 대승경전 - ≪법화경≫ ≪화엄경≫ ≪대반열반경≫ 등의 부처님 말씀이 많은 방편과 비유火宅喩 窮子喩……, 상징을 들어가며 설하셨다 해서 다분히 픽션허구으로, 한낱 문학작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음을 보고, 사실을 진실하게법문하고 싶어 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에서는 직설법을 썼음을 강조해 두는 바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대반열반경≫같이 큰 법을 설하실 때는 먼저 깊은 삼매에 드신다는 것과 하늘에서는 여러 아름다운 꽃비를 내리고, 대지는 육종으로 진동하고, 머리 정수리에서, 입 속 치아에서, 미간에서, 몸 전체에서…… 억종광명을 놓으셔서 무량 아승기 국토 저쪽의 소천세계 모두를 비추시기도 합니다.

이때 많은 보살, 호법성중104위, 하늘 왕등, 용왕…… 그 서열 높은 권속들이 구름같이 몰려와서 저쪽 세계의 광경을 보면서 놀라 부처님께 예배 공경하고 찬탄합니다.

바야흐로 감로의 법문은 시작이 됩니다. 32상 거룩하신 상호의 부처님께서는 백천억의 화신을 내시고 자재와 신통…… 미묘, 최승의 음성으로 법을 설하십니다. ≪화엄경≫과 ≪법화경≫ 등의 말씀을 허구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방편과 비유를 드는 것은 반드시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법을 모독, 능멸하는 대망어를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은 거룩하시고 희유하십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名利_쾌락에 대한 집착을 다 놓아버리면,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자아에 대한 것까지도에 집착하지 말고 다 버릴 때 드러나는 반야 지혜반야공는 화엄의 세계를 열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화엄의 세계로 깨쳐 들어가면오입悟入 붓다 이룬 이들은 탄성을 지르면서
“아-. 이거다! 옳지, 그래…….”합니다.

공空을 깨치고, 곧 마음자리를 보고 보림保任을 잘해서 공성空性을 증득하여 무루 대아라한이 된 후 실로 ≪법화경≫ 말씀처럼 백천만겁을 두고 삼천대천세계 부처님들께 모두 공양드리면서 보살도를 완성해야 삼신을 갖춘 붓다가 될 수 있습니다.

무아 속 절대계 연화장세계에 천억 나유타 갖가지 빛깔로 이루어진 자기의 불신佛身을 얻습니다. 유형이며 지복의 몸입니다. 32상 80종호 이상을 갖춥니다. 붓다의 눈빛은 때 묻지 아니한 선정삼매의 빛입니다. 지계․인욕․정진․반야․자비의 빛입니다.

붓다의 거동 거동 일거수일투족은 태산이 움직이는 듯 하면서도 해탈, 무애, 자비, 지혜덩어리이십니다. 붓다의 음성은 미묘음으로서 어느 때는 단보시바라밀음 때로는 시라계율바라밀음, 인욕․정신․선정․반야․자비․해탈음이십니다.

사자후음․운뢰雲雷음을 내실 때도 있습니다. 불신을 이루는 백종오색광명이 몸 여러 군데에서 방광하며 분사될 때의 그 붓다의 빛은 청정, 적정, 지혜, 환희, 청량, 단엄……합니다.

삼천대천세게의 일부 혹은 전부를 비추실 때 그 빛들 모임은 마치 삼매의 구름, 길상․원만․지혜․자비의 구름이 됩니다. 향香구름, 꽃․보배․의복의 구름도 됩니다.

향 구름에서 향비香雨가 내리고, 꽃 구름에서 꽃비가 내립니다. 그 향과 꽃과 보배……에서 갖가지 미묘한 법法의 소리를 냅니다. 그 부처님 광명으로 인하여 병든 자 병이 낫고, 근심 고통 있는 이는 그 번뇌의 고에서 떠납니다. 10악의 마음도 부처님의 억 가지 빛깔 광명을 만나면 악심이 떠납니다.

부처님의 손가락, 입과 입속 치아, 코, 눈매…… 어느 부분이든 그 아름다움에 취합니다. 8고리 석장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불가능이란 없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천상천하의 지존의 느낌이 듭니다. 깨끗하고 청정한 부처님 광명의 기능은 밀장이어서 모두 소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업장을 씻어주고, 소멸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붓다는 절대계에 여여히 계십니다. 원만보신은 거룩하고 희유하십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점은 보살이 지니지 못하는 삼신과 대적정삼매와 부사의한 억종무량광명에 있습니다. 불교는 위대합니다. 대승경전의 장면들은 사실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불교를 왜소화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력수행으로 우주의 본체, 마음자리를 보는 소위 견성은 경계가 뒤집혀서 모두가 공空입니다. 공을 깨친 후 두타행을 하여 나에 대한 착을 완전히 떼어야 공을 증득합니다. 아라한의 깨달음 보살이 되면 수행자의 네 영체가 완전 분리되어서 1번 영체 안으로 겹치고 그 1번 영혼체가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극락세계 옷을 하사받고 극락 정토보살 인가증을 받습니다.


보살의 깨달음 처음으로 불과를 증하는 무상 정각을 이룰 때는 자기의 불신이 이미 절대계에 존재합니다. 그 불신과 거짓 몸뚱이가 계합이 되면서 부처님으로부터 불의 인가를 선언받고 인가증을 받으며, 삼천대천세계 부처님 대장에 오르게 됩니다. 붓다의 깨달음_無上正覺

≪화엄경≫의 서품격인 세주묘엄품 같은 일들이 현실로 등장하게 됩니다. 광명 만덕‧자재 만현에게는 부처님의 아버님 정반, 어머님 마야가 와서 배알하고 축하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중 발췌
펴낸곳/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

[불교---1]불교의 위대한 점

불교의 목표는 완전한 생사해탈



윤회에서, 삼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른은 아라한 성자부터라고
했습니다.
아라한부터 빙의가 없습니다.
명부에도 못 들어간 영가귀신가 빙의된다면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의 몸은 청정하며 보살은 청정하다못해 발광發光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발광 정도가 아니라 빛덩어리 그 자체가 됩니다.
성자는 자기 나라의 말로 자기만의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공空을 깨쳐서, 혹은 묘유 속으로 헤엄쳐 나가며 부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 노래는 착이 없고, 상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오도송을 읊고, 법거량하는 것은 공부의 완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옛 스님의 것을 표절하여 흉내나 낸다면 더더욱 안될
일입니다.

먼저 불성을 보왔다면, 나의 본질도 보아야 합니다. 인간 영혼체의
비밀도 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영혼체를 영체라고도 부릅니다.
중생의 영혼체는 다층구조이며 4개의 영혼체가 겹쳐져 있습니다.
아라한 도道 이상을 이뤄야만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삼매에 자재해야 해탈이 가능합니다.

3번 영체로 몸을 빠져 나간다면, 그것은 삼매가 아니고 하늘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장작더미를 쌓아 놓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소신한다 해도 3번 영체로 빠져 나가는 삼매진정한 삼매가
아니라면 그를 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2번 영체로 몸을 자유로이 나고 든대도 그것 역시 진정한 삼매가 아닙니다.
1번 영제로 나갈 수만 있다면 극락정토까지 갈 수 있어서 여기부터가 진정한
삼매의 시작입니다.

삼매에 들려면 심신이 맑고 청정해야 합니다. 우주가 이 몸 안에 있고,
내가 우주 안에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무너진 이 경계는 아라한부터
가능합니다. 보살의 마음은 안과 밖이 수정같이 맑아 깨끗함과 더러움의
분별을 뛰어 넘습니다. 그저 깨끗하고 깨끗할 뿐입니다.

여기서부터 상대가 빙의됐는지 여부도 압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삼메에
들었는지도 압니다. 견성하고 도통했다지만 절반 이상은 빙의된 경우이고,
공부 많이 한 수행자가 명부에 못 들어가 수행자에게 빙의된 사례도
많습니다.

그가 빙의된 데다, 그리고 선서를 많이 보아서 오도송도 나오고, 법거량도
휼륭하게(?) 하기때문에 격외를 노래한다고 해서, 아라한 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아 속 삼매가 진정한 삼매이고, 완벽한 생사해탈, 즉 대열반은 무아 속 삼매에
자재해야 하며 무엇보다 자기의 불신을 얻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불신을 얻는다는 것은 대우주와의 완전 계합입니다. 업장과 번뇌, 그 습기의
찌꺼기까지 다 녹아야 불신이 생깁니다. 이 일은 부처님 경계이기에 윤회 안
중생과는 너무 거리가 먼 법문이라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단언하건대 무아 속 절대계에 자기의 불신을 두지 못하면, 즉
청정법신과 원만보신을 구족하지 못하면 붓다가 아니라는 것만 재삼
말씀해 둡니다.

불법, 정법을 만나 삼악도에 안 떨어지는 것만도 대단하게 여기지만
가능하면 여기에서도 큰스님을 만나 수행해서 윤회를 벗어나 성자,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성중의 반열에 들면 영원히 인간세계에 안 나오려면 안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다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아서 불법을 만나고 더구나 정법의 감로
법문을 듣고서도 우리 이대로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라한 성과를 이루면 보살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공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이타행만은 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선근공덕의 보따리가 문제입니다.
그 보따리가 커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진화합니다.
아라한 되고, 보살 될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근보따리입니다.
출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붓다_ 성중성 聖中聖


불교는 완벽한 생사해탈 곧 대열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붓다가 나올 수 없고 불 보살이
출세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만이 붓다가 나옵니다.
'성자 중의 성자' 라 할 수 있는
붓다가 탄생하십니다.
보살이 출세합니다.
이 점이 바로 불교의 위대한 점이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 위대한 가르침이여!

교학하는 이들은 불교의 무진연기 무아사상 등이 불교의 위대
한 점이라고 합니다. 법계의 위대한 경전 화엄경의 일중다一中多
사상, 보살의 원행願行 사상이나 신비로운 밀교사상, 정토삼부경에
기초한 정토사상 역시 위대한 발견이라고 하여 불교가 제일이라
주장합니다. 시방삼세를 회통하는 불교의 심오한 교의와 철학 사상
은 과연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불교경전의 방대함도 다른 종교의 그것과 비교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아함부만 해도 1만 8천여의 경들로 이뤄져 있
습니다. 그리고 방등, 반야, 화엄 등의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있습
니다. 티베트 쪽으로 흘러 들어간 밀교의 그 수많은 분량의 경전
들까지 합한다면, 분량에서도 가히 위대한 종교라 아니 할 수 없
습니다.

또한 불교는 그 화엄사상에서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양
자역학을 불 수 있어서 '과학의 과학' 이요, 선 반야 구사 유
식철학을 보면 가히 '철학의 철학' 이요, '학문의 학문'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토, 밀교 사상에서 본다면 '종교의 종교' 입니다.

과거 장엄겁 동안에 일찍이 불과를 이루셨던 삼천대천세계의 그
수많은 붓다들이 동서남북 상하에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불신佛身
은 없으나 불격을 갖춘 상수上首 보살님들도 무수히 계십니다. 그
래서 불교는 가장 힘이 있는 위대한 종교인 것입니다.

극락세계 위의 동방 약사부처님 정토정유리세계와 그 외 시방十方
에 산재한 정토세계에 있는, 무수 무량한 8지 이상 10지까지의
정토보살들과 상품등각 보살들의 수효는 더욱 많습니다.

이뿐입니까? 불 보살들을 받드는 성중들은 얼마나 되고요? 일
백사위 화엄성중의 대군단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사람이 죽어
서 가는 명부와 지옥도 지장보살의 수중에 있습니다. 이렇듯 불교
는 위대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자랑스러운 불자라는 긍지를 갖기 바랍니다.
'붓다 중의 붓다' 요, '부처님 중의 부처님' 은 다름 아닌 석가모
니부처님이십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삼계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다음은 다보불입니다. 삼계의 지존이십니다.

붓다마다 좌우보처 보살이 배정됩니다. 그리고 붓다마다 50명
이상의 아라한급 성중이 호신합니다. 황금색 장삼과 빨강 가사 그
리고 불자佛子가 주어집니다.

불교는 위대합니다!


출처 /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

오늘날 수행자들이 구가(謳歌)하는 정신세계는 견성(見性), 즉 깨달음이다. 하지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이러한 수행자의 한계, 즉 견성을 초월하여 아라한, 보살, 붓다를 거론한다. 지극히 장엄(莊嚴)한 세계가 견성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극명하고도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까지 어느 누가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존재의 계층적 도식(Hierarchy Schema)과 붓다의 삼신설(三身說) 그리고 칭명염불에 의한 염불선(念佛禪)의 중요성을 이렇게 큰스님처럼 명료하게 서술하였던가?

우리 불제자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기존 선 불교를 건전한 시각에서 올바른 비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불제자들은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즉, 큰스님께서 선 불교가 100%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선 불교의 세계를 환골탈태시켜 더욱 고원하고도 지고하게 확장시키려는 각골쇄신(刻骨碎身)과 혼연(渾然)의 노력들을 엿 볼 수 있다.

선 불교는 엄연히 한국 불교의 수행적 토양을 다지는데 좋든 나쁘든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 모든 불제자들은 이 점을 명각(明覺)해야 한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볼 때 그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선 불교가 주장하는 견성, 깨달음(Elightenment),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모두 아라한을 한계점으로 갖는다. 큰스님 말씀대로 인간으로서 견성을 하여 보림 후 아라한에 이르는 것만도 엄청난 일이며 참으로 힘든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 불교의 이러한 아라한까지의 깨달음에 의해서 근본불교 당시 석가모니부처님의 삼신설 체계가 가리워지고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알리기 위해 <<21세기 붓다의 메시지>>가 출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령 큰스님께서 단순히 선 불교의 폐단만을 비평하기 위해서 성작(聖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친술 하셨겠는가?

올바른 지견과 식견을 구비하여 큰스님의 서적과 법문을 대면한 불제자라면 큰스님의 심오한 대의(大意)를 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선 불교의 한계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선 불교를 근본불교에 기초하여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큰 스님의 염원에서 쓰여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힌두교의 범아일여 사상과 서양의 유대신비주의 인 그노시즘(Gnosticism 靈智主義)의 최종 목표와도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카발라에서는 아인 소프(Ayin Soph 히브리어로 무한이라는 뜻)로, 타로체계에서는 우아일체(宇我一體)로,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로, 그노시즘에서는 영지(靈智 Gnosis)로서 알려져 있다. 도가(道家)에서도 노자(老子)는 도가 수행 세계의 종지(宗指)를 현묘지도(玄妙之道)로 거론하고 있다. 현묘함이란 바로 불가(佛家)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비슷한 맥락을 한다. 따라서 전 세계의 수행문화가 20세기까지 그 최종 목적을 아라한 정도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시대는 급변하고 전 세계에는 아쿼리안(Aquarius)문명을 맞이하여 뉴에이지 열풍에 명상수행에 요가, 단전호흡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세태 속에는 세계 구도자들의 보다 큰 소식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관통하고 있다.

또한 견성의 수준으로는 생사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으며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거나 정립할 수 없다. 즉, 선 불교만이 한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영성문화와 종교 수행 체계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상에서 가장 심오한 수행체계이자 광대무한(廣大無限)한 철학사상을 함유하고 있다. 한편 지구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불교 박해와 탄압이 외부적이거나 묵시적으로 행해져 왔었다. 그러한 박해와 탄압의 어려운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너무 고차원적인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는 어쩌면 단순히 아라한 경지에 목표를 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교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나름대로 일조를 했다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결국 선 불교는 불교의 맥(脈)을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역할을 잘 이행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자각(自覺)의 눈을 크게 뜨고 오늘날의 위기에 몰린 불교를 복원시키고 중흥을 도모해야 할 때가 왔다. 불제자들 간에 너무 음계(淫戒)가 무시되고 막행막식으로 수행을 하는 경향이 불가에 만연해 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를 차마 그대로 방관할 수 없는 큰스님께서 친히<<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리라.

재차 강조하는바 선 불교는 강직한 행동과 난해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어려운 시절과 고비를 잘 넘겨왔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매우 높이 보이도록 했으며 불교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여러 형태로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잘못된 것은 아니니라, 진리(Truth)는 사실은 사실이라고 말할 때 증득된다.

즉 선 불교가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온 그동안의 공과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선 불교의 화두(話頭)와 공안(Koan)이라는 어휘는 전 지구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통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큰 스님께서는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선 불교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할 시기라고 사자후하신 것임을 명각(明覺)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저 유명한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이런 말이 있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고 말이다. 이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지니는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 설파하신 대로 “산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산에서 내려다본 정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일수록 크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경지가 높은 사람만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수행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종교명상수행세계에 있어서 가장 높고 궁극적 경지라고 하는 붓다위에 이르셨다는 사실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읽어본 이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큰스님께서 증험한 최상승 경지에서 불교의 수행체계와 사상체계의 숭고(崇高)하고 광오(廣澳)한 면을 여실히 밝히셨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존평 p211~216






겁에 하나 출세하는 붓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불교에서는 이러한 붓다가 나온다는 점입니
다. 삼신을 구족한 붓다는 오직 불교에서만 출세합니다.

실제로 어느 대성자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다면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원만보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모든
붓다의 청정법신을 한 몸뚱이로 하는 세존의 진불인 청정법신 비로
자나불 말입니다.

여름 한 낮의 햇살, 눈이 시려 볼 수 없는 그런 빛을 백천만 개
합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밝은, 수미산만한 대지
의 빛 덩어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보고, 하나님이나 창조주 따
위를 넘어서 우주 자체가 되어 버린 무서운 그 부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감득할 수만 있다면 불교의 위대함에 감읍하지 않고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분의 붓다는 그 위대함에 있어서 모두에서 소개한 여러 성자
들도 감히 따라오지 못합니다. 세존께서는 붓다의 출세를 "겁에 하
나, 천만 생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다"고 비유하십니다.

'중생 그리고 인간은 본래 불'이라 합니다만, 부처님께서는 그렇
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누구나 불성이 있기에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무명 번뇌를 다 거두어 내고 업장을 다 녹이면 성
자가 되고 나아가 공부가 날로 향상된다면 보살이 되고 언젠가는
붓다가 됩니다.

그리고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 덕상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경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마치 하나의 미세한 먼지 속
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화엄경>>의 도리 말씀과 비슷한 비유라
하겠습니다.

힌두교의 성정 <<베다>>에서도 인간이 백만 년을 수행해 날로
향상만 한다면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퇴전하지 않고 인신
을 받아 올 때마다 그렇게 백만 년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누구
나 윤회서 초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항상 태어날 때마다 공부해서 향상만 계속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생에 공부를 잘해서 상당 수준의 성과
를 얻은 후 다시 원을 세워 인간 몸을 빋아났다 해도 반드시 공
부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백천 생을 살면서 지은 악연
인연을 따라 방황하기도 하고 혹은 나락에 떨어져 형편없이 망가지
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 이루는 데까지는 3대아승지겁이 걸린다는
교가의 말이 맞습니다. 어쩌다 한 번 실수하여 여자에게 빠지면
공든 탑이 무너집니다. 짐승 몸을 받아 나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
지기도 합니다. 수행인은 이런 무서운 경우를 명심하여 뼈에 새기
고 정진해야 합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여!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알기바랍니다


뭇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불교사상은 우주적인 진리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불교도는 나의 생명과 똑같이 상대의 생명을 귀하게 봅니다. 따라서 불살생계는 우리 불교도의 첫 번째 계명인 것입니다. 불교만큼 평화를 애호하는 종교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사를一瞥하더라도 불교를 국교로 하거나, 불교의 이상을 정치 지도이념으로 해서 통치했던 국가가 이웃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불교 국가도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해서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거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그런 사례는 없습니다.

나는 이 난을 통해서 남의 종교를 험담 비방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무지한데서 죄악을 짓는 것이므로, 영적 무지를 깨우쳐서 모두가 선업을 쌓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0세기 말 경 - 우리 불교도라면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터키계의이슬람교 가즈니 왕조에 의해 17회에 걸쳐 북인도가 쑥대밭이 됐습니다.

불교와 힌두교의 사원이나 성지에 대한 파괴와 약탈, 승려의 학살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물만큼 철저하였습니다. 그 뒤 12세기 말 역시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비쿠라마시타 대불교사원의 파괴와 더불어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당唐의 무종武宗에 의한 ‘회창會昌의 폐불廢佛’이 가장 철저했고 대규모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동기는 도교의 불교 배격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만고의 사표라 숭앙받았던 공자의 가르침도 진秦의 시황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탄압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유서를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시킨 사건입니다. 공자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입니다. 인륜 도덕을 강조한 큰 공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미워하거나 험담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아니라 해서 무조건 비방하거나 폄훼해선 안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하물며 대성자, 부처님을 능멸하는 일, 깊은 수행적어도 삼매에 들 정도 없이, 학문적으로 충분한 이성적 검토 없이 불교라는 우주적인 메타종교를 이단시, 사탄시하면 중한 죄가 됩니다.
전각을 불태우고, 불상의 목을 자르고, 승려를 학살하는 일은 중대한 범죄인 것입니다.
화신化身佛이 들어있는 불상의 목을 치는 폭거는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극무간지옥행에 처해집니다. 불상은 우상이 아닙니다. 신행의 방편으로 조성한 것이지만 부처님의 화신이 듭니다.
필자는 깊은 삼매를 통해서 무엇이 진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죽으면 어딜 가는 지를 보고 중생들이 나고 죽는 세계를 봅니다. 지옥도 천상도 윤회를 벗어나 있는 정토 극락세계를 실제로 봅니다. 그리고 절대계에 법신불과 보신불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내면의 탐심과 진심, 어리석은 마음을 모두 한 티끌도 없이 정화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생사에 대한 문제를 끝까지 파헤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 공부를 많이 해서 재물과 여자에 대한 착이 없어져버리고 이 몸뚱이에 대한 애착이 완전히 끊어져버려 깊은 삼매에 들 수 있다면 중생이 윤회생사하는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음은 물론 윤회에서 해탈하여 정토에 날 수 있는 그런 지혜와 힘이 생깁니다.

≪불본행집경≫이나 ≪육도집경≫이라는 자카타Jataka 경전들을 보면 우리 부처님께서는 무량겁 이전에 불과를 이루실 때까지 백 생, 천 생을 자비의 보살로서 아름다운 이타행을 해 오신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날 적마다 항상 청정한 계율을 지키시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시면서 두타행으로 불도를 수행하셨습니다. 다만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중생을 불도로 이끄시고자, 그들을 대신하여 악도의 괴로움을 감수한 적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마치 예수Jesus가 인류의 원죄를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대신 속죄한 것처럼예수 역시 위대한 인류의 스승입니다 중생의 고통을 한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대수고代受苦하셨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지은 큰 공덕을 중생들에게 회향한 적도 무수히 많았답니다.

보살로 날 적마다 끝없는 자비의 행을 하셨으며 또한 오랜 겁의 세월동안 서원의 힘으로써 이윽고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고 아승기겁 전에 불과를 이루시어 법신‧보신‧화신 세 몸을 둘 수 있는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렇듯 위대한 어른이심을 확언합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성자가 부처님처럼 법‧보‧화 삼신을 갖추었답니까? 이런 성자를 폄하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종교가 다르다 해서 무조건 남의 종교를 사탄시하는 것은 지혜 있는 자들의 자세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상적광세계에 두신 당신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말할 것도 없고, 절대계에 두신 보신불불신의 광휘만 해도 중생은 상상 못할 그런 정도입니다. 여름날 햇빛 아래 노출된 크리스털 다이아몬드무량광‧억종광으로 이루어진 다이아몬드를 생각해 보십시오.

100%, 1000% 빛덩어리백종오색광인, 빛 자체이신 부처님의 불신을 최근의 한 실예를 통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무자년 O년 O일, 나는 광명 만덕 큰스님과 혜명정토27품 인가받은 스님과 함께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착하디착한 어느 불쌍한 신도를 돕고 싶어서 서울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비가 내리는 저녁 7시쯤 춘천 현지사로 돌아오는 도중입니다. 갑자기 차 안이 섬광보다 더 강렬한 빛으로 충만해집니다.

우리 교주 불 세존께서 차에 동승하신 것입니다. 광명 만덕 큰스님과 나의 영체는 각기 번개같이 몸에서 빠져나와 부처님께 오체투지 3배를 드렸습니다.

차 밖은 우리를 호신하는 일백 수십 명의 성중들 외에 부처님을 호신하는 수만의 무루 대아라한급 특별 성중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천지가 밝아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입니다.

10억Watt×10억 빛으로도 이 허공을 이렇듯 밝게 비출 순 없을 것입니다. 한량없고 수없는 빛깔의 광명이요, 마니구슬보다 더 빛나는 부처님 광명입니다. 동시에 안팎이 드러나고 청정무구한 빛입니다. 아름답고 영롱합니다. 굴러가는 승합차의 바퀴에 튕겨나가는 물방울들이 모두 억종광명이 되어 황홀할 지경입니다.

1시간 내내 부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보살펴 주고 온 선남자의 전생을 이야기해 주시고, 만덕 큰스님의 제석천왕에 대한 질문에 답해 주시고, 앞으로 우리들의 공부에 대한 그리고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의 음성은 부드럽고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그윽하고 청아한 미묘음이십니다. 천인이나 정토보살의 음색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경에는 “어일언음중於一言音中 구일체묘음具一體妙音 일일묘음중一一妙音中 구족최승음具足最勝音”이라 하였는데 잘도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묘음 가운데 가장 수승한 음성을 지니셨습니다. 현지사 거의 다 와서야 부처님께서는 떠나셨습니다.

나는 이 책 중간 중간에 밀장을 빼고는 조금씩 부처님에 관한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6일 만에 무無에서 이 천지만물, 우주 모두를 창조한 인격적 하느님은 없다고 나는 분명히 했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까지도 모든 것의 이전, 천지 이전은 분명히 영원불멸하는 우주 대생명입니다. 우주에 편만하고 스스로 있는 자존자 I AM입니다. 도道입니다. 공空입니다. 범梵입니다. 마음입니다-.

이것은 절대요 완전이요 최초의 원인으로서 사랑이며 지혜이고 힘이며 조화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인격적 이법입니다. 우주의 진리입니다.
여기에, 백천만겁을 두고 청정을 닦고 지혜를 계발하며 보살도를 완성하여 다겁생 동안의 업장, 악·습기를 지멸하고, 탐진, 108번뇌를 다 녹인 청정무구한 붓다의 지위에 오른 수행자의 분별을 떠난 여여의 지智, 평등성적 대원경지의 지智가 바로 우주의 본체, 진리와 계합되어 하나가 됩니다. 진리의 몸을 이룹니다. 이 진리의 몸을 법신불이라 합니다. 무형이지만 우주의 몸으로서 초월적 인격체라 볼 수 있어 여기서부터는 몸身을 붙입니다.

무형이라지만 빛, 존재의 근원인 빛, 그 빛의 빛인 백종오색광명덩어리입니다. 작열하는 햇빛 아래의 크리스털 억종광 다이아몬드 법신불입니다. 우주의 본체에 불과를 이룬 대성자의 지智라는 무루식이 깃든 이불理佛입니다.

다시 이 법신불에 보신불불신이 들면 우주의 진리, 우주의 이법을 부립니다. 힘과 이법을 부립니다. 진실로 우주의 주主가 됩니다. 우주적인 힘, 능력을 씁니다. 만물을 태초에 창조한 인격적 하느님은 없지만, I AM을 자체화自體化한 진정한 하느님이 곧 부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삼천대천세계이 세계의 에테르 본체를 집어 던질 수도 있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 자체가 됩니다. 하느님은 없으나 불과를 이룬 부처님은 절대계에 계십니다. 현지궁 현지사에서는 부처님 이후로 불의 삼신을 갖춘 두 분 큰스님이 출세한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10장 중에서





불교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중생들은 각기 종자가 있다는 불가의 유식법상唯識法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귀 꽉 막

힌 지옥종자도 분명히 있습니다. 육도에 윤회할 종자가 있는 반면

윤회를 벗어날 종자, 특히 희유하지만 보살 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옥 종자라 해서 마냥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교화하면

됩니다. 마치 아무리 나쁜 나무라도 접接을 붙이면 좋은 나무를 얻
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된다, 남 못할 일 안하면서 바르게 살면 된

다' 고 합니다. 좋습니다. 인생을 대과大過없이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습니다만, 그렇게 산다 해도 윤회의 생사고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

탈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궁극에는 붓다가 되길 원하십니다. 여기
가 완전 해탈이요, 절대 자유요, 대열반이기 때문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불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



진여일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참됨의 본성을 뜻한다. 불

가의 가르침은 본성을 철견하는 것에 일차적 목표를 둔다.

이 본성이란 본 면목, 자성, 참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바
로 우주의 체성이다.

자신의 마음이 근원 일성으로 돌아가면 본 고향에 돌아온다. 그

래서 유가에서는 이를 복명이라고 하여 명(목숨)을 태어나

기 이전의 원래 생명의 시기로 되돌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견성이다. 본성을 체화하여 증득하면 그것으로 성품과
계합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까지가 삶도 죽음도 없는 시공을 초월한

경지이다.

오온은 집착을 일으키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의미하며, 이 오온이라는 것에 의해 오감이 일어난다. 오온의 본

질이 텅 비어 있음을 관하기 위해서는 계율, 특히 음계를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한다.
사실, 불가의 가르침이 귀중한 이유는 계 정 혜 삼학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뼈를 깎는 노력과 눈물겨운 노력만

이 영혼을 환골탈테시킬 수 있다.

그리고 빛을 되돌이켜 거꾸로 내면을 비춰 보는 것을 화광반조
라고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것, 또는 잃어버린 마음

을 찾는 것이 바로 복본심성이다.

견성을 하게 되면 심원하고도 고차원적인 세계로 증입해 들어

간다고 큰스님께서는 전하신다. 죽 청정하고 고원하며 지고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큰스님을 제외하고 견성 이후 아라한과

이상에 대해서는 언급한 선지식이 전무하다.

필자 수준에서도 이 논고를 작성하면서 알 수 없는 내용을 말할 수

없어 큰스님의 가르침을 열거하는 미흡한 수준을 면치 못한 점, 큰스

님께 그리고 불제자님들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큰스님의 법 세계를 필설로 언급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큰스님의 법

세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며 부사의하며 어마어마하고 장엄하고 거룩

하다는 점을 말해둔다.
타종교 어디를 봐도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체계적인 위계는 전무하
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불가에 귀의 귀명한 것을 큰 기쁨으로 삼고

열심히 구법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라한, 보살, 붓다라는 명료한 위계는 불제자가 한 걸음 한

걸음 더 지고한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향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자극제가 된다는 점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일체 중

생을 비롯하여 견성과 아라한과를 이룬 수행자라면 자력 수행만을 고

집하거나 고수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큰스님이 하사하신 칭명염불선

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아 타력 수행으로 아라

한과를 넘어서 보살과 그리고 불과로 증입해 나가는데 진력할 것

을 권청하는 바이다.
희유하시고 거룩하신 부처님의 법세계를 남섬부주 대한민국에 펼쳐

주신 두 분 큰스님께 오체투지하고 예배드린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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